2017. 10. 21(토)
춘천 여행기
아무런 목표도 목적도 없이 그냥, 정말 그냥 떠나는 여행이 가능할까? 서두름도 없이 아주 한가하게 거닐고, 앉고, 쉬고, 차 마시고 그런 여행을 나도 할 수 있을까? 글로서가 아닌 오프라인 현실 속에서 온전히 하루를 릴랙스 하는 그런 여행.
그렇게 난 오늘 춘천을 다녀 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구한 서울행 그리고 춘천행 청춘열차 티켓. 절정을 맞은 단풍철을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의 열망으로 도로도, 열차도 모두 만원인데 참으로 행복하게 열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8시20분. 4호차 72번. 비록 끝좌석이라도 주어진 기쁨이 덜하진 않습니다. 용산에 내려 코레일 멤버쉽 가입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VIP 휴게실. 차 한잔이 더 여유롭습니다. 요즘은 카페라테의 부드러운 맛에 이끌려 주로 라떼를 마십니다. 이어서 청춘 열차. 청춘 열차의 승하차는 일반 전철, 지하철과 같은 승강장을 쓰고 있어서 혼란스럽고 혼잡하여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층 청춘열차, 좌석을 찾아 앉으니 마침 앞에 자리들은 무서운 한국 아줌마들입니다. 할머니에 가까운 아줌마들이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듭니다. 조심성은 커녕 거침없고 무례하고 시끄러운 공포의 아줌마들. 아 제발 소리라도 지르지 말았으면. 자리에 앉고 기차가 출발하자 이 아줌마들 경쟁적으로 먹을 것을 꺼냅니다. 불쑥 나온 배를 가리려고도 하지 않고 그런데도 옷은 왜 꽉 끼는 것을 입어 여기저기 살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게 하는지. 그래도 얼굴은 피둥피둥 번지르르합니다. 먹을 것이 많이도 나옵니다. 삶은 계란, 김밥, 과일, 떡, 모싯잎 송편, 빵, 커피, 녹차. 와구와구 먹어댑니다. 흘리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간간히 마시기도 합니다. 막걸리와 맥주, 소주가 아닌 것만도 천만 다행입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립니다. 시골의 고즈넉한 경치는 보기 어렵고 무질서한 건축물과 삐죽삐죽 흉물스럽기 까지 한 아파트들, 그리고 거의 빈틈이 없는 방음벽. 그래서 창밖 경치는 별로 보잘 것이 없습니다. 간간히 나타나는 터널도 기차 여행의 정취를 앗아가는 한 요인입니다.
그래도 어디론가 간다는 것은 즐겁습니다. 자라섬의 울긋불긋한 텐트도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논밭이나 산과들, 강과 계곡을 조금씩은 스쳐 보는 사이 기차는 남 춘천역.
조금 이르지만 효자동 주민센터옆의 오래된 막국수집을 찾아 들어갑니다. 벽화들을 그린 동네의 낡은 집.
그냥 마당 식탁에서 녹두 빈대떡 한 접시와 막국수를 시켜 먹습니다. 엊그제 하늘정원 갔을 때의 그 시끌벅적하고 정신 없던 식당과는 세계가 다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가도 손님은 그저 몇 명이 조용히 왔다 갈 뿐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이 식당을 아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녹두 빈대떡은 밀가루가 거의 안 들어간 듯, 고소하고 맛이 있습니다.
배부른 점심 후 따뜻한 가을의 양광을 받으며 이 가을 한가하고 여유롭고 나른하고 조용히 침잠하는 분위기로는 휴일의 대학 캠퍼스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강원대로 갑니다. 후문으로. 40년도 넘은 아스라한 지난 날, 난 1급정교사 자격을 위한 연수를 이곳 강원대에서 받았고 후문 근처 하숙집에서 한 달 남짓, 어린 아이와 아내와 같이 하숙을 하였었습니다. 아이가 몹시 아파 아내가 혼자 수원에 남아 있기를 너무 겁내 같이 와서 하숙을 하였지요. 그리운 그 시절의 흔적이나마 있을까 하였으나 후문 근처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그때의 한가로웠던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지만 짐작에 아마 이 곳이었을 거라는 곳은 그 모습 비슷하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걸어 올라 다니던 후문 길도 희미하나마 그때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수는 있었구요. 그러나 캠퍼스 안은 그때의 모습을 땅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캠퍼스 안은 가을이 고요히 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대학 답게 노거수들이 분위기를 무겁게 갈아 앉히고 있었고 그래서 은행나무, 느티나무 들의 단풍들이 품위 있게 물들어 있었구요, 소나무 류의 침엽수들도 적절히 단풍에 동참하고 있었지요. 사색은 벤치에서 이루어집니다. 곳곳에 적절히 놓인 벤치들은 쉼과 함께 많은 물음들을 나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스쳐가는 서늘한 가슴과 공연히 괴어오는 눈물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왜 그리 허허롭고 가는 시간이 턱없이 아쉽고. 까닭 모를 불안은 무엇이며 지금의 나는 하상 무엇인지. 돌아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내 삶의 발자취가 터무니 없이 부끄럽고 그렇다고 새로 찍어갈 발자국이 마땅히 클 것 같지도 않고. 아 정말 나는 이리 보잘것없이 스러지고 흩날려 가야만 하는 것인가. 몇 자국 걷다가 쉬고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고. 온몸의 힘을 빼고 생각한다는 것도 잊고 그저 있습니다. 그렇게 캠퍼스 안을 걷다 쉬다 가을이 모여 앉아 있는 자그마한 연못가에 도달합니다. 예쁜, 붉은 단풍과 소나무와 각종 나무들이 그 그림자를 연못 위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하염없이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가만히 노래도 몇 곡 듣습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한 대학 구내 건물에 생각지도 않은 조용한 카페가 있습니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으므로 레몬 에이드 한잔을 주문하여 천천히 마십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런 할 일도 없고 일부러 시간을 죽일 필요도 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 보잘 것 없어 부끄럽던 내 삶이지만 이런 여유로움은 젊음인들 부럽겠습니까? 생각하면 겨운 행복입니다.
세 시간 넘는 한적한 캠퍼스 안에서의 여유. 두꺼운 가을을 마음껏 가슴에 담고 후문을 나섭니다. 젊은애들처럼 아이스크림도 사서 입에 물어 봅니다. 유명하다는 왕짱구 김밥집에서 손가락 김밥을 사서 들고 남춘천역. 승강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고소한 김밥을 먹습니다.
다시 청춘 열차. 기울어 가는 석양이 비끼는 창가를 멍 바라봅니다. 역시 아쉬운 건 방음벽. 경관을 보기 어렵습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어도 피곤하긴 한 모양이라 꾸벅 졸다 보니 용산입니다.
종각에서 1호선 전철. 수원역 거쳐 집. 아 참으로 얼마만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휑하니 비어 스산한 바람이 할퀴어대는 가슴 속을 별 생각없이 들여다 보며 까닭 모를 이 서글픔의 실체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들여다 본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허허로움이 가시어 지진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