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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구 시인 문학 연보
문학 연보에 산문을 엮어
‘48 ‘경기 평택군 포승면 희곡리 156번지 출생.
아버지 윤명선(尹命善), 어머니 홍복희(洪福嬉)
1900년생 아버지는 과묵하시고 성실한 농부셨다. 어머니는 1912년생으로 열다섯 살에 스물일곱 살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어머니는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고, 흉내를 잘 내셨다. 엄한 부친에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오두막집이 작은 줄도 모르고, 4녀 3남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기초등학교 입학 졸업
입학식에 가던 날, 학교에 데리고 가기 전 가슴에 콧수건을 달아준 아홉 살 위 셋째 누님은 참깨를 널어놓은 둥근 짚 멍석 위에 내 이름자를 써서 일러주었다. 한글 먼저 쓰고, 한문을 이어 썼는데, 내가 단번에 외워 써내리자, 우물가의 어머니께 “우리 정구가 공부 잘 하려나 보아요”하고 큰 소리로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지나는 길에 들리던 풍금소리가 천상의 소리처럼 느껴졌다.
1학년이 끝나자 우등상과 정근상을 받았는데, 상장 뒤에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글방에 다니며 천자문을 배우고 강의록으로 공부하던 장형이 ’어떻게든 동생을 공부시키겠다‘고 각오를 연필로 써놓았다.
4학년이 되어 시작한 특별활동에 문예반을 들었다. 평가 고사 이외에 가끔 글짓기 대회도 열렸는데, 그때마다 입선에 들어 상장을 받았고, 5학년 때에 교내 백일장에서 「가을비」로 장원을 차지 하였다.
3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하기는 하였으나, 특별한 리더쉽이 있지는 않은, 그저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는 것이 정직한 평가일 것이다. 아무튼 졸업생이 5반 315명이나 되는 졸업식에서 6년 정근상과 우등상, 그리고 교육위원회의장상과 상품으로 아버지 목침만큼 두꺼운 한글 사전을 받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여름에는 무명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온몸이 새까만 채 학교를 다녔고, 겨울에는 흰 저고리나 검은 저고리에 검은 바지에 검은 조끼를 입고, 광목에 검은 물감을 들인 보자기에 책과 공책과 필통, 도시락을 싸서 어깨에 메고 학교를 다녔다.
어른들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시유?”하고 인사를 드렸고, “오냐, 핵교 갔다 오는구나?” 하고 물으면, “야!”하고 길게 대답하는 충청도 건너 동네에서 나는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인가 생각을 파 내려가다 보면 많은 부분 마지막은 어린 시절 고향에 이른다.
안중중학교 입학 졸업
평택군 서부 4개면의 학생들이 몰리는 안중중학교에 수석 입학하여 학자금을 면제 받았다.
1학년 때 등사판으로 인쇄한 교내 신문에 동시를 후면에 큰 글씨로 전재하고, 가정 형편상 수학여행에 빠진 심정을 국어 시간에 써내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올라가 읽고, 담임 선생님이 칭찬하는 바람에 문학에 소질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2학년 때 여주 영릉에서 개최된 전국 백일장에 국어 선생님과 함께 출전하여 영릉과 신륵사 등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으나, 백일장에는 낙선하는 굴욕을 당하고 돌아왔다. 실제로 시라면 소월시와 교과서의 동시를 전부로 알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때 시가 아니라 산문으로 경쟁을 했더라면 입선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늦게까지 가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 들러 선생님의 동서가 사준 탕수육을 먹어보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다 있구나 싶었으나, 집에 돌아와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문예반 시간에 두 시간에 걸쳐 백일장 참가기를 발표했던 것도 씁쓸한 기억 중의 하나다.
오산(烏山)고등학교 입학 졸업.
고등학교에서도 문예반 활동은 계속되었고, 해마다 탐방기 등 원고를 준비하여 교내 문집을 만들던 일, 교내 백일장에서 입선한 작품을 전시 중에 관람 왔던 화성군 내 어느 교장 선생님이 지목하여 드렸던 일과 문예반 선배 누군가의 주선으로 성환으로 한하운 시인을 찾아가 뵈온 기억이 있다.
친구들이 국문과나 영문과를 지원할 때, 장형의 조언대로 이공계를 지망하였다. 문학은 꼭 전공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린 학생의 철없는 생각이었다.
고려대학교 농화학과 입학 졸업.
학교 생활 내내 가정교사를 전전하느라, 전공과목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중에도 현대문학이나 월간문학 등을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다.
군생활
R.O.T.C 9기로 임관하여 광주 포병학교에서 16주 훈련 후, 3‧8선을 넘어 민통선 북방의 최전방 포병부대에서 2년 군복무를 마쳤다.
사회생활
제대 한 달 후 YJP에 입사하여 영업사원으로 근무 중에도 ’나는 너희와는 다르다, 나는 가방 들 사람이 아니라고, 마흔 살이 되면 나는 다 때려치우고 글을 쓸 거라‘는 막연하고 허황된 생각을 하면서,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직속상관에게 허가를 받아 전공을 보충하는 경영대학원에 등록하여 2년 동안 야간대학원을 다니기도 하였으나, 바쁜 업무에 밀려 MBA는 획득하지 못하였다.
잠깐의 방황 이후, 새로 옮긴 GCC에서는 먼저 회사에서의 실패 경험이 도움이 되어, 나는 비교적 철이 든 태도로 책임감 있게 일하였다. 영업에서 영업 전략을 짜고 수행해가는 마케팅으로 자리를 옮긴 것과 때때로 주어지는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출장 기회도 나의 공부 적성에 맞았다.
33년 동안 이사를 열 번이나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출근을 시키고 혼자서 이사할 정도로 아내(김기숙)의 내조는 적극적이었다. 살림은 물론 두 아들 교육도 모두 아내에게 맡겨졌다. 다행히 두 아들(문영, 서영)은 큰 말썽 없이 자라서 가정을 이루고, 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 또한 아내의 소원대로 65세까지 근무할 수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생활인
’84년 2월 우연히 광화문을 지나다가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한국일보 문화교실 학생 모집 공고가 붙어 있었다.
등록 후 3월 첫 수업에서 정진규 선생님을 뵈었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도 정진규, 박제천 선생님을 모르는 명실공한 문외한이었다. 내가 주로 읽었던 것도 김승옥, 이문구, 이청준, 조세희, 박태순, 윤흥길 등의 단편이었다.
정진규 선생님이 강의를 종료하자, <중앙일보>로 옮겨 이승훈 선생님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92년 가을, 대구의 청구건설이 후원하는 <청구문화제>(심사위원; 황동규)에 시를 응모, 입선하였다. 시상식장에서 함께 입선한 곽정례 시인에게서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을 추천받았다. 무엇보다 1시간에 1편씩 쓸 수 있다는 바람에 귀가 번쩍 띄었다.
‘92년 말에 이화동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을 찾아뵙고, 곧바로 수강을 시작하였다.
‘94 『현대시학』으로 등단(심사위원 정진규, 박제천, 김인환)하였다. ’97 <대산문화재단> 창작 지원금 수혜(심사위원; 이근배, 김명인, 이용직)로 첫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을,
‘99 문예진흥기금 수혜로 두 번째 시집 『햇빛의 길을 보았니』를 펴냈다..
그동안 펴낸 시집 등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제1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 (문학과창작,1998)
제2시집 『햇빛의 길을 보았니』 (시와시학, 2000)
제3시집 『쥐똥나무가 좋아졌다』 (천년의시작, 2009)
제4시집 『사과 속의 달빛 여우』 (시와표현, 2015)
제5시집 『한 뼘이라는 적멸』 (시인동네, 2020)
제6시집 『씀바귀와 쑥부쟁이』 (서정시학, 2025)
시선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 (문예바다, 2022)
산문집 『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국학자료원, 2000)
첫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의 작품 배열은 방산 선생님이 정하고, 문학아카데미에서 발행하였다. 중학교 때 국어교사이자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보당 박용식 선생님이 발문을 맡아 써주셨다.
격려와 혜택;
<수주문학상> (1999), <문학과창작 작품상> (2003). <공간시낭독회 문학상> (2020), <한국 가톨릭문인협회 작품상> (2025) 수상하였고,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 (1997), <문예진흥기금> (1999), <경기문화재단 창작 지원> (2022) 수혜, <세종도서 문학나눔> (2016) 선정 되었다.
낙수 혹은 노변잡기
내게는 어느 면, 산문이 시보다는 쉽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현대시학』 겉표지로 최욱경의 그림을 쓰고, 화가의 예술과 생애에 대한 40매가 넘는 산문을 써냈을 때와 일자서(一字書)로 유명한 일본의 전위 서예가 이노우에 유이치(井上有一)에 대한 미당 선생님의 시에 대해 썼을 때에 다른 시인에게 칭찬을 해주셨다.
『문학과창작』의 방산 선생님은 첫시집 전재하는 특집을 진행할 때 내게 탐방기를 쓰도록 하여, 산문 쓰는 실습을 할 기회를 주셨다. 특히 김상옥, 구상, 김춘수, 김종길, 김규동, 조병화, 박성룡, 성찬경, 민영, 김영태, 이유경, 정진규, 이근배, 조태일, 허영자, 김지하 등 원로 선생님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문학관과 시, 그리고 의미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많은 공부가 되었다. 그것은 보당 선생님의 압력으로 2000년 1월 『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란 제목으로 국학자료원에서 출간하였다
김상옥 <고전의 향기>, 구상 <존재의 비의를 캐는 묵상의 시>, 김춘수 <무의미 시의 깊은 뜻>, 김종길 <동양적 절제와 서양적 묘법의 균형>, 김규동 <푸른 만장의 큰 소나무>, 조병화 <구름에 새긴 시, 무상을 뛰어넘는 시인의 꿈>, 성찬경 <청금루를 지키는 정신의 힘>, 김영태 <향기로운 풍경인>, 정진규 <시의 위의, 사람의 위의>, 조태일 <뿌리 굵은 남도 뚝심>, 이근배 <여섯 번 신춘문예 당선 신화>, 박제천 <시공을 초월한 직관과 상상력>, 김지하 <후천 개벽을 꿈꾸는 시인> 등 제목을 붙이는 것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스무 분의 탐방기를 실었는데, 2026년 4월 현재 열여섯 분, 80%가 돌아가셨다. 인생은 무상하게 흘러가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시와 함께, 사람과 함께
등단하자 몇 사람이 동인 활동을 제안하고, 방산 선생님께 의논드리자 곧바로 팀을 만들어 주셨다. 노명순, 이나명, 한이나, 서주석, 최영규, 김성오, 상희구, 고영섭, 진영대, 오석륜, 박수빈 시인 등과 서로 격려하며 30년 동안 10권의 <시천지> 동인지를 발행하는 등 함께 청운의 꿈을 지켜가고 있다.
고창수, 고영섭, 정복선, 주경림, 김현지, 이혜선, 이영신, 이창호, 석연경, 이용하, 임경하 시인 등이 함께하고 있는 <현대향가시> 동인 활동도 어느덧 10주년이 되었고, 해마다 발간하는 동인지로 초심을 지켜가는 향가시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첫시집을 보신 임보 선생님의 초대로 ’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 동안 <우이시>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우이동 시인들 중에도 박희진, 이생진, 이무원, 황도제 등 정다운 분들이 세상을 뜨셨다.
방산 선생님을 따라 <한국시인협회>에 가입한 지도 30여 년이 되었다.
어떤 분들은 산문이 시 쓰기에 방해가 된다고 잡문이라 하대하며, 쓰는 것을 경계한다.
나도 웬만하면 산문에 시간 빼앗기는 것을 조심하고 있으나, 약한 마음에 지는 경우가 많다. 시에 대한 발문은 물론 일반 수필도 몇 가지 썼다.
가톨릭 의정부 교구의 <주보>에 2005년 31주 동안 매주 7~9장 정도의 수필을 연재하였다. 교리에 약한 나는 신앙보다는 우리 삶을 돌아보는 산문들을 주로 썼다. 예컨대, <아버지가 남긴 교훈> <신이 허락한 시간>, <가난한 형제의 꿈>, <나의 천사 필립보네리 수녀님>, <세배의 그리움>, <줄 세우는 사회>, <준비되지 않은 아빠> 등 내가 살아온 진솔한 이야기가 많았다.
다음으로는 심평원에서 발행하는 <심평>에 나라, 베이징, 더블린, 프라하, 뉴욕, 밀포드사운드, 아테네, 프라하 등의 여행기를 연재하였다.
회사 40주년을 맞아 「장년의 기도」란 시를 써서 양면에 끼워 싣느라 납품된 사보를 재인쇄하였던 것과 CEO의 지시로 나 모르게 문학아카데미 등 출판사에 연락하여 남은 시집을 다 사버려서 절판시켰던 것도 즐거운 기억의 하나로 남았다.
안중 쌈지공원에 세운 중학교를 설립한 은사들의 기념비 제막식에 가서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를 낭송하였던 것, 보당 선생님의 정년 퇴임 기념문집에 「맹호 출림 속 뻐꾸기」란 제목으로 박용식 선생님과 음악 선생님의 결혼 이야기를 써서 옛날을 상기하고 웃었던 일, <우이시>에서 시를 낭송할 차례에 시 대신 악보를 나눠주고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불러 제켰던 일이나, 목소리 좋은 황도제 시인이 내 시를 낭송하던 일도 그리운 추억이 되었고, 해평 윤씨 23세인 내가 선조 기반공의 묘비명을 지어 새기고 시제 때 나가서 낭독하던 일과 내게 한문 서예를 가르치는 단산 김재일 선생님이 일중재단으로부터 <우수작가상>상을 받게 되어 전시회를 가졌을 때 도록에 용감하게 서문을 썼던 것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1919년 『문학과 창작』 여름호에 연재를 시작한 <부채시로 안부를 묻다>는 2026년 『문학의 창』 봄호까지 7년 동안 98분의 시를 합죽선에 옮겨 적고, 짧은 코멘트로 시세계를 조명하였다.
돌아보면 연보라고 부를 만한 활동도 없이, 겨우 연명하듯 시인으로서 구석 자리를 지켜왔다. 시인을 소객(騷客)이라 부르던 시대가 길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조용하게 지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을 만들기로 하면 이슈가 많고, 시도 적극적인 변화를 추구했어야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것이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흘러간 세월을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때때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것에 감사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