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픈 추억
1970년 8월 여름방학 때의 일![](http://sakai.ivyro.net/icon/flower/66.gif)
나는 친구 두 키와 호부 돈 100원씩 개아쭘치에 넣고 서창에서 주남 뒤의 소팔산(솥발산)을 넘어
통도사 귀경을 간다꼬 아적 8시에 우리집 공기들인테 안대덩키두루 살째기 삽짝을 나섰심니더.
그 당시에 유행하던 비니루로 맹근 허여무리한 빈 가방을 어깨에 멘 것이 전부였으며, 부모님 허
락도 없이 나선 길이라 별도로 군임석이나 물을 준비할 수도 엄스심니더.
소팔산 밑에 도착하니 질은 엄어져뿌고 쇄피기 거튼 잡초들이 키를 넘어 망개까시에 껄키가꼬 맨
살키에 피가 나고 풀시기에 시이고 까풀막질에 자빠러지고 꾸부러지고 카머시도 퍼뜩 갈라꼬 상
그러븐 데를 다부지기 걸어 겅그이 산 너머의 마실에 도착해보이, 에부 개작은 데 널찍한 아스파르
트 신작로가 나 있길래 우리는 그 질이 머슨 질인지도 모리고 노래를 불러사머시러 물 만난 괘기
매꾸로 온갖 폼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심더.
더버서 땀이 나 때꾸정물을 줄줄 흘리면서 깨곰 맻 개 따문기 전부니 배는 등까죽이 붙어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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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을 재며 상구 걷고 있는데 우리 뒤에서 각중에 싸이렌 소리가 웨애앵 나는가 싶더니 앞에 경찰백
차를 타악 대는 기 아이게슴니꺼?
우리는 놀라 퍼뜩 내빼뿔라 카는데 고단새 시커믄 나이방을 낀 미구거튼 경찰관 두 키가 차에서 내
리더니 손들고 꼼짝 마라 카면서 우리에게 권총을 탁 탱구며 다마러오대예.
깜짝 놀란 우리는 두 손을 퍼쩍 들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으니 다짜고짜 귀통 보라지를 왕복으
로 올리고 시커먼 말장화로 궁디이를 사정없이 둘구차더라꼬요.
가당차이 아푸대예.
각중에 당한 일인지라 어리버리하게 서 있는 데 귀를 잡고 질 가로 끄잡고 와서는 물패기 꿀고안저
라 카는 바람에 우리는 벌거진 볼태기를 만치사며 꾸리앉았심니더.
그라고는 어느 하이꾜에 댕기는 누군지 대라 카머 또 주먹지로 머리를 시기 쥐 박더라고요. 한 참을
뚜디리 맞으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것 같이 생각키길래 와 패느냐카머 달라들다가 두 대씩 더 맞고
그제사 와 때리는 지 그 이유를 갈챠주는 데 우리는 기가 차슴니더. 더럽게 숭실받게 생긴 경찰관이
여기는 고속도로라서 차만 댕기지 사람 댕기는 곳이 아이라카머 너그들을 경찰서로 끄잡고 가야 되
겠다카머 또 말장화로 막 둘구 차사서 할 수 없이 함만 바달라꼬 비이까네 처음이라 특별히 바준다
카머 휑하니 가버리대요.
보굴이 억수로 나고 참말로 소치더라꼬예.
쑥떡배 주는 궁디이에 구두약이 시커머이 묻어 둘구차인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심더.
울나라에서 처음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은 고속도로
고속도론지 뭔지 우리가 우찌 알 수 있었으며, 갓길을 사람도 댕기라꼬 맹그러 논 줄 아는 우리에게
그렇게 묵사바리가 대두루 뚜디리 패다이 백차 뒤꽁무니를 보고 두 손으로 욕을 하고는 넘사시러버
서 퍼뜩 고속도로를 벗어나 문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로 내려서서 통도사를 향해 다시 터벅터벅 하염
없이 걸었심더.
세 키 다 뚜디리 맞은 뽈때기가 벌거케 부았습디더.
오후 3시쯤 통도사에 도착한 우리는 정문을 털레털레 걸어 들어가니 뒤에서 우리를 불러 세우더라꼬
예. 이건 또 머언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된다카지 멉니꺼.
나와서 보니 입장료가 30원이라고 붙여 놨더라고예.
“30원”
입석버스비가 5원 빠이 안하고 우리가 가진 돈은 1인당 호부 100원씩 빠이 없는데 30원이라카니……
입장료 내고 절에 들어가 본 적이 머리 털 나고는 함도 없는 우리들인데……
절 귀경 하는데 돈을 내라이, 에라이 ××넘들 같으니라구……
우리는 툴툴거리면서 절 귀경을 포기하고 다시 부산으로 갈라꼬 걸어 나오니 배가 무지무지 고파 할
수 없이 30원을 주고 간빵 한 봉지씩을 점빵에서 사 여풀때기에 있는 그랑 가에 발을 담구고 껍디기인
비닐포장지를 빼서 물을 반 쯤 붓고 거다가 간빵을 부어 부풀려 후루룩 들이 마셨습니더.
밀까리 풀죽 거트찌만 맛있대예.
눈이 터억 떠지는 것 같습디더.
그라고 난중에 묵는 별사탕은 참말로 꿀맛 이었심더.
우리는 다시 일나서 문지 풀풀 나는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고, 한 상구 걸으이까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우리는 나무 밑에서 조지앉아 지다리다가 혹가다 댕기는 부산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말았지예.
마침 양산 장날이라서 그런지 버스는 콩나물시루처럼 초만원이었고 소잡은데를 겅그이 비집고 들어
가 서서 가는데 현재의 교통수단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낍니더.
자갈 깔린 신작로를 덜커덩거리며 가는데 버스 천장이 낮아 수시로 머리가 천장에 쾅 부딪히고 커브
에서는 옆으로 자빠러지니 이건 차라리 아수라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겁니더.
양산 장을 지나서 내송에 도착할라카이 어떤 아지매가 깍재이에게 돈을 스리당했다고 괌을 치기 시작
했는데요, 사연인 즉 1,000원짜리 10만원을 보따리에 사서 버스 실건에 얹어 놨는데 그기 통째로 없어
졌다카는 겁니더.
버스가 내송정류소에 서자 도독넘거치 숭악하게 생긴 세 키가 흩어져 내 빼는데 그 중 호무차 보따리
를 들고 산을 향해 달나는 거를 본 우리는 그 넘을 쫓아가 돌빼이를 사정없이 던지이까네 머리에 피가
나머시러 돈 보따리를 내삐리며 꾸부러지더라꼬예. 그걸 보고 다마러가 낮에 고속도로에서 뚜디리 맞
은 거를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숨도 몬수두루 발로 둘구 차댓심더.
죽는다 캄시러 뚜굴뚜굴 구부는 거를 보이 가당차이 서언하더라꼬예.
깍재이 두 키는 도망을 가뿌찌만 한 키를 붙잡고 또 돈도 찾고해서 의기양양하게 우리는 버스로 돌아
와 깍재이를 팔송지서에 넘가주고 아지매가 욕바따고 주는 돈 1,000원을 받고 차장이 차비도 안 받겠
다카이 우리는 기분이 째질듯 좋았심니더.
1,000원을 번 우리는 그 질로 바로 서면으로 가 삼류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본 다음 맛있는 짜장면을 먹
고 히빠람을 불며 기분 좋게 집으로 왔심니더.
이바구는 여서 끝이 아이고예 마지막이 남았심더.
집에 살째기 들어가이 골이 머리끝까지 나신 아부지께서는 자알 한다 이너무손, 하라커는 공부는
안하고 밖에 나가 얼매나 찔락거리면서 나뿐 짓을 했기에 순사가 뿌짜바 갔냐며 변명할 시간도 주
지 않으시고 몽디이로 사정없이 뚜디리 패는 거 아임니꺼?
백지 집을 나와가꼬 절 귀경도 몬하고 땡꾸도 억수로 듣고 디기 뚜디리 맞고……
아이고 시어마시야, 오늘은 우째 이리 뚜디리 맞는 일만 생기는지?
우리가 지서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신 동네 아지매가 그거를 우리 집에 일러주뿟던 겁니더.
아, 그 날
입에서는 짜장면 냄시가 왕돌하고
내 몸띠는 시퍼러무리한 멍으로 도배를 해 뿟고
내 기억 속에서 개시고무로 빡빡 뭉캐뿌고 싶은
우쭐하면서도 아픈 추억으로 아이꺼지 남아 있습니더.
칭구들도 고속도로는 사람이 댕기는 질이 아이라카는 것을 아시고,
그라고 파출소 앞에는 서 있지도 마소오.
시장시럽게도 뚜디리 맞은 기 머 잘 나따꼬
이런 말을 하노 카시면 지는 고개를 푹 숙이뿔람더.
칭구들
추분데 따시한 불 쬐며 건강 잘 챙기이소오.
(李 元 鍵)
![](http://file1.magichome.paran.com:17500/20071019/08/1517377447_fire6564090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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