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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정리:2000.10.28-10.29
10월28일:15:10중산리 주차장-15:40칼바위-16:40로타리 산장(1박)
10월29일:05:30-40:기상,출발-06:20개선문-06:40천왕샘-07:00천왕봉-08:00장터목 -09:20세석산장-아침식사-10:25세석교-11:00북해도교(갈림길)-11:15휴게소-12:00거림골-12:30내대리-13:00곡점삼거리-13:30중산리
이번 산행은 일출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기상대 날씨를 확인해 보니 물 건너간 것 같다. 하지만 예정대로 천왕봉을 오르기로 한다. 나의 애마는 88고속도로를 달린다. 남원을 지나 이틀 전 지리산 단풍 구경을 다녀오다 2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급커브의 지리산 휴게소 길을 오른다.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경찰과 기자들이 고속도로 구간마다 통제 중이다.
함양을 거쳐 산청으로..덕산을 지나 중산리에 도착했다. 중산리 주차장에 파킹을 하고 꾸린 배낭을 메고 산행 준비를 한다. 홀로 산행은 참으로 간편하다. 간편식과 김밥을 준비했으니 먹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서서히 오른다. 항상 산행은 처음 30여 분이 힘들다. 그래서 나는 첫 출발을 서서히 한다. 자동차로 말하면 워밍 업이다. 특히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으로 오르는 가장 단거리로 경사가 극심해 마음의 준비를 한다.
삼십 여분 만에 칼바위에 도착한다. 많은 산님들이 하산 도중 칼바위에 머무르고 있다.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니 빗발이 날린다. 최근 들어 지리산행 중에 비를 맞는 것이 이미 일상화되어 별로 마음이 쓰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젖은 몸으로 산장에 들어가기는 싫어 서둘러 출발을 한다. 단풍철을 맞이하여 산장에는 산님들이 많을 것 같다. 산장을 예약하지 않아 잠자리가 은근히 신경 쓰였으나 바람막이 있는 곳 아무 데나 자리를 깔고 퍼질러 누울 생각을 하고 마음을 편하게 갖는다.
로터리 산장에 도착하니 4시 40분. 늦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산장 앞에는 먼저 온 산님들이 식사를 하며 삼삼오오 머무르고 있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온다. 오늘의 산행은 여기가 종점이다. 가볍게 우동을 끓여 김밥으로 저녁 식사를 한다. 시간이 흐르자 산장 안에는 이미 산님들로 꽉 차고 만다.
산장지기는 장작불로 난로를 피운다. 따뜻한 온기가 산장 안에 퍼진다. 오늘 밤 잠자리는 많은 산님들로 가득 차 비좁고 옹색하지만, 예약도 하지 못했는데 두 다리를 뻗고 잠잘 수 있다니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식사 후에는 부산에서 온 산님들의 구수한 입담으로 산장 안에는 활기와 웃음 꽃이 핀다. 비좁은 산장 안에 산님들은 삼십여 명쯤 되는 듯하다. 부산 산님 한분이 산장의 식구들을 위해 술 한잔 대접한다며 적지 않은 십여만 원 이상을 내놓아 캔맥주 1상자와 안주로 회식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를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덕분에 산장 안에는 간단히 소주, 맥주와 과자 파티가 열린다. 산장은 원칙적으로 9시가 되면 소등을 한다.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포근한 쉼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침상 끝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누우니 옆으로 움직일 공간조차 없다. 누운 자리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자야만 한다. 거의 눈만 감은 채 뒤척이지도 못하고 어서 날이 빨리 밝기만을 기다린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야 일어났다. 조용히 자는 산님들을 깨지 않게 조용조용 짐을 꾸린다. 밖에 나오니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다. 가을 찬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손전등으로 앞길을 밝히면서 서서히 천왕봉을 향해 오른다. 그래도 비와 추위에 대비하여 오버트라우저와 고어 재킷으로 완전무장을 하였기 때문에 마음은 넉넉하다. 오름길에 뒤돌아본 능선 저 아래는 중산리 민박 촌의 불빛이 꼬박꼬박 졸고 있고 고요하기만 하다. 천왕봉을 향하여 홀로 오르는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6시가 한참이나 넘어서야 조금씩 어둠이 풀린다. 삼십여 분 걸으니 개선문이 나타난다. 개선문. 지리산과 개선문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이십여 분 더 오르니 천왕샘이다. 이젠 천왕봉까진 마지막 급경사만 남아있다. 천왕봉 바로 직전 많은 사람이 마지막 이 급경사의 된비알에 녹초가 된다.
강한 비바람을 맞으며 천왕봉에 오르니 벌써 천왕봉엔 살얼음이 얼었다. 바위가 온통 미끌미끌하다. 조심해야만 한다. 바람이 세차다. 지금 시각은 오전 7시. 장터목에서 일출을 보러온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비바람이 날리는 터라 일출은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지리산 자락은 다행히 한눈에 들어온다. 찬 바람이 계속 불어와 몸을 사시나무 떨듯 산님들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잠시 머무르다 견디지 못하고 제석봉으로 향한다.
지난 사오마이 태풍이 지나간 후 야무지게 할퀴어진 등로는 아직도 정비되지 않았다. 그때의 흔적에 아직도 어수선하다.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없는 제석봉은 완전히 발가 벗겨진 모습으로 애처롭게 찬 바람을 맞고 있다. 장터목산장에 이르니 많은 산님들이 아침을 지어 먹느라 말 그대로 장터를 이룬다. 뱃속은 이미 촐촐하지만, 아침 식사는 세석에서 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바람이 불며 심술궂다.
연하봉에 오르니 11시 방향으로 촛대봉이 보인다. 바로 눈앞에 있지만 여기서 촛대봉까진 1시간이 족히 걸린다. 아침에 세석산장을 떠난듯한 산님들이 줄줄이 천왕봉을 향하여 주능을 오른다. 촛대봉에 섰다. 삼신봉에서 영신봉까진 짙고 무거운 회색 구름이 깔려있다. 구름의 움직임이 거의 없어 산자락과 함께 평온한 바다가 연상된다. 세석에 도착하니 9시 20분. 이미 산님들이 모두 떠나간 세석산장은 더없이 조용하다. 어젯밤 토요일은 시끌시끌했겠지. 올해 들어 운 좋게도 세석산장에 세 번이나 오게 되었다.
아름다운 세석고원. 샘터에 가서 식수를 받아 육개장 국물을 만들어 햇반을 넣어 국밥을 만든다. 애마가 중산리에 있으므로 나는 거림골이 하산 코스이다. 거림골은 뱀사골 다음으로 초보자들이 산행하기에 적당한 길이다. 경치도 비교적 좋고 급경사가 없으며 등산로도 호젓하고 쉬운 편이다. 오름 코스가 3시간 정도이니 쉬엄쉬엄 내려가도 2시간 남짓 지나면 거림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세석에서는 하산 코스도 많다.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는 백무동코스, 음양수 지난 남부 능에서 내려가는 대성골 코스, 삼신봉에서 청학동, 쌍계사로 내려가는 코스. 그리고 오늘의 하산 코스인 거림골 코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아마도 12시가 조금 넘으면 거림골에 도착할 것이다. 세석산장을 출발한다. 목조다리로 이쁘게 놓인 세석교와 북해도 교를 지난다. 주능 근처의 나무는 이미 잎새가 다 떨어져 나가서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포근한 세석산장 밑의 거림골은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 많은 산님들이 계곡에서 단풍에 취해 머물며 쉬고 있다. 경상도 아주머니들이 쉬었다 가라며 단감을 깎아 준다. 맛있다. 이런 행운까지 얻다니. 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처럼 모두가 정겹다.
곱디고운 빛깔의 단풍이여. 깊어 가는 가을의 정경이여. 아름다운 거림골이여. 쉬엄쉬엄 풍광을 즐기며 걷다 보니 예상대로 정오에 거림골 마을에 떨어진다. 평소 중산리에 많은 산님들을 빼앗겼던 거림골의 주차장에도 오늘만큼은 예외로 많은 차량들로 붐빈다. 가족들을 동반한 단풍 여행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오랜만에 제철을 만나듯 싶다. 거림골에서 진주까지의 버스는 하루에 4번 있다. 오후 차편을 보니 3시에 내려가는 버스가 있다. 시간이 맞지 않는다. 바로 얼마 전에 포장한 깔끔한 도로를 단풍 구경하면서 걷는다.
내대리에서 곡점 삼거리까진 2시간 동안 걸어야 할 것 같다. 걷다가 재수 좋으면 내려가는 차를 만나 얻어탈 수 있겠지. 시간도 충분하니 걱정할 것은 없다. 차를 얻어타고 곡점에서 하차한다. 다시 나의 애마가 있는 중산리로 올려 걷는다. 지금도 중산리로 관광차와 승용차는 계속해서 줄기차게 올라간다. 중산리 주차장에 이른다. 참으로 수월한 산행이었다.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여유롭다. 점심은 덕산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먹고 <덕산서원>과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제>를 들러 진주로 빠지면 된다. 오늘처럼 여유로운 산행이 또 어디에 있을까. 덕산마을로 향하며 조금씩 멀어져 가는 지리산 자락을 뒤로 바라보며 나의 마음은 그저 뿌듯하기만 하다.
첫댓글 지리산종주길이 눈에 선하네요.....
대간을 경인에서 시작하여 끝내면서 십여년 가까이 남진,북진을 오르며 내린 지금의 결론은 산이 나의교주님이 되어주심에 감사할따름입니다.
세상 눈 감기 딱 하루전날까지 산행은 계속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