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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Morrow” by John Donne (1572~1631)
여국현 (시인/영문학 박사)
이번 영시해설에서 다룰 시는 17세기 ‘영국 형이상학파 시인들The Metaphysical Poets’을 대표하는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아침인사」“The Good-Morrow”입니다. 던의 시 가운데 가장 단정하고 깔끔하며 어여쁜 시라는 평가를 받는 시입니다. ‘형이상학파’라 명명된 시의 특징도 잘 담겨 있고요.
존 던의 역동적인 개인사와 부인인 앤 모어(Anne More, 1585~1617)와의 사랑이 문학 외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그의 시와 그의 시가 지닌 문학사적 의미입니다. 존 던의 시가 대표하는 17세기 ‘형이상학파 시’는 영미문학사에서 특히, 20세기 초반 ‘모더니즘Modernism’ 시의 등장과 대단히 중요한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부분부터 말씀드리면서 존 던의 시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침인사」를 이해하는 데는 물론 던의 시 전체와 현대 영미의 ‘모더니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대표적인 현대 영미 시인이자 비평가인 토머스 스턴 엘리엇(Thomas Stern Eliot, 1888~1965)에서 시작되겠습니다. 세기말부터 전운이 감돌던 유럽은 결국 1차 세계대전(1914~1918)이라는 파국을 겪게 됩니다. 유럽 전체를 휩쓴 전쟁은 물질적 차원의 파괴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정신문명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엘리엇의 진단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황무지」“The Waste Land”는 정신적, 물질적 불모지로 변해버린 유럽에 대한 은유이며 상징이었지요.
엘리엇은 황무지가 된 유럽에서 다시 정신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원했고, 그를 위해 문학, 특히 시적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본보기가 될 ‘전통tradition’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가 도서관 서고를 뒤지며 문학사를 거꾸로 거슬러 살펴 올라간 까닭입니다. 그가 찾고 싶었던 것은 조화로운 인간 정신이었습니다. 이성과 감정,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고 그 둘을 통합한 정신. 엘리엇은 그것을 ‘통합된 감수성united sensibility’이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문학적 전통을 찾아가기 시작한 엘리엇은 우선 바로 직전인 19세기부터 봅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기는 감정과 열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던 낭만주의Romanticism 시기입니다. 상상력Imagination과 열정Passion의 페가수스 날개는 한계를 모르고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는 이카로스를 태양 가까이 날아가게 해주지만 결국 녹아 그를 바다에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광기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제어되지 않는 과도한 상상력은 현실에 발 닿을 새가 없어 보였지요.
만족할 수 없었던 엘리엇은 그 이전 시기로 찾아가 봅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시기’Neo-Classicism Period입니다. 이 시기는 낭만주의와는 반대로 감정과 상상력은 억압하고 이성과 규칙, 질서만을 강조하는 철저한 ‘이성Reason의 시기’입니다. 이성주의자인 엘리엇이 보기에도 과합니다. 상상력의 날개 없는 이성은 지루하고 숨 막히지요. 상상력은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 이상은 꿈꾸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옳다.”(Whatever is, is right)--18세기의 대표적인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인간론」“An Essay on Man”의 한 구절로 이 시대를 특징짓는 인식론을 보여줍니다.--가 시대의 모토인 곳에서 페가수스의 날개는 꺾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렸습니다. 전통주의자인 엘리엇에게는 낭만주의의 과도한 상상력보다는 냉철한 고전주의의 이성이 마음에 들기는 했습니다만 이 또한 너무 과도했지요.
그는 다시 그 앞, 17세기 청교도 시기Puritan Period로 가 봅니다. 먼지 가득한 도서관 서가에서 엘리엇은 존 던의 시를 발견합니다. 던의 시에서 엘리엇은 자신이 찾던 특성을 발견합니다. 이성과 감성, 상상력/독창성과 전통/규칙이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고 조화된 창조 정신, 엘리엇은 이를 ‘감수성의 통합Unification of Sensibility’이라고 부릅니다. 새가 두 날개로 날 듯 인간 정신도 이성과 감성, 두 영역이 균형 있게 작동하는 것, ‘감수성의 통합’은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감수성이 통합된 영혼에 의해 감정적 영역인 시에 지적 요소가 적절하고 정확하게 결합되어 생겨나 “사상이 장미꽃의 향기처럼 느껴지게” 되는 시, 엘리엇이 원한 것이 바로 그런 시였고 그런 문학이었는데, 존 던의 시가 그랬던 것입니다. 비판하는 이들의 눈에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기이한데다 현학적이기 까지 한”(‘형이상학’이라는 명칭은 이런 점을 비판하는 시각에서 나온 말이지만 결국 단점이 장점으로 바뀌듯 비난의 이름이 칭송의 이름으로 바뀌었군요.) 던의 시가 엘리엇이 보기에는 동떨어진 듯한 경험과 요소들이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며, 지적인 요소들—지리학, 종교학, 천문학, 의학 등 르네상스에 발달한 다양한 학문의 요소들—이 적절하게 사용된 훌륭한 창조적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던(과 던을 따르던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시에 사용된 비유를 특히 ‘형이상학적 기상奇想Metaphysical Conceit’이라 합니다. (지난 달 아널드의 시를 해설할 때 이미 한 번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기상’은 기발하고 뛰어난 생각이라는 말이니, ‘형이상학적 기상’이라는 표현은 던과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보여준 기발한 생각, 아이디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시인치고 기발한 생각, 비유를 적용하지 않은 시인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따로 이름을 붙일 만큼 형이상학파 시인들, 그 가운데 던의 시에 독특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연인의 결합을 두 사람의 피를 빤 벼룩의 배 속에서 두 사람의 피가 섞여 하나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거나(「벼룩」“The Flea”), 떠나야만 하는 남자와 남아 기다리는 여자, 두 연인을 콤파스의 다리에 비유한다(「고별사-슬퍼함을 금함」“The Valediction-Forbidding Mourning”는 등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엘리엇이 보기에 이처럼 존 던(과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시에서 통합되어 있던 ‘감수성’은 이후 분열—엘리엇은 이를 ‘감수성의 분열’dissociation of sensibility이라 했지요— 되기 시작해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8세기는 이성이, 19세기는 감성이 각각 강조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황무지가 되어버린 20세기 현대에 다시 필요한 것은 분열된 감수성을 다시 통합하는 것이고 이는, 감성적 영역인 시에 이성적, 지적 요소를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지요. 엘리엇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요소, 즉 다양한 신화적 요소와 상징, 은유, 비유, 환유 등의 기법들을 특히 애용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좁은 의미의 모더니즘을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도 하는 까닭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이지요. 자, 이제 존 던의 시, 「아침인사」“The Good-Morrow”를 살펴보겠습니다.
I wonder, by my troth, what thou and I
Did, till we loved? Were we not weaned till then,
But sucked on country pleasure, childishly?
Or snorted we in the seven sleepers' den?
'Twas so; But this, all pleasures fancies be.
If ever any beauty I did see,
Which I desired, and got, 'twas but a dream of thee.
그대와 나 무엇을 했는지 도대체 나는 궁금하오,
우리가 사랑하기까지. 그때까지 젖도 떼지 못한 채
유치하게 촌스러운 쾌락만을 빨고 있었단 말이오?
아니면 일곱 잠보들의 동굴에서 코골고 있었던가요?
그랬다오. 우리 사랑 이외의 온갖 쾌락은 그저 헛것일 뿐.
이제껏 내가 만나서 원하고 취했던 미녀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의 환영이었을 뿐이었다오.
이 시는 사랑을 찾아 헤매던 화자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잠들었다 깬 아침에 눈앞에 마주 누운 여인을 보는 순간에 하는 ‘극적독백’dramatic monologue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극적 독백’ 형식에서 화자와 청자, 둘은 모두 존재하지만, 청자는 듣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화자를 통해서만 청자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양식입니다. 나중에 19세기 시에서는 이 ‘극적독백’ 양식이 아주 많이 쓰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1행의 ‘by my troth’는 ‘도대체’ 정도로 번역되는 일상어투인데, 사실 당시에 시에서는 이런 일상어투는 잘 쓰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던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썼습니다. 평범한 일상어를 시에 아무렇지 않게 쓴 것, 던과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유치하게 촌스러운 쾌락을 빨다’라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채 육체적 쾌락만을 탐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은유이지요. 지금 그대와 나, 우리의 사랑은 육체적 쾌락만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결합이고 그 이전의 모든 사랑은 ‘유치하고 촌스러운’ 그저 ‘헛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전에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쿨 하게 인정합니다. 당신 만나기 전에 만나 구애하고 또 취했던 ‘미인’은 당신 찾아다니다 만난 ‘당신의 환영’ 즉 허상이었을 뿐이라는군요. 어쩌겠습니까. 그렇다는데. 말 잘 하지요? 수사학rhetoric에 뛰어난 것 또한 던과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들의 시에는 연애시가 많은데, 사랑의 유혹에 거부하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수사학은 톡톡히 제 기능을 하지요.
4행의 ‘일곱 잠보들의 동굴’the seven sleepers’ den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기,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에게 쫓기던 일곱 명의 기독교 신자가 동굴 속에 숨어 잠이 들었답니다. 잠을 자고 깨어보니 200년 넘는 시간이 흘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사라진 시대가 되어 있더라는 그런 신화 같은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겠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었던 그 일곱 잠보들처럼 자기는 진정한 사랑인 당신도 모른 채 지금까지 코골며 잠자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뭐 그런 뜻을 이 구절을 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군신화를 모르면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알 수 없듯 앞의 저 전설 같은 이야기를 모르면 이 구절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모르면 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게 되기도 하겠지요. 시가 ‘지적知的이다’라는 말에는 이처럼 사실 어렵다,라는 의미도 포함되게 됩니다. 모더니즘 시에 이르러 이런 현상은 더 심화되지요.
And now good morrow to our waking souls,
Which watch not one another out of fear;
For love all love of their sights controls,
And makes one little room an everywhere.
Let sea-discoverers to new worlds have gone,
Let maps to other, worlds on worlds have shown,
Let us possess one world; each hath one, and is one.
이제 깨어나는 우리 두 영혼에게 아침인사를,
서로를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않는 두 영혼에게.
우리의 사랑이 다른 모습에 대한 모든 사랑을 막아주고
이 작은 공간을 온 세상이 되게 하여 주니.
대양의 발견자들은 신세계로 가게 두고,
지도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 세상 저 세상 보여주게 두고,
우리는 하나의 세상만을 소유합니다, 서로 하나씩 지니고 하나 된 세상을.
미성숙한 육체적 쾌락의 세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화자와 연인의 ‘영혼이 깨어납니다’.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두 영혼은 두렵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완전한 사랑이 다른 존재의 모습other sights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막아줄control 테니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있는 이 좁은 공간little room은 온 세상everywhere이 됩니다. 던은 소우주micro universe, 대우주macro universe 비유를 자주 사용합니다. 마지막 연에도 나오니 그때 더 자세히 설명 드리겠지만 이 또한 일종의 지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에 빠졌다고 느끼는 연인들이라면 다락방이건 헛간이건 거기가 세상 전부 아니겠어요.
그 다음 3행은 지리적 비유가 이어집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해양을 통해, 혹은 육로를 통해 많은 탐험들이 이루어졌잖아요. 그 비유를 끌어온 것입니다. 던과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지적인 특징의 또 다른 면모이지요. 바다를 통해 신세계를 찾는 ‘대양의 발견자들’sea-discoverers은 바다로 신세계 찾아가게 두고, 육로로 탐험하는 이들에게는 지도maps가 길 안내 하게 내버려두자.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로 합쳐진”(each hath one, and is one) 세상을 갖자고 합니다. 두 사람이, 두 사람의 세계가 오롯하게 하나 되는 결합, 사랑이 그런 것일 테니까요. 마지막 3연입니다.
My face in thine eye, thine in mine appears,
And true plain hearts do in the faces rest;
Where can we find two better hemispheres
Without sharp North, without declining West?
Whatever dies was not mixed equally;
If our two loves be one, or thou and I
Loves so alike that none do slacken, none can die.
내 얼굴은 그대 눈동자에, 그대 얼굴은 내 눈동자 비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두 얼굴에 깃들어 있소.
어디에서 이보다 더 나은 반구들을 찾을 수 있겠소?
살을 에는 듯한 추운 북반구도, 해지는 서쪽도 없는 반구를.
소멸하는 것은 무엇이건 균일하게 결합되지 못한 것.
우리 두 사랑이 하나이거나 혹은 그대와 내가
똑같이 사랑하여 어느 한쪽도 느슨해 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죽지 않으리.
첫 행, 멋지지 않나요. 영어를 현대어로 풀어쓰자면, “My face appears in your eye, and your face appears in my eye.” 즉, “내 얼굴은 그대 눈동자에, 그대 얼굴은 내 눈동자에 보인다.”인데요, 동사 appears 하나가 두 문장에 다 쓰이니 하나만 저렇게 표현했군요. 이렇게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려면 얼마나 가까이, 얼마나 빤히 들여다보아야 하는지 알지요. ‘임계거리critical distance’를 넘어 최대한 가까이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곁가지로 좀 빠지면 ‘임계거리’란 무엇일까요? 다른 동물이 허락 없이 다가왔을 때 위협을 느끼는 거리, 혹은 포식자에게서 달아나야 하는 동물이 잡아먹히지 않고 포식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로 동물들마다 상대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생존의 위험에 따른 거리보다는 심리적 거리를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허용 가능한 거리는 더 가까워지겠지요. 가장 가까운 연인이나 가족이라면 그 거리는 거의 0에 수렵할 것이겠지만, 일반적인 사이라면 팔을 벌려 닿지 않을 정도까지는 유지하고 싶겠지요.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비치는 저 무한의 근접거리. 사랑이니까요.
다시 시로 돌아가서, 영어표현과 관련하여 1연의 ‘thou’ 그리고 3연의 ‘thy’, ‘thine’은 현대영어 you의 옛 표현입니다. 시에서는 자주 사용되지요. thou(you)-thy(your)- thee(you)-thine(yours) 이런 관계입니다. 3행에서 화자는 자신과 연인을 ‘반구’(半球,hemispheres), 즉 둥근 공을 반으로 똑 잘라 놓은 모양이라 은유합니다. 동그란 천체가 똑같이 딱 반으로 갈라져 있다가 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지금 화자와 청자 같다는 것이지요. 서로 똑같이 사랑하는 두 연인을 합쳐져 하나를 이룬 별로 은유한 이것이 이 시에서 보이는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기상’의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인과 반구, 완벽한 합일과 완벽한 천체, 그 유비가 그럴 듯 한가요? 그렇다면 던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 천체의 비유를 사용했으니 그 다음에 이어 지구의 비유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지요.
지구의 북극은 살을 에듯 춥지만 화자와 청자가 하나 된 이룬 별에는 그런 북극도 없고, 지구에서는 해가 지지만 그들의 별에서는 해도 지지 않는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듯 하지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멸하는 것은 무엇이건 균일하게 결합되지 못한 것”(Whatever dies was not mixed equally). 이 말 또한 지적인 표현이지요.
저 생각은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 닿아있는 생각인데요.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이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지요. 대우주(Great Universe)인 자연과 소우주인 인간은 똑같이 그 4원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우주는 4원소가 ‘균질하게’ 섞여 있어 변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4요소가 불균질하게 섞여 이루어진 존재라 변화하고 소멸한다고 생각했지요. 특히,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에게 이 4요소가 체액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 체액이 불균형을 이룰 때 곧 병이 난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생각이 바로 위이 구절에 반영이 된 것입니다. 던과 형이상학파 시인들은 이처럼 그에 어떤 것이건 구애받지 않고 시의 요소에 다양한 지적인 요소들을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엘리엇이 좋아한 점이 바로 이런 점이었고요.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 둘의 사랑이 하나이거나”(If our two loves be one),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내가 똑같이 사랑해서 (우리 둘 중) 어느 한쪽도 (사랑의 활력이) 느슨해지지 않는다면”(or thou and I / Loves so alike, that none do slacken), 그렇다면 “아무도 죽지 않으리”(none can die.)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상적인 사랑을 찾았으니 영원한 사랑을 원하는 것, 당연해 보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시에는 이렇게 다양한 지적인 비유와 이미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와 비유들은 사실과 유리되지 않습니다. 첫눈에는 좀 엉뚱해 보일지 몰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기발하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엘리엇이 주목한 지성과 감성의 결합, 즉 ‘감수성의 통합’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더니즘 시는 이런 경향에서 출발해 점점 더 어렵고 난해하며 지적인 비유들을 시에 활용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결국 시는 감상의 대상보다는 이해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고,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독자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지요.
사실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시에서 내용상 두드러진 특징은 이 시와 같은 사랑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시의 대부분이 ‘이 순간을 즐기자’(Carpe diem)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이 활동했던 17세기가 청교도 시기라 불리는, 가장 엄격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청교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고 느끼실 독자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영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존 던과 앤 모어의 사랑이야기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 시에 대한 해설을 마치겠습니다.
존 던은 이십대 초반까지 문란하다고 까지 할 수 있는 방황하는 삶을 보냅니다. 이런 젊은 시절의 던을 나중에 목사가 된 후의 점잖은 ‘던 박사Dr. Donne’와 대비되는 ‘난봉꾼 던Jack Donne’이라 칭하지요. 그러다 스물다섯 살에 영국 왕의 옥새관리인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세속적 의미의 출세 길에 첫발을 디딘 것이었지요. 상관의 인정도 총애도 받아 어느 정도의 출세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가 모시는 관리의 나이어린 조카딸과 몰래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앤 모어였지요. 둘은 2~3년 사랑을 나누다 1601년 비밀결혼을 합니다. 앤 모어의 나이 17세, 던의 나이는 29세였습니다. 나중에 사실을 안 상관을 포함한 앤 가족은 던을 상대로 결혼 무효소송을 제기했고 소송은 3년 가까이 진행됩니다. 물론 그 동안 던은 비서직을 잃었지요. 소송에는 이겨 결혼은 유지하게 됩니다만 이후 관직에 나가는 일은 어려워지고 소송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까지 겪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보면 던은 앤 모어와의 결혼과 던 자신의 사회적 성공과 바꾼 것이기도 했습니다.
던은 끝까지 모어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던에게 그녀는 이 시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진정한 사랑, 이상적 여인이었으며 던의 많은 시들이 앤 모어를 염두에 둔 시였습니다. 앤 모어와의 결혼을 통해 이전의 방탕하던 삶을 끝낼 수 있었고, 시 또한 이전과는 달리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결합을 추구하는 시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가 42살 되던 해인 1617년, 아내는 아이를 낳고 7일 후 사망합니다. 앤 모어의 나이 서른셋이었고 둘 사이에는 열둘—사산도 있었고 어린 시절에 잃은 아이도 있었습니다만—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이후 던은 재혼하지 않은 채「성 소넷」“Holy Sonnets”을 쓰면서 성직에만 몰두하다 1631년 3월 31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존 던의「아침인사」“The Good-Morrow”였습니다.
The Good-Morrow
by John Donne
I wonder, by my troth, what thou and I
Did, till we loved? Were we not weaned till then,
But sucked on country pleasure, childishly?
Or snorted we in the seven sleepers' den?
'Twas so; But this, all pleasures fancies be.
If ever any beauty I did see,
Which I desired, and got, 'twas but a dream of thee.
And now good morrow to our waking souls,
Which watch not one another out of fear;
For love all love of their sights controls,
And makes one little room an everywhere.
Let sea-discoverers to new worlds have gone,
Let maps to other, worlds on worlds have shown,
Let us possess one world; each hath one, and is one.
My face in thine eye, thine in mine appears,
And true plain hearts do in the faces rest;
Where can we find two better hemispheres
Without sharp North, without declining West?
Whatever dies was not mixed equally;
If our two loves be one, or thou and I
Loves so alike that none do slacken, none can die.
그대와 나 무엇을 했는지 도대체 나는 궁금하오,
우리가 사랑하기까지. 그때까지 젖도 떼지 못한 채
유치하게 촌스러운 쾌락만을 빨고 있었단 말이오?
아니면 일곱 잠보들의 동굴에서 코골고 있었던가요?
그랬다오. 우리 사랑 이외의 온갖 쾌락은 그저 헛것일 뿐.
이제껏 내가 만나서 원하고 취했던 미녀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의 환영이었을 뿐이었다오.
이제 깨어나는 우리 두 영혼에게 아침인사를,
서로를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않는 두 영혼에게.
우리의 사랑이 다른 모습에 대한 모든 사랑을 막아주고
이 작은 공간을 온 세상이 되게 하여 주니.
대양의 발견자들은 신세계로 가게 두고,
지도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 세상 저 세상 보여주게 두고,
우리는 하나의 세상만을 소유합니다, 서로 하나씩 지니고 하나 된 세상을.
내 얼굴은 그대 눈동자에, 그대 얼굴은 내 눈동자 비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두 얼굴에 깃들어 있소.
어디에서 이보다 더 나은 반구들을 찾을 수 있겠소?
살을 에는 듯한 추운 북반구도, 해지는 서쪽도 없는 반구를.
소멸하는 것은 무엇이건 균일하게 결합되지 못한 것.
우리 두 사랑이 하나이거나 혹은 그대와 내가
똑같이 사랑하여 어느 한쪽도 느슨해 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