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클라이머의 삶] 모상현씨
“이제 남을 위해서도 살고 싶어요”
2007년 5월22일 오후 12시 엄홍길, 변성호, 셰르파 한 명과 함께 로체샤르 정상능선에 올라선
모상현(牟相賢·34·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 마케팅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발이 무척 시렸다.
C4를 구축하기 위해 C3에서 닷새간 텐트 플라이 하나로 비박하며 지내는 사이 발가락에 동상증세가 나타나
물집이 잡혔으나 베이스캠프에서 이틀 쉬면서 가라앉아 괜찮으려니 했으나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선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생각하니
그냥 내려선다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싶었다. 이제 두세 시간이면 석 달간의 등반을 끝내고
그토록 염원해오던 로체샤르 8,400m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려달란 소릴 듣고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산소와 로프는 이미 다 떨어진 상황. 밑에 설치했던 40m 로프 두 동을 거두었다.
평탄하리라 싶었던 설릉은 20~30m 높이의 벽이 3개나 나타나 애를 먹였다. 그런데도 즐거웠다.
설악산 용아장성을 오르는 기분으로 정상에 올라섰다.
모상현과 변성호에게는 석 달간의 등반이었지만 엄홍길 대장은 2001년 이후 네 번 도전 끝에 이루어진 등정이었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단 말이야.’ 모상현은 시계를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칠흑같은 어둠이 밀려오고, 엄청난 추위와 강풍이 몰아쳤다. 변성호가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상에서 캠코더로 파노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잠시 고글을 벗은 게 설맹을 불러일으킨 것.
그런 상태로 안부까지 가는 동안 모두 지쳐갔다. 상현은 C4 도착 이튿날 엄홍길과 변성호가 쉬는 사이
셰르파와 둘이서 400m 로프를 까느라 힘을 쏟아부었던 터라 두 사람에 비해 더 빠른 속도로 체력이 고갈되어갔다.
“비박하자!”
8,000m 고봉 등반 중 여러 차례 비박을 경험한 엄홍길 대장이 안부에서 밤을 넘기고 내일 하산하자고 했으나
상현과 성호 두 대원은 자신도 없고, 하룻밤 지냈다가는 열 발가락 모두 잘라내는 상황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에 1분 1초라도 빨리 내려서고 싶었다.
너무 정신없이 등반하다보니 배낭 안에 물이 있는데도 마시지 못했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인 산소통도 그대로 멘 상태였다.BR>
꽁꽁 얼어붙은 수통과 산소통을 벗어버리고 다시 하산길에 들어섰다.
자일 한 동으로 하강하거나 클라이밍다운하고 고정로프를 만나는 지점에 내려서자 안심이 되었지만
엄홍길과 변성호가 내려오지 않자 초조해졌다. 잠깐 기다리다 마지막 캠프로 향했다.
너무 힘들어 잠시 쉰다 생각하다 깜짝 놀라면 졸고 있었고,
정신이 돌아오면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걱정하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살아 내려가야 한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얼어붙은 장갑으로 뺨을 후려치고 머리를 설벽에 처박았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마지막 캠프가 내려다보였다. 살았다 싶었다. 22시간만에 돌아온 캠프였다.
지퍼를 열고 상체를 집어넣는 순간 그대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눈보라와 깊은 눈을 헤치며 로체샤르 정상을 향하는 모상현씨.
“상현아~, 상현아~. 살려줘~.”
잠결에 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년 동안 형 동생하며 지내온 변성호의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2003년 탈레이사가르뿐 아니라 국내의 여러 산에서 목숨을 걸고 등반한 사이건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텐트 밖으로 나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형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튿날이 돼도 변성호의 눈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자 모상현은 그와 함께 C4에서 하루 더 쉬기로 했다.
그런데 지원차 올라온 셰르파와 함께 하산하던 엄홍길은 C4 바로 아래 로프가 끊어져
위에서 줄을 거두어 깔아야한다는 황당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변성호는 눈도 눈이지만 손과 발에 동상이 심해져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때문에 상현은 위에서 회수한 자일을 캠프 아래쪽으로 늘어진 줄과 이었다.
그런데 그게 죽음의 나락으로 잇는 줄이 될 줄이야.
“저희 팀 C4가 80년대 초 체코팀의 캠프 자리였어요. 그래서 주변에 고정로프와 하켄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줄에 저희 줄을 묶었던 거예요. 하루 쉬고 난 뒤였는데도 정신이 없었나 봐요.
20년 넘도록 8,000m에 매달려 있던 줄에 이었으니 툭 하는 느낌을 받는 순간 40m쯤 떨어진 것 같아요.
수천m 아래 빙하로 내리꽂나 싶어 순간적으로 끔찍했는데 눈턱에 걸리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죠.”
▲ 엄홍길 대장(오른쪽)과 함께 올라선 로체샤르 정상. / 로체샤르 등반 후 BC에서 헬기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부터 넉넉하지 못한 채 산을 다니다보니 장비를 소중히 생각했던 상현은 마지막 내려서기 전
캠프에 올려놓은 침낭 2개에 산소마스크 8개와 레귤레이터 2개 등 값이 나가는 장비는 몽땅 챙겨
배낭이 머리보다 높이 올라올 정도로 짊어지고 내려오던 터였다.
눈턱에서 어렵게 멈춰선 상태에서 배낭을 풀러 피켈만 손에 쥔 다음 몽땅 버렸다.
그리고 살얼음 걷듯 설벽을 한 발씩 내려서 고정로프 끝지점까지 내려섰다.
“얼마 뒤 성호형이 클라이밍 다운으로 내려왔는데, 눈물이 글썽하지 뭐예요.
너 그렇게 혼자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냐면서요.
그 전날 새벽 제가 먼저 내려오면서 느꼈던, 수직고 3,000m 벽에 나 혼자만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어렵게 베이스캠프로 내려섰는데,
힘이 너무 드니 도와달라는 무전을 받고 올라온 후배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풀풀 나고,
캠프의 대원들은 철수준비에 정신이 없지 뭐예요. 저희 두 사람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두 사람은 이튿날 고소포터가 짊어진 대나무광주리에 실려 베이스캠프에서 4시간 떨어진 마을로 옮겨져 헬기를 타고
카트만두를 거쳐 빠른 시간 내에 귀국할 수 있었지만, 이후 1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변성호는 발가락 10개를 모두 잘라내야 했고, 모상현 역시 양쪽 엄지와 검지발가락 발톱 부위를 절단해야 했다.
“병원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그래도 나았어요. 성호형은 손과 발이 모두 동상으로 엉망이었으니까요.
똥까지도 받아내야 했으니까요. 가장 힘든 것은 선후배들의 눈빛이었어요. 동정심이었죠.
저보다 먼저 발가락 수술한 성호형을 보니까 겁이 덜컥 나더군요.
그래서 도망치듯 퇴원해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수술 대신 자연괴사한 부위를 떼어내는 치료법이었다.
공포와 고통을 덜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1주일에 한 번씩 링거를 맞고 있다.
어린아이 속살과 연약한 발가락 살이 어서 단단해지게 하기 위해서다.
▲ 2006년 선인봉 남측 오버행.
"제가 받은 치료법을 알려달라고 할까봐 겁이 나요.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순 없을 테니까요.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니까요. 솔직히 2000년 에베레스트를 가면서도 길목에 있는 로체 남벽을 제대로 못 봤어요.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벽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원정대는 로체와 로체샤르를 함께 공략하는 팀이었어요.
다른 대원들 모두 로체 남벽 등반을 원했는데, 저와 성호형은 엄홍길 형의 목표인 로체샤르를 택했어요.
로체 남벽은 제 능력으론 불가능하겠다 싶었던 거죠.
벽은 그래도 해볼 만하다 싶은데 막판 칼날 리지는 답이 안 나왔으니까요. 참 힘들었던 1년이었어요.
그래도 이제는 이겨낸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자신이 대견하다 싶어요.”
88년 중학교 2학년 2학기 까까머리 때 친구들과 나선 북한산 산행에서
전문산악인들과 인연을 맺은 모상현은 이듬해 청악산우회에 입회하면서 암벽등반에 빠져들었다.
실내인공암벽까지 손을 뻗고, 91년 1월 고교 1학년의 신분으로 라면집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마련한 돈과 선배들이 도와준 돈으로 일본 조가사키 해벽을 찾을 정도로 아예 바위에 미쳐 지냈다.
그 결과는 여러 등반대회에서 나왔다.
그 해 가을 설악자연암벽대회와 이듬해 봄에 코오롱컵대회에서 고등부 우승을 차지하는 등
고2 때 5.12급 온사이트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학교 성적은 산 열정과 반비례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시고,
씁쓸한 마음으로 입대해야했다. 군 생활 중 자신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내는 동료들을 보면 화가 치밀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선배에게 제의받은 낭가파르밧(8,125m) 원정이었다.
“조가사키를 함께 다녀온 윤계중 선배님이 대장으로 내정된 충남대 원정이었어요.
그렇지만 충남대 산악부는커녕 충남대도 안 나온 저를 데려가겠다는데 누가 그러라 하겠어요.
그렇다고 토왕폭 한 번 오른 기록도 없는 저였는데요.
산악부 출신들이 아우성대는데도 윤계중 선배님은 꿈쩍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어느 날 보따리 싸라 하시는 거예요.”
윤계중씨가 데려다준 곳이 설악동이었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충남대 산악부 출신인 신상만(98년 탈레이사가르 등반 중 사망)이었다.
신상만 역시 평일에는 막일을 하면서 더 높고 험난한 산을 그리며 설악산에서 칼을 갈고 지내던 클라이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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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에베레스트 정상.
“상만이 형이 출근 전 오늘은 천화대 갔다 와라 하면, 천화대를 가고,
짐을 무겁게 지고 공룡릉을 다녀와라 하면 그대로 했어요. 빵 한두 개로 이틀 동안 참고 걷는 산행도 해봤고요.
토왕폭, 토왕좌벽도 다 그때 처음 해본 거예요. 월세 10만원짜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방에서 지내고 주말에 설악산 왔다 돌아간 친구들이 남겨준 음식 먹으면서
지낸 겨울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
상현은 그 해 겨울을 설악산에서 나고 이듬해 97년 3월 초 설악산에서 돌아와
원정 준비를 하면서도 매일같이 30kg가 넘게 나가는 배낭을 멘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1천회씩 하는 등
낭가파르밧 정상을 향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원정에 나서서도 윤계중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세계 제9위 고봉 등정에 성공한다.
“고교시절 스포츠클라이밍대회를 앞두고 그랬듯이 낭가에 가서도 이미지트레이닝을 수없이 반복했어요.
두 눈을 부릅뜨고 낭가파르밧을 바라보았던 거죠.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이 생겼어요.
쉽진 않았어요. 마지막 캠프에 첫 번째 오른 날은 지금도 어떻게 올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고소증에 완전히 맛이 갔었죠. 2차 공격에서 올랐어요.
상만이 형과 함께 오르다 보니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던 것 같아요.”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등정의 꿈을 이루었으나 상현은 귀국 후 고민에 빠졌다.
그의 머릿속에 1년간 꽉 차 있던 목표도 사라지자 대학에 대한 갈증이 되살아났다.
대학산악부 출신들과의 생활 또한 자극제였다.
“고민하다 목표를 산 대신 대학 진학으로 바꿨어요.
그렇게 해서 고교 졸업 5년 뒤인 99년 천안대에 들어간 거예요. 멋진 등반기를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택한 게 국문과였으니까요.”
학업에 한창 열중할 즈음 에베레스트 원정의 기회가 왔다. 대산련이 추진하는 세계 7대륙 최고봉 원정대였다.
낭가파르밧 성공 덕분에 받은 높은 점수로 발탁은 되었지만 세계 최고봉 등정이 쉽지는 않았다.
첫 번째는 해발 8,500m 지점까지 올랐으나 깊은 눈에 포기해야 했고,
두 번째 때는 등정은커녕 C3(7,200m)에서 폭설에 이틀간 갇혀 지내야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도전에 나서 성공했다.
"스승이 남긴 최고의 선 찾아 탈레이사가르에 도전"
그해 여름 원정에 나선 K2(8,611m)는 선배인 엄홍길씨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8,000m 14개 거봉 완등을 마무리짓는 등반에서 상현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 역시 다른 산도 아니고 산 중의 산 K2는 꼭 가고 싶었다. 이미 대원으로 확정된 한왕용,
나관주와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등반을 통해 경험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모상현은 K2에서도 선배들에 뒤지지 않는 능력을 보여주며 결국 등정까지 일구어냈다.
그러나 이후 방향을 바꾸었다.
“K2와 에베레스트 등반을 통해 얻은 것 중 가장 큰 게 높이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렸다는 거예요.
그걸 깨고 나니까 하고 싶은 등반을 해야겠다 싶어지더군요. 알프스부터 찾았어요.
산악스키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2001년에 이어 2002년 시샤팡마 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두 번째로 찾은 알프스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수백m 높이의 벽이 지천에 널려 있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알프스엔 아이거와 그랑드조라스, 마터호른 등 3대 북벽만 있는 줄 알았어요.
알프스를 가보지 않고 히말라야를 다녀왔다 생각하니 초등학교도 안 다닌 사람이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싶더군요.”
상현에게 그때까지 해온 모든 등반은 탈레이사가르 북벽의 전초전이었다.
2002년 가을 정찰을 다녀온 그는 이듬해 여름 알프스에서 칼을 갈고 곧바로 탈레이사가르에 도전했다.
“상만이 형이 탈레이사가르 북벽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요.
신기하다 싶을 만큼 기량이 뛰어난 형이 어떻게 산에서 사고를 당할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세월이 조금 지나면서 탈레이사가르가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오더군요.
그러면서 스승이 남긴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남긴 최고의 선을 좇으려 2003년 도전했던 거예요.”
▲ 2003년 탈레이사가르 북벽. / 2006년 요세미티 노즈 등반
2003년 가을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은 고 김형진의 형 김형일,
고 최승철의 아내 김점숙 등 98년 9월28일 정상 설릉 등반 중 추락사한 사고자들의 유가족 등,
대부분 사고자들과 연관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나선 등반이었다.
“딱 한 번의 시도로 끝났어요. 판단 미스였죠. 길을 잘못 들어섰어요.
그래서 예상 높이를 못 미처 6,600m 지점에서 그 날 등반을 끝냈죠.
거기서 피켈로 쪼아내 만든 좁은 얼음턱에 쪼그리고 앉아 포타레지 커버를 뒤집어쓴 채 자는
성호형이 탈이 났어요. 그 날 저녁 먹은 건조밥이 문제였지요. 밤새 토하며 고통스러워했어요.
그런 컨디션으로 이튿날 하룻동안 표고차 300m가 넘는 벽을 타고
정상에 올라 700m 아래 캠프까지 내려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싶었어요.
저 역시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탈레이사가르 등반은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나선 등반이었다.
알프스 등반은 유난히 힘겨웠다.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지만 훈련 부족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온 것 같았다. 탈레이사가르 발대식을 마친 뒤 검진 결과 갑상선기능항진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상현은 그 얼마 전 인연을 맺은 변성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등반에 참가했던 것이다.
“약 먹어가면서 등반했어요. 아무튼 한 달간 등반을 하는 사이 치료시기를 놓쳤어요. 저도 몰랐어요.
심해지면 눈이 튀어나오고 머리털이 빠진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거죠.
컨디션에 따라 몸무게는 한 달에 10kg씩 널뛰기하듯 하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 괴물이다 싶었어요.
1년 반 동안 숨어 지냈어요. 집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으니까요. 2005년 5월 수술하고 나아진 거예요.”
모상현은 지금도 탈레이사가르 등반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당시 인공등반기술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포터레지 가지고 밀어붙였으면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 사실을 3년 뒤인 2006년 엘캡 노즈 등반 중 깨달았어요. 지금 하면 틀림없을 거예요.
알프스와 요세미티 그리고 히말라야 등 고산 거벽등반에 필요한 3개의 무기를 모두 가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발가락이 멀쩡하다는 가정 하에서요.”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선 모상현은 자신이 해낸 그 어떤 등반보다
갑상성기능항진증과 동상 등 두 차례 시련을 이겨낸 것에 대해 뿌듯해하고 있다.
요즘은 발가락 수술 후 돋아난 새 살이 하루 빨리 단단해지도록 하기 위해
물집이 잡히더라도 매일 아침이면 달리기를 하고 주말이면 산을 찾고 있다.
“원정을 가더라도 놀듯이 등반했는데 로체샤르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요.
진짜 8,000m급 등반이다 싶었으니까요. 큰 데미지를 입은 것은 정말 아쉬워요.
그동안 사고를 당해보지 않아 제 한계를 몰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또다시 그런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역시 밀어붙일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된다 싶어요.
나 자신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니까요.
결국 그런 등반을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잖아요.”
모상현은 K2 정상에 오르자마자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드렸을 만큼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부모님이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산 때문에 성실하게 교회에 다니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로체샤르 등반 이후 교회 다니는 일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다.<
▲ 2008년 알프스 타퀼 북벽. / 지난 여름 알프스 코스믹 리지 등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로체샤르에서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순간 입에서 나온 말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이거였어요. 요즘 토요일은 산에 가더라도 주일에는 꼭 교회를 다니고 있어요.
주일교사로도 활동하고, 가끔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도 하고요.
그동안 저만을 위해 지내왔으니까 이제부터라도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야겠다 마음 먹었어요.
정신건강에도 좋아요. 부모님들도 무척 좋아하시고요.
산에서 빙빙 떠돌다가 교회로 돌아왔으니까요. 믿음이 대단한 건 아니에요.
기도하는 사이 저 자신을 반성하고 남을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싶은 거예요.”
갑상성기능항진증으로 튀어나온 눈 수술을 받고 눈 주위의 멍이 빠지기도 전인 2005년 6월
등산의류업체인 컬럼비아스포츠웨어에 입사한 모상현씨는 마케팅팀 소속으로 사회생활에도 열중하고 있다.
산악인의 날 행사 때 산악인 유가족들이나 어려운 산악인들에게 주는 지원금 또한
입사 면접 때 임원진에게 내놓은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이제 꿈은 꿈대로 두기로 했어요”
이제 발가락 절단으로 인한 정신적인 휴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지난 여름 알프스 등반을 다녀왔을 만큼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있는 모상현씨는 라이벌 업체라 할 수 있는
노스페이스에 근무하는 김은주씨(33)와 11월29일 백년가약을 맺는다.
“은주씨는 직장생활하면서 알게 된 사이인데 산에 다니는 저를 잘 이해해줘 정말 고마워요.
남자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도 깊고요. 많이 좋아졌어요. 알프스도 다녀왔고, 한 달 전에는 인수봉도 붙어봤어요.
발가락 사용이 기본인 슬랩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에지를 이용하는 하드프리쪽은 괜찮을 것 같아요. 신혼여행은 시드니로 갈 거예요.
이민 간 선배가 꼭 오라고도 했어요.
그 형 만나면 산 얘기로 밤새우는 날이 많을 것 같아 마지막 이틀동안만 만나자고 했어요.”
로체샤르에서 돌아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그를 아는 산꾼들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모상현씨의 꿈과 열정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성호형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지난해 가을부터 우이동에서 컬럼비아스포츠웨어 우이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결혼도 했고요. 벌써부터 선운산 가자고 난리예요.
언젠가, 매킨리에서 사라진 일본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씀드린 적 있지요.
꿈과 현실은 다르더군요. 그냥 꿈은 꿈으로 두기로 했어요
산이요? 발을 사용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해도 히말라야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대신 딱딱한 신발 신고 하는 벽등반은 내후년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젠 극한등반보다는 정말 즐거운 등반을 하고 싶어요.
어디라고 얘기하면 할 수 없이 가야할 것 같아 지금은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 글 한필석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