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禹錫(유우석)의 「陋室銘」(누실명)

☞ 중국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의 비취곡 바위에 새져져 있는 ‘누실명’
山不在高 有仙則名 산불재고 유선즉명
산(山)이 높다하여 명산(名山)이 아니라 신선(神仙)이 살아야 명산이고,
水不在深 有龍則靈 수불재심 유용즉영
물이 깊다하여 신령(神靈)한 것이 아니라 용(龍)이 살아야 신령하다.
斯是陋室 惟吾德馨
사시누실 유오덕형
여기 이 누추(陋醜)한 집이지만 오직 나의 덕(德)으로 향기(香氣)롭다네.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태흔상계록 초색입렴청
이끼는 섬돌을 타고 오르며 파랗고, 풀빛이 발을 뚫고 들어와 푸르네.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담소유홍유 왕래무백정
담소(談笑)하는 이들은 훌륭한 선비들이며,
오가는 이 중에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백정(白丁)은 없다네.
可以調素琴 閱金經
가이조소금 열금경
소박(素朴)한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성인(聖人)의 경(經)을 열람(閱覽)한다네.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무사죽지난이 무안독지노형
현악(絃樂)이나 관악(管樂)으로 귀를 어리럽히는 일도 없거니와
공문서(公文書) 따위로 몸을 수고롭게 하는 일도 없다네.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
남양제갈려 서촉자운정
남양(南陽),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초려(草廬)에 비길 것인가?
서촉(西蜀)땅, 양웅(揚雄)의 자운정(子雲亭)과 견줄 만 하리.
孔子云 何陋之有
공자운 하루지유
공자님이 이르시길
"군자(君子)가 살고 있다면, 어찌 누추(陋醜)함이 있다 하겠는가?"
* 諸葛廬(제갈려) : 서촉(西蜀), 제갈공명의 남양(南陽)에 있던 초려(草廬)
子雲亭(자운정) : 한(漢)의 성도(成都) 사람인 양웅(揚雄)의 정자. '자운'(子雲)은 그의 자(字)
〔지은이 유우석 (劉禹錫, 772~842) 〕
자 몽득(夢得). 허베이성[河北省] 출신이나 일설에는 장쑤성[江蘇省] 출신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두우(杜佑)의 막료가 되었다.
얼마 후 중앙의 감찰어사로 영전되어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805년 왕숙문은 실각되고, 우석은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 10년 후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었으나 그 때 지은 시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다시 연주자사(連州刺使)로 전직되고 그 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최후로 생애를 마쳤다.
지방직에 있을 때 머물던 작은 서실(書室) 이름을 '누실'(陋室)이라 불렀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으며, 만년에는 백낙천(白樂天)과 교유하면서 시문(詩文)의 도에 정진하였다. 시문집으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 (30권) 《외집(外集)》(10권)이 있다.
〔한글 해설문〕
여기의 한글 해설문은 한조(寒照) 신흥식(申興植)선생의 글을 옮겨왔다. 한조 선생은 道家의 무위사상과 儒家의 도덕이념을 거쳐 佛家의 선(禪)사상에 흠뻑 빠져 평생 공부해 온 분으로서 현재 유마강원(維摩講院)을 운영하고 있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법구경'(法句經), '채근담'(採根譚), '직지'(直指) 등 여러 종의 역서를 갖고 있다. <운영자>
<칼럼> [분수대] 누실명<陋室銘>
(중앙일보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2007.08.22.)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안으로는 성정이 음험한 환관들에 의해 졸렬한 정치가 펼쳐진다. 지방에서는 약해진 중앙 왕실의 허점을 파고 드는 호족 세력의 발호가 그치질 않는다.
당(唐) 왕실이 최고조의 국력을 발하던 성당(盛唐) 때를 보낸 뒤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시기의 모습이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니 천재 소리를 들었을 법한 유우석(劉禹錫)은 이때 정쟁에 휘말린다.
당시의 정치 개혁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그는 좌천된다. 지금의 안후이(安徽)성 조그만 현의 '통판'이란 자리를 받는다. 통판이란 벼슬은 남송(南宋)에 가서야 나름대로 지방관을 규찰하는 권한을 부여받는 직위지만 당대에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한직이다.
중앙 왕실에서 권력 다툼에 밀렸다 싶은 그를 환대해 주는 지방관은 없었다. 그의 상사는 골탕까지 먹이려 든다. 통판이란 벼슬에게 내주는 세 칸짜리 관사(官舍)를 두고서다. 지방관은 갖은 구실을 대서 그의 거처를 세 번 옮기도록 한다. 옮기면 옮길수록 그의 관사는 좁아지고 형편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받은 거처는 침대 하나에 책상과 의자 한 벌인 작은 방.
그의 유명한 문장 ‘누실명(陋室銘)’은 여기서 나온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있으면 좋은 산일 것이요/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한 물이리라/ 이 집이 누추하더라도 내가 닦은 덕으로 그윽할지니(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보기에도 한심했을 거처, 즉 ‘누실’에서 내보이는 그의 기개가 가상하다. 자신이 놓인 환경에 결코 굴하지 않는 자신감은 스스로의 덕에서 비롯하는 것일 게다. 그 덕이란 반드시 도덕적인 기준을 이르는 것은 아닐 터. 달리 말하면 유우석 본인의 속을 가득 채우는 실력과 사람 됨됨이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가슴 속 누실은 한 개쯤은 있을 수 있다. 그게 학벌이든 신체적인 결함이든 남에게 자랑스레 밝히지 못할 곡절 하나씩은 있을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채우느냐겠다.
가짜 학위를 두고서 시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학력에서의 단점을 거짓으로 치장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비난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몰아간 사회 분위기도 차제에 깊이 되돌아볼 일이다. 누실은 외형에 불과하다. 겉멋만을 향해 허망할 정도로 달려가는 사회는 깊이와 실력을 갖추지 못한다. 경계하고 바로 잡자.
첫댓글 何陋之有 멋지네. 신선이 거닐려면 산이 높고 깊어야 할텐데 용이 승천하려면 물이 깊고 맑아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