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巡禮)의 서(書)/오규원
1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偏愛)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2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옷자락은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 두는 것은
그리고 무엇인가 단 한마디의 말로
나를 영원히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
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비가 와도 젖은 자(者)는순례(巡禮)/오규원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 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어족(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만물은 흔들리면서-속(續) 순례(巡禮)1/오규원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數萬)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소 깨닫는 그것
우리도 늘 흔들리고 있음을
시(詩)/오규원
1
나는 미국문학사를 읽은 후 지금까지 에밀리 딕킨슨을 좋아하는데,좋아하는 그녀의 신장 머리칼의 길이 눈의 크기 그런 것은 하나 모른다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끔 그녀의 몸에 까만 사마귀가 하나 있다고 시에 적는다
2
노래가 끝나고 난 뒤에는 노래를 따라 나온 한 자락 따스한 마음이 이 지상(地上)의 기온을 데운다 우리의 노래는 언제나 노래로 끝나지 못하고 노래가 끝난 다음의 무서운 침묵의 그림자가 된다 그것이 노래의 사랑, 노래의 죽음이다
남들이 시를 쓸 때/오규원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리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문패(門牌)도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지친 잠은 내 옆에 쓰러지자마자 몸을 웅크리고
가느다랗게 코를 곤다
나의 잠은 어디 있는가
나의 잠은 방문까지는 왔다가 되돌아가는지
방 밖에서는 가끔
모래알 허물어지는 소리만 보내온다
남들이 시(詩)를 쓸 때 나도 시(詩)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詩)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남의 잠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나의 잠은 나를 위해
꺼이꺼이 울면서 어디로 갔는가
김(金)씨의 마을/오규원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封鎖)하여 버리오 도드토엡스키 정신(情神)이란 자칫하면 낭비(浪費)일 것 같소 유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至言)인 듯 싶소 그러나 인생(人生) 혹은 모형(模型)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禍)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에 고(告)하는 것이니...
1 산(山)과 주저앉은 바다
어제저녁 관념의 마을에 가서
나는 보았다
몇 사람이 주먹을 움켜쥐고
벽 뒤에 숨어서
남의 일생(一生)을 훔치는 것을
공지(空地)에 쌓여 썩어가는
대화 속에서
남몰래 언어들이 탈출하는 것을
밤을 포복하던 불빛
불빛의 가느다란 척추가
만(灣)처럼 휘어진 그곳,
무너지는 산기슭의
흙 속에 묻히는 달빛
과
나란히
시간의 질긴 근육이
두서없이 잘리는 그곳,
병(病)이 깊은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죽음에는
한약(漢藥) 냄새가 나는 것을
그날도
이론(異論)의 먼지가 높이 쌓이는 들판에는
나무들과
허리 구부러진 기침 소리가
하늘 깊숙이 침범하고
부서진 하늘 조각들이
(후략)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全景)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버스정거장에서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새
커튼 한쪽의 쇠고리를 털털털 왼쪽으로 잡아당긴다 세계의 일부가 차단된다 그 세계의 일부가 방 안의 光度를 가져가버린다 액자속에 담아놓은 세계의 그림도 명징성을 박탈당한다 내 안이 반쯤 닫힌다 닫힌 커튼의 하복부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다른 한쪽 커튼을 쥐고 있는 내 손이 아직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세계에 노출되어 있다 그 세계에 사는 맞은편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집의 門들이 닫혀 있다 열린 세계의 닫힌 창이 하늘을 내 앞으로 반사한다 태양이 없는 파란 공간이다 그래도 눈부시다 낯선 새 한 마리가 울지 않고 다리를 숨기고 그곳에 묻힌다 봉분 없는 하늘이 아름답다
거리의 시간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사내가
간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뒷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의 모가지 하나가
여러 사내 어깨 사이에 끼인다
급히 여자가 자기의 모가지를 남의 몸에
붙인다 두 발짝 가더니 다시
사람들을 비키며 제자리에 붙인다
감동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 여자의
핸드백과 한 여자의 아랫도리 사이
하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주전자가 올라붙는다 마리아의 한쪽 가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놀란 여자 하나
그 자리에 멈춘다 아스팔트가 꿈틀한다
꾹꾹 아스팔트를 제압하며 승용차가
간다 또 한 대 두 대의 트럭이
이런 사내와 저런 여자들을 썩썩 뭉개며
간다 사내와 여자들이 뭉개지며 감동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든다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이 시대의 순수시
자유에 관해서라면 나는 칸트주의자입니다. 아시겠지만, 서로의 자유를 방해하 지 않는 한도 안에서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몰래(이 점이 중요합니다.)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법은 나는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게 하는 사랑, 그 사라의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자유를 사랑하므로, 세상의 모든 자유도 나의 품 속에서 나를 사랑 합니다. 사랑으로 얻은 나의 자유. 나는 사랑을 많이 했으므로 참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자유,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자유, 금주의 운세를 믿는 자유, 운세가 나쁘면 안 믿는 자유, 사기를 치고는 술 먹는 자유, 술 먹고 웃어 버리는 자유, 오입하고 빨리 잊어 버리는 자유.
나의 사랑스런 자유는 종류도 많습니다. 걸어다니는 자유, 앉아다니는 자유(택시 타고 말입니다). 월급 도둑질 상사들 모르게 하는 자유, 들키면 뒤에서 욕질하 는 자유, 술로 적당히 하는 자유, 지각 안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봉급 봉투 털 어 기세 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자유, 찰칵찰칵 택시 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자유,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남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자유.
이 세상은 나의 자유투성이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팔아서 공순이의 옷을 벗기는 자유, 시대라는 말을 팔아서 여대생의 옷을 벗기는 자유, 꿈을 팔아서 편안을 사 는 자유, 편한 것이 좋아 편한 것을 좋아하는 자유, 쓴 것보다 달콤한 게 역시 달 콤한 자유, 쓴 것도 커피 정도면 알맞게 맛있는 맛의 자유.
세상에는 사랑스런 자유가 참 많습니다. 당신도 혹 자유를 사랑하신다면 좀 드 릴 수는 있습니다만.
밖에는 비가 옵니다.
시대의 순수시가 음흉하게 불순해지듯
우리의 장난, 우리의 언어가 음흉하게 불순해지듯
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미망(미망), 무의미한 순결의 뭄뚱이, 비의 몸뚱이들……
조심하시기를
무식하지도 못한 저 수많은 순결의 몸뚱이들.
오규원 (오규옥)
출생 : 1941년 12월 29일
사망 : 2007년 2월 2일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직업 : 시인
학력 : 동아대학교
데뷔 :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경력 : 1982년~2002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수상 : 2003년 제3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1982년 현대문학상 수상
대표작 : 사랑의 기교,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하늘아래의 생
팬카페 : 시인 오규원을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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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옥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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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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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하고
한잔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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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젖은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
꽃과 그림자
붓꽃이 무리지어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왼쪽과 오른쪽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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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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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지와 편지봉투
당신의 편지를 오후에 받았습니다
그래도 햇빛은 뜰에 담기고 많이 남아
밖으로 넘쳤습니다
내 손에서는 사각사각 소리가 났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사각봉투였습니다
사각봉투 끝은 오후의 배경을 가리켰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A4용지였습니다
A4용지는 단정하고 깍듯했습니다
A4용지는 나의 그늘은 잘 담기었지만
바람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두 겹으로 하얗게 접혀 있었습니다
~~~~~~~~~~~~~~~~~~~~~~~~~~~~~~~~~~~~~~~~~~~~~~~~~~~~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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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잎의 여자 1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한 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트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트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 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레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트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
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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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잎의 여자 3 / 오규원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커피같은 여자,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
자,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그녀도 뒤집
히며 엉덩이가 짝짝이되네.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내일이면 왼쪽 엉덩
익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
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감
한 여자,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그녀도 앉아
있네.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보여 주지 않는 여자,앉으면 앉은,서먼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물푸
레 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문학과지성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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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대낮
솟구치는 질경이는 잎 뒤의 햇볕을
어디에다 두었나 잎 뒤가 텅 비었다
송장풀과 개비름은 잎 뒤의 그림자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그림자가 없는
육체라니! 숨긴 그림자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나 허물어진 아파트 단지
외곽의 땅이 개쑥갓과 쑥부쟁이처럼
부풀고 있다 드러누워 기고 있는
외풀은 다리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그곳에 나는 오늘 가보고 싶다)
野古草와 바랭이는 허리를 어디에다
숨겨두었나 어디에다
시집 '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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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밤 / 오규원
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 놓았네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 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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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와 전화
한 죽음을 불쑥 전화로 내게 안기네
창 밖에 띄엄띄엄 보이는 눈송이를 따라 내리다가
내리다가 돌에 얹혔다가 허물어졌다가 마른 풀에 얹혔다가
나무 가지에 얹혔다가 흙에 얹혔다가 스며들다가
무끄러미 아직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내 손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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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 오규원
지난 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 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애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여,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쪼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根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日月이여
모두 떨어져 덤숙히 쌓인 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발자국이 하나씩 남는다.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나가고.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나가고.
서서 작별을 지지하는 발
발가락 사이 이 차가운 겨울을
부수며
무엇인가 아낌없이 주어버리며
오늘도 딛고 있다.
바람을 흔들며 선 고목 밑
죽은 언어들이 히죽히죽 하얗게 웃고있는
겨울을.
첨탑에서 안식일을 우는 종이
얼어서 얼어서 들려오는
겨울을.
이번 겨울에도 나의 발은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日月이 부서지는 소리
그 밑 누군가가 무게를 받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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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1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
몇 가닥을 뽑았고,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어 보였고, 또
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
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
어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는 정오에 출근했고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한 번 훔쳐 보았고,
이 여자 또한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점을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이 여자의 눈에도 별이 뜨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나는 어제 버스가 쉽게 달리는 것을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때문에 이 시대의 우리들이 얼마나 무능
한가를 느꼈고,
쉽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아도
거리에 선 우리들의 상상력은 빈약해 보였고
그 옆에 선 아이들조차
다시 태어나리라는 상상력을 방해했고,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버스가 고장이 나기를 희망했다.
버스가 탈선되기를, 탈선의 장치의
거리가 준비되기를,
허락받은 사람들은 허락받은 냄새와 지랄의 아름다움을 위
해
셋방이라도 하나 얻기를 희망했다.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나는 갈구했고, 그리고
사랑의 말에는 모두 구린내가 나기를 희망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랑이란
맹물이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잊어버려서
이제는 떠올리기조차 너무나 먼
이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려면
셋방을 얻어 주는 그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나에게 질문하며.
2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
술과 함께 오기도 좀, 개뿔도 좀, 흰소리도 좀, 십원짜리
도 좀 마셨고
그러나 오늘 새벽 잠이 깨었을 때는
오기도 개뿔도 다 어디로 가고
후줄근히 젖은 시간이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새벽의 창문과 뜰과
이웃집 지붕 위로
그만그만한 어제의 오늘 하루가 내복바람으로 나를 보았
고,
나는 일어나 있었고,
찬물을 한 사발 마신 후
오늘 하루 그것의 사랑에 박힌
티눈의 정체에게 안부를 나는 물었다.
카세트에 녹음된 금강경의 독경을
한 번 듣고, 뒤집어서
반야경을 한 번 듣고.
오늘 나는 오늘의 어제처럼 출근했고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한 잔 마셨고
전화 두 통화 받았고
전화 한 통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워물고 새삼 어제
집에 무사히 도착한 일을 신기해하며
아직도 서정시가 이 땅에 씌어지는 일을 신기해하며
아직도 사랑의 말에 냄새가 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맹물 사랑의 신도들을 신기해하며.
3
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고
살 것이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므로
내일 나는 사랑할 것이고,
친구가 오면 술을 마시고
주소도 알려 주지 않는 우리의 희망에게
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
손님이 오면 차를 마실 것이고
죄 없는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할 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은 일만큼 배부른 일을
궁리할 것이고,
맥주값이 없으면 소주를 마실 것이고
맥주를 먹으면 자주 화장실에 갈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하며 만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게 전화도 몇 통 할 것이고,
전화가 불통이면
편지 쓰는 일을 사랑할 것이다.
시집 ; 이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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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산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
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집 ; 두두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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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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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巡禮8 / 오규원
멸망하지 않는 그대의 꿈일지라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저기, 멸망이라는 말을 모르는 바다.
멸망이라는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바다의 슬픔을
해변의 때찔레꽃이 오늘도
울며 대신 떨어진다.
매일
그 뜻을 전하려 바다로 가는 소리.
그대, 돌아오지 마라
누구도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바다에 가면
누구나 옷벗은 사람끼리 만나리라.
사랑의 技巧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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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技巧.1 / 吳圭原오규원
K에게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게 당신을 사랑해 하며
아양을 떨고,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버스가 다니는 길과 버스 속의 구린내와
길이 오른쪽으로 굽을 때 너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훔치는 한 사내의 不道德부도덕에게
사랑의 法법을 묻는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취하는 法을 소주에게 묻는다.
어리석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취해야만 法에 통한다는 사실과
취하는 法이 기교라는 사실과
技巧가 法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안하게도 술집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취해서 깨닫는다.
내가 사는 法과 내가 사랑하는 法을
낡아빠진 술상에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깨닫는다.
젓가락이 둘이라서
장단이 맞지만,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法은 하나뿐이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장단은 엉망이다.
江 건너 마을에는 後庭花후정화 노랫가락이
높고
밤에도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좌석 밑의 구린내와 지린내를 사랑하고
商女상녀는 망국한을 몰라
노랫소리가 갈수록 유창해진다.
나는 이곳의 技巧派기교파로 울면서, 이 울음으로
몇 푼의 동냥이라도 얻어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여기 이렇게 울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사랑의 技巧, / 민음사,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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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남산의 한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뉘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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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者
성경에 가라시대 마음이 가난한 者에게 福이 있다 하였으니
2백억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9억 원을 축재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 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1백9십9억 원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8억을 축재한 사람 또한 그민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적은 20억 원이니 30억 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돈 이야기로 詩라고 써놓고 있는 나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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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비가 온다, 대문은 바깥에서부터 젖고 울타리는 위에서부터 젖고 벽은 아래서부터 젖는다
비가 온다, 나무는 잎이 먼저 젖고 새는 발이 먼저 젖고 빗줄기가 가득해도 허공은 젖지 않
는다
..................라고 말하는 시도 젖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