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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지 못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못하는... 딱 거기가 내가 서 있는 자리다.
가톨릭행동에서 그날의 복음에 대한 짧은 묵상과 함께 행사소식이 실린 메일이 매일 온다.
가지도 못하면서 매번 행사는 꼼꼼이 읽는데... 2015년 가을 영성학교의 세번째 주에 요나수사님의 강의가 있다!!
내게는 가을에 주말이 없다. 벌써 6년째 9월부터 석달 동안 매주 토요일 진행되는 스케줄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계획을 짜면서 10월 9일 한글날이 금요일이라 연휴에는 결석이 많을거라면 그 주의 토요일엔 아예 강의를 하지 않고 건너 뛰기로 했다.
그런데 영성학교의 세번째 강의가 바로 10일이라니!
명동성당은 알아도 그 뒷길에 있다는 전진상교육관은 모른다.
daum지도의 길찾기로 검색을 하고, 수첩에 전철 갈아타는 법까지 메모를 했어도 오랫만에 대중교통으로 가는 길은 낯설다. 그런데 명동역 8번 출구에서 골목으로 꺾어지자 마자 친구와 마주쳤다. 같은 모임에서 갈린지는 20년쯤 되었고, 몇년에 한번 정도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 마주치는 사이다. 어머나 ~ 왠일이니? 명동성당의 10시 미사를 끝내고 이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 뒷문 옆 새로 생긴 까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싸게 팔더란다. 어딘데? 남대문시장에서 4개 3천원 하는 만두로 점심을 떼우고 차마 4천 5백원짜리 파스쿠치 커피를 마실 수 없어서 그냥 참고 오던 길이야. 그래 그래 잘 했다. 난 커피 한잔 더 마시면 되지. 그러면서 그 친구가 나를 데려 간 곳은 바로 전진상교육관 앞이다. 까페는 한산하고 직원은 친절하다. 조금 전 남대문 시장에서 산 작은 보온병을 내밀며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보온병을 씻어서 담아줄 수 있느냐'고 묻자 기꺼이 o.k.다. 편안한 의자에 늘어져 수다떨며 피곤을 풀고 수사님 커피까지 한잔 챙겼다. 머 이런 일이 다 있지? 내 수호천사는 잠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하긴 언제 어디로 샐 지 모르는 인간이니 불안하겠지^^
1시간 반 정도의 강의는 밀도가 높다. 그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강의에서의 메모와 수사님이 인용한 시와 문구를 검색하며 기억을 재구성하다 보니 - 읽는 사람에게는 아니겠지만 - 내게는 이게 동영상이고, 녹음이다. 다시 수사님의 농담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밝고 따스한 표정들이 보인다.
강의 메모
문명이 발전하고 서구화가 된 곳일수록 개체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감각은 강화되고,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은 부실해진다. 이 때 우리는 잔인해 질 수 있다. 인간은 원래 다른 존재에 대해 예민하게 태어났다. 그런데 그 감각이 무뎌지면 잔인해지는 것이다. 누군가 생태계에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무감각해져 버려서 그렇다고 느낀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집단적 성향의 발로인 것이다.
이 강의 주제, '관계', '우리 시대의 가난한 존재를 인식하기' 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가 관계를 잘 맺으면 나와 상대가 주체와 객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할 때, 이는 내가 당신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안다는 것은 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친하다는 것이다.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어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관계가 인식이다. 마종기 시인이 읊었듯이 너와 나 사이에 강줄기가 있어서 내가 흔들리면 저쪽의 너도 흔들린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의 끈이다. 이는 단지 시적 언어만이 아니다. 우리 사이에 이런 끈이 있는데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이런 끈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영성학교의 문제의식은 '사회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위한 연대, 노력, 운동, 발언과 기도생활, 영성생활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것인 듯 하다. 일상생활에서는 이 두 가지가 따로인 것 처럼 보인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들은 정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두자고 생각하고 운동권에서는 기도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근래의 흐름, 특히 현 교황님의 가르침은 이 두가지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위에서 종종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 세상과 사회를 넓고 깊게 바라보고, 이 시대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나와 관련없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라는 인식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하고 헌신하고 일하는데 어느날 문득 눈을 뜨고 자신을 돌아보니 스스로가 너무 메말라 있고 고갈되어 기쁨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NGO에서도 그런 분들을 꽤 보았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위한 헌신과 노력이 영성적 근원에 연결되어 번아웃되거나 탈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역시 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나름의 체험, 생각을 나누고 싶다.
성경에서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친교라는 말이다. 라틴어로 communio, 글자 그대로는 일치, 친교이고 그리스 어로 koinonia라고도 한다. 친교는 참여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도 이런 참여가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고, 하느님이 강생을 통해서 사람에게 참여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교부들은 神化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인성과 신성이 서로 섞인다는 것이 아니라 닮아간다는 의미이고 하느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먼저 인간에게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그 참여의 현장에서 하느님과 나 사이만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의 경계도 무너진다. 또한 하느님과 사람만이 아니라 온 세상, 물질계도 다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미사가 거행될 때 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성체만 잘 받아 모셔도 우리가 지닌 치명적 오해가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사회적 운동의 영성적 근원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구절이 있다. 토마스 머튼이 수도생활 25년 쯤 되었던 어느 날 느낀 것을 일기에서 기록했다.
"루이빌 상가 중심에 있는 4번가와 월넛 가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리를 오가는 이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며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며, 비록 서로 낯선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서로 이질적인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던 것이다. …… 다르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에 너무도 안심하고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것에 감사드립니다"(『토마스 머튼의 단상`-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에서).
이런 것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몰려 온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과 행인들의 구별이 사라진 것이다. 이들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이들은 내 사람들이고 나 역시 이들의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서로 낯선 사람일지라도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선승들의 경험, 선물과도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사이가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인식인 것이다. 바다의 수면을 보면 섬들은 떨어져 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우리는 섬이 아니라 연결된 대륙이라는 것을 보는 감각이다. 토마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 하느님과의 합일에서 세속 사람들이나 자신이 같다는 것을 알아 들은 날이 이 날인 것이다.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것이다.내가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은 축복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 하느님이 강생하신 인류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줄 길이 없다...라고 머튼은 쓰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을 담은 태양처럼 빛나고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머튼은 본 것이다.
그 본 것이 어디서 완성되는가? 제 안에서 혼자 깨닫는 것은 환상이다. 자기 안에서 본 그것이 동시에 다른 사람들 안에서 보일 때, 그 때 봄은 완성이 되고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에게 가질 수 있는 좋은 질문은 내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수도자이고 신부이다 그러나 꽤 오래 전부터 나는 스스로를 신부라고 소개하는 일이 없다. 신부보다는 수사, 더 많은 경우 그냥 이름만 이야기한다. 신부란 내가 걸치고 다니는 역할 중 하나이다. 필요에 따라 걸치는 옷이다. 나는 엄마, 아빠 선생, 운동가, 교수, 신부, 수사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옷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그 때 충실하게 해야 할 역할이지 내 정체성이 아니다.
정체성에 대한 튼튼한 교육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수도회에 들어오면 수도자가 무엇인지, 그 수도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배워야 한다. 그러나 정체성에 단단하게 갇혀 있어도 병이다. 정체성이 확립되면 떠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교조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동화란 흡수통일이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상대는 무찔러야 할 대상이 되는데 무찌르지는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분단고착이다.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팔할은 흡수통일 아니면 분단고착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며 종살이를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종살이하고 있다는 뜻이다. 불가에서 我相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하느님을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하듯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온유함이다. 종교적 수행의 본질은 하느님이 사람을 보는 그 시선에 자신도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내가 몸으로 깨달아 알기 전에는 믿는 것이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다. 사람에게는 사람들 자신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근원적인 차원이 있다. 기도는 그 차원을 인식하고 알아들어가는 것이다.
영적 성장은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할 줄 알고, 관대하게 되는 것은 언제인가? 내가 근원적으로 조건없이 용납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이 있을 때, 나도 비슷한 방향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많이 사람받았기에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치명적 사랑을 아는가? 왜 우리는 사랑 받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가? 그런 사랑을 받았을 때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치명적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만하면 됐다는 것이 없다. 계속 간다. 나는 우리가 서로 엎드려 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존경이다. 그러나 인간적 차원이 아니다. 상대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나도 하느님이라는 사실을...보이지 않으면 믿어야 한다.
가난한 이를 위해서 투신한다, 일한다는 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함정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을 한다. 가난한 이를 위한다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위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상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이다. 이상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의 한계 - 이상과 우상은 비슷하다- 를 벗어나는 길은 가난한 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가 되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입장의 동일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이 좋은 것은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형태입니다. 신영복 옥중서신,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중에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같아지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도와 주시지 않는 것 같다. 잘 안들어 주실 때가 더 많다.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고통받으신다. 오리게네스 교부가 '하느님이 고통받으신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와 함께 고통받는 하느님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면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교황님이 '밖으로 나가라'고 하시는데 그건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말이 아니다. 시혜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 들어갔을 때, 그 때 비로서 복음을 알아듣는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는 것이다. 가난한 이의 현존이 우리를 복음화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오늘날도 역시 그러하다. 이상의 추구와 하느님의 추구는 어느지점에서 레디컬하게 달라진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행동에서 가난하게 되는 지점으로 넘어갈 때 운동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루터가 말하듯 나는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인 것이다. 내가 수행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만 내가 나를 사랑받도록 방기하고 나를 내어 놓을 수 있다. 그렇게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사랑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용서받은 죄인이 성인이다. 근원적으로는 ... 스님들이 노력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노력하면 자기가 단단해진다. 고통받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은 고통받는 분이다. 고통받지 않는 사랑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미이다.
고통받는 하느님만이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에 이 하느님을 만난 사람만이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첫댓글 나누어주신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상대를 도와주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것.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의 형태이라는 옥중서간글 등..이 잔잔히 ..파고듭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신영복선생님이 출옥하기 전 평화신문에 실렸던 글을 읽었어요. 그 후 출간되는 책을 차곡차곡 다 읽었거든요. 근데 수사님을 통해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한답니다.
우리 사이에 강줄기가 있어서 서울에서 흔든 강줄기가 부산에서도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그 흔들거림의 줄기를 잡고 우리모두가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나눔!!^^.
부산에서 열린다는 후원회 모임에 가시거든 메모랑 사진 올려 주세요. 어떤 분들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해요.
혼자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때로는 좀 많이 힘든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서 듣고, 또 그 새겨 들음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시는 분들과 동참하는 자리라고 조슴스레~~ 말씀드립니다.
좋은 말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