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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오봉의 학문과 시(詩), 관료 생활아주신씨(鵝州申氏)
1. 학문
오봉 선생은 23세에 어계(漁溪) 조려(趙旅)42) 선생의후손인 망운정(望雲亭) 조지(趙址)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인 함안 조씨의 여러 학자와도 교유를 하였다.43) 우선 그의 장인 조지는 어릴때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들 4형제도 학자 출신이었다. 오봉은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성장할수록 뜻을 더욱 분명히 하고 학업에 충실하였다. 벼슬길에 나가서도 어려서 퇴계의 문하에 나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자청하였고, 항상도산을 왕래하며 임란 중에도 여러 급문제장로(及門諸長老)들과학문을 강구하고 지결(旨訣)을 이어 받았으며, 제현(諸賢)들과 시정(時政)을 담론하고 고견을 참고하기도 하였다.
오봉은 아버지의 권유로 형(신지효)과 함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彥璣)44) 선생에게 배웠는데, 그는 퇴계의 급문제자(及門弟子)이면서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도산 근처에 서사(書舍)를 지어 ‘유일(惟一)’이란 편액을 걸어 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오봉을 비롯해 남치리(南致利), 정사성(鄭士誠), 권위(權暐), 박의장(朴毅長), 권태일(權泰一) 등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오봉은 퇴계의 뛰어난 제자[高弟]인 학봉 김성일 선생에게 배웠다. 학봉은 학문적으로 퇴계의 수제자이며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든 예절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오봉은또한 학봉의 수제자로서 그를 통하여 퇴계의 사상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오봉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공무를 집행하는 여가에도 지속되었고심지어 전란 중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오봉집�에는 오봉이읽었던 도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45) 먼저 그는 한시(漢詩) 창작에남다른 특징과 장점을 보였다. 이것은 오봉이 평소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를 애독하고 애송했던 것에서기인하고 있다.
오봉은 관직에서 스스로 예안 현감을 선택하고 전란 중에도예안과 안동에서 퇴계 학문을 연마하여 왔는데, 학자로서 오봉은 임진란이 크게 방해 요소가 된 것으로보여 진다. 그러나 오봉은 유일재 김언기에게 수학하면서 급진적인 학문적 발전을 이루었고, 학봉 김성일을 통한 학문적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지식인들의 기본 필독서인 �소학(小學)�, 사서삼경을 위시하여, 두보시(杜甫詩)와 �성리대전(性理大全)등 각종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퇴계집(退溪集)�을 애독하면서그 중에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을 통해서 내면의 수양을 완성해 갔다.46) 오봉은 백씨(伯氏, 신지효)가 �성리대전�에서 직접 가려 뽑아 베껴 쓴 책 뒤에 발문(跋文)을 썼다. 내용을 보면 백씨가 생전에 애독하던 책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성리대전�은 퇴계를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의 필독서였기에 오봉 역시이 책을 탐독하였다. 오봉은 1598년 성재(性齋) 금난수(琴蘭秀)47)에게서얻은 �고경중마방�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내면 수양에치력하였다. 이 책은 퇴계 이황이 은나라 탕왕의 반명(盤銘)을 비롯해서 7편의 잠(箴), 명(銘), 찬(贊)을 뽑아 엮은 잠언서이다. 이고경중마방은1595년 월천(月川) 조목(趙穆)48)이 도산서원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책이다. 오봉은퇴계의 편저인 이 잠언서를 통해 속세에 찌든 내면을 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경중마방은 1607년 한강(寒江) 정구(鄭逑)49)에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고, 영조ㆍ정조 때에는 궁중에까지 전파되어 애독되는 단계에이르렀다.
오봉의 학문과 관련하여 광해 경술 1610년 오봉 선생이 생도를 가르치기 위하여 복축강서(卜築講書)하던 곳이 있는데 장현광(張顯光)50)선생이 그 이름을 ‘장대(藏待)’51)라 하였으니, 이는 “간직하고익히며 때를 기다린다.[藏修以待之]”52)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장대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89년에 중건되었다.
오봉의 학문이 형성된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성격이 관후(寬厚)하였으며 유년시절부터 학문에 열중하였고 특히 청년 시절에는 도산을왕래하며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강론지결(講論旨訣)하며 자신의 학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봉은 문관이었지만 문무겸전(文武兼全)하였고, 퇴계를숭모하였으며, 학봉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퇴계와 남명(南冥)의 양문(兩門)을 출입하는학자들과도 교유하였다. 오봉은 경상 좌ㆍ우도를 통하는 사우 관계(師友關係)를 맺어 활약한 조선 중기의 선비였다.
�오봉집�을 통해 우리는 신지제의 일생 행력과시와 학문에 관해 다음 4가지 사항을 검출할 수 있었다.53)
① 신지제는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다. 신지제는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 예조 좌랑, 문학,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고, 왜적이국토를 유린하는 때에 항왜 활동을 하여 공훈이 두드러졌다.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와 뜻을 같이하여 �화왕산동고록(火旺山同苦錄)�에이름이 올라 있다.
② 신지제는 국가의 통치와 관련한 관각 문학에도 뛰어났고, 개인의 서정을 토로하는 순문학에도 뛰어났다. 신지제는 지제교(知製敎)54)의 삼자함(三字銜)을 지닐 만큼 국가의 공적 문장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오봉집�에 실린 많은 수창시(酬唱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우들이나 지방관, 하급 관료들과 폭넓게 시문을 주고받은 문학가였다.
③ 신지제는 지방관으로서도 탁월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고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특히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했다. 창원 부사재직 시에 명화적 정대립(鄭大立)을 체포하여 경내를 안정시킨 것은 중요한 공적이다. 그리고 57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로는 고향의 의병 유가족 돕기와 후진 양성에 전력했다.
④ 신지제는 영남의 여러 학풍을 흡수했다. 그는 소년 시절 퇴계학맥의 김언기에게 배우고, 그 후 김성일을 스승으로모셨다. 그러는 한편으로, 장현광을 종유했고, 남명학맥 의 학자들과도교유했다. 따라서 신지제는 경상좌도와 우도의 학맥을 소통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실로 신지제는 17세기초반 영남학맥에서 이채를 띠는 인물이다. 17세기 영남의 문학사와 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문과일생 사적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42) 조려(趙旅, 1420~1489) :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본관은함안(咸安)이다. 생육신의한 사람이다.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저서로는 『어계집』이 있다.
43) 박명숙, 오봉 신지제 선생의 생애와학문 , �동양예학� 38호, 동양예학회, 2017, 63-94쪽.
44) 김언기(金彦璣, 1520~158) : 자는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광산(光山)이다. 안동시풍천면 구담리(九潭里)에서 태어났으며, 이황(李滉) 문하에서수학하였다. 안동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었다.저서로는 �유일재집�이 있다.
45) 황만기, 오봉 신지제의 학문 경향과삶의 제 양상 , �영남학� 69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 연구원, 2019, 179~21쪽.
46) 황만기, 상게 논문, 180쪽.
47) 금난수(琴蘭秀, 1530~1604) :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性齋)ㆍ성성재(惺惺齋)ㆍ고산주인(孤山主人),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이황의 문인이며,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제릉 참봉ㆍ봉화 현감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공로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성재집(性齋集)�이 있다.
48) 조목(趙穆, 1524~1606) :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본관은횡성(橫城)이다. 이황의문인이며,1594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벼슬이 공조 참판에이르렀다.예천(醴泉)의정산서원(鼎山書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의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월천집�,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49) 정구(鄭逑, 1543~1620) :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江), 본관은청주(淸州)이다. 창녕현감ㆍ공조 정랑ㆍ안동 부사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집� 등이 있다.
50) 장현광(張顯光, 154~1637) :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인동(仁同)이다. 1583년에향시에 합격한 뒤 보은 현감ㆍ공조 좌랑ㆍ의성 현령ㆍ사헌부 장령ㆍ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여헌집�ㆍ�역학도설(易學圖說)� 등이 있다.
51) 장대(藏待) : 장대서당(藏待書堂)은 1610년 신지제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강당으로, 의성군봉양면 장대리에 있다. 169년에 사당인 경현사(景賢祠)를 지었고, 1672년에 위판을 봉안할 때 이민성(李民宬)을 함께 배향하였다.1702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고 김광수(金光粹)와신원록(申元祿)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52) 간직하고……기다린다 :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는 재능을 몸에 품은 채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君子 藏器於身 待時而動]”라고 하였다. 원문의 장수(藏修)는 �예기� 학기(學記) 에 “군자는 배움에 있어 마음에 간직하고 반복해 익히며 물러나 쉬고노닐며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라고한 데에서 온 말이다.
53) 심경호, 전게 해제, 70~71쪽.
54) 신지제는 성상의 명에 따라 임란공신 이광악(李光岳, 157~1608), 고희(高曦, 1560~1615)에게 내릴 교서를 지어 올렸다.(글씨는 한석봉이 씀)
2. 시(詩)
오봉이 예안 현감으로 있던1591년 이후부터 1613년 창원 부사가 되기 전까지 지은 35제의 시는 오봉집� 원집 권1에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는 임진란 등으로 한가롭게 시를 쓸 수 있는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봉집� 권2~4는 1613년에서 1618년까지 창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은회산잡영(檜山雜詠) 으로 회산(檜山)은 창원의 별칭이다. 회산잡영은 상권 108제(題), 중권 54제, 하권 90제, 모두 252제의 시를 수록했다. 권7 습유에는 시 6제가 실려 있다. 결국오봉집의 원집과 별집에는 49제의 시가 실려 있다. 즉, 원집 권1 35제, 권2 회산잡영(상) 108제, 권3 회산잡영(중) 54제, 권4 회산잡영(하) 90제, 권5 구당만록 에 95제, 권7 습유(拾遺)에 6제, 별집 61제이다. 이 61제는 신지제가 예안 현감으로 있던 1590년대 지은 것부터 그가 죽은 1624년까지 원집에 실리지 못한시들을 연대순으로 수록했다. 오봉집에 수습된 시들은 많지 않지만 왜란 당시의 여러 상황, 저자의 교유 관계, 향촌 생활의 양상을 드러내 보여 주는 소재가 특이한 것이 많다.55)
신지제의 시는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수창이 많다. 1613년부터 1618년까지 창원 부사로 있을 때 교유한 곽재우(郭再祐)56)ㆍ박서구(朴瑞龜)57) 등과 주고받은 시가 있고, 설월당 김부륜(金富倫)58)이나 신지제보다 앞서 창원 부사를 지낸 손기양(孫起陽)59)과주고받은 시도 여러 편이 있다. 오봉이 젊어서 스승 김언기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스승님책상 위에 두보시 전질(全帙)이 있었다. 그 내용을 보았더니 바로친구 김광문(金光門)의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안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임란이일어났는데 그 때 두보의 시(詩)가 보고 싶어서 김광문에게서빌려 보았다. 시 가운데 오봉의 기호에 맞는 것을 베껴서 5권으로나누었는데 다만 필체가 졸렬하여 글씨가몹시 삐뚤삐뚤한 것이 한스러웠다. 오봉은 두보의 시 가운데 훌륭하다고판단되는 시만 뽑아 다섯 권으로 만들었다.
성당(盛唐) 때의 시인인 두보는 안사의 난이라는 혼란기를 살면서 우국충정에 불타는 마음을 시로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오봉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두보가 내적 갈등을 어떻게 승화하였는가를 두시(杜詩)를 통해 살피고자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시 창작(漢詩創作)에 있어서 두시(杜詩)의 시작 기법(詩作技法)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지제 선생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진여의(陳與義), 육유(陸游) 등 중국 시인들의 시에 차운하여 자신의 심회를 드러내는 한편, 매월당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나 석주(石洲) 권필(權韠)60) 등 조선 시에도 적극적으로 차운했다. 선생은 창원 부사로 재직 시 많은 시작(詩作)을 남겼고(檜山雜詠), 문집번역판의 1권에 있는 대부분의 시도 이때에 쓴 것이다. 선생의수준 높은 많은 시를 정밀하게 분석해서 그의 정신세계
와 문학세계를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55) 심경호, 오봉 선생문집 해제 , �오봉 선생문집�1, 한국국학진흥원, 2019, 23~71쪽.
56) 곽재우(郭再祐, 152~1617) :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忘憂), 본관은현풍(玄風)이다. 성주목사ㆍ진주목사ㆍ한성부 우윤ㆍ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남 의령에서의병을 일으켰고, 1598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을 지켰다. 시호는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망우집』이 있다.
57) 박서구(朴瑞龜, 1546~1623) : 자는 정하(呈夏), 호는 악견(嶽堅), 본관은밀양(密陽)이다. 박창도(朴昌道)의 아들이다. 임진왜란때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했고, 만년에 회산 교수(檜山敎授)를 지냈다. 저술로는�악견시집(嶽堅詩集)�이 있다.
58) 김부륜(金富倫, 1531~1598) : 자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본관은광산(光山)이다. 155년사마시에 합격한 뒤 전생서 참봉ㆍ내섬시 주부ㆍ동복 현감ㆍ봉화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설월당집�이있다.
59) 손기양(孫起陽, 159~1617) :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ㆍ송간(松磵), 본관은 밀양(密陽)이다.15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ㆍ성현도 찰방ㆍ신녕 현감ㆍ울주판관ㆍ창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밀양의 칠탄서원(七灘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한집이 있다.
60) 권필(權韠, 1569~1612) :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본관은안동(安東)이다. 임숙영(任叔英)이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탄핵하다가 삭관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여 해남으로 귀양을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석주집』이 있다.
55) 심경호, 오봉 선생문집 해제 , �오봉 선생문집�1, 한국국학진흥원, 2019, 23~71쪽.
56) 곽재우(郭再祐, 152~1617) :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忘憂), 본관은현풍(玄風)이다. 성주목사ㆍ진주목사ㆍ한성부 우윤ㆍ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남 의령에서의병을 일으켰고, 1598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을 지켰다. 시호는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망우집』이 있다.
57) 박서구(朴瑞龜, 1546~1623) : 자는 정하(呈夏), 호는 악견(嶽堅), 본관은밀양(密陽)이다. 박창도(朴昌道)의 아들이다. 임진왜란때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했고, 만년에 회산 교수(檜山敎授)를 지냈다. 저술로는 악견시집(嶽堅詩集)이 있다.
58) 김부륜(金富倫, 1531~1598) : 자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 본관은광산(光山)이다. 1555년사마시에 합격한 뒤 전생서 참봉ㆍ내섬시 주부ㆍ동복 현감ㆍ봉화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설월당집이있다.
59) 손기양(孫起陽, 159~1617) :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ㆍ송간(松磵),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58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ㆍ성현도 찰방ㆍ신녕현감ㆍ울주 판관ㆍ창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밀양의 칠탄서원(七灘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한집�이 있다.
60) 권필(權韠, 1569~1612) :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본관은안동(安東)이다. 임숙영(任叔英)이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탄핵하다가 삭관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여 해남으로 귀양을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석주집』이 있다.
1) 왜란 당시의상황과 항전 의지
신지제 선생이 예안 현감 시절에 지은 병중에 두서없이 진술하다[病中漫述] 시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 백성들의 피폐한 삶과, 왜적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한 모습,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을근심하며 지은 것이다.61)
조선의 운수 왜 이리도 어긋났는지 靑丘氣數何太蹇 청구기수하태건
동쪽 왜구 몰려와 병화가 참혹하네 巨寇東來兵禍酷 거구동래병화혹
해를 넘긴 전쟁에 살기 흉흉하니 經年劒戟殺氣高 경년검극살기고
피로 물든 동해, 시체쌓인 골짜기 血流溟海骨塡谷 혈류명해골전곡
영남에 덮친 재앙 사나운 불길에 氛蔽東南虐焰盛 분폐동남학염성
관가와 민간의 곳간 다 타버렸구나 公蓄私藏付回祿 공축사장부회록
백성은 옛 터전을 잃고 떠돌며 生民流落失舊居 생민류락실구거
노약자 산으로 피해 띳집을 지었네 老穉登山草爲屋 로치등산초위옥
관리가 군량 조달로 곡식 독촉하니 有司調糧簿書急 유사조량부서급
없는 자나 있는 자나 다 갖다 바쳤네 貧人富人傾斗粟 貧인부인경두속
거듭 닥친 기근에 백성들 탄식소리 飢饉荐臻民嗷嗷 기근천진민오오
이 집은 헐벗은 채 떨고 저 집은 곡하네 東家肉寒西家哭 동가육한서가곡
갓난 아이 길 가에 버려져 있어도 宛宛赤子路傍棄 완완적자로방기
경각에 달린 목숨 누가 돌보랴 命在須臾誰顧復 명재수유수고복
굶주려 죽어 길에 널린 시체에 菜顔盈道相繼斃 채안영도상계폐
까마귀와 들개들 물어뜯고 있네 烏鳶集啄狗犬簇 오연집탁구견족
습한 기운에 역병이 크게 도니 瘴氣流行癘疫熾 장기류행려역치
남은 백성마저 날마다 죽어가네 餘民死亡日相續 여민사망일상속
작년 열 집이던 것이 지금 두어 집 남아 前年十室今數家 전년십실금수가
고아와 과부와 외로운 노인뿐이네 子孤妻寡老者獨 자고처과로자독
방백이 농사 힘쓰라는 글을 내려도 方伯雖有勸耕書 방백수유권경서
심고 가꾸려는 이 없으니 어찌하리오 其奈莫肯種黍菽 기내막긍종서숙
병든 수령이 근심한들 어찌하랴 病倅憂傷終奈何 병쉬우상종내하
밥상 앞에 두고 차마 먹지 못하겠네 對案不敢喫公餗 대안부감끽공속
신지제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영남 지역의 방어에힘썼는데, 이 시기에 친형 신지효(申之孝)와 동향의 스승인 김성일(金誠一),의병장이자 친우(親友)였던 김해(金垓)의 죽음을 겪었다. 이때김해를 애도하는 만시를 20운으로 지었다.
고관은 목가를 두려워하고 達官怕木稼 달관파목가
철인은 용사의 해를 꺼린다지 哲士忌龍蛇 철사기룡사
얼마 전 학봉 선생을 애도했는데 曾悼鶴峯逝 증도학봉서
그대 또 죽었으니 어찌하랴 又如達遠何 우여달원하
…(중략)…
불공대천의 원수에 분노하고 憤讐天共戴 분수천공대
의병 일으켜 자주 격문 돌렸네 鳴義檄頻過 명의격빈과
임금 위한 충심은 간절하였으나 捧日心徒切 봉일심도절
바다 가득 메운 적들을 어찌하랴 塡溟勢則那 전명세칙나
잠시 강가에서 같은 꿈을 꾸었는데 乍同灘上夢 사동탄상몽
곧 바닷가에 나가 있느라 멀어졌네 還阻海濱珂 환조해빈가
얼마 전 부인을 잃었다고 했는데 卽說遭盆歎 즉설조분탄
갑자기 그대 상여온다고 들었네62) 驚聞返柳車 경문반류차
떠도는 말 처음에 안 믿었는데 行言初不信 행언초부신
마침내 부고가 오고 말았네 凶訃竟非訛 흉부경비와
어찌하여 나라가 쇠퇴하는지 爭奈邦家瘁 쟁내방가췌
친구에게 통한이 일게 하네 徒貽舊識嗟 도이구식차
집안에 아들은 아직 어리고 庭孤年未長 정고년미장
어버이는 머리가 다 백발이라 堂老髮皆皤 당로발개파
천지사이에 슬픔이 끝이 없고 俯仰悲無盡 부앙비무진
저승과 이승으로 갈라졌네 幽明路已差 유명로이차
그대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는데 音容都寂寞 음용도적막
이 세상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네 人世獨婆娑 인세독파사
한없는 슬픔에 통곡하자니 慟哭無窮意 통곡무궁의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리네 茫茫淚漲河 망망루창하
시의 첫 구절에서 목가(木稼)는 나무에 물방울이 얼어붙어 기묘한 형태를 이룬 것으로, 위인의 죽음을예고하는 뜻으로 쓰인다. 또 용사(龍蛇)에 해당하는 진년(辰年)과사년(巳年)은 현인에게 불행이 닥치는 흉년으로 일컬어지는데, 전란이 일어난 해가 임진년(壬辰年)이며그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해(金垓)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세상을 떠난 해가 계사년(癸巳年)이라는것을 나타낸다.
신지제 선생은 예안 현감으로 있을 때, 외가 종형제 항렬의 누이 장씨가 곤궁에 처한 것을 애처롭게 여겨서 김춘룡(金春龍)63)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느라 시를 지어 보냈다.
즉, 누이 장씨를위하여 4운시를 지어 김춘룡 원서 형에게 주고 중서 아우에게 보이다 [爲張氏妹賦四韻呈于金元瑞兄[春龍]示仲瑞弟]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1수이다. 시는 다음과같다.
불쌍하게 떠돌며 살던 장씨 누이 瑣尾流離張氏妹 쇄미류리장씨매
호해에서 잠시 만났구나 相逢湖海暫時人 상봉호해잠시인
어려운 시기에 다들 외면하니 畏途顔面元多厚 외도안면원다후
타향에서는 친한 인척 더욱 적네 異地婚姻更少親 이지혼인경소친
곤궁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으랴 不爲困窮寧有此 부위곤궁녕유차
다른 형제가 있다지만 누구를 의지하겠나 謂他兄弟欲誰因 위타형제욕수인
구덩이에 쓰러져도 내 구제할 수 없으니 將塡丘壑吾難救 장전구학오난구
지하의 조상 야단친 지 오래됐으리 地下先靈久已嗔 지하선령구이진
장씨는 5∼6년전에 남편을 잃고 홀로 지냈는데 지금 병란을 만나 생업을 잃었다. 또 인척들에게 자주 속아서 편히 지낼수 없었으므로 어렵게 살던 집을 떠나 월성을 떠돌다가 김춘룡의 집에 더부살이를 했으나 형편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신지제는 고령의 부모를 모시고 죽은 큰형의 식구들을 돌봐야 해서 장씨를 보살필 형편이 못되었으므로,유복한 김춘룡에게 장씨를 특별히 부탁한 것이다.64)
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강화(講和)를 시도하자 이에 대한 울분을 아래의 시로 표출하여 설월당 김부륜(金富倫, 1531~1598)에게 전하였다.
하늘을 뒤덮은 요망한 기운 언제 없어지려나 蔽天氛祲幾時淸 폐천분침기시청
삼한 땅에 다섯 해 내내 전쟁이 끝나지 않네 五載三韓不解兵오재삼한부해병
작은 나라에 좋은 대책 없음을 스스로 알지만 褊壤自知無上策편양자지무상책
잃어버린 대국의 위신은 어떻게 회복하려는지 大邦何復損王靈대방하복손왕령
동창 아래서 마침내 남조의 의론 주동하니 東牕竟主南朝議 동창경주남조의
용절 들고 범 아가리로 간 사행길 헛수고였네 龍節徒勞虎口行룡절도로호구행
도망쳐 돌아온 필부의 일 참으로 가소로우니 堪笑逃來匹夫事감소도래필부사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는 임무 가볍지 않구나 四方專對任非輕사방전대임비경
김부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도왔으며, 달아난 봉화 현감을 대행하여 수습에 힘써 특교(特敎)를 통해 봉화 현감이 된 인물이다. 신지제 선생은 조선에서 5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전쟁을 한탄하고, 남송(南宋)의 간신 진회(秦檜)가 금(金)나라와 화의(和議)할 것을 주장한 일을 인용하여 명나라가 조선의 뜻과 다르게 일본과강화를 시도한 것을 비판하였다. 또 명나라가 일본과 강화하는 것을 대국의 위신을 추락 시키는 굴욕적인일로 인식하고, �춘추(春秋)�에서 정(鄭)나라 집정대신정첨(鄭詹)이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서억류되었다가 구차히 목숨만 부지하여 도망쳐 돌아온 고사에 빗대었다.
61) 이하로 본고에서 인용한 원문의 번역은 �오봉선생문집�(한국국학진흥원, 2019)을 참조한 것이다.
62) 얼마……들었네 : 김해의 부인 이씨(李氏)가세상을 떠난 지 1개월 만에, 김해가 뒤이어 진중(陣中)에서 병사한 것을 말한다.
63) 김춘룡(金春龍, 158~1621) : 자는 원서(元瑞), 호는 행파(杏坡), 본관은경주(慶州)이다. 임진왜란이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와 합세하였으며, 울산에서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에 제수되었다. �오봉집� 권5에 신지제가 쓴 만시가 실려 있고, 권7에 제문과 묘지가 실려 있다.
64) 심경호, 전게 해제, 48쪽.
2) 교유시
신지제 선생은 정유재란 때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고수하여왜적을 막았다. 전란이 끝나고 창원 부사로 재직할 때는 손기양과 함께 곽재우의 망우정(忘憂亭)을 방문하여 시를 남기는 등 전란 후에도 교유를 이어나갔다. 아래의 시는 곽재우의 선물에 감사하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낙동에서 금빛 옷 입은 사신이 東洛金衣使 동락김의사
너울너울 날아 바다 모퉁이로 왔네 蹁蹁落海隅 편편락해우
땅에 떨어진 석류 열매가 墮地石榴子 타지석류자
신선 세상에서 날아왔구나 飛來自僊區 비래자선구
둥글게 황금을 싸고 있고 團圓裹黃金 단원과황김
영롱하게 붉은 구슬을 꿰었네 璀璨絡丹珠 최찬락단주
쪼개 보니 바람과 이슬처럼 차가워 試劈風露寒 시벽풍로한
쟁반에 담아내어 늙은이 놀라게 하네 登盤驚老夫 등반경로부
요즈음에 가려움증을 앓고 邇來病風㿔 이래병풍뢰
마음에 심란한 일이 많았는데 心緖多煩紆 심서다번우
한 번 삼키니 상쾌함이 감돌고 一呑新爽廻 일탄신상회
두 번 씹으니 묵은 병이 낫네 再嚼沈痾穌 재작침아소
금세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고 俄覺身骨輕 아각신골경
문득 바람 타고 날고 싶구나 忽欲凌風衢 홀욕릉풍구
멀리 난새와 학을 타고 遠逐鸞鶴驂 원축란학참
동정호 위로 날아가 飛過洞庭湖 비과동정호
발을 씻으며 팔황을 바라보고 濯足望八荒 탁족망팔황
신선의 무리 좇아 노는구나 追遊韓衆徒 추유한중도
늙은 신선이 나를 돌본다면 老僊如顧我 로선여고아
이 길이 응당 외롭지 않으리 此道應不孤 차도응부고
곽재우가 자신의 망우정 아래에 열린 석류를 다섯 개를 보내오자, 이 석류를 황금과 붉은 구슬[丹珠]로표현하여 선물을 진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 외에도 곽재우의 망우정을 주제로 한 시(奉呈忘憂亭僊丈)와 차운한 시(次忘憂堂郭丈韻 , 次郭丈韻 送別子張) 들이 �오봉집�에 다수 실려 있어 서로 돈독한 교유가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신지제 선생은 퇴계학파의 김부륜과도 많은 시를 나누었다. 아래는 김부륜이 술을 들고 찾아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소매에서 시 몇 폭을 꺼내 보여주자 이에 대하여 화답한시이다.
낮은 벼슬 전전하다가 자주 몸져눕고 薄宦支離臥病頻
전란과 공문서 처리로 정신이 없구나 軍州簿牒損精神
때로 고을 노인 따라 모임에 참석하니 時從邑老攀佳會
오상65)을 마련했던고인에게 부끄럽네 却向遨牀愧古人
높은 산 우러르듯 자나 깨나 그리웠는데 景仰高山夢寐頻
바위틈 매화와 시내의 달은 옛 기풍일세 巖梅溪月舊風神
후생이 배울 만한 곳이 어찌 없으리오 後生私淑寧無地
선보에서 스승을 따른 이 아직 있다오 單父從師尙有人
김부륜이 당(唐)나라 종리권(鍾離權)의장안의 술집 벽 절구 3수에 쓰다[題長安酒肆壁三絕句] 시에 차운하여 동년 급제자 모임을 기념하는 시를 지어 보여주자, 신지제 선생이 취중에 두 편을 지어 화답한 것이다. 선보(單父)의 수령으로 나갔던 공자(孔子) 제자 복자천(宓子賤)의고사를 인용하여 김부륜을 종유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밖에 찾아와 준 김부륜에게 사례하는 시(謹次雪月丈韻謝枉顧), 가야로 가는 중에 술을
들고 오는 설월당 어른을 만나 모래사장에 앉아 이야기 나누다가술에 취해 절구 한 수 를 읊은 시(將往佳野 路上見雪月丈佩酒而來 坐話沙頭 醉吟一絶), 기타 차운시(敬次雪月丈留韻, 次杜團練宣州韻奉呈雪月丈) 등에서 사적으로 그와 왕래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신지제 선생은 자신보다 앞서 창원 부사를 지낸 손기양(孫起陽, 159∼1617)을 종유했다. 손기양의 자는 경징(景徵), 호는오한(聱漢) 또는 송간(松磵), 본관은 밀양이다.
15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울주 판관・창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밀양의 칠탄서원(七灘書院)에 제향되었다. 훗날 이익李瀷이 작성한 창원 부사 오한 손공의 행장[昌原府使聱漢孫公行狀] 에 따르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월간(月澗) 이전(李㙉) 및 그 아우 창석(蒼石) 이준(李埈), 부용(芙蓉) 성안의(成安義),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검간(黔磵) 조정(趙靖),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등과함께 신지제 선생도 손기양을 따랐다고 한다.66) 아래는 손기양이 이숙평67)에게준 시에 차운하여 경징을 전송한 시이다.
아마 무성한 숲속 교외의 집 遙想郊居著茂林
시내와 산에 짙푸른 안개 자욱하리 霧灘煙嶂綠沈沈
젊어서는 동해에 낚싯대 드리웠고 初年東海持竿手
늙어서 남산에서 콩 심을 마음 있었네68) 晩節南山種豆心
강가 언덕에서 지팡이 짚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沙岸投筇隨好景
들판 정자에서 자리 바꾸어 시원한 그늘 찾네 野亭移板趁淸陰
못난 이 몸은 괴롭게 헛된 명예에 매여 龍鍾苦被浮名繫
성성한 백발로 동루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네 坐嘯東樓雪半簪
오한 노인이 편지에서 좋은 일 전해 오니 聱叟書來好事傳
공명정 아래에다 작은 배 띄웠네 空明亭下泛蘭船
오리 타고 함께 한 이는 영남루69) 주인이고 乘鳧相逐嶺南宰
학 타고 들른 곳은 강가의 신선이라네 駕鶴仍過江上僊
고운 기녀는 줄지어 옥고리처럼 둘러 있고 紅袖引行環似玉
술동이 벌여 놓고 샘물처럼 퍼 마시네 綠罇圍坐酌如泉
산수에서 한껏 취해 마음껏 즐기고 구경하니 湖山一醉狂歡賞
천년의 좋은 풍류란 바로 이 자리를 말하리 千載風流說此筵
신지제 선생이 창원 부사로 재직할 때 지었던 시를 모은 회산잡영상・중・하를보면, 박서구(朴瑞龜,1546∼1623)와 수창한 시가 가장 많다. 창원 교수였기 때문에 선생은 그를 ‘광문(廣文)’이라고 불렀다. 저술로 악견시집(嶽堅詩集)이있으나 시는 그리 많이 수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높은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창원에서 선생의문학적 벗이 되었던 인물로, 선생의 시에 박서구의 시적 재능을 인정한 대목이 많이 보인다.
광문 젊은 나이에 명성이 빛나더니 廣文華譽壯年時
저 멀리 서울로 달려가려고 하네 欲向天衢逞遠馳
만 마리 말을 다 제치고 앞길을 열었고 萬馬空羣開道路
천 명의 군사 쓸어버리고 깃발을 걷었네 千人掃陣捲㫌旗
죽엽 항아리 새로 빚은 술을 기울이고 迷罇竹葉傾新釀
금옥 소리처럼 아름다운 옛 시를 읊조리네 擲地金聲誦舊詩
재주와 힘이 아직도 강건하니 才力如今尙強健
앞길의 운수가 기구하지 않으리라 未應前路命偏奇
박서구가 육유(陸游)의 시에 차운하자, 여기에 다시 차운해서 지어 준 시이다. 이 시를 지은 시기는 박서구가 서울로 과시(科試)를 보러 가던 참이었다고 하는데, 시의 구절 구절마다 그의 재주를높이 평가하고 있다.
눈 내리는 하늘에 햇빛 희미하게 빛나니 雪天殘日少光輝
추위 견뎌낸 뜰의 매화 아직 움츠리고 있네 寒勒庭梅未解圍
팽택 현령은 술 한 잔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彭澤眞思傾秫醥
초나라 객은 마의에 익숙한 것 공연히 자랑하네70) 楚人虛詑慣麻衣
작은 고장에서 학문 닦지 않음을 감히 논하랴 敢論百里絃歌斷
변방에서 급보 들리지 않는 것만 조금 기쁘다네 稍喜三邊羽檄稀
나라의 귀한 시인을 외지에서 만났으니 國寶詩流逢塞上
백발 늙은이 그대 따라 취해 함께 돌아가리 從君白首醉同歸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次廣文] 중 3번째 수
흰머리 노인 세상에서 누가 받아주리 皓首人寰爲孰容
청년의 기상 씩씩하여 용도 잡을 만했지71)靑年意氣壯屠龍
붕새 삼천리 박차고가서72) 도로 날개를 드리웠지만 三千摶去還垂翼
운몽 여덟 아홉 개 삼키고도 속에 체함이 없네73)八九呑來不滯胷
사조가 즐기던 경치 제일의 명승지이고74) 謝眺風煙元勝地
정건이 지은 시는 또 문장의 으뜸일세75) 鄭虔文字更詞宗
장성이라 항복의 깃발 세우겠다고 말하기 부끄러워 長城慚告降旗竪
앉아서 작은 부대를 써서 웃으면서 공격하리 坐用偏師帶笑攻
65) 오상(遨牀) : 고을 수령의 들놀이를 뜻한다. 중국 성도(成都) 태수가 매년 4월 19일에 두보(杜甫)의초당(草堂)인 창랑정(滄浪亭)에 나와서 놀고 잔치할 때면 사람들이 너른 뜰에 의자를 늘어놓고 관람하였는데,이 의자를 ‘오상’이라고 하였다.(�老學庵筆記� 佩文韻府)
66) 심경호, 전게 해제, 39쪽.
67) 이숙평(李叔平) : 이준(李埈, 1560~1635)의 자이다.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정자ㆍ예조 정랑ㆍ단양 군수ㆍ사간ㆍ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창석집�이 있다.
68) 젊어서는……마음 있었네 : 손기양의 정치적 역량과 처세를 칭송한 것으로, 젊어서 백성들의삶을 넉넉하게 하는 데에 힘쓰고 늙어서 전원으로 물러날 생각을 하였다는 말이다. �장자� 외물(外物) 에 “임 공자(任公子)가 큰낚시에다 소 오십 마리를 미끼로 하여 큰 고기 한 마리를 잡아 그 고기를 포로 만들어 주어, 절강의동쪽과 창오(蒼梧)의 북쪽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라고 한 내용과 도연명의 귀전원거(田園居) 에 은거의 즐거움을 표현하면서 “남산 아래에 콩 심으니[種豆南山下]”라고 한 내용을 인용하였다.
69) 영남루(嶺南樓) : 1365년에 밀양 군수 김주(金湊)가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각으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김주가중수한 이후에 전쟁이나 실화로 훼손되어 수차례 중건하는 과정을 거치고, 지금 건물은 1844년에 밀양 부사 이인재(李寅在)가새로 지은 것이다. 현재 밀양시 내일동(內一洞)에 있다.
70) 팽택……자랑하네 : 전원에서 술을 벗하고 외지에서 은자처럼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빗댄 말이다.팽택(彭澤) 현령은 현령의 인끈을 풀고 고향으로돌아간 진(晉)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키며, 초나라 객은 초나라에서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내다가 소인배의 참소로 쫓겨난 굴원(屈原)을 말한다.
71) 용도 잡을 만했지 : 원문의 ‘도룡(屠龍)’ 특별한재주를 뜻한다. �장자� 열어구(列禦寇) 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익(支離益)에게 용 잡는 기술을 배우느라 천금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면서 3년만에 기술을 완전히 터득했으나 써먹을 곳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72) 붕새……가서 : 큰 뜻을 펼치는 모습을 나타낸 말로, �장자� 소요유(逍遙遊) 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때는 물을 3천 리나 박차고 회오리바람을타고 9만 리나 날아오른 뒤에야 6개월을 가서야 쉰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는구절을 인용하였다.
73) 운몽(雲夢)……없네 : 포부가 웅대함을 나타낸 말이다. 한나라의 사마상여(馬相如)가상림부(上林賦) 에서 “초나라에는 일곱 개의 못이 있다. 하나는 운몽택으로 사방 9백 리인데, 운몽택처럼 큰 호수를 여덟아홉 개를 삼켜도 가슴속에 조금도 막힘이 없다.[楚有七澤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한 데서 나온 말이다.(�史記� 卷17 司馬相如列傳)
74) 사조(謝眺)가……명승지이고 : 사조의자는 현휘(玄晖), 남조 제(齊)나라의 시인이다. 종산(鍾山)의 별장, 경정산(敬亭山), 삼산(三山) 등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었다고 한다.
75) 정건(鄭虔)이……으뜸일세 : ‘광문’에 착안하여 박서구를 광문관 박사를 지낸 정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정건은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문인으로 현종이 그를 총애하여 광문관(廣文館)을 설치하고 박사(博士)로 임명했으며 두보(杜甫) 또한정건과 교유하면서 남긴 시가 있다.(�新唐書� 卷202 文藝列傳ㆍ鄭虔)
3) 구미리 정착 후의 시
신지제 선생은 1618년창원 부사에서 체직되어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정착하였다. 아래의 구미 별장에 터를 잡고 살며(龜庄卜居)라는 시는 선생의 한가로운 마음을 잘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새로 널찍하게 터 잡은 구미 별장 新卜龜庄一畒寬
앞에는 푸른 물, 뒤에는푸른 산 平臨碧澗背蒼巒
열심히 농사지어 우선 생계를 이어가고 力耕且足供飢飽
작은 집 지어 그나마 추위와 더위 견디네 小搆聊堪度暑寒
대와 매화 옮겨 심어 오래된 정분 유지하고 移竹兼梅存宿契
갈매기와 해오라기 불러 즐겁게 함께 지내네 喚鷗和鷺託同歡
지금 늙은이라 아무 할 일 없으니 從今老矣無餘事
인간사 험난하다는 말 믿을 게 없네 不信人間道路難
석주 권필의 ‘임거십오영’ 시에 차운하다[次權石洲(韠)林居十五詠] 는 15편의칠언절구 연작이다. 이른 봄의 풍광. 늦봄의 풍광, 초여름의 풍광, 가을 소리, 초겨울의풍광, 가뭄 걱정, 내리는 비를 기뻐함, 사물을 보면서 일어나는 감회, 할일 없이 소요함, 사물 관찰의 방식, 시냇가 정자,홀로 즐기는 생활, 마음 살피는 방도, 성품을보존하고 수양하는 태도, 가을 해바라기 등을 차례로 읊었다. 아래는 15편 중에 일부를 추린 것이다.76)
얼어붙은 물 녹아 시냇물 맑고 流盡寒澌澗水淸
따뜻한 봄에 새가 정답게 우네 禽聲初暖漸和鳴
봄바람 부는 중에 산비 뜰에 내리니 一庭山雨東風裏
땅 가득 파릇파릇 새싹이 자라네 滿地微微細草生
【위 시는 이른 봄을 읊은 것이다.】
남쪽 이랑에 단비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니 望望南阡穀雨來
거북등처럼 갈라진 땅에 먼지가 자욱하네 田疇龜坼漲塵埃
옛날 비 뿌리던 사람 어디에 있는지 舊時行雨人何處
신총은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네 萬里神驄去不廻
【위 시는 가뭄을 걱정한 것이다.】
아득히 먼 구만리 하늘에 茫茫九萬老天長
대궐에서 향불 하나 피웠으리 禁裏應燒一炷香
사방에서 환호하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驚起四鄰爭拍手
새벽에 강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네 曉來江水看汪汪
【위 시는 비가 내린 것을 기뻐한 것이다.】
한가한 중에 사물을 살피니 은자 감동시키고 閒中觀物感幽人
동풍이 삼라만상 변화시켜 날마다 새롭네 百變東風日日新
끊임없는 천기 쉬지 않고 돌고 도니 衮衮天機流不息
푸른 복숭아 붉은 살구 절로 봄 다투네 碧桃紅杏自爭春
【위 시는 사물을 보고 감회가 이는 것을 읊은 것이다.】
단전丹田과 적실赤室은 본래 비어 있으니 丹田赤室本來空
지극한 이치 빈 곳 통해 가는 곳마다 합하네 至理虛通逐處融
주인옹을 불러 늘 여기에 있게 해야 하니7) 要喚主翁常在此
잃은 닭과 개 찾는 일78)을맡아야 하네 管求雞犬放收中
【위 시는 마음을 살피는 것을 읊은 것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잊어서는 안 되니79) 人間有事未應忘
성품을 보존해야 하는 것80)의미가 깊네 只要存存一味長
좋은 바탕을 한없이 너그럽게 가지면 無限寬閒好田地
눈앞의 사물마다 천향天香 아님이 없으리 眼前無物不天香
【위 시는 성품을 보존하고 수양하는 것을 읊은 것이다.】
구미리에 물러나 지내면서,전란을 겪고 폐허가 된 수도가 다시 중흥하고 새 궁궐이 지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보(杜甫)의 시에 차운하여 감회를 나타내었다.
전쟁의 승패 한 판의 바둑과 같으니 勝敗兵家一局棊
그때의 전쟁에 백성들이 슬퍼하였네 那時荊棘國人悲
우환을 겪은 전날에 노래하며 기대하였고 謳歌舊屬殷憂際
중흥하는 때에 새로 대궐을 바라보네 象魏新瞻再造時
하늘 끝 높이 구름 밖으로 누가 솟아있고 雲外瓊樓天極迥
대궐 곁의 금장에 이슬이 늦게 맺히네 日邊金掌露華遲
외로운 신하 바다에서 늙어가니 孤臣白髮滄洲暮
꽃가지를 꺾으면서 한없이 사모하네 采采芳花無限思
새 궁궐이 옛 규모보다 장엄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바라보고축하드리기를 원하였지만 병환으로 차질이 생겨 초야로 물러나 사는 처지에 그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하였다.
선생은 구미리에 물러나 지내면서 명나라가 몰락하고 후금이흥기하자 이에 우려를 나타낸 시도 지었다. 이 시는 듣자니 왕 참정81)이수군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군사와 함께 의주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때에 오랑캐가 요동을 함락한 뒤 요동과 계주에 웅거하고 있어 왕 참정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가 오랑캐 사신을목을 베고 오랑캐의 후방을 요격하기를 도모하여 마치 관군과 양편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취하는 듯이 하였다고 한다.그 뜻이 장대하고 원대하니 중국에 큰 인물이 있구나. 이 계획이 만약 성공하면 중국을 위해막중한 사안을 처리한 것이 된다. 중국을 위해서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에 이익과 피해가어떠할지를 모르겠으니 정세로 보아 따라야 할지 말지를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수롭게여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왕공의 조치를 옳게 여기면서도 조정의 계책은 결단하기 어려운 것을 걱정하여우연히 그 일을 읊다
[聞王參政 領舟師二萬到鴨綠江 欲同本國守義州 時奴賊陷遼 雄據遼薊 參政以孤軍深入斬奴使 謀爲要擊奴後若爲官軍猗角之勢 其志壯且遠 上國有人矣 此計如就 其爲上國料事重矣 第未知本國利害如何 亦未知事勢之可從與否 竊思之 誠非放過之地 於是韙王公之擧措 而慮廟謨之難斷偶詠其事] 라는 긴 제목으로 되어 있다.
[문왕참정 령주사이만도압록강 욕동본국수의주 시노적함료 웅거료계 참정이고군심입참노사 모위요격노후약위관군의각지세 기지장차원 상국유인의 차계여취 기위상국료사중의 제미지본국리해여하 역미지사세지가종여부 절사지 성비방과지지 어시위왕공지거조 이려묘모지난단우영기사] 라는 긴 제목으로 되어 있다.
왕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王公未知何狀人
해외에 전해진 명성 어찌 그리 장한고 名傳海外何其壯
백성들이 모두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東人拭眼盡回頭
하늘에서 신선 내려왔다고 들은 듯하네 如聞羽人來天上
양공과 원공이 서로 연이어 패배하여82) 楊公袁公相繼敗
요동 한쪽 구석이 전란으로 휩싸였네 遼天一隅煙塵漲
이리와 범이 온 땅에서 우레처럼 우니 豺虎滿地聲如雷
평평한 산동 지방에 요새로 삼을 곳 없네 壇漫山東無堡障
적은 군사로 죽음 무릅쓰고 깊이 들어가니 孤軍深入出萬死
압록강 파도 위에 청작 배가 떠가네 鴨綠波上靑雀舫
격문을 날려 보내 조선을 진작시키니 羽書飛來聳下國
백만 오랑캐 군사 간담이 서늘해지네 百萬胡兵膽已喪
조정의 계책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나 不知廟筭出何塲
매우 어려운 일이라 힘써 강구해야 하리 事有至難宜勉強
당시의 국사를 누구에게 물으시려나 此時謀國問何人
훌륭한 재상에 의지해야 할 테인데 安危成敗憑賢相
시의 서문을 별도로 쓰는 대신 제목을 통해 명나라와 후금,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밝히고 시의 내용과 창작 경위를 설명한 점이 이채롭다.명나라는 후금과의 전쟁에서 불리 해지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를 사대하던 조선으로서는이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으나, 자칫 강성해지는 후금에 견제를 당할 우려와 군사적인 소모를 감수해야 하므로국익을 위해서 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신지제 선생은 고향 구미리에 물러나서도 나라에대한 걱정에 위 시를 지어 답답한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구미리에 정착한 이후에 지은 구당만록(龜堂漫錄) 에는 살고 있는 향촌 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시들이 여럿보인다. 아래는 외가에 옛날부터 있던 연못이 황폐한 지 여러 해가 되어 늘 안타까웠는데 종손 박준이우물을 파서 보수하고 못가에 초당을 지었다. 한밤중에 비가 개고 달이 떠서 맑은 물가에 서서 보니 매우시원하여 잠을 자지 않고 거닐다가 닭이 세 번 울고서야 그쳤다. 나는 박군이 옛 집을 보수하여 내가바라보고 감개하는 곳을 황폐하지 않게 한 것에 대해 매우 고맙게 여겼다. 이어서 여러 시에 차운하여내가 감개한 심정을 기술하여 박군이 더욱더 힘쓰도록 하다
[外家舊有蓮池 荒廢累年 每惜之 宗孫朴俊疏鑿重修 搆草堂于池上 時夜將半 雨晴月出 俯臨鏡面甚覺淸爽 逍遙不寐 至于雞三鳴乃已 余甚幸朴君保守舊宅 使吾瞻感之地 不就荒蕪也 仍次諸作 述吾感愴之情 使朴君更加勉強焉] 라는 제목의 시이다.
[외가구유련지 황폐루년 매석지 종손박준소착중수 구초당우지상 시야장반 우청월출 부림경면심각청상 소요부매 지우계삼명내이 여심행박군보수구댁 사오첨감지지 부취황무야 잉차제작 술오감창지정 사박군경가면강언] 라는 제목의 시이다.
계단 아래 네모난 연못 맑고 깊으니 階下方池淸且深
갠 하늘의 밝은 달이 물결을 비추네 霽天明月印波心
자손들 모인 옛 집에 먼저 들어가니 先入舊宅諸孫會
사물마다 느끼는 감회 고금이 다르네 物物關情異古今
2[二]
못과 대를 다시 넓히니 물색이 새로운데 重拓池臺物色新
맑은 밤에 읽어나 앉아 남몰래 애태우네 淸宵起坐暗傷神
지난 오십년 전의 일을 헤아려보니 筭來五十年前事
그 당시 아이가 벌써 노인 되었구려 當日兒郞已老人
고향에 머물며 선생의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담한 필치로그려낸 시 중의 하나로, 외가의 박군이 초당을 지어준 일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지어 전해준 작품이다.
신지제 선생은 신유년(1621)7월 28일에 도적떼에게 습격을 당하였다. 이때화재로 인해 집이 반이나 타고 서책 오백 권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시종도 여섯 명이나 화상을 입었는데, 이사실을 아래와 같이 시로 표현하였다.
하녀가 다급해하며 방으로 들어와서는 下女愴忙叫入閽
도적떼가 야밤에 담장을 넘었다고 하네 已聞羣盜夜踰垣
처음에 잠에서 깨니 약간의 취기가 도는데 初廻枕上微酣起
모두들 곤히 잠든 상황에 손을 쓸 수 없었네 無奈鋒前衆睡昏
앞 다투어 상처 점거하여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爭點瘢瘡披亂血
다친 사람을 부축하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네 走攜呻痛慰驚魂
다행히 죽은 사람 없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幸無殤殀餘何問
도적 잡느라 분주하니 두렵고 원통하네 逮捕紛紜恐或冤
황지의 못된젊은이83)도 선량한 백성이니 潢池惡少是良民
하늘이 준 본성은 본래 부족하지 않았네 天賦初來本不貧
다만 곤궁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只爲困窮方有此
우선 편안히 다독여서 친애해야 하리라 且應安戢轉須親
서적은 천여 권이나 흩어지고 없어지고 詩書散落將千卷
집은 기울어지고 무너져 잿더미가 되었네 棟宇傾堆又一塵
처자식에게 분부하노니 한스럽게 여기지 마라 分付妻孥且無恨
선생은 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도적떼에게 피해를 당하고도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또한 도적떼 또한 하늘이 내린 백성이었으나 곤궁하여 난리를일으켰으므로 이들을 다독여 주어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 궁핍한 백성에 대한 연민과 이들을 은덕으로포용하려 하는 돈후한 성정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신지제 선생의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아래의 시를 통해 엿볼수 있다.
고작 30리 떨어졌다고녀석 괴로워하는데 纔三十里渠猶苦
이른 나이에 어머니 여읜 우리는 어떠하였으랴 早歲幽明我若何
슬하의 우리 오남매가 너무나도 슬퍼했으니 膝下哀哀五男女
그 당시 얼마나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을까 異時何限惱先爺
선생의 가족애와 인간미가 구절마다 묻어나는 작품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가 있는 며느리를 그리워하는 손자를 보고서 본인이 느낀 안타까움이 발단이 되어 지은 시이다. 옛날 신지제 선생과 그 형제분들은 1569년에 모친 박씨를 여의었는데, 당시 선생의 큰형은 9살, 선생은 8살, 누이는 5살, 아우는 4살, 막내 여동생은태어난 지 10개월이었다.
그때 너무나도 슬퍼했던 자신들의 모습이 선친을 더욱 애통하게만들었을 것이라는 선생의 생각은 선친에 대한 효성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76) 심경호, 전게 해제, 46쪽.
77) 주인옹(主人翁)을……하니 : 당(唐)나라 때 서암(瑞巖)이란 승려가 매일 “주인옹아! 깨어있느냐?”라고 자문하고 “깨어 있노라.”라고 자답한 것을 말한다. 이는 마음이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도록 시시각각(時時刻刻) 일깨우는 지경(持敬)의방법이다.(『心經 卷1』)
78) 잃은……일 : 풀어졌던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 「고자상(告子上)」에 “닭이나개가 도망치면 사람들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이 도망치면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아니다. 놓친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人有鷄犬放 則知求之有放心而不知求 學文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고한 데서 온 말이다.
79) 사람이……되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나오는 “반드시 하는 일이 있어야 하지만 결과를 미리기약하지 말아서,마음에 잊지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80) 성품을……것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본성을 보존하고 보존하는 것이 도의로 들어가는 문이다.[成性存存道義之門]”라고 한 것을 말한다.
81) 왕참정(王參政) : 왕사기(王士琦, 151~1618)로 참정은 산동포정사사 우참정(山東布政使司右參政)을 말한다. 자는 규숙(圭叔), 호는 풍서(豐嶼)이다. 절강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사람이다. 1583년에 진사가 되어, 문장에 능하다 하여 처음에 서길사(庶吉士)로 뽑혔다. 1598년 6월에 흠차 어왜서로감군(欽差禦倭西路監軍) 산동포정사사 우참정(山東布政使司右參政)으로 조선에 나와 유정(劉綎)과진린(陳璘) 모두를 지휘했다.
82) 양공(楊公)과……패배하여 : 1616년만주에서 후금(後金)을 건국한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변경을자주 침략하자 명나라는 날로 강대해지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양호(楊鎬)가 이끄는 10만명의 군대가 진출하여 조ㆍ명 연합군이 앞뒤에서 일제히 적을 협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작전에 차질이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하였다.
83) 황지의 못된 젊은이 : 생활고에시달리고 수령들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을 말한다. 한(漢)나라 공수(龔遂)가 선제(宣帝)의 하문(下問)을 받고는 “이번의반란은 기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관리들이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폐하의 백성들이 무기를 슬쩍 훔쳐서 황지에서 한번 장난친 것일 뿐입니다.[其民困于飢寒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盜弄陛下之兵于潢池中耳]”라고 한 데서온 말이다.(�漢書� 「循吏傳ㆍ龔遂」)
3. 30년간 (28세~57세) 관료 생활
1) 선행 사례(善行事例)
오봉은 28세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문과 장원이라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문과장원은 9품직이나 8품직이 아닌 7품직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특혜가 수반되었다.
이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관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다하였다. 특히 예안 현감 시절에는 임진왜란을 당해 수령으로서의 치안 유지에 진력하면서 7년간의 난리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은 목민관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봉은 28세때인 1589년 4월에 이단(異端)에 대해서 논한 대책문으로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5월에 무공랑(務功郎, 정7품)의품계에 사섬시 직장(贍寺直長, 종7품) 이라는 행직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591년 봄에 내직인 사헌부 감찰(정6품)에 임명되었지만 내직보다는 외직인 예안 현감(종6품)을 자청하였다.
① 예안 현감 때 관군과 의병으로 일본군을 막으면서 전장이수습된 이후 창고 문을 열어 굶주린 백성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며, 다른 지역 주민에게도 차별을 두지않았다.
② 1591년 1월에 봉직랑(奉直郎)에 부임하자 강도 10여명이 체포되어 예안현의감옥에 수감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절도사에게 맡겼다. 그러자강도들이 모두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이때도 선생이 풀어 주라고 명하면서 “너희들은 본래 양민인데 의식(衣食)이곤궁해서 스스로 불의에 빠졌기 때문에 지금 내가 너희들을 살려주니 너희들은 잘못을 고쳐 스스로 지난 허물을 뉘우치고 새 길을 가라.”라고 타일러 죄를 뉘우치게 하였다.
이를 통해 비록 죄를 지었지만 백성의 편에 서서 해결하도록힘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니 도적들은 모두 감격하여 울면서 백배 사죄하였고, 귀농을 원하는 자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일이 있은뒤로는 현의 경내에는 경계하라고 미리 알릴 일이 없게 되었다. 선생은 관이 먼저 백성이 원하는 것이무엇인지 알아서 해결하고 믿음을 주면, 백성의 교화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③ 오봉은 1601년 8월 전주부 판관(全州府判官)에제수되었다. 오봉은 번다한 일을 마음을 다해 처결하여 모두 이치에 맞게 하였다. 또한 강한 이를 억누르고 약한 이를 도와서 위엄과 은혜가 넘쳐났다. 이에고을 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워 뜻을 기렸다.
④ 1602년전라도 암행어사에 차출되어서는 관리의 폐단을 없애고 백성의 고통을 보듬으며 실적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고 명백하여 권세가 있다 해서 봐주는 일이없으니 고을 수령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⑤ 1613년(52세) 8월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한양집으로 권세가가 청탁하며이르기를 “제가 데리고 있는 하인이 송사하러 올 것입니다. 저를봐서 잘 처리해 주길 바랍니다.”하였다. 이에 “공정한 마음으로 밝게 들으면 시비는 저절로 분별 됩니다. 부당한방법으로 나에게 청탁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청탁한 이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나가서 끝내송사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⑥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이 합천(陜川)에 있으면서멀리 조정의 권력을 잡고 흔들었지만 오봉은 가까운 근방의 고을 수령으로 있는 여섯 해 동안 한 번도그집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정인홍은 오봉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미워하지 않았다. 어떤이가 말을 지어내어 “고을 수령이 궁궐에 납부할 면포 40필을사사로이 사용하였다.”라고 하며 정인홍에게 알리니 정인홍이 말하기를“나는 그가 행한 정치를 들어왔다. 필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오봉은 이 말을 듣고 향당(鄕黨)에 고을 백성들을 모아 면포 수를 조사하게 하되 물건의 유무만을살피고 말을 지어낸 자가 누구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봉이 체직되어 돌아갈 때에 그 사람이 와서길가에서 전별하고 뒤따라오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⑦ 오봉은 병란 중에 굶어 죽은 신체가 길가에 즐비하자, 마음을 다해 구제하여 날마다 한 말의 곡식을 주며 말하기를 “인정이란많으면 쉽게 써버리게 마련인데 급할 때마다 돕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오봉의 구휼에 힘입은 고을 백성들은 구렁텅이에 뒹구는 일을 면하게 되었다. 원근의유리걸식하던 이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 들었다. 오봉이 말하기를 “모두다 같은 백성이니 차마 피차를 구분하지 못하겠다.”하고는 마침내 아울러 구호하여 목숨을 보전한 이가수 천여 명이었다.
⑧비안 현감(比安縣監)에게 편지를 보내어 장례 비용이 없어 부친의 장례를 제대로치르지 못하는 상주의 선비 칠봉(七峯) 황시간(黃時幹, 158~1642)의 장례를 도와준적이 있었다.84)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지에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린 상주(尙州)에 사는 사인(士人) 황정간은 곧 저의 옛친구입니다. 이제 갈 곳을 잃어 관할구역인 저곡촌(渚谷村)으로 이주했습니다. 5월에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비용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만약 은혜를베풀어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조금 보내 주신다면 어찌 황군(黃君)만감사하겠습니까! 저 또한 친구의 일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윤달 25일에 영구를 만들어 고향에 반장(返葬)할 예정인데 노정이 금당(金堂)을거쳐서 위만(威萬)과 입석(立石) 등지를 지나갈 것입니다. 바라건대 길가에 사는 민가에서 네댓 마리의큰 소를 동원하여 잘 호송하도록 하여 운구가 잘못되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황군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할 것입니다. 무릇 민가의 상사(喪事)도오히려 달려가서 도와야 하는 법인데, 더구나 사대부 집안이 이런 망극한 아픔을 당하였으니 어찌 차마어려운 사정을 보고서도 구휼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⑨ 창원 부사 재직 시1614년 오봉 선생 53세 때에 병란을 겪으면서 학교(서당등)가퇴락하였는데 선생이 봉록을 털어 학교를 짓고 유학을 진작시켰다.
⑩오봉 선생이 관직을 떠날 것을전제로 구미보(1610~1617)를 축조하고 몽리답에 물값[水稅]을 받아 그 일부를 의병의 유가족을 돕는데 지출하였다.
84) 황만기, 전게논문, 194쪽.
2) 주요 관직
(1) 예안 현감(1591.6~1596.2)
예안하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퇴계 이황이다. 조선의 유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인 퇴계의 탄생은 유학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그의 이름은 예안의 핵심이 되어 왔으며,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이다. 예안은 신라시대에는 영주(榮州)에속했고, 고려때는 안동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시대는 다시 독립 현으로서 자리매김을 하다가85) 20세기 초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시 안동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안은퇴계 이황의 고향으로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으나 사족 세력(士族勢力)이 강하며 ‘난치지향(難治之鄕)86)’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선조대(宣祖代) 이래 문고나 수령을 파견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이 한사(寒士)들로 예안 사족 층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예안의 사족들은 공론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예안 내에서도 명망을 갖추고 예안의 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있었기 때문이다.
오봉 선생의 예안 현감 재직 기간은 임진란과 같은 특수 사정을고려할 때 4년 7개월 이라는 재직 기간은 엄청나게 긴 기간이다. 특히 임진년 1592년에 예안 부근의 안동부, 의성현 등의 수령 재임 기간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한 해 동안 여러 명이 교체되었다.
〈예안 현감 신지제〉
1591.2.8. 承議郎 司憲府 監察 제수
1591.6.21. 承議郎行87) 禮安縣監제수
1591.1.8. 奉直郎 行 禮安縣監 제수
1593.1.30. 通德郞 行 禮安縣監 제수
1593.8 通善郞 兼 禮曹正郎 兼 禮安縣監 제수
1594.4.1. 通德郞 行 禮安縣監 兼 春秋館 記事官 제수
1595.7.4. 朝奉大夫 行 禮安縣監 兼 春秋館 記事官 제수
1595.7.20. 朝散大夫 行 禮安縣監 兼 春秋館 記事官 제수
1596.2.6. 朝散大夫 行 世子侍講院 文學 제수
임진란이 일어난 1592년한 해 동안 수령(부사)이 교체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 안동 부사 : 정희적(도주), 신지제(대행), 김륵(중앙에서 파견한 安集使),우복령(1592~1596)
- 문경 현감 : 이희급(1592.1 부임), 신길원(1592.4재임 중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 변흔(1592.9 임시부임)
- 의성 현감 : 선조 임금 재직 기간 중 2명
- 비안 현감 : 선조 임금 재직 기간 중 16명
예안 현감으로서 오봉 선생의 업적은 전체 재직 기간이 임란기간이었고 전란 중 군량미, 무기 조달, 성곽 축성, 명나라 군대 지원, 의병 조직, 지원등으로 일관되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그 해당 항목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85) 오봉의 연보 등 기록에 보면 처음에 예안을 선성(宣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태조 때에 수령 이능선이 의거하여 이 지역을 선성으로 고치고 군(郡)으로승격하였다.
86) 황만기, 임진란기 예안의 유학과학맥 ,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 2018, 435쪽.
87) 행(行) : 행수법(行守法)이라하며 품계와 관직의 불일치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새로 보임된 관직의 품계가 전에 받았던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행(行)’이라 하고 반대로 보임된 관직이 전에 받았던 품계보다 높은 경우‘수(守)’라고 한다.
(2) 창원 부사(1613.8~1618.3)
1613년 8월 선생 나이 52세 때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1610년 3월 충청도 도사에 제수되었고, 5월에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 해 8월 함경도 북평사, 1610년 10월 전라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은 충청도 도사를 그만두고 돌아온 뒤로 광해군 시절에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어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렸지만한번도 부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계모 오부인이 간절하게 재촉하는 통에 마지못해 애써 일어나 관직에부임하였다.
1617년 선생 나이 56세 창원 부사 시절에도적 정대립(鄭大立)을 잡은 일로 인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당시 정대립은 그의 무리 수 천명을 데리고 바다와 섬 등지에출몰하면서 고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창원 일대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매우 골칫거리였다. 이에 오봉이 근포(跟捕, 죄인을정탐하고 수사하여 체포함)하여 정대립 이하 두목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남은 무리까지도 와해시켰다. 이로 인해 바닷가 여러고을이 편안해졌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통정대부의 품계를 알리는 교서를 내렸는데
교서에는 명화작적(明火作賊)이라고 쓰여 있다.
위 교서는 오랫동안 오봉 종가에 보관되어 오다가 최근 의성조문국 박물관에 기탁되었다. 교서 내용의 일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88)생각건대 너는 강함으로 부드러움을구제하고 충분히 배운 뒤에 정사에 임하였다.
예전 사헌부에서 이미 늠름한 기상이 있었는데, 이름난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오봉은 1618년 57세 때에 창원 부사로 재직하면서 쓴 시(詩)를 모아서 �회산잡영(檜山雜詠)�이라 하고 그 서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이번 국역된 문집의 상권에 실려 있다.
선생은 어머니의 뜻에 이끌려 마지못해 창원 고을에 부임하였는데공무 여가에 지루하고 무료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가고픈 생각과 계절의 변화에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이따금 시구로 나타냈다. 이를 1책으로 묶어서 �회산잡영�이라 하고 직접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문을 지었다.89)
88) 황만기, 전게 논문, 192쪽.
89) 이하로 본고에서 인용한 원문의 번역은 �오봉선생문집�(한국국학진흥원, 2019)을 참조한 것이다.
「회산잡영」 서문
계축년(1613)에내가 창원 부사로 부임해 왔다. 창원은 옛날에 의안(義安)과 합포(合浦) 두 현으로있다가 합쳐져서 하나의 부(府)가 되었다. 옛날 원나라 세조 때(1274) 홍다구(洪茶丘)와 김방경(金方慶)에게 조서를 내려 일본을 정벌하게 하면서 합포현에 성개부(省開府)를 설치하였다. 성개부에서 10리쯤떨어진 곳이 바로 절도영(節度營)이다. 지금은 절도영을 옮겨서 설치하여 태수가 임시로 거처하면서 직무를 보았다. 지난번일본 병사들이 우리나라로 쳐들어와서 마산포(馬山浦)에 진지를설치하고 산을 따라 못을 파며 계곡을 끊어 성으로 만들었는데, 성개부의 치소와 서로 바라보는 곳에 있었다. 태수가 남쪽 누각에 앉거나 동관을 올라가면서 볼 때마다 애통해 하였으니 옛날 큰 번진이었다.
병란 이후에 성곽은 무너지고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무지한관리와 어리석은 백성들은 수군과 육군의 진영 사이에 나뉘어져 있고, 둔군(屯軍)과 모군(募軍)의 대역에 섞여 들어갔다. 아! 고을에는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고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가 없으니 매번 공무를 보는 여가에 홀로 앉아서 휘파람을 불고 옛날과 지금을 떠올리며감회에 젖어 슬퍼하였다. 새소리가 귀에 요란하고 인애와 장기가 살에 에이며 생각은 막히고 몸과 마음은적적하였다. 그래서 도성과 고향을 떠난 그리움과 시대를 아파하고 사물을 슬퍼하는 마음이 눈길마다 일어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다. 그사이에 친구와 친척들이 찾아오면 미친 듯이 기뻐하고 놀라자빠져서 술을 마시며회포를 풀고 혹은 흠뻑 취해 즐거워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북을 치고 간간이 피리를 불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여 흡족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하늘 끝에서 우연히 만났으니 인정과 의리가 그러한 것이다. 즐거움이가시고 나면 더욱 쓸쓸함을 느끼고 모였다 헤어지는 것이 일정함이 없고 떠났다 머무르는 것이 기한이 정해져 있어 보내고 맞이하는 한스러움으로 암담한마음이 끝이 없었다. 때때로 푸른 바다에 배를 띄워 섬을 실컷 둘러보다 흥이 다하면 돌아오니 때로는저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밤이 되기도 하여 해 그림자가 기울어 금빛으로 일렁이고 달이 떠오르자 구슬이 잠긴다.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고 파도가 비늘처럼 출렁이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배회하여 배가 가는 대로 두어 깊은 마음을 달래니 황홀하여훌쩍 인간 세상과 뚝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허공을 기대어 바람을 타고서 세상을 버리고 홀로서 있는 마음이 든다.
또 옛 대와 남은 비석에서 고운(孤雲)이 노닐던 자취를 찾고 푸른 시내와 자그마한 집에서 한강(寒岡)의 그윽한 기약을 떠올리며 줄 지은 매화와 대는 양주의 시흥을불러일으키고 한 말 쌀을 위한 타향살이는 평택(彭澤)으로돌아가는 생각으로 울적하게 하니 마음에서 느끼는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아! 탄식하고읊조리는 나머지 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구나. 아!성정이 발하여 시가 되니 시는 본래 억지로 지을 수 없을 뿐이다. 더구나 글 솜씨가 없는내가 글을 짓는 데 더욱 서툰 것을 말해 무엇하랴. 평소에 시를 읊고 짓는 것을 일삼지 않은 적이 없어이번에 부임해 온 뒤로부터 감회가 일어 회포를 풀기도 하고 무료하여 번민함을 달래기도 하며 운에 따라 차운하기도 하고 흥을 부쳐 기록하기도 하여근심과 탄식의 뜻을 부치고 너그럽게 누그러뜨리는 생각을 섞어서 날마다 읊고 번뇌하여 마치 시를 전공하는 사람과 같이 하였다. 스스로 회포를 풀고 마음을 위로하여 마침내 스스로 번뇌를 누그러뜨리려고 한 것이니 어찌 감히 성정이 발로되는것이라는 논의에 함께 끼어서 시인들과 서로 어울리기를 생각 하겠는가. 훗날 혹 자손들이 보게 된다면또한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데 보탬이 되게 하고 너희들이 효성으로 사모하는 데에 자료로 삼게 하려는 것이니,혹여나 기록할 만한 것은 아우와 아들을 시켜 거두어 가서 한 책에 베껴서 후일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라.
(3) 오봉의 관직 제수
이 글의 전반부는 오봉 선조가 관료로서 삶과 업적이 어떠하였는지살펴보는 것이고 후반부는 임진란의 어려운 시기에 일본군과 싸워야 하는 전쟁 또는 군사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봉의 업적 등을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항목에서 예안 현감과 창원 부사로서의 관직은 재직기간이 비교적 장기간 이어서 따로 취급한 것이다. 여기서는오봉의 관직 연보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그 구체적 행적은 후반부에서 필요에 따라 언급하기로 한다.
〈관직 연보〉
1589.05 무공랑(務功郎) 사섬시 직장에 제수
11 선무랑(宣務郎)에 승진하여 조정에 들어감
1590.04 승훈랑(承訓郎)에 제수
05 승의랑(承議郎)에 제수
1591.02 성균관 전적에 승진
사헌부 감찰로 옮김
06 예안 현감에 제수
11 봉직랑(奉直郎)에 제수
1592.04 임진란 일어남
05 오봉 안동 부사 겸직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예천 지역)으로 달려가 적의 길목을 막음
06 오봉의 형(신지효)이 일본군에 의하여 피살
1595.04 춘추관 기사관 겸직
1596.02 조봉대부에 제수
05 임기가 차서 공조 정랑으로 옮김
체찰사 이원익(1547~1634)이 임금에게 오봉에게 예안 현감을 계속 맡길 것을 청원
07 조산대부 겸 춘추관 기주관에 제수
1597.02 사간원 정원에 제수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옮김
03 병으로 사직하고 용양위 부사직에 제수
04 순찰사 종사관에 제수되어 순찰사와 함께 팔공산성을 들어가 지킴
1599.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달려가 곽재우와 동맹,창의록에 이름 수록
1600.02 중훈대부 제수
전라도 도사에 제수
05 아들 홍망(弘望) 출생
1601.01 예조 좌랑에 제수
증직대부에 오르고 예조 정랑에 제수
07 영남 출신 인사들과 장악원(掌樂院)에서 동도회(同道會) 설립(27명)
08 전주 판관 제수
1602.03 사헌부 지평에 제수
통훈대부에 제수되고 체찰사 종사관이 됨
전라도 암행어사 차출
07 실록교정청 낭청에 선발
1603.08 경상도 군무안핵사에 차출
1604.05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지제교에 제수
성상의 명에 따라 이광악(157~1608), 고희(1560~1615)임란공신에 내릴 교서를 지어 올림
1605.05 사헌부 지평에 제수 겸직은 전과 동일, 시강원문학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에 제수
왕명의 의하여 사헌부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작성
1606.04 충무위 부사용에 제수
07 통제사 종사관에 제수
1607.03 강계부 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 병환으로 부임하지 않음
04 아버지 별세(3년간 여막살이)
1609.12 공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광해군의정사가 혼조로워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음
1610.03 충청도사에 제수
05 해임되어 귀향
08 함경도 북평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61.10 전라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613.08 창원 부사에 제수
1614 봉록을털어 병란으로 퇴락한 학교를 재건
1616.01 학교에 유생들을 모아 강학
1617.05 정대립 사건처리로 품계가 올라 통정대부
1618.03 체직되어 고향으로 옴
07 의성 구미에 자리 잡고 살다
1623.02 천동재사(泉洞齋舍)에서 우거
1624.01.8. 별세
1646(인조) 이조 참판 증직
169.08(헌종) 장대서당 오른편에 사당을 세움
1702.4(숙종) 사당을 서원으로 승격
3) 상소문(上疏文)
(1) 승지를 사양하는 소(「辭承旨疏」)
동부승지 신(臣) 신지제는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거듭 조아리고 삼가 주상전하께 백 번 절하며 올립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은작년 5월 중에 우연히 더운 바람을 쐬었다가 그만 오한과 신열이 수시로 반복되어 문을 닫고 자리에 누워지낸 것이 거의 반년이 넘었습니다. 10월초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혼절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말도 제대로못한 채 네댓새를 몸져 누웠다가 탕약을 마시고 침을 맞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습니다. 이때부터 원기가소진되고 정신이 흐릿하며 눈이 침침한가 하면 담이 치받고 기가 뭉치며 어지럽고 초조하니 이런저런 병이 갈수록 고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조만간 죽음이 분명 닥칠 것입니다.
다행히 올해 여름 사이에 잠시 차도가 있는 것 같이 비로소마을을 출입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천만 뜻밖에 성상이 내린 소명을 받고서 놀라움과 두려움에 감격의 눈물이 흘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에 삼가 대궐에 나아가 사은숙배를 하려고 억지로 병든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비안현(比安縣)에이르러 반나절 더위를 겪은 나머지 예전의 증상이 그만 재발하여 현기증이 나고 담이 막히며 온 몸이 오한으로떨리고 정신이 흐리며 눈이 침침한 증상이전보다 더욱 심했습니다. 다리와 무릎에 힘이 없고 허리와 옆구리가 욱신거리는데 억지로 몸을 이끌어 말을타고 보니 곧장 엎어질 것 같았습니다. 이에 멀리 대궐을 향해 바라보노라니 한 발짝은 나아갈 수 없고넋이 빠져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성상께서는 특별히 친지 부모와 같은 인정을 베풀어 신의 직첩을 환수하고 분수에 맞게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소서. 신은 몹시 두렵고 황송한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위의 상소문은 오봉의 6세자손 신체인(申體仁,1731~1812)90)이 관리하고 있던 것인데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고 있다.
선조 오봉 선생은 혼조(昏朝광해군)의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벼슬에 나갈 뜻이 없어서 임명장이 자주 내려왔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해년(1623)에 반정이 일어났을 때 폐주(廢主 광해군)가 왕위를 넘겨준 일을 듣고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얼마 뒤 승지에 임명(인조)되었으나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짤막한 상소를 지어 올리되 병의 증상만 진술하고 새 시대의 정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말이 느긋하고 완곡하여 성급하지도 않았고 노골적이지도 않았다. 당시친구 중에 오직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91)과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92)만이그 뜻을 알았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선조를애도한 만시에 “승정원에 임명하는 왕의 부름을 사양했네.”라고하였고, 경정이 지은 제문에 “왕명 출납에 탁월한 재주를장차 새 조정에서 펼치려 했는데 공(신지제)이 나아가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우리 선조의 출처를 알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인데 행장을 살펴보면 신제로 단서만 들고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예컨대 묘지와 묘갈 등의 문장에서는 애초에 그 대강을 설명하지않았으니 자손과후인들이 선생의 진면목을 알지 못할 까 염려스럽다. 돌아가신 스승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93)이 일찍이 내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오봉(梧峯)이 승지를 사양한 상소문은 바로 군자가 말년에 행하는 큰 절개인데한스럽게도 문집에 실리지 못했다. 들리는 바로는 잃어버렸던 글을 다시 찾았다고 하니 이보다 큰 다행이있겠는가. 서둘러 이어 간행하여 세상에 전해지도록 해야 할듯하네.”라고하였는데 그 말이 늘 귓전에 맴돈다. 이제 못난 후손 체인(體仁)이 주제도 모르고 외람되이 몇 줄의 글을 덧붙여 그 전말을 대략 위와 같이 기술하였다. 훗날 평가하는 사람이 만약 속간을 인하여 이 상소문을 살펴보고서 은미한 뜻을 이해한다면 아마 숙연히 공경심이일어나 그 숨은 덕을 드러내 밝히려고 할 것이다. 6세손 체인이 삼가 기록한다.
90) 신체인(申體仁, 1731~1812) : 자는 자장(子長), 호는 회병(晦屛), 본관은아주이다. 신지제의 6세손으로 의성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출사의 뜻을 버리고 평생 학문에 힘썼다. 봉양면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고,저서로는 �회병집�이 있다.
91) 이호민(李好閔, 153~1634) :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 본관은연안(延安)이다. 1584년대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좌승지, 예조 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92) 이민성(李民宬, 1570~1629) : 자는 관보(寬甫),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597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1601년 승정원 주서ㆍ예조 좌랑ㆍ병조 정랑ㆍ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경정집』ㆍ『조천록(朝天錄)』이 있다.
93) 이상정(李象靖, 171~1781) :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한산(韓山)이다. 735년에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ㆍ예조 좌랑ㆍ연일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대산집�이 있다.
(2) 사헌부 상소문 차자(箚子)94) 초안(선조)
오봉 선생은 “대책을논하라”는 과거시험 답안지부터 글짓기, 논술문을 쓰는 데는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오봉은 과거시험에서 이단(異端)에 대하여 논한 대책문으로 1등에 뽑혔고, 임진공신록을 지을 때 왕명을 받았으며, 선조가 풍수 재해(風水災害) 대책에 대해서 널리 의견을 구할 때 사헌부를 대표하여 상소문(안)을 작성하였다. 또한1593년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낸 의병 문제와 대책에 대한 유명한 글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풍수 재해에 대한 왕명의 대책 의견 상소문(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들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요사이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자리에드러나는 이변 들과 강과 바다와 나무와 돌과 짐승에게 나타나는 변괴는 모두 성상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늘이 우리 백성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경서가 속이는 것이고 사람의 일은 장담할 수없다고 한다면 하늘이 속이는 것입니다.
신들이 만일 자리에 앉아서 봉록을 타먹으려 생각하고 성상의귀를 거스르는 충언을 꺼려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입니다. 신들의 말이 온당하지않으면 마땅히 함부로 말한 죄를 받을 것이니 진실로 전하로부터 직분과 봉록을 헛되이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고 온 나라가 피폐하며 기강이 날로해이해지고 정령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선대 열성조께서 물러 준 은택에 힘입어 유지되고있을 뿐이지, 조정이 잘 다스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정한도리가 모두 사라지고 사사로운 욕심이 마구 난무하여 하나같이 서로 배척하는 것을 일삼고 나랏일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한쪽 사람이 등용될 때마다 한쪽 사람이 물러났으니 지금까지 몇 사람이 등용되고 몇 사람이 물러났습니까. 경박한 신출내기들이 여론을 맡아서 묘당(廟堂)을 뒤흔들고 대성(臺省)을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밝은 성상께서는 가려진 바가 있어서 살피지 못하고 조정의 신료들은 하는 대로내버려 둔 채 금하지 못하며 음양을 고르게 다스려야 할 사람95)이 천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돕는일에 무관심하며 간언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공정하게 시비를 가려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쪽 변경에 근심거리가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북쪽 변방에 다급한 경부가 잇달아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변고는 하늘이 내린 재앙일뿐만이 아닙니다. 이를 변화시켜 만회할 방법은 큰 근본을 세우고 큰 강령을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밖의 세세한 일은 힘쓸 것도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보위에 오른 이후로 격치성정(格致誠正)96)의학문과 참찬위육(參贊位育)97)의 공부를 오래도록 익히고 편안하게 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두사람의 어진 재상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힘을 썼다는 말은 아직듣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전하께서 인재를 쓰고 버릴 즈음에 그저 비위나 맞추며 임금을 섬기는 자를 어질게여기시는지 아니면 사직을 편안하게 안정시키는 이를 어질게 여기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한편은 그 말이달콤하여 받아들이기 쉽고 다른 한편은 그 행동이 직설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인재를 쓰고 버리는것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나라의 존망과 직결되니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임금이 만일 아랫사람에게 사사로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먼저 ‘사사로움[私]’이라는한글자를 없애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사이 벼슬을 내리는 날마다 궁 밖의 사람들이 성인의 조정에서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손가락질 해대고 심지어 하인들까지도 모두 아무는 아무와 인연이 있다느니 아무가 아무에게 빌붙었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임명장이 내려오기도 전에 벌써 누구라는 말이 떠도니, 작은 벼슬도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큰 벼슬도 이런 폐단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일을 바라고 벼슬과 상을 함부로 행사한 탓에불만에 쌓인 민심이 거리마다 가득합니다. 신들은 이러한 조치가 성상의 치세에 큰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왕실이 끼치는 폐단은 지금 세상에서 말하기 어려운 고질이 되어서 경연에서 측근신하들이 이 일을 언급할때면 번번이 견책을 받고 귀양을 갑니다.
아! 대궐문 밖에원성이 들끓는데 재상과 측근 신하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니, 전하께서는 어디에서 왕자의 허물을 듣고서올바른 가르침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시는데 신하들이 곧이곧대로그 허물을 들추어 내려한다면 불경죄에 가깝습니다. 신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왕자가 불의에 빠진것을 보고서도 전하 앞에서는 따르는 척 하다가 집으로 물러나서는 몰래 비방한다면 그것이 임금을공경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고수(瞽瞍)가 사람을 죽이면 법관은 법대로 집행할 뿐이다.98) 법을 집행하는관리는 임금의 아들이라도 처벌하기를 청해도 되는데, 하물며 신하들이 하인을 처벌하길 청하는 경우이겠으며, 하물며 궁방의 종도 아니면서 가칭한 자이겠습니까. 당시 간사한 하인한 둘을 법률에 비추어 처벌하는 것이 나라의 체통에 있어서 무슨 큰 흠이 되기에 조정의 대신과 측근 신하들이 서로 번갈아 청하는데도 받아들여지기는커녕도리어 화를 입는 것입니까. 다만 구실을 붙여주고 악행의 빌미를 제공할 뿐입니다.
여우와 쥐떼가 성곽과 사당에 빌붙어 사는 것처럼 사방에 가득퍼져 남의 노비를 빼앗고 남의 전답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에 배반을 모의하는 하인들이 다투어 귀의하며도리어 제 주인에게 창을 겨누고, 부역에서 도망친 백성들이 다투어 붙좇아서 관아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갖은 방법으로 숨기고 속이기 때문에 고을 수령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관찰사도손쓸 수가 없습니다.
지방 관아의 아전으로서 세금을 맡아 거두는 이가 속임을 당하기도하고 시장의 상인으로서 은전(銀錢)을 가진 이가 도리어 화를입기도 하며, 게다가 마치 관청에서 하는 것처럼 옥사를 제 멋대로 처결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의원성이 차마 들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결코 왕실에서 자세히 알 수 없으니 결국 모든원성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신들은 몹시 애통하게 여깁니다. 더구나성스러운 조정에 경사가 넘쳐 왕족이 번창하게 되면 앞으로 이런 잘못을 답습하는 폐단이 많아져 이루 다 바로잡을 수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우선 인색한 마음이 움트는 것을 없애고 공변된 도를 선뜻 내보여서 광명하고 정대한 다스림이 중도를 세우고 표준을 세우는 마음에서 나오게하소서. 그런 다음에야 공변된 도를 넓힐 수 있고 사사로운 정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임진년난리를 피하는 길에 준신 상하가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마음이 어떠하였습니까. 만약 항상 그러한 마음을보존해 왔더라면 하늘은 예전에 벌써 마음을 바꾸어 재앙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깊숙한 궁궐 안에서 거처하면서 피난길에 겪은 고난을 지금도 잊지 않으시며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에서 전하의 근심을 잘 헤아리는 이가 있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재난이 많을수록 나라가 흥한다.”99) 라고 하였고, 또 “망할까염려하는 것이 보존하는 길이다.”100) 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그 당시 박승종(朴承宗)101)이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차자(箚子)의 내용 중에 당시 권신이 싫어할 말이 있다하여 도중에 가로막고 아뢰지 않았다.이에 오봉 선생은 사직서를바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94)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이다.
95) 여기서는 재상(宰相)을 말한다. �서경� 주서(周書)ㆍ주관(周官) 에 “이 삼공은 치국의 도를 강구하여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의 기운을고르게 다스린다.[玆惟三公 論道經邦 燮理陰陽]”라고 하였다.
96) 사물의 도리를 파고들어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의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뜻을 정성스럽게 품고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는 의미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을 합친 말로 �대학�에 보인다.
97) 천지가 제자리를 잡아 안정
98) 임금의 가족이라 해도 법 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수는 순(舜)임금의아버지로, 천자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죄를 범했을 경우 법관인 고요(皐陶)는 어찌해야 하느냐는 도응(桃應)의질문에 맹자가 “법대로 집행할 뿐이다.[執之而已矣]”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孟子�盡心 上)
99) 진(晉)나라 유곤이 원제(元帝)에게 “어려움 많을수록 나라가 흥하고, 걱정이 많을수록 성군을 만든다.”라고 하였다.(晉書元帝紀)100)�주역�계사전 하(繫辭傳下) 에 나오는 말이다.
101) 박승종(朴承宗, 1562~1623) :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밀양(密陽)이다. 1586년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봉교, 홍문관 부제학, 병조 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4. 대인관계
1) 선현(先賢)
임진란기(1592~1598)를포함하여 150년대 초부터 160년대 초까지 10여 년 동안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퇴계학과 퇴계학맥의 중심에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을 필두로 하여 시초에는 젊은 이황을 예안의 제자들이 스승으로 모셨고, 퇴계가 관직을 끝내고 저술과 제자 양성에 집중하는 시기가 되면서 범 안동문화권으로 제자군이 넓게 형성되었는데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제자가 류성룡(柳成龍, 1542~1617)과김성일(金
誠一, 1538~1593)이다.
이후 퇴계학은 경상도 북부지역에서만 머물지 않고 낙동강 중류까지확대되면서 한강 정구(鄭逑, 1543~1620), 여헌 장현광(張顯光, 154~1637)으로 대표되는 성주와 구미 지역으로 제자군이형성된다.
예안 지역을 포함하면 이황이 젊은 시절 이황이 예안에서 강학을시작할 때는 주로 예안 지역을 중심으로 제자군이 형성되었다. 조목은15살 때 38살의 젊은 이황을 스승으로 삼았고, 이후예안 지역을 중심으로 퇴계 학단이 형성되었다.
산남 김부인(金富仁, 1512~1584),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1516~157)을 비롯한 5형제와 성재 금난수(琴蘭秀, 1530~1604) 간재 이덕홍(李德弘, 1541~1596)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혼맥과 학맥으로 얽힌 인적관계를 형성하였고 퇴계 사후 이들은 월천 계열, 또는 예안 학단으로 지칭되면서 퇴계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經) 공부와 심성론에 침잠하는 특징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제자가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입문은 김성일이 빠른데 19세때인 156년 퇴계 문하에 나아갔다. 그리고 류성룡은 21세 때인 1562년 퇴계 문하에 입문했다. 이때 형 류운룡(柳雲龍,1539~1601)과함께 도산에 가서 수 개월간 �근사록(近思錄)�을 수업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성리학에만 전념하겠다는 강한 일념을가졌으면 이황은 이러한 제자에 대해 높은 기대를 드러냈다.102)
류성룡은 25세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면서 도학 공부보다는 치국(治國)에전념하는 경세가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19세에 입문한 제자 김성일에 대한 이황의 평가는 여러곳에서등장하고 있다. 특히 “행실이 높고 학문이 정치하니 내 눈속에 그에 비길 만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라는 평가는 이황이 김성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제자에게 이황은 입문한 후 10년뒤인 29세 되던 해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병명(屛銘) 을 건네주었다. 오봉 신지제는 당대에 누구나 선현(先賢)으로 받드는 퇴계 이황과 그의 수제자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스승으로 모셨고 선현들의 사상이 구국 운동과 실천 정신으로 발휘됨은 물론간접 제자인 오봉의 의병 활동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었다. 그 내용은 오봉의 의병 활동 항목에서 구체적으로서술하기로 한다.
102) 이상호, 임진란기 안동지역 유학의철학적 특징과 실천정신 , �경북지역 임진란사� 3권,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 2018. 2~42쪽.
(1) 서애 류성룡(1542~1617)
류성룡과 신지제는 나이도20년 차이가 있었고 관직은 더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비교해 보기 위하여임진란을 전후하여 먼저 류성룡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1589년 류성룡은 대사헌, 병조 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다시 예조 판서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때 정여립 사건으로류성룡은 스스로 사퇴를 청하였고 탄핵을 원했다. 그러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이조 판서에 임명한다음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시켰고, 1591년 이조 판서겸임, 다시 좌의정(이조 판서 겸임)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선조의 왕세자 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되자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이산해(영의정)등의 북인과대립하였다. 1598년 정인홍 등 북인들은 류성룡이 일본과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워 탄핵하였다.
관직을 삭탈당한 류성룡은 억울하게 고향 하회로 내려갔고 비용이없어 거처할 공간도 없었다. 이후 누차 소명으로 160년복관되어 영의정에 복직되는 등 조정의 거듭된 부름이 있었으나 모든 벼슬을 사양하였다. 1601년 8월 아내 상을 당하였고, 1603년 부원군 임명, 1604년 임진왜란을 회고한 �징비록�과 �서애문집�의 저술을마치고 안동 풍산으로 돌아왔다.
서애선생과 오봉 신지제의 직접 대면은 오봉이 과거 시험을볼 때 서애 선생이 감독관으로 있었을 때였다. 류성룡은 158년 12월 대제학에 임명한 뒤 이때까지도 그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가 “이번 시험에 장원한 사람은 그 문장이 어떠하였기에 이토록높은 점수를 받았습니까?”라고 묻자 류 선생이 “그 사람의됨됨이를 평가하면 아마 문장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봉은 마지막 겨울 한 철을 류성룡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 학봉 김성일(1538~1593)
19세에 입문한 제자 김성일에 대한 이황의 평가는 그의 행실, 학문 태도, 김성일이 기록한 이황의 언행록(言行錄)등 여러 곳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기 나라가 매우 위급한 최전선 영남우도에서 초유사와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구국 활동에 헌신한대표적 인물이다. 당시 성리학이 만개된 사회에서 퇴계 이황, 남명조식, 율곡 이이 등의 학풍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 중김성일은 안동 임하현 출생으로 퇴계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승문원, 예문관, 춘추관, 경영관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특히 영남 사림의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오봉 신지제 선생은 학봉의문하에서 수제자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임진란 초기 학봉의 의병 지원 활동은 직접ㆍ간접으로 예안 현감 신지제의 의병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었다.
정계에서 동인의 수장격인 위치에 있었던 학봉은 통신부사로일본에서 돌아온 후 성균관 대사성 겸 승문원 부제조에 임명되었다. 1592년 봄 형조 참의에 특배되었고다시 4월 1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임진란이 발발하자 통신사 일에 있어 정세 보고를 잘못한 건으로 김성일5세 때 나명(拿命)이 우역편(郵驛便)으로 전해지자, 창원에서스스로 한양으로 가던 중 충청도 직산에서 갑자기 경상우도 초유사
(招諭使)103)로 임명되었다.
한편 학봉의 수제자 오봉 신지제는 1589년 4월 과거 급제, 5월무공랑 사섬시 직장, 1월 선무랑 1590년 4월 승훈랑, 5월 승의랑,1591년 2월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6월 예안 현감에 제수되었다. 예안 현감은 오봉이 연로한 어버이를편히 모시기 위하여 고향이 가까운 고을에 부임하기를 자청한 것이었다. 학봉 선생이 안타까워하며 “이제 막 벼슬길에 나왔는데 어찌 그리 서둘러 외직으로 나가려 하는가? 조정에서자네를 병조의 낭관으로 천거하려고 논의 중인데 어찌하여 조금 기다리지 않는가?”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벼슬길이 트이고 막히는 것은 운수에 달려있고, 무엇보다 고을이 고향집과가까워서 찾아뵙고 살피기에 편합니다.”라고 하였다. 오봉의한 구석 마음에는 존경하는 퇴계의 고향(도산서원)에 근무하기를원하고 있었다.
오봉의 스승인 학봉이1593년 4월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 진주성에서 세상을 떠나 학봉 선생의 운구가 안동가수네[佳樹川, 안동 와룡 서지리]로 돌아와 장례를 치를 때 오봉이 직접 가서 제사를 올렸는데, 다음과같은 제문이 남아 있다.104)
103) 초유사(招諭使) : 조선 시대 임시관직으로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불러모아 타일러 안정시키는 책임을 맡았다.
104) �오봉 선생 문집� 2권, 176~17쪽.
학봉 김 선생을 애도하는 제문[祭鶴峰金先生文]
아! 공은 56년 동안 세상을 사셨는데 생전에도 부끄러운 것이 없고 사후에도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몸가짐과 일처리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훤히 밝아 삶과 죽음이나 영광과 치욕으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참되고 미더우며 독실하고 신중한 언행이 늘 몸에 배어 있어서 오랑캐 땅에서도 행하였고, 위난이 닥쳐 나라가 무너지는데도 절개를 바꾸지 않고 기필코 나라를 회복시키려 했습니다.
아!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넌 제갈량(諸葛亮)이 출정하여 아직 승리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까. 황하를건너라고 세 번 외쳤던 종택(宗澤)이 뜻을 미처 이루지 못했는데하늘은 어찌 급히 앗아갔습니까. 시대가 그리해서입니까. 운명이그리해서입니까. 우리 공께서 또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이 세상의 불행입니다.
아! 대장부로태어나 이와 같이 살다가 이와 같이 죽었으니 또한 사업을 잘 마무리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성공과 실패, 행운과 불운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그것으로 공의 사업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바르고 굳센 기상이 하늘에서는 북두성이 되고 땅에서는우주가 다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 나처럼 못나고형편없는 사람이 문하에 드나든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공경하며 따랐는데, 어지러운 풍진 속에 엎어져서 오늘 같은 불행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홀로남아 길을 잃었으니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영령이시어! 부디 와서 흠향하소서.아 슬픕니다.
(3) 퇴계 이황(1501~1570)
오봉 신지제(1562~1624)선생이 가장 한스럽게 생각한 것이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직접 배우지 못한 사실이다. 그가 9살 때 퇴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를하고 과거 시험을 멀리했던 유일제 김언기(1520~158) 선생에게 대신 가르침을 받았다. 김언기가 안동 북쪽 고을인 가야곡(佳野谷)에 은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하여 그 문하에 출입하는 이가 수 백 명이었는데 오봉도 백형 지효(之孝)와 함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1576년에는 아우 지신(之信)이뒤따라 와서 함께 수학하였다. 가야곡에서 동학 70여명이땔감 당번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사고를 친일은 전술한 바 있다. 이 때 같이 간 친구 두 사람은 권태일(1569~1631)과 박의장(155~1615)이다. 권태일은 15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 정랑, 호조 참의, 전주 부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박의장은 157년 무과에 급제한 뒤경주 부윤, 안동 부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호조 판서(증직)를 역임하였다.
오봉은 1591년 7월 예안 현감에 부임하면서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오봉은뒤늦게 태어나 도산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고을에 부임한 뒤로 매달 서원에 들러 사당에 참배하고 선생의 유적을둘러보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흥의 뜻을 붙이고 당시 퇴계 선생 문하에서 직접 배운 원로들을 상대하였다. 월천조목, 설월당 김부륜, 간재 이덕홍, 성성재 금난수와 서로 왕래하고 교유하며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다. 임진왜란으로군사를 징발하고 민생을 돌보느라 한시
가 급박한 중에도 왕래를 멈추지 않았다.
월천 조목(1524~1606)은 152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벼슬이내려왔으나 사양하였다. 일생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김부륜(1531~1598)은 15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동북 현감, 봉화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덕홍(1541~1596)은사옹원 직장, 영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금난수(1530~1604)는 1561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79년 이후 시평 현감, 봉화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퇴계 이황은 4번의사화가 끝나고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던 시기에 사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이름을 드러냈다.특히 그는 학문이 성숙되던 시기에 도덕 정치를 표방하면서 죽어갔던 선비들을 직접 보았고, 스스로도자신에게 있어서 아버지나 스승과 같았던 이해(李瀣, 1496~150)의희생을 목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황은 죽음을 무릅쓰고 도학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이들을 기리고,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 내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진행했다.임진란기 안동 지역에 있어서 퇴계학의 전승은 류성룡과 김성일의 양대 산맥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오봉은 학봉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퇴계의 살아있는 원로 제자와 교유를 통하여 전수되었다. 특히임진란과 의병 활동의 연계는 신지제가 몸소 실천하였는데 이것은 이 논문의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2) 교유 인사
오봉 선생의 인맥 또는 대인관계는 관리로서 중요한 시기가 1590년대 임진ㆍ정유왜란과 겹치기 때문에 의병 동지와 일반 동지를 구분하여 따로 언급하기가 곤란하다. 여기서 의병 동지는 이 논문의 후반부 오봉의 의병 활동 부문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예안, 안동지역의 인사들 가운데 일반 인사들은 직간접으로 퇴계와관계된다. 이것을 제외하면 23세 결혼 이후 처가 쪽의 함안조씨와 퇴계 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남명학파와도 활발한 교유를 하고 있었다.
오봉은 1601년 7월에 영남 출신 인사들과 장악원(掌樂院)에서 동도회(同道會)를설립하였고 27명의 이름을 기록한 책 �영남동도회제명첩(嶺南同道會題名帖)�을 만들었는데 회원 총 27명의 관직과 이름, 출신지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이호민(153~1634)이시를 짓고 아울러 서문을 썼다. 이호민은 1584년 문과에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좌승지, 예조 판서, 홍문관 제학을 역임하였고, 호는 오봉(五峯), 저서로는 �오봉집(五峯集)�이 있다.
퇴계의 문인록을 처음 작성했던 사람은 퇴계의 직전제자(直傳弟子)와 학봉의 학통을 계승했던 권두경(1654~1726)인데 그는 �계문제자록(溪門諸子錄)�을 편찬하여 10여명의퇴계 문인들을 수록한 바 있다. 그 후 퇴계로부터 6세인이수연(1693~1748)이 약 60여 명의 문인을 추가하였고, 이수향이 다시 10명 추가, 9세손이야순이 수십 명을 추가하여 260여 명의 사가본(四家本)을 완성했다. 퇴계 문인들의 완성본은 1854년 갑인본(309명)이다. 퇴계 문인들을 분석해 보면 진성 이씨(진보 이씨), 영천 이씨, 안동권씨, 안동김씨, 봉화 금씨 등 안동과 예안 인근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한양 출신도 50명에 이른다.
오봉 신지제의 대인관계는 그의 문집 가운데 수창시로서 주고받은시(詩), 죽음을 애도하는 시, 제문 등을 보면 그의 인맥과 교유 인사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의성조문국 박물관에 기탁된 오봉 종가 고문서의 자료는 고서 5점과 고문서85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제영남동도회제명권(題嶺南同道會題命卷)�은 1601년 7월에 한양에 있는 영남인이 장악원에 모여 친목회를 가졌는데 이를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재경영남향우회이다. 이때 오봉 신지제를 포함하여 모두 27명이 참여하였다. 인명을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정곤수(1538~1602) 권경호(1546~1609) 김 혜(156~1624)
이호민(1533~1634) 류중룡(158~1635) 노도형(1571~1615)
강 신(1543~1615) 전 우(1548~1616) 이민성(1570~1629)
강 연(1522~1614) 오극성(159~1616) 권 제(1548~1612)
윤 엽(1546~1604) 이홍발 신경익(1548~1613)
박응립(1517~1582) 박광선(1562~1631) 이민환(1573~1649)
신지제(1562~1624) 권세인(1548~1608) 조 정(155~1636)
강 담(1559~1637) 권 순(1564~162) 조우인(1561~1625)
김택룡(1547~1627) 권 주(1576~1651) 남복규(159~1615)
위의 인사들을 출신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상주 9ㆍ함창 4ㆍ군위 3ㆍ단성 2명의 순이고, 예안ㆍ영해ㆍ초계ㆍ거창ㆍ고령ㆍ의성ㆍ성주ㆍ금산ㆍ안동은각 1명이다. 상주와 함창 지역의 출신이 절반을 차지하고있다.
기록 순서를 보면 오봉 신지제는 전체 27명 가운데 비교적 빠른 순위인 7번째로 등재되어 있다.
순위는 품계 순위 아닌 행수법(行守法)에 의한 관직 순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지제의품계는 종3품인 중직대부(中直大夫)였으나 행직은 종5품인 예조 정랑이다. 반면에 박응립의 품계는 종5품인 현신교위(顯信校尉)였으나 수직(守職)은 종4품인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이다. 그리고 행직이 같은 경우에는 품계가 높은 사람을 먼저 기록하였다. 강담의 경우 신지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품계는 종3품인 보공장군(保功將軍)이고행직은 정5품인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이다. 행직은 같은 정5품이나품계에 있어서 같은 정3품이라 하더라도 서반인 보공장군보다 동반인 중직대부의 품계가 앞선다.
5. 관직 은퇴 이후의 생활
1) 의성 구미리(龜尾里) 정착
1618년 3월 오봉은 창원 부사를 마지막으로관직을 떠나 7월 고향 구미(龜尾)로 돌아왔다. 경상북도에는 구미라는 지명(동명)이 세 곳이 있다. 선산구미, 의성 구미, 안동 구미이다. 선생은 하천(下川) 오동산(梧桐山) 북쪽에서 태어났고 자라서 자호를 오봉(梧峯)이라 하였는데 오동산은 필자의 외가 동네인 오산(梧山)의 뒷산 이름이기도 하다. 구미에서새 거처를 마련하였고 또 호를 ‘구로(龜老)’라고 하였다. 창원에서 돌아올 때 행장에는 서적 몇 상자가 있을뿐이었는데 대나무 숲 속의 새 거처 초가집에서 산수에 흥취를 부쳐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근심을 달랬다. 일찍이지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05)
새로 널찍하게 터 잡은 구미 별장
앞엔 푸른 시냇물 뒤엔 푸른 산 있네
힘써 밭 갈면 주린 배 채울 수 있고
집은 작아도 추위와 더위 견딜 만하네
대와 매화 심어서 오랜 정분 간직하고
갈매기 해오라기 불러 즐거움 나누네
이로부터 할 일 없이 노년을 보내니
세상사 험난하단 말 믿을 게 없네
1623년 2월 오봉은 구미에서 의성 쪽으로 조금이동하여 개울 건너편 천동재사(泉洞齋舍)에서 우거하였다. 이 곳 천동은 임진란 초기에 백형 신지효가 일본군에 의하여 살해된 곳이다. 재사는천동의 선영 아래에 있으며 집과는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선생은 천동 골짜기가 조금 깊숙하여 병든 몸을 요양하기에편리하다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이곳에서 잠시 우거하였다. 재사 앞에 오래된 작은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정비하여 연꽃을 심고 그 사이에서 노래 부르고 시 읊으며 세상의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오봉을 비롯한의성 아주 신씨의 본거지(귀파)인 구미에 대해서는 이에 앞서신정주(1764~1827)가 쓴 �구장지(龜莊志)�에서 여러 구석, 곳곳을이름 붙여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지명이 모두 한자로 되어 있고 우리 말 발음대로 부르다 보니 표현이다르고 이상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신정주가 쓴 구장지 산천(山川)조 에서는 쌍천(雙遷)이기록되었는데 금산서원 건너길 옆 암벽에 “쌍천”이라는 두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4차선 도로 확장 공사와함께 부서져 버렸다.(197) 구장지에서는 구미촌 백호석에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쌍천이란 큰 두글자가 구동공(龜洞公)의 필적으로, 그 아래에는 큰 길이 동쪽은 의성현과 서쪽은 도리원으로 뚫려 있다고 하였다.쌍천은 그 글자가 새겨졌던 아래는 청송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남대천(長川, 구장지)과 춘산(氷山)에서 발원한 쌍계천(下川,구장지)이 합류하여 구미리 앞 섬개들을 이루는 곳으로 지형의 의미를 상징하였다. 구미와도리원은 2km거리인데 그 중간에 험한 낭떠러지의 벼랑바위가 있는데 대구와 안동간의 국도를 만들기 위해서는반드시 이 지점의 바위를 폭파시켜야 한다. 아주 옛날에는 가파른 바위 언덕이 있고 그 밑으로 쌍천 개울이흐르고 있었는데 구한 말 이후 편도 2차선의 한 길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1954~1957)이곳은 도리원을 향하여 왼쪽 언덕 아래가 깊은 물속이고, 그 속에 깨진 바위들이 있었고, 특히 여름에는 물속에 자라ㆍ잉어ㆍ가물치가 거닐고 있는 모습을 한 길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한 길옆의 가로수는 키가 큰 포프라 나무였는데 이곳은 물이 가까운 쪽으로만 아름드리의 오래된 아카시아나무가 띄엄띄엄 가로수로 서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로 그렇게 굵고, 크고, 나무 중간 기둥에 썩은 구멍이 나 있고 그 속에 사나운 벌들(땡삐)이 사는 것은 여기서만 볼 수 있다. 구미에서 도리원 초입의 봉양중학교는걸어서 다니고 있었는데 5일마다 열리는 장날에는 재미있는 일이 벌이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장날 아카시아 나무 벌집을 작은 모래자갈 한 움큼 쥐고 벌집을 건드려 놓고 50m~10m 도망을 가서 도랑에 숨어 있으면 트럭에 장사꾼과 상품을 함께 신고 달려오는데 벌집 주위에 나와돌아다니던 벌들(지상2m)이 트럭 위의 장사꾼을 따라가며공격하면 난장판이 되고 만다. 다른 또 하나는 장날 점심시간은 모두 시장에 가서 부모에게 국밥을 얻어먹고있느라고 정시 수업이 되지 않아 선생님들이 몽둥이를 들고 학생들을 찾아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 부락으로 의성 구미는50여 년 전부터 아주 신씨의 집성촌으로서 마을의 규모가 10여 호가 넘는 큰 동네가 형성되고있었다. 근대 개화 이후 현대식 초등학교가 처음 생길 때 봉양면의 유일한 학교가 구미의 마을 앞에 설립되어동네 아이들은 그 만큼 쉽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나의 외증조부가 그 전에 문경 군수에서 봉양 면장으로와서 학교는 장터(도리원)보다 옛날 선비촌인 구미에 장소를정한 것이었다.
105) �오봉 선생문집� 권2, 38쪽.
2) 구미보(龜尾洑) 축조
(1) 조선 시대의 수리 시설
가. 조선 시대 벼농사 기술과 논농사 이앙법도입106)
농경 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기술 진보인 철제 농기구는 4~6세기경에 널리 보급되었다. 통일신라기는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의 확산, 고려 시기에는연작상경법(連作常耕法)의 보급, 조선 중기에서는 이앙법(移秧法)의보급이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킨 주요한 기술 진보였다. 1세기 중엽에는2년마다 한 번 씩 경작하는 일역전(一易田) 모든경지의 중간 등급이었고, 1430년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은 농업 기술이 선진적이던 삼남 지방의 농법을 정리하였는데여기에 수록된 농법은 논과 밭 모두 연작상 경법이었다.
고려 중기에는 소규모의 연못[堤堰]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12세기이후 저습지의 개간을 위해 방파제를 만드는 하거(河渠) 공사가이루어지고 방천(防川), 방조제(防潮堤)가 수축되었으며, 간척지개간과 황무지 개간법이 조선 후기에도 활발하였다.
조선 전기 농가 경영의 안정화에 기여한 또 하나의 중요한계기는 면작(棉作)의 보급이었다. 1364 문익점에 의해 전래된 면화는 섬유 제품의 우수성과 국가의 장려책에 힘입어 널리 재배되었다. �농사직설�에서는 벼의 재배법으로 수경법(水耕法), 건경법(乾耕法), 삽종법(揷種法)을 들었다. 앞의 두 가지는 논에 볍씨를 바로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이며, 삽종법은 모판 앙기(秧基)에서 기른 모를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이다. 논에 물을 채운 상태에서알아서 파종하는 수경법이 가장 상세히 기술된 것은 물이 벼의 생장에 긴요할 뿐만 아니라 염분을 씻어냄으로써 지력을 유지하는 효과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파종하여 모가 자라는 4월~5월에 강수량이 적어 마른 논에 파종하여 흙 속의 수분을 활용하는건경법이란 독창적인 재배법이 출현하였다. �농사직설�에 의하면이앙법은 ‘제초(除草)에편리하지만 만일 큰 가뭄이 들면 손 쓸 바가 없으니 농가의 위험한일’이었다. 모심기 철인 봄에 가뭄이자주 발생하는데다가 수리 시설의 보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선 초에 이앙법은 금지당하여서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가뭄에 취약한 이앙법의 보급을 위해서는 수리 시설이 정비되어야했다. 조선 조 태종대부터 세조대까지는 폐기된 제언(堤堰)을 수축하거나 새로운 제언을 축조하는 수리 개발이 활발하였다. 1469년에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의하면 제언이 모두 769개에 달하였다. 제언의 개발이 한계에 달하자 16세기에는 천방(川防), 곧 보(洑)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제언은 산골짜기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모아서이용하는 것이고, 보는 하천의 물을 막고 끌어서 관개에 활용하는 것이다. 제언인 즉 수원(水源)이천로(淺露)한데 공역(功役)이 많이 들며 천방은 수원이 넉넉하여 공(功)이 적어도 이익이 많다.(�문종실록�)문종의 유서(諭書)에서 알 수 있듯이 보는 효율적인수리 시설이었다.107)
임진ㆍ정유 양란 직후에는 인구가 격감하여 김매기 노동을 대폭절감하는 이앙법의 보급이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에경상도를 중심으로 도입되던 이앙법은 17세기 후반에는 남부에 널리 보급되었다. 17세기에는 가뭄에 대비하여 물을 담지 않은 모판에 모를 키우다가 여름에 수량이 풍부해지면 이앙을 하는 건앙법(乾秧法)이 개발되어 수리가 불안전한 지역에 보급되었다. 이앙법, 곧 모심기 법은 ‘사반공배(事半功倍)’라 할 정도로 노동력을 절감하면서도 수확량을 높였다. 이앙법은 김매기[中耕除草] 노동을대폭 절감하고, 직파법은 적어도 4차~5차의 김매기가 필수적이었으나 이앙법은 2차~3차로 족하였다.
조선 중기에 논 1마지기두락(斗落)을 김매기 하는 데에 평균적으로 직파법은 8.5명, 이앙법은 3명의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1마지기는 벼 1말을 파종하는 면적을말하는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0)에 의하면 논은 평균 138평, 밭은 평균 187평이었다.
106) 이헌창, 한국 경제사 강의안(2019) 중에서 일부 인용
107) 이태진, �16세기 천방(川防) 보(洑) 관개(灌漑)의 발달�, 한국사회사 연구 , 지식 산업사,1986, 198~205쪽.
나. 수리 시설과 관리
경상도 수리 시설 가운데 못(제언)수는 1470년 721개, 1518년 80개, 1782년 1,52개였다. 이것을 170년대 말 각 지역의 못(제언)수를보면 안동 8ㆍ청송 4ㆍ영주2ㆍ영천 187ㆍ예천 19ㆍ의성 92ㆍ군위 40ㆍ비안 38ㆍ의흥 10개였다.
조선 시대 양대 수리 시설은 보(洑, 천방川防)와 못(제언)이다. 보는 하천수를이용하는 것이고, 못(제언)은산골짜기 또는 개천 물을 막아 이용하는 것이다. 수리 행정의 변천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108)
조선 초기(태종) : 공조(工曹)의 삼관사(三官司)중 산택사(山澤司) 세종 :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주․군(州․郡)의제언을 조사하게 하여 지방관 출척(黜陟)의 기준으로 삼고, 각 군의 제언수와 몽리 면적 대장을 만들어 일부는 공조, 일부는궁중에서 보관 성종 12년(1476)에 제언사(堤堰司)라는 사무관청이 등장,1483년에는 제언, 천방의주관권을 관찰사에게로 이관 임진란을 계기로 국가 기강이 극도로문란해지고, 진언사 폐지. 그 이유는 제언에 대한 관리 감독이소홀해지고 지방제언은 토호(土豪) 권세가의 손에 들어가서파괴.인조 2년, 숙종 9년(비변사) 대책 발표고종 2년 의정부에 귀속
다. 수리 시설과 전답의 관리
수리 시설 : 국유 - 국가에서 농민이나 군인을 동원해서 수축(修築)
공유 - 농민공동체(몽리계, 제언계, 보계, 수리계조직)
궁방(宮房) - 궁중관리
사찰(寺刹) - 절에서 관리
개인 관리 – 극히 적음(토호, 사대부 소유)
토지와 함께 매매 가능
국가 기관의 소유와 관리
관둔전(官屯田) - 지방 관아
국둔전(國屯田) - 관아의 경비 또는 군량미로충당
진수(鎭戌)의 병졸(兵卒)
임란 이후 훈련도감을 비롯한 많은 영문(營門), 아문(衙門) 설치
많은 전지(田地)를 둔전(屯田)을 소유, 동시에수리 시설 소유
라. 18세기 말 수리 시설의 문제와한계109) (정조)
각 지역의 큰 못(大堤)을 지목하면서 제언의 부실을 언급하자면, 제언이 무너지고 그 기능을상실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은 일단 자연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었다.
수리 시설을 새롭게 축조하였음에도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못하는 경우의 하나로 신구보(新舊洑)의 수리 다툼이 있었는데, 주로 구보(舊洑)의 주장에따라 신보(新洑)를 훼설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였다.
수리 시설의 이용은 신분,계급에 따라서 차별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나 부농(富農)이 아닌 양인 농민은 수리 시설을 이용하는 기회의 측면에서 불리하였다. 이때쟁수(爭水)의 문제가 발생한다. 촌락의 부강자가 자신의 논이 낮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물을 끌어 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수리 시설을 계속적으로 철저하게 관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존재하며, 수리 시설은 자연재해 극복의 불안정성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강우량과 강설량을 합한 강수량의 대소에 따라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게 되면 이러한 불리한 자연 조건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수리 시설의 이용을 제한하는 인위적 요인 중의 하나가 화전(火田)의 성행이었다. 산화전(山火田)은 산허리의 초목이 사라지면서 수리 시설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할수 없게 만드는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토사가 흘러내려 산 도랑을 메워 버리거나 하천(河川)의 하상(河床)을 높아지게 하기 때문이다.
(2) 구미보(1610~1617)
오봉의 아버지 몽득 선생 때에 거처를 하천(下川, 풍리)에서 구미로옮긴 것은 도리원을 중심으로 사통팔달의 교통 편의와 농사를 짓는 영농 조건이 풍리보다는 구미가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 때 구미에는 지내(池內)라고하는 큰 못과 동편 송월 지역에 작은 연못 2개가 있었다. 연못하나는 공동 우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길, 개천건너편에 있는 천동(泉洞, 샘골)에는 아래위로 큰 못이 2개 있었는데 이곳은 오봉 종가의 재사가 있었고, 임진란 때부터 백형 신지효의 가족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오봉은일찍부터 관직으로 나가서 직접 농사를 짓고 살아본 경험은 부족하지만 지방 관원으로서 향촌의 수리 시설과 그 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관찰경험과 영농 기법에 대한 생각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창원 부사로서 마지막 관직 생활을 염두에두고 오래 전부터 구미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과 설계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고, 수리 시설의 관리와방법에 대해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의(完議)는 종중(宗中), 가문(家門), 동중(洞中), 계(契)등에서 제사, 묘위(墓位), 동중사(洞中事), 계 등에 관하여 의논하고 그 합의된 내용을 적어 서로 지킬것을 약속하는 문서로 입의(立議)라고도 한다. 구미 구보(龜尾舊洑)는오봉 신지제(1562~1624)가 구미에 입향하여 세거하게 되면서 마을의 몽리답(蒙利畓)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할 뜻으로 길부촌(吉夫村) 앞에 축조하였다. 이보의 완성으로 인근 7~8개 동의 농장에 관개할 수 있었다. 따라서보의 관리는 아주 신씨 오봉파 문중에서 주관하고 매년 돌아가면서 도감(都監)하되 타성(他姓)은 허락하지않았다. 애초에는 입역이나 수세가 전혀 없었으나 기유년 이후 오봉 문중에서 수세하게 되어 1두락 당 5량씩을 받게 되었다. 이에이보 중에 있는 경작자들이 일제히 회합하여 구보 도목을 추심한 뒤 경술년 9월에 새로 조약을 만들었다. 원래 구미보는 오봉 선생이 중심이 되어 오봉 종택 개인 소유로 축조된 것이며 처음에 받은 수세는 일부를 임진란유가족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새 조약에 따라 오봉 종중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여러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입역과 수세를 내도록 한다는 완의이다. 이 완의는 전체 26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에 완의하는 목적을 기록하고, 이어 상ㆍ중ㆍ하고로 구분하여 보중의 작자와 경작 면적을 나열하였다. 머릿단에답주를 쓰고 다음 단에 몇 배미 몇 두락지로 경작면적을 마지막 단에는 경작자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경작자가 바뀐 부분은 첨지를 하여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 보(洑) 중의 상ㆍ중ㆍ하 전체 경작면적은 총 427두락 4승락지였다. 덧붙여 이 보를 지키는데 공이 있었던 천동(泉洞) 강세원(姜世元) 증조(曾祖)의 업적을기록하였다. 즉 이 보 안에 어떤 경궁인이 새로이 축보하려는 것을 강세원 증조가 홀로 여러차례 관에상서하여 쌓지 못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에 이어서 조약절목(條約節目) 1조항을 기록하고 있다. 조약 내용은 보주인 신씨들도 각 마을의여러 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입역, 수세해야 하며, 도감은타성에서도 뽑을 수 있으며, 송침방천(松浸防川)이 1년 중의 제일 큰 역인데 여기에 빠지는 사람은 송가(松價) 1전과 군정조 1전을내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보 안의 두수 중 태반은 감고 배(監考輩)들이 사사로이 낭비하였는데 이를 바로 잡고 상고는 5두락지 당 1명, 중고는 10두락지당 1명, 하고는 15두락지당 1명씩을 입역하도록 하였다. 입역할 때 두수에 차지 않는 1명에게는 가물(價物)을준비하여 내도록 하되 백주(白酒)나 대전(代錢) 4전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전에는 7삽(鍤)으로하던 것을 이제는 5삽이 되어 군정수가 25명이 됨으로써두수가 전에 비하여 반감되었고, 백주도 5준이 되었는데 이를대전 4전에 비겨 4분만을 내고 1분을 거절하면 관에 고하여 엄징하도록 한다고 하였다. 또 보중에양산금송(養山禁松)하여 방천에 쓰고자 하는데, 중간에 보법이 해이해져 간혹 양반이 이를 어기고 빼앗는 수가 있었는데 이러한 일이 있으면 관에 고하여 엄처하는일, 상하 작자 중에 이러한 조약을 어기는 자는 자답이면 관에 고하고,반분작자는 답주에게 징계하도록 하여 해당 기간 흘역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약 끝에관으로부터 서압을 받아 공증하였다.
108) 이광린, �이조수리사 연구�, 한국연구도서관, 1961, 104~120쪽.
109) 염정섭, �조선 시대 농업발달 연구�, 태학사, 202, 346~354쪽.
100) 심수철, 의성 조문국 박물관 소장자료해제 Ⅲ. 오봉자료, 2018, 168~169쪽.
(3) 40년간 가동 중인 구미보
구미보의 역사 중에서 위에서 지적된 천동 강세원 증조의 보를지킨 업적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수리 시설 중에서도 보(洑)의 축조를 강조하는 주장은 18세기 말에 경상북도의 여러 지역에서거론되어 왔다. 특히 보가 보급됨에 따라 상보(上洑)와 하보(下洑)의 물싸움, 이른바 보송(洑訟)의문제가 고질적인 폐단이었다. 보송이란 구보보다 하천의 상류 지역에 신보(新洑)를 축조하였을 때 두 보(洑)의 몽리 지역 주민들이 물의 사용 권리를 놓고 다투는 것을 말한다. 이때현실적인 수리조건에서 당연히 후에 만들어진보는 이전의 구보의 수량(水量)에 영향을 주지 않는 거리 간격을 지켜야 할 것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이 발생하고 있었다. 제대로 거리 간격을 지키지 않는 경우뿐만 아니라 영향 관계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간격에 있음에도 억지로 신보를축조하지 못하게 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보송(洑訟)은 수령의 판단에 의거하여 결판나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구보의 편을들어주어 수리 조건의 전반적인 개선이라는 측면은 현실화되기 일보 전에 무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수리 시설에 관한 사회문제는 심한 경우에는 민란(民亂)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1893년충남 당진군 합덕리의 합덕지(合德池), 1894년 전라도고부군 답내면 만석보(萬石洑)의 동학란은 수리 문제와 과중한수세 징수가 문제된 것이다.
구미보는 필자가 구미에서 농사 많이 짓고 과수원이 있는 집안에서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고향에서 다녔고 고등학교(1957~1960)와대학교(1960~1964), 대학원 여름 방학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고, 보(洑)의 부역을 다녔기때문에 그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선 구미보의 길이에 대해서 오봉 선생 문집에서는 4km라고되어 있는데 실제는 7~8km이다. 전술한 신정주(1764~1827)의 �구장지(龜莊志)에서도 20리(里) 라고 하였고구미보가 끝나는 쌍천 바위 지점에서 시작하여 길천동(길부동)을지나 보가 시작되는 지점까지는 옛날 축조 때에 옛 길을 기준으로 계산할필요가 있다.
구미동은 동네보다 수리 시설을 위하여 마을 앞으로 전선이먼저 들어왔고, 양수기는 전기의 힘으로 밑에 있는 개울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이때가 1960년대 중반인데 물은 원래 구미보의 봇도랑을 이용하고별도로 그보다 조금 높은 지역에 새 물길(봇도랑)을 만들어이중으로 물을 끌어 올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보의 부역을 위한 통보 방법은 목소리가 좋은 타성(他姓)의 동네 분이 긴 마을을 네 차례 옮겨 다니면서 큰 소리로 외치는것이었다.
“보에 오소, 보에오소, 아침 일찍이 오소, 애들 보내면 안됩니더 어른이 오소.”
초등학교는 학급 자치회가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딸이자기 아버지 목소리 흉내내고 다니는 남자 친구를 자치회에 고발하여 혼내 주라고 하였다. 대학교 여름방학이면 보의 부역을 다니는데 문제가 많았다. 우선 집에서 아침 먹고 출발하는데 현장까지 도착하면 1시 30분이 지나고 있다. 더워지기전에 일을 하는데 일이 전혀 능률적이지 못하다. 개울물을 도랑을 만들어(50~60m) 끌어와야 하는데 진흙 또는 찰흙을 자갈 속에 넣어(그때는 비닐이 없었음)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물이 봇도랑 시작 지점으로 끌어 오기 힘들고설사 끌어 온다고 해도 그 물은 그 부근의 논으로 가고 7km~8km 떨어진 우리 동네까지는 오지 않는다. 매일 비능률적인 행사에 동원되고 있는데 보의 도감을 맡고 있는 아주 신씨 족친은 고집이 세고 원칙을 무시하고있으면서 한번은 부잣집에서 머슴(일꾼 2명)을 보내지 않고 일 못하는 대학생을 보냈다고 쫓아내려고 했다. 사실일의 성격상 머슴이 하던지 대학생이 하던지 전혀 차이점을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개개인에게일을 할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사정이 같은 친구(신경렬)도 있어서 대학생이 시비 대상이 된 것이다. 보통 1시 30분 경 점심 먹고 그늘에서 잠자다가 오후 4시 30분경 일어나 일을 조금 하는 척 하다가 문흥 양조장에서 막걸리먹고 집으로 오는 것이다.
한번은 나와 친구 대학생2명이 쫓겨나는데 이유가 장가 안 간 애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30살이 넘은 결혼 못한 노총각도 함께 문제되었다. 그 때 노총각의형님이 대성통곡을 하며 “돈이 없어서 동생 장가 못 보냈는데 여기서 이런 설움을 당하고 있다.”라 하고 울고 있으니 주위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고 대학생들은 웃지도 못하고 뒤돌아서 있었다. 결국 앞으로 이 일은 없는 것으로 하였다. 보에 일하러 다닐 때는간혹 상류에서 물(신보) 때문에 우리와 시비가 붙는 경우가있다. 서로 얼굴을 잘 아는 사이인데 양쪽의 도감이 대표로서 물속에서 목을 잡고 싸움을 하고 있는데절대로 우리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자칫하면 큰 싸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선수들끼리 치고 박는데 다른 동료들은 개입하지 않는 것과 같다.
구미보의 종점인 우리 동네의 봇도랑에는 가을이면 미꾸라지풍년이다. 오래된 봇도랑이고 진흙이 쌓여 있고 봇도랑에는 항상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어서 미꾸라지가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다. 양수기로 개울물을 퍼 올릴 때는 중지하면 도랑도 물이 마르고 고기가 살 수없지만 전통적인 봇도랑에는 사정이 다르다.
3) 향년(享年) 63세
(1) 이조참판 증직
필자는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오봉 선생과 관계되는 수많은인사들의 생존 기간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평소 건강과 주량 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는데건강 상태는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시작(詩作)과 술을비교할 때 평소 술은 좋아하신 것 같았다. 선생은 1623년(62세) 2월 천동재사에 우거할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지병은 풍비(風痺)를앓고 있었다고 한다. 풍비는 찬바람이나 습기가 몸에 침투하여 생기는 병으로 팔다리와 몸이 마비되고 쑤시는등의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만년에 오봉 선생은 높은 덕망과 훤한 풍모로 세상의 추증을 받았고, 조정에서는 정승이 될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인조반정의 초기에 특별한은총을 입고 임명되자 친구들이 모두 벼슬에 나가기를 권하였는데 선생은 겨우 비안현에 이르러 사직 상소를 올리고 돌아 왔다. 훗날 경정 이민성 공이 오봉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에 “왕명 출납의탁월한 재주를 장차 새 조정에서 시험하려 했는데 공은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1623년 10월 어머니 오부인이 하천에 있는아들 지경(之敬)의 집에서 병들어 누워있는데 천동에서 달려가모셨는데 12월에 어머니 약시중을 들다가 지병이 덮쳐서 들것에 실려 구미 본가로 돌아 왔다. 점점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 자제들이 물러가 쉴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다가 기진맥진하여 인사불성이되고 나서야 비로소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오히려 어머니가 무엇을드셨는지 자주 물었다. 그믐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이미 병이 위독하여 의식이 없었다. 시험 삼아 사탕을 입안에 넣으니 더 삼키지 못하고 다만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소리로 “이것을 어머님께 드렸느냐?”라는 말만 들릴 뿐이었다. 선생은 비록 숨이 끊어질듯한 가운데서도 늘 어머님 병환이 어떠하냐고 물었는데 정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3월 17일 의성현 신평면 중율(中栗) 산 86번지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장례 이후 선생과 관계되는 주요 연보는다음과 같다.
- 1646(인조 24년) :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 좌부빈객 증직
- 169.5(헌종 10년) : 장대서당 오른편에 사당을 세움
- 1702.4(숙종 28년) : 서당이 서원으로 승격
- 1706.7 :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움
오봉의 사후 많은 인사들이 오봉 선생 행장(行狀) 뒤에 빠진 일을 기록하고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11)
(2) 제문(祭文)
가. 이민성(李民宬)112)
아, 공이 처음세상을 떠났을 때 아득히 만 리 밖에 있어서 꿈에서도 혼을 만날 수 없었고, 장례를 치를 때 상여 끈을잡고 장지까지 가서 곡하지도 못했으며, 첫 기일이 되었을 때 궤연이 제자리에 없어서 또 직접 잔을 올려정성을 표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 슬픕니다. 확고하여 꺾기 어려운 지조와 의연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기색과 널찍하여 포용력 있는 도량을 이제 다시는 볼 수없습니다. 사헌부에서 일할 때 절개가 곧다는 이름이 있었고 어려운 고을을 다스릴 때 유능한 지방관이라는명성이 자자했으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세상에 분명 이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왕명 출납의 탁월한 재주를 장차 새 조정에서 시험하려 했는데 공은 세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구미동 초가와 학록(鶴麓)의이끼 낀 정자에서 바둑 두고 술 마시며 즐겁게 시 읊던 것이 벌써 옛 일이 되었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나. 이민환(李民寏)113)
오직 영령께서는 우주의 특별한 기운을 받고 명산대천의 정기를타고 태어났습니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니 사람들이 모두 한 조각의 옥임을 믿었고 천직(淸職)을 두루 역임하니 세상에서 모두 한 조각 얼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차례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니 백성이 왜 이리 늦게 왔냐며 다투어 칭송했고,만년에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어서는 왕명 출납에 탁월한 재능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병마가 침범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까. 성상께서는 원로를 잃어 애통해하고 사람은 현인의 죽음에 슬퍼했습니다.
아! 슬픕니다. 단정하고 중후한 용모와 바르고 곧은 기상과 넓은 도량과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 그리고 박식한 학문과 정치적재능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 하늘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까. 공이 병들었을 때 누이가 먼저 죽고 어머니가 이어서 세상을 떠났으며 공도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이 모든일이 한 두 달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참혹한 일이 있겠습니까. 선한 이는 복을 받고 어진 이는 장수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그런데선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복을 받지 못했고 어진 사람이라고 반드시 장수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경우가 있단 말입니까.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대를 이을 외아들에게 공의 풍모가 있고 영특한 손자의 골상이 비범한 점이니,하늘의 보답이 마치 문서를 맞춘 듯이 티끌만큼도 차이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공(于公)의 솟을 대문에 고관의 수레가 드나들고 장씨(張氏)의 후손에게 벼슬자리가 끊이지 않으니14) 어찌 훌륭하지 않습니까. 나는 만 번 죽다 살아난 끝에 아직도목숨을 보존하고 있는데 공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모자람을 채워 줄 이가 없고 나를 옳은길로 인도할 이가 없다는 생각에 술잔을 들고서 마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다시 일어나 앉습니다.
아! 옛 사람들은천년을 거슬러 고인을 벗 삼기를 늘 간절히 바랐습니다. 더구나 같은 시대에 태어나고 같은 고장에서 살았으며게다가 혼인을 통해 좋은 인연까지 맺었으니, 우러르고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무덤에 벌써 풀이 우거지고, 대상(大祥) 기일이 급히 돌아와 궤연을 곧 거두게 되었습니다.
비바람을 맞으며 한바탕 통곡하니 세상만사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저도 근래 들어 갈수록 이가 빠지고 머리가 세며 눈앞이 어른거리고 귀가 먹먹하니, 이승에서 얼마나 살수 있겠습니까. 저도 공을 따라 영원히 지하로돌아갈 것입니다. 공은 이를 아십니까. 이것으로 말을 마치니또 한바탕 눈물이 그칠 줄 모릅니다. 아! 슬픕니다.
다. 김종일(金宗一)115)
아! 공이 아름다운덕과 훌륭한 행실과 큰 재주와 넓은 도량을 세상에 다 펴지 못하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한 집안의 슬픔일 뿐만이 아닙니다. 사문의 불행으로 인하여 우리 공을 잃기에 이르렀으니 개인적인 슬픔에 더욱 간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때이나 이 슬픔이 가시겠습니까.
아! 이 조카[小姪]116)는타고난 운명이 기구하여 겨우 아홉 살 무렵에 문득 아버지를 여의고서 무지몽매하기가 양 치는 아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난 번 무신년(1608)에 문하에서 수학할 때 공께서 저를 아들처럼보살펴 주시고 밤낮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비록 학문의 방법을 알지 못하여 가르치는 뜻을 다 깨닫지는못했지만 지금 말단 기예에 종사하면서 이름자를 대략이나마 알고 있는 것은 실로 공 덕분입니다.
겨우 두어 해 배우고 나서 문득 하직인사하고 돌아왔고 그로부터 15년 동안 왕래가 또 뜸했기 때문에 옆에서 오랫동안 모시지 못한 것이 늘 한스러웠습니다. 하늘이 보살피지 않아 마침내 한없는 슬픔을 품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공이 세상을 떠날 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공이영영 떠나던 날에 몸이 아파 장지에 곡하러 가지 못했습니다. 아! 슬픕니다. 통곡하고 또 통곡합니다. 대상기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벼슬에매인 몸이라 곡하러 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변변찮은 제물을 갖추어 감히 미천한 정성을 고합니다. 아! 슬픕니다.
111) 이하로 본고에서 인용한 원문의 번역은 �오봉선생문집�(한국국학진흥원, 2019)을 참조한 것이다.
112) 이민성(李民宬, 1570~1629) : 호는 경정(敬亭), 자는 관보(寬甫), 본관은영천(永川)이다. 1597년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1601년 승정원주서ㆍ예조 좌랑ㆍ병조 정랑ㆍ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경정집』ㆍ『조천록(朝天錄)』 이 있다.
113) 이민환(李民寏,1573~1649):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60년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 좌랑ㆍ영천 군수ㆍ형조 참판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자암집�이 있다.
114) 우공(于公)의……않으니 : 조상의음덕으로 가문이 흥성하고 후손이 출세함을 말한다. 장(張)씨는 한나라 사람으로 자손이 계속 이어져 큰 벼슬을 지낸 이가 10여명이었다.
115) 김종일(金宗一, 1597~1675) : 자는 관지(貫之), 호는 노암(魯庵), 본관은경주이다. 김경룡(金慶龍)의아들이고, 신지제의 문인이다. 1625년 문과에 급제한 뒤성균관 전적ㆍ사간원 정언ㆍ상주 목사ㆍ울산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노암집�이 있다.
116) 조카[小姪] : 아버지의 친구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이른 말이다.
(3) 만사(輓詞)
가. 이호민(李好閔)117)
예로부터 영남 땅에 인재가 많지만
공처럼 풍모가 노성한 이는 없었네
도성에 머무르며 고단한 객지살이
산마루에 핀 매화가 향수를 달래 주네
은대에 임명하는 왕의 부름 사양했는데
남쪽에서 부음이 들려와 크게 놀랐네
이 몸도 금년에 몹시 늙고 병들었으니
머지않아 저승길에서 웃으며 반기겠지
나. 장현광(張顯光)118)
어질고 착한 성품은 본디 천성에서 나왔고
몸과 마음에 원래부터 한계를 두지 않았네
온화하고 공손한 도량은 억지 꾸밈이 아니고
즐겁고 화평한 진심은 본래 타고난 것이었네
세상에 처하여 귀퉁이에 감춰짐 꺼리지 않았고
백성을 대할 때 새매의 뜻 적다는 비난 무릅썼네
당시에 큰 복 누리지 못한 것을 어찌 한하랴
남은 경사가 응당 훌륭한 아들에게 나타나리
다. 호계(虎溪) 신적도(申適道)119)
타고난 바탕이 후덕하니 품성이 절로 참되고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서 벼슬했네
사헌부에서 총마 탈 때 위엄과 명성 대단했고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정치와 교화 새로웠네
효우의 가업을 전수하여 조상의 공적 빛내고
겸손한 몸가짐은 고을 사람의 본보기 되었네
신선되어 천상으로 돌아감을 어찌 차마 보랴
특별히 사랑받은 이 몸 수건에 눈물 한 가득
라. 류진(柳袗)120)
남을 대하는 마음에 의심과 시샘이 없었고
고상한 기풍은 속된 마음 가시게 하였네
남쪽 고을 다스려 유능한 솜씨 인정받았고
한림학사121)로명을 받들어 뛰어난 재주 펼쳤네
한바탕 나비 꿈에서 깰 줄 누가 알았으랴
영혼이 잡초에 묻힌 사실 믿지 못하겠네
벼슬에 몸이 매여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애도하는 글 짓고 나니 슬픔 가누기 어렵네
117) 이호민(李好閔, 153~1634) : 자는 효언(孝彥),호는 오봉(五峯)ㆍ남곽(南郭)ㆍ수와(睡窩),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전적ㆍ병조 좌랑ㆍ좌승지ㆍ예조판서ㆍ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오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118) 장현광(張顯光, 154~1637) :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인동(仁同)이다. 1583년에향시에 합격한 뒤 보은 현감ㆍ공조 좌랑ㆍ의성 현령ㆍ사헌부 장령ㆍ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는 �여헌집�ㆍ�역학도설(易學圖說)� 등이 있다.
119) 신적도(申適道, 1574~163) :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 본관은아주(鵝洲)이다. 1606년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공을 인정받아 상운도 찰방에 제수되었고, 병자호란 때 척사를 주장한 공로로 제릉 참봉ㆍ건원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의성 단구서원(丹邱書院)에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호계집�이 있다.
120) 류진(柳袗, 1582~1635) :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본관은풍산(豊山)이다. 류성룡의아들이다. 161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세자익위사 세마ㆍ봉화현감ㆍ형조 정랑ㆍ청도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수암집이 있다.
(4) 오봉문집 관련
가. 문집 뒤에 쓰다[文集後識]
아! 우리 고조부오봉 선생은 높은 덕과 지극한 행실로 세상의 사표가 되었고 문장은 여사일 뿐이다. 집안에 유집 약간권이전하여, 옛날에 나의 선친이 징사(徵士)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1625~1701) 선생을 찾아가 교정을 청하였으나 선생이다마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시 대가의 교정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보관해 왔다.
병신년(1736)에불초 손자들이 함께 모여 “우리 선조가 세상을 떠나신 지 이제 백여 년이 흘렀는데 먼지 쌓인 상자 속문집이 아직 세상에 간행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들의 수치이다.”라고 개탄하며 비로소 재력을 끌어모아 간행할 방도를 모색했다. 1737년 봄에 당제(堂弟) 하구(夏龜)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12) 공을 찾아가 편차와 서술을 부탁하였는데 마침 공이 뜻밖의 탄핵을 받고 삼가 조정의 처분을 기
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유고를 안고 헛걸음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조공이 끝내탐라에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죽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듬해 1738년(무오년)에 온 고을의 유생들이 장대서원에 모여서 “선생의 도가 담긴 글을 제때에 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모두의 뜻이 일치하여 물자를 모아 추진하였으니 이는 자손으로서 참 다행스런 일이다. 다만 근세 문학에 뛰어난 선비가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23) 천상(天祥)씨만 남아 있었다. 그해 겨울에 하구에게 유고를 가지고 먼저 부탁하게 했고, 1739년 봄에 내가 또 이어서 찾아가 천상씨와함께 석천정(石泉亭)124)으로 가지고 가서 반복해 토론하고드디어 교정을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족질 치운(致雲)으로 하여금 판각본을 정서하여 장대서원에 보내고 각수에게 보내 새기게 하였다.오랜 세월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야 이루고 나니 어쩌면 길이 전하는 일이 오늘에야 이루어지려고 기다려 왔던 것인가. 다만 남긴 글을 다 수습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탄식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한 점만 맛보아도 온 솥의 고기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니, 어찌 꼭 많아야만 하겠는가. 삼가 현 손 생원 진구(震龜)가삼가 기록하다.
121) 한림학사(翰林學士) : 국왕의 문한(文翰)을담당한 관리를 말한다. 신지제는 1604년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된 뒤 왕명에 따라 이광악, 고희 등에게 내릴 교서를 지어 올렸다.
122) 조덕린(趙德鄰, 1658~1737) :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본관은한양(漢陽)이다. 1691년문과에 급제한 뒤 시강원 설서ㆍ강원도 도사ㆍ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 당쟁의 폐해와 노론의득세를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1737년에 다시 1725년에 올린 상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받고 제주로 유배 가던 도중 강진(康津)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옥천집�이있다.
나. 오봉 선생 문집 발문(梧峯先生文集跋文)
오봉 선생 신공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에 유문 몇 권을 수집하여 편찬하고 묘지명과 행장을 덧붙여 읽는 사람들이 공의 큰 인품을 사모하게 하였으니후학에게 참 다행스런 일이다. 예로부터 영남에 큰 학자가 많았지만 유독 융경(隆慶)과 만력(萬曆)연간이 퇴계 이 선생의 시대와 아주 가까워 규모와 기상이 절로 달랐다. 공이직접 퇴계 문하에서 경서를 가지고 공부하지 못했지만 선성(宣城 예안)현감을 지내는 동안 도산서원과 역동서원(易東書院) 사이를오가며 문하의 원로들과 선생의 지결을 강론하여 밝힌 것이 거의 6~7년이었으니, 얻은 바가 또한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는가.
공은 평소 아름다운 덕과 뛰어난 행실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며, 자신을 엄히 단속하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또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으니, 당시 선진들이 모두 진심으로 인정하여 입이닳도록 칭찬하였다. 만일 조정의 중임을 맡겨 평소의 경륜을 펼치게 했다면 덕업과 공렬이 우뚝하여 볼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년에 혼란한 시대(광해군)를 만났고 만년에는 밝은 조정의 은총으로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한탄스럽고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저술한 문장은 분명하고 유창하며수려하고 빼어난 데다 진부한 말을 쓰지 않았고, 시를 두고 말하면 격조가 맑고 높으며 의취가 전아하고순정하여 세상의 속된 기운이 없었으니, 모두 후대에 전할 만한 것이었다. 문소(聞韶 의성)의 유림이공의 후손들과 문집을 간행하여 서원에 보관하기로 뜻을 모으고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해 주기를 부탁했다. 삼가생각건대, 나는 용렬한 데다 글솜씨가 졸렬하여 이 문집에 대해서 무어라 평가할 인물이 못된다. 다만 대대로 교유가 매우 두텁고 평소에 선생을 사모하던 터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기에 삼가 책 끝에쓴다. 1739년 6월에 안동 권상일(權相一)125)이삼가 발문을 쓰다.
간기(刊記) : 1740년 2월에 장대서원에서 처음 간행하다.
123) 이광정(李光庭, 1674~1756) :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본관은원주(原州)이다. 169년진사시에 합격하고 1719년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다. 여러차례 천거를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눌은집�이 있다.
124) 석천정(石泉亭) : 1535년에 권동보(權東輔)가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금의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酉谷里)에지은 정자이다.
125) 권상일(權相一, 1679~1759) :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본관은안동이다. 171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ㆍ병조 좌랑ㆍ양산 군수ㆍ봉상시 정ㆍ형조 참의ㆍ우부승지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청대집등이 있다.
다. 오봉 선생 별집 발문(梧峯先生別集跋文)
나는 평소 오봉 선생의 풍모를 듣고서 사모해 마지않았다. 1741년 여름에 마침 영남에 갈 일이 있어서 잠시 말고삐를 돌려 선생의 옛집을 방문하였는데, 주변을 거닐며 둘러보니 오랜 세월에 대한 감회가 일었다. 이에 공의현손 상사(上舍) 진구(震龜)126) 씨가 책 1질을 내게 주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선조의 유집으로이미 간행을 마친 것입니다. 다만 시문 중에 흩어져 없어진 것들을 근래에 꽤 수습하여 별도로 기록해두었고, 또 연보 1통을 베껴서 완성하였습니다. 이제 곧바로 이어서 간행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교정하고 한 마디말을 덧붙여 이 일을 도와주시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거절을했으나 들어주지 않아 마침내 정중히 받아서 돌아와 끝까지 읽어 보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말을 한다127)고 했는데 이는 믿을 만한 말이다. 추가로모은 시문을 살펴보니 모두 후대에 전할 만한 것이었고, 정수를 가려 뽑은 것이지 단순히 많이 모은 것이아니었다. 상사가 또 “마침내 내가 주제 넘는 지도 모르고몇 수를 뽑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현포(玄圃)에 쌓인 야광주(夜光珠)를 모은 것이니128) 버려졌다 하여 보배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연보도 넉넉하고 충실하여 일을 기록하는 체제를 잘 갖추었기에 약간만 다듬어서 돌려주었다. 공의 우뚝한 행실과 올바른 출처와 뛰어난 문장에 대해서는 이민환(1573~1649)의행장과 김응조(1587~167)의 비문과 이광정(1674~1756)의서문과 권상일(1679~1759)의 발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내가또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1742년 5월 5일에 선성(예안) 김이만(金履萬)129)이 삼가 쓰다.
126) 신진구(申震龜, 1680~1754) : 자는 문수(文叟), 호는 죽애(竹厓), 본관은아주(鵝洲)이다. 1710년에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28년에 향시에 합격한 뒤 서울로 올라가던 중 이인좌의 난리 소식을 듣고 의병을일으켰으며, 1736년에 영남 유림의 소수(疏首)로 활약했다. 오봉 신지제의 현손이다.
127) 덕이……한다 : �논어� 헌문(憲問) 에 보인다.
128) 현포(玄圃)에……것이니 : 문장이뛰어남을 비유한 말로, 현포는 곤륜산(崑崙山) 위에 있다고 전해지는 신선의 거처이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육기(陸機)의 문장을평하여 “육기의 문장은 현포에 쌓인 옥과 같아서 야광주가 아닌 것이 없다.[機文 猶如玄圃之積玉 無非夜光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晉書 陸機傳)
129) 김이만(金履萬, 1683~1758) : 자는 중유(仲綏), 호는 학고(鶴皐), 본관은예안(禮安)이다. 1713년문과에 급제한 뒤 성
라. 별집을 개편하고 뒤에 쓰다(別集改編後識)
옛날 선조의 문집을 간행한 뒤에 종조부 상사공(上舍公)이 산일된 원고 약간 편을 뒤이어 수습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연보 1통을 작성하여 청전(靑田) 김이만(1683~1758)에게발문을 구하고 다시 이어서 간행을 하려고 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후에공이 세상을 떠나고 여러해 뒤 1782년에 내가 종숙부【상사공 신진구의 막내아들로 이름은 도하(道河)】의 명을 받아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공이 소장하던 일고를 꺼내어차례대로 편집하고 정리하여 별집 1권을 만들었다. 이어서연보의 초본 안에서 두루 찾고 자세히 뽑아서 사실대로 수정한 다음 �별집�과 합쳐서 1책을 만들었으니 대략 편집 체계가 갖추어 졌다.
대개 일찍이 종질(宗姪) 신정옥(申鼎沃,1741~1783)【신지제의 7세손】과 함께 줄곧 이 일을 힘썼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옥이갑자기 원통하게 죽고 종숙부도 세상을 떠났다. 정옥이 숨을 거둘 때 그 아우 정오鼎五에게 “내가 죽으면 자네가 내 뜻을 이어서 오직 선조를 위한 일에 힘을 다하도록 하게.”라고 당부하였다. 정오가 그 형을 장사지내고 나서 다시 별집을 다검토하고 정본을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병들고 노쇠한 탓에 미루다 보니 지금껏 손을 대지 못했는데올해 봄에 정오가 또 간절히 청하였다. 내가 비로소 병든 몸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구본舊本을 찾아내어 다시 글자를 교감하고 베껴 써서 완성본을 이루었다. 대개 일고에 실린 것은 본디 상사공上舍公이모은 것을 저본으로 하되 직접 새로 찾은 여러 편을 함께 엮었다.
예컨대 계해년(1623)에쓴 ‘승지를 사직하는 소[辭承旨疏]’는 우리 선대 할아버지 만년의 큰 절개임에도 원집에 수록되지 못하고 빠져 있었는데 이제 다행히 실리게 되었다. 다만 연보의 초본은 논의해 봐야할 대목이 없지 않고 규모와 형식도 부득이 확장하고 변경할 필요가 있어서 사실에비추어 다듬고 윤색하였다. 마침내 주제넘는 줄도 모르고 조목을 나누고 강령을 세워서 큰 글자로 표제(標題)를 쓰고 표제마다 두 행으로 세주(細註)를 써넣었는데, 옛체제를 조금 바꾼 것이 유감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바로 상사공의 초본을 받들어 그 일을 마무리하고종숙(從叔)과 종질(宗姪)의 뜻에 부응하여 유감이 남지 않게 하려던 것이니 결코 별도의 본을 만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초본에 실린 것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이어서 책 끝에 김이만의 발문을 붙여서 후인들이 상고할것이 있고 이 사실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 한다. 1789년 1월정축
일에 6세손 신체인(申體仁, 1731~1812)이 삼가 쓰다.
마. 전 형조참판 이민환(1573~1649)130)
예안 현감 때 임진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는데, 공이 있는 힘껏 구제하여 매일 한 말의 곡식을 나누어 주며 “인정이란많이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쓰기 마련이니 다급할 때에 돕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덕분에 고을 백성이 구렁텅이에 뒹구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원근에서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 모여 들었는데 공이 모두 구휼해 주며 “이들도 모두 나라의 백성인데어찌 피차를 구분하겠는
가.”라고 하였으니, 그리하여 목숨을 보존한 이가 매우 많았다.
오봉이 근시재 김해(金垓)와 1589년 증광시에 함께 급제했는데 임진란 중에 공은 본 고을의수령으로 있고, 김해는 의병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로교유하여 우의가 몹시 돈독했는데, 말이 시사에 미칠 때마다 서로 개탄해 하며 “우리는 마음을 합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만약 불행한일이 생기면 처자식을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김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의 가족이 모두 굶주려 죽을 지경이 되자 공이 이를 가엽게 여겨서 어린 아이를 관아에 데려다 두었는데 비쩍 말라뼈만 앙상한 몰골이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 부인이 공의 당부대로 직접 빗질하여 이를 잡고 때를씻어 주고는 급한 대로 우선 멀건 죽으로 빈속을 달래어 주고 한달이 지난 뒤에야 밥을 먹여서 살아날 수 있었다.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처음부터 끝 까지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공의 높은 의리는 옛사람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다
고 할 만하다.
1606(병오년) 가을에 통제사 종사관에 제수되었을때 행장을 비롯한 여러 물품이다 해지고 닳아 있었다. 어떤 이가 통제영은 여러 장인이 모여 있는 곳인데어찌하여 이렇게 닳고 해진 것입니까? 라고 묻자 공이 “내일찍이 통제사가 안팎으로 요구하는 물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안에 적힌 물목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 어찌 차마 그 사이에서 이름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종가의 조카를 딱하게 여겨 사당에올리는 제물과 제사에 쓰는 도구를 반드시 직접 마련해 주었으며, 자신의 토지를 나누어 조상을 받드는데보태어 주었고,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기일에 앞서 목욕재계하여 슬픈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늙고 병든 뒤에도 오히려 조카와 손자들을 가르치느라 조금의 여가도 없었다. 자제들이병환 중에 무리하지 말라고 청하자 공이 곧바로 물리치며 “어찌 차마 죽은 형의 자손들이 금수가 되게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근검하고 후덕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지조가 있었다. 평소 묵묵하게 자신을 감추고 자랑하지 않았으며 남의 선행을 듣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허물을 고치려 힘썼다. 항상 일찍 일어나서 머리에 갓을 벗지 않고 허리에 띠를 풀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사람들도 공의 흐트러진 모습을본 적이 없었다. 평생 화려한 옷을 몸에 걸친적이 없고 늘 무명옷을 입으며 “이 옷이 내게 무척 편하다.”라고 하였다. 평소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어서 관청에 있을 때에도 낮에는 공무를 보고 밤이면 늦도록 등불을 밝혀 책을읽었다. 부인이 “베옷을 벗고 벼슬길에 나간 것이 벌써 오래되었는데어찌하여 이토록 고생을 자처하십니까?”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글을읽는 것이 어찌 입신 양명을 위한 것일 뿐이겠소.”라고 하였다.
항상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내가 초야의 선비로서 외람되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너희들은 부디 십분 삼가 남을 흉보지말고 누군가 혹 자신을 비방하더라도 절대 따지지 말라.”라고 하였다.내외 친척들 중에 형편이 어려운 이가 있으면 몹시 딱하게 여겨 힘닿는 대로 도와주었으며, 친한하인들 중에도 춥고 배고프거나 병든 자들을 모두 구제해 주며 “이들도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내게 목숨을의탁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와 사랑이 지극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얻었다.
고을 사람을 대할 때 온화한 기운이 넘쳐서 부모가 있는 이와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것을 가르치고 형제가 있는 이와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우애를 힘쓰게 하였으며 유생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독서하기를권하였다.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같이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지않는 이가 없다.
조정에서 벼슬 할 때에 지조가 확고하여 나아가고 물러남이공명정대했고 몸가짐이 청렴하고 신중하며 대체를 지키는 데 힘썼다. 항상 “관직에 있는 자가 파직될 것을 두려워한다면 남에게 굽히지 않을 수 없다.”라고하였다. 이 때문에 벼슬하여 정사를 펼칠 때 반드시 자신의 뜻대로 행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범한 편지도 일절 한양에 보내지 않았다. 평생동안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일찍이 한양에 있을 때 인척인 어떤 선비가 찾아와 “아무 재상이 그대를 아껴 만나 보려 하니 그대는 꼭 찾아가서 보시오.”라고했으나 공은 답하지 않았다. 훗날 또 찾아와 말했는데, 공이 “초야의 빈한한 선비가 어찌 감히 권세가의 집을 찾아 가겠습니까.”라고하니 그사람이 발끈 화를 내고 가 버렸다.
이웃에 사는 조정의 인사가 한창 권신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공의 거처를 찾아와 묵으며 “어떤 재상이 그대를 언급하며무척 만나보려 하니 그대는 가서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공이 몹시 꾸짖으며 그대와 내가 모두 빈한한 선비로서 외람되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것만 해도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더구나 벼슬길이 트이고 막히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므로 출세하는데 급급해서는 안 되니, 나는 결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는 부디 신중하게처신하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고, 얼마지나지 않아 마침내 유배를 갔다.
130) �오봉선생문집� 권2, 215~27쪽.
바. 장대서원131) 묘우 상량문(藏待書院廟宇上樑文) - 이당규(李堂揆)132)
선현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계도하는 본보기를 남겼으니, 후학이 사당에 제향하여 높이 받드는 방도를 감히 늦출 수 있겠는가. 순식간에우뚝한 집이 완성되니 제비가 즐겁게 모여들어 축하하도다. 살피건대 문소(聞韶, 의성의 옛 이름)는큰 고을로 본디 문헌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졌도다. 문소의 땅은 화산(花山, 안동의 옛 이름)과 접하여 산이 병산(屛山)의 빼어난 기운을당기고,133) 물은 낙동강으로 이어져 물줄기가천곡(川谷)의 연원에 머물렀도다.134)맑은 기운이 성대하게 모여들어 많은 인물을 길러 내었도다. 기개와 충의가 넘치는선비로서 이따금 임금 위해 목숨을 바친 이가 어찌 없었겠는가. 공명과 문한을 다툰 신하로서 역사에 뚜렷이드러난 인물도 있었도다. 앞뒤로 이름을 드날린 사람이 많지만 사표라고 할 수 있는 이를 꼽으면 누구이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오봉선생은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향당에서 예의와 범절이 발랐도다. 스승을 찾아가 학문에 더욱 힘써서정원에 뿌리를 깊이 내렸고, 가업을 일으키려는 뜻이 늘 간절하여 집안의 보배라 일컬어졌도다. 여덟 살 때부터 이미 온갖 행실의 근원을 깨달았으니, 집안에 전해지는충효의 가풍을 이어 조상을 욕되게 하지않았고, 여막에서 슬퍼하고 예를 다함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잘알아서 했다. 관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어서는 조정에서 큰 공렬을 드날렸으니, 사헌부 관리로서 거침없는 필치가 부월(鈇鉞)135)보다 매서웠고, 밝은 해와 가을 서리 같은 기백이 간악한 귀신의 간담을 깨뜨렸도다. 도에따라 나아가고 물러나 여유가 있었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맡아 모두 잘 다스렸도다. 조무택(祖無擇)이 고을을다스리니 금세 학교가 지어졌고, 문옹(文翁)이 고을에 부임하자 문득 유학의 교화가 이루어졌도다.136)
임진년 병란이 일어났을 때 안진경(顔眞卿)이 의리에 분기한 전례137)를본받았고, 온 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부필(富弼)이 굶주린 백성 구제한 일138)을 다시 보았도다. 오직 밖으로 드러낸 것이 여유로웠던 것은 또한 본성을 기른 것이 깊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성인의 도를 기뻐하였으니 어찌 북쪽으로 배우러 간 진량(陳良)139)을 논하겠는가. 늘 자신이 뒤늦게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니동방의 주자(朱子)보다 뒤에 태어났도다. 독실하게 실천함이 이와 같으니 조예의 깊이를 알 수 있도다. 고요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140)을 걱정하느라 도리어 제 몸에 병이 깊은 줄도 몰랐고, 서산에 해가 지는 것141)을 슬퍼하다가 마침내 피로가 겹쳐 목숨을잃었도다.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 인륜을 밝힌 것은 백대의 사표가 될만했고, 목숨을 버리면서 효를 실천했으니 구천에서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생전에 이미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사후에 높은 명성이 더욱 드러났도다. 꽃다운 향기 맡으니 존경심이 일어나고, 남은 빛 우러르니 마음에잊히지 않도다. 모든 사람이 다투어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한데 마음이겠는가. 교화에 감화되어 아직도 국그릇과 담장에 보이는 것 같건만,142) 자취가점점 사라져서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어찌하랴.
이른바 향선생이 죽으면 제사를 지낸다143)는 경우라고 사대부들에게 물어보니 마땅한 일이라고 했도다.
이에 현인을 높이 받드는 정성을 다하여 영령을 편히 모실방도를 의논하던 중에, 이곳 장대의 땅을 둘러보니 바로 가숙이 있던 자리였도다. 옛 서당 규모를 그대로 따랐으니 바로 평소 선생이 소요하던 곳이고, 새로편액을 걸게 되니 옛 현인이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준 것14)이로다. 젊은이와늙은이가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목소리를 내고 원근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함께 힘을 보탰도다. 땅이 우리에게아름다운 장소를 내어 주었으니 아무 강과 아무 언덕이며, 떳떳한 본성을 가진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달려왔도다. 선비들은 책을 내려놓고 일을 도왔고 서민들은 공역에 달려와 유풍을 받들었도다.
…중략…
삼가 원컨대, 들보를올린 뒤로 사람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고 선비들이 의귀할 곳을 두어, 창문을 열고서 본보기가 멀리 있지않음을 생각하고 저기 마룻대와 처마를 바라보며 높은 산처럼 더욱 우러르리라. 비워 두었다는 비난145)을 사지 말고 마루에 올랐다는 비유146)를 받도록 힘쓰라. 단청이 더욱 아름다우니 성인의 도와 함께 빛나고, 문물이 다시 새로워지니이름난 터와 함께 무궁히 전하리라.
131) 장대서원(藏待書院) : 1610년 신지제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금의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지은 장대서당의 후신이다. 169년에 사당인 경현사(景賢祠)를짓고 1672년에 위판을 봉안할 때 이민성(李民宬)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702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고 김광수(金光粹)와 신원록(申元祿)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32) 이당규(李堂揆, 1625~1684) : 자는 기중(基仲), 호는 퇴촌(退村), 본관은전주(全州)이다. 168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의성 현령ㆍ홍문관 수찬ㆍ이조 정랑ㆍ동부승지ㆍ대사간ㆍ함경도 관찰자ㆍ이조 참판 등을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3) 병산(屛山)의……당기고 : 신지제가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을 뜻한다. 병산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으로,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柳袗)의 위패를 봉안했다.
134) 천곡(川谷)의……머물렀도다 : 신지제가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등과 교유하며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다. 천곡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벽진면 수촌리에 있던 영봉서원(迎鳳書院)의 후신 천곡서원으로, 1623년에 정구(鄭逑)를 1642년에 장현광(張顯光)을배향하였다. 정구가 이천(伊川)의 ‘천’과 운곡(雲谷)의 ‘곡’을 따서 이름을 고쳤다.
135) 부월(鈇鉞) : 임금이 신하에게 병권의 상징으로 내려준 도끼로, 주로 출정하는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
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136) 조무택(祖無擇)이……이루어졌다 : 신지제가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화를 펼친 것을 말한다. 조무택은 송나라 인종(仁宗) 때 원주 자사(袁州刺史)로 부임하여 학교를 세우고 문풍을 진작시켰고(古文眞寶』 袁州學記), 문옹(文翁)은 한(漢)나라 경제(景帝) 말기에 촉군 태수(蜀郡太守)로부임하여 성도(成都)에 관립 학당인 문옹석실(文翁石室)을 세우고 교화를 펼쳤다.(漢書卷89 循吏傳ㆍ文翁)
137) 안진경(顔眞卿)이……전례 : 당나라 현종(玄宗)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이 사촌 형인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舊唐書 顔眞卿傳)
138) 부필(富弼)이……일 : 송나라 사람부필이 청주 자사(靑州 刺史)로 있을 때 공사의 집 10여만 채를 가려서 유랑하는 백성 50여만 명을 거처하게 하고 국가의식량을 지급하였다고 한다.(宋史 食貨志)
139) 북쪽으로……진량(陳良) : 맹자가 진량을 평하여 “진량은초나라 출신이다. 주공과 중니(공자의 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인 중국에 와서 공부하였다.[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라고 하였다.(孟子 滕文公上)
140) 고요한……것 : 부모의 신변에 문제가 생김을 비유한 말로, 여기서는 신지제의 계모오씨(吳氏)가 병든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사람 고어(皐魚)가 “나무는 가만히있고 싶어도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모시려고 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韓詩外傳 卷9)
141) 서산에……것 : 죽음이 가까워짐을 비유한 말로, 여기서는 신지제의 계모 오씨가위독한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이밀(李密)이 임금의부름을 사양하며 쓴 진정표(陳情表) 에 “조모 유씨(劉氏)의 병이해가 서산에 지려는 것처럼 숨이 끊어지려고 하니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 아침에 저녁 일이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劉日薄西山 氣息奄奄 人命危淺 朝不慮夕]”라고 하였다.
142) 국그릇과……같건만 : 죽은 이를 간절하게 사모함을 말한다.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앉아있을 때면 요임금의 그림자가 담장[墻]에서 어른거리는 듯하고 밥을 먹을 때면 요임금의 얼굴이 국그릇[羹] 속에 비치는 듯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後漢書 李固傳)
143) 향선생(鄕先生)이……지낸다 : 한유(韓愈)의 양거원 소윤을 전송하는 서문[送楊巨源少尹序] 에 보인다. 고향출신 인물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지방 교화에 영향력을 행사하다 죽으면 사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함을 말한다.
14) 옛……것 : 장현광이 ‘덕을 쌓고 때를 기다린다.[藏修以待]’라는 뜻으로 ‘장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이 연보 에 보인다.
145) 비워 두었다는 비난 : 인정을 베풀지않는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상(離婁上) 에 “인은 사람이 거처할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이 가야할 바른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려두고 가지 않으니 슬프구나![仁人之安宅也 義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146) 마루에 올랐다는 비유 : 학문을 닦아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이르는 말로, 논어 선진(先進) 에서공자가 자로의 경지를 두고 “마루에는 올랐고 방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未入室]”이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