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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랑 목사와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새해 벽두 1월 1일을 기해 전국에서 기독교 단체들이 주관하는 통일 촛불기도회가 개최됐다. 포항에서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주찬양교회로 정해졌고, 의미 있는 통일촛불기도회로 치러졌다. 이 날의 기획은 언론인 홀리클럽 회원들의 노력이 컸다. 참고로 말하자면 언론인 홀리클럽은 기독교계의 좋은 소식을 취재하여 각 언론사에 배포하며 전파하는 단체인데, 12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상가건물에 월세를 주고 있는 30평의 작은 교회인데 포항시 기독교를 대표하는 통일촛불기도회가 작은 이곳에서 치러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주찬양교회를 담임하는 이사랑 목사는 20여 년 전부터 매년 중국선교를 감당해왔다. 준비해간 선교비와 옷, 학용품, 선물 등을 조선족에게 전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중 일제치하 때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젊은 시절 깡패였다가 회심하고 목사가 됐던 김익두 목사의 손녀와 증손자도 만나게 됐다. 당시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병자치유를 비롯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암울한 시절 사람들은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공산당의 손에 김익두 목사는 순교했다. 종교를 아편이라 교육하는 북한의 현실에서 후손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목사의 도움으로 증손자는 무사히 귀국했고, 현재 주찬양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있다. 이처럼 이 목사는 중국선교를 하면서 자연스레 탈북민과 만나게 됐고,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면서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포항에서 12년 동안 탈북민 목회를 하면서 이 목사는 수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감당해야 했다. 본인 소유였던 아파트를 처분하고도 수돗물이 끊기기 일쑤고, 전기도 수시로 단전될 만큼 어려워졌다. 물설고 낯선 한국에서 탈북민들은 취직이 어려웠고, 그나마 북한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줘야 했다. 그래서 이 목사는 대리운전,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수없이 다녔고, 베개에 닿기만 해도 잠에 곯아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목회와 일을 병행하는 것도 정신적 육체적 한계에 다다랐을 때 올 초 통일촛불기도회를 주찬양교회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소식을 들었고, 탈북민들에게 통일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기에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이 기도회에서 탈북민의 간증을 듣고 북한의 인권유린과 처참한 실상을 더 잘 알게 된 참석자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 탈북민들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통일’임에도 우리들이 잘 알지 못했고,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을 뉘우쳤다.
이 기사가 언론인 홀리클럽을 통해 국민일보와 포항지역 교계뉴스와 지역신문에 보도가 됐다. 그래서 주찬양교회는 얼마 전 남서울교회(화종부 담임목사)에서 후원하는 성전이전 지원금 수 천만 원을 받게 됐고, 탈북민들과 가까운 북구 창포동으로 이전했다. 지역교계에서도 십시일반의 정성을 보탰고, 탈북민멘토협의회는 의료봉사와 후원금으로 탈북민들을 도와왔는데 더 큰 헌신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놀라운 것은 탈북민들의 인식전환이다. 새성전 청소는 물론 이삿짐을 전부 자원하여 날랐고, 피 같은 돈을 헌금으로 드렸다. “이제 창포동 새성전은 탈북민의 사랑방이 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돼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이사랑 목사는 탈북민이 데려온 4살 여아 에스더를 지금껏 친딸처럼 키워왔다. 이제 고교생이 된 에스더의 애절한 기도가 잊히지 않고 귓전에 맴돈다. “탈북민 청소년들이 이 땅에서 방황하지 않고 잘 정착하여 통일 한국의 주역이 되게 해 주소서”
언약의교회 이금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