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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눈구멍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나
오연경
쓴다는 게 뭔가? 흩어져 있다가 꿈틀거리고 결합하기도 하면서 다시 돌아가는 것, 나가지 못하게 하고 꼼짝없이 나를 붙들어놓는 것,
당신을 내복처럼 껴입고 생각하는 것.
- 「시인의 말」
쓰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듯이,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았던 것, 언젠가는 쓰리라 생각했던 것, 생각지도 못했는데 느닷없이 써지는 것들에 붙들려, 무언가를 쓰느라 혹은 쓰지 못하느라 곤죽이 되어가고 있는 자. 이번 시집에서 최정례 시인은 저 엎드려 쓰는 자의 형상으로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는 의무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다. 시가 아니라 시 같은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데에는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 이번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에는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겠는 어떤 것이 시가 되어가는 과정 혹은 시가 되는 데 실패하는 과정이 교묘하고도 집요한 방식으로 겹쳐 있거나 숨겨져 있다. 하염없는 기다림과 조급한 안절부절 사이에서, 닿을 수 있다는 기대와 닿을 수 없다는 불안 사이에서 가까스로 시 같은 것을 쓰겠다는 것은, 매번의 쓰기마다 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방식으로 시가 되어감을 실천하겠다는 지독한 각오가 아닐 수 없다.
최정례 시인이 시 같은 것을 쓰겠다고 각오 아닌 각오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시가 되겠다고 터무니없이 덤벼드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문득 떠올라 귀찮게 굴며 밑도 끝도 없이 쳐들어오는 이야기들, 덩굴처럼 무성하게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어 올라가는 이야기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가 아니면 안 된다고, 당신이 아니고서는 떠돌다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채는 이야기들, 이야기들. 시인은 흘러오고 흘러가는 저 이야기들에 기꺼이 몸 대준 채, 무조건 기다리기만 하면 기차는 온다는 심정으로, 개천에서 용이 날 때까지 뒤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것은 역경을 뚫고 출세한 성공 신화가 아니라 개떡 같이 지지부진한 삶의 이야기에서 시 같은 것이 벌컥 솟아오르는 글쓰기의 신화로서, 이번 시집의 제목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것이다. 죽음과 시간의 노예가 되어 흘러가는 이 일상의 개천이 바로 시의 홈타운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으로서 말이다.
이야기들 사이의 방백, 누구보고 들으라고?
그런데 커다란 이야기 등짐을 진 낙타는 무슨 수로 시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가. 잊혀졌다고, 지워졌다고 생각한 기억의 파편들,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겠는 이야기의 조각들이 끝도 없이 시의 봉투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봉투는 부풀지도 않은 채 이상한 꿈의 바퀴를 하염없이 굴리며 굴러간다. “‘원고’를 첨부한다는 말 대신에 ‘궤도’를 첨부한다고 써 보낸”(「원고와 궤도」) 실수는, 그러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비밀에 대한 폭로인 셈이다. “총총한 씨앗 속에 또다른 이야기를/ 그 이야기 속에 숨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다 하다보면 딸기는 사라지고 마는”(「딸기는 왜 이렇게 향기로운 걸까」) 것처럼 이야기의 수레가 지나간 자리에 시라는 궤도가 남는다. “또다른 말을 숨겨야 겨우겨우 당신에게로 가”(같은 시)는 시의 궤도.
오늘 아침, 밖에서 누가 경적을 울렸는데 문득 그 시간표가 떠올랐다. 코트 안주머니 깊숙이 뭔가를 넣어두었다가 몇 계절이 지나도록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 말을 하리라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라고.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보면 갑자기 녹음이 짙어지는 곳이 나타난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그래 여기서 내리자 여기서 내려 살아가자, 그랬던 어떤 순간이 있었다. 그때처럼 갑자기 어떤 결심이 서는 순간, 그때에 하리라.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어떤 순간이 올지 어떨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꼭 한번은 말하고 싶었다. 그 시간표 위로 지나간 전철들을 도저히 다 셀 수는 없다. 이제 와서 그것들, 그 말들, 그런데 어느날은 그 이야기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죽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난 왜 이러는 것일까,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들을 생각도 없는데.
- 「그 시간표 위로」 부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의 때가 왔다고 주장하며 솟구쳐 오른다. 우연히 경적이 울리면 그 우연을 타고 기억의 한 조각이 끌려 나오고, 상관도 없는 또 다른 기억의 조각들이 거기에 엉겨 붙어 말이 되겠다고 안달을 한다. “피아노의 한 음이 이전 음을 누르며 튀어”오르듯, “우연이 길에서 헤매는 중인데 필연이 터치를”(「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하듯, 우연은 결심을 종용하고 결심은 필연을 기획한다. 이제 와서, 저 시간표 위로 지나간 무수한 시간들과 망각들을 무지르고 당신에게로 가겠다고, 기어코 닿아 보겠다고, 꼭 한번은 여기, 말들 속의 빈자리에 들어서 보겠다고 주장하는 저들에게 시인은 무방비로 끌려간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언젠가 하리라 생각했던 ‘이 말’의 의미나 내용이 아니라 말이 찾아오는 순간, 실수처럼 잠깐 왔다가 침몰해 가는 순간, 그 순간에 대한 망각과 기다림, 순간의 텅 빈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이 세상의 현실이 죄다 몰려가는 말들의 궤도 자체라 할 수 있다.
느닷없이 나타나 반복되는, 잠깐 제 모습을 드러내려다 지워져버리는 이야기들 앞에서 시인은 기꺼이 무력해진다. 마치 받아쓴다는 듯이, 그러나 무언가가 써지는 순간 늘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실패와 실패 사이에 무력한 중얼거림을 불쑥 끼워 넣는다. “난 왜 이러는 것일까,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들을 생각도 없는데”라거나, 아니면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펭귄이라니, 쓸데없는 생각이다”(「한짝」), “그것이 꿩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망각의 풀밭에서」), “나는 왜 이렇게 쓰는 걸까”(「너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나」), “처음부터 다시 말하라면? 처음으로 다시 방백 같은 걸 하라고 한다면?”(「빗방울 화석의 시대로」)이라는 심상한 혼잣말을. 그러나 난감함을 고백하는 듯한 이 구어체의 중얼거림이 이야기와 이야기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고, 이야기들을 흐르게 하는 리듬이 되고, 이야기들 사이에서 이야기 아닌 것이 움찔 비어져 나오는 틈새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저 혼잣말이 튀어 나오는 순간 쓴다는 행위가, 써나간다는 궤적이, 쓰려고 했던 것과 쓸 수 없었던 것과 끝내 쓰인 것들의 춤사위가 전면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무대 안에서 무대의 바깥에 대고 속삭이는 방백처럼, 이야기들의 한쪽 옆으로 비켜난 목소리가 ‘왜 이렇게 쓰는 걸까’라는 질문을 독자와 공모한다. 그러니까 방백으로 말하기(say in an aside)는 누추하고 서글픈 일상, 야비하게 망가져 뒹구는 삶의 이야기들을 짜깁고 누비고 제멋대로 뻗어가다 침몰시키는 시의 바늘구멍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천의무봉의 완성품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시가 되어가는 이음매의 한 땀 한 땀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쓰기의 비상과 추락을 보여준다. 우리가 술술 읽히는 이야기에 낚여 따라가다가, 문득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머뭇거리게 되는 곳도 바로 저 구멍이다.
쓰기와 죽음 사이에서, 아이러니의 모험
누구에게나 센티멘털하게 흘러가는 삶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누구도 “쎈티멘털 저니, 이 길 밖으로 벗어날 수”(「이 길 밖에서」) 없다. 이야기들은 이 길 안에서, 구질구질하고 객관화할 수 없는 “심정의 끈적거림”(「심정의 복사본」)을 붙들고 몰려온다. 이것들을 받아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지만, 쓴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이 길 밖에서 올빼미 눈 같은 것을 번득이면서”(「이 길 밖에서」), 어디 먼 데 갔다 온 것처럼 저편에서 내 삶을 바라보는 순간의 착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매혹적인 약혼녀 헤드비히를 사랑한다. 그녀 없는 미래란 생각할 수도 없다. 릴케는 침대에서 전전반측하다 팔꿈치로 벽을 치게 된다. 그 소리에 반응한 옆방의 여자가 릴케의 방문을 두드리고 다시 비몽사몽간에 그녀가 릴케의 팔을 베고 있고, 그런 식으로 여자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난 널 혐오해, 네가 싫단 말이다, 꺼져버려, 외친다. 파혼 통보를 받은 릴케는 떠나버린 약혼녀를 찾으러 가나 허사, 돌아와보니 검은 눈의 여인이 그의 침대에 죽은 채 누워 있다. 이런 것을 읽고 있는 나. 벗어날 수 없는 컴컴한 계단, 방문의 손잡이, 늙어빠진 이빨들,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저 팔꿈치, 내 마음이 아니라 저 삐걱대는 계단과 딱딱한 벽, 더러운 발바닥, 검은 미로의 갱도, 수시로 컴컴한 안개가 몰려온다. 설탕물같이, 독액같이, 더러운 시같이 끈적끈적.
- 「릴케의 팔꿈치」 부분
시는 삶을 사랑한다. 삶이 없는 시의 미래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시 쓰기의 전전반측은 필연적으로 죽음의 벽을 툭 툭 건드린다. 시는 “검은 눈의 여인”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시를 끌고 가는 것은 삶의 틈새에서 삐걱대는 죽음의 팔꿈치, 우연의 연쇄를 가장하여 컴컴한 안개를 몰고 오는 말들의 깊은 구렁이다. 그러니까 “릴케의 팔꿈치”는 사랑스런 삶을 버려둔 채 컴컴한 죽음으로 더듬어 올라가는 시간의 발걸음이자, 저 상투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시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말의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최정례의 시는 이렇게 릴케의 팔꿈치 같은 우연의 디딤돌을 놓고, 그것들을 디뎌 나가면서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쳇바퀴를 돈다. 만약 그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봐”라고 따진다면 “잃어버린 것을 찾고 싶은데 말도 뭘 잃어버렸는지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말의 고민)라는 항변이 돌아올 것이다. 저 회전하는 이야기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가 “말 속에 있는 빈자리”(같은 시),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잃어버렸던 말들이 돌아오는 시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최정례의 시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우회하고, 불길하고 섬뜩한 꿈의 텅 빈 구멍을 우회하고, 갑자기 왔다 가는 우연의 순간들을 우회하고, ‘나는 왜 이렇게 쓰는 걸까’라는 연극적인 혼잣말을 우회한다. 그는 시라고 생각하는 것, 시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향해 곧장 나아가지 못한다. 최대한 멀리, 시와 삶과 현실과는 아주 멀다고 여겨지는 것들에게까지 멀리 끌려갔다가 온다. 이 우회로는 삶이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가기 위한 경로이자 그 물음으로만 개척해 가는 경로다. 여기서 산문과 시, 꿈과 현실, 삶과 죽음, 쓰기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는 허물어지고 뒤섞여 “설탕물같이, 독액같이, 더러운 시같이 끈적끈적”한 아이러니가 된다. 최정례의 시는 이 매혹적이고도 치명적인 아이러니에 기꺼이 모험을 건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 때는 국문과를 그만두고 미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년 내내 그 생각만 하다가 결국 못 갔다. 병아리를 키워 닭이 되자 그걸로 삼계탕을 끓였는데 못 먹겠다고 우는 사촌을 그리려고 했다. 내가 그리려는 그림은 늘 누군가가 이미 그렸다. 짜장면 배달부라는 그림. 바퀴에서 불꽃을 튀기며 오토바이가 달려가고 배달 소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자 짜장면 면발도 덩달아 불타면서 쫓아갔다. 나는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 왜냐구?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기다린다. 우리는 서둘러야 하고 곧 가야 하기 때문에. 사촌은 몇 년 전에 죽었다. 심장마비였다. 부르기도 전에 도착할 수는 없다. 전화 받고 달려가면 퉁퉁 불어버렸네, 이런 말들을 한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전문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미대에 가지 못한 이야기, 병아리 때부터 키운 닭이 삼계탕으로 돌아온 이야기, 함께 어렸던 사촌이 문득 심장마비로 먼저 죽은 이야기, 불러서 달려갔더니 불었다고 퇴짜 맞는 이야기 들이 교묘하게 겹치고 포개진 이 시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 한쪽으로 비켜선 방백이 끼여 있다. “나는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 왜냐구?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그러나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는 고백. 그런데 간절히 쓰려 했지만 끝내 쓰지 못했던 짜장면 배달부에 대한 시가 저 숱한 이야기들의 우회로를 거쳐 지금-여기, 시의 자리에 막 당도하고 있다. 쓰고 싶었던 소망, 쓰지 못했던 좌절, 여전히 못 쓸 것 같은 불안을 붙들어 안은 채 힘겹게, 겨우겨우 시 같은 것이 쓰이고 있는 장면으로서 말이다. 이처럼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 감당해야 할 쓰기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향해 서두르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뒤로 흘려보낸 과거에서 온다. 삶의 바퀴는 불꽃을 튀기면서, 시간의 면발을 하염없이 뒤로 나부껴 보내면서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간다. 그러나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뒤에 남겨진 것들은 더 빨리 사라지고 지워지고 흩어져 버린다. 기다림은 늘 기다리는 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야 뒤늦은 기다림이 된다. 이미 지나가버린 무언가를 간신히 움켜쥐는 순간은 힐끗 저쪽 세상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한짝은 얼음 바다를 계속 바라보고 서 있”는데 “한짝은 느낌도 생각도 대책도 없다.”(「한짝」) 저 잃어버린 한 짝, 대책 없이 매달리게 되는 한 짝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갈피마다, 틈새마다, 얼룩마다, 골목마다 서성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 이 불가능한 기다림이야말로 시간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이고 쓰기 앞에 선 시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와 시의 꿈은 마주볼 수 있는가
최정례의 이번 시집은 자신의 쓰기에 대해 던지는 ‘왜?’라는 물음의 포복과 갱신으로, 쓰고 있는 나의 쓰기에 대한 쓰기를 되감아 올린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시는 한때 어떤 시의 꿈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셰익스피어의 시구에서 빌려온 첫 시의 제목, ‘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을 ‘시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로 오역하려는 것이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한때 어떤 시간의 꿈이었을 거야. 지금 나는 그 흐르는 꿈에 실려가면서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어. 곤죽이 돼가고 있어. 시간의 원천, 그 시간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이 흐르고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달덩이가 자기 꿈을 달빛으로 살살 풀어놓는 것처럼. 시간의 꿈은 온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였어. 장대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인 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시간은 흐르자고 꿈꾸었어. 이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자, 나와봐.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는 꿈. 아무도 못 말려. 그런 꿈을 꾸었던 그때의 시간도 자신의 꿈을 돌이킬 수가 없어. 시간과 시간의 꿈은 마주 볼 수도 없어.
- 「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전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흐르자는 것은 시간의 꿈이고 시의 꿈이다. 시의 원천, 시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은 지금도 흐르고 있고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귀한 보석을 시간의 낡아감으로부터 꺼내 보존할 수 없듯이, 시적인 것의 반짝임 또한 시의 낡아감으로부터 꺼내 보존할 수가 없다. 아무도 못 말리는 시의 꿈에서 시가 탄생하지만, 시가 되는 순간 시의 꿈은 깨질 수밖에 없다. 시와 시의 꿈은 마주 볼 수 없다는 데 시인의 좌절이 있지만, 시와 시의 꿈의 어긋난 이음매를 릴케의 팔꿈치로 기워 보겠다는 데 시인의 태도가 있다. 시인은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므로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는 아이러니에 전존재를 던진다. 그리하여 “꿈의 텅 빈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이 세상의 현실이 몰려가는 것”(「꿈땜」)처럼 시의 꿈, 말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잃어버린 목소리가, 내던져진 자들의 목소리를 소환한다.
이번 시집의 3부를 이루고 있는 장시, 「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는 닿을 수 없는 당신에게 주어진 ‘목소리의 거처’라 할 수 있다. 기다리고 원망하고 그리워하고 두려워하던 당신, 누구냐고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던 당신, 실수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던 당신, 끊임없이 쓰고 또 쓰도록 몰아붙이던 당신에게 목소리가 주어진다. 여기서 당신은 내가 되고 나는 당신이 된다. 이제 당신은 나를 당신이라 부르며 나의 이상한 꿈과 섬뜩한 불안을, 나의 소화불량과 두통과 구토를, 나의 시달림과 안달복달을 그쪽 세상의 말로, 그쪽 세상의 감각과 논리로 설명해 준다. 당신은 나의 증세에 대해 “도처에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 곳에도 없는”, “당신 꿈속을 휘젓고 다니면서 함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당신 머리 위에 사막 위에 떠 있게 된” 자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닿을 수 없어 무력하던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그쪽에서 나에게 닿아 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다. 나와 당신은 서로 유리된 세계에서 불안의 증세로, 꿈으로, 모래바람 소리 같은 것으로 잠시 잠깐 스칠 뿐이다.
‘오래 전 뱃속에서 지워낸 아기’라는 모티프는 페미니즘의 자장 따위 아랑곳없이, 지워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지워지지 못한 존재, 꿈속을 떠다니는 존재, 오직 나의 “지금 이 시간”, 나의“지금, 여기”로만 도래하는 어떤 존재로 그 의미를 확장해 가면서, 한 편의 시를 저토록 긴 호흡과 장중한 리듬으로 끌고 가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목소리를 얻은 자는 나 자신이면서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한때의 있었음으로부터 지금-여기의 있음으로 도래하겠다는 죽음의 그림자이자 시의 꿈의 얼굴이다. 그가 바로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었던 무엇, 삶과 죽음의 근원적 모순과 결핍, 틈새와 얼룩, 균열과 파편들이 소용돌이치는 검은 눈구멍의 주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쓰는 걸까.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나방처럼 너를 그리며, 너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고 있나.”(「너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나」)라는 방백은 이제 와 여기, 무대 바깥의 목소리로부터 답을 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는 이번 시집의 한가운데를 찢고 열린 ‘검은 눈구멍’이다. 이 시는 알 수 없는 저 심연의 눈으로, 나머지 다른 시들에서 중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이상한 꿈의 쳇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며 쓰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로 하여금 쓰게 하는 것, 시의 꿈을 마주 보라고 곤죽이 되도록 몰아가는 것은 “허공중에서 쉬지 않고 껌뻑거리는 해골 같은 검은 눈구멍들”(「검은 눈구멍」)이다. “폐인공위성이 떨어지면서 갑자기 이상한 시간이 도래했”(「이수역 7번 출구」)다고, “기억은 직조하듯 잘 나가다가도 느닷없이 움찔한다”(같은 시)고, “꽝 소리가 났는데 세상은 멀쩡”(「흔들렸다」)하다고, “희미해지며 무뎌지다가 다시 떠올라 더욱 뚜렷해진다”(「에로틱 숫자」)고 어리둥절해서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올 때, 그때 거기 검은 눈구멍의 부름이 있다.
엄마, 여보, 마이 스윗 하트, 얘들아, 여러분, 그리고 당신, 당신을 사랑해 반짝이고 굴러다니고 휩쓸려다니며 쉬익 소리를 내는 것, 그 속에 내가 있었는데 당신은 나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내 생각의 모습인데 당신은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나무둥치를 붙잡고 당신을 부르고 싶다. 엄마, 여보세요, 소나무, 밤나무, 백양나무, 아저씨, 난 사실 그렇게 용기 있는 자가 아니에요. 난 있는 힘을 다 발휘해 당신을 부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당신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닿지가 않아요. 당신은 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당신 대신 유칼립투스 나무를, 당신 대신 싸이프러스 나무를, 당신 대신 나를 부르다니요. 닥터 장, 여보세요, 사장님, 팀장님, 아빠, 은경 씨, 날 어떻게 좀 해줘 오늘 뿐이야. 내일은 없어, 지금 이 순간뿐이야, 안녕, 아니 안녕할 수 없어, 그러나 내던져진 자로서 할 말은 이것뿐이야, 잘 있어 안녕.
- 「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 부분
이 슬프도록 아름답고 대책 없이 무력한, 내일이 없어 간절하고 순간이어서 처절한, 갇히지 못해 지나가고 어쩔 수 없어서 뜨거운, 타오르는 목소리는 시의 꿈의 것이다. 시의 꿈은 “그 누구를 그리워하면 그것이 얼른 달려와 당신과 하나가 되는 곳, 당신이 나이며 내가 당신인 곳, 모두가 하나라서 내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곳, 쓸쓸함이 무엇인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부른다. 시는 시의 꿈이 흘려보내는 저 간절한 부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가. 시와 시의 꿈은 마주볼 수 있는가. 이쪽에서는 그쪽을 꿈꾸고 그쪽에서는 이쪽을 부르지만 서로 유리된 채로, 서로를 내던진 채로, 각자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되어 생각으로만, 그리움으로만 서성일 뿐이다. 그러나 최정례는 쓸 수 있음과 쓸 수 없음의 사이에서 하염없이 서성이고 머뭇거리고 걸려 넘어지는 시인의 운명을, 예술가의 태도를 결코 저버리지 못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꿈속에서 지나친 것과 지금 지나치고 있는 것”, “딴 세상과 이 세상 사이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인터뷰」)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이들의 인터뷰(inter-view)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가렵”고 “가려우니 긁을 수밖에”(같은 시) 없어서 시 같은 걸 쓴다. 비장함은 사절이다.
그나저나 나는 시 같은 걸 쓴다. 별로다. 나는 시 같은 걸 쓰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다. 한밤중이다. 그건 괜찮다. 바위틈으로 기어들어 부풀리고 굳어져서 아무도 꺼내지 못하게 할 테다. 그러나 다시 내장 빼앗기고 반으로 잘려 던져지는 해삼의 밤이다.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찍는 밤이다. 간이고 창자고 쏟아놓고 기다려주마. 이 내장 삭아 젓갈 되면 그 아득한 맛에 헤어나지 못할까. 헤이, 미식가 여러분, 세상이 한판에 녹아내릴까.
- 「해삼내장젓갈」 부분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협상 카드”로 내장을 내놓으면 내장은 가져가고 몸은 반으로 잘려 던져지는 게 해삼의 처지다. 다시 잡히면 한 번 더 잘려서 넷이 되고 여덟이 될 것이다. 매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호의적일 리 없는 삶에 호되게 당하다 보면, 분하고 원통한 이야기들은 해삼처럼 끝도 없이 증식한다. “내가 내 속을 긁어내 환상의 꾸러미를 만들건 말건, 내장 긁어내 보였다 다시 삼키건 말건” 해삼의 내장은 쌓이고 삭아서 시가 된다. 헤어날 수 없는 아득한 맛이 될 테니 한 번 맛보시란다. “헤이, 미식가 여러분, 세상이 한판에 녹아내릴까” 호기롭게 권한다. 최정례 시인의 최후의 협상 카드는 유머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프로이트는 두려워하고 있는 무력한 자아에게 초자아가 건네는 다정한 위로의 말을 유머라 했다. 발등을 찍히고 찍힌 데 또 찍히는 인생인데, 두려움과 그리움이 눈 비비며 같이 사는 구덩인데, 저 무력한 존재에게 “별로다”와 “괜찮다”가 한끝 차이라는 위로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최정례 시의 이 아득한 맛에 녹아내렸다면 당신은 미식가가 맞다. 당신의 머리 위에 “당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뜨거운 사막 같은 불안”(「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이 있다는 것을 맛보는 것이 우리의 미식(美食)이니까. ‘이것들이 대체 뭔가’, ‘쓴다는 게 뭔가’ 따지는 듯, 억울하다는 듯, 덤벼보겠다는 듯, 그러나 두렵다는 듯, 불안하다는 듯 묻고 또 묻는 시인의 안달복달 덕분에 시와 시 아닌 것을 감식하는 우리의 혀가 무한히 증식한다. 최정례 시인은 시간과 죽음의 노예가 되어 흘러가는 이 개천의 일상에서 또 다시 용꿈을 꿀 것이다. ‘시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오연경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월간 "시와표현" 2015, 5월호
첫댓글 어쩜 제가 이 시집을 보고 느낀 그대로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평론으로 풀어낸 오연경이란 분이 누군지 검색해보았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를 납득시키는 능력이 놀랍군요~~~^^**
다시 한번 용꿈을 꾸셔서 새로운 시의 세대를 이룩해주시길 기원하고 싶네요
우리가 해삼내장젓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