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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폭포
지장봉(877m)이 원류인 이 폭포는 한탄강 서쪽에 깊숙이 자리해 있다. 높이 약 18m의 폭포가 이루어내는 맑고 시원한 시냇물과, 주변의 울창한 수풀로 경치가 좋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고을 원이 한 재인(才人)의 아내가 절색인 것을 보고,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에서 줄을 타게 하여 죽게 하고 아내를 차지하려 하자, 그는 자결하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불렀다고 한다. 서울에서 재인폭포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의 당일 코스이다. 군사작전 지역에 속해 토, 일요일에만 개방되지만, 5~9월에는 평일에도 검문 없이 통과할 수 있다.
재인폭포에서 한탄강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연천댐, 전곡선사 유적지 한탄강 유원지, 숭의전과 같은 볼거리와 쉬어갈 곳이 많다. 보개산 너머 굽이굽이 연천읍 내산리 가는 길은 선경을 보는 듯하고 동막골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피서지로 유명하다.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 재인폭포 매표소 031-834-7274
이 숭의전의 관리도 고려 왕족의 후손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도였다. 아울러 선조때는 여조왕씨 후예로 참봉을 제수하여 전각의 수호와 향사를 보게 하였다.
* 문의 : (연천군청 문화관광계) (031)839 - 2063
고대산(高臺山)의 유래는 "큰고래" 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것은 신탄(薪炭)지명에서 연루된 것으로 보이며 "방고래"(땔나무를 사용하는 온돌방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고랑을 고래하고 함)를 이르는 것으로 고대산은 골이 깊고 높아 고대산(高臺山)이라고 한다.
또한, 1907년 11월 4일 의병진 150명과 임진강에서 의병들을 토벌하러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20연대 8중대와 연천에서 격전한 후 신탄막에서 흩어지고 의병진 60명이 고대산에서 다시 일본 군대와 치열하게 교전한 곳으로서, 우리 선열들의 용맹스러운 민족정기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대산 관리사무소 031-834-3064 연천군청 031-834-2211
한탄강 일대는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용암석이 많다. 이 용암들은 현무암으로 용암이 식을 때 생긴 기포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곰보돌이라고 부른다.
한탄강 범람으로 인해 수차례 기반시설이 훼손과 수해로 한탄강 국민관광지 조성변경계획 용역을 마치고 2005년부터 2007년부터 2007년까지 조성을 완료할 예정이고 현재는 본 사업의 추진으로 대부분의 상가들은 이주 보상으로 철거된 상태이다.
한탄강 관광지 관리사무소 031-832-9572
한국전쟁 이전에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던 기차는 이젠 신탄리역에서 회차한다. 신탄리역에서 옛 철원역을 지나 휴전선 너머 평강 사이에는 철길이 없어진 상태이다. 북한에서는 평강-세포-고산-통지원-원산 등을 지나 고원까지 이어지는 경원선을 '강원선'으로 바꿔 부른지 오래다. 현재 신탄리역 근처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경원선 철도의 남쪽 중단점을 알리는 푯말이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 후 초성리역이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수복된 이후인 1956년 10월 1일 신망리역에 을종위탁 발매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한탄강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관광인파가 몰리면서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1975년 6월 28일 한탄강역이 개설되어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신탄리역 031-834-8887
서울에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동막계곡은 수도권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당일치기로 호젓한 피서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특징은 어른허리 깊이의 소가 군데군데 있어 가족 끼리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알맞고 계곡 주변에 기암괴석과 자연림이 아우러져 자연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문화관광과 031-839-839-2789, 2065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km지점에 위치한 무장공비침투로는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 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 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북한은 당시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를 1968년 1월 21일 서울로 잠입시켜 대통령 관저(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시설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68년 1월 19일 21시경 파주시 법원리에 거주하는 나무꾼이 신고하여 군·경 합동으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1968년 1월 20일부터 1월 30일까지 전개되어 사상자 29명, 도주 1명, 체포 1명(김신조)의 전과가 있었으나 우리 군·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현재 무장공비침투로에는 그 당시 이 곳에 주둔한 미군 제 2사단 방책선 경계부대에서 설치한 경계 철책과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무장공비의 모형물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관할 군부대에서는 1999년 10월 1일자로 민통선 북방 지역 출입 통제를 일부 완화하여 사전 신청에 의한 견학이 가능하다.
열두개울은 기암절벽과 맑은 계곡이 손잡고 선경을 빚는다. 선녀바위, 무장소, 보안소, 만장바위, 평바위, 도라소, 돌묵소, 봉바위, 쌍무소, 용수골소 등의 명소가 10리에 걸쳐 펼쳐진다.
옛날, 다리가 없던 시절에 법수동에서 덕둔리로 가려면 열두차례나 개울(산내천)을 건너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5개의 다리가 놓이고 길이 뚫려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열두개울' 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인근에는 1992년 12월에 온천 지구로 지정받은 포천시 소재 신북온천이 있다.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문화관광과 031-839-2065, 2789
당포성은 당개 나루터 동쪽에 있다 ![]()
▲ 당포성 내부와 동벽
차는 이제 숭의전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당포성(堂浦城)으로 향한다. 당포성은 미산면 삼화리와 마전리를 잇는 삼화교 오른쪽 임진강 현무암 단애 위에 위치한다. 전체적인 모양은 삼각형으로 호로고루와 비슷하다. 남벽과 북벽의 길이가 각각 200m이며, 동벽의 길이는 50m이다. 남북의 두 벽은 10m가 넘는 단애로 천연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동쪽에는 성벽을 쌓았는데 높이가 6m이다. 않는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니 언덕 속으로 축성된 돌들이 보인다. 그런데 호로고루처럼 정교해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호로고루보다는 덜 중요했던 성으로 보인다.
▲ 당포성에서 바라 본 임진강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와 신라, 고려와 조선시대 기와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고구려 기와보다 신라의 기와가 더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대 호로고루보다 그 활용도가 훨씬 낮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기와편 외에 토기편도 발견된다. 이것 역시 신라계의 유물이 더 많다. 북쪽으로 잔출하던 신라의 본진은 대부분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나루를 건넜을 테지만 일부는 당포성을 공격하여 임진강 북쪽의 교두보를 확보했을 수도 있다.
▲ 당포성 안의 탱크
우리는 임진강을 따라 나 있는 남쪽 단애를 따라 성안을 살펴본다. 남쪽을 어느 정도 구경을 하고는 발길을 북쪽으로 돌린다. 뭐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발길을 동벽쪽으로 돌린다. 그런데 중간쯤 철조망이 쳐 있고 그 안에 녹이 슨 탱크가 서 있다. 탱크 위로는 위장망이 쳐 있다. 군사시설 지역으로 더 이상의 접근은 불가능하다. 3357부대장 명의의 접근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당포성에 성황사라는 절이 있었음이 미수 허목의 시를 통해 확인된다.
▲ 당포성의 석축
당포성 동쪽 성벽을 나오면서 동벽의 석축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사실 정교하게 쌓은 성은 아니다.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쌓아올린 모습이 보인다. 이들 석축 위로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알 수 있다. 길가로 나오니 주변에 인삼밭이 펼쳐진다. 길옆으로는 망초대가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여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다.
▲ 최병수 해설사가 설명하는 겸재 정선의 '적벽강'
우리의 다음 답사 코스는 은대리 성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은대리성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바로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향한다. 가는 차 안에서 최병수 해설사는 연천 현감을 지낸 신유한(1681-1752)이 겸재 정선(1676-1759)과 적벽강을 유람하며 지은 시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지냈던 것 같다. 미수 허목의 구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유람하기도 했다. 62세가 되는 1742년 10월 신유한은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 관찰사였던 홍경보와 함께 연천의 적벽강을 유람한다.
▲ 연천군 3D 지도
이때 남긴 글이 『의적벽부(擬赤壁賦)』이며, 신유한이 부(賦)를, 정선이 그림을, 홍경보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의적벽부』를 보니 적벽강 주변의 "나뭇잎은 떨어지고 산은 맑으며, 강은 소리 내어 흐르고 돌은 튀어나왔다. (木落山淸 江鳴石出)" 그들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 "강산과 풍월은 본시 나누어질 수 없음과 세상을 만든 조물주의 신묘함 (江山風月 本無分域 是造物者化成之妙)"을 알게 된다. 이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뛰어난 재능을 서로 알아보고 오랜 기간 교류한 대표적인 화공이며 글쟁이였다. 그러나 정선에 비해 신유한은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아직 신유한에 대한 연구와 소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고롱이
▲ 미롱이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지이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전곡리 유적의 규모가 가장 크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1978년 미군 병사 그렉 보웬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그에 의해 채집된 4점의 석기가 아슐리안 석기로 밝혀졌고, 1979년 이후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 주먹도끼
이처럼 전곡리 선사 유적지는 구석기 연구의 틀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당포성을 떠난 지 20분 후 차는 이곳 전곡리 선사유적지(사적 제268호)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유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미롱이와 고롱이라는 두 마스코트를 지나야 한다. 미롱이의 미는 미래를, 고롱이의 고는 고대를 상징한다고 쓰여 있다. 전곡 구석기유적관에는 모조품만 가득
▲ 전곡 구석기유적관 이곳을 지나 길을 따라 가면 좌우로 과거 구석기시대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재현물들이 있다. 왼쪽으로는 짚으로 만든 움집이 있다. 이 움집은 옛날 집 뒤에 만들어놓던 김치꽝을 생각나게 한다. 석기의 모조품도 있다. 이곳을 지나 약간 언덕진 곳에 이르면 왼쪽으로 구석기인들의 기술을 보여주는 돌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앞 쪽으로 토층전시관이 보인다.
▲ 전곡리 유적 발굴 도표
토층전시관 1층에는 발굴과 관련된 기록과 자료가 있고, 한층 아래 지하에는 토층을 수직으로 보여주는 전시공간이 있다. 1층에 보니 '전곡리 구석기유적 연도별 발굴기간 및 출토유물 통계'가 나와 있다. 1979년 3월부터 2001년 2월까지 무려 11차례나 발굴 조사를 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4개 지구로 나누어 발굴을 했으며, 11번 중 두 번은 사적구역 외곽을 조사했다.
▲ 토층전시관 내부
1979년(1차)부터 1983년(6차)까지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연합 발굴조사팀이 작업을 했다. 나중에는 국립 중앙박물관과 국립 문화재 연구소 도 참여했다.
토층전시관을 보고 나오면 한쪽으로는 넓은 공간에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4개의 체험동이 있어, 석기를 만들고 토기를 빚고 선서놀이 체험 등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여유가 없어 그곳에 들를 수가 없다. 애들의 교육장으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나오다 보니 화강석으로 만들어 놓은 큰 주먹도끼 복제품이 보인다. 주먹도끼는 역시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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