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고양지역 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전쟁 발발 전 고양지역 역시 대구 10월 항쟁, 여순사건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45년 12월 21일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의 결성대회에 고양청년회가 참가했다.(동아일보, 1945. 12. 22)
조선건국청년회는 1946년 5월 18일 고양군 신도면, 용두리, 원당면에서 지부결성식을 열었다.(동아일보, 1946. 5. 24)
고양군에서는 1947년 2월 16일 독청원과 민청원이 충돌하여 연행된 40명이 전원 무죄 언도를 받게 되자 박근영 검찰관이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47. 7. 20)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고양지역에서 북한의 선거에 참여한다는 연판장을 돌리는 활동이 있었다.(동아일보, 1948. 12. 11)
이 사실은 고양지부 등에서 모아진 ‘스탈린 원수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을 휴대하고 개성을 경유하여 월북하려던 박동이 체포되어 알려졌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전쟁 발발 당시 고양지역은 국군 1사단의 방어구역이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1사단 일부(13연대?)가 6월 28일과 29일 고양지역의 행주나루와 이산포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후퇴했으며, 인민군과의 격전은 없었다.
인민군 점령기 고양, 파주, 강화 등 경기서부지역에서는 9월 28일부터 30일 사이에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고양에서는 태극단원 등 주민들이 9월 28일과 30일 덕이리 은장, 내무서 뒷산, 오금리 등에서 집단희생당했다.
반면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의심되는 신도면의 ‘타공결사대’에 의한 희생사건이 있다.
이들은 태극단과 마찬가지로 1950년 7월 3일 인민군 점령하에서 결성된 반공비밀결사단체였는데, 국군 수복 후 신도지서를 도와 치안활동을 하면서 1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런데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1950년 11월 25일 이들을 체포한 후 ‘이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부역자들의 조직’이라고 발표했다.
타공결사대는 간부 30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일반 대원 200여 명은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되어 1‧4후퇴와 함께 마을을 떠나야 했다. 군법회의 결과 부대장 1명이 사형당했다.
이후 고양 타공결사대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받은 유상문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하고 항소하면서 자신은 사건 당시 월북 중이어서 현장에 없었으며 고양경찰서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공결사대 사건에 대해 김창룡 암살사건을 교사했던 허태영 대령은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김창룡이 성과를 과장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실제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의 조사결과 발표는 시기와 가해주체 등에서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다.
(김창룡 암살사건은 1956년 1월 30일 발생했는데, 당시 김창룡은 소장이었다.
군법회의의 최고 책임자는 백선엽이었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강문봉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공국진 전 헌병사령관도 연루되었다. 강문봉은 4․19 혁명 후 석방되었다. 1948년 초여름 수도사단 1연대 정보장교 김창룡이 고문치사사건을 일으켰다. 희생자는 원효로에 살던 시민이었다. -출처, 백선엽 『길고긴』, 324~329쪽)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 치하 고양지역에 대한 유엔군의 진입은 미 해병대가 행주로 진입한 1950년 9월 20일부터였으며, 9월 28일 고양지역 전역을 수복했다. 미 해병대에 편입되어 고양지역을 수복한 국군 해병대와 경찰은 각 마을에 진입하는 즉시 인민위원장 등 부역자를 색출하여 확인하는 대로 사살했다.
지도읍 현천리와 화전리에서는 공은억 등 치안대원들이 황재덕, 지희덕 등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하여 인공치하 화전리 인민위원회 사무실이었던 곳에 감금해 두었다. 9월 20일경 행주나루터로 상륙한 해병대가 들어와 치안대가 잡아 놓은 인민위원장을 넘기라고 하자 이들을 넘겼다. 그러자 해병대가 그 자리에서 등 뒤에서 총을 쏘아 사살했다.
국군 해병대와 미군은 1950년 9월 20일 한강을 도하하여 행주지역을 수복하고 일부는 수색으로, 일부는 의정부 방면으로 향했다. 고양지역은 의정부 방면으로 진출하던 미군과 국군 해병대에 의해 9월 28일 완전히 수복 되었다.
9월 21일 국군이 행주와 능곡을 수복하면서 이 지역에서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태극단 등 우익단체에 의해 행주 창고와 능곡지서로 연행되었다. 일산지역에서는 능곡이 수복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경의선을 따라 능곡까지 오기도 했으며 이 자리에서 연행된 주민들도 있었다.
고양경찰서의 공식 복귀 이전에 미 해병대에 파견되어 있던 경찰관들이 선발대로 들어와 피난하지 못했던 잔류 경찰관을 중심으로 태극단, 치안대 등 민간치안조직을 구성했다. 이들은 연행할 주민의 명단을 작성한 뒤 먼저 수복된 지역의 지서 임시유치시설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치안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0월 2일 주민 40여 명이 고양경찰서로 연행되는 등 10월 6일까지 8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었다.
고양경찰서는 주로 중면에서 활동하던 치안대를 중심으로 의용경찰대를 조직했다. 1950년 10월 6일경 고양경찰서원들이 복귀하면서 치안대 일부는 의용경찰대로 재편되었다.
의용경찰대는 간부로 대장 1명, 부대장 2명, 정보부장 1명, 경비대장 1명, 심사사찰부장 1명이 있었으며, 처음엔 이진 등 13명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태극단이 의용경찰대와 함께 치안활동에 참여하면서 총살에도 가담했다.
1950년 10월 6일부터 고양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10월 6일은 고양경찰서 사찰계가 복귀한 날이며 민간치안조직 중 일부가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로 재편된 날이기도 하다. 고양경찰서 임시유치시설은 고양경찰서 맞은편에 있던 양곡창고였다. 양곡창고에서 끌려나온 주민들은 굵은 철사로 양팔을 묶였고 2km정도 떨어져 있는 금정굴로 이송되었다.
금정굴 입구에는 이미 경찰과 의용경찰대, 태극단이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고 의정부로 가는 줄 알고 있던 주민들은 산 중턱에서 공포에 떨며 총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한번에 5명씩 산으로 끌려가 굴 입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등 뒤에서 날아오는 총을 맞아 15미터 굴속으로 떨어졌다.
고양 금정굴사건의 마지막 날인 10월 25일 20명이 학살당하는 현장에는 고양경찰서장까지 직접 가담했다. 의용경찰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서장은 2명을 직접 총살했다.
결국 200여 명의 고양군 주민들이 인민군 점령 3개월 동안 인민위원회 등에 협력했다는 빌미로 고양경찰서 유치시설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고양 금정굴에서 집단학살당했다.
가해자 대부분은 학살이 고양경찰서장 등 상부의 지시로 인한 즉결처분이었다고 생각했으므로 합법적인 행위로 느끼고 있었다. 1995년 총살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은 153구였으며 조병세 등에 대한 형사사건기록에는 180~200명이 희생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고양지역에서는 고양경찰서에 의한 금정굴사건 외에도 각 지서에 의해 학살이 저질러졌다.
송포지서는 면 인근의 주민 200여 명을 가좌리 양곡창고에 감금했다가 대부분 한강변에서 집단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10월 20일 희생자 피원기, 피원순, 이범인은 집에서 묶인 채 끌려 나갔는데, 1주일 후 이산포나루터 부근에서 피원순의 시신과 나머지 2명이 묻혀 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송포면 덕이리에서는 1950년 10월 중순경,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송포지서에 갇혀 있던 안종덕, 안종옥 형제가 덕이리 뒷산 새벽구덩이에서 희생당했다.
벽제면 성석리에서는 치안대장 홍씨(홍기세)에 의해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20여 명이 옛 성석국민학교 교실에 갇혔다가 10월 30일경 벽제지서로 이송된다면서 끌려가다가 도중인 귀일안골 뒷골계곡 방공구덩이에서 희생되었다. 이 경우 일가족이 몰살당했으므로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었으며, 친척들조차도 치안대의 위협이 두려워 도와줄 수 없었다.
신도면 화전리 황뇌성은 1950년 10월 10일경 수색으로 끌려가던 중 다락고개에서 희생당했다. 그의 동생 황을성은 황뇌성이 희생된 지 보름 후 현천동 공동묘지에서 살해되었다.
이때 같은 마을 주민 정범성과 남전, 먹골의 주민 등 10여 명도 함께 살해되었다. 지희덕은 치안대 사무실로 쓰였던 화전리 주민 김광식 소유의 한옥집 사랑채로 끌려 가 여러 날 감금되어 있었다.
그 후 살아남은 지희덕, 김순범 등 부역혐의자들은 마을 주민들의 탄원에 의해 1950년 10월 20일 신도지서에서 풀려났으나 다시 이웃 마을 덕은리의 치안대 최봉구, 김순돌 등 4명에 의해 같은 날 오전 마을에서 체포되어 바로 화전리계곡으로 끌려 가 살해당했으며, 오후 4시경 희생자 지희덕의 시신이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공은억은 2차 연행 당시 “이들이 큰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 용서해 주라”고 부탁했음에도 덕은리 치안대 최봉구 등은 “현천리 난점 수수밭에 숨어있던 정보국 국군 대위를 잡은 사람들”이라면서 사살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향동 주민들이 화전계곡에서 희생당했다.
이 외에도 행주내리에서 63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나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았다.
<미군폭격 피해>
한편, 미군 폭격에 의한 피해 사실도 확인되었는데, 1950년 7월 13일 미 공군의 기총사격으로 중면 일산리에 거주하던 김문선이 사망했다.
이상 고양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