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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파워 리더십
꿈을 이룬 대통령
제임스 M. 스트록 지음/최종옥 옮김
느낌이있는나무/2002년 11월/342쪽/12,000원
▣ 저 자 제임스 M. 스트록
제임스 M. 스트록은 작가이자 강연자이며 샌프란시스코 소재 경영컨설팅사의 대표로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다수 기업에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태평양연구소의 선임이며 저서로는 『레이건 리더십』 등이 있다.
▣ 역 자 최종옥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한항공, 코카콜라, 외국계 금융기관에서 자금 및 국제금융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북코스모스 대표이며 「파이낸셜뉴스」 등에 경제, 경영 분야 서평을 기고하고 있다. 역서로 『유럽제국주의 경제학』, 『리눅스 혁명과 레드햇』, 『일대일 마케팅』,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 『나도 3M에서 일하고 싶다』등이 있다
▣ Short Summary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특권을 가진 최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인물로 여겼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의 대부분이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에 의해 계발된 것임을 감안할 때, 자신에 대해 내린 그의 정의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루스벨트는 리더십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과거 루스벨트가 보여준 리더십은 독단적이고 과격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활동하던 시기는 혼란한 변화와 변혁의 시기였다. 루스벨트는 그 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구현했고, 오늘날에 와서 그의 리더십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루스벨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당시로서는 전통을 벗어난 독특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요구되는 강력한 리더십의 원형을 보여줄 것이다.
▣ 차 례
서문, 1909년 9월
제1장 당신이 어디에 있든 리더가 되어라
제2장 두려움과의 작별
제3장 항상 배움
제4장 역경 속에서도 용감하게 일하기
제5장 몽둥이 휘두르기!
제6장 행동, 행동 그리고 또 행동
제7장 최고의 인재를 확보하기
제8장 팀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 내기
제9장 리더십-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제10장 행동을 말로 표현하기
제11장 호전적인 단어들 - 부당한 비판에 대응하기
제12장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루스벨트 파워 리더십
꿈을 이룬 대통령
제임스 M. 스트록 지음/최종옥 옮김
느낌이있는나무/2002년 11월/342쪽/12,000원
서문 1909년 9월
미합중국이 기초를 세우기 시작할 20세기의 먼동이 트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실험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중앙정부가 공화 민주주의를 설립한 것은 세계 역사상 가장 대담한 시도였으며 그 역사는 이제 겨우 100년에 지나지 않았다. 1861년부터 1865년의 기간 동안 미국을 폐허로 만든 피로 얼룩진 남북전쟁은 여전히 전쟁의 상흔을 남기고 있었으며, 20세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19세기는 전례 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고 미합중국은 주어진 운명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뉴욕타임즈」가 1900년 1월 1일자에 20세기가 보다 밝은 문명의 새로운 새벽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1901년 5월에서 11월까지 뉴욕의 버팔로에서 개최된 범미주 박람회는 새로 시작되는 20세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상징하고 있었다. 9월 6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 박람회 참석을 위해 버팔로 음악의 전당에 도착한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는 환호하는 청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때 앳된 얼굴의 리온 촐고스라는 25세의 청년이 마치 혈관 속의 박테리아처럼 점점 더 늘어나는 환영인파를 뚫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대통령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수건으로 감싼 촐고스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 나오면서, 숨겨진 권총에서 맥킨리의 복부를 향해 두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초인처럼 위풍당당했던 대통령은 입술을 악물며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부통령 루스벨트는 라 모테 섬 넬슨 피스크 전 주지사의 저택 잔디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급보를 받은 루스벨트는 즉시 버팔로를 향해 출발했다. 저격 사건이후 수일만에 맥킨리는 회복되었다. 9월 10일 화요일, 루스벨트는 맥킨리가 실질적으로 위험한 상황은 벗어났다고 믿고 버팔로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뉴욕 주의 아디론닥스로 향했다.
9월 13일 금요일, 루스벨트는 한 호수 근처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행보를 멈추었다. 그 때 길 아래쪽에서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와 그에게 전보를 내밀었다. 전보에는 대통령이 다시 위독해져 그가 즉시 버팔로로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밤새도록 마차를 달려 마침내 토요일 동이 틀 무렵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루스벨트는 맥킨리 대통령이 이미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적 여정의 종착지를 향해 마련된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9월 14일 토요일 오후 버팔로에 도착하자마자, 루스벨트는 한 개인주택 안에서 맥킨리 행정부의 각료들에 둘러싸인 채 지방 판사 앞에서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선서를 했다. 미국 역사상 다섯번째로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맥킨리 대통령의 사망으로 국민들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다소 특이한 대통령이 행정수반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42세 생일을 2주 남겨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가장 젊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행정부내 하급각료 자리에서 오른 지 4년도 채 안되어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한 것이다. 그의 급격한 부상만큼이나 그의 인격 역시 모든 면에서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맥킨리는 1860년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 남북전쟁 세대들이 겪은 쓰라린 과거의 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루스벨트는 새롭게 등장한 신세대를 대표하고 있었다. 1858년에 태어난 그는 20세기 초 미국 자체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가진 최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기자신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여겼다. 그가 보여준 리더십의 대부분이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에 의해 계발된 것임을 감안할 때, 자신에 대해 내린 그의 정의는 적절하다. 루스벨트는 리더십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루스벨트가 경력을 쌓아온 궤적은, 당시로서는 전통을 벗어난 독특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루스벨트는 삶에 대하여 이미 100년 전에 오늘날 기업가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즉 오늘날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네자신닷컴(yourself.com)’의 최고경영자가 되라는 톰 피터스의 철학을 추구했던 것이다. 리더십에 관한 루스벨트의 교훈은 리더십 역시 삶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리더가 되어라
루스벨트는 키가 5피트 9인치에 달했으며, 몸무게는 200파운드에 약간 못 미쳤다. 그는 신체가 건장했으며, 이는 오랫동안 지속해온 운동과 끊임없는 육체노동의 결과였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강한 의지로 꾸준히 노력하여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수도관 같이 가는 다리로 휘청거리듯 걸으며 항상 기가 죽어지내고, 너무도 허약한 나머지 10대 불량소년들에게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던 그였지만 스페인-미국전쟁 때는 쿠바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러프 라이더(Rough Riders) 부대의 영웅적 리더가 되었다. 또한 그는 뉴욕 맨하탄의 ‘실크 스타킹’이라는 부유층 거주지역에서 성장하였지만, 스스로 ‘약골 소년’에서 거친 서부의 존경받는 목장주로, 그리고 탐험가로 변신했다. 전문가를 능가하는 자연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자연에 푹 빠졌던 루스벨트는, 때로는 피에 굶주린 냉혹한 승부 근성을 지닌 열렬한 스포츠광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리더십 교훈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현재 당면한 일에 있어 전력투구를 하며 미래에 대한 예측을 토대로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 당대와 현재의 비평가들은 그를 초보적이며 구태의연하고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며 무시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리더십의 힘 대부분은 단순함과 투명성에서 나왔다.
1895년, 36세에 루스벨트는 뉴욕 시 경찰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허리케인과 같은 영향력으로 부패한 관료조직을 강타했다. 맨해튼 부유층 지역인 실크 스타킹 출신이자 당시 애송이 위원인 루스벨트는 민주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화당 내에서도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냈다. 그의 신랄한 공세는 부패한 정치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당시 정치적 성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후원자들과의 관계조차도 긴장감에 빠뜨렸다.
1896년 공화당의 윌리엄 맥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루스벨트의 관심은 워싱턴으로 쏠렸다. 상원위원 로지와 다른 친구들은 루스벨트를 해군성 차관으로 천거했다. 맥킨리 대통령은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 임명되자마자 지나치게 저돌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루스벨트는 해군성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새로 임명된 해군성 차관인 루스벨트의 기질에 대해 맥킨리가 우려할 만도 했다. 1898년 2월 25일, 해군장관 롱이 휴가중이어서 장관직무 대행을 하고있던 루스벨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당시 세력을 확장하려는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듀이 제독에게 전문을 보내 전시상황에 대비하여 필리핀에 주둔 중인 스페인 함대를 막도록 명령했다.
올바른 국가 정책을 통해 국가에 헌신하는 것 이외에도 루스벨트는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가하여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 그 해 4월 마침내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되자 루스벨트는 자신의 머리뿐 아니라 신체 역시 조국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가족과 친구의 거센 반대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해군성 차관의 자리를 내던지고 쿠바에 주둔 중인 육군부대에 자원했다. 쿠바전투에서 그는 리더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 말을 타고 무방비 상태로 공격에 노출된 채 부하들을 지휘했다.
1898년 여름 스페인-미국간의 쿠바전투를 마치고 여름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루스벨트는 국가적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전공은 당대의 유명기자들에 의해 언론에 자세히 보고되었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공화당은 믿을만한 주지사 후보자로 루스벨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루스벨트는 1898년 11월에 130만 표 중 18,000표도 안 되는 근소한 차이로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공화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플래트는 새 주지사 루스벨트가 중요 정책에 대해 사전에 당과 사전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잘 지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결국 자기 방식대로 업무처리를 했다. 루스벨트는 고위직 인사 임명과 규제 법안 그리고 자원 보존 관련 주요 정책에 대해 플래트 및 및 양당의 구태의연한 세력들과 자주 의견을 달리 했다.
플래트는 서서히 그리고 아주 은밀하게 루스벨트를 뉴욕에서 쫓아내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1899년 후반 부통령 가렛 호바트가 돌연 사망하자 플래트는 루스벨트를 한직으로 몰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부통령 유고 시 그 직위의 승계에 관한 헌법조항이 없어, 부통령 자리는 1900년 선거 때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 부통령직은 정치적으로 일종의 종착역으로 간주되었다. 부통령의 업무는 상원의원회의(1년 동안 단 몇 일밖에 열리지 않는) 의장 역할이 전부였다. 그 자리는 어떠한 제도적 기반도 없었으며 집무실도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한 부통령에게는 대통령이나 뉴욕 주지사처럼 대저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플래트의 이러한 의도에 강력히 저항했지만 결국 동부의 당 고위급 지도자들과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서부 대표들의 뜻밖의 연대로 루스벨트는 부통령후보로 지명되기에 이르렀다.
1901년 3월 4일 맥킨리의 승리로 환호에 가득 찬 대통령 취임식 퍼레이드에서 눈에 띄지 않는 들러리로 나서야 했을 만큼 부통령으로서 루스벨트의 역정은 외로운 것이었다. 플래트는 맥킨리와 루스벨트의 취임을 지켜보며 “테디(루스벨트의 애칭)가 사라지는 순간을 보기 위해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낙관적인 사고방식은 완강한 도전에 부딪힐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만약 내가 한직으로 떠밀린 것이라면, 적들은 내가 그 한직을 보다 유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 기간 동안 여행과 연설을 하고, 늘 그래왔듯이 집필과 서신 교환에 몰두했다.
1901년 9월 맥킨리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루스벨트는 20세기 여명에 미국인의 삶이 되어버린 질주하는 기관차의 기관사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나의 유기적 통합체로 통일되지 않고 서로 흐트러진 파편조각 같았던 그의 범상치 않았던 인생 경험들이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어, 그는 새로운 모습의 국가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루스벨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포함하여 어떠한 고위직 지도자 자리에서도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재의 자리가 공직 생활의 마지막 자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루스벨트는 어떠한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고 이러한 태도가 결국 그의 삶을 범상치 않은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두려움과의 작별
루스벨트는 인생을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인생 후반부인 1912년 독자적인 ‘불 무스(Bull Moose; 숫사슴)당’ 후보로서 대통령에 출마한 것은 그에게 가장 힘든 전투였다.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두 거대 정당의 조직과 유능한 후보자에게 동시에 도전했던 것이다. 이들 중 한 명은 그가 직접 자신의 공화당 후계자로 지명했던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으며, 다른 한 명은 뉴저지 주지사이자 민주당 후보인 우드로 윌슨이었다.
11월 선거를 앞두고 몇 주 동안 맹렬하게 선거운동을 벌이던 백전불굴의 루스벨트도 10월 중순경에 이르자 과로로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10월 14일 유세를 위해 밀워키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오픈카를 타고 연설장으로 향했다. 루스벨트는 모자를 들어올려 군중의 환호에 답례했다.
그때 지지하는 군중 속에서 권총을 지닌 한 정신 이상자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총을 든 손이 정면에서 루스벨트를 겨냥했다… 한 발의 총성… 마치 말에 채인 것 같은 충격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한줄기 고통… 몸은 시트위로 무너져내렸고… 피와 고통과 싸늘함… 아수라장….
차가운 죽음의 숨결이 그의 목을 엄습했다. 참모진과 가족들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며 루스벨트는 약해진 목소리로 단호한 결의를 비쳤다. ”연설을 하게 해주게. 이번이 나의 마지막 연설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번 연설은 꼭 해야만 해.“
유세장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피에 젖은 셔츠를 보여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몸은 떨렸지만 정신만은 또렷한 루스벨트는 한시간 반 동안 꼬박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의 진정한 힘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설문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온몸으로 보여준 용기에서 나왔다.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루스벨트는 몸을 돌려 의사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과 갈 준비가 되었으니 당신이 마음대로 하시오.”
의료진은 가슴의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늑골 안에 박혀있는 총알을 찾아냈다. 다행히도 총알은 그의 연설원고와 안경집을 관통했다. 루스벨트의 반대자들도 그의 이 같은 행동에 존경심을 나타냈다. 「뉴욕 헤럴드」는 다음과 같은 제목 하에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우리는 그의 정치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의 기개는 존경한다.“
루스벨트는 일찍부터 ‘용기야말로 첫 번째 가는 미덕’이라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에 내포된 지혜를 깨달은 셈이었다. 용기는 다른 모든 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임을 인식한 그는 자기계발에 장애가 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로 결심했다.
항상 배움
두려움을 극복함으로써 성격을 변화시킨 루스벨트는 책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루스벨트의 이미지는 행동하는 사람 - 목장주, 카우보이, 군인, 탐험가, 사냥꾼 - 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배움에 대해 무모하리만큼 강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루스벨트는 꾸준히 하루에 한두 권, 심지어는 세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항상 자신의 호주머니에 책을 한 권 지니고 다니거나 백악관 기둥 한 곳에 책을 감추어 놓곤 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애를 특징 지운 행동들과 독서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내 말안장 주머니나 탄약 배낭에 항상 몇 권의 책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종종 한낮에 나무 아래에서 쉬는 동안에 책을 읽거나, 내가 죽인 짐승의 시체 옆에서, 혹은 캠프가 설치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책을 읽곤 했다. 때로는 손 씻을 물을 구하기 어려워 책들은 피, 땀, 총 기름, 먼지로 인해 더러워졌다.
루스벨트는 독서가 인간 최고의 도덕적 본능을 강화시켜준다고 믿었다. 아마도 루스벨트는 “리더가 되려는 사람은 육체적 건강을 위해서 영양제를 섭취하는 것처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도 비타민을 섭취해야 한다.”고 말한 비즈니스 컨설턴트 제임스 론과 의견을 같이 했을 것이다. 또한 루스벨트는 자서전을 비롯하여 『1812년 해전』, 『서부의 승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서를 집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고 지도자가 학습한 것은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성과에 반영되어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조직의 중심 목표는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용감하게 일하기
1884년 2월 13일 지지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던 뉴욕주 의회의원인 루스벨트는 갑자기 날아 온 한 통의 전보를 받고 급히 기차역을 향해 달렸다. 그의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아내 엘리스는 항상 딴 세상 사람인 듯한 고결함을 지녔다. 밝은 미소를 띈 그녀의 모습은 늘 온화해 보였다. 그녀의 몸가짐은 좋은 가문 출신임을 반영하듯이 교양 있고 사려 깊었으며, 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의 빛 바랜 사진들은 여전히 그녀의 매력을 전해주고 있다. 1878년 가을 루스벨트가 첫눈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당시 그녀는 열 일곱, 그는 스무 살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일인 1880년 10월 27일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당신으로 인해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고 말했다.
루즈벨트는 자정 직전에야 집에 도착했다. 그는 아내의 침상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내는 완전히 혼수상태였고 다음 날 오후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그녀는 겨우 스물 둘이었다. 루스벨트는 2월 14일 일기에 ‘X’ 자를 크게 그리고 단 한 마디만 적어 넣었다. “내 삶에서 빛은 사라졌다.” 다음 날인 2월 15일 일기는 텅 비어 있었다.
엘리스를 잃고 난 뒤 그는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다. 그는 일생 동안에도 이러한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예컨대 1918년, 1차 세계대전에 미국 조종사로 참전한 그의 아들 퀀틴의 전사 소식을 들은 주간에도, 루스벨트는 공화당 전당 대회 연설을 포함한 모든 일정을 예정대로 고수했다. 이러한 태도는 루스벨트가 스스로 끌어낸 역경을 치료하는 해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한 개인이 역경과 자신의 과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가가 역경이나 과오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역경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역경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모진 태도로 인해 비난을 면할 수 없겠지만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로지 최선을 다해 순간의 삶에 충실하려는 그의 진취적인 태도는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다.
몽둥이 휘두르기!
루스벨트 대통령이 가진 여러 이미지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투사의 이미지이다. 그는 학창시절에 불량배들에게 당하기만 했던 그는 인생을 싸움의 연속으로 보게 되었다. 루스벨트가 알바니의 주지사 관저에 있던 당구 테이블을 레슬링 매트로 바꾼 사실은 결코 놀라만한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 시절에는 권투게임도중 왼쪽 눈의 시력을 잃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인생의 모든 면에 싸움과 투쟁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정치에 입문하면서 그는 자기 스스로를 ‘소극적 선(善)’ 에서 분리 시켰다. “책상 앞에 앉아 학문만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할 수는 없다.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이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격하는 것이지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해군성 차관시절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적 측면에서도 기선제압은 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보장한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무용지물이다. … 평화의 여신은 정의의 칼을 수반할 때만 힘을 발휘한다.
국내에서, 루스벨트는 자신의 국가관과 일치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여겨지는 개인이나 단체들을 의욕적으로 그리고 가혹하리만큼 매섭게 ‘몽둥이(Big Stick)’를 휘둘렀다. 대통령 재임 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루스벨트는 공격 자세를 취했다가도 신속하게 화해의 태도를 취했으며, 이 같은 방식으로 아주 성공적인 협상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1905년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중재함으로써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루스벨트는 국내에서 중요한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도 강력한 힘을 사용했다. 그는 국가 경제를 붕괴시키고 폭력사태를 유발할 수 있었던 1902년의 안드레이사이트 탄광 파업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의회와의 협상에서도 그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국가가 철도사업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한 ‘헵번 법(Hepburn Act)’과 파나마 운하 건설의 법적 승인을 얻어낸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행동, 행동 그리고 또 행동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정치적 사안들은 워싱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금융을 움직이는 힘은 뉴욕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설적인 미국의 금융가 J.P. 모건은 공금융과 사금융 모두를 장악하고 있었다. 1913년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되기 전까지는 일개 시민인 모건이 미국의 실질적인 중앙은행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모건은 신임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법무장관에게 독과점금지법 위반혐의로 모건이 최근 설립한 노던 증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이미 지시했다는 급보를 전해받았다. 통상적으로 있었던 사전 경고도 없이, 모건의 뛰어난 위상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도전을 받은 것이었다. 모건은 직접 대면해서, 남자대 남자로서 대통령과 반드시 대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백악관을 방문했다.
“혹시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잘못했다면 각하의 사람(법무장관)을 내 사람(모건의 변호사)에게 보내면 그 잘못을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건이 말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저의 철강 연합이나 나머지 회사들도 공격하실 계획이십니까? “물론 아닙니다. 위법 행위만 없다면 말입니다.”
노던증권 소송은 이미 불편한 상태에 있던 금융단체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당내의 거센 비난과 함께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루스벨트는 ‘앞으로 경기 침체가 되면 모두 루스벨트의 책임’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상황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04년 대법원은 노던증권에 대한 루스벨트의 독점 금지조치에 대해 이유 있는 것으로 판결했다.
노던증권 소송사건은 링컨이래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의 지위가 중앙정부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루스벨트의 수많은 활동 중 최초의 것이었다. 훗날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야망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하는 일을 워싱턴과 링컨의 노선에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다.” 노던증권 소송사건 이후 루스벨트는 주도적으로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이 20세기의 세계무대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기초를 쌓았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말은 부드럽게 하되, 행동은 강력하게 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는 국회가 논쟁만 하고 있을 때 자신의 특기대로 신속하게 파나마 운하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상징적이고 전략적인 요충지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기를 주저하는 미국인들을 설득하여 세계수준의 해군함대를 구축했다. 마치 ‘큰 방망이(Big Stick)를 휘둘러대는 듯한 그의 열정적 모습이 너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나머지 비평가들은 그를 위험한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8년에 이르는 자신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 미국은 “단 한발의 총탄도 외국에 대해 발포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리고 이처럼 가장 호전적인 사람이 후일 노벨평화상을 받은 최초의 미국인이 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탁월한 행동력을 토대로 대통령직의 업무영역에 대한 종전의 경계를 서서히 변화시키더니 종국에는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루스벨트는 한 마디로 현대적 의미의 대통령 직무를 창안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운 전통 중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도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리더십 -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
리더의 첫 번째 의무는 지휘하는 것이다. 쿠바 전투에서 자신의 부대인 러프 라이더의 훈련 중 루즈벨트는 자신의 팀원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심이 지나쳐 결국 지휘관과 사병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힘든 훈련을 마친 후, 루즈벨트는 말에서 내리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제군들 원하는 만큼 맥주를 실컷 마셔라. 돈은 내가 낸다.”
그 이야기를 들은 루즈벨트의 직속 상관이자 친구인 레오나드 우드 대령은 그 날 저녁 루스벨트를 자기 막사로 호출했다. 우드는 장교가 자기 직속 부하와 함께 술을 마심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군기상의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막사를 나온 루즈벨트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몇 분 후 막사로 되돌아 가 말했다. “각하, 제가 정말 되먹지 못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리더의 첫 번째 의무는 지휘하는 것임을 깨달은 루스벨트는 그후 자신이 기꺼이 병사들과 궁핍을 함께 할 용의가 있음을 보이는 한편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었다. 얼마 후 자신이 의도적으로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루즈벨트는 부하들이 자신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루스벨트가 넬슨과 같은 위대한 제독들에게 확실하게 매료된 것은 함장 임무의 많은 부분이 대체로 리더의 역할을 상징한다 것을 인식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함장은 자신의 배와 승무원의 보호를 절대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조타석에서 그만이 원거리를 내다보고 바라볼 수 있는 수단과 책임을 부여받는다. 그는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머리 속에 그린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승무원들이 이를 따르고 그에 대해 책임지도록 한다. 그는 팀의 업무를 자신의 비전과 연결시키고 자신의 비전을 보다 폭 넓게 이야기함으로써, 모든 승무원들이 자신의 행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게 한다.
행동을 말로 표현하기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루스벨트의 말은 여전히 생생하게 들린다. 러시모어 산에 있는 얼굴들을 자세히 볼 때마다, 우리는 성격이 엄격한 워싱턴, 명석한 제퍼슨, 성자로 추앙을 받으며 우수에 잠긴 링컨을 숭상한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무언가 좀 다르다. 비록 그가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19세기에 살았음에도 그의 얼굴모습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생생함과 친근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의사전달 능력은 그의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 퇴임 후 보낸 시간은 윈스턴 처칠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가운데 어느 것도 웅변의 재능만큼 귀하지 않다. 당으로부터 버림받고, 친구들에게 배신당하고, 또한 자기 사무실에서 쫓겨난다 해도 웅변의 힘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다.” 1912년 불무스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전에 뛰어든 루스벨트는 조직적인 후원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자신의 의사전달 능력에만 의존했다.
후일 그의 주장 - 특별히 그가 요구한 민족주의와 국민에게 군사준비의 당위성을 일깨웠던 - 은 인기를 잃고, 기존 정치세력으로부터도 기피를 당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그의 비전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고,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그 불꽃을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호전적인 단어들 - 부당한 비판에 대응하기
1912년 선거철이 다가왔을 때 한 유명 정기간행물은 ‘루스벨트냐 아니면 공화당이냐!’라고 신파조로 제목을 붙인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루스벨트는 특기가 거짓말하기이고, 이중 성격으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최초의 인물이며, 최초의 허풍쟁이 이고, 최초의 불량배이다.” 그밖에도 그는 영원한 거짓말장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머리를 가진 반미치광이 천재 등등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루스벨트는 비평을 공인생활을 하자면 피할 수 없는 일로 생각했고, 차라리 비난과 욕설을 자극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일이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설적인 비평을 아주 중요한 배움의 원천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어떤 것도 비판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단 그 비평이 선의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고, 정직하고 지혜로운 것이며, 훼방대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는 소위 건설적인 의견제시와 비평을 위한 비평을 확연히 구분했다.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루스벨트는 평생을 살아면서 본보기의 효과 - 좋은 본보기이든 나쁜 본보기이든 간에 - 를 깊이 받아들였다. 항상 인격을 중시하고 그 인격은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행한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은 루스벨트는, 자신의 생활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했다. 루스벨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영웅으로 숭배하는 사람들 -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로 루스벨트 자신의 아버지, 워싱턴, 링컨 - 을 본받고자 했다. 그들은 항상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스벨트는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쟁영웅들을 존경해 왔던 루스벨트는, 쿠바전투에서 그 영웅들의 미덕을 몸소 보여주었다.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그는 나태한 장군들을 불러 등산을 하게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위급 장교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3일 동안 90마일을 달리도록 지시했다. 당연히 불평과 함께 독재자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단 하루만에 말을 타고 100마일을 주파함으로써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으로서 신변의 안전도 개의치 않고 새로 발명된 잠수함을 타고 한 시간 이상 잠수하기도 했다. “내가 잠수함을 탄 가장 큰 이유는 내 자신이 시도하기 꺼리는 일을 장교들이나 사병에게 시킨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1917년 미국이 마침내 3년 동안 유럽을 뒤흔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루스벨트는 국회가 승인한 지원병으로 구성된 사단 중 한 부대를 지휘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윌슨은 루스벨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실망한 루스벨트는 대신 자신의 네 아들을 유럽 전장으로 보냈다. 딸 에텔도 프랑스에서 간호사로 복무했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 퀀틴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온 세계를 통틀어 국가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봉사한 것으로 알려진 리더는 마지막까지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삶의 활력
루스벨트는 1880년 봄 대학 졸업을 준비할 무렵 종합검진을 받은 결과 심장이 약한 것으로 진단 받았다. 의사는 앞으로 너무 심한 육체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며 직업선택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의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박사님이 금하시는 것을 전부 하려고 합니다. 내가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야 한다면 삶이 짧다고 해서 안타까울 일도 없을 겁니다." 루스벨트는 변신을 꾀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벽에 부딪혔다고 자포자기하기보다는 '60세까지만 철두철미하게 내 삶을 끌고 가자.'고 침묵으로 맹세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저서 『전력 투구하는 삶』은 바로 자신의 인생철학 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언급했다. 루스벨트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만들어가고, 동시에 마음과 정신세계를 강건하게 하여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세계적인 업적들 때문에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정을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만한 칭찬을 덧붙였다. “아이들이 책 보다 더 좋다.”
6명의 자녀 중 5명을 출산한 두 번째 부인 에디스도 나름대로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강인한 성격은 루스벨트를 현실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의 가계부 균형을 맞추고, 남편 동료들의 성격을 예리하고 빈틈없이 평가하는 것은 종종 그녀의 몫이었다. 에디스는 ‘소박한 삶이 건강한 삶이다.’라는 남편의 신념을 어떤 의구심도 없이 공감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부부는 그들의 사회, 경제적 위치라면 의당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유혹들을 한 점 아쉬움 없이 떨치고 중류층의 평범한 삶을 고수했다.
두 번째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이란 일종의 긴 전쟁이다. 한 전투에서의 승리는 단지 또 다른 전투를 위한 기반을 제공할 뿐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국 모든 사람은 패배를 맛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간의 승리가 의미 있는 것이었고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면, 마지막 패배인 죽음이 그 동안 이룩했던 값진 승리를 퇴색시키지도 않고 퇴색시켜서도 안 된다.”
1918년 10월 27일 일요일 루스벨트는 60세를 맞이했다. 그의 정치 역정도 서서히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자, 국민들은 다시 루스벨트의 덕목에 감사하게 되었다. 외롭게 징병을 주장한 그의 선견지명이 옳은 것이었음이 입증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참전을 주장한 그의 노력뿐 아니라 가족들의 노력에 의해 더욱 부각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분위기를 충격적으로 보여주듯 공화당은 11월 5일 총선에서 10년만에 처음으로 상/하 양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시 루스벨트를 1920년 대선의 확실한 공화당 후보로, 그리고 금번 총선에서 가장 혁혁한 공로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수년동안 너무나 심하게 혹사당한 루스벨트의 몸은 이제 쇠약해지고 시각과 청각도 장애가 생겼다. 1919년 1월 5일 일요일 루스벨트는 몇 개의 사설을 쓰고 다듬는 등 하루종일 집필 작업에 몰두했다. 그 날 저녁 에디스와 함께 화로 앞에 앉은 루스벨트는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사가모어 언덕을 사랑하는지 모를 거야.” 에디스라는 인생의 화롯불 앞에서 양손을 따뜻하게 데우고, 루스벨트는 다음날 아침 새벽 4시가 지날 무렵 잠든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정적이었던 부통령 토마스 마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도 루스벨트를 그가 잠들어 있을 때 데려가야 했다. 그가 깨어 있었더라면, 한 바탕 대전투가 일어났을 것이다.”
1월 8일, 수요일, 오이스터 베이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루스벨트가 늘 바랬던 것처럼 간소한 예식이었다. 음악도 찬사의 말도 없었다. 하객들은 가족과 친구,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몇몇 고위 인사들의 참석한 것이 전직 미국대통령의 장례식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암시였다. 성조기로 덮인 떡갈나무관은 근처 영스 묘지로 옮겨졌다.
전력 투구하는 삶에 대한 루스벨트의 본보기는 바로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하는 데 있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비범한 리더십과 가정 생활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삶과 일을 묶어주는 공통 요소는 봉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믿고 있었다. “우리는 봉사하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동기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당신은 부서진 조각들 밖에 얻지 못할 것이며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루스벨트의 리더십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가 이룬 업적보다는 오히려 그의 인격에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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