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믿어라
- 세계를 경영하는 욕망의 두뇌들 -
볼프강 헤를레스 지음 / 장복희 옮김
생각의 나무/2000년/414면/11,000원
▣ 언론에 비친 『자신을 믿어라』
- '세계를 경영하는 CEO들' 그들은 어떻게 성공했나
우리는 왜 그토록 CEO의 성공에 주목하는가? 그들의 성공 비결에 귀 기울이는가? 그들은 왜 위대한가? 『자신을 믿어라』(부제: 세계를 경영하는 욕망의 두뇌들)는 이러한 의문에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다. 독일의 세계적 저널리스트인 헤를레스가 21세기 최고 경영자 18인과의 현장 인터뷰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글로벌 경영인의 성공전략을 생생하게 담았다. 기자가 CEO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해답을 찾았기에 현실감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드러나 있어 마치 그들을 만난 듯한 착각에 들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CEO들의 열망은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적이고 그들의 통찰력은 핵심을 비껴 가는 법이 없어 무섭다. 생각의 틀을 깨는 기상천외한 발상, 위험을 무릅쓴 시도, 개혁을 주도하는 강력한 리더십, 교묘한 마케팅 전략 등이 흥미진진하다. CEO의 가장 큰 역할은 개혁의 필요성을 감지하여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기존의 제도와 관행, 가치관을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집념은 무모하리 만치 저돌적이고 냉혹하다. 그러나 그 성공신화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 면모 또한 이 책은 간과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경영자들! 그들을 최고로 만든 특별한 성공 전략, 그들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우상으로 여겨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 그는 자신의 기업을 대중 문화의 일부처럼 경영한다. 그는 컴퓨터 전문가보다는 비즈니스맨으로서 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그를 비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의 "빌 게이츠 꼴통"과 같은 글을 예로 들어, 탐욕스럽고 막강한 괴물처럼 느껴지는 빌 게이츠의 일면을 보여 준다. "일단 한번 해봐!", "반드시 이기려고 해야 한다", "결코 포기하지 마라", "나이키를 신으면 불가능한 것도 할 수 있다"…… 나이키를 창업한 필 나이트(Phil Knight)의 마케팅 전략이다. 단순한 신발회사가 아니라 꿈을 제조하는 공장이라는 그의 이미지 마케팅 전략은 승리를 갈망하는 미국인들의 의식을 대변하여 나이키를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퀀텀 그룹의 설립자이자, 컨설턴트인 조지 소로스. 우리가 투기꾼을 경멸하면서도 "위대한 투기꾼"이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삶에 대한 열정과 위험을 무릅쓴 배짱과 용기에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반면, 무서운 금융 천재, 투기꾼,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조지 소로스는 기존의 관행이나 가치관을 벗어나 자기 스스로 변화를 시도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 책은 단순히 한 기업가의 경영 철학이나 지식만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들이 만드는 제품은 어떻게 기획되고 시장이라는 싸움터에 나오는가? 기업가들은 우리가 겉으로 보는 모습과 실제적으로 얼마나 다른가? 굳게 닫힌 그들의 얼굴 뒤에는 과연 무엇이 숨어 있는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힘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가? 내일 그리고 그 이후의 날을 그들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우리의 산업 사회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이 책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자본의 속성과 기업가를 이해할 수 있는 즐거운 체험이었다. 그들은 단지 돈과 성공만을 위해 모험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과 기업, 그리고 세계를 변혁시킨다. 그리고 말한다. "자신을 믿어라."
- 조선일보 2000/8/26 정기인(한양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 저자 볼프강 헤를레스
볼프강 헤를레스는 1950년에 태어나 독일 보덴제 근처의 린다우에서 성장하였다. 바이에른 라디오 방송국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들어 통일되기 전 독일의 수도였던 본에서 정치부 기자로 일하였다. 베를린으로 가서 ZDF 방송국에서 발간하는 유명한 문화 잡지의 편집을 맡았으며, 클라우스 브레서와 함께 '이제 무엇을(Was nun)'이라는 시사 토크쇼를 만들어 진행했다. ZDF 방송국의 스튜디오 책임자로서 <본 다이렉트>를 제작, 진행하였고 지금은 이러한 경험들을 살려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멸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국수주의의 도취- 통일 독일의 권력 투쟁의 장면들』 『양분된 기쁨 - 제3공화국의 한해』 『주변 세대 신드롬』 등이 있고, 기업 추리소설 『합병』을 쓰기도 하였다. ZDF의 시리즈 기획물인 다큐멘터리를 토대로 저술한 것이며, 헤를레스는 이 작품으로 크반트 미디어 상과 에른스트 슈나이더 상을 받았다.
▣ 역자 장복희
1963년 경북 고령 출생.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및 박사과정 수료.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며, 1996년 월간 「신동아」에서 독점 게재한 '슈피겔' 지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동아출판사 『프라임독한사전』 개정판 작업에 참여했으며, 역서로 『이혼의 기술』,『 아스트렌드 린드그랜』 동화 2권과 『까마귀가 알록달록 했을 때』 등이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독일 ZDF 방송의 <인물들>이라는 시리즈와 「프론탈」과 「비조」 잡지의 <파워 플레이>라는 기획시리즈에 소개되었던 18명의 글로벌 경영인들의 성공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가이드북의 짧은 지면에 18명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기가 어려워 본 가이드북은 원본 도서에서 소개된 18명에 대한 프로필을 담는 형식으로 정리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필 나이트(나이키 설립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애니타 로딕(보디숍 설립자)
리처드 브랜슨(버진 그룹 설립자)
테드 터너(CNN 설립자)
존 페리(오셔너 그래픽스 설립자)
페르디난트 피에히(폴크스바겐 회장)
호세 이그나시오 로페스(제너럴모터스 부사장)
위르겐 슈렘프(다임러 벤츠 회장)
헬무트 마우허(네슬레 회장)
하인리히 폰 피러(지멘스 회장)
에릭 퇸제스(크베르너 그룹 회장)
코르넬리우스 헤르크스트뢰터(로열 더치셀 그룹 회장)
루카스 뮐레만(크레디트 스위스 총재)
필 콘디트(보잉 커머셜 에어플레인 회장)
조지 소로스(퀀텀 그룹 설립자, 투자가)
페이스 팝콘(브레인 리저브 설립자, 컨설턴트)
드워드 데 보노(심리학자, 컨설턴트)
제1부에서는 모험과 아이디로 성공한 창업자들은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제품들을 만들어 낸다. 제2부에서는 영향력 있는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간 계층 출신의 전문 경영인들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기업을 변화, 개혁했으며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수행해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현대적 개혁가이자 구조조정 전문가이다. 제3부에서는 기업가들의 대열에 들 만한 컨설턴트들을 살펴보고 있다. 경영 지도자들은 전세계적 변혁 앞에 두려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복잡해지는 세계 시장에 대해 간단한 처방을 원하다. 오늘날 컨설팅 분야는 더울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찬사와 질시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조지 소로스도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이윤 에언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차례
1. 모험심과 아이디어로 성공한 창업자
일단 한 번 해봐 - 필 나이트
소프트의 괴물 - 빌 게이츠
향기를 파는 로맨티스트 - 애니타 로딕
열기구 조종사 - 리처드 브랜슨
용사 - 테드 터너
바닷속의 노인 - 존 페리
2.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전문경영인
급경사 길에서 - 페르디난트 피에히
농부와 전사 - 호세 이그나시오 로페스
'빌어먹을 성(城)'의 변혁 - 위르겐 슈렘프
피사의 사탑 - 헬무트 마우허
여러 역할의 연기자 - 하인리히 폰 피러
바람에 맞서 항해하는 바이킹 - 에릭 퇸제스
유전을 찾아서 - 코르넬리위스 헤르크스트뢰터
보물을 지키는 요정의 후예 - 루카스 뮐레만
영공의 주권 - 필 콘디트
3. 이윤의 예언자 전문컨설턴트
투기꾼과 박애주의자 - 조지 소로스
99명의 인생을 한 번에 - 페이스 팝콘
베네치아의 모자 놀이 - 에드워드 데 보노
- 세계를 경영하는 욕망의 두뇌들 -
볼프강 헤를레스 지음 / 장복희 옮김
생각의 나무/2000년/414면/11,000원
제1부 모험심과 아이디어로 성공한 창업자
1. 일단 한번 해봐(Just Do it) - 필 나이트
- 너도 할 수 있어, 일단 한번 해봐!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의 여신 이름을 딴 나이키는 스포츠 용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마케팅 전략이다. 『일단 한번 해봐', '반드시 이기려고 해야 한다', 이는 승리를 갈망하는 미국 사회의 좌우명이 되다시피 했으며, 이러한 이미지 마케팅은 기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전략의 하나이다.
1938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 신문사 발행인이었다. 오리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위논문을 써 졸업했다. 졸업논문에서 그는 독일계 스포츠 회사인 아디다스가 미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삼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미국이 더 좋은 품질의 운동화를 개발하고 아시아에서 이를 제조할 경우 독일 경쟁사보다 더 유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학창 시절 필 나이트는 대학의 중거리달리기 선수였다. 팀에서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팀의 코치는 빌 바우어만이었다. 그는 오리건주에서 유명한 코치였는데, 훈련방법이 혹독하고 특이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이트는 바우어만을 "반은 천재이고 반은 미친 사람"이라고 일컬으면서 "내가 본 코치 중에서 최고"라고 말했다. 바우어만은 팀 선수들이 신던 질이 낮은 신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필 나이트는 바로 이것을 자신의 졸업논문 주제로 삼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잠시 동안 공인회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많은 졸업생들이 그렇듯이 그도 미래의 전망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코치였던 바우어만과 힘을 합쳐, 논문 주제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964년 나이트와 바우어만은 500달러의 자본을 들여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포틀랜드 외곽에 자리잡은 이 회사는 벽만 있는 허름한 매장이었고 바로 옆은 술집이었다. '타이거'라는 상표를 단 최초의 운동화는 일본 고베에서 제조했다.
주말이면 나이트는 초록색 소형 트럭을 몰고 전국의 신발업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신발을 팔곤 하였다. 그는 아디다스 판매담당자의 비웃음을 받아가면서 이런 일을 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공인회계사 일은 계속 해나가면서 포틀랜드 대학에서 1969년까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필 나이트가 나이키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시장에 내놓은 최초의 모델은 '코르테즈'라는 이름의 스포츠화였다.
회사 설립 첫해인 1964년 나이키는 고작 1,300 켤레를 파는 데 그쳤으나 1993에는 1억 켤레를 돌파하였다. 1980년 나이키는 자본금 300만 달러로 주식시장에 상장하였다. 그 해 경쟁사인 아디다스를 밀어내고 미국 내 판매 1위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다가 1986년 갑자기 참패한다. 나이키는 2위로 떨어졌고 주가는 28달러에서 7달러로 폭락하였다. 700명이 넘는 직원이 직장을 잃었다. 이렇게 참패한 원인 중 하나는 나이키가 당시 부상하던 에어로빅 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한 데 있었다. 회사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의 급격한 성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키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과 광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노선을 수정했다. 1997년에는 프로 골퍼 타이거 우즈도 나이키와 계약하였다. 1997년 나이키는 매출액 64억 달러에, 순이익 5억 5,33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97년에는 25년 회사 역사상 가장 좋은 영업 실적을 거두었다. 매상이 91억 9,000만 달러로 치솟았고 이익도 7억 9,580만 달러에 이르렀다.
2. 소프트의 괴물 - 빌 게이츠
- 세상에는 뛰어난 기업가들이 많지만 빌 게이츠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다. 그가 우리 시대의 우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빌 게이츠는 자신의 기업을 대중문화의 일부처럼 경영한다. 아마 컴퓨터 전문가보다는 비즈니스맨으로서의 빌 게이츠가 훨씬 더 천재적일 것이다. 그는 미래의 모습을 감지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그를 비난하는 홈페이지들이 많다. '빌 게이츠 꼴통' 이런 빈정거리는 말도 적혀 있지만 때때로 그는 탐욕스럽고 막강한 괴물처럼 느껴진다.
1955년 10월 28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두 누이와 함께 여기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어머니는 워싱턴 대학의 교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를 접하기 시작하여 13살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같이 시애틀의 교통량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판매 첫해에 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 몇 년 뒤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한다. 그들은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였던 알테어에서 사용되는 컴퓨터 언어 베이식을 함께 보완해 낸다. 그때까지는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1975년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하며, 알테어 컴퓨터 회사인 MITS 사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해 달라고 주문하자 얼마 후 대학을 중퇴한다. 1979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시애틀 근처의 밸러뷰로 이전하며 1980년 IBM이 개인용 컴퓨터에 사용될 운영체제를 찾고 있을 때 이 큰 주문을 따낸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신화적인 발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빌 게이츠는 무명의 프로그래머에게 5만 달러를 주고 운영체제를 사들여 이를 'MS-DOS'라는 이름으로 IBM에 계속 공급했다. 나아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MS-DOS에 대한 권리를 계속 보유한다고 IBM과 합의함으로써 전대미문의 성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협력업체들에게도 MS-DOS 운영체제를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직원은 100여 명 정도였지만 5년 뒤에는 벌써 1,200명을 넘어섰다. 1986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현재의 사옥이 있는 시애틀의 레드먼드로 이전하며 그 해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빌 게이츠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몇 달 뒤인 1987년 그가 보유한 45퍼센트의 지분은 10억 달러로 불어났다. 그 뒤 몇 년 동안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그래픽 운영체제인 윈도우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였다. 1990년 3.0 버전과 연이은 후속 버전으로 프로그램 개발의 돌파구가 열렸으며, 이 윈도우 버전이 시장을 완전히 석권하게 된다.
1992년에는 직원수가 8,000명을 넘어섰으며, 전년도보다 20퍼센트가 늘어난 10억 달러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 1991년과 1996년 사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시장 지배력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경쟁사들은 차례로 흡수되거나 아니면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항해서 전략적으로 제휴했다. 미 법무부의 반독점 심리가 여러 번 열렸으며, 1994년과 1995년에 이루어진 심리는 모두 당사자간의 타협으로 종결된다. 1995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새로운 운영체제인 '윈도우95'를 세계시장에 출시하였다. 이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롤링 스톤스의 노래 <Start me up>을 1,2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 무렵 빌 게이츠의 재산은 130억 달러에 이르렀다. 처음 빌 게이츠는 인터넷의 경제적 가치를 대단치 않게 여겼고 그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6년 초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기업의 목표를 완전히 바꾸었고 그로부터 몇 달 내에 빌 게이츠는 기업을 개편하여 인터넷에 도전하였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세계 48개국에서 약 2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매출액 86억 달러에 21억 9,000만 달러의 이윤을 남겼으며, 전년도에 비해 46퍼센트 성장했다. 1997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컴퓨터 회사인 애플사에 1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을 사들이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년 전에 매킨토시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혁신을 일으켰던 애플사가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결합하게 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애플 사용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재계는 한 목소리로 이 소식을 환영하였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270억 달러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가장 부자인 셈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된 이후 빌 게이츠는 2억 7,000만 달러 이상을 공익 단체들, 특히 교육 분야에 기부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근무하던 멜리사 프렌치와 결혼하여 1996년에 딸 제니퍼 캐서린을 낳았다. 빌 게이츠는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5년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을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 중국에서만 40만 부 이상이 팔렸다.
3. 향기를 파는 로맨티스트 - 애니타 로딕
- 광고비 한 푼 안 들이고도 '보디 숍'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자양분은 무엇인가?
'보디 숍은 단순히 화장품이나 욕실 용품만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 사회 변화. 제3세계와의 공정한 거래를 위한 개척자라는 의식으로써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에 저항하는 무언가를 시도한다.
1942년 10월 23일 웨스트 서섹스의 리틀팸프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이민을 왔으며, 어머니는 친척들과 같이 작은 이탈리아식 아이스카페를 운영했다. 지방의 여학교를 다녔으며 배스에 있는 뉴턴 파크 칼리지를 졸업했다. 1962년 파리로 가서 인터내셔털 헤럴드 트리뷴지의 도서관에서 일했다. 영국에 돌아와서는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유엔의 산하 조직으로 제네바에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여성 권리를 위한 부서에서 일했다. 고향인 리틀햄프턴에서는 레스토랑 지배인을 거쳐 호텔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70년 남편 토머스 고든 로딕과 결혼했다. 1976년 서섹스주 시배드 브라이튼과 골목길에 최초의 '보디 숍'을 개점했다. 1997년 이 회사는 세계 47개국에 약 1,500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다. 그 중 절반은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운영한다. 제1호 보디 숍 개점 때 애니타 로딕은 모두 25종의 스킨 케어와 샴퓨들을 선보였다. 지금 이 기업은 약 580가지의 각종 제품과 600종에 이르는 액세서리를 공급하고 있다. '보디 숍'은 욕실 용품과 화장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뿐만 아니라 환경, 사회 변화, 제3세계와의 공정한 거래를 위한 개혁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리틀햄프턴에 있는 본사에는 1,300명의 직원들이 근무한다. 1996년에는 총 8,300톤의 제품이 생산되었다. 그 중 1,800톤이 모발 제품과 스킨케어 제품이었고, 176톤은 파우더, 55톤은 립스틱이었다.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생산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1997년에는 세계적으로 평균 0.4초마다 판매가 이루어졌다.
1984년 주식시장에 상장하였다. 회사 소유주와 주주들의 관계가 계속해서 좋지 않자, 1996년 애니타 로딕과 남편 고든은 독립적으로 사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주식을 재매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주가가 심하게 폭락하는 바람에 이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할 경우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주식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당금을 55퍼센트로 올림으로써 주주들의 구미를 끌어당기는 새로운 노선을 택하였다. 1996년 보디 숍의 매출은 전년도에 비해 17퍼센트가 늘어난 2억 5,600만 파운드였다.
4. 열기구 조종사 - 리처드 브랜슨
- 살아 있는 한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작고 기민할 것, 브랜슨은 이를 자신의 성공 처방으로 생각한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며, 특히 자신이 가진 위치와 영향력을 세계를 개선하는 데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확실성과 가치 질서가 붕괴된 현대 사회에서 기업가의 정신이 어떻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1950년 옥스퍼드에서 태어났으며 유명한 스토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16살에 브랜슨은 「스튜던트」라는 전국적인 학생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이 신문은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여자친구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자 낙태수술을 할 병원을 어렵게 찾아다녔는데, 1968년에 브랜슨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곤경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피임법, 낙태, 법률적인 문제들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생상담소를 세웠다. 이 상담소가 설립되자 도움을 구하는 젊은이들의 상담이 줄을 이었고, 이 상담소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상담소가 들어선 사무실에서 브랜슨은 1970년 '버진'이라는 이름의 음반 통신판매업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그는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버진 음반 가게를 처음 열었다. 1972년 브랜슨은 처음으로 옥스퍼드셔에 녹음실을 마련하였으며, 그 곳에서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마이크 올드필드가 최초의 음반<Tubular Bells>를 녹음하였다. 그 음반은 1973년 출시됐는데 몇 주만에 전세계에서 히트곡 1순위로 올라섰다. 1년만에 음반이 500만 장이나 팔렸다. <Tubular Bells>의 성공은 이후 브랜슨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후 브랜슨은 벨린다 칼라일, 제네시스, 필 콜린스. 롤링 스톤스와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 해설가들을 '버진 레코드'로 끌어들였다. 버진 레코드는 쟁쟁한 음반회사 대열에 끼게 되었다. 1992년 브랜슨은 '버진 레코드'를 10억 달러를 받고 EMI에 매각하였다. 브랜슨은 EMI와 계약할 때 계약서에 이후 30개월 동안은 음반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명시했다. 30개월이 지난 1996년 11월 브랜슨은 'V2 뮤직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음반회사를 설립하였다.
브랜슨 제국은 '버진 그룹'이 조종하고 있다. 버진 그룹은 음반, 멀티미디어, 서적, 소프트웨어 등을 취급하는 체인점인 버진 메가스토어, 여행사, 호텔, 클럽들을 거느리고 있다. 1993년에는 버진 라디오를 개국했으며 매일 500만 명의 청취자들이 이 방송을 듣고 있다. 1994년 버진 콜라가 코카 콜라와 펩시콜라에 대항하여 음료수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첫해에 8,000만 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 1995년 버진은 금융 사업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생명보험사와 연금공제기금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1995년 여름 버진 그룹은 4억 5,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영국의 MGM 영화들을 사들였다. 1996년 버진 그룹은 37억 마르크를 벌어들였다.
1984년 브랜슨은 '버진 애틀랜틱 에어웨이'를 설립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었다. 현재 이 항공사는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항공사이며 미국과 아시아, 유럽을 운항한다. 항공 화물 사업에서도 버진 애틀랜틱은 라이벌인 브리티시 에어웨이에 도전장을 냈다. 1996년 브랜슨은 유럽을 운항하는 항공사 버진 익스프레스를 세웠다. 브랜슨은 여러 복지 단체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보건교육재단인 보건기금의 공동 발기인이기도 하다.
한편 1985년 이후로 브랜슨은 여러 영역에서 새로운 세계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1986년에는 대서양을 가장 빨리 횡단하는 선박에게 주는 파란 휘장(Blue Band)을 획득했으며, 1987년에는 열기구를 타고 직접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였다. 1991년에는 일본에서 캐나다 북부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브랜슨은 몇 차례 기록을 깨기 위해 시도했지만 기후라든지 기술적인 문제들 때문에 중단해야만 했다. 열기구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계획은 1998년 1월 새로 시도할 예정이다. 브랜슨은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런던과 옥스퍼드셔를 오가며 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룬 일도 꽤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신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속 나를 찾아오는 거구요." - 리처드 브랜슨
5. 용사 - 테드 터너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CNN이 있었다면 히틀러로부터 정말 세계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
처음 CNN을 시청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아는 체를 하는 사람들은 CNN을 바보 겁쟁이들이나 보는 방송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지금 코카콜라를 정글에서도 살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CNN은 세계 어디에서나 수신할 수 있다. "훌륭한 저널리스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호기심이 많고 열심히 일하고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구요. 컵에 든 물이 반이 비어 있다고 보지 말고 반이나 가득 차 있다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테드 터너의 말이다.
1938년 11월 19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원래 목화 농장을 하던 집안이었으나 1920년대 경제공황으로 몰락하였다. 아버지는 생수 대리점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후에 그는 광고회사를 차려 광고 간판을 제작하였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테드 터너는 브라운 대학에 들어가 경영학을 공부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터너는 행실이 불량하여 대학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1960년 터너는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으며, 1963년 아버지가 자살하자 기업 경영을 떠맡았다. 1970년 그는 애틀랜타의 지역방송인 '채널17'을 인수하여 몇 년 뒤에 돈벌이가 좋은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6년 케이블 시스템이 전국적으로 확충되면서 이 지역 민방은 '터너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6년 그는 야구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인수하였다. 1978년에는 애틀랜타 호크스도 사들이는데 이로써 스포츠 중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1982년에는 4,77개나 되는 케이블망이 터너의 프로그램을 중계했다. 1980년 6월 1일 뉴스 전문 채널인 CNN 방송이 시작되었다. ABC, NBC, CBS가 장악하고 있는 방송 체제를 깨뜨리며 24시간 보도 프로그램으로 틈새시장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이 목표였다. 1985년 3,000만이 넘는 가구가 CNN을 시청하였다. 1995년 CNN은 15개 위성을 통해 세계 210여 국가에 프로그램을 중계하고 있다. 1984년 CNN의 수익은 세금을 공제하고 500만 달러였는데, 1991년에는 1억 3,70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86년 터너는 14억 달러에 할리우드의 거인인 MGM을 사들였다. 외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몇 달 후 다시 되팔지 않을 수 없었으나, 3,000편이 넘는 고전 영화들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그가 보유하고 있다. 1988년 그는 오락 채널인 TNT를 설립하여 방송에 다시 복귀하였다. 이때 MGM 영화들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90년 터너의 기업이 올린 매상은 14억 달러로 추산되었다. 1991년 걸프 전쟁과 모스크바 쿠데타(1991년 8월) 동안에는 1,080만 가구가 CNN의 프로그램을 지켜보았다. 중간 광고 가격이 7,500 마르크에서 3만 마르크로 치솟았다.
1992년 TNT는 최초로 전세계에 방영되는 트릭영화 프로그램인 만화영화 네트워크를 출범시켰다. 이 만화영화 네트워크가 출범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은 한나 바버라 필름 아키브가 소장하고 있는 8,500편의 영화들이었다. 1994년 터너는 자신의 열한 번째 방송국인 '터너 클래식 무비'를 설립하였다. 1995년 9월 TBS는 미디어 업계의 거인인 타임워너와 합병하여 총매출액이 187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미디어 오락기업이 되었다.
합병 후에 터너는 케이블 프로그램을 모두 맡았으며 타임워너 사장인 제럴드 레빈의 대변인이 되었다. 1996년 양 회사의 주주총회는 합병 협정을 승인하였다. 터너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폭스 사의 사장 루퍼트 머독은 이 합병에 반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다. 터너는 여배우 제인 폰다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첫 번째,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다. 터너는 요트 경기를 아주 좋아하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다. 특히 1979년에는 패스트네트 레이스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6. 바닷속의 노인 - 존 페리
- 구시대가 낳은 영원한 개척자!
페리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열쇠가 바다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해저는 무한한 에너지원이다. 페리의 삶을 결코 독창적인 발명의 역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삶은 산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의 힘에 관한 것이었다.
1917년 1월 2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홀리데이는 미국 전역에 여러 일간지를 발간하는 신문사의 법률 고문이었다. 1930년 페리의 아버지는 플로리다에서 자신의 신문사를 설립하였다. 존 페리 주니어는 예일대학에서 경영학과 예술을 공부한 뒤 1940년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다. 아울러 기술 설계도에 대한 강좌도 들었는데 여기서 쌓은 실력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페리는 아버지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때 다른 신문사 지분을 몰래 매입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이 신문사를 적대적 방식으로 인수하였다. 존 페리는 이런 식으로 이미 10대 후반에 중요한 회사 경영 경험을 쌓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미국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하였다. 페리 그룹은 1940년 들어 놀랄 만큼 급팽창하였으며, 1944년에는 독점혐의로 법정 심리가 열리기도 하였다.
195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존 페리는 동생 페어웰과 함께 페리 출판사의 경영권을 맡았다. 당시 이 기업은 30개의 신문과 12개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거느렸으며 직원 수는 1,100명이 넘었다. 10년 후 페리는 100만 달러를 주고 동생 회사(일간지 15개와 주간지 11개, 텔레비전 방송국 하나)를 인수함으로써 동업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페리는 노조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노조가 지칠 줄 모르는 페리의 기술혁신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페리는 미국에 윤전기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사진식자가 발명되자 이를 즉시 받아들였으며 컴퓨터 식자로 인쇄 기술을 혁신한 선구자였다. 1963년 페리의 회사에서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 결과 페리는 점차 신문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는 텔레비전 방송에 투자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에 작은 잠수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6년 페리는 페리 케이블을 1,600만 달러에 매각하고 사업 일선에서 물러났다. 페리는 1960년에 이미 잠수함과 수중 로봇을 제조하는 '오셔노 그래픽스(Oceano graphics)'를 설립하였다.
그는 바하마 제도에 태양열, 바람, 수소 같은 미래지향적인 에너지 공급 체계를 시험하기 위한 연구 기지를 세웠다. 1971년 페리는 잠수함 회사를 노르웨이의 '뷔르드(Byrd)' 사와 '마틴 마리에타' 사에 매각하였다. 페리의 회사인 '에너지 파트너'는 화석 연료를 이용하지 않은 가연 물질을 이용한 전기 차량 연구와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이 회사는 포드 자동차와 제휴 관계에 있다. 페리는 로비스트 그룹을 이용해 자신의 이상인 '국민 배당금 계획'을 관철하고자 노력했다. 늘어나는 국가 부채와 불만스런 국가 재정 정책에 대한 페리 나름의 해결책인 셈이다. 페리는 세 번 결혼했으며 여섯 자녀를 두었다.
제2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전문경영인
1. 급경사 길에서 - 페르디난트 피에히
- 페르디난트 피에히도 포르셰처럼 불후의 신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피에히는 우수한 업무 능력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독일의 어떤 최고 경영자들보다 냉혹하고 비타협적이다. 그는 유럽의 자동차 산업이 사진 산업이나 전자 산업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유럽 산업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고 보고, 자동차 산업이 이 두 분야와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1937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스포츠카 회사인 포르셰를 설립했으며, 후에는 최초의 국민차 모델인 폴크스바겐을 설계하였다. 피에히는 취리히에 있는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으며 1962년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포르셰 주식회사에서 엔진 테스트 부서의 기술자로 처음 일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1968년에는 개발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1971년에는 포르셰 회사의 기술이사로 승진하였다. 현재까지 피에히는 회사의 최대 주주 중 한 사람이다.
1972년 젊은 엔지니어 피에히는 바이에른 지방의 잉골슈타트에 있는 아우디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뛰어난 설계자라는 평을 얻었으며, 1975년에는 기술이사로 임명되었다. 1988년에는 주식회사로 바뀐 아우디의 회장에 임명되었다. 피에히의 주도하에 실린더가 5개인 엔진과 차체 무게를 줄이는 제작 방식으로 설계하여, 이미지 변화에 성공한 아우디는 벤츠와 메르세데스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1991년 아우디는 창립 이후 가장 좋은 사업 실적을 달성하였다. 1992년 피에히는 모회사인 아우디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으며 1993년 1월 1일에는 폴크스바겐 회장에 임명되었다. 폴크스바겐 회장 자리를 놓고 역시 이사였던 다니엘 괴터베르트와 경합을 벌였다.
피에히는 11년 동안 기업을 이끌어온 카를 한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그는 혹독한 비용 절감과 합리화 조처를 통해 폴크스바겐을 적자에서 건져내겠다고 굳게 다짐하였으며, 과거 제너럴모터스의 경영인으로서 '코스트 킬러'로 알려진 스페인인 로페스를 1993년 초에 채용하였다. 이 무렵 피에히는 직원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더구나 1994년에는 폴크스바겐 경영진이 공개적으로 그에게 항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로페스를 폴크스바겐으로 스카우트한 일과 관련하여 제너럴모터스는 자사의 기밀을 누설하고 서류를 횡령한 혐의로 로페스를 기소했는데, 이때 이미 분란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폴크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 수뇌부들은 몹시 전투적인 어조로 몇 달에 걸쳐 공개적으로 언쟁을 벌였다. 피에히는 이를 '기업 간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로페스 사건으로 한동안 피에히의 위치가 위태롭게 되는 듯 했으나 결과적으로 약화되지는 않았다. 1997년 1월 폴크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는 재판이 아닌 화해에 합의했다. 폴크스바겐은 제너럴모터스에 1억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며 앞으로 7년 동안 약 10억 달러 어치의 제너럴모터스 부품을 구입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폴크스바겐의 이사였던 로페스는 1996년 11월 회사를 그만두었으며 이로써 두 자동차 회사 간에 화해의 길이 열렸다.1997년 3월 폴크스바겐의 감사위원회는 페르디난트 피에히와의 계약을 5년 더 연장하였다. 1997년 4월 피에히는 1996년도 결산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따르면 매출액은 881억 마르크에서 1,011억 마르크로 늘었으며, 6억 7,800만 마르크의 이윤을 남겼다. 1996년 한 해 동안 폴크스바겐은 399만 4,000대의 차량을 판매하였다. 피에히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는 전원주택에서 산다. 두 번 결혼했으며, 두 살에서 서른 다섯 살까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요트를 아주 즐긴다.
2. 농부와 전사 - 호세 이그나시오 로페스
- 로페스는 진정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유럽을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합리화의 비용 절감의 귀재 로페스. 그는 자동차 공업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전망한다. 자신을 일류 경영인이 아닌 그저 노동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로페스의 꿈은 자동차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 바로 그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1941년 1월 18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빌바오 공대에서 시스템 조정장치와 제조 기술을 공부했으며 196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혼해서 딸을 셋 두고 있다. 기계 제조회사인 웨스팅하우스의 스페인 자회사에서 생산 책임자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타이어 회사인 파이어스톤에서 기업 조정 관리자로 헌신했다. 1980년 로페스는 스페인 중부 사라고사에 있는 제너럴 모터스 자회사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자재책임자로 승진하였다.
1987년 말 로페스는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자회사인 아담 오펠 주식회사의 이사가 되어 뤼셀하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생산과 구매를 담당했다. 1988년 11월 그는 제너럴모터스의 유럽 담당자가 되었으며 몇 달 뒤에는 제너럴모터스 본사 구매를 담당하는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1992년 로페스는 제너럴모터스의 모든 구매를 책임지는 이사로 임명되어 미국 디트로이트로 자리를 옮겼다.
제너럴모터스에서 톱 매니저로 이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를 고려하는 구매와 냉혹한 협상으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미 제너럴모터스에 있을 때부터 그는 차량이 완성될 때까지의 연쇄적인 가치 창조라는 개념을 하청업자들에게도 강요하였다. 결국 제너럴모터스의 재고품 관리비용을 현저하게 절감할 수 있었다.
1933년 로페스는 제너럴모터스의 경쟁사인 폴크스바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세계적인 톱 뉴스가 되었다. 폴크스바겐 사장 피에히는 그를 생산과 조달 담당 이사로 임명하였다. 이 무렵 폴크스바겐은 사업상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92년 수익은 전년도의 11억 마르크에서 1억 4,800만 마릍로 줄어들었다. 몇 달에 걸친 조사 끝에 전문가들은 폴크스바겐의 비효율적인 비용 구조, 특히 부품 비용과 구매 가격이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로페스가 폴크스바겐으로 자리를 옮긴 지 몇 주 후 제너럴모터스는 그가 비밀 서류들, 특히 오펠 소형차를 생산하게 될 공장 건설과 관련된 서류들을 빼내갔다는 혐의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1994년 4월에 오펠 자동차는 산업스파이 혐의로 로페스를 고소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 사건은 두 기업 경영자들 사이의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다. 1996년 3월 제너럴모터스와 오펠이 폴크스바겐 사와 피에히 사장, 로페스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디트로이트 법정에 제기하자 갈등은 극에 달하였다. 손해배상 청구액은 40억에서 50억 달러에 달했다.
1996년 11월 29일 로페스는 폴크스바겐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감사위원회가 그의 사직서를 수락했다.1997년 1월 제너럴모터스와 폴크스바겐은 미국에서 만나 타협하기로 하였다. 합의서에 따르면 폴크스바겐은 제너럴모터스에 1억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며 약 10억 달러 어치의 부품을 제너럴모터스에서 구매하기로 하였다. 로페스의 사직은 두 기업의 타협 조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로페스는 빌바오에 컨설팅 회사를 차려 독립하였다.
3. '빌어먹을 성(城)'의 변혁 - 위르겐 슈렘프
- 이윤을 내는 기업만이 사회적 기업이 될 수 있다!
위르겐 슈렘프는 벤츠 영업소의 자동차 기계공에서 출발,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경제 기적을 이룬 세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경영자의 전형으로서, 목표 지향적이며 야심에 가득 찬 출세주의자이기도 하다.
1944년 9월 15일 독일 남부 바덴의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고향에서 대학을 중퇴한 후 처음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영업소에서 자동차 기계공 수습을 받았다. 그 후 엔지니어 공부를 계속해서 196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그는 슈투트가르트의 다임러 벤츠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여러 부서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74년 처음으로 해외 근무를 나가 남아프리카의 메르세데스 벤츠 자회사에서 일하였다. 처음에는 고객 서비스를 담당했으나 1980년부터는 기술책임이사로 일했다.
2년 뒤인 1982년 슈렘프는 다임러 벤츠가 100퍼센트 지분을 소유한 미국 내 자회사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상용차 생산회사인 유클리드의 사장이 되었다. 슈렘프는 심한 적자에 허덕이던 이 회사를 2년만에 흑자로 돌렸고, 그리하여 모험적이기는 하지만 능력 있는 실력자라는 평을 들었다. 슈렘프는 자신이 주도하여 유클리드를 매각하였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메르세데스 벤츠에 부사장이 되어 돌아갔다. 1985년 그는 그 곳에서 사장이 되었다. 1987년 초 슈렘프는 슈투트가르트의 본사로 돌아와 이곳에서 신설 부서를 맡아 상용차 설계를 담당하였다. 동시에 그는 다임러 벤츠의 이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1989년 다임러 벤츠는 구조를 개편하면서 방위산업과 항공, 우주산업 영역을 통합해 '독일우주항공주식회사(DASA)'를 설립한다. 이때 다임러 벤츠 회장은 DASA의 사장 자리를 슈렘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슈렘프는 다임러 벤츠 이사회의 정식 이사가 되었다. 이 시기는 기업의 다양한 활동들과 관련 분야들을 기능적으로 통합하는 구조 개혁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슈렘프가 맡은 일은 아주 도발적으로 보였다. 9개월 후 그는 DASA의 새로운 사업 구조를 4개 영역(항공, 방위산업, 우주항공, 기타 활동)으로 개편하였다. 다시 한 번 그는 '실력자'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DASA는 금방 급류에 휘말렸다. 바르샤바 조약이 붕괴됨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방위비 지출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공기술 사업도 퇴보 상태였다.
1991년에는 독일 연방군에서 들어온 주문만 30퍼센트 정도 줄어들었다. 그 결과 1991년에는 기업의 수익이 1억 1,300만 마르크였는데 1992년에는 400만 마르크로 떨어졌으며 1993년에는 8억 900만 마르크 적자를 기록하였다 영업 실적이 좋지 않자 1994년 6월 다임러 벤츠 감사위원회는 총수인 로이터에게 조기 퇴진을 제의하였다. 1995년 5월 24일 슈렘프는 다임러 벤츠의 이사회 회장이 되었다. 새로 총수가 된 그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높은 수익을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1995년에는 57억 마르크의 기록적인 적자가 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1996년에는 다시 흑자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무자비한 방식으로 다임러 벤츠의 채산성을 강화하였다. 적자를 내는 AEG 매각을 추진하였고 AEG 본사는 해체시켰다.
1996년 1월 다임러 벤츠는 네덜란드의 항공기 제조사인 포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다. 포커를 인수할 때만 해도 슈렘프는 포커를 '러브 베이비'라고 말했다. 여기에만도 약 55억 마르크가 투입되었었다. 약 2년 동안에 슈렘프는 35개의 사업 영역을 23개로 줄였다. 기업을 정상화하기 위한 슈렘프의 거친 요법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자본시장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자신이 바라는 새로운 기업 구조를 만들기 위해 몇 달에 걸쳐 투쟁하면서도 그는 강경론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행동했다. 자회사였던 메르세데스 벤츠는 모회사에 통합되었다. 슈렘프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사장이자 그의 적수였던 헬무트 베르너를 물리치고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자신의 이 계획을 관철시켰다. 베르너는 1997년 1월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1996년의 결산은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슈렘프는 매출액 1,064억 마르크에 28억 마르크의 이윤을 냈다고 발표하였다. 직원 수는 20,964명이 줄어든 290,029명이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명예영사이며 경제와 정치 소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다. 결혼을 해서 아들 두 명을 두고 있다.
4. 피사의 사탑 - 헬무트 마우허
- 어쩔 수 없이 예스(YES)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하지만 견뎌라. 결코, 노(NO)라고 말하고 싶은데도 예스라고 말하지 마라!
마우허는 평생을 네슬레에서 일했으며, 독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네슬레 총수가 되었다. 그는 일관성 있고 엄격한 경영으로 120년 네슬레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팽창 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네슬레를 변화, 개혁하여 세계 최대의 식료품회사로 만들었다.
1927년 12월 9일 알고이 지방의 아이젠하르츠에서 태어났다. 여동생만 넷이고, 아버지는 우유가공 공장의 기술자였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네슬레 사가 소유하게 된 이웃 우유가공 공장에서 장사에 필요한 훈련을 쌓았다. 네슬레 사의 지원을 받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마친 후에 스위스 로잔에서 경영교육 과정을 끝마쳤다. 마우허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독일 네슬레 사에서 영업결산 보조원으로 일했다. 얼마 후 기획과 회계부서 책임자로 승진하였으며, 영업관리 부서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로잔에서 경영교육을 받고 돌아온 뒤에는 독일 네슬레 사의 마케팅 책임자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1년 뒤 그는 네슬레의 자회사로 냉동식품 체인점인 핀두스의 경영을 맡게 된다. 1971년 마우허는 네슬레를 떠나 독일소비조합의 대량구매협회(GEG)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1년 뒤에 다시 네슬레 그룹으로 되돌아온다. 1972년 헬무트 마우허는 뮌헨에 있는 알고이 알프스우유주식회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 독일 네슬레 사의 경영진은 그를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1981년 마우허는 경영협의회 위원이 되어 제네바 호수 근처의 베베이에 있는 네슬레 본사로 파견된다. 이제 네슬레를 움직이는 요직에 진출한 것이다.
이 무렵 네슬레의 매출액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이미지 문제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위생 상태가 불량해 잘못 먹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3세계에서 무책임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신생아 음식물들을 광고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 스위스 회사의 신뢰성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네슬레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거세졌다. 마우허는 비판 진영과의 대화에 나섰고, 자신이 새로운 정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개방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적인 견해를 고수하였다. 1990년 헬무트 마우허는 경영협의회 회장에 임명된다. 독일인으로서 네슬레 총수가 된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마우허는 일관성 있고 엄격하게 경영하면서 공급 품목 문제를 해결해냈다. 이와 동시에 그는 120년 네슬레 역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그런 팽창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지휘 아래 전세계적으
로 식료품 기업들을 인수했다. 뮌헨의 커피 회사인 달마이르와 유럽 최대의 소시지 회사 헤르타 되르플러 주식회사도 인수하였다. 1988년에는 약 2만 2,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미국의 카네이션 사와 영국의 제과회사 로운트리를 사들였는데, 이는 신문의 톱 뉴스가 되었다. 그 해 마우허는 파스타를 만드는 이탈리아의 부이토니까지 인수한다.
1992년 네슬레는 아주 중요한 수입원을 손에 넣게 된다. 프랑스의 페리에 광천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사들임으로써 마우허는 생수 시장에 진출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뒤로 네슬레는 생수 브랜드인 페리에, 콘트렉스, 비텔을 소유하게 되며, 미국에서는 애로우헤드, 독일에서는 디 블라우엔 크벨렌이라는 생수를 출시하였다. 네슬레는 베트남, 중국, 이탈리아, 폴란드, 태국, 이집트에서도 생수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996년에는 70억 리터의 생수를 판매하였으며 생수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네슬레는 세계적으로 8,500개가 넘는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1996년 네슬레의 매출 총액은 스위스 프랑으로 605억 프랑이었는데, 그 중 20퍼센트가 네스카페 판매원이었다. 이윤은 스위스 프랑으로 34억 프랑 늘어났다. 1997년 중반에 헬무트 마우허는 경영협의회 위원직을 후임자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페터 브라벡 레트마테에게 물려주었으며 전략 사업만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경영협의회 회장 자리는 2000년까지 계속 유지한다.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고 있다.
5. 여러 역할의 연기자 - 하인리히 폰 피러
- 적재적소의 사람 배치와 올바른 투자 결정만이 사업의 미래를 결정한다!
피러는 유럽최대의 전기, 전자 제품회사 지멘스의 총수로서, 자유로움과 엄격함, 부지런함과 절제, 자연스러움과 적응력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의 장점은 내부, 외부와의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공격적인 개혁정책을 취하면서 모든 직원들에게 새로운 기업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1941년 1월 26일 에를랑겐에서 직업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 있는 에를랑겐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1968년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인 1969년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공부하면서 에를랑겐의 지방 신문사에서 자유기고가로 일하였으며 학위를 마칠 때까지 법과대학 조교로 있었다.
1969년 지멘스 주식회사의 법률 부서에서 법률 자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8년 뒤에는 지멘스의 자회사인 유니온 발전소로 자리를 옮겨 판매와 주요 부서의 여러 업무들을 위임받았다. 그는 발전소의 커다란 프로젝트들을 잘 수행해냈고 자청해서 지멘스의 경영 업무를 맡았다. 1988년 10월 그는 유니온 발전소의 세일즈 부서를 맡았는데, 이 부서가 독자적인 사업 영역으로 개편되면서 지멘스 주식회사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피러도 모회사의 이사로 승진하게 된다. 1990년 10월 지멘스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중앙이사회의 이사에 임명됨으로써 앞으로의 성공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핵에너지가 발전에 사용되면서 발전소 사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피러는 핵기술에 찬성한다고 공공연히 밝혔지만, 전통적인 가연물질을 이용한 발전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단호한 합리화 조치로써 유니온 발전소를 확실한 궤도에 올려놓았다. 1991년 7월 피러는 지멘스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지멘스 전통에 따르면, 당시 회장이었던 카스케의 후원으로 내정된 그런 자리였다. 그의 지휘 관할 아래 지멘스는 동유럽 사업에도 진출하였으며 체코의 스코다와 합작하여 에너지 기술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1992년 7월 피러는 기술자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멘스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었는데, 경제신문들도 이를 자세히 보도하였다. 300여 개의 자회사와 관련 업체를 거느린 지멘스는 유럽 최대 전기·전자제품 회사이다. 전세계적으로 지멘스는 700개가 넘는 생산 기지를 두고 있으며 193개국에 진출해 있다. 직원 수는 38만 명에 이른다.
피러가 지멘스의 경영권을 맡았을 때 회사는 상당한 흑자를 기록하고는 있었지만 세계적으로 경기 후퇴기여서 불황 문제와 맞부딪쳐야 했다. 그리하여 이익에 대한 기대가 줄어드는 가운데 1992년과 1993년의 수익률은 2.4퍼센트에 머물렀다. 피러는 'TOP(시간절감과정)'라는 이름 아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공세적 조치를 취하면서 1994년 초 모든 직원들에게 새로운 기업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3년 안에 1인당 생산성을 30퍼센트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 내 일자리도 줄였다.
현재 지멘스는 전구, 마이크로칩, 유리섬유 기술, 통신, 발전소, 기관차와 같은 250가지 사업 분야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지멘스 결산을 보면 피러의 이러한 공격적인 개혁정책들이 효과를 보는 것 같다. TOP를 도입한 이후, 생산성이 300억 마르크 정도 증대하였다. 1996년과 1997년의 전체 매출액은 1,070억 마르크로 14퍼센트가 늘어났으며, 수익은 세금을 공제하고 난 뒤 25억 마르크로 20퍼센트 늘어났다.
하인리히 폰 피러는 결혼하여 자녀를 셋 두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에를랑겐에서 기사련의 시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70년대 초 연방의원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테니스를 즐기며 휴가 때는 스키나 등산으로 시간을 보낸다.
6. 바람에 맞서 항해하는 바이킹 - 에릭 퇸제스
- 전통이라는 짐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눈으로 본다!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것보다는 바람에 맞서 항해한다!
에릭 퇸제스는 정말 특이한 노르웨이인이다. 그는 열광적인 합리주의자이며, 극히 지배욕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조선 산업이 퇴보기에 접어들었을 때, 유럽에서 조선 산업은 사양 산업이 아니라 장래성이 있는 가장 유망한 사업임을 간파했고, 그것이 적중하였다.
1946년 생으로 오슬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런던에서 살며,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스키와 산책이 취미다. 1973년 노르웨이의 국영기업인 노프스크 휘드로의 법률 부서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1978년 이 회사의 석유와 가스 사업 경영인이 되었다. 1979년에는 이 회사에 화학비료 부서를 설립하였다. 1988년 크베르너로 자리를 옮겨 이 회사 회장에 임명되었다. 이 회사는 수력발전 터빈과 북해의 석유시추 장비를 생산한다. 크베르너는 그의 지도 아래 아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조선그룹으로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세계를 주도하는 건설업체 대열에 든다. 1996년 본사를 런던으로 옮겼다.
크베르너는 수력발전 터빈의 수출에서 90퍼센트의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기업의 중추는 조선 분야이다. 핀란드의 MASA 조선소들은 11.5퍼센트의 수익률을 내는 대표 기업이다. 크베르너 그룹은 노르웨이, 핀란드, 스코틀랜드, 싱가포르, 메클렌쿠르크에 조선소가 있으며, 유람선, 가스 운송선, 쇄빙선, 컨테이너 화물선, 초고속선 등을 제조하고 있다. 미국 보잉사와 러시아 협력사와 합작으로 해양에 기지를 둔 로켓 발사대를 건설 중이다. 또한 미국 ORNS이 주문한, 건설비만도 50억 달러가 드는 해상공항 건설도 보잉사와 함께 맡고 있다.
1996년 4월 크베르너는 영국 그룹 트라팔가 하우스를 9억 400만 파운드에 인수했다. 이리하여 해외사업 비중이 60퍼센트에서 80퍼센트로 높아졌으며, 직원 수는 약 두 배 정도가 늘어나 5만 6,000명이 되었다. 이미 1993년에 크베르너는 동독의 바르노프 조선소를 손에 넣었으며, 20억 마르크가 넘는 보조금으로 조선소를 희생시키고 현대화하였다. 1997년이면 이 바르노프 조선소는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크베르너 석유 가스사'는 시추와 정유 시설을 건설하며, '크베르너 금속사'는 동, 구리, 철, 알루미늄을 가공하는 생산 시설을 건설한다. '크베르너 펄프 제지사'는 종이 생산에 필요한 시설을 짓는다. '크베르너 건설'은 영국의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댐과 다리를 건설하고 있으며 감옥, 병원, 미디어 센터를 건설하는 경영 전략을 펼치고 있다. 역사가 깊은 유람선 해운사로 유명하지만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큐나드 라인(Cunard-Line)'도 크베르너에 소속되어 있다. 최근에는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조선소를 사들였다.
7. 유전을 찾아서 - 코르넬리위스 헤르크스트뢰터
- 성공은 마음 먹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꾸준히 견뎌 나갈 때 저절로 되는 그런 것이다!
코르넬리위스 헤르크스트뢰터는 재정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멕시코만에서 어떻게 석유를 퍼올리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감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회사에 문화적인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전문 엔지니어들이 전혀 문제삼지 않던 것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장점으로 여겼다.
1937년 8월 21일 독일 국경 가까이 있는 네덜란드 벤로에서 태어났다. 로테르담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196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로테르담 대학에서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다. 1967년부터 빌리통이라는 네덜란드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여 경영에 대한 경험을 쌓아나갔다. 1971년 이 회사 재정과 경제 부문의 책임자가 되었다. 1972년 빌리통사는 셸 소유로 넘어갔으며 그는 이곳에서 1980년까지 일하면서 여러 중요한 직위를 거쳤다. 1980년 그는 런던의 셸 인터내셔널로 자리를 옮겨 동남 아시아를 담당했다.
1982년부터는 프랑스 셸에서 재정과 관리 담당 이사로 일하였다. 3년 뒤인 1985년 7월 독일 셸 사장으로 임명되어 함부르크로 왔으며, 1988년에는 헤이그 본사로 발령받아 유럽 지역을 맡는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셸 그룹 회장단의 일원으로 승진하였다. 1990년 헤르크스트뢰터는 독일 셸의 감사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로열 더치 석유회사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93년 7월에는 로열 더치 셸 그룹의 최고 경영자로 승진하였다. 공식 직함은 경영위원회 회장이다.
셸 그룹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약 2,000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현재 고용된 종업원은 20만 명이 넘는다. 50년대 이후 회사 조직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헤르크스트뢰터의 지휘 아래 광범위한 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영국 영토 안의 북해에서 석유를 증산한다는 헤르크스트뢰터의 결정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 초 셸이 시추선 브렌트 스파를 침몰시킨다고 발표하자 그린피스가 보이콧을 선언하고 나섰는데,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재야운동가인 켄 사로 위와가 처형되자 또 한번 셸은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케 사로 위와는 셸이 나이지리아의 환경을 파괴한다고 비난했었다. 셸과 헤르크스트뢰터는 이런한 비난을 일축하면서 나이지리아 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제한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술적 자만'에 빠져 환경과 인권문제를 판단하는데 오류를 범했다고 말했다. 헤르크스트뢰터는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에 더욱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재미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 크르넬리위스 헤르크스트뢰터
8. 보물을 지키는 요정의 후예 - 루카스 뮐레만
- 거대한 금융시장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미래의 희망과 관련된 미래 산업이다!
루카스 뮐레만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는 거만하거나 엘리트같이 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아는 것이 많고 아주 생각이 빠른 실용적인 사람이다. 크레디트 스위스를 국제화하였으며 그리하여 스위스를 국제화하는 데 기여한 루카스 뮐레만에 대한 이야기는 국제화에 관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스위스의 퀴스나흐트에서 1950년에 태어났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장크트갈렌 대학에서 공부했고, 1973년부터 1975년까지 IBM의 정보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다. 그 다음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경영대에서 공부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에 입사하였으며, 1982년에는 파트너 위치로 올라섰고 그로부터 4년 뒤(1986)에는 시니어 파트너로 선발되었다.
1989년 맥킨지의 스위스 지사장이 되었으며 1년 뒤에는 뉴욕 맥킨지의 경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4년 9월 1일 뮐레만은 스위스 재보험사 임원이 되어 취리히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후 그는 세계 2위인 스위스 재보험사의 이사이자 대표가 되었다. 1996년 독일 알리안츠 그룹에 보험 자회사를 모두 매각하였는데 이 매각으로 약 55억 프랑이 기업의 금고에 들어왔다. 스위스 재보험사는 핵심사업에 집중함으로써 아주 높은 수익을 올렸으며 주가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1996년 뮐레만은 네덜란드 푸르덴셜의 자회사로 영국의 재보험사인 '머천타일 앤 제너럴 리(Merchantile & General Re)'를 17억 파운드에 매입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업계에 상당한 긴장을 몰고 왔다. 그리하여 스위스 재보험사는 생명보험과 의료보험 분야에서 세계적인 주자로 떠올랐다. 1996년 중반 뮐레만은 스위스에서 가장 큰 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 그룹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1997년 1월 1일부터 루카스 뮐레만은 취리히에 있는 크레디트 스위스의 최고 경영자이자 경영위원회 임원이 되었다. 경영위원회 의장이었던 라이너 구트의 지휘 아래 이 기업은 1996년부터 구조가 새롭게 달라졌다. 스위스 신용기관으로부터 크레디트 스위스 그룹이라는 새로운 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뮐레만은 구조개혁을 철저하게 수행했으며 그룹을 세계에서 주도적인 금융기업으로 만들고자 했다. 기업활동은 4개 사업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고객 업무와 '소매 금융을 관장하며, 크레디트 개인 금융 그룹은 개인의 국제적인 은행 업무를 총괄한다. 크레디트 스위스 에셋 매니지먼트는 세계 곳곳의 재산관리를 담당하며, 상업은행과 투자 업무는 '크레디트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CSFB)'이 관장하고 있다.
1997년 9월 뮐레만은 빈터투어 보험을 합병한다고 발표해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합병으로 그는 크레디트 스위스를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으로 만들겠다는 꿈에 성큼 더 다가서게 되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현재 1,500만의 고객을 관리하고 있으며 자산총액은 7,000억 프랑이다. 뮐레만은 스위스 항공과 프랑스 일반보험(AGF)의 경영위원회 임원이다.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두고 있다.
9. 영공의 주권 - 필 콘디트
-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새, 비행기라는 현대문명의 신화에 도전한다!
사색가이자 행동하는 사람, 즐길 줄 아는 사람이자 일에 미친 사람. 콘디트는 이런 양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보잉이 엔지니어, 노동자, 프로젝트 그룹과 같은 여러 개의 줄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나무라고 생각한다. 맥도널 더글러스와의 합병으로 인하여 보잉은 이제 유럽의 에어버스만을 경쟁 상대로 남겨두었으며,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또다시 시작한다.
1941년 8월 2일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태어났다. 버클리 대학에서 엔지니어 공부를 하고 1963년 자연과학 졸업논문을 썼다.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에서 비행기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다. 보스턴의 MIT 공대에서 경영학 과정을 마쳤다. 대학교에 다닐 때 콘디트는 이미 조종사 자격증을 땄다. 1965년 워싱턴주 시애틀의 보잉사에서 개발 엔지니어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1973년 보잉의 경영진으로 승진하였다. 10년 동안 여러 부서를 거친 후 1983년 콘디트는 부회장 겸 총괄 매니저가 되었다. 1년 뒤 그는 부회장 직책으로 마케팅과 구매 관할권을 맡았다.
1986년 업무집행 부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 '보잉 커머셜 에어플레인 그룹(Boeing Commeecial Airplane Group)' 회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대형 제트기인 B777기 개발팀에 책임자로 참여했다. B777기는 제도판 위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컴퓨터로 만들어낸 최초의 비행기였다. 1996년 5월 콘디트는 보잉 그룹 전체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 최대의 비행기회사이자 중요한 군수업체인 보잉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기업 매출액의 약 30퍼센트는 군수 분야와 우주항공이 차지하고 있다.
필 콘디트는 80년 기업 역사에서 이제 (설립자인 보잉을 빼고) 일곱 번째 회장이다. 그가 취임한 무렵에는 새로운 비행기에 대한 수요가 활발했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불황과 군비 절감으로 보잉은 대단한 압박을 받았다. 콘디트의 전임자는 구조 개편 프로그램을 제때에 단행하였고 직원 수를 현저하게 줄였다. 이는 콘티트가 미국의 최대 수출 기업인 보잉을 다시 흑자로 돌려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보잉 직원은 약 14만 7,000명이다. 경쟁사인 에어버스가 부상하고 있지만 보잉은 세계시장을 약 60퍼센트 점유하였다. 여기에는 공급 품목이 아주 다양하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여러 항공사들이 수년 간 적자를 내다가 처음으로 이윤을 내게 되자 1996년에는 여객기와 화물기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1997년 여름 미국의 비행기 제조회사이자 군수업체인 맥도널 더글러스(직원 6만 4,000명)와 합병하면서 다시 한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결과 보잉은 민간 제트기 분야 점유율을 65퍼센트로 높였다. 이제 남아 있는 유일한 경쟁자는 에어버스 인더스트리뿐이다.
1997년 7월 말 유럽은 보잉과 맥도널 더글러스의 합병을 승인하였다. 보잉이 미국 항공사들과 맺은 장기 독점공급 계약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유럽연합은 보잉의 지배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이 합병을 공동으로 봉쇄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으름장을 놓았다. 유럽연합은 유럽의 에어버스 컨소시엄이 미국 시장에 좀더 쉽게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96년 보잉은 매출액 227억 달러(전년도 195억 달러)에 약 10억 1,000만 달러의 순수익(전년도 3억 9,300만 달러)을 올렸다. 1996년 맥도널 더글러스는 7억 8,800만 달러의 순수익을 거두었는데, 무엇보다도 군수산업의 힘이 컸다. 1997년의 매출액 목표를 보잉은 330억 달러로 설정하고 있다. 납품할 비행기의 수는 340대(1997년)에서 1998년에는 450대로 늘어난다고 한다. 보잉 회장인 콘디트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와 손잡고 인위성 텔레콤 시스템의 설비사업을 1997년에 시작할 계획인데 90억 달러가 들어갈 전망이다.
제3부 이윤의 예언자 전문컨설턴트
1. 투기꾼과 박애주의자 - 조지 소로스
- 투기꾼을 경멸하면서도 우리가 '위대한 투기꾼'이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지 소로스는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반면, 무서운 금융 천재라든가 투기꾼 등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판도 듣는다. 그는 조심성과 예측, 불신과 신뢰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일찍이 터득하고 내면화하였다. 위험을 무릅쓴 그의 배짱은 오랫동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한 인간의 용기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열망과 공포, 투기꾼 소로스는 바로 이러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내 판단은 다른 사람보다 썩 나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난 내 의견과 행동을 바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항상 이론에 따라 행동합니다." 조지 소로스의 말이다.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나치 점령기에 소로스는 여러 은신처에 숨어서 지냈다. 전쟁이 끝난 2년 뒤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친척집에서 자랐고 런던 경제학 스쿨에서 공부했다. 철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칼 포퍼의 강의를 특히 좋아했다. 포퍼의 저작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의 사상과 이후의 박애주의적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52년 대학을 졸업한 뒤 영국의 투자회사인 '싱어 앤 프리드랜더'에서 경험을 쌓았다. 1969년 투자기금협회인 '퀸텀 그룹'을 설립하였다. 기금 총액은 현재 300억 마르크에 달한다. 수년 간 계속 성공을 거두면서 소로스는 수십 억대의 개인 자산가로 부상하였다. 1992년 100억 달러로 영국의 파운드화에 환투기를 하여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파운드의 시세가 2.9 마르크에서 2.4 마르크로 떨어졌고 소로스는 미리 싼값에 사들여 비축해 두었던 덕분에 20억 마르크에 이르는 이윤을 거둬들였다.
1993년에는 프랑스의 프랑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환투기를 했지만 실패하였다. 1995년 이탈리아의 리라화에 대해 환투기를 하여 다시 성공하였다. 1997년 초여름 말레이시아 총리는 동남아시아 환율이 20퍼센트까지 급락한 책임이 소로스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1979년 소로스는 '열린 사회 기금'으로 뉴욕에 그의 재단을 처음으로 설립하였다. 5년 뒤에는 헝가리에 '동유럽 기금'을 설립하였다. 1987년 소련에 '소로스 기금'을 설립하였다. 현재 소로스 기금은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30개국 외에도 아프리카와 하이티에서 활동 중이다. 기금의 목표는 '열린 사회'의 토대를 구축하며, 이에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 있다. 1989년까지 소로스는 약 3억 달러를 열린 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투자하였다.
1990년 소로스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두고 프라하, 바르샤바,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 분교를 둔 중부유럽 대학(센트럴 유럽 유니버시티)을 설립하였다. 이 대학의 설립에 약 3억 5천 달러가 소요되었다. 부다페스트에서만도 그의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300명이 넘는다. 소로스는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특히 옥스퍼드(1980년)와 볼로냐 대학(1995)에서도 학위를 받았다. 현재 그는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단독 소유주이다.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는 개인 투자회사로 퀀텀 그룹의 자문역을 맡고 있다.
"나는 투기꾼이 아닙니다 결코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습니다. 존재를 위험하게 하지 않고서 내가 어느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 한계를 탐구하는 거죠." - 조지 소로스
2. 99명의 인생을 한 번에 - 페이스 팝콘
- 트렌드는 혼돈의 세계에서 찾아낸 일종의 질서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용해 삶을 변화시켰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급 트렌드 연구가이며,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브레인 리저브의 설립자 페이스 팝콘. 그녀는 문화적, 사회적 추세를 인지해냄으로써 고객이 새로운 사업 영역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장과 생산품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통속적인 소비용품에 시대 정신이라는 잉여 가치를 덧붙여 상품을 트렌드화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최고로 만들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 사명입니다. 내 인생이 끝날 때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면 그게 내 사명을 다한 거겠죠." 페이스 팝콘의 말이다.
1948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페이스 플로트킨이다. 초기 유년시절을 중국 상하이에서 보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연극배우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70년 광고 에이전시의 크리에이티브 담당자가 되었다. 에이전시에서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이름을 팝콘으로 바꿨다. 그로부터 얼마 뒤 아예 법적으로도 이름을 바꾸었다. 1974년 그녀는 친구인 피즈 마리골드(Lys Marigold)와 함께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브레인 리저브를 설립하였다. 1991년 미래의 흐름을 예언하는 최초의 『팝콘 리포트(Papcorn-Report)』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유럽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급 트랜드 연구가에 속한다. 특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IBM, 펩시콜라, BMW, AT&T 같은 회사들이 고객이다. 그녀는 문화적, 사회적 추세를 인지해 냄으로써, 고객이 새로운 사업 영역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장과 생산품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브레인 리저브는 미래 시장의 도전을 올바로 평가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특히 '유행 견본품, 브레인 잼, 독창적인 생각'은 이러한 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페이스 팝콘은 뉴욕의 이스트 햄프턴에서 살고 있다.
3. 베네치아의 모자 놀이 - 에드워드 데 보노
- 중요한 건 아이디어의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 그 자체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일종의 사고 운동의 재료이다. 사고가 유연하게 되어 고정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사고 운동인데, 자기가 알고 있는 기존 지식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새로운 문제 해결 방법이 나타난다. 에드워드 데 보노는 경제계의 지도자들에게 창의적인 사고를 가르치면서 측면적 사고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는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며 미래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하는 경영인들의 요구와 가장 잘 부합하는 가치 관념으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5월 19일 몰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였다. 그는 세인트 에드워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몰타의 왕립대학에 들어갔다. 뒤에 옥스퍼드 대학으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로데스 장학금으로 의학과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의학부 강사를 지냈다. 1963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진단의학 분과의 대리 책임자가 되었으며, 1971년부터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인지력 연구기관의 소장을 맡고 있다. 이때부터 데 보노는 국제적인 '독립사고기구(Independent Thinking Organization)'의 총재직을 맡았다.
또한 하버드 의대와 보스턴 시립 병원의 명예 고문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 그는 위대한 사상가들을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데 보노의 철학 학교'와 함께 영국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학문적인 작업 외에도 데 보노는 경제계 지도자들에게 창의적인 사고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해결 방안과 구상을 가져온다는 측면적 사고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는 세계 유수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으며, 캐나다, 미국,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정부의 자문을 하기도 한다. 또한 교육과 관련된 국가 조직이나 국제 조직에도 강의와 자문을 하고 있다.
에드워드 데 보노는 40권이 넘는 책을 썼으며, 이 책들은 24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베네치아의 테세라섬에서 정기적으로 '인터내셔널 크리에이티브 포럼(International Creative Forum)'을 개최하고 있다. 특히 협상 지도나 전략, 위기 관리, 상품 개발의 지도력을 위한 세미나를 하며 이를 토대로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데 보노는 런던과 몰타 그리고 베네치아에 있는 자신의 섬을 오가며 지낸다.
"흔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반항적인 사람들보다 측면적인 사고에 더 뛰어난 경향이 있어요. 반항적인 사람들은 저항을 통해서만 창의성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 보수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샅샅이 조명하지요." - 에드워드 데 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