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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뿌리 이야기
1976. 6. 30 대동보 발간사.
우리 김녕김씨는 시조대왕께서 계림에 나시어 신라천년의 국기를 다지신 덕택으로 경주 땅에서 천년동안 왕실의 큰 영화를 누린 후, 고려조에서는 경주 안동 수원등지의 봉작을 누려오다가 원정공 휘 향(珦) 선조의 빛나는 충의를 이어받으신 문열공 휘 시흥(文烈公 諱 時興) 선조께서 외적과 싸우신 훈공으로 다시 안동에서 김해로 군작이 옮겨져서 우리 김녕김씨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셨다.
이후 이씨조선 전기까지 혹은 정간공 휘 정병(貞簡公 諱 挺丙), 송암공 휘 질(松菴公 諱 秩)과 같이 절의를 세우시고, 혹은 충민공 휘 인찬(忠愍公 諱 仁贊)과 같이 개국일등공훈에 빛나시는 등 누대의 충의의 전통을 다지면서 대대로 재상의 반열을 지켜오셨다.
문무겸전하시고 충효쌍전하신 충의공 백촌선생 휘 문기(忠毅公 白村先生 諱 文起) 선조께서 역사에 유래가 드문 굳은 의지로 이른바 사육신의 한분으로 정충대절(貞忠大節)을 세우시어 아드님 여병재공 휘 현석선조(如甁齋公 諱 玄錫先祖)와 더불어 순절하시었다.
뿐만아니라 충의공과 내외종간이요 성재공 휘 익생선조(省齋公 諱 益生先祖)의 외손 취금헌 박팽년 선생(醉琴軒 朴彭年 先生)까지 또한 사육신의 한분으로 순절하신 이후 만지당공 휘 준(晩池堂公 諱 遵)선조께서는 고흥으로 만은공 휘 길상(晩隱公 諱 吉祥) 선조께서는 평해 정명으로 숨어시고 일가들이 각지에 흩어져서 우리김씨는 한때 그믐달의 어두운 세월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께서는 훌륭하신 인고로 새로이 충효의 전통을 세우시며 서서히 운세를 만회하고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등 외침이 있었을 때마다 충정공 휘 준영(忠貞公 諱 俊榮), 분성군 휘 응수(盆城君 諱 應壽), 겁암공 휘 영년(㤼岩公 諱 永年), 묵재공 휘 언공(黙齋公 諱 彦恭), 충효공 휘 유부(忠孝公 諱 有富) 학은공 휘 선복(學隱公 諱 善復), 충경공 휘 경세(忠敬公 諱 景世), 충숙공 휘 흔(忠肅公 諱 欣) 그 밖에 여러 크신 인물들께서 감연히 일어 서시어 나라를 지키시고 문중을 중흥하시기에 힘쓰셨다.
일제의 침입이 있자 매하선생 휘 근배(梅下先生 諱 根培), 벽산선생 휘 도현(碧山先生 諱 道鉉), 범산선생 휘 법린(梵山先生 諱 法麟), 일우 휘 한종(一宇 諱 漢鐘), 보형공(寶炯公) 께서 천추에 빛날 절의로 항일투쟁을 하시어 광복의 원훈이 되셨다.
이재 우리는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다시 보름달의 성운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경주천년의 영화를 능가할 새 성운기를 마지할 준비로서 일가끼리 서로의 정의를 두텁게하고 우리의 단결한 힘으로 우리와 우리겨레의 번영을 다지고자 우리는 전국종친회를 조직하였고, 진일보하여 이 대동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조(仁祖) 서기 1624년 때 이른바 천계갑자보를 간행하기 이전부터 족보를 모시고 있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구보를 편집하신 여러 어른께 삼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지난날의 수많은 족보들은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고 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때에 편집되었던 까닭에 그 내용이 통일된 바가 없었다. 각파를 만라한 대동보의 결실을 거둘만한 보가 거의 없었다. 보의 이름도 각파보에 김녕김씨 족보, 김해김씨 족보 양근김씨 족보, 분성김씨 족보, 경주김씨 족보 등 구구하였다. 관존민비와 남존여비의 원칙하에 편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한자로만 적혀있어 많은 일가들이 읽지를 못하고 모시기만 하는 족보에 그쳤던 것이다.
과거의 구보들은 전기한 바와 같이 결함이 있어 사람들은 읽기가 어려웠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족보를 펼쳐보기를 꺼렸고 자기 선조들의 얼과 발자취를 연구하기보다는 읽기 쉬운 국사나 야사 외국사를 연구하는데 그치는 일이 많았다.
이에 뜻있는 종친들이 정사에 의하여 우리 한글 위주로 알기쉽고 또한 읽기쉬운 글로 선조들의 높은 충효의 전통과 빛나는 발자취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적어서 언재나 누구나 친근할수 있는 대동보의 간행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의 새시대를 맞아 각자의 구보를 정리 통합하여 명실공히 통일된 대동보를 정확한 사료에 의하여 만민평등 남녀평등의 민주적원칙에 따르고 알기쉬운 한글로 새시대에 맞도록 편집하는 역사적 거업을 오로지 전총친들의 얼과 성으로 이룬 것이다.
이러한 족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족보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일시적인 오해로 합보하지 못하였던 완계 휘 희년(浣溪 諱 禧年) 선생의 문중이 이보 편집의 계기로 합보하는 등 이보 편집이 우리김씨 단합을 촉진하는 것도 기쁜 일이다.
이 보로 인하여 숭조사상이 높아져서 우리모두가 선조의 충효를 본받아 선조에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되도록 노력하여 그 조상에 그 자손이란 칭을 받도록 힘쓰고 우리 종친간의 단합이 더욱 굳어지면서 철석같은 국가안보와 남북통일의 원동력이되고 이로서 우리김씨와 우리 겨레의 번영이 앞당겨질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
다만 남북분단으로 북한에 남아있는 종친들이 입보를 못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며 이보를 편집함에 당하여 이 역사적 비애를 더욱 절감하게 되었고 조국통일의 열망이 더욱 고조 되었다.
돌이켜 보면 1972년 가을 유성온천에서 발기회를 가진 이래 4년동안 대동보 편찬 위원회 여러분의 수고는 실로 많았다.
특히 편집분과위원회에서 집접 집필한 위원들께서는 섭씨 30여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도 영하 20도를 육박하는 추위에도 오직 김년인의 긍지와 사명감에서 좋지않은시설과 대우를 따지지 않고 불철주야 노력하여 이 대업을 성공리에 마쳐주셨다.
그 공로는 우리 김녕김씨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업성취를 위해 한결같이 정성을 모아주신 전국종친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특별한 호의로 이 대보의 인쇄를 시종 성의껏 하여주신 회상사(回想社) 박홍구 사장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보로 인해 조종신령의 가호아래 일가간의 효제지심이 더욱 일고 단결된 힘으로 우리겨레의 대번영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1976년 6월 30일 위원장 원규 외 8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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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성고(得姓考)
우리 김씨는 언제 비롯하였고 시조는 누구인가.
고래로 설이 갈리므로 이를 삼가 살펴보기로 한다.
1. 시조에 대한 신화
삼국사기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지은 책에는 신라 탈해왕께서 밤에 들으니 경주 금성 서쪽에 있는 시림이라는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날이 새자 태보인 호공을 시림에 보내어 알아보니 시림숲속 나뭇가지에 금빛의 작은 궤짝이 달려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으므로 호공이 돌아와서 왕에게 본대로 아뢰었다.
이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금빛 궤짝을 갖다가 열어보니 그 속에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잘생겼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거두어 길렀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슬기가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금빛 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인연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 부르고 나라이름까지 계림으로 고쳤다. 고 쓰여 있다.
한편 삼국유사 고려 때 스님 일연이 지은 책에는 중국영평 3년 경신(庚申) 8월 4일 밤에 호공이 월성 서리를 그니 노라니 시림에 금빛이 보이고 자주 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곧게 나리고 그 구름 속에 황금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그 궤에서 광채가 나고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 울고 있었다.
이에 호공은 이일을 왕에게 아뢰어 왕은 그곳으로 거동을 하시어서 그 궤짝을 열어보니 마치 옛날 박혁거세의 일과같이 그 궤짝에서 한동자가 누워있었다가 일어났다. 그래서 혁거세가 맨 처음 발한(勃韓)말을 따서 알지(閼智)라 이름 지었다.
대저 알지라함은 방언에 아기를 뜻한다.
이에 왕은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환행하시니 길에서 새와 짐승이 춤을 추어 축하하였다. 그 후 왕은 길일을 택하여 그 아기를 태자로 봉하였지만 그 아기는 자라서 고파사(故婆娑)에게 양보하고 종내 왕위에 오르지 않으셨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다.
알지는 열한을 낳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아서 6대 만인 미추의 대에서 비로소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김씨는 모두 알지의 후손이다. 라고 쓰여 있다.
이상은 모두 계림김씨는 모두 알자지자(閼字智字) 후손이라 한다.
또한 알자지자 선조는 대보라는 왕 다음의 지위에 오르고 또한 대왕으로 추존하여 태조대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보에는 모두 이설에 따랐다.
나. 성자한자(星字漢字)가 김씨조(金氏祖)라는 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수백 년 전 신라 때 세워진 신라 문무왕비석에는 문무왕의 시조는 문무왕의 제 15대인 성한왕(星漢王)이라고 쓰여 있고 역시 산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먼저 고려태조 때 세워진 진철대사비(眞澈大師碑)에도 계림김씨인 진철대사는 시조가 성한이라고 쓰여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무었에 근거하여 썼는지는 모르나 김씨의 시조를 성한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고 성한왕은 문무왕의 15대조 이시니 삼국사기에 알자지자의 아드님으로 된 세자한자(勢字漢字)와의 동일인이요 삼국유사에 알자지자의 아들로 된 열자한자(熱字漢字)와 같은 분인데 필경 성한왕가 알자지자 대보공은 동일인인지도 알 수 없다.
다. 시조 신인설(神人說)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보면 신라 사람들은 자기들을 소호김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라 하며 성은 김이라 하였는데 김유신 장군의 비문에도 또한 말하기를 김유신 장군은 헌원(軒轅)의 후예이고 소호의 영윤이라 하였은즉 남가야(南伽倻)시조 수로왕도 신라김씨와 같은 성이라고 하여 김씨의 시조는 하늘사람(神人)이라는 설도 있다. 위에서 본 문무왕비도 성한왕이라 하늘에서 온 신인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모두 왕실의 선조를 신격화 하려는 정책적인 것이다.
2. 득성경위(得姓經緯)
그러나 신당서신라전(新唐書新羅傳)에는 왕의 성은 김씨요 귀족의 성은 박씨요, 백성에게는 성이 없고 이름만 있었다. 하고 금서룡박사(今西龍博士)의 신라사 연구에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유리왕 9년에 육부의 이름을 고침에 있어 성을 하사하여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라고 하였다. 고 하지만 최씨 설씨 등의 성은 신라왕조의 선비들이 당나라에 유학하려 함에 있어 성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당나라에 있는 큰 성을 따서 성을 삼은 것이요, 이씨(李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같은 성은 신라시대에는 하나도 없었다.
신라 말 고려초까지는 일반적으로 성은 보이지 않고 이씨(李氏), 정씨(鄭氏), 같은 성은 고려중엽 부터 보인다. 왕실이 박(朴), 석(昔), 김(金)의 성을 붙인 것은 진흥왕 이후라고 생각한다. 신라에 한문이 들어오기 전에는 성은 없었고 당에 신라선비들이 유학하기 시작하여 성이 비로소 생겼다는 것은 오늘날의 통설이다. 이렇게 보면 알자지자 대보공(閼字智字 大輔公)때나 성한왕때부터 김씨라고 칭하였다고는 볼수가 없고 그후에 소급하여 계통을 찾아 김씨의 선조를 댄 것이라고 보이는데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이 동족이었거나 혹은 신라의 원시부족사회에 추장, 부추장(몽고계의 고대사회에 부왕이 둘 있었고 삼국유사에도 비왕의 문구가 보인다.) 들이 있어서 추장인 왕과 부추장인 비왕 둘이 박씨계, 석씨계, 김씨계에 각각 있었으나 김씨계는 성한왕 내지는 알지 대보공 때에 비로소 세력이 확대되어 왕위의 물망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로되 알자지자 선조 이전에도 신라에 김씨가 신라의 왕족에 속해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왕력 제 1에는 탈해왕의 전왕은 제3대 유리왕의 부인이 사요왕(辭要王)의 딸 김씨라고 되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왕의 처남으로 탈해왕에 이어서 알자지자께서 시림에 탄강(誕降)하였다는 해로부터 겨우 15년 후에 등극한 파사왕(婆娑王)(재위 중에 결혼한 기록은 없다.)의 왕비도 김씨사성부인(金氏沙省夫人)으로 허루갈문왕의 딸이라 하였으니 알자지자선조 이전부터 김씨는 진한(辰韓)의 일국인 사로국(新羅)의 육촌중 우세한 부족으로 적어도 비왕(裨王-副王)인 갈문왕등 왕의 칭호를 붙일 지위를 유지하던중 알자지자 선조내지는 성한왕 때에 세력이 굉대(宏大)하고 대대로 세력을 키워가고 왕비도 배출하다가 늦어도 맞추왕때에 이르러 제 1왕인 왕위에 오르고 차츰 중국의 왕실제도를 받아 들여 신라왕실로 하여금 김씨 왕조가 되게 하였다고 보여 진다. 신라에는 처음에는 경주지방에 여섯 부족이 그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를 육촌이라 부렸다고 한다.
이병도 박사의 한국사 고대편 에 의하면 육촌중 김씨 부족은 사량(沙梁)이었고 사량은 혁거세의 부인 알영의 탄생지 즉 즉 알영정의 소재지인 지금의 남천의 북안인 사정리를 중심하여 남천이북 서천이동 북천(알천)이남에 위치하여 박씨 부족의 급량(及粱)과 남북으로 대치하여 밀접한 관계를 갖었을 것이라고 한다.
위의 한국사 고대편에 의하면 김씨를 칭한 것은 임금등 군장대인의 뜻인 간(干), 감(邯), 금 이사금(尼師今)을 음을 따라 금(金) 내지는 김(金)이라 한 것이라 한다.
3. 미추왕이전도 왕족 김씨는 처음에 박씨, 석씨와 같인 일족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함은 앞에서 언급한바있는데 모계중심사회의 잔속이 엿보인 신라초기에 다군다나 왕족만의 형통을 이어온 성골에 한하여 왕이 될수있었던 신라초기에 있어서 미추왕이 등극하기 이전에도 박씨왕이나 석씨왕중에 김씨를 어머니나 할머니로 모신분이 있었다면 이는 김씨도 왕족이라 할 것인즉 시조이후 미추왕이전의 김씨위치는 박씨, 석씨 양씨의 혼인관계를 살핌으로써 짐작이 간다.
이미 알자 지자에서 대보공이 되고 태자가 되었다고 삼국사기에 쓰인점에 비추어보면 당시부터 김씨의 위치를 알수있거니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제육대왕 지마잇금(祗摩尼師今)은 석탈해왕 손녀의 어머님이시자 또한 제 5대왕 파사잇금(婆娑尼師今) 의 왕비이신 사성부인도 김씨인데 김허루 갈문왕의 따님이요 위 지마시사금도 왕비는 애래부인김씨로 김마제 갈문왕의 딸이시고 제9대왕 석벌휴이사금의 어머니 지진례 부인도 김씨이고 제 11대왕 조분잇금(助賁尼師今)의 어머니 옥모부인도 김구도 갈문왕의 따님이신 김씨이니 박혁거세이래 12왕중 5왕의 어머니 또는 비가 김씨 출신인 점에 비추어보면 우리김씨는 시조이후 미추대왕이 등극하기 전에도 계속하여 왕족의 옆에있으면서 왕에 주놔는 세력을 갖고 차츰 그 세력을 키워가다가 드디어 미추대왕에 이르러 신라의 제 13대 대왕으로 대통을 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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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시조 제 1세 알지대왕(閼智大王)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 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 서기 65년(乙丑) 3월 4일(삼국유사는 8월 4일) 밤에 탈해왕이 들으니 경주금성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기 들리는지라. 왕께서 사람이 살지도 않는 숲에서 닭이 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시고 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호공(瓠公)이 왕의 명령을 받고 시림(始林)에 가보니 한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금빛의 궤(櫃)가 걸려 있는데 그 아래에는 휜 닭 한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이 왕에게 돌아와 이 사실을 아뢰니 왕께서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어 그 금궤(金櫃)를 가져오게 하여 뚜껑을 열어보니 궤(櫃)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기이(奇異)하였다.
왕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신하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복으로 아들을 내려 주신 게 아니냐.’하시고 그 아이를 기르시니 그는 자라남에 따라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났다.
그래서 왕께서는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부르고 금궤(金櫃)에서 나셨다 하여 김(金)이라는 성(姓)을 정해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시림(始林)을 계림(雞林)이라 고치고 국호도 계림(雞林)으로 고쳤다고 전(傳)해 온다.
석탈해왕(昔脫解王)의 태자(太子)로서 섭정(攝政)에 해당하는 대보(大輔)벼슬에 계셨으나 석파사왕(昔婆娑王)에게 양보하시고 왕위에 오르시지 않으셨다. 뒤에 시조대왕(始祖大王)이라고 추존(追尊)되시었다.
신라 문무대왕비(文武大王碑)와 진철대사비(眞澈大師婢)에서 계림김씨시조(雞林金氏始祖)가 성한왕(星漢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15대조라고 기재되어있다.
비(妃)는 마정부인(麻貞夫人)이시니 석탈해왕(昔脫解王)의 왕자 각간 강조(康造)의 따님이시며. 아들은 세한(勢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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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신화
탈해왕(脫解王) 9년 경신년 3월 8일의 일이었다. 왕이 밤에 금성(金城- 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가보니 큰 빛이 시림에서 비치고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금색으로 된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는데, 궤 속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궤를 가져 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만 아이가 자고 있었으므로 하늘이 준 아들이라 생각하여 거두어 길렀다. 혁거세의 고사(故事)를 본떠 지혜가 뛰어나 아이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알지는 신라어로 어린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알지를 안고 왕궁에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다투어 줄을 지어 기뻐하며 춤추었다. 탈해왕은 길일(吉日)을 택하여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하고 평생토록 왕위에 앉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고 정했고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미추 이후 신라의 왕위는 대대로 김씨가 계승했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신화 보해:
천손 강림 신화이자 난생 신화(卵生神話)의 한 이형태(異形態)로 보인다. 하늘로부터 드리워진 자줏빛 구름, 그리고 흰 닭 등으로 천신(天神)이 상징되어 있고 비록 알이 직접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지가 황금의 궤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 흰 닭이 울었다는 것으로 보아 난생 신화의 한 가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알지의 후손 미추의 즉위를 밝히고 있는 이 알지 신화는 하나의 문화기원 신화(시조신화)에 속한다. 신라의 왕위 계승자들은 거의 알지의 후손인 김씨 가운데서 나왔다.
2세 추존 세한대왕(勢漢大王)이시며,
구보에는 벼슬이 이찬(伊湌)이라한다. 신라 문무대왕비에는 공을 성한왕(星漢王)으로 기재하였으며 대왕으로 추존(追尊)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능(陵)과 비(妃)는 실전(失傳)하고 아들은 아도(阿道)이다.
3세 추존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이시며,
신라 파사왕(婆娑王) 32년 신해(서기 111년) 벼슬이 파진찬(波珍飡)에 이르셨다. 일성왕(逸聖王) 15년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追尊)되셨다고 한다. 능(陵)과 비(妃)는 실전(失傳)하고 아들은 수류(首留)이다.
삼국사기의 박 아도는 김 아도의 오기 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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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도와 박아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제상은 본래 시조 박혁거세의 후예로 파사이사금의 5대손이며, 그 할아버지는 갈문왕 박아도이고 아버지는 파진찬 박 물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박제상을 김제상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성이 김씨라는 것은 그가 박혁거세의 후손이 아니라 김알지의 후손이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혼동이 생긴 것은 그의 조부로 기록된 갈문왕 아도의 성이 박씨인지 김씨인지 분명치 않았다는 뜻이지만, 본래 신라가 중국식의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김춘추가 신라의 고유 복장을 버리고 당나라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한 서기 649년 이후의 일이므로 아직 박제상이 살고 있던 5세기 초에는 신라에 그런 중국식의 성씨가 있었는지 어떤지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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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조 14년 기사 봉 아도갈문왕(封朴阿道葛文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사 중에 왕이 재위 시 갈문왕을 명했다는 기사는 흔하지 않다.
10대 내해왕이 죽은 아버지 骨正을 갈문왕에 추봉했다는 기사가 있고 진평왕이 자신의 아우들을 갈문왕에 봉했다는 기사가 있다. 진평왕 대는 갈문왕이 권력을 잃고 이름만 남은 명예직으로 추락한 상태이니 참고할 여지가 없다.
재위와 동시도 아니고 재위 중간에 갈문왕을 봉했다는 기사는 일성왕 대 기록이 유일하다. 이 점도 특이하지만 좀 더 이상한 부분이 있다. 朴阿道는 뭔가? 姓과 이름 3자를 연결해 기사 중간에 놓은 경우는 이 초기 기록에는 유사한 예가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본문 중에서 성+이름 체제로 기록되기 시작한 시기는 이 박아도를 빼면 법흥왕대 금관국왕 김구해(金官國王 金仇亥)가 처음이다. 금석문에 성이 등장하는 건 통일이후 부터이고 일본서기에 신라사신 이름으로 성이 본격 등장하는 시기는 7세기 중반경이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석우노나 박재상(昔于老나 朴提上)처럼 성을 병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기와는 다른 형식이고 그것도 후대 기록과정에서 들어간 것이 드러나므로 참고할 바가 못 된다. 朴阿道의 朴이란 姓 역시 후대에 삽입된 姓으로 볼 수 있다. 일성왕의 재위 중간에 갈문왕을 임명했다는 내용이나 이름에다 姓을 병기한 사실은 주목해 봐야 할 중대한 단서이다. 유사한 예 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단출한 문장의 주인공에 姓을 기입해야만 했을까?
이 아도갈문왕에 대한 기사를 다른 기록에서도 볼 수 있으니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조에 나오는 박제상의 계보이다.
박재상혹운모말 시조박혁거세, 파사이사금오세손, 조아도갈문왕
(朴提上或云毛末, 始祖朴赫居世, 波娑尼師今五歲孫, 祖阿道葛文王)
이 박제상 계보의 아도가 일성왕대 갈문왕에 봉해진 아도와 동일인이라는데 의문의 여지는 없다. 성이 박씨이고 갈문왕이란 지위가 동일하니 말이다.
그런데 기록상 박제상은 5세기 대 인물이고 박아도 갈문왕의 갈문왕 임명 시기는 148년이다. 박제상의 조부와는 도저히 생존연대가 맞다 고 볼 수 없다. 이 두 인물을 동일인으로 보려면 부득이 연대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눌지왕대 인물 제상의 조부라면 4세기 인물정도로 봐야겠지만 5대 파사왕의 3세손임을 감안하면 일성왕대 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김씨 계보에 또 다른 아도가 보이니 주목하게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원년기사 미추왕의 출생계보 즉
알지-세한-아도-수류-국보-구도-미추(閼智-勢漢-阿道-首留-旭甫-仇道-味鄒) 중 아도가 있는데 미추왕의 윗대이니 金阿道가 된다. 알지가 탈해왕대 태어났다 하고 알지의 5대손 구도가 벌휴왕대 인물이니 아도는 일성왕대 인물로 보는데 어긋남이 없다.
위의 아도갈문왕은 갈문왕이란 지위가 동일한 반면 활동연대가 어긋나고 아래 박아도와 김아도는 유사한 시기에 활동했지만 이름이 같다. 이 김씨 계보 중의 阿道가 앞서 거론한 박아도와 활동시기가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한의 윗대 알지가 4대 탈해왕대 태어났다 하고 알지의 5대손 구도가 9대 벌휴왕대 활동한 것을 감안하면 알지의 손자 아도가 7대 일성왕대 활동한 것은 자연스럽다. 박제상계보로 보아도 박아도는 5대 파사왕의 증손자이니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박아도는 갈문왕이고 김아도의 조부는 재상에 해당되는 大輔라는 최고위층임을 감안하면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고 본다. 더구나 성이 사용된 시기도 아니고 후대처럼 김씨나 박씨가 선명하게 구분되었던 시기로 볼 수도 없다. 설사 이름이 같더라도 후대 기록자는 둘을 달리 표현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기록의 아도가 모두 동일인물 임을 추론이 되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초기기록으로는 유일하게 기사 본문 중에 姓+名이라는 형식으로 기입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후대 기록자는 김씨 아도와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박씨 아도가 이 시기에 갈문왕을 지냈음을 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태조 성한왕을 찾는 작업에 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가 있으니 바로 문무왕비문이다. 문무왕 비문에는 성한왕을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했는데 연구자들은 이 계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文武王--1)武烈王--2)龍春--3)眞智王(金輪)--4)眞興王--5)立宗--6)智證王--7)習甫--8)訥祗王의弟--9)奈勿王--10)末仇--11)仇道--12)首留--13)郁甫--14)阿道--15)勢漢--16)閼智
지증왕 이후의 계보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지증왕의 계보와 미추왕의 계보를 연결하면 15대의 인물과 성한으로 추정되는 15대조 세한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태조 성한왕이 바로 삼국사기에 아무런 지위 표시 없이 등장하는 勢漢임을 알 수 있다. 세한의 아들인 아도의 정체를 확인한다면 삼국사기에서 감추어 놓은 태조 성한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기록상의 아도가 모두 한 인물을 지칭한다는데 큰 의론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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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수류(首留)이시다,
지마왕 15년 병인(서기 126년)에 수상격인 각간(角干)이 되셨다. 묘(墓)와 배(配)는 실전(失傳)한다. 자(子)는 욱보(郁甫)이다.
5세 욱보(郁甫)이다.
일성왕(逸聖王) 무자(서기148년) 각간(角干)이 되셨다. 묘(墓)와 배(配)는 실전(失傳)한다. 아들은 구도(仇道)이다.
6세 추존갈문왕 구도(葛文王仇道)이시다.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19년(서기 172년) 1월 벼슬이 파진찬(波珍飡)이셨고, 벌휴왕(伐休王) 2년(서기 185년) 2월에 도원수(都元帥)인 좌군주(左軍主)가 되시어 소문국(召文國=지금의 義城(의성))을 치시었다.
역시 벌휴왕(伐休王) 5년( 서기 188년) 3월에 백제(百濟)의 군사가 모산성(母山城=지금의 鐵州)을 침범하자 이를 물리쳤으며, 또 서기 189년 7월에 백제군(百濟軍)이 신라 땅 구양(狗壤)에 침범 하였을 때에는 백제군(百濟軍) 500여명을 살획(殺獲)하였다.
그러나 서기 190년 8월에 백제(百濟)가 다시 원산향(圓山鄕=醴泉)을 습격하고 또 부곡성(缶谷城)을 침범하였을 때에는 보은(報恩)에서 복병에 패(敗)하여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셨다. 미추왕(味鄒王) 2년 (서기 263년) 2월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되셨다.
비(妃)는 술례부인 박씨(述禮夫人 朴氏) 갈문왕이칠(葛文王伊柒)의 따님이시며, 지마왕(祇摩王)의 손녀이시다. 능(陵)은 양위(兩位)모두 실전(失傳)한다. 아들은 미추왕(味鄒王), 대서지(大西知), 말구(末仇)등을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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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직계왕은 아니지만 김씨 최초 미추왕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있다. 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군병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대적할 힘이 부족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하였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야 음덕으로 도와주었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金氏)다. 미조, 미고, 미소라고도 한다.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 박씨이고, 왕비는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선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김씨 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제37대 혜공왕 14년(779년) 4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능 안에서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호소하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이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임금님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말 말고 그 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 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 즉,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
이상 삼국유사의 기록을 다듬어 실었다. 미추왕은 신라의 대표적 왕가인 김씨 왕가(王家)의 사실상의 첫 번째 임금이다. 어머니는 박씨, 부인은 석씨라 박?석?김 세 가문의 연합으로 탄생한 임금임이 엿보인다. 김씨 왕계의 시조답게 자손들이 다스리는 신라를 위하여 영험을 나타낸 일을 일연선사는 잘 그려내고 있다. 더구나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될 정도로 신라호국의 화신인 김유신과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며 미추왕의 애민호국정신을 돋보이게 했다. 삼산과 병칭되는 제사라 함은 대사(大祀)를 말한다. 삼산은 나력, 골화, 혈례다. 원래 국가의 정사에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가 있는데, 미추왕릉에 대한 제사는 대사였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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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추존 충정대왕 말구(忠正大王 末仇)이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91년 유례왕(儒禮王) 8년 1월에 가장 벼슬이 높은 이벌찬(伊伐飡)이 되셨는데, 인품(人品)이 곧으시고, 충성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어, 유례왕(儒禮王)께서 자주 찾아오시어 요긴한 정사(政事)를 상의 하신 뒤에 시행(施行)하셨다. 이후 추존 충정왕(追尊 忠正王)이 되셨으며, 배위(配位)는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 미추대왕(味鄒大王)의 따님이시며, 아들은 내물대왕(奈勿大王)이시다.
2. 직계대왕1
8세 내물대왕(奈勿大王)
신라 제 17대 왕으로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이니 흘해왕(訖解王)께서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서기 356년 4월에 왕위에 오르신 후 많은 선정(善政)을 베푸셨다.
대왕 2년 봄에 사자(使者)를 각 지방에 보내시어 홀아비(鰥), 과부(寡), 고아(孤), 자식 없는 늙은이(獨)들을 위문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곡식 석 섬씩을 하사(下賜)하셨다. 특히 효성(孝誠)이 지극한 백성에게는 관직에 등용시키고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1급씩 승차를 시켜드렸다 .
왕 3년 2월에는 왕께서 친히 시조 묘에 제사(祭祀)를 드리셨고,
9년 4월에는 왜병(倭兵)이 크게 침입하므로 왕은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게 하시고 옷을 입혀 사람이 병기를 들고 있는 것 같이 위장시켜 토함산 밑에 세우고 용사 1천명을 솔 고개(釜峴) 동쪽 벌판에 잠복시켜 두었다가 적을 전멸 시켰다.
대왕 11년(서기 366년)에는 백제와 수교를 하셨고, 17년에는 사자(使者)를 각 지방에 보내시어 창고의 곡식을 풀어 가뭄으로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셨다.
18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 지금의 永平)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항복하여 귀순하였다.
또 26년에는 위두(衛頭)를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에게 보내어 친선(親善)을 꾀했다.
또 왕37년에는 강성한 고구려(高句麗)에 중부(仲父) 이친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사촌(四寸) 실성(後日 實聖王)을 인질로 보내셨다.
38년 5월 왜적이 또다시 침입하여 5일 동안이나 금성(金城)을 공격하였으니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지키고 있으니 퇴주하므로 날센 기병 2백 명을 시켜 적의 퇴로를 끊고 뒤이어 보병 1천명을 보내어 독산(獨山 지금의 迎日地方)까지 추격하여 전멸 시켰다.
또 41년 8월에는 말갈족(靺鞨族)이 북방을 침범하므로 삼척지방에서 격파시켰으며, 42년에는 강릉(江陵)지방에 가뭄이 심하므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시는 한편 1년 동안 세금을 면제 하셨다.
46년(서기 401년) 7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사촌 실성(實聖)이 돌아왔다.
대왕47년(서기 402년) 2월에 돌아가셨으니 제위 47년 동안 여러 차례 외침을 물리치시고, 자비로서 백성을 다스리신 성군이시다.
능(陵)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첨성대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비(妃)는 보반부인 김씨(保反夫人 金氏)이니, 미추왕의 공주이시다.
아들은 눌지대왕(訥祗大王), 복호(卜好), 말사흔( 末斯欣)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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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17대 내물 마립간에 대하여.
신라 제17대 왕(재위 356∼402).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신라에서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이며, 비(妃)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흘해왕을 이어 즉위하였는데, 이로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벌여 세우고, 병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하였다.
381년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게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은 뒤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으로서,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漢字)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고, 395년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삼국유사
- 17대왕 내물마립간(?~402)
성은 김씨.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이고,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의 왕력(王曆)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다만 미추이사금과 일정한 근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흘해이사금이 후계자가 없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삼국사기》에는 '이사금(尼師今)'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首席長) 또는 후세의 군장(君長)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上監)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내물마립간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大等)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 (中央政廳)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南堂)'에서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朴), 석(昔), 김(金)의 삼성(三姓)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물마립간의 이러한 체제내적인 정비는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여, 377년과 3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前秦)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衛頭)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는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태평어람 太平御覽》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 秦書》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海東:新羅)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의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같은 신라와 전진과의 외교관계는 곧바로 중국문물 수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물마립간대에 와서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게 된 이유는,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신라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는 왜(倭)와 연합한 다음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그 결과로 체제정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 단독으로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는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399년에 내물마립간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 5만명의 보병, 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하여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한 일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즉,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392년에는 내물왕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냈다.
401년에 귀국한 실성은 내물마립간이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을 배제시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여기에는 고구려의 압력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런 만큼 신라가 내물마립간 때에 대내적으로는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해도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야 하였고, 그 결과 내정간섭을 받을 정도로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밖에도 내물마립간 때에는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흉년이 든 하슬라(何瑟羅:지금의 江陵) 지방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투항하자 백제와의 외교마찰을 감수하면서 이를 받아주었으며, 동북 국경지방에서는 말갈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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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복호(卜好)이시다.
실성왕(實聖王) 11년(서기 412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가셨다가 눌지왕(訥祗王) 2년(서기 418년)에 박제상(朴堤上)의 충성심(忠誠心)과 지혜로 고구려 땅을 무사히 탈출하여 환국하시었다. 구보에는 갈문왕에 추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근거를 알 수 없다.
배(配)는 천명부인(天命夫人) 묘는 양위(兩位)모두 실전(失傳) 아들은 습보(習寶)이시다.
10세 습보 갈문왕(習寶 葛文王)
생전에 갈문왕이셨던 것 같다.
비(妃)는 오생부인(烏生夫人) 눌지왕의 공주 묘는 양위(兩位)모두 실전(失傳) 아들은 지증왕(智證王)이시다.
3. 직계대왕2
11세 지증대왕(智證大王)
서기 437년생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남달리 뛰어 나셨다. 서기 500년에 신라 21대왕인 소지왕(炤智王)이 아드님 없이 돌아가시자 재종제(再從弟=육촌아우)로서 제 22대 왕위에 오르셨다. 왕은 고래(古來)의 원시적인 문물제도를 일신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루셨고 마립간(麻立干)으로 써 오던 왕호를 처음으로 왕(王)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왕 3년에는 순장(殉葬)을 금(禁)하시고, 농사를 장려하여 소로 밭갈이 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4년에는 국호를 다시 신라로 정하셨다.
5년에는 상복(喪服) 입는 법을 정하시고,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골화성(骨火城) 등을 12성을 쌓으셨다.
6년에는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정하시고 실직주군주(悉直州君主)에 이사부(異斯夫)를 임명하시고 얼음을 저장케 하시고 선박의 편의를 도모하셨다.
7년에는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시고 서울에 동쪽시장을 설치하시고, 함정(함정)을 파서 맹수의 피해를 막도록 하셨다.
13년 6월에는 이사부를 시켜 지략으로서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항복받아 병합(倂合) 하여, 15년에는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백성을 이주시켰다.
대왕 15년(서기 514년)에 돌아가시니 제위 14년이요 향수 78세이셨다.
시호는 지증대왕(智證大王)으로서 신라에서 처음으로 시호법(諡號法)이 시작되었다.
비(妃)는 연제왕후 박씨(延帝王侯 朴氏) 이찬 등흔(登欣)의 따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모양부(牟梁部) 상공의 따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들은 법흥왕(法興王), 입종(立宗), 진종(眞宗)을 두셨다
12세 진종(眞宗) :
벼슬은 각간(角干) 배(配)는 우정부인 박씨(禹貞夫人 朴氏) 아들은 흠운(欽運)이다.
13세 흠운(欽運) :
벼슬이 구보에는 각간으로 되어 있어나 삼국사기에는 일길찬(一吉飡)으로 기재되어있다. 배(配)는 우정부인 박씨(禹貞夫人 朴氏). 아들은 마차(摩次)이시다.
14세 마차(摩次) :
벼슬은 잡간(匝干)이시고, 배(配)는 하차부인 박씨(河次夫人 朴氏). 아들은 법선(法宣)이시다.
15세 추존 현성대왕 법선(玄聖大王 法宣) :
벼슬은 대아간(大阿干)이시며, 원성왕(元聖王) 2년 (서기786년)에 현성왕(玄聖王)으로 추존되셨다.
비(妃)는 현성왕후 김씨(玄聖王后 金氏). 아들은 의관(義寬)이시다.
16세 추존 신영대왕 의관(神英大王 義寬) :
벼슬은 이찬이시며, 원성대왕 2년 신영대왕으로 추존되시었다. 비(妃)는 영의왕후 김씨(英懿王后 金氏). 아들은 위문(魏文)이시다.
17세 추존 흥평대왕 위문(興平大王 魏文) :
신라 제 33대 성덕왕 11년에 이찬으로 중시가 되셨다가 성덕왕 12년 10월에 년만(年滿) 하심을 핑계 삼아 사직 은퇴 하셨다. 서기 786년에 손자 되시는 원성대왕께서 흥평 대왕으로 추존하시고 오묘(五廟)에 모시었다.
비(妃)는 흥길왕후 김씨(興吉王后 金氏). 아들은 효양(孝讓)이시다.
18세 추존 명덕대왕 효양(明德大王 孝讓)
벼슬은 일길찬이시며, 당서에는 벼슬이 대아간으로 되어있다. 서기 786년에 아드님이신 원성대왕(元聖大王)께서 명덕대왕(明德大王) 으로 추존하시고 오묘에 모시었다.
비(妃)는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 朴氏).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존 아들은 원성대왕 경신(元聖大王 敬信)이시다.
4. 직계대왕3
19세 원성대왕 경신(元聖大王 敬信)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왕통이 끊어지고 모반과 시해가 연이어 지다가 서기 785년에 원성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그 뒤에는 모두 우리의 경순왕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제 12대 왕인 지증왕이 승하하신 뒤에 8대 271년 만에 다시 왕위를 이어 셨다. 원성왕의 후손으로 왕위에 오르신 분은 소성대왕, 애장대왕, 현덕대왕, 흥덕대왕, 희강대왕, 민애왕, 신무대왕, 문성대왕, 헌안대왕, 헌강대왕, 견강대왕, 진성여왕, 효공대왕, 경순대왕 등 14왕이요, 그 재위연수(在位年數)는 135년에 이른다.
대왕은 내물대왕의 12세손이며, 태종무열왕계의 마지막 왕이신 혜공대왕 16년(서기780년) 2월에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했을 때 이찬벼슬에 계셨는데 혜공대왕의 명을 받아 상대들 김량상과 합세하여 김지정을 목 베고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셨다.
이 난리로 혜공대왕과 왕비기 시해되었음으로 상대등 김량상이 왕위에 오르시니 이기 곧 제 37대왕 선덕대왕이시다.
서기 780년 선덕대왕이 왕위에 오르시자 원성대왕께서는 수상격인 상대등이 되셨다. 어느 날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 쓰고 십이 현금(十二 絃琴)을 안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시는 꿈을 꾸셨다.
여삼이란 사람의 해몽에 따르면 북천(北川)물에 기도를 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 하셨다. 드디어 서기 784년 1월에 선덕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드님이 없자 군신들이 의논하여 주원(周元)을 다음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주원의 집은 알천건너 경북(京北) 2십리에 있었고 때마침 밤중에 많은 비가 내려 알천강물이 넘쳐 주원이 강물을 건너오질 못했다.
군신들은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주원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니 평소에 덕망이 높고 군왕의 체모를 갖추신 상대등 경신(上大等 敬信)을 다음 왕으로 모시자는 여론이 있어 다시 군신회의를 열어 대왕을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제 38대왕이 되셨다.
왕께서는 왕위에 오르시자 시조대왕, 대종대왕, 문무대왕, 조부이신 흥평대왕, 부친인 명덕대왕을 오묘에 모시고 문무백관의 작위를 1급씩 승차시키셨다.
2월에 김원전(金元全)을 당에 보내시니 당의 덕종(德宗)은 나금능채(羅錦綾彩) 30필과 옷, 은합(銀盒) 등의 예물을 보내왔었다.
이해 가뭄이 들자 66,230섬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하셨다. 3년에는 죄수를 대사면 하셨고, 4년 봄에는 종전에 활쏘기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고치어 독서삼품제(讀書三品制)로 인재를 뽑으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을 읽어 능통하고 논어 효경(論語 孝經)에 밝은 사람을 상품으로 하고 ,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으로 하였다. 이것이 동방과거제도(東方科擧制度)의 시초였다.
시전(詩傳), 서전(書傳), 춘추(春秋), 예기(禮記), 주역(周易),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능통한 사람은 특별히 발탁하셨다.
이해에는 가뭄이 심하였음으로 전국에 살을 보내어 안무(安撫)하셨다.
5년에 가뭄이 심하여 국고를 풀어 구휼(救恤)하셨고, 6년에는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셨다.
또 같은해 5월에는 곡식을 풀어 광주(廣州)와 공주(公州)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시었다. 7년에는 태자 인겸(仁謙)잃는 참척(慘慽)을 당하시고 태자(太子)에게 혜충(惠忠)이란 내리셨다.
또 전 시중 이찬 제공(悌恭)이 모반을 함으로 잡아 죽였다. 혜충태자(惠忠太子)의 아드님인 준옹(俊邕)을 시중으로 삼으시고
8년 5월에는 왕자 의영(義英)을 태자에 봉했으나 십년에 또다시 태자를 잃어셨다. 같은해 7월에는 봉은사를 세우셨다. 11년 1월에는 혜충태자의 아드님이신 준옹(俊邕)을 태자로 봉하셨다. 또 이해 4월에 가뭄이 심하여 왕께서 죄수를 다스리시니 유월에 비가 내렸다. 12년 봄에는 기근이 들고 질병이 유행하여 창고를 풀어 구제하시었다.
14년(서기 798년) 3월에 망덕사의 두 탑(塔)이 서로 마주쳤는데 이해 12월 29일에 왕께서 돌아가셨음으로 원성(元聖)이라 시호(諡號)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하였다. 재위 14년 이셨다.
왕께서는 이처럼 문치(文治)에 뛰어나신 영주이셨는데 궁달지변(窮達之辯)으로 친히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어셨다.
비(妃)는 숙정왕후 김씨(淑貞王侯 金氏) 각간 김신술(金神述) 따님이시며, 아들은 인겸(仁謙), 의영(義英), 예영(禮英)이 계신다.
20세 추존 혜강대왕 예영(惠康大王 禮英) :
벼슬은 각간에 이르셨다. 손자이신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에 오르시어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존하시었다. 비(妃)는 순성태후 김씨(順成太后 金氏) 대아간 충연의 따님 아들은 제옹(悌邕), 헌정(憲貞), 균정(均貞)이시다.
21세 추정 성덕대왕 균정(成德大王 均貞)
서기 812년(헌덕왕 10년) 봄에 시중이 되셨다. 헌덕왕(憲德王) 14년 3월 시중 김헌창은 서기 785년 자기아버지 주원이 왕위에 오를 뻔 하다가 장마로 알천 강물을 건너지 못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원성대왕(元聖大王)이 왕위에 오르셨던 사실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청주 도독(靑州 都督)을 거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公州)이 되었을 때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국(長安國)이라하고 연호를 경운원년(慶雲元年)으로 정한 뒤 광주(光州), 전주(全州), 진주(晉州), 상주(商州)의 도독을 위협하니. 충주(忠州), 청주(淸州), 김해(金海) 등의 벼슬아치와 각 고을 수령들이 복속(服屬)하였다.
진주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빼서 밀양(密陽)으로 도망가고 광주(廣州), 춘천(春川), 양산(梁山), 평양(平壤), 원주(原州) 등지에서는 먼저 헌창의 반란을 알고 군사를 단속하여 수비하였다. 18일에 전주(全州) 장사 최웅(崔雄)이 서울로 도망을 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헌덕대왕은 장군 8명을 내어 왕도 팔방을 수비한 후 일길찬 장웅(張雄)을 선발하고, 뒤이어 위공(衛恭)과 제릉(悌凌)을 보내고 이찬 균정공(伊湌 均貞公) 그 아드님 우징(祐徵= 神武王)공과 잡간 웅원에게 삼군을 장악케 하여 이를 막아 치도록 하였다. 이찬 균정 공께서는 이 헌창 난의 관군 총사령관이 되시어 이를 정벌하시었다.
이찬 균정 공께서는 적군을 성산(星山)에서 맞아 이를 격멸시키고 제장(諸將)들과 더불어 전곤을 지휘하여 공주 고마나루에 이르러 적과 싸워 많은 적을 참획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공주성(公州城)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므로 관군을 성을 포위하고 10일 동안 성을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자 헌창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살하니 이렇게 하여 헌창의 반란은 평정되었고 헌창을 가담한 무리 239명을 주살하였다. 흥덕대왕 10년( 서기 835년) 3월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오르셨다. 흥덕대왕이 돌아가심에 아드님 우징(신무왕), 조카 예징, 및 김양(金陽)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시려 하였으나 조카 김제륭(金悌隆=희강왕)이 시중 김명(민애왕)등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시려 하였으므로 궁중에 들어가 서로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 하셨다. 이 싸움에서 김양(金陽)은 화살에 맞았다. 후일 아드님 우징께서 반정하여 왕위에 오르시자 성덕대왕으로 추존되시었다.
비(妃)는 진교부인 헌목태후 박씨(眞矯夫人 憲穆太后 朴氏) 이시다.
5. 직계대왕4
22세 신무대왕 휘 우징(神武大王 諱 祐徵)
서기 839년 4월에 (현덕왕 14년)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을 때 대아찬(大阿飡)으로서 부친 균정공(均貞公)과 함께 삼군을 지휘하여 공주 금강 고마나루(公州 錦江 熊川)에서 크게 싸워 적을 무찌르고 대승리를 거두어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서기 828년 1월에는 대아찬으로서 시중이 되셨다가 서기 831년(흥덕왕 6년 1월)시중을 면하셨다.
서기 834년(흥덕왕 9년) 1월에 다시 시중이 되셨으나 다음해 835년 2월에 아버님 균정공(추존성덕왕)께서 상대등이 되시어 입상하시므로 시중벼슬을 사임하셨다.
서기 836년 12월에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시자 아버님 균정공께서 왕위에 오르시려 함으로 김양(金陽)과 더불어 아버님을 도왔으나 역시 왕위를 노리는 제륭(悌隆=僖康王)과 궁중에서 대결하여 싸운 결과 패하여 아버님이 전사하였으므로 신무왕께서는 패주하셨다.
이에 경쟁자인 희강왕이 신라 제 43대의 왕위에 올랐다.
서기 837년(희강왕 2년) 4월에 아버님 균정공께서 실패한 일로 원망을 했다는 이유로 희강왕편의 김명(金明), 이홍(利弘), 등이 모해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혹 화가 미칠까 두려워 5월에 가족을 거느리고 황산진구(黃山津口)로 피하셨다.
그곳에서 배를 타시고 청해진(淸海鎭)으로 가시어 청해진대사 궁복(淸海鎭大使 弓福=張保皐)에게 의탁하시었다.
6월에 고종매부예징(姑從妹夫禮徵)과 아찬 양순(阿飡 良順)이 역시 패하여 청해진으로 왕을 찾아 의지 하였다. 마침내 희강왕 3년(서기 838년)에 희강왕 편에서 희강왕을 세우고 균정(均貞)을 패사(敗死) 시킨 김명(金明), 이홍(利弘), 등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은 자결하고 김명(金明)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 44대 민애왕(閔哀王) 이다.
민애왕 2년(서기 839년) 2월에는 먼저 균정(均貞)공을 도와 희강왕(僖康王)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실패하였던 김양(金陽)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대왕을 찾아 뵈었다.
이에 대왕께서는 민애왕 명(明= 민애왕 이름)이 찬위했다는 말을 듣고 청해진대사 궁복(淸海鎭大使 弓福=장보고)에게 이르시기를 김명(金明)이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이홍(利弘)이 군부를 왕살(枉殺)하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살 수 없다.
원(願) 컨대 장군(將軍)의 군사를 빌려서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까한다.
하니 궁복이 이를 쾌히 승낙하고 군사 오천을 주면서 그의 친지(親知) 정연(鄭年)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반란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해 12월에 대왕께서는 김양(金陽)을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으시고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연(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이르렀다.
민애왕을 대감 김민주(大監 金敏周)를 시켜 맞아 싸우게 했다.
대왕께서는 낙금(駱金)과 이순행(李順行)을 보내 기병 3000으로 돌격하니 살상(殺傷)이 태반이었다.
다음해 1월에 밤낮으로 행군을 하여 대구벌에 이르니 민애왕(閔哀王)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찬 대흔(伊湌 大昕)등 장병으로 하여금 막게 하였다. 그러나 대왕의 군사가 싸워서 크게 이기고 민애왕(閔哀王)편의 군사는 과반수를 잃었다. 민애왕은 서쪽 교외의 큰 나무아래에 있었는데 좌우에 있든 사람들이 다 흩어지자 혼자서 당할 수 없을 깨닫고 달아나 숨었으나 병사들이 찾아서 참살하였다. 이에 예징(禮徵)등이 궁중에 있던 민애왕의 잔당을 깨끗이 소탕하였다.
이리하여 서기 839년 4월에 예징(禮徵)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시니 신라 제 45대 왕이시다.
왕께서는 즉위하시자 선조이신 이찬 예영(伊湌 禮英)공을 추존하여 혜강왕으로 봉하시고 식읍 이천호를 내리셨다. 한편 이홍(利弘) 은 두려운 나머지 처자를 버리고 산속에 숨었으나 기사(騎士)를 보내어 참살 하였다.
신무대왕께서 전에 청해진대사 궁복(淸海鎭大使 弓福=장보고)에게 의탁하고 또 궁복의 군사를 빌릴 때 장차 왕위에 오르면 궁복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신바가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간하기를 “궁복은 출신이 미천하니 그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만류하여 뜻을 이루질 못했다. 이해 7월에 왕께서 불행하게도 역도인 이홍(利弘)의 화살에 등을 맞는 꿈을 꾸시고 등창이 생기시어 그해 11월 23일에 돌아가셨다. 능은 경주 제형산 서쪽이 있다.
비는(妃) 정종태후(定宗太后) 명해의 따님이다.(明海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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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 대하여
장보고는 헌덕왕 대에 중국으로 들어가 무녕군 소장이 되었으며, 흥덕왕 3년(828) 귀국한 후 청해진 설치를 왕에게 허락받고 그곳을 지켰다. 그는 해적의 소탕에 주력하여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통상들을 통제하며 큰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신무왕의 즉위에 군사를 보조함으로써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기로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려고 준비한다. 그러나 청해진에 들어온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했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반격하며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했다. 그리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실봉 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했고,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중앙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는데,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쯤 지나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또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부탁하며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가, 왕위에 오른 김우징이 약속을 지키려 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다고도 전한다.
어쨌든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이후 그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군사행동을 일으킨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는 바 없다. 실제 반란을 일으켰든지 그렇지 않든지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접근한 염장은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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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직계대왕 5
23세 문성대왕 휘 경응(文聖大王 諱 慶膺)
서기 839년 7월 신무왕(神武王)의 뒤를 이어 제 46대 왕위에 오르셨다. 왕위에 오르시자 죄수를 대사면(大赦免)하시고 예징(禮徵)을 상대등으로 하시고 “청해진대사 궁복 장보고(淸海鎭大使 弓福 張保皐)는 일찍이 신고(神考 신무대왕)를 도와 선조의 큰 적(巨賊)을 토벌하였으니 어찌 그 공을 잊으랴”
하시고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겸하여 의복(衣服)을 하사 하셨다.
부왕이신 신무왕께서 장궁복(張弓福)과의 약속에 따라 7년 3월에 궁복의 딸을 차비(次妃)맞으려하니 정신(廷臣) 들이 간하기를 “부부의 도(夫婦之道)는 사람의 윤리(倫理) 인 고로 하우(夏禹)는 도산(塗山)을 아내로 맞아 흥하였고, 은탕(殷湯)은 신을 맞아 창성하였고, 주의 유왕(幽王)은 포사(褒姒)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진헌공(晉獻公) 은 여희(驪姬)로 인하여 국난이 일어났으니 국가의 흥망이 이와 같아 삼가지 않을 수가 없나이다. 장궁복(張弓福)은 섬 사람이온데 어찌 그의 딸이 왕비(王妃)가 되오리까. 하므로 그 계획은 그만두시었다. 궁복은 자기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한데 크게 원한을 품고 왕 8년(서기 486년)봄에 역적을 모의 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무주사람 염장(閻長)이란 용사가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조정에서 허락하여 주신다면 소신이 장궁복을 제거 하겠나이다” 하니 왕께서는 이를 허락 하셨다.
염장(閻長)은 청해진의 장궁복에게 가서 지략을 써서 “ 나라를 배반하여 장궁복에게 의탁하는 것처럼 꾸며, 그를 환영하는 연회석상에서 술취한 장궁복을 찔러 죽였다.
왕 9년 2월에는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臨海殿)을 수리 하셨고, 11월 9일에는 이찬 김식(伊湌 金式)등의 모반을 평정하시고 12년에는 사형수의 사면령(赦免令)을 내리시고 13년 2월에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의 백성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케 하셨으며, 이찬 원홍(伊湌 元弘)이 불경을 가지고 왔음으로 왕께서는 교외(郊外)까지 나가시어 이를 맞으셨다.
대왕 14년 7월에는 명학루를 수리하시고 17년 1월에는 사신을 보내시어 서남주군(西南州郡)의 백성들을 위문하시었다.
왕께서는 이와 같이 백성을 사랑하시고 문화재를 아끼시는 현군이었으나 3년 봄에 일길찬 원필(元弼)이 모반하다가 도망가고, 8년에 장궁복(張弓福)이 모반하려했고, 9년 5월에는 이찬 양순(良順)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었고, 11년 9월에는 이찬 김식(金式)등이 모반하다가 복주되는 등 네 차례에 걸친 모반사간을 모두 평정하셨다.
대왕 19년 정축년(서기 857년) 9월 왕께서는 병환이 드시어 아뢰기를 “과인은 불민한 사람으로 높은 위에 있어 위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을까 근심이 되어 조석으로 조심조심하여 마치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보좌하여 사직에 욕된 일은 없었으나 불행하게도 병이든지 십 여일이 되었어도 병세는 더해지고 정신이 혼미하여 아침이슬과 같이 쓰러질까 두려운데 나라의 대업은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며, 모든 정사는 잠시라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서불한(舒弗邯) 의정(誼靖)은 선왕의 손자이시고 과인의 숙부로서 효우명민(孝友明敏)하고 관후 인자(寬厚仁慈)하여 오래도록 보정하였으니 이분을 모시면 위로는 조종을 받들고 아래로는 창생을 진무(鎭撫)할만 하여 무거운 짐을 풀어 현덕에게 맡기 고저 하니 어찌 한탄 하리요. 항차 생사 시종(生死 始終)은 만물의 대기(大期)요, 수명장단은 인명의 상분(常分)이니 죽는 사람은 상리에 이르는 것이므로 죽는 사람을 과히 슬퍼하질 말 것이요, 모든 신하들은 힘과 충성을 다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라. 이 뜻을 국내에 밝혀 알게 하라.” 하시고
그해 9월 7일에 돌아가시니 재위 19년이었다.
시호는 숭덕흥문지문(崇德興文之文)이요, 행화지천지성(行花知天之聖)이라 하여 문성대왕으로 정하였다. 능(陵) 경주 공작지에 있으며,
비(妃)는 조명왕후 박씨(照明王后 朴氏) 와 김씨 위흔의 딸(金氏 魏昕 女) 자식은 안원(安原)을 두셨다.
24세 안(安)
삼국사기에는 부왕이신 문성대왕(文聖大王) 9년(서기 847년)에 왕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고 하고 14년 11월에 왕태자께서 돌아가셨다고 기록 되어있으나 태자인 왕자는 이때 어른이 아닌듯하다.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위(位)에 오르자 이찬에서 수상격인 상대등(上大等)이 되셨다. 비(妃)는 원인부인박씨(元仁婦人朴氏)이며, 능은 실전하고 아들은 민공(敏恭), 민선(敏善)을 두셨다.
25세 민공(敏恭)
헌강대왕(憲康大王) 6년(서기 880년) 2월 이찬으로서 우겸(又謙)의 뒤를 이어 시중이 되셨다. 시중으로 계실 때는 태평성세(太平盛世)를 누리고 있던 때인데 서기 880년 9월 9일에 왕께서는 좌우군신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오르시어 사방을 관망하셨는데 서울(경주)의 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으므로 왕께서는 민공(敏恭) 공께 이르시기를 “ 내가 듣건데 지금 백성의 집들은 모두 기와로 덮었고 짚으로는 덮지 않는다고 하며, 밥을 짓는 데는 숯을 쓰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라고 묻자
민공 공께서 대답하여 아뢰기를 “ 소신도 그와 같은 말을 들었 아온데 그것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천지음양이 잘 조화가 되고 풍우순조(風雨順調)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의식이 풍족하고 국경은 별탈이 없으므로 시정(市井)에서는 모두 기뻐하오니 이는 성덕의 소치 이 옵니다” 라고 하시니.
왕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이는 실로 경들의 힘이지 어찌 짐의 덕이라 하리요.”라고 하셨다고 하신다.
아들은 실홍(實虹)을 두셨다.
26세 추존 선흥대왕 실홍(宣興大王 實虹)
벼슬은 각간이었으며, 서발한(舒發翰)이셨다. 경순대왕(敬順大王)께서 선흥대왕(宣興大王)으로 추존하셨다. 삼국사기 효녀 지은편(孝女 知恩篇) 기록에 따라 수정하였음.
27세 추존 의흥대왕 인경(懿興大王 仁慶)
벼슬은 아진찬 경순대왕께서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존하셨다.
벼슬은 잡간(迊干)이었다.
사위(婿) 고려태조 왕건
28세 추존 신흥대왕 효종(神興大王 孝宗)
삼국사기 효녀 지은편(孝女 知恩篇)에 의하면 공께서 소년시절 화랑으로 계실 때 그 무리가 몇천 여명에 이르렀고, 효녀 지은(孝女 知恩)을 종으로 샀던 주인에게 그 몸값으로 십여 섬을 변상하여 주고 지은이로 하여금 노예를 면하게 해주고 또한 조(粗) 일백 섬과 의복을 내리셨다. 이 말을 들은 진성여왕께서 그의 오빠인 헌강대왕(憲康大王)의 공주를 공에게 중매하시었다고 한다.
대아찬으로서 시중이 되셨고, 뒤에 이찬으로 승진되셨다.
경순대왕께서 신흥대왕으로 추존하시었다.
비는 계아부인(桂娥夫人) 김씨이며, 헌강왕의 따님이시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실린 효녀 지은설화의 이야기.
“통일신라 말 정강왕(886년)의 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했던 지은은 서른둘이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홀로 됐을 뿐만 아니라 앞 못 보는 봉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팔이만으로는 두 모녀가 살기에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지은은 부잣집에 가서 자청해서 몸을 팔아 그 집의 종이 되었다. 그 대가는 쌀 열섬이었다. 지은은 하루 종일 그 집에 가서 일하고 날이 저물면 어머니에게 밥을 지어드렸다. 이런 날이 사나흘 지나자 지은의 어머니가 딸에게 물었다. ‘저번에는 음식이 거칠어도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비록 음식이 좋으나 맛이 그전만 못하고 속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으니 무슨 까닭이냐?’ 어머니는 마음으로 맛을 봤던 것이다. 지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이런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 때문에 너를 여종이 되게 했으니. 내가 빨리 죽는 게 낫겠구나.’ 어머니와 딸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니, 그 소리에 길 가는 사람들도 크게 슬퍼했다. 그 당시 화랑 효종량이 이를 보고는 자신의 집에서 곡식 100섬과 의복을 보내주고, 지은의 주인에게 그 몸값을 갚아 양민이 되게 했다. 효종량의 무리 몇 천도 감읍하여 각기 곡식 한 섬씩을 지은에게 주었다. 정강왕도 이 일을 알고는 벼 500섬과 집 한 구를 내주고 혹시 곡식을 도둑질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 군사를 보내 지키게 했다.” 효녀 지은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소개된 유명한 이야기다. 마치 심청전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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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직계대왕 6
제 29대 경순왕 부( 敬順王 傅)
서기 897년에 탄생하셨고, 서기 927년에 11월에 이종(姨從)이신 경애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 56대 왕위에 오르셨다.
신라 제 51대 왕인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도적이 일어나고 나라 안에는 군웅할거(群雄割據)로 어지럽게 되자 진성여왕을 인책하여 그의 서조카인 효공대왕(孝恭大王)에게 양위하였다. 그러나 효공대왕의 대에도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이 점점 커지기만 하고 효공대왕은 아드님 없이 돌아가셨음으로 사람들이 효공대왕의 매부(妹夫)이고 신라 제 8대왕 아달라 이사금의 먼 후손인 박경휘(朴景暉)를 세워 왕을 삼으니 이가 곧 신라 53대 왕인 신덕왕(神德王) 이요, 박씨로써는 728년 만에 비로소 왕위에 오른 셈이다.
신덕왕(神德王)이 돌아가시자 큰아들이 경명왕이 왕위에 오르시고 또 그뒤를 이어 경명왕의 아우 경애왕이 왕위에 오르시었다.
경애왕 4년(서기 927년) 11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왕도를 침범하였는데 경애왕은 비빈종척(妃嬪宗戚)을 거느리고 포석정(鮑石亭)에서 놀이를 하던 중이어서 견훤에게 잡히고 말았다.
견훤은 궁중을 약탈하고 경애왕을 협박하여 자살케 한 뒤에 왕의 이종제(姨從弟)인 경순왕(敬順王)을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삼고 퇴각하였다.
이에 경순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것이다.
서기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지금의 경북의성(慶北義城)을 공격하였고, 10월에는 문경(聞慶)을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서기 931년(경순왕 5년 2월)에는 고려 태조가 오십여 기를 거느리고 경주에 이르러 대왕을 배알(拜謁)할 것을 원하므로 대왕께서는 백관을 거느리고 영접하여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푸셨다.
이곳에서 대왕께서는 “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환란이 일어나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며, 마침내 나라를 침해 하니 분통함을 말할 수가 없다”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니 주위에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 태조 왕건도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 하셨다.
고려태조가 수십일 머무른 뒤에 돌아갈 때 왕께서는 종제 유렴(從弟 裕廉)으로 하여금 배행하도록 하셨다.
8월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사신을 보내어 금삼안마(錦衫鞍馬)를 바치었다.
대왕 6년(서기932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셨다.
9년 (서기 935년) 10월에 이르러 강토는 그의 다 남에게 빼앗기어 국세는 심히 쇠약해져 있었고 스스로 나라를 온전하게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왕께서는 천명을 깨달으시고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국책을 의논하시었다.
대왕께서는 나라를 고려태조에게 양도할 것을 제의 하자 어떤 이는 “옳다 ”하고 어떤 이는 “옳지 않다”고 하여 찬반이 매우 분분하였다.
특히 태자이신 일(諱 鎰=麻衣太子)께서는 “ 나라의 존망은 천명에 따르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의사들과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고 스스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 이를 의논함이 옳은 일이 온데 어찌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겠나이까.”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외롭고 위험함이 이와 같아 형세는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는데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피를 흘리게 함은 나로서는 차마할 수가 없는 일이다”라고 하신 뒤 백성을 생각하시는 지극한 생각에서 시랑 김봉휴(侍郎 金封休)편으로 국서를 고려태조에게 보내어 신라국을 고려태조에게 양도할 뜻을 전하시었다.
이에 태자 일(鎰)은 통곡하면서 대왕을 배별하고 개골산(皆骨山=金剛山)으로 들어가시어 바위틈을 집으로 삼아 몸에는 베옷(麻衣)을 걸치고 초식으로서 애달픈 일생을 마치셨다고 하여 세칭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려온다.
그해 11월에 고려태조가 대왕의 국서를 받고 대상왕철(大相王鐵)등을 보내어 이를 영접토록 하였다.
대왕께서는 신라 국도를 떠나 고려태조에게 귀부하는데 향거보마(香車寶馬)가 삼십리를 연이었고 길가의 국민들은 목메어 통곡하며 봉송하는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담장을 두른 뜻하였다 고 한다.
고려태조는 교외(郊外)까지 나가서 대왕일행을 맞이하여 위로하면서 궁 동쪽 갑제(甲第= 훌륭한 저택)를 드리고 고려 태조의 장녀(柳花婦人 所生)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대왕의 후비로 삼으셨다.
또 그해 12월에 대왕께서는 고려태조의 천덕전(天德殿)에서 신하가 되는 의식인 정견례(庭見禮)를 드리니 신라국이 건국한지 992년의 오랜 역사는 그 막이 내리고 천년사직은 이렇게 끝이 났다.
고려태조는 부마가 되신 경순대왕에게 정승공(政丞公)을 삼으시니 그 위(位)가 태자 보다 윗자리이며 국록으로 해마다 쌀(白米) 일천 섬을 지급하고 시종하는 사람들과 그 외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보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신라를 경주(慶州)라 고쳐 부르고 대왕의 식읍으로 정하였다.
처음 대왕께서 고려태조에게 귀부하실 때에 고려태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대왕에게 두터운 예로서 대접을 하며 사자를 시켜 대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과인에게 넘겨주시니 그 은혜가 크옵니다. 원 하옵 건데 우리의 종실과 혼인을 맺어 영원히 구생(舅甥)의 의를 즐기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대왕께서 대답하시기를 “ 우리 백부(伯父) 억렴(億廉)께서는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로 계셨는데 그 따님이 부덕(婦德)이 있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그로서 내정을 갖추심이 좋을까 생각하옵니다.”라고 하시어 고려태조는 그를 아내로 맞으시니 이가 곧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요, 신성왕후의 소생이 바로 현종(顯宗)임금의 아버지(安宗)으로 추존되신 분이시다.
고려 경종임금은 대왕의 공주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시니 이가 곧 형성왕후이시다. 고려경종은 서기 975년 10월 대왕을 상부(尙父)로 모시었다.
상부(尙父)로 책봉하는 경종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 칙(勅)하노니 주(周)나라가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먼저 여망(呂望= 강태공의 이름은 여상)을 봉하고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에는 먼저 소하를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온 천하(天下)가 크게 평정이 되고 기업(基業)이 널리 열려 용도(龍圖= 왕의 계보) 는 20대를 세우고 인지(麟趾=자손)는 사백년을 밟아 일월이 거듭 밝고 천하가 길이 태평하여 비록 무위의 주로부터 시작하여 이치에 통달한 신하에 이르기까지 그 빛에 모두가 순화되었다. 이제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국왕 정승 식읍 팔천호 김부(觀光順化 衛國公臣 上柱國 樂浪國王 政丞 食邑 八千戶 金傅)는 대대로 계림에 살게 하고 벼슬은 왕작(王爵)을 나누어 주거니와 그 영렬(英烈)한 기상은 구름을 누를만하고 문장의 재예(才藝)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를 만하다. 부(富)는 춘추에 넉넉하고 봉토에 귀히 거(居)하시며, 가슴속에 육도삼략(六韜三略=병서)이 들어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 병술)의 요점은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시다. 우리 태조께서 처음 목린(睦隣)의 우호를 닦으시며, 일찍 여풍을 알아 바로 부마의 인의를 베푸시어 안으로 대절(大節)을 갚아 주었다. 이로서 집과 나라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에서 모이고 아름다운 이름이 뚜렷이 퍼지고 의범(懿範=아름다운 규모)은 높이 빛났다. 그러므로 상부 도성령(尙父 道成嶺)의 호를 더하여 주고 아울러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 崇德守節功臣)의 호를 준다, 훈봉은 예와 같으나 앞서의 팔천호를 통산하여 일만호를 식읍으로 삼게 한다.” 라고 하였다.
서기 978년 4월에 대왕께서는 애달고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향수는 82세이시고 시호를 응천무운지경(應天撫運之敬)이요, 응시솔덕지순(應時率德之順)이라 하여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 화장산(京畿道 長湍郡 南八里 花藏山= 행정구역 변경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다.
비(妃)와 자식(子息)은 죽방왕후 박씨(竹房王后 朴氏)에 3남. 鎰, 湟, 鳴鐘
효목왕후 왕씨(孝穆王後 王氏, 후에 낙랑공주, 신난공주로 개호)에 5남2녀
殷說, 重錫, 鐥, 錘, 德摯,
별비 순흥안씨(純興安氏) 1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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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신라 56대왕, 마지막 왕):? ~978년, 재위: 927년~ 935년
경순왕(敬順王, ? ~ 978년 4월 4일, (재위: 927년 ~ 935년)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며, 고려 초의 문신이다. 성은 김(金)씨요, 이름은 부(傅)이다. 문성왕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 태후이다. 경명왕, 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본래는 신라의 왕족이었으나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당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8년 만에 고려에 자발적으로 투항을 결정하였고, 태조 왕건에게는 자신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 등 태조 왕건의 딸 2명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한편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의 왕 중에 유일하게 경주를 떠나 경기도에 묻힌 신라왕이기도 하다.
생애
경순왕은 신라 문성왕의 후손으로 본명은 부이다. 아버지는 이찬을 지낸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신덕왕의 딸이자 신라 경명왕, 신라 경애왕의 누이 또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 박씨이다. 그러나 생몰년이 미상이라 계아태후 박씨가 경명왕, 경애왕의 누나인가 누이동생인가는 불확실하다. 계아태후에 대한 기록도 불분명해 헌강왕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문성왕-안(安)-민공(敏恭)-인경(仁慶)-효종(孝宗)으로 가계가 이어졌고, 후일 그가 자신의 백부의 딸이라며 왕건에게 소개한 신성왕후의 친정아버지 억렴은 종숙으로, 문성왕-안(安)-민공(敏恭)-실홍(實虹)-억렴(億廉)-신정왕후로 이어졌다. 본래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입장이었으나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당하면서 외사촌들(경명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를 무렵 이미 그는 죽방부인 박씨(朴氏)와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등의 부인에게서 여러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죽방왕후에게서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 또는 金溢)과 아들 김익(金謚), 김굉(金鍠, 신라멸망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된 범공(梵空)), 대안군 김명종 등의 아들과 딸 덕주공주(德周公主) 등을 두었다. 또한 소실인 별빈 순흥안씨(別嬪 順興安氏)에게서 학성부원군 덕지(鶴城府院君 德摯)가 있었다.
신라 왕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피살되고, 경순왕이 제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 배경은 미상인데,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경명왕의 자녀들이 미성년자였는지 그가 화백 회의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효종랑을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할아버지 실홍(또는 관홍)을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각각 추봉하였다.
재위 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 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수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그는 태조 왕건에게 자신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소개했는데, 그는 고려 태조의 신성왕후가 된다.
고려에 귀순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이에 마의태자, 김일, 범공, 이순유 등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고려에 귀순을 결심했을 때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두 딸인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와 부인 왕씨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냈다. 낙랑공주는 신명순성왕태후 소생이고, 부인 왕씨는 평주 호족 박수경의 딸 성무부인 소생인데, 성무부인의 딸은 딸밖에 낳지 못하여 작위를 받지 못했다. 낙랑공주는 그에게서 대안군 김은열과 신란궁부인 김씨, 그리고 황경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대안군 김은열의 딸은 이허겸에게 시집갔는데, 외손녀사위가 김은부이고 외증손자는 이자연으로 현종과 문종 때의 외척이 된다.
최후
이후 정승공(政承公)에 봉작된 뒤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고 지금의 개성과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태조 사후 혜종, 정종, 광종을 거치는 동안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숙청을 모면하고 경종 대에 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딸인 헌숙왕후는 경종의 정비가 되었는데, 경종은 특별히 장인을 배려하여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978년 4월 4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에 안장되었다.
사후
고려에서 경순왕의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고려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 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 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년) 다시 되찾아 정비하게 되었다.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崇惠殿),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敬天廟) 등에 제향 되었다.
현재의 경순 왕릉 비는 영조 23년(1747)에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 10월 14일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 김응호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한다. 여기서 수치란 고쳐 새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1748년 1월29일에는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해서 경순 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한다. 이렇게 해서 경순 왕릉은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었다.
1748년(영조 24) 경순 왕릉 인근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인 김빈(金礗)과 김굉 등이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74년 이 비는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73년 이후 이루어진 경순 왕릉 정화에 따라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
가계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아버지 : 김효종(金孝宗), 문성왕의 4대손(고손자)
•어머니 : 계아태후(桂娥太后)
경순왕의 왕후
•죽방부인 박씨
죽방부인(竹方王后) 박씨(朴氏)는 예부시랑 박광우의 딸이라고도 전하는데, 정사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박광우는 죽산 박씨로 되어 있는데, 죽산은 경기도 안성으로 신라 수도 경주와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다. 죽방부인을 신라 진골 출신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으나, 죽방부인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소원왕후라는 명칭은 죽방부인이 사망한 이후에 고려에서 내려준 시호이다.
•자녀
◦마의태자 김일(金鎰 또는 金溢), 첫번째 부인의 장자
◦김익(金謚)
◦범공대사 김굉(金皇, 914 ~ ?),
◦덕주공주
◦영분공 김명종(金嗚鍾), 경주김씨 영분공파
•송희부인 석씨(昔氏) - 박씨라는 설도 있다.
•자녀 ◦김전(金佺)
◦김요(金瑤) : 골산 김씨
◦김곤(金琨)
◦김영(金英)
◦김분(金奮)
•낙랑공주 왕씨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의 장녀이다. 신명순성왕후는 고려 제3대 정종, 고려 제4대 광종의 어머니이다. 낙랑공주는 혼인 전에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로 불리었으며, 혼인한 뒤에 낙랑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도 불리었다. 《삼국사기》, 고려사에 따르면 935년 11월에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자녀
◦대안군 김은열 : 김녕군, 경주김씨 대안군파
◦삼척군 김추 : 삼척 김씨 시조, 고려 초 문하시중 역임
◦언양군 김선 : 언양 김씨 시조
◦1녀 헌숙왕후(고려 경종의 처)
◦2녀(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하가, 이주좌의 증조모)
◦3녀(황경(黃瓊)에게 하가)
◦의성군 김석 : 의성 김씨 시조
◦강릉군 김건 : (후)강릉 김씨 시조
•부인 왕씨
왕건과 성무부인 박씨의 딸 왕(王)씨는 경순왕의 아내이다. 성무부인 박씨는 평주의 호족 박수경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왕건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넷과 딸을 하나 낳았는데, 딸 왕씨는 경순왕의 부인이 되었다. 경순왕과 결혼한 성무부인 박씨 딸 왕씨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시호는 전하지 않는다.
•기타 후궁들
◦별빈 순흥안씨(別嬪 順興安氏) - 민담설화, 신라삼성연원보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마지막 부인이다.
◦학성부원군 덕지 : 울산 김씨 시조
◦후궁 석씨(石氏)
◦후궁 무명씨 ◾1녀(육보(관성 육씨 시조)에게 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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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영정 (1794년, 이명기작)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 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본의 초본 등이다.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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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敬順王, ?~978)의 릉은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에 있으므로, 그는 만년에 경주를 떠난 것이 확실하다. 별빈 안씨와 관련한 일이 전해오는 곳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안산, 시흥 등지이므로 별 빈은 경순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만년에 경주를 떠났을 때 맞이한 부인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별 빈은 신라 때가 아닌 고려 초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별빈 소생이라는 경순왕의 막내아들 덕지(德摯)가 914년 태어났다는 기록도 보이나, 경순왕의 막내아들이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려 통일 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울산김씨 시조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2째 왕자인데 경주김씨. 羅州金氏 족보 등에는 경순대왕과 별빈(別嬪) 순흥안(順興安)씨 소생인 덕지(德摯)가 학성군(울산)에 책봉되어 울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되어있어 서로 간에 위조족보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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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 이야기
태자(太子)는 신라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소생의 첫째 왕자로, 사서(史書)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일부 문헌에 이르기를 일명(一名) 김일(金鎰)이라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 (경순왕 9년) 10월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손국(遜國)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종묘(宗廟)에 하직 인사를 하고 통한(痛恨)을 안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입고 있던 비단옷이 부끄러워 찢어버리고 대신 삼베옷을 입고, "고려가 주는 양식을 소·돼지처럼 먹고 사느니, 차라리 신라 사람으로 칡뿌리를 캐먹고 살겠다"며 끝까지 신라 사람으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그가 삼베옷을 입고 다녔다 하여 세칭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렀으며, 금부대왕(金富大王)ㆍ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도 불린다. 부안 김씨(扶安 金氏)에서 시조로 모시고 있다.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하늘의 명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명을 거슬리는 자는 망하게 마련이다. 지금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로운데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이 죽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 하겠다" 고 하면서 끝내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고려에 항복했다.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
나라의 존망이라는 것이 천명(天命)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삼국사기》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는 자리에 태자 및 계자와 이순유(李純由) 등이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동생 계자도 처자를 버리고 그를 따라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가,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고 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에 고려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여 경순왕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서라벌을 경주로 고쳐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일설(一說)에 그는 강원도 인제군 금부리(金富里)에서 두 아들 및 대의지사와 함께 세력을 이루어 신라 소국(新羅 小國)을 세워 신라 부흥을 꾀했다고 한다.
후세 평가
그는 태자의 신분으로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아버지 경순왕과 고려에 맞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태자(太子)의 행동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조선의 신흠(申欽)이나 윤증(尹拯) 같은 유학자들로부터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비롯해,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태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1778년 완성)》에서 “마의 태자가 없었더라면 천년의 군자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태자(太子)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나, 1784년(정조 8)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에서 비석이 발견되어 탁본 후 다시 묻었다는 경순왕의 제 4자 김은열(金殷說)의 묘지명에 김일(金鎰)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다.
고려 후기 문신·학자인 김자수(金自粹)의 《상촌집(桑村集)》과 신흠(申欽)이나 윤증(尹拯)같은 조선의 문인들이 마의태자의 행적에 대해 읊었던 한시 작품 등에 '초의(草衣)' 또는 '신라왕자'로만 다루어질 뿐,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이광수가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 「마의 태자」를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속에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부흥 운동설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이외에는 마의태자(麻衣太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 태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관련한 민간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 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다(다만, '김일'(金鎰)이라는 인명 자체는 1940년대 이후에야 새로 위패에 추가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자진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 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 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시로,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그 누이동생 덕주 공주(德主公主)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 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 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 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 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 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 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정종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8. 중시조
제 30세 은열(殷說)
고려태조의 맏 따님 낙랑공주께서 낳으신 첫째 아드님으로서 대안군(大安君)에 봉군 받으셨고 벼슬이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역임하신 후에 내사시랑평장사 이르셨고 무진(1028년) 3월 4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나라에서 장지를 하사하여 개성군 영남면 용흥리 화곡 오룡산 남쪽에 기슭 임좌(開城郡 嶺南面 龍興里 花谷 五龍山 壬坐)에 모셨다. 이조(李朝)의 정조(正祖) 8년( 1784년)에 공의 지석이 발견되어 공의 친족관계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배(配) 전의리(李)씨 공부시랑 의흥군 담의 따님이시다.
후예들은 경주(慶州), 안동(安東), 김녕(金寧), 평해(平海), 수원(水原), 한남(漢南), 수안(遂安), 청풍(淸風), 공주(公州), 용담(龍潭), 상락(上洛), 등을 비롯한 수많은 본의 김씨로 분파(分派)되었다.
제 31세 태화(泰華)
고려의 성종과 목종 때의 분으로 강릉군(江陵君)으로 봉군 받으셨다. 1784년 (正祖甲辰)에 발견된 대안군 묘지석(大安君 墓誌石)에서 대안군 형제분의 서열을 명시하여 적은 끝에 자 강릉군 태화(子 江陵君 泰華)라 쓰여 있고 다른 아드님의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대안군의 외 아드님으로서 강릉군으로 봉군 받으셨음이 분명함으로 이에 구보에 누락된 바를 시정하여 새로이 기입한다. 요는 실전하며, 배시도 실전하여, 슬하에는 자 정구(正矩) 이시다.
제 32세 정구(正矩)
1624년에 편집된 천계갑자보에 김해군 휘 염(金海君 諱 濂)의 백형인 계령(繼苓)의 난 2대 위에 휘 정구(諱 正矩)가 있으나 자상치가 않다는 기록이 있고 경주김씨보에는 예로부터 김해군 염(金海君 濂)의 윗대에 공의 휘자를 기제 하여 왔으나 우리의 구보에는 계속 누락되어 왔으므로 새로이 기입하여 바로잡는다. 고려 현종 덕종 정종 때의 분으로 추측되며 공의 시대가 거란대군이 침입하였던 때임에 비추어 구보에 적힌 수성군(隨城君)의 사적으로써 강민첨장군(姜民瞻將軍) 양규장군(楊規將軍)등과 더불어 거란군을 대파한 팔장군(八將軍)의 한분이라는 사적은 공의 사적이 오전된 듯도 하나 자세히 알 수가 없음이 유감이다. 군호 또는 작호는 실전하고, 묘지와 배씨도 실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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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전쟁
이쯤에서 우린 고려 현종의 시점에서 이 전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종의 이름은 순. 그는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의 아들로 아버지인 왕욱이 죽고 나서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개경은 이미 천추태후의 세상. 순은 대량원군으로 책봉되었으나 천추태후의 아들인 송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천추태후에 의해 사찰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약 10년 동안 권력욕을 마음속에 품고 찬탈의 기회를 노리던 순. 그러나 긴 시간 절치부심해서 노린 기회는 황당하게 강조의 정변으로 막을 내렸다. 분명히 천추태후와 자신의 정쟁이었는데, 군권을 쥐고 있던 강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임금이 되고 만 것이다. 순은 임금의 자리에 올라 훗날 '현종'이라 불리게 된다.
강조에게 권력을 모조리 빼앗겼지만, 아직 현종에게 가능성이 있었다. 쫓겨난 천추태후 세력도 존재했고, 이름뿐이더라도 자신은 임금이었다. 아무리 강조라고 해도 이미 목종을 죽인 상황에서 현종까지 죽일 순 없는 법이다. 기다림엔 이골이 났지만, 조금 더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조용히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 갑자기 거란이 쳐들어온단다. 정변을 일으켰다가 강조에게 뒤통수를 맞은 지 1년 만의 일이다.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그는 죽을 수도 있다. 반대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군사를 이끌고 거란을 격파한 공로가 인정되어 강조의 힘이 더 강해진다. 이기든 패하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과가 나온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체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격렬했다.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주에서 고려의 주력군이 박살났단다. 급히 동북면의 군사를 서경에 투입해서 방어케 했는데, 동북면의 장군 지채문이 사선을 넘어 달려와 서경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사실, 서경은 함락되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번엔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가 곽주성을 탈환해서 거란의 보급선을 끊었다고 한다. 덕택에 피난을 가야 하느냐, 항복을 해야 하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강감찬의 의견을 따라 피난 가기로 결정했지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아슬아슬하게 거란군의 선봉을 피해서 떠난 피난길은 도무지 임금의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 신료들은 대부분 도망쳤고, 군사들도 죄다 도망쳤다. 지채문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필사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해주지 않았다면, 나주까지 도망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현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탁류에 휘말려 한반도 남쪽 끝에 도착했다. 그가 나주에 도착하고 나자 밀정이 전황을 알렸는데, 드디어 거란군이 퇴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경에 올라가는 것도 두렵다. 강조를 중심으로 전쟁을 치르던 군부는 대부분 사망했고, 그나마 천추태후 세력의 인재 가운데 현종의 편이 되어 줄것 같던 양규 역시영웅적인 활약 끝에 사망했다. 쉽게 말해 권력의 공백기를 겪고 있던 셈이다. 천추태후 세력은 쫓겨났고, 자신의 세력은 대부분 도망쳤으며, 강조의 세력은 와해하였다. 심지어 임금의 권위를 말해주던 '황도皇都'개경마저 불타 없어졌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믿을 사람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거의 담기지 않은 힘겨운 여정이 끝나고 개경에 도착했을 때 현종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개경은 잿더미가 된 채로 위대한 군주를 맞이했다.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이전 임금들이 쌓아 놓은 기반을 모조리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그는 거란과의 외교 조절부터 시작했는데, 비록 자신이 직접 친조 하겠다는 항복 맹세는 지킬 수 없지만, 꾸준히 거란에 사대하겠노라고 사신을 보냈다. 물론, 거란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거란 성종이 직접 최 정예병 40만 명을 이끌고 친정한 상황에서 그 결과가 그저 이전과 같이 사대하겠노라는 친서에 불과하다면 국격에 흠집이 생기고, 임금에 도전하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거란은 명분을 위해서라도 두 가지 중 하나는 꼭 챙겨야 했다. 고려 현종의 친조(현종보고 직접 와서 항복하란 의미라 여기면 적당하겠다.) 혹은 강동 6주의 확보가 그 두 가지다.
거란에서 계속 사신을 보내 압박하자 현종은 여유롭게 무시했다. 죽으면 죽었지 거란에 친조하거나 땅을 내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무모하다고만 할 순 없다. 지난 전쟁 당시 거란은 강동 6주 대부분을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할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강동 6주는 고려의 목숨 줄임과 동시에 거란의 목덜미를 잡는 도구이기도 했던 셈이다. 거란이 강동 6주를 내 놓으라 압박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현종이 절대 돌려주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외교 관계가 미묘하게 흘러가자 급해진 거란이 군사적 수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넘어 고려 땅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흥화진의 대장군 김승위가 이를 막아섰다. 거란 역시 본격적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으로 이 상황에도 양국의 외교 교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종에게 필요했던 건 '시간'일 뿐이었고, 거란은 고려가 힘을 회복할까봐 마음이 급했던 것에 불과하다. 급기야 거란은 도통까지 임명해 군사를 모아 고려 땅으로 침공해왔는데, 이 전투에서 흥화진의 반격을 받아 700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압록강 인근에서 익사했다. 이후 거란은 강동 6주를 타격하기 시작한다.
거란은 주로 흥화진, 통주, 곽주를 중심으로 기동 타격을 가했다. 비록 고려군이 잘 막아냈지만, 고려 내지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피해가 심각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곽주에선 고려군 수만 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거란의 공격이 시작되자 현종은 아주 간단하게 당연한 일을 했다. 거란 사신을 억류해버린 것. 그저 거란의 요구를 거절한 게 아니라 아예 사신을 억류한다는 건 대단히 강경책인데, 당연한 일임과 동시에 어려운 일이다. 거란 성종이 분노해 대군을 이끌고 재침공한다면, 고려엔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종은 위태롭지만 승부를 걸 법한 패를 계속해서 던졌고, 거란은 현종의 태도에 의구심을 가지며 휘둘리기 시작한다. 수백만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게임이었지만, 막다른 골목에 서 있던 현종의 담대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외교를 이어가며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는 전비가 급했다. 무신의 급여를 제대로 주지 못해서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재정 상태가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현종은 궁궐을 다시 짓고, 이전엔 없었던 '개경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며, 북방에 최소 10만의 병력을 배치해 거란군과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공백 상태였던 권력은 자신의 세력을 추스르고, 천추태후와 정치적 화해에 성공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며, 강조의 잔존 세력도 어느 정도 끌어안으면서 채웠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시했던 건 그런 '구세대' 세력이 아니라 지난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숨겨진 보석'들의 발굴이다. 강감찬, 지채문을 필두로 강민첨, 정신용, 김훤 등의 전쟁 공로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하려면 전비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여긴 현종은 지방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기존의 행정망을 배경으로 군현제를 거의 완성했으며, 완성하기 전까진 안무사를 순행케 함으로써 행정 공백이 없도록 노력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은 국제 정세에서 아주 정확한 말이다. 당시 고려가 처한 상황도 그랬는데, 고려와 거란이 전쟁으로 쇠약해지자 여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현종은 여진과의 교섭과 전투를 아직 검증되지 않은 지휘관인 강감찬과 강민첨에게 모조리 맡기는 강수를 두었다. 이렇게 인재 선발과 전쟁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고려는 2군 6위라는 중앙군 편제를 완성하게 된다. 현종은 평범한 군주였으면 평생을 다 쏟아 부어도 못할 업적을 거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수년 만에 다 해내고 있었다.
현종의 놀라운 정치력이 발휘되는 동안 거란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거란군의 증원되는 병력의 규모도 수만 명에 이르렀고, 1016년 1월 5일엔 거란의 대군이 곽주까지 내려와 고려군 수만 명을 죽이고 돌아갔다. 대체 왜 고려군 수만 명이 곽주에 모여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전투에서 고려는 주력군의 상당수를 잃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거란은 쾌재를 불렀으리라. 그러나 이 전투에 대한 고려의 반응이 거란의 뒤통수를 갈겼다. 분노한 현종이 거란 사신을 고려 땅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수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으니 벌벌 떨며 항복할 줄 알았던 거란은 고려의 반응에 당황했다. 덕분에 1년 동안 거란은 고려를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그 사이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버리고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초강수를 뒀다. 현종이 거란에 무릎을 굽힐 생각을 조금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던 거란은 결국, 기동 타격전을 포기하고 점령전을 시작하려 했는지 중국 출신의 병사를 모아 흥화진을 포위 공격했다. 중국 출신의 병사를 모았다는 것은 아마 단순히 함락하는 게 아니라 성을 차지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거란은 흥화진을 함락하긴 커녕 고려의 반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제 고려와 거란은 다시 한 번 큰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거란은 국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 반드시 후방의 고려를 잡아야 했고, 고려 역시 앞으로 영토 확장을 위해서 거란을 꺾어둘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고려인들 사이에서 지난 전쟁들로 팽배해졌을 거란에 대한 적개심은 단순히 국지전으로 치고받는다고 해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10년에 걸친 전쟁 덕분에 고려군은 정예군이 되어 있었고, 다소 익숙하지 않던 강동 6주의 전장도 이제 익숙해졌다. 강동 6주의 군사들은 양규의 헌신과 전우들의 죽음을 똑똑하게 기억할 터. 그 들에게 거란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완성이지만, 어느 정도 방어책이 될 수도 있는 개경성도 있었다. 이전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절대적 강자를 상대로 이런 상황을 이끌어낸 현종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고려의 북부가 초토화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수도가 함락된 절망적 상황에서 그는 개경을 복구하고, 개경성을 쌓았으며 군사 -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그렇게 수백 년 고려 역사상 가장위대한 군주로 자리 잡았다.
제 33세 염(廉)
고려 문종 때 분으로 벼슬은 붕어이시며, 천계갑자보에 의하면 김해백(金海伯)의 봉작을 받으셨다 하며, 공을 관조(貫祖)로 하는 김해김씨의 일파가 있다.
묘는 실전하며, 배씨는 파평윤씨 공부시랑 순철의 따님이시며, 자녀는 稟言, 景言이시다.
제 34세 품언(禀言)
고려 문종과 숙종 때의 분으로서 벼슬은 소보(少保)와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 平章事)에 이르시고 숙종 9년에 여진정벌 때 공을 세워 수성백(隨城伯)의 봉작을 받으셨다. 수성(隨城)은 지금의 수원(水原)이다. 수원김씨는 공을 관조로 모시고 있다. 구보에 의하면 공께서 거란군을 격퇴한 팔장군의 한분으로서 봉군 받으셨다고 기록되었으나 연대로 보아서 숙종 9년 여진정벌 때 공이 있으시어 수성군(隨城君)의 봉군을 받으신 일이 오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배씨는 아산장씨와 개성왕씨가 있다.
제 35세 향(珦)
자는 부민이시며, 청렴과 근신으로 매사를 잘 처리하시어 예종 때부터 내시(당시는 귀족출신의 문신을 말함)로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셨다. 합문지후를 거쳐 경원군사로서 청렴과 근면으로 많은 치적을 남기시고 감찰어사가 되셨고 인종 4년(1126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그해 5월에 왕의 밀지를 받으시고 척준경(拓俊京) 최사전(崔思全)과 더불어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시었다. 이자겸의 둘째아들 이지보(李之甫)가 공의 사위였으나 인척의 구애됨이 없이 충을 다하시었고 그 공이 가장 크시면서도 이를 말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어지시다고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으시었고 위사공신이 되시었다.
이때 봉군이나 봉작을 받으셨음이 틀림이 없으나 군호나 작호가 전하지 않는다. 이해 6원 검교사도 호부상서 지문하성사(檢校使徒 戶部尙書 知門下省事) 12월에 병부상서가 되셨고, 5년(1127년) 6월에 검교태위 수사공(檢校太尉 守司空) 12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 6년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셨고 9년(1131년)에는 검교태위 수사공 문하시랑 동중서시랑 평장사로서 치사 하셨다. 공께서 사직원을 내시어도 왕은 충적이 특출하시어 임금이 어려울 때 몸을 던져 간신(姦臣)을 제거하고 근심걱정을 같이 하였으니 영화(榮華)를 같이 누릴 것인데 왕이 공을 대우하고 싶은 뜻을 몰라주느냐 며, 수리하지 않고 사표를 다섯 번이나 반려한 후에 공의 뜻을 움직일 수가 없음을 아르시고 비로소 수리를 하였다. 공께서 위사공신으로서 봉작을 받으셨음이 틀림이 없는바 고려사 열인전에 공을 안동부 인(安東府 人)으로 기록한 것과 만성대동보에 공을 김녕파의 파조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안동(安東)또는 금주(金州)에 봉작을 받으셨으리라 추지된다. 인종 13년(1135년) 2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뚫더니 얼마 안되어 경인일에 돌아가시니 철조(國民葬) 하셨다.
배씨는 실전하며, 謚號는 元靖이시다.
제 36세 순보(順輔)
고려 인종, 의종때 분으로 벼슬은 중서령에 이르렀고 문정도덕이 일세에 뛰어나셨으나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그 내용이 전하지 않는 것이 유감스럽다. 구보의 문열공사적(文烈公事蹟)으로써 묘청의 난에 공이 있어 봉군 되셨다는 사적은 년대로 보아 공의 사적이 오전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배씨는 인천 이씨이며, 자녀는 世翊, 世羽를 두셨다.
제 37세 세익(世翊)
고려 의종 때부터 신종 때의 분이시며 벼슬은 중추원 좌승선에 이르셨다. 의종 24년과 명종 3년의 무인의 난(武人之亂)에도 화를 피할 수가 있었으나 세상을 비탄하시고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시었다. 묘는 실전하며, 배씨는 경주이씨 상서영관의 따님이시며, 자녀는 鳳麒 鳳麟을 두시었다.
제 38세 봉기(鳳騏)
고려 강종, 고종 때의 분이시며 벼슬은 동정(同正)이시었다. 무인의 난과 무인정치로 세상을 어지럽고 또한 난리가 계속되던 때라 벼슬을 일찍이 버리시고 오로지 학문과 몸을 닦으셨다.
난세라 묘지와 배위는 모두 전하질 않는다. 자녀로는 叔興, 叙興, 余興, 時興을 두셨다.
제 39세 시흥(時興) : 김녕김씨 관조(金寧金氏 貫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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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조(貫祖)
1. 김시흥(金時興) 대동보 내용
휘는 훤(咺)이시며, 호는 둔촌(鈍村), 신라경순왕의 예손 고려 고종 초 의성태생이며, 곧은 선비로서 벼슬에 뜻이 없으시더니 주위의 권유로 문과에 급제하신 후 한림을 거쳐 외관으로 치적을 쌓으시고 예부시랑중겸 김녕대도호사 총랑 전라도부부사(全羅道部夫使), 양주부사(楊州府使),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 하정사(賀正使), 밀직학사(密直學士), 춘궁시독관(春宮侍讀官)등을 역임한 후 병마사로 출장,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입상 여러 차례 재상직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 먼저 주국상락군개국남식읍일천호(柱國上洛郡開國男食邑一千戶)가 되었다가 김녕군을 봉군 받으셨음. 수는 72세에 증벽상삼한중대광정승(贈壁上三韓重大匡政丞)이며, 시(謚)는 문열공(文烈公) 원종 12년 밀성(密城)의 난에는 요승을 먼저 쳐서 난을 평정하셨고, 그후 삼별초의 난에는 침입을 막아 경상일도를 평안케 하시니 왕이 그 기념으로 금주(金州)를 김녕대도호부(金寧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임연(林衍)이 원종을 유폐하였을 때 원제(元帝)가 고려의 왕제(王制)를 없애려는 것을 설득하여 중지시켜 국가와 민족의 존폐를 위기에서 구한 민족의 은인이신 명학사이시며, 예서체의 명필가 이셨다. 익산 오강서원(益山 五崗書院), 고창 왕산사(高唱 王山祠), 아산도산사(牙山道山祠), 서유림 봉사공(公)의 김녕군 봉군에 연하여 그 후, 관향(貫鄕)을 김녕(金寧)으로 고쳤다.
묘는 송악산에 있다고 하나 실전하며, 배씨는 옹주개성왕씨이며, 어사 이방순의 따님이라고도 한다. 자녀는 상(瑺)과 순(珣)을 두셨다.
김녕의 연혁(金寧 沿革)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김녕(金寧=지금의 金海)은 신라유리왕 18년(서기 41년)에 수로왕이 구촌장의 추대로 가락국을 세운 뒤 가야(伽倻), 금관국(金官國) 등으로 국호가 바뀌었다가 신라 법흥왕 19년(서기 532년)에 구해왕이 신라에 부강(附降)하여 빈객으로 예우 받은 사실과 금관국을 식읍으로 정하고 읍호를 금관군으로 변경하였다. 그 뒤 문무왕 20년(680년) 금관소경으로 고치었고, 경덕왕 때에 김해소경으로 하였다.
고려태조 23년(서기 940년)에는 김해부로 고치었으며 인해현으로 낮추었다가 다음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 성종 11년(995년)에는 금주 안동도호부로 하였다가 현종3년(1012년)에 금주군으로 고치었다.
그 뒤 원종11년(1270년)에는 문렬공께서 방어사로서 밀성의 난과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공훈이 있어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 뒤 충렬공 19년(1293년), <동국여지승람에는 충렬공 2년(1276년)으로 기록되어있음.> 에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가 충렬왕 34년(`1308년) 금주목으로 하였다.
충선왕 2년(1310년) 에 다시 김해도호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가락(駕洛) 서기 41년
가야(伽倻) 서기 41년
금관(金官) 서기 532년
임해(臨海) 서기 940년
금주(金州) 서기 995년
김녕(金寧) 서기 1270년
금주(金州) 서기 1293년
김해(金海) 서기 13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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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이관사실(本貫移貫事實)
전기한 김녕연혁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 김녕김씨의 관조이신 김녕군 휘 시자흥자(時字興字)께서 봉군 받으신 김녕의 지명은 여러 차례의 변경이 있었던 것이다. 관조에 대하여 만성보 경주 김씨편에는 원정공을 김녕김씨 관조라하였으나 원정공은 인종때 분으로 김녕 고을이 생기기 전이고 또 봉군제도를 부할 하기 이전분이므로 김녕군을 봉군 받았을 리가 없고 또 김해백 휘 렴(金海伯 諱 濂)을 관조로 한 보가 있으나 그 후손인 원정공이 고려사에 안동도호부로 되었고 당시는 김녕 고을이 생기기 전이었던 점과 김녕군께서 관조라고 예로부터 전한 점등에 비추어 따를 수 가 없다.
관조께서 봉군 받으신 김녕이란 지명은 원종 11년(1270년)에서 충렬왕 34년(1308년)사이에만 써왔고 그 뒤에 다시 금주와 분성으로 고쳤다가 충선왕 2년(1310년)부터 김해로만 써왔기 때문에 우리의 본관을 김해 혹은 분성으로 써왔던 것이다.
한편 시조가 전연다른 가락국 수로왕후예 들도 같은 김해로 본관을 써왔기 때문에 선금이라 일렀고 김녕군의 후예들과 경순왕후손인 김녕군의 후예인 우리 종문은 후금이라 일러 구별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선금이라 이렀던 수로왕 후예들과 경순왕후손인 김녕군의 후예들사이에는 같은 본관을 쓴 관계로 여러 가지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 김녕군 종문에 서는 현종 기유년(1849년)과 고종갑신년(1884년) 두 차례나 정부에 청원을 하여 당시의 예조의 비준을 받아 본관을 김녕으로 쓰게 된 것이다.
예조비준서1(禮曹批准書)
충청도연기고을 유학 김주성, 근학, 성현, 치수, 홍환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대종백 각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생등은 관향을 김해로 한 것은 경순왕 8세손이신 김녕군 휘 시흥께서 김해땅에 봉군 받으셨기 때문에 호를 김녕으로 하였으니 김녕은 깅해 이니다. 김녕군의 9세손이신 충의공 휘 문기 호 백촌(忠毅公 諱 文起 號 白村)벼슬은 이조판서께서는 단종때 육신과 함께 순절하셨으므로 자손들이 침체 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무술년(1838)에 우리 증조부이신 휘 홍련공께서 상소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심에 정조대왕께서는 은전(恩典)을 내리시어 충의의 시호와 찬성의 증직을 주시고 판부의 교지를 내리었습니다.
김충의 문기공의 탁월하신 대절(大節)은 육신과 함께 죽음을 아름답게 하셨으니 일후부타 자손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천지서(賤支庶)에게 천역을 시키지 말라는 왕명이 내린뒤 김해의 김은 선김, 후김의 구별이 없이 경순왕후손이라 일컬어 왔으니 김녕군을 시조로 삼았던 것이 혼잡하여 떳떳함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선김은 가락후손이요, 후김은 김녕군 후손이라 한번 판부의 교지가 내린뒤부터 천역을 모피하는 사람을 위록(僞錄)하여 사사로히 김녕군의 후손에 의탁하여 백촌으로 파손을 삼았습니다. ............ 중략.
우리들은 불초 잔약한 자손으로서 이제야 족보를 닦으니 훗날 혼잡의 염려가 없지 않아 이재 감히 대략의 전말은 진술하고 우러러 각하께 하소연 하오니 엎더려 빌건데 세세히 통찰하시어 김녕군의 자손으로 하여금 김녕으로 관향을 갖게하여 파보를 바로잡고 선김이 사탁(私託)하여 기록하는 폐단을 구별하여주시기 천만 간곡히 대종백각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기유(1849년) 11월
경상도 유학 김치수, 김주성, 김낙희, 김원성, 김호섭, 김치범, 김서범,
답신.
종중에서 상의하여 선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라.
예조비준서2 (禮曹批准書)
예조에 단자를 올려 영남과 호남유생 김기대 영규 한봉 등은 삼가 대종백 각하께 백배상서하나이다. 엎드려 바라 건데, 김씨의 관을 김해로 한 성씨가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가락왕 휘 수로의 후손이며, 또 하나는 싱ㄴ라시조왕 휘 알지의 35세손(38세 손인을 착오)이신 휘 시흥께서 고려 때 나라에 공을 세우시어 김녕군을 봉군 받으신 후 그 자손은 여태까지 본관을 김해로 김해로써 왔기에 세상에서는 선후김으로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오면서 여러 대를 거친 두 김씨의 후손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다가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나 태반은 미약하였던 것입니다.
선김의 호손은 선김의 본관을 알지 못하고 후김의 후손은 후김의 본관의 유래를 알지를 못하였거늘 하물며 타성이 분별 못함이야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들은 그 근본을 연구함에 있어 애타왔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김녕은 즉 김해의 고호이니 김녕군의 후손은 보첩을 수정할 때 반드시 중조께서 봉군 받으신 것으로 관향을 삼았다면 지나친 실책이 없었을 것인데 일의 체계가 중한데도 사사로이 자기 나름대로 한데다가 지극히 소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평소 비록 미약했다 하더라도 중시를 무릅쓰고 먼 천리 길을 선조의 사실 목록에다 단자를 첨부하여 진정하오니 엎드려 바라 건데, 선후김이 이조일관한 사실을 깊이 살피시어 현란의 폐단이 없게 하여주시며 특히 관향을 고호인 김녕으로 해주실 것을 대종백각하께서 선처하심을 바라옵니다.
갑신(1884년) 12월 17일
선후김이 두 김해로 혼잡 되었으나 그러나 김녕군의 후손은 김녕으로 수보하는 것이 도리상 마땅한 일이다.
예조 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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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김녕군(金寧君)에 대하여
시조대보공 알지대왕(始祖大輔公 閼智大王)의 38세손이시며, 중시조 경순대왕(敬順大王)의 11세손이다, 경순왕의 제 4자 대안군(大安君) 휘 은열(殷說)의 6세손 원정공 휘 향(珦)의 4세손 동정(同正) 휘 봉기(鳳麒)의 4자 이시니, 명은 時자 興자 휘는 훤(晅) 호는 송악(松嶽)또는 둔촌(鈍村)이시며, 자는 시자 흥자(時字 興字)이시다. 고려의 고종과 원종 때의 분이시며, 과거에 급제하신 후 여러 국난(國難)에 출장입상(出將入相)하셨고, 벼슬이 광록대부평장사(光祿大夫平章事)에 이르셨으며, 삼한중대광정승(三韓重大匡政丞)을 추정 받으시고 김녕군(金寧君)을 받으셨으니, 시호(諡號)는 문열공(文烈公)이시다.
천계갑자보(天啓甲子譜)에는 상락군(上洛君)을 봉군 받으신 후 김녕군(金寧君)을 추봉 받으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공이 생존한 시대는 거란(契丹), 동진(東眞), 몽고(蒙古)등의 침입을 비롯하여 금주(金州)지방의 왜구(倭寇)침입, 밀성(密城)의 난, 진도(珍島)의 난, 삼별초(三別抄)의 난, 등 많은 국난이 있었으므로, 공께서 먼저 세우신 공으로 상락군을 받으셨다가 또다시 큰 공을 세우시고 김녕군을 이봉(移封) 받으신 것으로 추지되신다.
익산오강서원(益山五岡書院), 아산도산사(牙山道山祠), 고흥봉암사(高興鳳巖祠), 고창왕산사(高敞旺山祠)에 모셔있었다.
묘지는 개성송악산에 있다고 하나. 현재는 실전이다.
배씨는 부부인(府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라고도 하시고 어사(御使) 이방순(李方咰)의 따님이라고도 하며, 묘지는 실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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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 김훤(김시흥 관조를 말함)
김훤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며 자는 용회이다 1296년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우자 원나라는 원나라에 있던 세자 심을 동안공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연 일당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 때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세자가 공으로 책봉되면 임연 일당에게 이 사실이 도리어 이용당하게 되며 따라서 국내정세가 불리할 것이라고 주장해서 이 계획을 중지하게 하였다 1270년인 원종 11년에 금주방어사가 되었을 때 밀성 사람 방보가 공국병마사를 자칭하며 난을 일으켜 근처의 군현을 선동하여 세력을 떨쳤다 또 부사 이이를 죽이고 진도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삼별초와 결탁하려 하였다. 이때 경주판관 엄수안과 함께 군사를 내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안렴사 이숙진을 회유하여 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밀성의 도둑 무리는 괴수 방보의 목을 베어 항복함으로서 난은 평정되었다 또한 삼별초의 잔적들이 군사를 나누어 경상도로 쳐들어 올 때 금주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예부낭중이 되고 곧이어 도호부사가 되었다 1275년에는 총랑이 되었다가 전라도부부사가 되어 부임하던 중 청호역에서 전라도 안찰사 노경륜이 역을 통해 서울에 보내는 내선의 대부분이 사선인 것을 보고 몰수하여 국고로 돌렸다 [출처] 고려의 문신 김훤|작성자 낙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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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 이야기(위키리 사전)
본관 김녕은 김해 지역이지만 가야 계통이 아닌 신라 계통 본관이며, 시조는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 김시흥(金時興)이다. 김은열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다. 장황하게 설명하자면, 김알지의 34대손이자 경순왕의 7대손이다. 김시흥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여 공을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에 의해 김녕군(金寧君)으로 봉해진 바 있다. 이에 여기에서 본관이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녕은 현재의 김해시 지역으로 이 때문에 김녕의 지명이 김해로 바뀌자 졸지에 김해 김씨가 되어버린 김녕 김씨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김해 김씨가 선김(先金), 김녕 김씨가 후김(後金)으로 불리는 걸로 적당히 합의하다가 김녕 김씨 쪽에서 본관을 그냥 옛 이름인 김녕으로 되돌리기로 조선 헌종~고종 때에서야 결정되었다. 그 전에는 중간에 사성 김해 김씨까지 생기면서 헷갈리는게 상당히 심해서 어쩔 수 없었던 모양. 한편 일부 계통은 김녕 김씨로 갈아타지 않고, 그냥 김해 김씨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같은 후김 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분관된, 시조를 김인찬으로 하는 익화파(익화 김씨, 양근 김씨), 종남파, 법흥파(법흥 김씨), 종민파와는 과거 통혼을 하지 않았으며, 동성동본 통혼 이후에도 가풍이 엄한 집안에서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결성 김씨, 분성 김씨도 같은 계통이라 통혼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사육신 사건 때, 김문기가 반역으로 죽으면서 집안까지 거의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렇게 단종 복위 운동 때 반역으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신원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저기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김문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심했으면 상기한 바와 같이 헌종~고종 때 본관을 김녕 김씨로 되돌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이며, 심지어 김문기의 후손도 김녕 김씨 충의공파(忠毅公派), 경주 김씨 백촌공파(白村公派), 김해 김씨 백촌공파(白村公派)로 갈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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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김부식, 묘청의 난을 진압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 호는 뇌천, 시호는 문렬이고.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 김효충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한다.
김부식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 사록과 참군녹사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 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한다 1121년에는 임금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는데 지금의 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 농단하고 비슷하다고 볼 수가 있었다.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반대한 일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인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김부식은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을 한다.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 · 정극영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게 되었다.
어사대인·호부상서·한림원 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에 승진하였고, 수사공으로 승진한다
1126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를 하게 되는데.
김부식은 추밀원사로 승진하여 재추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게 되었다.
묘청 등의 서경 천도 운동은 1129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종도 자주 행차를 하였다.
이때 서경의 서기를 조작한 일이 탄로 나고, 행차 때의 악천 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자.
김부식 일파는 1134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에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조광·유당은 1135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일단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 백수한을 처형하고 서경으로 출전을 하였다.
김부식은 중 군장으로서 좌 군장으로 김부의, 우 군장으로 이주연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향했다 김부식을 주축으로 한 개경파 들은 묘청·유담 등을 죽이고 항복을 받아 냈으나. 조광이 또 반하므로 서경을 포위하고, 1136년에 잔당을 소탕하고 진압을 하게 되었다.
이에 김부식은 묘청의 난으로 공신으로 임명되었고. 김부식은 이러한 공을 이용하여 정적인 윤언이를 축출하고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인종의 명을 받들어 정습명, 김효충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의 편찬을 지휘하게 되었다. 1140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축출되었던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1151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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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林衍, 1220년?~1270년)은 고려 고종·원종 때의 무신(武臣), 권신(權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진천(鎭川).
임연의 생애는 1231년 임연은 제1차 고려-몽골 전쟁 때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고려의 대장군인 송언상이 고향 땅인 진천으로 오게 되었으며 진짜 전쟁처럼 지휘를 하며 놀고 있었다. 대장군인 송언상이 이를 보고 비범하게 여겨 그에 의해 개경으로 가서 그의 종이 되었고 또한 학문과 무예를 배웠으나 송언상이 병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홀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1234년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후에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우, 최항을 섬겼으며 김준을 따르면서 양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1258년(고종 45년) 류경,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1268년에는 김준을 죽였으며, 원종을 폐하여 영종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과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에서 귀국하기 전에 출륙환도(出陸還都)와 권신의 제거를 약속했다. 원종이 몽골병과 함께 귀국하려 하자, 임연은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어 백성의 해도입거(海島入居)를 명하고, 몽골에 항전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1270년 등창으로 죽었다. 아들 임유무가 뒤를 이었다.
임연이라는 사람은 임연(林衍)의 원래 이름은 임승주(林承柱)이다. 그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주(鎭州)에 붙어 지내다가 주리(州吏)의 딸에게 장가들어 임연을 낳자 이를 인연으로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임연은 인상이 흉악했으며[蜂目豺聲:봉목시성] 행동이 재빠르고 힘이 세어 물구나무선 채 팔로 걸을 수도 있었고 지붕 위로 이엉 다발을 던져 올리기도 했다.
대장군(大將軍) 송언상(宋彦祥)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군졸로 있다가 뒤에 고향에 돌아갔는데 몽고가 쳐들어오자 임연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적을 몰아내어 드디어 대정(隊正)으로 임명되었다. 임효후(林孝侯)란 자가 임연의 처와 간통했는데 이를 안 임연이 임효후의 처를 꾀어 간통하니 임효후가 그를 관청에 고발했다. 해당 관청에서 임연을 처벌하려고 했으나 김준(金俊)이 그 사람됨을 높이 사 극력 구원해 준 덕분에 형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또 김준의 천거에 의해 낭장(郞將)이 되었기 때문에 임연은 항상 김준을 아버지라 부르고 김충(金沖)을 숙부라 불렀다.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의(崔誼)을 죽이고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으며, 거듭 승진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김준이 국정을 장악한 후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므로 원종(元宗)이 그를 싫어하게 되었고, 임연도 또 김준과 틈이 생겨 마침내 김경(金鏡)·최은(崔) 등과 함께 그를 살해했다. 또 김경과 최은의 세력이 자기보다 커질까 우려한 나머지 야별초를 시켜 김경과 최은 및 최은의 동생 최기(崔琪)를 체포하여 참수하고 큰 거리에 목을 매달았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장계열(張季烈)은 기마와 격구(擊毬)에 능했으며 성품이 청정하고 예의가 발랐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받아서 내전을 무시로 출입했다. 또 대장군 기온(奇蘊)은 왕의 이복누이의 사위로 국가 기밀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김준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진기한 보물을 김경과 최은에게 뇌물로 주었으므로 임연의 미움을 사게 되어 둘 다 섬으로 유배되었다.
임연이 삼별초(三別抄)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구정(毬庭)에 집결시킨 후 재상(宰相)들에게,
“내가 왕실을 위하여 권신을 제거했는데도 왕은 김경 등과 함께 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 내가 큰일을 저지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을 먼 섬으로 쫓아 보내고자 하는데 어떤가?”
라고 말하니 재추들이 감히 대꾸를 못했다. 임연이 돌아가면서 차례로 의견을 묻자,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은 양위시키자고 했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천우(兪千遇)는 극력 불가하다고 주장하므로 임연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끝마쳤다. 이튿날 밤에 임연이 전 장군(將軍) 권수균(權守鈞), 대경(大卿) 이서(李叙), 장군 김신우(金信祐)를 옥에 가두고, “권수균은 미천한 신분으로 외람되게 높은 직책을 받았고, 이서는 자신의 처의 전 남편의 딸과 간통했으며 김신우는 제 아비의 첩과 간통했다.”고 죄를 따진 후 모두 죽여 버림으로써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임연이 갑옷 차림에 삼별초(三別抄)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거느리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의 집을 찾아가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왕창을 위해 만세를 부른 후 대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종친들과 백관들이 조정에서 하례를 올리는데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쳐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다.
하례가 끝나자 임연이 급히 계단 아래로 내려와 이장용에게 절을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주장했던 양위라는 계책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왕은 진암궁(辰嚴宮)에 있었는데 임연이 좌부승선(左副承宣) 이창경(李昌慶)을 시켜 강제로 나가게 하니 측근의 신하들이 모두 흩어지고 왕은 비를 맞으며 걸어 나갔다. 이창경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바치고, 또 자신의 종자 다섯 명을 시켜 각각 왕과 왕비를 모시게 하여 별궁(別宮)으로 옮겼다. 얼마 후 임연은 왕을 다시 김애(金皚)의 옛날 집으로 옮기게 하고 왕실창고에서 진귀한 보물들을 훔쳐 내었다.
앞서 임연이 왕의 폐립을 모의할 때 사공(司空) 이응렬(李應烈)이, “왕씨 자손이 한 사람만이 아니니 어찌 꼭 지금의 왕이라 합니까?”라고 말했는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기뻐 날뛰며 희색이 만연했다. 이응렬은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林惟茂)의 장인이었다. 왕창이 임연을 교정별감(校定別監)으로 임명하자, 임연은 김준(金俊)의 옛 집으로 옮겼으며 왕창은 육번도방을 보내 그를 호위하게 했다. 이때 세자(世子)가 원나라 연경(燕京)으로부터 귀국하는 길에 파사부(婆娑府)에 이르자 정주(靜州)의 관노(官奴)인 정오부(丁五孚)가 몰래 강을 건너와 이렇게 변란을 알렸다.
“임연이 주상을 폐위시키고 새 왕을 세운 후, 세자께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 입국하지 않을까 우려해 야별초 스무 명을 국경선에 매복시켜 대기하도록 했으니 입국하지 마십시오.”
세자가 그 말을 듣고는 진위를 몰라 주저하고 있자 대장군 정자여(鄭子璵)등이, “임연이란 놈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근거 없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유(羅裕)가 말을 달려 나와,
“아직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정말 변란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고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역적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고 입국을 말렸으며 무덕 장군(武德將軍) 김부윤(金富允)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다.
제교(諸校) 정인경(鄭仁卿)이 몰래 강을 건너 자기 부친을 찾아가 사정을 알아보고 돌아와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으며, 정오부도 고주사(告奏使) 곽여필(郭汝弼)이 지금 영주(靈州)에 와 있으니 사람을 시켜 그를 만나게 하라고 건의했다. 세자가 함께 왔던 몽고 사신 일곱 명을 시켜 곽여필을 영주에서 붙잡고 또 의주방호(義州防護)인 통역관 정비(鄭庇)를 붙잡아 문초한 결과 모든 사실이 밝혀졌다. 세자가 통곡하고 몽고로 되돌아가려고 하자 신하들이 모두 주저하며 반대했으나 정인경만 홀로 극력 권유해 결국 되돌아가게 되었다.
임연이 제멋대로 왕을 갈아치우고는 아무도 자신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세자가 몽고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장군 유원적(兪元績)이 낭장(郞將) 정수경(鄭守卿)과 함께 임연을 죽인 후 왕위를 회복하려는 뜻을 품고 장군 윤수(尹秀)에게 의논했다. 윤수가 거짓으로 승낙 하고 임연에게 달려가 알리니 임연이 그들을 체포해 국문했다. 정수경은 불복했으나 유원적의 자백을 받아 그들을 처형하고 그 집을 몰수했다.
몽고가 사신을 보내 왕의 폐립을 문책해오자 임연은 왕이 병 때문에 자발적으로 양위했다고 대답했다. 몽고가 다시 병부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편에 조서를 보내 왕과 왕창 및 임연을 불러 사실 여부를 조사하려 하자 겁이 난 임연은 재추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조서에 대응할 방안을 의논했다. 이 자리에서 임연은,
“내가 국가를 바로 잡고 난 뒤에 황제에게 조회하려 했는데 지금 이렇게 급히 부르면서 문책하니 장차 이를 어찌할 것인가?”
라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흑적에게 잔치를 베풀고 진기한 보물을 듬뿍 뇌물로 주었으며 또 3, 4품관들로 하여금 각각 무기명으로 조서에 대한 적절한 회답을 만들어 밀봉해 올리게 했다. 다시 자기 집에서 흑적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흑적이 왕위를 회복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므로 임연이 어쩔 수 없이 재추들을 모아 왕창을 폐위하고 왕을 복위시킬 것을 결정했다.
동지추밀(同知樞密) 조오(趙璈)13)는 평소 겸손한 처신으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임연이 왕을 폐위시킬 때 조오는 병이 들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연이 권세를 휘두르게 된 후부터는 조정 안팎의 민심이 조오 에게로 쏠렸다. 장군 김문비(金文庇)가 임연을 암살하려고, 조오의 아들인 장군 조윤번(趙允璠)과 함께 약속을 정한 후 조오에게 알렸으나 조오는 승락하지 않았다.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김문비가 도리어 임연에게 밀고하니, 임연이 조오를 흑산도(黑山島)로 유배 보내고 조윤번 및 조오의 사위인 비서랑(秘書郞) 장호(張顥) 등 일곱 명을 죽인 후 가산을 몰수했으며, 또 조오의 아들 조윤온(趙允溫)도 유배 보냈다. 조오가 임연을 해치울만한 능력이 있었는데도 비겁하게 처신해 화를 자초하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하루는 자은사(慈恩寺)에서 재를 올리느라 깃발을 세운 것을 본 어떤 자가 임연의 아들 임유간(林惟幹)더러, 변란이 일어나서 관청에 반란군의 깃발이 섰다고 알렸다. 임유간이 급히 달려가 임연에게 알리자 임연은 문을 닫아걸고 부들부들 떨었다. 왕이 몽고로 가게 되자 임연은 왕을 제멋대로 폐위시킨 일을 발설할까 겁을 내어 임유간(林惟幹)과 심복들로 하여금 호종하게 했다. 몽고의 수도에 당도하자 임유간이 강화상(康和尙)을 통해 왕의 폐위 문제를 대충 얼버무려 보고했다.
그러나 황제가, “세자와 이장용이 이미 모든 사실을 진술했으므로 짐이 자세히 알고 있다. 너의 아비가 함부로 왕을 폐위시킨 것이 정말인가?”
하고 따지자, 임유간은 그 일은 이장용(李藏用)의 소행이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책임을 돌렸다. 황제가 이장용 및 신사전(申思佺)과 원부(元傅)에게 묻자 각자 사실대로 대답했으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유간이 다시 반론을 펴려하자 황제가 가로막으면서 “네가 말한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한 후 쇠줄로 목을 매어 옥에 가두었다. 이어 중서성(中書省)에 명해 임연에게,
“네 아들이 와서 보고했고 신료들도 또한 와서 보고했으나 짐의 생각에 아직 명석치 못한 바가 있으니 네가 때에 맞춰 속히 입조해 분명하게 밝히도록 하라.”는 공문을 보내게 했다. 임연이 그 명령을 거부하려고 야별초(夜別抄)를 각 지역에 보내 백성들을 섬에 들어가 살도록 독촉하게 했다. 임연은 근심과 울분으로 등창이 나서 죽었는데 그 전에 하늘이 열흘 넘게 흐리다가 비로소 맑게 개였다.
당시 순안후(順安侯) 왕종(王琮)이 나랏일을 임시로 맡고 있었는데, 임유무의 요청으로 임연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증직(贈職)하고 장열(莊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왕종이 또 임유무를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임명하자 임유무가 도감 6번(都監六番)을 집결시켜 자기 집을 호위하게 하는 한편 임유인(林惟栶)을 시켜 서방 3번(書房三番)을 거느리고 임유간(林惟幹)의 집을 에워싸 만약의 경우 구원하게 했다. 임유무는 동요(童謠)와 참설(讖說)이 널리 유포되는 것을 꺼린 나머지, 동요와 도참을 퍼뜨리는 자를 잡는 사람에게는 벼슬과 재물로 포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 일관(日官) 오윤부(伍允孚) 등을 불러 나라를 진정시킬 계책을 물으니 오윤부가, “병이 깊어진 뒤에 의약을 구하면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두련가국왕(頭輦哥國王)과 조평장(趙平章) 등을 시켜 왕을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자, 왕이 먼저 정자여(鄭子璵)를 보내 국내에 있는 신료들에게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설득하게 했다. 임유무는 내심 따르고 싶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우려해 은퇴한 재추들과 3품 이상의 고위관리, 4품 이하의 관리 및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각자 밀봉한 글로 가부를 표하게 했다. 다들 임금의 명령이니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자 임유무는 화가 북받쳐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각 지역으로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을 보내 백성들을 산성과 바닷섬으로 입보(入保)시켜 왕명을 거부하려 하였다. 또 김문비로 하여금 야별초를 거느리고 교동(喬桐)을 지켜 몽고군의 내습을 방어하게 했다.
임연이 보낸 야별초가 경상도로 가 백성들을 독촉하여 바닷섬으로 입보시키려 하자 안찰사(按察使) 최간(崔澗)이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 주열(朱悅), 판관(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모의하여 야별초를 체포해 금주(金州 : 지금의 경남 김해시)에 가두어두고 왕의 귀국을 기다리다가 왕이 국경을 넘어 오자 급히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다. 전라도 안찰사(按察使) 권탄(權坦)과 충청도 안찰사(按察使) 최유엄(崔有渰)도 왕이 황제의 교지를 전달하며 설득하자 모두 감읍하면서 즉각 관할 고을들을 잘 설득했다. 서해도 안찰사(按察使) 변량(邊亮)은 왕의 귀국 소식을 듣자 행재소로 달려갔는데 그 말을 들은 임유무가 사람을 보내어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임유무가 어린 나이에 아비의 권력을 이어 받았으므로 일을 제대로 처리할 줄 몰라 매사를 이응렬(李應烈)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은퇴한 송군비(宋君斐) 등에게 맡겨 결정을 내리게 했다. 매부인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直門下省) 송송례(宋松禮)는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했으나 내심 늘 울분에 차 있었다. 임유무가 왕명을 거역하려 했기 때문에 온 나라가 흉흉해지자 홍문계가 송송례와 함께 계책을 모의했다. 송송례의 아들 송염(宋琰)과 송분(宋玢)은 모두 위사장(衛士長)이었는데, 송송례와 홍문계가 삼별초를 집합시켜 대의(大義)로써 설득하고 임유무를 체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변란의 소식을 들은 임유무가 군사들로 사방을 에워싸게 하고 반군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던 차에 삼별초가 그 집 동쪽 문을 부수고 돌입해 화살을 마구 쏘니 호위병들이 완전히 무너졌다.
임유무와 그 매부인 대장군 최종소(崔宗紹)를 사로잡아 섬으로 유배 보내려고 했으나, 마침 몽고 사신이 객관에 있었으므로 다른 변란이 일어날까 우려해 모두 큰 거리에서 처형했다. 또한 이응렬(李應烈)·송군비(宋君斐) 및 그들의 재당숙 되는 송방우(宋邦又)와 이성로(李成老), 이응렬의 고종사촌 동생인 이황수(李黃綬) 등을 유배 보냈다. 그리고 서방 3번(書房三番) 및 조성색(造成色)을 없애버리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다들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다. 이응렬은 머리를 깎고 도망하다가 추격하는 자에게 붙잡혀 구정(毬庭)으로 끌려왔는데 젊은 패들이 그 죄를 따지며 마구 주먹질을 했다.
임유인은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자 이를 본 몽고 사신이 목을 졸라 죽여 버렸다. 임유무의 어미인 이씨(李氏)는 투기가 심하고 포악한 여자로 자식들이 왕명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살육한 것은 대개가 그 여자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일족이 패망하자 화려한 옷차림에 진기한 보물을 갖추고 도망하려고 했으나, 조오(趙璈)의 처자들이 문밖에서 엿보고 있다가 머리채를 잡아끌고 뺨을 쳤다. 또 원한을 품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어 그의 옷을 찢어 벗겨 버리자 구경꾼에 둘러 싸여 숨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미나리 밭으로 들어가니 아이들이 다투어 기와조각을 던졌다. 뒤에 그 아들 임유간(林惟幹)·임유거(林惟柜)·임유제(林惟提) 등과 함께 체포되어 몽고로 압송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연 [林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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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상(瑺)
휘는 서경(瑞卿) 광정대부첨의중호 전일의 평장사 겸판병조사(匡靖大夫僉議中護 兼判兵曹使)를 역임하시고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며 만성보(萬姓譜) 수원김씨편(水原金氏篇)에는 공의 휘(諱)자를 서(瑞)로 하였는바 이는 서경(瑞卿)의 경(卿)자를 누(漏)자한 것으로 보인다.
3세 극세(克稅)
고려원종(高麗元宗)때 부터 충숙왕(忠肅王) 때의 분으로서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을 거쳐 대광첨의찬성사(大匡僉議贊成事)에 이르셨다. 시호는 실전하고 묘는 과천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한다.
4세 중원(重源)
호는 미곡(梶谷)이시며, 시랑(侍郎) 백촌선생(白村先生)께서 쓰신 노경모재선생행장(魯景慕齋先生行狀)에 의하여 밝혀진바 공께서 1336년에 따님 정경부인을 낳으신 연대에 비추어 고려의 충숙왕 때부터 공민왕 때의 어른임을 알 수가 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시고 뜻이 크셨다. 구보에 벼슬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刑部侍郎)을 지내신후 광록대부이부상서(光祿大夫吏部尙書)를 지내셨다고 하나. 위 백촌 선생의 글에 비추어 이부상서는 증직인 듯하며 광록대부는 공민왕(恭愍王) 5년에 다시 생겼으니 그 뒤의 증직임을 알 수가 있다. 일설에는 공양왕 때 고려가 망하자 슬퍼하시어 굶어 순의(殉義)하셨다고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묘는 김포에 있다고 실전한다.
배씨는 안동권(權)씨, 일설에는 문숙공주 이씨라고 하나 그 부마(駙馬) 해창위마분관(海昌尉馬紛管)이 달로화치(達魯火赤)인 점을 비추어 믿을 수가 없다.
5세 현(峴)
중정대부직문하(中正大夫直門下) 1614년 광해군 때 어사를 역임한 정립(鄭雴)의 글에 공의 계보와 직함이 기록되어있다. 돌아가신 후 공양왕 때 봉익대부이조판서(奉翊大夫吏曹判書)를 증직 받으셨다. 묘는 안음(安陰) 지금의 경남함양군 안의면 교동마을 뒤에 있다고 전한다. 배씨는 밀양 박씨이다.
6세 광저(光儲)
자는 화중(華中), 호는 농암(聾岩)이시며, 고려 때 밀직사좌승선(密直司左承宣)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 증봉익대부판도판서(贈奉翊大夫判圖判書)이며, 묘지는 안음(安陰)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 교동마을 뒤라고 전 하고 있으나 천계갑자보(天啓甲子譜)에는 영동서면(嶺東西面) 유좌(酉坐)로 기제 되어있음. 정립(鄭雴)의 글에 공의 휘를 저(佇)라고 하였는바 고려사의 고려말 명신 저(佇)가 공과 동일인인 듯한 점도 있다.
정립(鄭雴)에 대하여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방(霶). 자는 군흡(君洽), 호는 고암(顧菴). 옥천 출신. 아버지는 찰방 정유건(鄭惟謇)이며, 어머니는 옥천전씨(沃川全氏)로 관찰사 전팽령(全彭齡)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성취되었으며, 정온(鄭蘊)·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유를 맺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5년(광해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학유·전적·좌랑 등을 비롯하여 진해현감·경상도도사를 거쳐 1623년(인조 1) 춘추관기주관 겸교리와 정랑·군자감정·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헌(趙憲)·이충범(李忠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보급하였으며, 진해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진흥시키고 농업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기도 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김장생(金長生)의 휘하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본군의 도유사가 되었고, 이어서 4개군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동궁(東宮)을 전주까지 호종하였다.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사부(詞賦)에 능하였고, 태극·음양설·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인물성동이설(人物性同異說) 등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고암유고』 6권 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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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순(順)
자는 창여(昌汝) 호는 퇴휴당(退休堂) 1341년에 출생하였으며, 고려 때 봉순대부판전농시사(奉順大夫判典農寺事) 봉익대부 호조판서(奉翊大夫 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서울에서 안음(安陰)에 있는 선산을 석묘 가시는 길에 충북옥천(忠北沃川)에서 백지리(白池里)를 둘러보시고 산수가 좋은 곳이라 하여 터전을 백지리로 옮기시고 정자(亭子)를 이원마암(伊院馬巖)에 세우시고 살으셨다.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이시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물러나셨다는 뜻에서 퇴휴당(退休堂)이라는 자호(自號)를 쓰셨다. 묘는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서영촌 남쪽기슭 곤신룡(坤申龍) 건좌(乾坐) 비석이 있으며 재실은 경원재(景遠齋)가 있다 배씨는 정경부인 밀양박씨이며 슬하에는 관(觀), 지(智)를 두셨다.
8세 관(觀)
호는 수헌(睡軒) 태종(太宗)임금 때 호분시위사좌령사직(虎賁侍衛司左領司直)을 역임 증자헌대부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曺判書) 복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復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묘는 영동군 심천면 명천리 텃곡 묘좌(卯坐) 재실은 경모재(景慕齋)
배씨는 정경부인 옥천 육씨(貞敬夫人 沃川 陸氏), 정경부인 순천박씨(貞敬夫人 順天朴氏) 왕조신록에 의하면 충의공께서 13세 때 계모를 모셨다는 구절이 있고 판서박중림(判書朴仲林) 참판박팽년(參判朴彭年)선생과 충의공과는 족친이라는 구절이 자주 나와 충의공과 박팽년선생과는 내외종간 임을 알 수가 있는 한편 판서 박중림(判書 朴仲林)의 배위 두 분은 밝혀졌으나 영상공의 배위한분이 밝혀져 있지 않은 점에 비추어 영상공의 배위 한분이 순천박씨로 박팽년선생의 고모임이 분명함으로 삼가 추기한다. 묘는 육씨와 합봉으로 모셨다고 전하고 이씨조선 초기에 초취와 합봉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판사정립(判事鄭雴)의 글에 의거하여 육씨(陸氏)를 첫 부인으로 삼가 모셔 기제 한다.
9세 문기 (忠懿公派 派官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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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관조 충의공파 파관조
9세 문기(文起)
초휘는 효기(孝起)이었으나 빙장문정공휘효정(聘丈文貞公諱孝貞)의 휘자를 피해 문기(文起)로 개명하셨다.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정호마암(亭號馬巖)이시며 1399년 2월 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셨다.
일찍이 모친상을 당하시어 매일 조석으로 성묘(省墓)를 하는등 효행이 지극하시어 백지리를 이때부터 효자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재(天才)라 불릴정도로 영특하였으며, 성품이 곧고 강직하면서도 활달하시고 언변이 능하시고 무예도 뛰어나 문무겸전하셨다. 1426년 생원시 및 문과의 대책과(對策科)에 합격하시고 같은 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어 태종실록을 편찬하셨고, 1436년 사간원 좌헌납, 1437년 병조정랑, 1438년 사재감부정, 1439년 경상도아사 1441년 입직수문전, 경창부소윤으로 문과 시관, 1443년 의정부사인, 1444년 봉상시윤, 1445년 함길도진무, 1448년 겸지형조사, 1449년 겸지병조사, 1450년 병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1451년 도승지 함길도관찰사, 1453년 형조참판 천추사 자헌대부 함길도 병마도 절제사, 1455년 공조판서겸 판 중추부사 삼군도진무, 천관지 국조방목과 복관작교지에는 이조판서로 되어있으니 이조판서를 역임한듯하다. 함경도감사 때에는 학문을 널리 장려 하셨음으로 유림에서 생사(生祠)를 지어셨으며, 함길도 관찰사와 도절제사 때에는 둔전법(屯田法)을 설치하시어 공적이 크셨다고 하시며, 한어(漢語) 와 외교에 밝으셨다.
문종(文宗)께서 돌아가실 때 단종(端宗)을 부탁하셨음으로 단종을 보호하시기에 힘을 쓰시니 계유정변(癸酉政變)때부터 안평대군 편이라 하여 계속 몰리었으나 당대의 제일가는 인물이었음에 세조가 포섭하고자 한 까닭으로 여러차례의 위기를 맞으시고 면하시었다. 내외종간인 박팽년선생과 특히 친밀하게 지내시던 중 병권을 동원해서라도 단종을 복위시켜드리려고 동지들과 노력하시다가 1456년 6월 2일 김질의 밀고와 성삼문의 자백으로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당하셨으나 상왕인 단종과 동지에게 누(累)가 미칠까하여 홀로끝까지 입을 다무신 체 불복하시었다가 음력 6월 8일 아드님 여병재공(如甁齋公)공과 함께 형사순절(刑死殉節)하셨다.
이조실록 세조 3년 6월 경자일조에 그동안의 조사결과 이때의 충신 여섯 분을 기록하였으니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과 공이시니 이른바 단종의 사육신이다. 원래 사육신은 문신으로서 생명을 바쳐 충의를 다하는데 뜻이 있는 것이어서 사육신은 위의 이조실록 기재와 같이 문신으로서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생명을 바치신 공은 비롯한 여섯 분을 칭하였던 것인데 먼 후일에 남효온(南孝溫)이 사육신전을 지을 때 잘 못 알아서 공 대신에 무신(武臣)인 유응부(兪應孚)장군을 넣은 실수를 범하여 오늘날 사육신에 공을 넣지 않고 공을 사중신(四重臣) 또는 삼재(三宰) 로 잘못 꼽아왔다. 일부후손들이 중종(中宗)때 금고에서 풀리기도 하였으니 1717년 8세손인 휘(諱) 이휘(爾輝)께서 신문고를 치고, 10세손 휘(諱) 정구(鼎九)께서 노력하여 1731년 영조신해(英祖辛亥)에 관직이 회복되셨다.
1776년 정조무술(正祖戊戌)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으셨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세손이사(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世孫貳師)를 증직 받으셨다. 1791년 정조신해(正祖辛亥)에는 불천위(不遷位)로서 부조묘(不祧廟)에 모시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또다시 1870년 고종경오(高宗庚午)에는 정려의 왕명이 있었다. 정각은 시흥군 수암면 화정리 오정각(五旌閣)이다. 임진왜란 전부터 옥천에서 정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타버렸고, 영월장능충신단, 공주동학사숙모전, 의성 덕양서원, 섬계서원, 화림서원, 나산사, 화암사, 오강서원, 호계서원, 갈산호암서원, 월계서원, 금회영각, 구산서원, 충렬사, 세덕사, 요당서원, 왕의영당, 왕산사, 가일사, 도동서원, 양주 삼충단, 등에 모시고 백지리 옛터에는 유최기(兪最基)가 찬(攢)한 유허비가 있다.
묘는 양주하습지라고 하나 실전하며, 노량진 사육신묘역 성역화계획에 따라 동묘역에 설단을 모셨다.
배씨는 정경부인 김봉비 이시며, 선산 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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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선생 사육신론
1. 후세의 육신론 오류
남효온씨가 그의 저서 육신전에서 단종의 충신이 여섯분이 있다 해서 이를 사육신이라 하고 이 사육신을 성삼문선생, 박팽년선생, 하위지선생, 이개선생, 유성원선생 및 유응부장군으로 한 이래 세칭 사육신은 이 여섯분을 지칭하여 왔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등제하고 또 서원 배향도 그렇게 하여 왔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치어 순절한분은 그 여섯분 뿐이요. 그 밖에 단종의 충신은 생육신이 있을 뿐인 것으로 아는 분이 허다하다.
심지어 영월 충신단의 제사에도 초혼축문에 사육신이라고 불린 위 여섯분과 생육신 여섯분의 이름만을 호명하는 정도가 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왕조신록 세조 2년 병자육월 병오일조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역율로 몰린 분들을 사형한 기록 다음에 그 주모자로 볼 여섯분의 성명과 이른바 그 모의 동기를 설명하였는데 그 여섯분은 육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및 김문기 여섯 선생님이시다. 이분들이 이른바 원래의 사육신이다.
이분들로 인하여 육신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인데 먼 후일 남효온씨가 와전된 야언을 토대로 육신 전을 저술함에 있어서 문무겸전한 김문기 선생이 판서겸 도진무였던 것을 모르고 육신 중에 함길도 절제사를 거친 도진무사 있다는데서 고위무신이 사육신전에 있었다고 착각하여 유장군 과 김선생을 혼동하여 육신 중에 유장군을 넣고 김선생을 빠뜨린 일대 과오를 범하였다. 그후 정사를 살피지 않은 역대 왕과 경연의 선비들이 이 육신전을 금과옥조로 믿어 왔다. 심지어 당시 복위운동에 가담한분들은 이 육신전의 여섯분이며 김문기 선생은 연좌한대 지나지 않는다고 하기에 까지 비약한 책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야언이나 소설의 창작이 정사를 외곡한 허물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이에 본고에서 늦게나마 이 역사의 외곡을 바로잡고 정사대로 김문기선생을 사육신의 한분으로 환원하는 정의의 작업을 감히 시도하는 것이다. 다만 사필이 본업이 아니고 격무핑계로 더 좋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지 못한채 역은 허물을 면할 수가 없다. 학계 여러분과 사육신의 충절을 험모연구하는 여러분께서 더 많은 연구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을 삼가 부탁드린다.
2. 백촌김문기선생 인물론
10세 현석(玄錫)
자는 태초(太初)호는 여병재(如甁齋) 1420년생 생원시험을 거쳐 통훈대부 거창현감(通訓大夫 居昌縣監) 양지현감(陽智縣監),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 하였으며 강직한 천성으로 군민을 사랑하시고 덕치를 하셨음으로 거창에는 송덕비(頌德碑)가 섰고 영월에는 1451년에 청덕비(淸德碑)가 섰다고 충의공께서 1456년 세조 2년 단종임금의 복위를 도모하시다가 탄로되어 순절하실 때에 아버님을 따라 순절하시니 그 충효는 하늘을 하늘에 통하고 해와 달과같이 밝으셨다 하리다. 1791년에 왕명으로 장릉충신단에 배향되었고 1870년에는 정려의 왕명이 있었으며 자헌대부이조판서겸판의겸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兼判議禁府事)의 증직을 받으셨다. 1876년에 거창에 사적비가 섰어며, 현재 덕양서원(德陽書院), 왕산사(旺山祠), 숙모전(肅慕殿), 영월충신단(寧越忠臣壇), 등에 배향되어 있으며, 공께서 생존시에 좌부승지를 역임하셨다는 구보의 기재가 있으나 분명치는 않다. 남겨진 유시가 수편 있다고 전하나 찾을 길이 업음이 아쉽다.
11세 충립(忠立)
호는 아한(啞漢)이시며, 1442년 3월 5일생이며 15세 때 단종사화(端宗士禍)로 경상북도 상주에 정속되어 화대면(火垈面)에서 살아 셨으니 그 사실이 적안(籍案)에 기록 되어 있다. 1892년 고종 때 통훈대부 사헌부장령(通訓大夫 司憲府掌令)의 증직을 받았다. 1494년 8월 20일 졸하셨다.
묘지는 구보에는 영상공 묘지 아래 제 2위 묘좌(卯坐)라 하였으나 확실한 증거나 문헌이 없음으로 단(壇)을 쌓아 제사를 드리며 유시 수편이 전한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음이 아쉽다, 하겠다. 배씨는 숙인 남향홍씨이시다.
12세 충지(衷之)
초명 충지(忠智) 1489년 8월15일 출생 1547년 2월 6일 졸 묘지 영동남면 마거리 간좌, 배씨는 덕수이(李)씨 슬하에는 영시(永時), 영수(永守), 영춘(永春), 영손(永孫), 영추(永秋), 영하(永夏), 영회(永會), 영종(永從)을 두셨다.
13세 영시(永時)
1533년 4월 8일생 선조의 분묘가 모셔져 있는 영동고을로 이속될 것을 원하시어 상주에서 영동으로 이주하셨다. 1594년 3월 3일 졸하셨다. 묘지는 영동 마거리 선산 아래 품자(品字)형 배열의 왼쪽 간좌(艮坐)이다. 배씨는 경주이(李)씨이시며, 슬하에는 논학(論鶴), 제학(提鶴), 논실(論實), 원학(元鶴), 안일(雁日), 덕학(德鶴), 장수(長壽), 병학(柄鶴), 범(範), 연학(淵鶴), 구흥(九興), 논탁(論卓), 현학(賢鶴), 효건(孝建)을 두셨다.
14세 논학
자는 상명(象鳴)이시며, 1574년 2월 8일생 도량이 크시고 영특하셨다. 인조 임금때 무과시험에 합격하시어 승사랑훈련원봉사(承仕郎訓鍊院奉事)를 역임하셨으며, 7월 7일 에 졸하셨다.
묘지는 영동 마거리 간좌(艮坐) 비석 있음. 슬하에는 선립(善立), 선방(善方), 선인(善仁), 선상(善尙), 선철(善喆), 선만(善萬), 효립(孝立), 선득(善得), 흘(屹), 저(渚), 해응(海應), 선남(善南), 선견(善堅), 선옥(善玉)을 두셨다.
*** 임난 년도 1592.
병자호란이 일어난 시기가 인조 14년인 서기 1636년 12월~1637년 1월 까지 입니다.
11. 입향조
15세 선철(善喆)
초명은 철(喆)이며, 자는 사숙(士淑)이시며 1620년에 출생하셨으며, 영동에서 영산으로 이주하셨다 증가선대부한성부좌윤겸 오위도총부부총관(贈嘉先大夫漢城府左尹兼 五衛都摠府副摠管) 배씨는 파평윤(尹)씨이며, 묘지는 영동 남면 마거리 간좌(艮坐)이며, 슬하에는 화(華), 채(蔡), 번(番)을 두셨다.
16세 화
자는 화중(化中)이며, 호는 어은(漁隱)이시다. 1634년생이며, 증가선대부한성부판윤겸오위도총부도총관(贈嘉先大夫漢城府判尹兼五衛都摠府都摠管) 영동에서 아버지를 따라 영산 도천으로 이주하여 자손들에게 효심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심. 1702년 2월 8일 졸하셨다. 묘지는 창년군 도천면 도천일리 산 산 1번지 솥골 임좌(壬坐) 비석과 상석이 있음. 배씨는 충주지(池)씨이며, 슬하에는 소(疏)와 의중(儀仲)을 두셨다.
17세 소(疏)
자는 능옥(能玉)이시며, 호는 정천(井泉)이시다. 1649년에 출생하여 1729년 10월 3일 졸하셨다. 묘지는 계성면 봉산리 뒤 천마산 간좌(艮坐) 비석 있음. 배씨는 일선김씨 슬하에는 승룡(承龍), 승창(承昌), 승석(承碩), 승신(承信), 승념(承念)을 두셨다.
18세 승창(承昌)
자는 경희(景熙) 1667년생이며, 1730년 졸하셨다. 배씨는 해주오씨 이며 슬하에 수백(守伯), 수만(守萬), 수완(守完)을 두셨다
19세 수완
자는 윤업(允業) 1686년생 3월 28일 졸하셨다. 묘지는 장척앞 산 계좌(癸坐) 배씨는 파평윤씨이다.
20세 성삼(聖三)
자는 용기(龍起)이시며, 1719년생이며 9월 13일 졸하셨다.
묘지는 영산면 당포동 계좌(癸坐)이며 배씨는 회산 황씨이시다.
21세 호봉(好奉)
자는 학선(學善)이시며, 1776년 출생하였으며, 12월 21일 졸하셨다. 묘지는 선산아래 계좌(癸坐)이며, 배씨는 의성김씨이다. 슬하에 덕지(德之), 현지(賢之), 광지(光支)를 두셨다.
22세 광지(光支)
자는 여실(汝實)이시며, 1804년 출생하셨으며 3월 16일 졸하셨다. 묘지는 도천면 분미골 동산 해좌(亥坐) 배씨는 광주이씨 이시며 슬하에 재길(在吉), 재동(在桐)을 두셨다.
23세 재동(在桐)
자는 양서(揚瑞)이시며, 1825년도에 출생하시어 졸한 연도는 미상이며 5월 8일 졸하셨다.
시서(詩書)에 능하시고 지역향교에서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을 쓰셨다고 함. 2005년 족보 세득록 학행편(世得錄學行篇)에 시문(詩文) 1편을 남겼음.
묘지는 장척산 왼쪽 건좌(乾坐), 배(配)씨는 달성서씨(達城徐氏)와 벽진이씨(碧珍李氏)가 있었으며, 벽진이씨는 1849년 9월 29일 자녀 없이 졸하시고 달성서씨(達城徐氏)에서 자손이 출생되셨다. 슬하에는 문권(文權), 국권(國權)을 두셨다.
양서공의 적덕행적(積德行蹟)
공께서는 1825년도에 출생하시어 공의 나이 19세 때 1843년 두 살 아래인 벽진 이씨(碧珍李氏) 댁 규수와 결혼을 하였으나. 벽진이씨(碧珍李氏) 부인께서 몸이 허약 하시고 이름 없는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1849년 9월 29일 별세하셨다. 다시 1852년 10월에 달성서씨(達城徐氏)를 부인으로 마지 하여 마전리(도천면 예리)에서 토현(도천면 송진리)으로 거주지를 옮기셨다. 토현리에서 1854년 6월 15일 장남 문권(文權)이 출생하고, 1866년 차남 국권(國權)이 출생하였다. 당시만 해도 마전리는 문전옥답이라 할 수가 있었지만 토현리에는 홍수가 범람하면 외로운 섬이 된다하여 톡꼬(獨谷)라고 불러지다가 토현, 토곡, 송진(시나루)으로 지명이 변경된 곳이다. 공이 토현리에 이주할 당시에는 시(稅)나루 부근에 영산고을의 곡물을 한양에 보내기 위한 나루터 부근에 몇몇 민가가 정착하고 있었지만 양 사방이 개울과 늪지대로 되어있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공께서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인근 야산을 개간하시고 연자 방아간(돌방실)을 돌리시고, 안담마을을 조성하고 바깥담마을도 조성 하게하시고, 마을길도 넓히고 개울가에는 통행이 편하도록 징검다리를 놓으시며 개간하지 못하여 방치된 땅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법을 마을 주민에게 알려 줌으로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시니 당초에는 마을 호수가 20여 호였던 호수가 1백호에 가깝게 널어나게 되셨다고 한다. 이는 진실로 개척자의 길을 실천하신 분이시며 적덕공행을 쌓으신 분이라 하겠다. 만년에는 주경야독을 하시며, 후진을 양성하셨다는 내용이 있어 여기에 기록하여 놓고자 한다.
시(詩),서(書)에 능한 재동공(在桐公)
공(公)의 자(字)는 양서(揚瑞)이시며 충의공(忠毅公)의 십삼세손(十三世孫)인 광지공(光支公)의 차자로서 1825년에 도천면 마전(麻田)에서 출생하시어 그 후 송진 안담(土峴)으로 이주하여 누각(樓閣)을 세워놓고 지내셨다.
공(公)은 일찍이 영산향교(靈山鄕校)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평소의 성품(性品)이 인후(仁厚)하시고 총명(聰明)하였으며 특히 시(詩), 서(書)와 한학(漢學)에 통달(通達)하여 남다른 경지(境地)에 이르렀으나 공명(功名)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치가(治家)의 법도(法道)를 지키면서 동향교(同鄕校)에서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을 쓰셨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는 자선(慈善)으로 구제(救濟)를 하시고 허기진 길손들에게는 밥과 의복(衣服)을 희사(喜捨)함으로서 공(公)의 깊으신 학덕(學德)과 적덕공행(積德公行)이 원근(遠近)으로 퍼져 나갔다. 언재나 집안의 대문이 잠겨있는 날이 없었고 안채와 사랑채의 앞마당은 잔디가 자라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향토사지(鄕土史誌)인 영산사적(靈山史籍)과 향토문화지(鄕土文化誌)에 선조(先祖)의 기록(記錄)이 일부 남아 있으나 송진리 246번지 일대의 전각(殿閣)과 서책(書冊)과 권선(勸善)의 가첩(家牒)을 남겼다고는 하나 공(公)의 종손(宗孫) 형모공(炯慕公)께서 왜정(倭政)의 유혹(誘惑)에 의해 일본으로 귀화(歸化)하여 그 상세(詳細)한 치적(治積)을 구전(口傳)으로도 알 수가 없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흔적은 六, 二五 동란(同亂)으로 모두 소실(消失)되어 후손(後孫)으로서 안타깝다, 아니할 수가 없었는데 천행(天幸)으로 공(公)의 수제자(首弟子)이신 최주봉옹(崔周鳳翁)께서 공을 칭송(稱頌)한 시(詩) 한 수가 경주최씨(慶州崔氏) 가첩(家牒)에 기록(記錄)이 되어있고 토현리(土峴里) 노인당에서 이글을 시문(詩文)의 표본(標本)으로 노래하고 있음으로 후대(後代)에 그 본보기로 삼고자 삼가 그 시(詩)를 올려 두고자 한다.
燕燕羽飛 岸山下(연연우비 안산하)
地闢林亭 似遠鄕(지벽임정 사원향)
偏無門鋪 客來攪(편무문포 객래교)
墻頭每過 鴨鵝酒(장두매과 압아주)
聞鷄晨洗 千券習(문계신세 천권습)
有才無祿 豈天意(유재무록 개천의)
野人一生 太平歌(야인일생 태평가)
靑高學人 金揚瑞(청고학인 김양서)
제비 때 날아드는 얕은 산언덕 아래
숲속 트인 땅 정각은 먼 고향이 보이나니
한쪽으로 고리 없는 대문에 찾아드는 길손들.
매번 담장을 오르내리며 고기안주 막걸리 넘치고.
닭 우는 새벽에 세수하고 천권의 서책 익혔으되
재주 있고 녹을 받지 않음은 어찌 하늘의 뜻이런가.
일평생 공명을 탐하지 않으시고, 태평가를 불렀어라,
청고(靑高) 학인(學人) 김양서공(金揚瑞公)이시여.
27세 判出 삼가 이글을 記錄함.
양서공(揚瑞公)의 묘지(墓地) 파묘(破墓)에 관한 설(說)
양서공(揚瑞公)의 슬하에는 두 아드님이 계신다. 장자는 문연(文淵)이고 차자는 국권(國權)이다. 장자이신 문연에게는 형모(炯慕), 형석(炯碩), 형경(炯景)의 세 아들이 있었으나 장자는 일본에 귀화하시고, 차자는 조귀하시고, 삼자는 형을 따라 일본에 가셨다가 1830년대 중반에 귀국하셨다.
양서공(揚瑞公)의 차자인 국권(國權)에게는 형지(炯芝), 형주(炯周), 형석(炯奭), 형명(炯明)의 네 아들이 있었다.
때는 대략 1936, 7년도 시점의 일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것은 형지(炯芝) 장자 종규공(宗圭公)이 나이 15세 전후의 일이라 한 사실에 근거함이다.
당시의 국내사정은 일제강점기시대에 일본이 한국을 그들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강제하고, 1937년의 중 ·일전쟁(中日戰爭:支那事變),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한국의 인력과 물자를 강제 동원하여 전력화(戰力化)한 전시 동원기(戰時動員期)이다.
이러한 시기이니 국민의 대다수는 굶주리고 사람의 삶이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고픈 심정의 시대이니 온갖 사기꾼이 선량한 백성을 현혹시키고, 미신이 판을 치는 시대라 하겠다. 이러한 시기에 그나마 밥술은 굶지 않을 만한 집 사랑채에 일명풍수라 자칭하는 지사가 항시 들끓고 있었다.
특히 공의 손자 중에 형주(炯周)집 사랑채에는 신원도 모르는 자칭 명지사라는 사람이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그 집 사랑채 선반에는 항시 누구의 유골 뭉치인지 모를 두골(頭骨)만 몇 쌍이 올려 져 있었다고 한다.
이런 유골을 남몰래 명산이나 명문가의 선산부근에 암매장을 하자는 지사의 유혹에 현혹되어 이장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형주(炯周)공의 부친인 국권(國權)공의 유골도 여러 곳으로 이장되었다가 결국은 도천면 소천리 남씨댁 선산위에 유골을 암장하였다가 소송에서 패소하는 슬픈 사연도 있었다.
형주공(炯周公)은 보모의 유골을 명산에 안치하면 후손이 번창하고 자손만대에 영화를 누린다는 허영에 들떠있다 보니 매사 그러한 일에는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이에 1936~7년경 조부이신 재동공(在桐公)의 묘지를 어디로 옮길지 옮길 장소도 정하질 않고 묘지의 봉분을 열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형지(炯芝), 형주(炯周), 형석(炯奭), 형명(炯明)의 네 형제가 봉분을 열어 유골을 수습하려는 찰라에 선조의 유골에서 따뜻한 온기가 푹 터져 나옴에 깜짝 놀란 자손들은 바쁘게 봉분을 그대로 덮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우리문중의 가세는 서서히 기울어 들어갔고, 집안에 무슨 찬치나 중요행사가 있으면 그릇 깨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고 했다. 지금의 장척산에 재동공(在桐公)의 산소는 그 당시 바쁘게 봉분을 덮다가 그대로인 상태이며, 지금도 누구도 감히 그 산소에는 흙 한줌도 섣불리 옮기려고 하질 않는다. 재동공(在桐公)과 공의 배씨에 대한 기제사는 1970도 까지 지내시다가 후손 27세 판출이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묘사를 지내기로 집안 간에 합의 하였으나 모사의 주체가 없어 약 20년간 방치하였다가 1990년대가 되면서 형경(炯景), 형지(炯芝), 형주(炯周), 형석(炯奭), 형명(炯明) 다섯 집안 후손이 윤번제로 돌아가며 모사를 차리는 것으로 합의가 되어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27세 판출(判出) 삼가 후손이 알게 하고자 이글을 기록하여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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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문권(文權)
자는 세윤(世允)이며, 호적에는 문연(文淵)으로 되어 있음, 1854년 6월 15일생이시며, 1930년 10월 15일 향년 77세를 일기로 졸하셨다.
배씨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시며, 1857년 출생하시어 1921년 3월 21일 (향년65세)에 졸하셨다. 묘지는 송진 절 뒷산에 안치되었다가 비행장 설치관계로 화장하여 소실됨. 슬하에 형모(炯慕), 형석(炯碩), 형경(炯景)의 세 아들을 두셨음.
1. 문연(文淵)공의 행장기
도천면사무소 구본 호적등본을 근거로 기록한다. 공은 호적상의 성명은 문연(文淵)이시며 1854년 6월 15일 출생하시어 1930년 10월 15일 (향년 77세)에 졸하셨다.
배씨(配氏)는 아버지 인동장씨 장사옥(張士玉), 어머니 이만절(李萬切)의 장녀로 1857년 출생하신 장경순(張敬順)과 1877년 4월 9일 결혼하셨으나 오래도록 자녀를 출생하지 못하다가 장씨부인 34세 1890년 8월13일 장남 김모개(金慕介, 족보상 炯慕)출생하고.
1895년 3월 7일 차남 김모운(金慕云, 족보상 炯碩)출생 하였으며.
1900년 10월29일 삼남 김경대(金景大, 족보상 炯景)출생 하였다.
1921년 3월 21일 장씨부인(張氏婦人,향년65세)에 졸하시니 이후 문연공(文淵公)의 나이 67세에 상처(喪妻)하셨다. 공의 성격은 행적을 추지 하여보았을 때, 한마디로 너무나 어질고 욕심 없이 내 것을 다 빼앗기면서 평생을 사신 분이라 하겠다.
어느 집안 어느 문중을 막론하고 국가의 대 변혁기에 가문(家門)마다 크고 작은 피해가 하나도 없을 수야 없겠지만 특히 우리문중은 경순대왕 이후 국가에 변란이 일어나면 그 장손이나 장자가 특히 많은 피해를 입었거나 가정이 몰락직전에까지 이르는 예(例)가 많아 후대(後代)에 참고가 될까하여 삼가 기록해 두고자 한다.
족보상의 24세 문권(文權)공은 호적상 문연공(文淵公)이시다. 공이 생존하고 계실 당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어 일본인이 우리강토를 무단 도륙을 내고 있었던 시기이다.
1910년 한국을 병합하고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이 시기는 식민적 지배체제를 굳히기 위하여 일본이 기초 작업을 한 제 1차 시기이며, 행정·군사·입법·사법 등 모든 정무에 독재권을 가지고 있던 조선총독이 강력한 헌병과 경찰력을 배경으로 폭력적인 군사 통치를 자행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일제는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1910∼1918년 2456만원을 투자해서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신고절차가 복잡하거나 기타의 사유로 신고기간 내에 신고하지 못한 경우나, 사유(私有)와 점유의 한계가 불명확한 경우, 또는 일본관헌의 위압 등으로 많은 한국농민이 점유한 토지와 소유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동리와 종가(宗家)의 공유지, 구 조선정부의 공전(公田)·역토(驛土)·둔토(屯土) 등 전국토지의 약 40%를 약탈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결국 일제의 막대한 토지약탈과 한국인의 토지소유의 영세화를 촉진하였다. 이 약탈한 토지는 그들의 국책대행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東拓)에 넘겨져서 일본인 지주의 한국진출을 적극 도와 대규모 한국인 소작농을 상대로 한 일본지주의 농장이 개설되었다.
이러한 국가적인 변환기를 맞아 도천면 토현리에 일본인 고아라는 사람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고아가 정착하자 도천지서(都泉支署)가 토현리로 옮겨 오고, 대구마산 도로건설사업, 낙동강 재방건설사업 등 토목공사가 도천면, 남지면, 길곡면일대에 집중적으로 벌어지게 되었으며, 특히 토현리가 모던 토목공사의 중심지가 되다시피 하였다. 문연공의 부친이신 양서(揚瑞)공이 일궈놓은 농토의 대부분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일본인 고아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나. 경찰력까지 동원하여, 뺏고자하는 야만인에게 감히 누구라서 지켜낼 수가 있었겠는가,
다시 일제강점기 제 2기에는 한민족의 3 ·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한국말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하였으며, 한국을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로 다지는 등 고도(高度)의 기만적 정치기술을 연출한 시기였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으로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집중화가 가속되어 한국인의 자작농 ·자작소작농은 감퇴일로의 길을 걷고 소작농 ·화전민으로 떨어진 농민들은 다시 피용자(被傭者) ·노동자로 전락하였으며, 여기에도 끼지 못한 많은 농민들은 유망(流亡)의 길을 떠나, 남한의 주민은 주로 일본에, 북한의 주민은 주로 중국으로 이주하는 시기였다.
이때의 일본인 고아는 우리선조이신 문연(文淵)공을 회유하기 시작했는데. 자녀나 인척 중에 한 사람을 일본에 파견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인질을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때는 1925년 전후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것은 그 당시에 선조의 토지에 매매 동향이 많았던 점에 미루어 추정 하는 것이며. 또한 족부에 기록이 그즈음에서 말소된 것을 보고 추정함.
해서 문연(文淵)공의 장자(長子)이신 형모(炯慕)공께서 향년 33세에 두 아드님을 포함한 직계 가솔(家率)을 대리고 일본으로 귀화를 하게 되셨다. 해방이후 수차례 환국을 하시겠다는 의사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해 결국은 지금까지 소식이 단절된 상태이다. 형모(炯慕)공 후손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다시 추기하기로 함.
문연(文淵)공의 차자(次子)이신 김모운(金慕云)공은 1895년 3월 7일에 출생하시어 1920년 4월 9일 창년군 계성면 당리 광주이씨(廣州李氏)부인과 결혼하여 우강리(友江里)로 거처를 옮겨 거주하시다가 1923년 4월 16일 향년 28세에 자녀 없이 졸하셨으며, 광주이씨(廣州李氏) 부인은 그이후의 기록이 전무하여 알아 볼 길이 없으며, 후손인 27대 판출(判出)이 공의 제사에 지방을 쓸 때 이씨 부인을 기록치 않고 단독으로 모운공(慕云公)의 제사를 모시다가 형자 향렬(炯字鄕列)을 일괄하여 모사(慕祀)에 올리면서부터 공과 부인을 축문에 올렸는데 착오로 여태까지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오기한 것을 2018년부터 광주이씨(廣州李氏)부인으로 정정하여 올리고자 한다.
문연(文淵)공의 삼자(三子)이신 형경공(炯景公)은 1900년 8월 16일 출생하시어 1966년 1월 6일 졸하셨다. 배씨는 1926년 영산면 구계리 아버지 최선교(崔善敎), 어머니 김귀람(金貴藍)의 차녀(次女)이신 최한연(崔汗然)과 결혼하여 형님이 있는 일본에 들어갔다가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되셨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 26조에 의거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됨.) (189011부산진구-60, 2011. 02. 25)
일본에서 다시 만주로 강제 이주 하셨다가 부친인 문연공(文淵公)이 졸 하신 이후 귀국하여 부곡면 사창리(釜谷面 沙唱里) 공의 매부가 거주하는 곳에 이주한 사실도 있음.
이상과 같이 문연(文淵)공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으나 장자는 일본에 귀화하시고, 차자는 자식 없이 조귀하시고, 삼자는 형을 찾아 일본으로 가셨다가 만주로 강제동원 되시고, 문연공께서는 67세에 부인과 사별하시고 홀로 외로운 삶을 사셨는데, 거처는 부친이신 양서(揚瑞)공의 주택임에도 동생인 국권(國權)이 가권(家權)을 통제함에 따라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농토며 선산이며, 문중의 자산은 모두 동생 자손 쪽으로 전부 넘어가고 문연공(文淵公)의 사후(死後)에 후손인 3자 형경(炯景)선조가 귀국을 하였으나 부모로 부터의 유산은 일 푼도 받아본 흔적이 없었다고 함.
문연공(文淵公)께서 1930년 10월 15일에 졸하시니 향년 77세였으며 묘지는 송진 절산 뒤 공동산 가장 위쪽에 부인 인동장씨 묘지 옆에 안장을 하셨으나, 돌아가신 후 상여를 따르는 상주는 자식이 아닌 조카들이 상주를 대신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 토호(土豪)로서 일본인 고아의 후원으로 상여 뒤를 따르는 문상객이 줄을 이었다는 설이 있음. 하지만 초상을 치루고 1년도 되질 않아 문중에서 묘지(墓地)가 역장(逆葬)이라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 아닐까 추정이 됨. 이때 형모공(炯慕公)은 귀국을 하지 않고, 선조이신 형경(炯景)공의 가족들과 귀국을 하셨다. 형경공(炯景公)께서는 부친의 성격을 닮아, 신체도 좋으시고 힘은 장사였지만 남의 말에 현혹이 잘되는 그런 성격을 가지셨던 분이시다. 귀국하여 원래가 조부의 집이였고, 부친의 집이었지만 삼촌과 사촌형님들이 점유하고 계셨으니 어찌할 수 없이 부곡면 사창리 매형 집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귀국하여 모친과 부친의 산소에 대한 문중에서 논의는 4촌 형님들은 한사코 암매장으로 밀장을 권하였고, 처가에 장인이신 최선교(崔善敎)공께서는 한사코 말리셨다고 하나, 운명의 신이 우리집안을 몰락의 길로 인도를 하였는지는 몰라도 형경(炯景)선조께서 모친의 산소를 밀장하기로 결정하시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택해 인동장씨(仁同張氏)의 봉분을 파헤치고 유골을 수습하여 지게에 짊어지고 창녕군 개성면 삼성암 절 부근에 이라고는 하나 암매장을 하여 표시를 해두고 돌아왔다는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집은 불이 나서 초토화 되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불이 난 집을 수습하고 며칠이 지난 후 암매장한 산소를 찾아보았으나 유골자체가 흔적이 없이 망실되고 없었다는 한심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유골은 찾을 길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형경선조(炯景先祖) 부인이신 경주최씨 부인께서 이름 없이 아프기 시작하여 1947년 10월 29일 전념성이 아주강한 콜레라(호열자)로 돌이가시니 마을에서 화장(火葬)으로 장사(葬師)를 치루셨다. 경주최씨 조모의 병과 사망이 반드시 인동장씨(仁同張氏)산소 이장(移葬)이 원인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후 형모(炯慕)의 장자 용세공(容世公)은 일본군 해군장교로서 대동아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시고, 형경선조(炯景先祖)의 장자 영규공(永圭公)은 六, 二五 동란에 참전하시어 전사하는 아픔이 있었다.
또다시 1970년대 중반 영산들에 군용비행장을 설치하는 관계로 송진 절산 뒤 공동산 자체가 산중턱까지 절개되는 국책사업으로 인해 문연공(文淵公)의 산소마저도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때 화장(火葬)해서 분소(焚燒)시키므로 실전(失傳)하게 되었다.
이상 27대 後孫 判出 삼가 문연공(文淵)의 행장(行狀)에 대해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을 기록하여 두고자한다.
2. 잘려 없어진 가지들
빽빽한 정글 속에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재목을 바르게 자라게 하여 훌륭한 동량(棟梁)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갓 솟아나는 나무줄기를 절단하거나 상하게 하면 그 나무는 다 자라게 된다 해도 올바른 재목으로 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다.
24세 문권(문연)공의 장자 김모개(金慕介)공께서는 1890년 8월 13일 출생하시어 1908년 남양홍씨(南陽洪氏, 洪性允)와 결혼하시어 1910년 장녀 분선, 1912년 장남 김용세를 낳으시고, 1915년 차녀 세연, 1920년 차남, 김용웅, 1923년 3남용도, 1926년 3녀 차선을 낳으시니 슬하에 3남 3녀를 낳으셨다. 1932년도 에 일본으로 이주하셨다. 그런데 문중족보에 등제된 것은 장남 용세와, 차남 용웅공은 등제되어 있으나 삼남과 삼녀는 기록에 없고, 첯째 따님은 부곡에 있는 김해배씨 댁에 결혼을 했고, 둘째따님은 영산 신씨댁에 결혼하여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셨고, 셋째따님은 마산 중리로 결혼하시어 일본에 계시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우리조부인 경대 조부 생존 시까지 래왕이 되었으나 현재로는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장남인 용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셨다는 말이 있었으며, 공의 따님 말에 의하면 일본해군 장교로 임관되시어 대동아전쟁 시 제주도 남단해상에서 전사하셨다고 전하며, 용세공에게는 슬하에 따님 한분이 계시는데 대략 1939년생 이라 했으며, 이름은 한국명은 김애자(金愛子) 일본 이름은 하라다 라고 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15살 때 그의 모친은 용세공의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자, 일본에서 흔적 없이 살아졌다고 함. 이렇게 문연공에게는 장자가 없어지고 둘째 마져 조귀하게 되므로 나무로 말하자면 원줄기가 절단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리하여 문연공의 3자인 경대 공에게는 물려받은 유산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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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귀화하신 형모공(炯慕公)의 행장기(行狀記)
형모공(炯慕公)께서는 24세 문연공(文淵公)의 장자로서 1890년 8월 13일 출생하시어 일본으로 귀화 하신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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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 26조에 의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됨. (189011부산진구-60, 2011. 02. 25)
배씨는 경주최씨(慶州崔氏), 1902년 10월 20일 출생하시어 1947년 10월 29일 졸하셨다. 슬하에는 영규(永圭), 정순(貞順), 순동(順童), 사위, 禹判永(丹陽禹氏), 柳世㤠(文化柳氏)씨가 있으며.
배씨 밀양박씨(密陽朴氏) 소생으로 용구(容九), 순덕(順德), 순자(順子)와 사위 丁元吉(羅州丁氏)가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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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개(金慕介)공 은 아버지 홍재순() 어머니 김일남()의 차녀인 홍성윤(洪性允) 과 결혼을 하셨다.
25세 형경(景大)
자는 경대(景大)이시며, 1900년 8월 16일 출생하시어 1966년 1월 6일 졸하셨다. 묘지는 도천면 송진리 밭 곤좌(坤坐)이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 26조에 의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됨. (189011부산진구-60, 2011. 02. 25)
배씨는 경주최씨(慶州崔氏), 1902년 10월 20일 출생하시어 1947년 10월 29일 졸하셨다. 슬하에는 영규(永圭), 정순(貞順), 순동(順童), 사위, 禹判永(丹陽禹氏), 柳世㤠(文化柳氏)씨가 있으며.
배씨 밀양박씨(密陽朴氏) 소생으로 용구(容九), 순덕(順德), 순자(順子)와 사위 丁元吉(羅州丁氏)가 계신다. 용구(容九)(1955년생)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이며, 장녀 순덕(順德)(1950년생)은 丁元吉(羅州丁氏)과 결혼하여 강원도 춘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차녀인 순자(順子)(1952년생) 결혼을 하였으나 이혼을 하고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소식이 단절된 상태임.
26세 영규(永圭)
1931년1월17일(음력 경오년 11월 29일) 출생하시여 1953년 7월18일(음력 6월 8일) 시 불상 인제지구에서 전사하셨다.
묘지는 당초 송진리 공동산 간좌(艮坐)에 계신 것을 배씨인 현풍곽씨(玄風郭氏) 묘지가 있는 어만리 선산에 합봉함.
배씨는 郭弼守(玄風郭氏) 1932년 8월 4일 출생하시어 2012년 음력 11월 18일 졸하셨다. 생존 시 사회봉사활동으로 민족통일위원회 부산진구협의회 운영위원이며, 1996년 평화통일촉진운동 유공자 부산진구청장상 수상, 2011년 생활공감 국민행복 정책제안 실적 우수 유공자 부산시장상 수상경력이 있음.
27세 판출(判出)
초명은 진철(鎭鐵) 1951년 1월 15일 출생, 경남공업전문대학을 거쳐 한국방송통신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졸업, 한국통신 영산전화국장겸, TK 부산본부 교환기술부장, KT 경남전신전화건설국 기술부장, 부산전화건설국 교환기술부장 역임.(1970.3~ 2003. 12)
뉴스타운(인터넷신문, 오프라인 보사위생신문) 영남권취재본부장 역임.(2008. 7 ~2011. 12)
행복도시부산 환경문화 알리기 사업회장(지구환경보호를 위한 NGO 활동) 2010.3~)
행복나눔협동조합 법인 이사장 취임( 2013. 5. 3)
행정사 자격취득(2012년),
시인등단(2014, 3월 신춘문예 봄 제 21호),
등단 시 3편 중 1
초봄 앞에서
새싹 손짓하며 돋아나는
대지에로 피어나는
그것은 새날 맞는 아지랑이런가.
침묵어린 내 가슴에 머무른다.
작은 소망 먼 기다림이
훈훈한 바람으로 실려 가는 곳에
무상한 시간 그 너머로
마냥 흔들려 지나가더니
살아있는 삶을
아직도 못 만지고 돌아가는
가냘픈 실바람
차갑게 간절히 껴안은 들판
수양버들 한 그루 머나먼 길에서
다시 시작하는 계절 따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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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음력 11월 18일 어머님을 천상에 보내놓고 다음해 1년 상을 맞으며 지은 시.
새싹과 아지랑이는 자손들이 생각나고, 훈훈한 바람과 실바람은 어머님이 이승에서 하던 일을 다 못하고 떠나심. 외로운 수양버들 한 거루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자손들을 연상하며 이별이 자연이치임을 순응을 하지만, 이 차가운 겨울만 넘기시면 3년을 더 사실 것이라는 맹목적인 바램을 멀리하고 못내 떠나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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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시 3편 중 2
백일홍은
아무 말 없이 살아가던
혼자만의 백일 그리고 사랑
그대 향한 이 소망
가슴 깊이 더 깊숙이
낮은 기도로 바치며 피어나서
백일동안 건네줄
숙연하게 펼쳐진 빛나는 색깔
햇빛 속에 박혀진 영혼으로
화사한 그대의 얼굴
오늘도 꽃밭에서 서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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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부산 백병원에 종합검진을 하여 골수암의 판정을 받으셨다. 그해 조짐이 좀 이상하긴 했다. 년 초에 아침 산책 겸 등산을 다녀오시다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합의금조로 돈 육십 만원을 받으셨다. 그 돈 육십 만원으로 부전시장에서 붕어, 자라, 한약제등을 넣은 용봉탕을 팩으로 만들어 가지고 오셨다.
육십만원 어치가 펙으로 몇 개인지는 세어보질 않아 모르지만 승용차 트렁크가 다 찰 정도로 많았다. 그것을 약 2~3개월 먹고부터 밥맛이 없다하시며, 다른 음식은 그의 먹지를 못하셨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에 기침을 하시면 목에서 피가 올라오신다 해서 병원에 진찰을 해본결과 암전의 4기라고 하셨다. 그렇게 입원하여 꼭 백일 만에 세상을 하직하시고 용봉탕은 반도 드시질 못하고 남아 삼오가 지난 후 산소에 가서 부어 드렸다.
입원하여 계시는 동안 당신께서 생각나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했던 사람을 기억하셨다가 아들이 면회를 가면 전부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 이질녀들에게 한복 한 벌씩 해 줘야하는 데 못해줬다. 해서 이질 자부들에게 각자 금액으로 환산하여 돌려주었고, 둘째 이질인 용원집에는 잔치하면 3백만원을 줄려고 했는데 잔치가 없어 못 주었다 해서 초상 후에 그 돈을 용원이 이종 집에 주었다. 그 외도 당신이 바라시는 것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말씀을 하셨기에 마무리 지었다. 2012년 음 11월 18일 밤 간호원이 오늘 밤은 보호자가 대기하는 게 좋겠다. 해서 백병원 중환자 대기실에서 잠시졸고 있었는데 갑작이 상여 사방에 축 늘어진 꽃나무가지가 내 눈을 스치고 지나가기에 깜짝 놀라 눈을 뜯는데 그때마침 나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빨리 중환자실로 오라해서 뛰어갔더니 이미 숨은 멈추었고, 온 몸과 손발은 아직도 따듯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대기 중인 간호사는 이미 운명하셨다고 하지만, 말을 하지 않은 뿐 살아있는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약 30분~40분 정도 있으니까 몸이 서서히 식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병원에 입원해서 백 일만에 돌아가시고 돌아가시는 그 시간에 나의 눈에 상여에 널어진 꽃가지를 백일홍가지라 생각이 되어 이 시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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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시 3편 중 3
젊은 날에
누군가 오래도록
내 얼굴 바라보다가
한 모퉁이 주점에 앉는 시간인가보다.
술기운 가득어린 얼굴 내밀어
희미한 기억 꺼내더니
한동안 소주잔에 쓰디쓴 술을 따르며
지난일 안주삼아 술 마시던
그대는 나의 무슨 그림자인가요
유리창 너머 저 멀리로
투명하게 떠오르는 무수한 발자국
부스러진 삶의 뒤안길
고요한 시간 뒤로 다가오는
계절타고 오는 아련한 그림자
어린 그 한사람, 또렷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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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아들 하나 바라보시고 사시다 가셨네, 비오고 바람 불고 울쩍 한날이면 떠오르는 내 어머님, 내가 출생하여 육십평생을 모시고 지내는 동안 어머님을 생각하니 즐거워 하신 날 보다는 마음 아파하시 던 날이 더 많았네. 어찌 하나하나 지나온 세월의 잘못한 일들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있으랴마는. 이재는 좋은 곳 가셨으니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어머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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