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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 양산 천성산 산행기
2013년 11월 12일 양산 천성산(922m) 산행 ‣ 코스 : 백동마을 - 법수암 - 천성산 제2봉 - 집북재 - 공룡능선 - 익성암 - 주차장 ‣ 산행시간 : 5시간 30분
천성산 가는 길
2013년 11월 12일 경남 양산 천성산으로 산행을 떠난다. 8:30 함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따끈한 된장 시래기국과 함께 요기를 한 알프스 회원들은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남으로 향한다. 8:40 경호강 아침 은빛물결이 정갈한 종가집 툇마루마냥 반질반질 빛나고 있다. 8:49 산청 톨게이트를 지난다. 지리산 자락과 이별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진주로 향한다. 남해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열려 있다. 9:53 진주에 다가갈수록 남강(경호강) 푸른 물줄기의 폭은 넓어지고 강물은 스스로 깊어진다. 수주 변영로 시인의 ‘논개’를 떠올린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햇살이 따갑다. 관광버스 조수석에 앉아 있는 까닭이다. 트렁크에 실린 배낭에 등산모를 넣어 둔 까닭에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천성산을 향하고 있다. 얼굴이 가을햇살에 그을리고 있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한다. 바쁜 개인사로 인해 천성산 산행을 취소했다가, 천성산이 그리워 대기자로 명단에 올리게 되었고, 결국 일정을 조정하여 출발 직전에 따라 나서는 바람에 조수석을 배정받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
무엇이 나를 천성산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천성산은 지율스님으로 인해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관통에 반대하며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지율스님. 언젠가 지율스님이 위독한 상황에 처했을 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스님이 도룡뇽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도룡뇽으로 대표되는 천성산의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던지려 했던 지율스님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생명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에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한 농성의 옳고 그름을 떠나, 생태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관주도의 일방적인 개발 방식에 일정 부분 제동이 걸렸고, 생태학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악산 대원사 명부전에는 4대강 개발에 반대하며 소신공양한 문수스님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수스님 영정을 뵈올 때마다 나는 지율스님을 떠올리곤 한다. 문수스님, 지율스님,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이끄시는 실상사 도법스님은 우리에게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의 분별을 없애고, 공존 상생의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제석천 인드라망(因陀羅網)이 그러하듯이, 보석인 내가 빛나는 것은 너라는 보석이 그물에 매달려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천성산을 향해 달려가면서 나는 자문한다. ‘나는 무엇에 목숨을 거는가?’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전 삶과 온 생명을 던져 건지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리운 내원사
10:20 낙동강의 도도한 물줄기며 모래톱이 모습을 드러낸다. 버스는 다시 울산, 양산을 향해 북진한다. 10:26 양산 톨게이트를 빠져 나간다. 내원사 16.5km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윽고 천성산 내원사와 영축산 통도사로 나뉘는 갈림길이 보이고, 천성산 가는 길 양편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겨울맞이 채비를 하고 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처럼 줄지어 서 있다. 11시경이면 천성산에 닿는다 하니 회원들이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대는 왜 천성산에 가려 하는가? 내 마음을 나도 뭐라 규정할 수 없지만, 내가 무리해서 천성산에 가는 것은 지율스님의 정신적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것만도 아니요, 천성산(원효산) 억새밭을 걷고 싶은 마음 때문만도 아니다. 어쩌면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여 지율스님의 불제자가 된, 대학 제자(속명, 미라美羅)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성산의 자연 속에서 비구니가 된 미라를 생각하고, 미라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지율스님의 말없는 가르침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여제자 중 두 분이 절집으로 출가를 했다. 한 분은 남원의 한 중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했던 학생(속명, 금숙金淑)이다. 이형권의 책에 실린 여승만큼이나 서럽도록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을 그 학생이 출가를 했다는 소식을 언젠가 들었다. 곱상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난 그 여제자가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빙그레 웃는 게 고작이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동생과 함께 할머니 손에서 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늘 가슴 한 편을 아리게 했던 여학생으로 기억된다.
두 번째 학생은 국어교육과 제자 미라(美羅)이다. 내가 대학 강단에 섰던 첫해 가르쳤던 후배이자 제자라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학생에게 현대소설론을 가르쳤다. 얼굴이 붉고, 눈망울이 유달리 크고, 목소리가 낭랑하며, 동기생 가운데 키가 유별나게 작은 여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졸업 직후 국어교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했다.
어린 날의 아픔, 젊은 날의 상처
천성산에 다가갈수록 여승과 관련된 갖가지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1980년 7월 말. 계엄령 하에서 대학이 휴교되고, 나는 하릴없이 지루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흉흉한 소식이 풍문처럼 떠돌고 있었다. 이 무렵 국어교육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나는 우리들의 시위를 격려해 주셨던 우리과 지도교수의 해직 소식에 또 아파해야 했다. 선생님은 5년간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일까? 친구와 함께 말없이 군산 발산리 고봉산 자락을 오르고 있었다. 고봉산이 남북으로 길게 누운 8부 산허리에 바다와 개정 들판을 바라보고 지장암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갈공사, 산 너머에 광법사 등 우리 할머니가 불공을 드리던 암사들이 있었다. 고즈넉한 지장암에 여전히 연보라 불두화(수국)가 만발해 있었다. 10년 전 이맘때를 회상해 보았다. 내 나이 10살, 난 그곳에서 아버지의 천도제를 올리고 있었다. 10년 뒤, 어린 나는 청년이 되었고, 천도제를 집전하셨던 여승 또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새겨놓고 있었다. 노을 지는 서해들판과 바다를 보며, 해원의 세상, 불국정토를 생각했다. 핏빛 노을 속에 관세음보살의 나라가 펼쳐지길 바라며, 피안에 계신 아버님이며, 국가폭력의 광기로 생명을 잃어야 했던 남도 광주의 민중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천도제를 올렸다.
굴곡진 삶의 서사(敍事) - 백석의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고적한 가을밤에 읽고 싶은 시가 있다. 백석(白石) 시인의 시 ‘여승(女僧)’. 백석은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다석 유영모 등의 가르침을 받은 평양 오산학교 출신으로서, 일본 아오야마대학(靑山學院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오산학원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분이다. 또 그는 번역가로서도 큰 자취를 남겼는데,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고향인 평안도 정주(김소월의 고향이기도 함)에 머물러 있어, 1987년까지 백석의 시집 ‘사슴’은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해금 이후 나는 그의 시의 매력에 빠져 이듬해 ‘백석의 시세계’(한국언어문학회, 1988)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벌처럼 돈 벌러 나간 지아비를 찾으려고 옥수수 행상을 하며 금광을 전전하다 끝내 어린 딸마저 잃고 어느 봄날 입산(入山)한 여인. 시적화자인 ‘나’ 또한 여인처럼 굴곡진 삶을 살다 어느 암자에서 여인과 조우하게 된다. 취나물 냄새가 배일 정도로 여승은 속세와 절연한 지 오래 되었건만, ‘나’는 그 여승에게서 채 떨치지 못한 슬픔의 그림자를 읽어내고 불경처럼 서러워진다.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노래한 여인, 흰 눈 쌓인 깊은 산속 마가리 마을로 떠나 사랑하고 싶어 했던 여인은 비록 출가하여 여승이 되지는 않았지만, 생을 마치기 전에 1,000억대로 평가되는 자신의 재산을 법정스님께 시주하여, 성북동 자락의 요정은 길상사(吉祥寺)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승, 낮달의 포름한 향내
여행작가 이형권의 책 ‘山寺 -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여는 곳’ 머리말에 실린 젊은 비구니 사진은 참 인상적이다. 선방으로 보이는 공간에서 정갈하게 승복을 입고 합장을 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다. 여드름 자국이 아직 남아있지만, 한 점 티끌조차 없는 고운 피부, 파르라니 깎은 머리, 둥근 이마, 동그란 귀 아래로 약하게 스러지는 귓불, 짙지 않은 눈썹 아래 초롱초롱한 산머루빛 눈망울,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오똑한 콧날, 가볍게 다문 입술, 턱에서 목덜미로 굽이치는 고운 선을 모아 가슴 앞에 합장하고 있다. 시선과 합장한 손이 만나는 꼭지점 너머에 반개한 눈, 웃음이 보일 듯 말 듯한 부처님이 앉아 계시리라. 젊은 비구니 옆에 있는 노스님의 짙은 머리, 검은 피부, 구부정한 자세로 반쯤 눈감은 모습과 대비된다.
문학작품에서 여승을 노래한 시 가운데, 내가 애송하는 작품이 있다. 이준범 시인의 ‘연(戀)’이란 시다.
‘사바(娑婆)의 번뇌가 / 장삼에 묻어가는 / 철쭉도 이우는 어느 귀로에서 / 울어 당신이 잊혀진다면 / 이 몸 범종(梵鐘)되어 / 스스로 가슴 터뜨려 / 허허장천(虛虛長天)을 마냥 울겠다만’
철쭉이 지는 어느 봄날, 여승은 속세에 내려 왔다가 산사로 돌아가고 있다. 가사 장삼을 걸쳤지만, 여승은 사랑의 슬픔을 채 떨치지 못하고 속세를 등지고 있다. 그리움을 떨치기 위해 얼마나 가슴을 터뜨려야 할까, 빈 하늘 한 구석에서, 울어 임을 잊을 수 있을까? 종소리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아파야 하는 종처럼…….
또 송수권 시인의 ‘여승’도 내가 좋아하는 시다. 한국대표시인101인선집(문학사상사) 제1권으로 나온 책 42~43쪽에 실린 시다. 영광스럽게도 이 책에 내가 쓴, 송수권 시인에 대한 문학평론이 실려 있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중략)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에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문학은 삶의 아픔을 드러내고, 이를 생에 대한 긍정의 자세와 정서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예술이다. 그런 점에서 여승의 이미지는 시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 대표적 작품이 인간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한 수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는 조지훈의 ‘승무’이다. 이처럼 여승의 도량 내원사가 있는 천성산을 가면서 줄곧 여승에 대한 상상력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은 문학의 속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효산 화엄늪에 빠지고 싶어라
11:00 웅상읍 백동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장백아파트 옆에서 천성산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은 후 제법 경사진 언덕을 올라 원적사(圓寂寺)를 향한다. 천성산의 원래 이름이 원적산이었다 하니, 원적사는 그 옛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절인 셈이다.
법당과 요사채 하나, 7층석탑, 석불좌상만 있는 자그만 암자이다. 떨어지는 낙엽소리가 들릴 만큼 고적한 산사에서 잠시 거닐며 원적의 세계가 주는 미감을 느껴본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원융의 세계, 번뇌가 사라진 절대 경지인 적멸의 세계를 뜻하는 원적은 이처럼 비움, 작음에서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원적암에서 소요하는 사이 일행은 원적암 옆길을 따라 한창 산을 오르고 있다. 나 또한 서둘러 산을 오르기로 했다. 하지만 선두를 따라잡기는 만만치 않았다. 오르는 산은 오르지 않는 산보다 높다 했던가?
천성산 오르는 길 또한 쉽지 않다.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오르지만 이마에서 연신 땀이 흐른다. 정족산에서 주남고개를 거쳐 제2봉 아래를 지나는 임도를 만난다. 인부 아저씨들이 등산로 정비공사를 하는 중이다. 수고한다, 고맙다는 인사도 채 못하고 오르면서 내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성산 산행에서 인상 깊은 것 중 하나가 낙엽길을 원없이 걸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일행이 걷는 산길에 단풍잎이며 참나무 떡갈나무 잎 등 활엽수잎들이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다. 부처님 가시는 길에 꽃을 뿌리는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한 것처럼, 산우회 회원들이 가는 길에 노랗고 붉게 물든 꽃같은 낙엽들을 흩뿌려 놓은 것이다. 늦가을 자연은 우리가 부처요 하늘로서 존귀와 영광을 받을 만한 존재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뿐만 아니라 마른 나뭇잎들이 풍기는 내음도 그윽하거니와 사그락사그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매우 정겨웠다. S. 구르몽의 시가 생각난다. “시몬, 너는 듣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천성산 제2봉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북으로 낙동정맥이 정족산을 거쳐 주남고개로 이어지는 모습이 펼쳐지고, 가까이로는 천성 공룡능선이 제2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남서방향으로 나무도 없는 원효산(천성산 제1봉), 화엄늪 구릉이 펑퍼짐하게 펼쳐지고 있다.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은 늘 아름답다. 사실 천성산을 천성산답게 하는 것은 원효산으로 불리는 제1봉(920.7m)이 아닐까 생각한다. 낙동정맥이 통도사를 품은 영축산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돌린 산이 천성산인데, 가지산도립공원에 속하는 이곳은 울산 정족산(748.1m)을 거쳐 양산 집북재를 향해 천성공룡능선을 따라 굽이치며 내달려 천성산제2봉(922m)으로 솟구치며 골산을 이루다가, 서남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육산인 천성산제1봉(920.7m)을 이룬다.
영축산이 통도사 창건주인 자장율사의 산이라면, 천성산은 원효대사의 산으로 불린다. 계율에 따라 엄격한 삶을 살았던 자장율사와 달리 거리낌 없는 무애행(无碍行)을 실천하며 파격적인 민중불교를 열었던 원효는 대조적인 면이 많다.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 - 우리나라 원효대사가 판자를 날려 중국 산동성 법운사의 재난을 막아 중생들을 구했다는 설화)으로 중국에서 많은 제자들이 해동 신라로 찾아와 원효의 제자가 되었고, 이들을 모두 성인으로 만들었다 해서 원적산(圓寂山)을 천성산(千聖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런 점에서 원효대사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제1봉 화엄늪은 신성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원효암이 있는 위쪽 산마루인 제1봉 주변 7만여평은 온통 평원이며, 그 서쪽에 고산 습지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화엄늪이 숨어 있다. 낙엽과 풀잎들이 쌓여 이탄층(泥炭層)을 이루고 있고 용천수가 있어 화엄늪 주변에 695종의 식물과 38종의 곤충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원효산으로 불리는 천성산제1봉 일대는 억새풀, 진풀이새 초지로서, 봄이면 철쭉이 아름답고 가을 억새가 명물이어서 지자체에서 이곳에서 축제를 열어 생태계를 파괴시켰다가 환경단체의 비판에 직면하여 올해는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환경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인근 정족산의 무제치늪의 훼손을 본 지율스님이 천성산(원효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은 계율에 얽매임 없이 중생에게 자비를 실천하고자 했던 원효의 삶을 실천하고자 한 귀결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도 터널로 인해 이탄층을 이루고 있는 원효산 일대가 지반침하와 수맥변화를 일으켜 화엄늪마저 훼손될까 염려했던 것이다.
화엄늪에 빠지고 싶다. 온생명이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극락세계를 잠시라도 거닐고 싶다. 하지만 나와 같은 속된 인간의 발걸음이 그 조화로움을 깨뜨린다면, 제2봉 먼발치에서 바라 보기만 해도 다행이 아니겠는가? 군부대가 주둔해 있고, 수천개의 지뢰가 그곳에 매설되어 있다 하니 역설적이게도 다행이지 않은가?
가지 못한 길,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은 아쉬움을 남기고, 가지 않은 길은 그리움을 남긴다. 어쩌면 그리움을 남기기 위해 미완성의 여백을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가고 싶어도 가지 않아야 하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먼 곳에서 달려와 저만치 먼발치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여정도 있는 법. 원효대사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화엄경을 설하신 화엄벌, 즉 원효산(천성산 제1봉) 억새평원과 화엄늪이 갈 수 없는 길, 가지 못한 길이라면, 천성산 제2봉에서 내원사로 향하는 B코스 하산길은 가지 않은 길이었다. 산을 오를 때 사철나무님이 내게 묻는다. “하늘사랑님, 내원사 가실 거예요?” “아뇨. 공룡능선 타야지요.” 나는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공룡능선을 타면서도 마음은 내원사 계곡과 법당, 선원 등을 더듬고 있었다. 제2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지는 내원사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삼성교-진산교-금강교-옥류교-세진교를 거쳐야 비로소 이르게 되는 내원사. 제자 미라는 이 길을 따라 입산하여 수계를 받고 여승이 되었으리라. 속세의 먼지 티끌 번뇌를 삭발로 떨치고, 속세의 인연을 끊고, 금강석같은 진리를 깨우쳤으리라.
문득, 교사가 된 국어과 동기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미라를 찾아 내원사에 갔다가 스님께 혼난 일이 떠오른다. 그들은 △△스님을 만나, 반가움에 “미라야”하고 속명을 불렀다 한다. 속세의 연을 끊은 불제자에게 속세의 이름을 불러 번뇌를 불러일으킬까 저어했기 때문에 짐짓 철부지 친구들을 나무랐으리라. 아마 그들은 다시는 내원사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내원사에 갔던 여학생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모교였던 전주의 모 여고에서 국어교사를 하다가 수녀가 되고 말았다.
집북재를 향하는 능선에 로프 구간이 이어지고 있다. 공룡능선이라는 명칭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천성공룡능선 구간에는 10개 정도의 로프 구간이 있다. 엄한 계율처럼 공룡능선을 내려가며 정신을 집중하게 되니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진다.
천성산 제2봉 높은 산마루에 까마귀가 날고 있다. 회원들과 까마귀 이야기를 하면 산길을 걷는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를 죽음의 상징, 흉조(凶鳥)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또 백로에 대비되는 불순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까마귀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태양에 삼족오(三足烏, 세발달린 까마귀)가 산다고 믿었고 이를 숭배하기도 했다.
원효산 언저리를 맴도는 까마귀를 보며, 원효의 깨달음을 생각해 본다. 원효가 스승이신 대안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였다. 대안스님은 너구리를 정성스레 길렀는데, 어느 날 새끼 너구리가 죽자 까마귀에게 먹이로 주지 않는가? 대안스님은 죽은 너구리가 죽어서 까마귀에게 보시 공덕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자유를 얻고, 늘 중생들에게 보시의 삶을 사는 것을 배운 것이다. 형식적인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무애행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도 뭇 중생들에 대한 참사랑을 실천했던 원효의 마음을 내원사 미라 스님은 이미 체득했으리라.
낮달의 배웅을 받다
16:15 익성암에 이른다. 일주문 근처에 있는, 내원사의 암자로서 성인을 더 많이 배출한 암자란 뜻을 담고 있다. 익성암 옆에 원적산 산신령을 모신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산령각은 본절에서 약 5리쯤 떨어져 있는데, 원효스님과 관련하여 내원사 창건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된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해 오는 내원사 창건설화에 따르면, 동래 척판암에 주석하시던 원효스님이 당나라 산서성 태화사에 수도하던 천명대중이 뒷산이 무너져 위급한 사고를 당할것을 미리 아시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拓板救衆)"이라고 판자에 써서 태화사 상공에 날아다니게 했다. 대중이 공중에 뜬 판을 보고 놀라 일주문 밖으로 나온 순간에 산사태가 나서 절은 무너져 버리고 대중은 모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구출된 천명의 대중은 도를 구하여 원효스님을 찾아왔고, 원효는 그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중방리(지금의 용연리)를 지나게 된다. 이 때 원적산(圓寂山) 산신령이 마중 나와 "이 산은 천 사람이 득도할 곳이니, 원하오니 이곳으로 들어와 머무소서"라고 말한다. 원효는 산신령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지금의 산령각 입구까지 오게 되었고, 이곳으로 인도한 원적산 산신령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산령각을 짓게 되었고 유독 내원사 산령각은 큰절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후 원효 스님은 계곡을 따라 들어와서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 중, 하 내원암과 아울러 89개의 암자를 창건하시어 천명의 대중을 머물러 수도케 하였다. 그리고 석가여래가 수미산에서 설법하시듯, 대중을 천성산 상봉에 모이게 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지금도 그곳을 화엄벌이라 하며, 988명이 이 산에서 득도하였고 나머지 12인중 8명은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사불산(四佛山)으로 가서 도를 깨달았다 한다. 그리하여 원적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6:30 주차장 집결시간이 되어 간다. 산문을 벗어나 버스가 있는 주차장을 향한다. 무엇이 마음을 끄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다. 내원사계곡, 산하동계곡, 성불암계곡을 벗어난 개울물은 양산천과 만나기 위해 숨죽이며 흐르고 있다. 붉게 물든 벚나무잎들이 산사의 저녁 햇살에 불탄다. 중생을 향한 부처의, 원효의, 지율스님의 자비심이 저리 뜨거웠을까?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고 나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늘 한 모서리로 시선을 돌린다. 허허장천에 자세달이 떠 있다. 포름한 낮달이 합장하고 배웅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마음속으로 합장하고 기도한다. “스님 부디 성불 행불(成佛 行佛)하세요.”
하산주를 나누는 자리에서 막걸리를 네 잔이나 마셨더니 얼굴이 제법 불그레해진 듯하다. 그리움을 잊고자 함이었던가? 내원사 여울이 얼마나 윤회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네 인연은 또 어떻게 이어질까?
언젠가 단풍이 불타는 산사 템플스테이에서 미라, 금숙 스님이 내리치는 죽비를 흠씬 맞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연히 찾은 산사에서 노스님과 합장 한 후 마주친 눈에서 가지취 내음이 나는 제자 스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숙세(宿世)의 연이 아직 남아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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