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가 비판
묵자 사상은 매우 합리적이며 실용적입니다. 이런 점은 유가에 대한 비판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유·묵이라고 병칭된 이유는 두 사상 사이에 대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묵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후하게 지내고 상복을 입는 기간도 긴 유가의 예제를 반대했습니다. 그 까닭은 장례가 너무도 화려해서 마치 이사가는 사람 같으며, 이것이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일을 안 하기 때문에 산업이 부진해지고, 그 동안은 아이도 안 낳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해서 정의의 전쟁에 필요한 사람이 부족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묵자는 유가의 악, 즉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악기를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생기는 이익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사실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화려하게 장사지내고 음악을 들으면서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지배층뿐이었으며, 묵가 집단은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묵자가 화려한 장례나 음악과 노래, 춤을 반대한 것은 지배 계층의 특권을 부정한 것이며, 그 까닭은 이런 일들이 모두 피지배 계층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자는 철저한 공리주의자였습니다.
셋째, 묵자는 운명론을 반대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명(命)을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천명(天命)이라고 불렀습니다. 천명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 중 운명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묵자는 자기가 운명을 반대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본뜻은 세습에 의한 차별성을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일찍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 세상이 평안할 것인가 혼란할 것인가, 부자가 될 것인가 가난할 것인가 등을 모두 운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 신분과 부를 세습하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묵자는 운명이란 포악한 임금이 만들어 낸 궁색한 자기 변명이며, 나아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운명이란 것을 본 사람이 없을 뿐더러, 세상 모든 일은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고, 운명을 믿으면 노력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해악을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세습적 신분제에 반대했습니다. 지배층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며 피지배층이 끝내 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재를 쓸 때 차별을 철폐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넷째, 묵자는 유가가 하늘과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신령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하늘은 모든 것을 낳은 생명의 근원이자 도덕의 뿌리였습니다. 그러나 묵가의 하늘은 겸애의 실시 여부를 살피는 감독의 기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상과 벌로 평가 결과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묵가의 합리성에 비추어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주장이지만, 묵자가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싣기 위해 '신령한 하느님'을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반전 평화론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은 이기심에서 왔습니다. 이기심은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사랑을 낳으며, 차별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 자기 집안,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묵자는 지배 집단의 차별적 사람 때문에 생긴 침략 전쟁의 물결을 거슬러서 무차별적 사랑에 기초한 전쟁 반대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묵자의 전쟁 반대론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구호도 작은 실천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묵가 집단은 그러한 전쟁에 맞서는 방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방어를 위한 무기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묵가 집단의 이런 모습을 가리켜 방어전을 위한 전쟁 청부업이라고도 했습니다.
묵자가 전쟁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는 지배 집단을 도둑에 비유했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간 좀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남의 나라를 침략한 큰 도둑은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고 비난했습니다. 또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사람을 죽이면 인간 백정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인 자는 도리어 영웅이 되니 어쩐 일이냐고 했습니다.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노력은 첫머리에 소개한 일화에서 보았듯이 눈물겹습니다. 묵자는 그 밖에도 제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노나라에 대한 침략을 막았고, 초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정나라에 대한 공격을 막았습니다. 묵자의 전쟁 반대 의지는 그만큼 강했던 것입니다.
▶ 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
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입장에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지배 계층을 향해 똑같이 사랑하라고 외침으로써 정치적 평등을 확보하려고 했고, 서로 나눠 갖자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적 수탈에 대항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는 지배층의 음악, 노래, 춤을 반대했고, 화려한 장례를 반대했습니다. 현실적인 지배를 운명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지배 논리에 맞섰고, 강자의 영토 확장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침략전을 막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고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통일의 기운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았을 때는 많은 약소국들이 묵자의 뛰어난 방어전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묵가 집단을 유지시키는 사회적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이 깨져 몇몇 강대국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면서부터 묵가의 영향력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왕권이 안정되자 묵자 사상은 완전히 소멸하고 묵가 집단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그 뒤로는 협객들의 집단, 즉 의적 같은 비밀 결사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 나갔을 뿐입니다.
묵자 사상이 소멸된 원인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묵자 사상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을 때 맹자는 묵자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가 자기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묵자의 유가 비판에 대한 유가의 대응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묵가와 유가 사이의 이러한 대결 의식은 묵가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당시는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자유로운 대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이어 중국을 평정한 한나라는 유가 이론을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묵자의 철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묵자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묵자의 사상은 2500여 년 전이라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혁명적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소 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자는 혁명을 꿈꿀 수는 없었습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묵자가 피지배 계층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공격 전쟁을 의미하게 되고, 공격 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점이 묵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내부적 요건입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묵자 사상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인 자기 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또 다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기심입니다. 사회주의는 강한 조직력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지탱되었고, 경험과 실천이 그 사회의 추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직력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가 뚫고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묵자도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묵가 집단을 강철 같은 대오로 이끌어 갔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주된 동력은 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과 꿈이었고, 이를 통해 내적 성실성과 아울러 외적인 배척력을 함께 가질 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즉 팽팽한 긴장이 강한 단결력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 전국의 혼란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혼란의 종말은 지배 집단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강화시켰습니다. 혁명 이론이 없는 묵자의 철학이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탱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틈을 이기적 욕구가 그대로 놓아둘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2500여 년 전 중국의 획기적인 사상은 꿈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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