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
그 말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분단의 아픔 중에 가장 괴로운 것이 한 핏줄 간의 생살 도려내는 듯한 이별의 아픔이
가장 크다 하겠지만, 북녘 땅의 저 수려한 산하를 내 맘대로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러모로 세인(世人)의 입에 오르내리는 금강산은 그 이름만 해도 사계절을 달리하고
있으니, 이른바 봄에는 금강(金剛). 여름에는 봉래(蓬萊), 가을에는 풍악(楓嶽). 겨울에는
개골(皆骨)산이라 하지 않든가.
그 찬란한 명성이 널리 중국의 중원 땅에도 울려 퍼져, 오죽하면 저들로 하여금「고려
땅에 태어나서 (願生高麗國), 금강산 구경 한번 해 봤으면 (一見金剛山)」하는 소망을 시
(詩)로까지 토로(吐露)하게 하였을까.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명산이다.
이러한 금강산은 대체로 강원도의 회양 ‧ 통천 ‧ 고성 ‧ 인제의 4개 군에 걸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사방 주위가 40km에, 전체 면적은 약 400㎢로 알려져 있다.
이 산의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峯)의 높이가 해발 1,638m라 하니, 한라산과 지리산 보다
많이 낮지만, 설악산의 대청봉과는 거의 높이가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 금강산의 대부분의 지질(地質)은 흑운모(黑雲母) 화강암과 반상(斑狀) 화강암
으로 형성되었고, 남북으로 달리는 대단층선(大斷層線)을 따라 지층이 단락(斷落)하여 천
(千) 수백 미터에 이르는 단층지괴(斷層地塊)를 이루어 산의 골격이 만들어지고,
이에 더하여 산의 풍화침식으로 인해 다양한 지질상의 변화가 나타나 기봉(奇峰), 암대
(巖臺), 절곡(絶谷), 단애(斷崖) 등의 변화무쌍한 경관미(景觀美)를 자랑하게 되었으니 이
금강산은 우리에게 그야말로 천혜(天惠)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금강산에 대한 동경(憧憬)은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
이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기에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 금강산을 다녀 올 수 있는 길이 열렸
다는 소식에 누구 못지않게 이를 반겼으며, 먼저 다녀오신 분들의 찬사를 들으면서 마냥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금강산을 다녀오는 소망
을 이루지 못하고 지내다가, 지난 2005년 10월경에야 비로소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에 나는 KBS의 충주방송국장으로 재임 중이었는데, 시청자위원으로 방송의 발전에
도움을 주시던 여러 위원들 중에 한 분이 금강산을 몇 차례 다녀 온 경험이 있다 해서, 우리
시청자위원들의 금강산 단체 방문을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 제천시에서 당시에 금강산 근처에 지자체 협력 사업으로 사과단지를 조성해
그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적극적으로 금강산 방문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이 해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나와 우리 시청자위원들은 부부 동반으로 2박 3일
간의 일정 하에, 마침내 금강산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금강산 방문 초기에는 뱃길을 이용했
기에 많은 분들이 좀 불편하게 다녀왔다지만, 우리 일행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는 휴전선
육로로 방문하는 편의(便宜)를 누릴 수 있었다.
첫 날인 22일 아침, 일찍 충주를 출발한 우리는 강원도 고성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민족분단의 상징인 한 맺힌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으로 향했다. 막상 휴전선을 넘는다고 하니
긴장도 되고, 각별한 감회가 일었다. 입경(入境) 절차를 마치고 포장된 도로를 달려서, 금강산
에 도착하여 준비된 숙소에 여장을 풀고 난 우리 일행은 드디어 산을 오르게 되었다.
이 금강산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내금강, 외금강, 신금강, 해금강으로 그 구역이 구분된다고
한다. 이는 주봉(主峰)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그 서쪽이 내금강, 동쪽인 바다쪽이 외금강, 외금
강의 남쪽 계곡이 신금강, 동단(東端)의 해안부를 해금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던
당시에 내금강 쪽은 출입이 통제되어, 외금강 남쪽인 신금강과 해금강의 일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충주에서 출발할 때는, 10월 하순이기에 금강산의 단풍은 이미 한물 갔으려니 하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막상 산을 오르면서 보니 단풍이 한창이어서 나는 절로 입이 벌어졌다.
단풍색갈이 다채롭기도 하거니와 어찌 그 빛깔이 그리도 곱던지,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아주 맑은 가을 날씨에 이처럼 아름다운 산을 오르려니, 나는 그저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었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외금강의 명소로 알려진 구룡폭포를 향해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간간이 절경속에서 사진 촬영도 하였지만, 그저 한 군데라도 더 보고자 하는 맘에,
나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일행들 앞에서 분주히 걸었다.
마침내 도착하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구룡폭포....!!
옥류동(玉流洞)계곡의 끝자락, 암벽을 타고 쏟아 내리는 폭포가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이 폭포의 상하 높이가 50여미터 이고, 폭포수가 떨어져 못을 이룬 구룡연(九龍淵)의 수심이
10미터라고 한다. 연한 회색빛 암벽을 타고 지상으로 흘러내리는 폭포수를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려니, 저 중국의 이태백이 여산폭포를 보고 감탄하며 지었다는 “날아 흘러 삼천 척을
내려오니 (飛流直下三千尺), 은하수가 구만리 하늘에서 떨어 진 듯 (疑是銀河落九天)” 하다는
시구(詩句)가 연상되었다. 그저 천하의 이태백처럼 멋지게 이 폭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첫 날에 금강산을 오르내리려니 봉우리면 봉우리, 절벽이면 절벽, 계곡이면 계곡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더하여 계곡을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물은 그야말로 옥수(玉水)
였고, 여기저기 화려한 색깔로 자태를 뽐내는 단풍잎들은 산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실내 인
테리어의 절정이라고나 할까.
산 곳곳에 기암절벽을 타고 우뚝우뚝 서 있는 푸르디 푸른 노송(老松)들은 천연 분재(盆栽)의
극치(極致)인 것만 같아, 그저 감탄이요, 또한 탄성이었다. 이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일행,
아니 이날 함께 산을 오른 수많은 인파들에게 너 나 할 것 없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다음날에는 산행 코스를 달리 하여 저 유명한 만물상(萬物相)쪽으로 향했다. 어제 올라 가
본 구룡폭포에 비해 코스가 더 험했다. 산을 오르며 우리처럼 대한민국에서 오신 많은 분들을
만났는 데, 그중에는 연세가 드신 어른들도 많았다. 그런데 등이 굽고 걸음도 불편해 하는 분들
이지만, 금강산 구경에 대한 욕심은 젊은이들 못지않아, 숨찬 모습으로 험로(險路)를 올라가는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어쨋거나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만물상(萬物相)....!!!
참 신비하고 놀라웠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사물의 형상이 여기 다 모였다는 의미로 이곳의
이름을 만물상(萬物相)으로 부른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 어느 인공정원이 이보다 아름다우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유서 깊은 궁전을
방문하여 세련되게 가꾸어 놓은 인공조경의 백미(白眉)를 보고 탄성을 발하였던 추억에 비해,
대자연의 솜씨로 빚어 놓은 천연 조경(天然造景)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솜씨를 훨씬 능가하는
묘작(妙作)중의 묘작이었다. 높은 곳에서 만물상을 굽어보는 맛은 아래에서 올려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妙味)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가슴속이 아주 후련하였다.
만물상에서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개를 오르니, 아득한 발 아래로 쪽빛 동해바다가
출렁이는 게 아닌가. 산과 바다의 공존과 조화가 또한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 내었다. 오정 쯤
오른 이곳에서 하도 날씨가 좋아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니, 거의 중천에 태양이 빛나고 있건만
사라지고 없을 줄 알았던 반달이 엄연히 창공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이 또한 진풍경(珍風景)이었다. 한낮에 해와 달이 같은 하늘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내겐 참
신기하게 여겨졌다.
마지막 날에 해금강 삼일포를 둘러보았고, 이로써 나는 사흘 간에 걸친 금강산 구경을 모두 잘
마치게 되었다. 참 좋은 날씨에 좋은 분들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 온 것은, 내 인생에 마치 멋진
삽화처럼 끼어들어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옛부터 천하 절경의 금강산을 찾은 많은 시인(詩人)과 묵객(墨客)들은 저마다 그 소감을 작품
으로 표현해 왔다. 수많은 한시(漢詩)와 화필로 그려 낸 화첩(畵帖)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일찍이 조선 초기의 대학자였던 권근(權近) 선생은 “동쪽에서 노는 이들 문득 정상에 오르려다
(東遊使欲凌高頂), 천지자연 굽어보니 가슴 탁 트이네(俯視鴻濛一溋胸)” 라고 노래했고, 그 한참
후대의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천지간에 서서 크게 웃으니 (大笑立天地), 창파에 든 배 아득히
떠 가네(滄波渺去舟), 아침에는 노랑꽃 울며 이슬 떨구고(黃花朝泣露), 가을밤 붉은 단풍이 우우
하고 우는 구나(紅葉夜鳴秋)” 라고 금강산을 노래한 바 있다.
대자연의 은총과 인간의 시운(時運)이 잘 맞아서, 아내와 함께 이 금강산을 일부나마 둘러보긴
하였으나, 실은 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었다.
특히, 내금강과 비로봉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내게 못내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그렇
게도 보고 싶었던 금강산의 일부나마 아주 좋은 날씨에, 이곳 저곳을 올라 본 것은 큰 행운이었
다고 믿는다. 이에 나는 이 감격과 감동을 선인들의 흉내를 내어, 서툰 칠언율시(七言律詩) 한편
으로 아래와 같이 노래해 보는 것이다.
<題 : 金 剛 山/ 금 강 산>
揚 名 天 下 金 剛 山 (양명천하금강산) 그 이름 세상에 널리 떨치는 금강산이여
淸 秋 佳 陽 尋 妙 嶺 (청추가양심묘령) 맑은 가을 좋은 날에 아름다운 산을 찾네
皆 谷 秀 景 天 筆 畵 (개곡수경천필화) 골짜기마다 수려함 하늘 붓으로 그린 듯
每 峰 奇 絶 神 手 屛 (매봉기절신수병) 봉우리마다 절묘함 神이 만든 병풍인 듯
靜 坐 身 用 金 玉 裝 (정좌신용금옥장) 조용히 앉은 모습은 금과 옥으로 장식해
毅 立 頭 上 日 月 明 (의립두상일월명) 씩씩하게 솟은 봉우리 위로 해와 달 빛나
上 皇 救 恤 蒼 生 苦 (상황구휼창생고) 하나님께서 인생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사
海 東 腰 處 造 仙 景 (해동요처조선경) 우리나라 허리에 신선의 마을 만드셨구나 (끝)
- (2013. 12 수필동인지 「공론」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