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 <오늘의 가사문학>
「남도의 맛과 멋」
-풍류도 밥상에서 나온다・2
송 수 권
‘대숲바람 소리 소소할 때 불발기 창을 반만 열면 남으로 비껴가는 기러기 떼 그림자가 보이는 늦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반가운 사람이 오지 않나 싶어 이따금 마른 국화 문양이 뜬 창호문을 열기도 했으리라. 혹은 도시 속의 밀폐된 창문과 달리 사각사각 눈 오는 소리도 그 창호문을 통해 들었으리라. 혹은 달빛이 흘러들면 절로 그 창호에 서권문기(書卷文氣)의 향이 돌고 가야금을 타는 여인의 다소곳한 그림자도 떠올랐으리라’
위 글에서 대숲바람 소리만 빼면 서울의 인왕산 그늘 속에 감추어진 한식집일 수도 있지만 대숲바람 소리가 끼어든 것으로 보면 이는 남도의 한정식집이다. 필자가 95년도에 펴낸 ‘남도의 맛과 멋’에도 썼지만 한국의 대숲은 강릉지방이 그 한계선이기 때문이다. 허균도 ‘도문대작’에서 죽순은 노령 이남이라고 밝혔다. 하서 김인후(金麟厚)는 매죽석(梅竹石)을 찬양하면서 매화는 차가워도 빼어나고, 대나무는 여위어도 오래 살고, 돌은 기기묘묘해도 문기(文氣)가 있으니 이것이 삼익우(三益友)라 했다.
또 ‘문 안에는 대가 있는데 방문을 열면 어찌 난초가 없겠는가?’라고 예향인(藝鄕人)은 곧잘 그 기질을 뽐낼 때 자랑삼아 말한다. 그래서 한정식집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하고 창호미닫이를 열고 들어가면 벽에서부터 서권문기가 자르르하다. 병풍 아래 서상대가 있고 그 위에 하다못해 문방사우인 지필묵이 놓인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교양 있는 안 주인의 품위만 갖추었다면 밤새워 한정식을 먹을 만하다.
그래서 예향 광주 또는 목사골에 오면 사불여(四不如)라 해서 감사또가 구실아치만 못하고, 구실아치가 기생만 못하고, 기생이 음식맛만 못하다는 말은 식탁에서 나온 ‘귄’있는 말이다. 또 그들 말대로 남도 기생은 치마를 둘러도 왼쪽 ‘괴’를 내고 음식맛도 ‘게미’가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남도인은 늙어서도 음식에 타박이 심한데 이를 ‘괴낸다’ 또는 ‘괴물친다’고 말한다.
홍어+해묵은 배추김치+돼지편육(이상은 목포 3합), 낙지볶음, 잡채, 배추 생김치, 쇠고기 편육, 은행+밤+쇠고기(이상은 꼬치), 홍어찜, 홍어회, 홍어생코, 돼지고기 편육, 토하(민물새뱅이)+애호박지짐, 어만두, 찹쌀부꾸미, 쇠고기 산적, 대하(큰새우)살+오이+당근 샐러드, 육포, 은행구이, 깨강정 등 마른안주, 파김치, 멸치볶음, 들깻잎 보숭이, 젓갈(조개젓, 오징어젓, 토하젓, 멸치젓), 조기매운탕, 양파절임, 호박잎쌈, 고사리나물, 가지나물, 도토리묵, 깍두기, 삼색전(표고, 호박, 명태), 싱건지, 신선로 등 평균 밥상만 보더라도 이렇다.
이상은 광주 문화예술회관 옆 골목에 자리잡은 진식당(대표 송미자,062-227-1520)의 상차림 물목표다. 홍어찜(흑산홍어)이 오를 때는 8만원이 추가되고 통보리굴비(오가재비, 비틀이)가 오를 때는 굴비 한정식이 되기도 한다. 이는 나의 10년 전 취재 노트다.
필자는 어느 지면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한정식은 쥐코밥상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알맞은 상이라고. 그리고 낮이 아닌 밤에 먹는 상이라고. 적어도 미식가나 시인 묵객이 받는다면 이미지와 인격을 팔고 사는 주인 마나님 치마폭에 일필휘지 묵향이라도 묻어나야 한다고. 그것은 쫓치기 상이나 모듬상이 아니라 더운 것, 찬 것, 부드러운 것, 딱딱한 것 등 열두 순배는 돌아 나와야 한다고. 적어도 푸짐하다고 표현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고 썼다. 오히려 그것은 선풍(仙風)을 타는 검약과 절제의 고유식탁, 붙박이 식탁이라고 썼다. 그것은 모바일 식탁이 아니라 뿌리깊은 전통 식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도 필자는 여전히 그런 상차림의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하서 김인후가 소쇄원 담원에 줄줄이 써 붙인 48영(경)중 41영의 시다.
장한(張翰)이 강동으로 향한 후로는
풍류를 아는 이 그 누구던고
반드시 사랑하는 농어회(玉膾) 같지 않더라도
기다란 순채싹(氷紗) 맛보고자 하네
같은 물풀 중에서도 연은 군자의 상징으로 순채(蓴菜)는 시절 음식으로 격이 있는 선비들 특히 계산풍류(溪山風流) 중에서도 가장 사랑 받았던 나물이었다. 순채는 동의보감에 뇌혈관의 청혈제로 소개되어 있고 일급수에서만 엑기스(우무덩어리)가 열리는 물풀이다. 그래서 물속의 안테나 또는 환상의 물풀이라고 일본의 고급 식당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41영은 가히 하서 김인후의 인품을 가늠해 볼만한 대목이다. 음식에도 탁기와 청기가 있는데 순채는 청기의 음식이다. 이와 반면 다음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로 탁기로 해석할 수 있는(이는 필자의 생각임)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를 예로 들어보자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 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메어나가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에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곧 가면
누른 해 흰 달 검은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볼 제
뉘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바람 불 제
뉘우친들 어쩌리
-장진주사「將進酒辭」
같은 계산풍류 중에서도 하서 김인후의 식탁과 송강 정철의 식탁은 이처럼 차별화 된다. 소쇄원도에는 상지(上池)가 있다. 작은 띠집으로 엮은 소쇄정 옆에 소당이라 이르는 상지가 있고, 그로부터 원림의 입구쪽으로 중간 쯤에 물방아가 돌고 더 내려가면 하지가 있어 상지의 물은 하지로 흘러 못물에 노는 어류와 물풀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경치를 산지순아(散池蓴芽)라고 쓴 글씨까지(고경명) 보이는데 하지에 흩어져 있는 물풀이 바로 지금은 맥이 끊겨 버린 순채다. 이른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맛이요 멋의 운치다.
순채는 농어회와 함께 가을철에 식도락가나 선비들이 찾았던 시식(時食)이었다. 41영에 보이는 농어회와 순채나물을 일러 순갱노회 또는 순로라고도 한다.
맛과 멋을 드러내는 남도의 식탁에선 이미 자취를 감춘 음식 중의 하나지만 다시 살려 쓸 만하다. 송강의 시조를 어떤 이는 대도풍류(大道風流) 또는 거즐풍류(擧櫛風流)라고 추켜 세울지는 몰라도 남도 음식이 질퍽하고 질탕한 것이 아닌 ‘검약과 절제의 선풍’을 타는 식탁이라면 대도풍류는 자칫 인품을 손상하고 이웃에 해를 끼치는 풍류로 흐르기 쉽다. 쉽게 말하면 처(處)는 본(本)이요 출(出)은 말인데 이는 선비의 본분을 일컫는 말이다. 처와 출이 거꾸로 된 것을 우리는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쓰는데 이는 풍류에서 쓰는 말이다. 풍은 하늘을 흐르는 바람이요 류는 땅을 흐르는 맑은 물이며 이 가운데 사람이 들면 풍류인이라고 말한다. 식성지인성(食性之人性)이라는 말은 음식이 곧 품성을 낳는다는 말인데, 음식은 하늘에서 나와 땅에 깃들고 사람에 의해 그 품격이 완성된다는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