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봄날
이 민 영
4년 동안 길게 길러온 머리를 싹둑 잘랐다. 봄이면 노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만개한 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을이면 카페에서 같이 수다를 떨던 남자친구는 귀엽다며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기도 했다. 그런 내가 머리를 자른 이유는 30대를 넘기고 사회 초년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조교를 하거나 국민저널리즘을 실천하며 지내오다가 정말 운이 좋게도 국회 앞 자그마한 언론사에 취직하게 된 것이었다.
짧아진 내 머리가 어색했다. 그러나 기자가 되는 한 발을 떼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시원해 보이는 헤어스타일이 점점 내 마음에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입가엔 미소가 살포시 앉아 있었다. 부모님도 너무 잘됐다며 첫 출근을 분주히 도와주셨다. 엄마는 첫 출근 전날에 새로 산 정장을 금방이라도 베일 듯이 깔끔하게 다려주셨다.
그 후 나는 성실히 출근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무난한 거리였으나 아침 출근 인파를 뚫기란 여간 만만치 않았다. 무표정으로 샴푸 향기를 길거리에 남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에 한데 모였고 지하철에선 침묵의 불편함이 아우성쳤다. 1시간 20분 동안 사람으로 꽉 낀 지하철에 서있기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출근을 하면 제일 먼저 그전날이나 그날 올라온 기사를 스크랩했다. 신입들에게 실력을 쌓기 위해 강행된 것인데 이 스크랩이 쉬워 보여도 예리한 눈을 가져야 하고 미묘한 언어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이 일과는 매일매일 이루어졌다.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해서 스크랩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타임에 스크랩으로 마무리 했다.
그리고 오전 뒤타임과 오후에는 교육을 받았다. 언론계에서 수십년간 일한 대표님이 나와 동기에게 교육을 해주셨다. 그 교육은 기사를 쓰는 법에 대해 새로운 눈을 트이게 했고 기사를 탐독하는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말못할 어려움이 있었다. 동기와 4년 선배 기자가 나보다 어리다는 데에서 오는 내적 상실감이 있었다. 대학원 박사를 수료한 뒤 그대로 강의 자리를 구했으면 내 연령대에 적당하거나 조금 빠른 것인데, 방향을 틀어 한 회사의 말단으로 들어오니 약간 자괴감 같은게 들었다. 간간이 대학원 후배들에게 연락이 오거나 주변인들의 조언 아닌 조언을 들으면 ‘내가 괜히 이 길에 들어왔나?’라는 생각이 들기 일쑤였다. 또한 빠듯한 하루는 스트레스 씨앗이 되어 내 건강을 서서히 망쳐갔다. 가끔씩 두통과 몸살기운을 느끼기 일쑤였다. 나는 그래도 끝까지 버틸 것을 끊임없이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정신이 아찔했다. 화장실로 가는 발걸음이 휘청였다. 세면대의 거울 속 내 모습은 무언가 무너진 듯한 녹아버린 얼굴이었다. 그리고 낭자하는 선홍빛 코피를 보았다. 휴지로 급하게 코피를 닦았지만 출혈을 계속됐다. 결국 휴지를 흠뻑 적신 뒤에야 코피가 어느정도 멈추었다. 거기에 더해 내 다리는 퉁퉁 부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무거웠다.
이렇게 갑자기 닥친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난 병은 결국 나에게, 사직서를 내게 했다. 어느 한가로운 점심시간에 사직서를 작성하고 동기와 상사에게 인사를 했다. ‘가족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의례와 같은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으러가는 여의도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며 따사로운 햇볕마저 아프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내가 출근하는 줄 알고 엄마가 새벽부터 정성스레 다려준 블라우스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곱고 단정한 블라우스에 엄마와 나의 기대, 꿈이 담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중한 꿈을 놓친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4월의 그 봄날은 화창한 햇볕과 번쩍이는 큰 빌딩, 화사한 내 옷이 눈물에 일렁이는 아이러니한 날이었다…
첫댓글 이민영 작가님!
상실감이 느껴지는 안타까운 내용이네요.
중요한 것은 건강이니까 몸을 추스린 후에 새로운 도전을 하면 됩니다.
파이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