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토플 iBT 120점 만점을 받았다고 할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 학생이 ‘민족사관고’ 재학생이라고 밝히자 “그러면 그렇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학생이 해외 어학연수나 사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시험 준비를 했다고 하자 사람들은 다시 깜짝 놀랐다. 재현 양은 ‘토플 시험보다는 영어 자체를 열심히 공부한 것이 비결인 것 같다’며 웃었다.
최근 독학으로 토플 iBT 120점 만점을 획득해 화제를 모은 민족사관고 국제반 2학년 오재현(15) 양. 토플 iBT(Internet-Based Testing) 시험은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항목으로 구성된 영어인증시험으로 비영어권 국가 학생이 영어권 국가 대학에 지원할 때 필요하다. 오재현 양이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은 그녀가 강남 8학군 출신도, 부잣집 딸도 아니고, 해외 유학이나 연수 한 번 가보지 않은 ‘순수 국내파’란 사실 때문. 사실 그녀의 이번 성적은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것이었다. 대전에서 태어나 초등학생 시절 이미 토익 940점을 받아 지역 일간지에 등장할 정도였고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본 토플 iBT에서 110점을 맞았던 것.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학교에서 만난 재현 양은 아담한 체구에 웃음 많은 평범한 사춘기 학생이었다. 초중학교 시절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민족사관고에서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오재현 양은 평소 어떻게 공부를 해왔고 또 하고 있을까?
‘순수 국내파’ 여고생의 토플 만점 비법
“지난 시험 이후 3년 만에 토플을 봤어요. 이번 시험을 위한 준비는 따로 못했어요. 인터넷에 떠도는 기출문제 후기도 안 봤어요. 시험 전날 동생이 보던 토플 책을 빌려보고, 말하기 항목 출제유형을 처음 파악했을 정도예요.”
토플 시험을 열심히 준비한 이들에게는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서 재현 양의 만점 비결을 알 수 있었다. 오양이 공부한 것은 토플이 아니라 영어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3년 전 토플 시험을 처음 볼 때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 이번 시험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굳이 시험 만점의 비결을 꼽자면, 첫 번째로 충분한 시간 투자. 재현 양은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 처음 토플 시험을 접했다. 아버지가 ‘특목고 가려면 필요하다’며 권한 것. 재현 양은 그때 꽤 열심히 시험을 준비했다. 학교 끝나고 4시쯤 집에 와서 영어공부에 기본적으로 6시간을 투자했다. 주말이나 방학 때는 하루 15시간씩 듣고 쓰고 말하며 강행군을 펼쳤다. 당시 시중에 나와 있는 토플 교재는 거의 다 사서 풀어봤다. 이때 획득한 점수는 110점. 이 점수는 훗날 만점을 위한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오재현 양은 단순히 토플 시험 공부만으로는 만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만점의 두 번째 비법은 천문학, 생물학, 심리학 등 기초학문에 대한 흥미와 다독(多讀)이었다. 토플에는 기초학문 관련 지문이 출제된다. 배경지식을 숙지하고 있으면 훨씬 유리하다. 재현 양이 속한 민족사관고등학교 국제반은 외국 명문대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특별반. 외국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 ‘대학과목 선이수’(AP; Advanced Placement)를 위해 공부했던 생물학과 심리학이 토플에 큰 도움이 됐다. 이렇게 읽은 외국서적만 300권. 책값만 1천만 원이 넘는다. 재현 양은 “오히려 학원을 안 다닌 덕에 남는 시간이 많아서 가능했던 일”이라며 웃었다. 이렇게 읽기 항목은 자연스럽게 정복됐다.
무조건 많이 읽고, 또 읽어라
재현 양은 “읽기 실력에 왕도를 찾는 게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라며 읽기의 효용을 거듭 강조했다.
“읽기라는 게 문자를 읽는 게 아니라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잖아요. 일정 수준에 오르면 비판적인 안목도 갖게 되고요. 토플에서 흔히 나오는 유형이 단어를 제시하고 원래 뜻과 다른 의미로 쓰였을 때 문맥상 의미 차이를 파악하는 것인데요, 그 ‘느낌’을 키우는 방법은 독서 외에 다른 길이 없어요. 그리고 작가에 대한 인식이 생겨요. 가령 찰스 디킨스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면, 시험에서 지문으로 나온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어도 ‘찰스 디킨스’라는 이름만으로 ‘이런 성향을 갖고 있겠구나’ 예측할 수 있어서 시험장에서 훨씬 유리해요. 해석도 쉬워지고요. 많이 읽어보면 읽을수록 부수적인 효과 역시 큽니다.”
오재현 양이 꼽은 세 번째 비결은 특이하게도 적극적인 성격이다. 한국 학생들이 토플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듣기와 말하기. 듣기는 이미 초등 3학년 토익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올렸을 정도로 재능이 남달랐지만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재현 양은 학교 원어민 영어강사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친분을 쌓았다. 그의 재능과 노력을 발견한 강사는 각종 영어말하기 대회에 추천하고 지도교사를 자청했다. 3년 동안 말하기 실력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재현 양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 오히려 학원에 갈 타이밍을 놓쳤다”면서 “적극적인 자세가 말문을 트이게 한다는 속설이 맞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