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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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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 字 子進 號 南溪
맹 자 자진 호 남계
太宗 庚寅 八月一日生 成宗癸卯 九月十一日 卒 享年 七十四 용마 삼필의 꿈을 꾸고 삼자를 얻으니
태종 경인 팔월일일생 성종계묘 구월십일일 졸 향년 칠십사 駿孫(준손) 驥孫(기손) 馹孫(일손) 이시다.
태종10년 1410년 8월1일생 성종14년 1483년 9월11일 사망 향년74세
世宗 戊午 中 生員進士 越三年 辛酉 登文科 弘文博士 端宗 癸酉靖亂 以 集賢殿 交理 棄官歸
세종 무오 중 생원진사 월삼년 신유 등문과 홍문박사 단종 계유정난 이 집현전 교리 기관귀
관직을버리고 돌아오다
成宗朝 左郞公臣官 至司憲 府執義嘗師 江湖 金先生 得聞 圃冶程朱之學 于 從文業 於 黃尨村相公
성종조 좌랑공신관 지사헌 부집의상사 강호 김선생 득문 포야정주지학 우 종문업 어 황방촌상공
之文道學 高明與華齊 金先生 爲道義之交 諸賢嘗稱曺 金先生 爲道義之交 諸賢嘗爲
지문도학 고명여화제 김선생 위도의지교 제현상칭조 김선생 위도의지교 자현상위
曰 老先生 贊禮部 韻略序曆事五朝 中宗朝 贈使曹 參判ㅇ經筵 春秋觀事
왈 로선생 찬례부 운략서력사오조 중종조 증사조 삼판 경연 춘추관사
墓 郡北水 也山간 碑銘 參贊 涵虛亭 洪貴達 墓地睡ㅇ權 五福贊 德宗二年 壬寅 享于 白洞祠
묘 군북수 야산간 비명 참찬 함허정 홍귀달 묘지수간권 오복찬 덕종이년 임인 향우 백동사
配 貞夫人 鄭氏 父 集賢 贊翰 林中虔 號 漁隱 有一女
배 정부인 정씨 부 집현 찬한 임중건 호 어은 유일여
딸하나만 두었다.
繼配 貞夫人 龍仁李氏 夫 刑曹參議 讓工曹典書 中 順會孫 永樂 甲辰二月二十四日生 有賢德 生三子一女
계배 정부인 용인이씨 부 형조참의 양공조전서 중 순회손 영악 갑진이월이십사일생 유현덕 생삼자일여
弘治九年 丙辰 閏三月 二十七日부폄于公 墓在有碑
홍치구년 병진 윤삼월 이십칠일부폄우공 묘재유비
http://kr.blog.yahoo.com/enaksehd8
자료5
조선시대 사헌부의 종3품 관직.
정원은 2인이다. 1392년(태조 1) 7월에 반포한 태조신반관제에 의하면 종3품의 중승(中丞) 1인이 있었는데, 이 중승이 1401년(태종 1) 7월의 관제개혁 때 집의로 개칭되고 이것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사헌부의 직무는『경국대전』에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寃抑)을 풀어주고, 남위(濫僞)를 금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는 것처럼, 백관의 비위사실에 대한 탄핵감찰권과 일반범죄에 대한 검찰권을 아울러 행사할 수 있는 동시에 불복공소(不服控訴)에 대한 고등법원으로서의 구실까지 겸하는 등 왕지를 받아 법률을 집행하는 법사(法司)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인사(人事)와 법률개편의 동의 및 거부권행사라고 할 수 있는 서경권(署經權) 등 국정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집의를 포함한 대관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는 막중하였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젊은 인재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문과에 급제한 자로서 직배(直拜)되거나 승문원·성균관·홍문관 등을 거친 자들이 임명되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6
김맹 의 묘도비명
都摠府經歷兼司憲府執義金公 淑人李氏附葬墓道碑銘(幷序)
도총부경력겸사헌부집의김공(김맹) 숙인이씨부장묘도비명(병서)
參贊涵虛亭洪貴達撰(참찬 함허정 홍귀달 지음)
해설; 1611년간 홍귀달의 유고를 모아 엮은 허백허전문집(虛白亭文 集)과 1802년 임술보에 재록(載錄) 된 것입니다. 비명의 내용에 정사 년(1497년)에 작성한 것으로 나옵 니다. -
解釋; 2005. 6. 13. 金順大
金駕洛貴姓也始祖首露王之生也有 金卵之異故仍姓焉後國滅其裔多居 其也經歷公最裔也
김씨는 가락의 귀중한 성씨이다. 시조 수로왕이 탄생할 때 금빛 알 의 기이한 일이 있어서 <김을> 성 으로 했다. 그 후 나라는 멸망했으 나 그 후손이 거기(김해)에 많이 살 고 있다. 경력공(맹)은 아주 뛰어난 후손이다.
公諱孟字子進 曾祖伉仕高麗爲都制 庫判官 祖湑入 本朝爲義興縣監 始 移居淸道郡 考克一不仕終于家以孝 聞 命旌門後佔畢齋金公題曰處士門
공의 휘는 맹이고 자는 자진이다. 증조는 항(伉)이며 고려 때 도제고 판관을 지냈고, 조부는 서(湑)로서 조선에 들어와 의흥현감이 되었고 청도군으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 다. 부친 극일(克一)은 벼슬길에 나 가지 않고 집에서만 일생을 보냈으 며 효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정려문 을 세워주었고, 후에 점필재 김공( 김종직)이 정<려>문에 제목을 붙 여 말하기를 처사문(處士門)이라 고 칭했다.
妣李氏 漢城府尹 暕之女 公幼讀書 爲文北學有譽名捷生員進士試又擢 文科大爲先輩所重集賢直殿南秀文 引與論詩史深許之以家藏書籍付之 曰更勉可典文衡
모친 이씨는 한성부윤 이간(李暕) 의 따님으로 공이 어릴 때에 책을 읽어 주어 문장이 뛰어나게 되었으 며, 북학(중국학문)에 명예와 이름 을 날리고, 생원과 진사시험에 합 격하였고, 또 문과에 뽑히고 선배 를 소중하게 여겼더니. 집현직전의 남수문[1]이 이끌어서 시문과 역 사에 대해서 같이 논하였으며, 가 문에 보관된 서적을 보는 것을 허 락하고 덧붙여 말하기를 ‘다시금 노력하면 문형(대제학)을 맡을 수 있을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1] 南秀文(1408~1443); 조선의 학자. 자는 경질(景質)·景素(경소), 호는 敬齋(경재), 參判(참판) 琴(금 )의 아들. 生員(생원)으로 1426년( 세종 8)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 제, 集賢殿 副校理(집현전부교리) 가 되고, 1436년 文科重試(문과중 시)에 급제, 1438년 賜暇讀書(사가 독서)했으며, 集賢殿(집현전)에서 柳義孫(유의손)·權 採(권채)·辛碩 祖(신석조)등과 문명을 떨쳤고, 「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草稿( 초고)의 대부분을 썼다.술을 과음 하여 왕의 충고를 받은 일이 있었 고, 集賢殿 直提學(집현전직제학) 에 이르렀다. 1711년(숙종37) 沃 川(옥천)의 虎溪堂宇(호계당우)에 祭享(제향)되었다.
公之兄弟五曰健勇順靭鉉公健之亞 也 處士病深彌留以靭與鉉未婚念不 置
공의 형제는 5명으로 건(健), 용(勇 ), 순(順), 인(靭), 현(鉉) 인데 공은 건의 다음이다. 처사(극일)의 병이 심하여 오랫동안 낫지 않고(彌留), 인(靭)과 현(鉉)은 미혼이라 마음 을 놓지 못했다.
公捐己財辦粧具令各取室鉉最少且 有疾處士尤憐之公終身特友愛每撫 背必潛然涕焉
공이 자신의 재산을 들여서 필요한 것들을 갖추게 하고, 장가들게 하 였다. 현(鉉)이 가장 어리고 병이 있어서 처사가 더욱더 가련하게 생 각했는데 공이 종신토록 우애를 지 키며, <현의> 등을 어루만질 때 마 다 반드시 남모르게 울곤 하였다.
爲司憲府監察外吏苦倉庫吏侵漁聞 公嚴明私於令臺吏債公去爲金泉道 察訪凡驛路積弊立啓罷凡使命出於 其途者憚公莫敢加一騎
사헌부 감찰이 되어 외부에서 근무 할 때, 집안이 어려운 창고관리가 물건을 훔쳐 갔다(侵漁)는 것을 듣 고, 공이 엄중히 밝혔으나, 개인적 으로는 관리의 잘못의 책임을 물어 공은 김천의 도찰방으로 좌천되었 다. 모든 역로(驛路)의 쌓이고 쌓인 폐단을 밝히고 타파하니, 그 도(道) 에서 임무를 받은(근무하는) 모든 관리들은 공을 겁내어 감히 말(馬) 한 마리도 더 갖지 못하였다.
聞星州有一家三女早孤哀愆期不嫁 公叩監司與州牧給資粧指旬月皆嫁 之
들어보니 성주에 있는 어떤 집에 3 여자가 있으나, 어려서 홀로 외롭 고 애처로웠으며, 혼인할 나이는 되었으나 시집을 못가, 공이 감사 인 여주목사에게 물어보고, 비용을 대 주어 열 달(旬月)만에 모두 시집 을 보내었다.
遇一儒生通經術年老无成公悶{憫} 之帖米十斛與之生拜謝且曰生有一 妹家貧壯未嫁公哀之又與之十斛生 旣嫁其妹追謝公於京師公館於其第 尋薦于銓曺除訓導以送凡周急濟窮 此類多
우연히 한 유생이 사서삼경에 통달 하였으나 나이가 많아 이루지 못하 여, 공이 불쌍히 여겨 쌀 10석을 보 내주자 유생이 감사해 하고 또 말 하기를, 유생에게는 여동생 한명이 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아직 시집 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므로, 공이 애처롭게 여겨서 또 10석을 주니, 유생이 이윽고 그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서울(京師; 당시 한양) 에 있던 공을 쫓아와 감사해 하니, 공이 그 집에 투숙하게 하고 전조[1]에 천거하여 훈도에 봉하 여 보내니 모든 다급한 처지에 있 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周急)과 궁 핍한 사람들을 돕는 일(濟窮)이 이 와 같이 많았다.
[1]전조(銓曹); 인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監高靈懸時贊成許公詡以罪安置海 島所過門生故吏皆避不出公出拜于 途盛酒饌慰送許公泣曰戀故人者獨 吾佐郞耳盖許嘗判禮曺公爲朗故云
고령의 현감으로 있을 때, 찬성사 인 허후(許詡)공이 죄를 지어 섬으 로 보내질 때, 지나가는 길에서 문 하생(門生)이었던 예전 관리들이 모두 피해버리고 나오지 않자, 공 이 나와 절하고 길에 가서 많은 술 과 반찬을 보내어 위로하니 허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옛사람 은 내(맹 자신을 지칭) 좌랑 혼자뿐 이다.’ 하니 이는 허공이 일찍이 예 조판서에 있을 때 공이 좌랑을 지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匪懈堂瑢喜文雅名一藝者皆引爲門 客聞公工篆文再枉問公令門者麾不 納夫人詰其故曰寒士援高貴欲何爲 耶終不見{目}及瑢誅門客皆及焉
비해당(匪懈堂)용(瑢)[1]이 우아한 글을 좋아하여 이름난 예술가를 모 두 불러들여 손님으로 대하다가, 공에 대하여 듣고는 글을 받겠다고 다시 굽히고 부탁하였으나, 공은 찾아온 사람에게 명하여 글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부인이 그런 일들 을 힐난하여 말하기를 “춥게 사는 선비가 고귀한 것을 가지고자 욕심 을 부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 고 끝까지 보지도 않았고, 또 용(瑢 )이 죽음을 당하니 문객(방문한 손 님)이 모두 이 영향을 받았다.
[1]匪懈堂 瑢;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조선 세종의 세째 아들. 이름은 용( 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 (匪懈堂) 낭각거사( 珏居士) 매죽 헌(梅竹軒)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 졌고 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그의 맏형인 문종이 다스 릴 동안에는 조정의 배 후 에서 실 력자 구실을 하며 둘째 형 수양대 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꾸며 김 종서 등을 죽 일 때 억지로 죄를 씌워 강화로 귀 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 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혀,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한 다. 글씨 는 조맹부체를 본받아 썼으며, 오 래 살았다면 크게 발전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452년(문종 2) 경자자(庚子字)를 고쳐 임신자(壬 申字)의 자모를 썼고, 그림에도 뛰 어나 화가 안견과도 친분이 깊었다 .
대표작으로는 <<몽유도원도 발문 >> 이 있고, 이외에 글씨로 <<영 릉신도비>><<청천부원군 심 온 묘표>>가 있으며, 저서로는 <<비 해당집>>이있다.
爲都摠府經歷十年不遷亦不介于懷 時南怡驟顯爲都摠管僚屬例皆投刺 於其門公獨否及怡誅搜其家得留刺 者皆誅之公獨脫
도총부 경력이 되어 10년 동안 딴 곳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이 역시 마음에 두지(개의치) 않았다. 이 때 남이[1]가 빠르게 드러나서(빨리 승진하여) 도총관이 되니 동료(僚 屬)들이 대부분(例) 모두 그 가문 에 자기를 알리고자(投刺) 하였으 나, 공이 홀로 거부하였다. 또 남이 는 주살되어 그 집안이 조사를 받 아 자신을 알린 사람들이 모두 죽 임을 당했으나, 공이 홀로 벗어났 다.
[1]남이 (南怡 ; 1441~1468)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서 본관은 의령(宜 寧)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이며 영의정 부사 재(在), 아버지는 의산군(宜 山君) 휘(暉)이며, 어머니는 정선 공주(貞善公主:태종의 4녀)로 태 종의 외손자다.
公性廉退不趍附勢利故身歷五朝屢 經禍機皆不與唯嗜酒日飮無何官雖 卑家雖婁空晏如也
공의 성품은 청렴하고 겸손하였고, 허리를 굽혀(趍) 세력이나 이권에 붙지 않아, 몸소 5임금을 모셨고, 여러 번 화가 미쳤으나 그때마다 모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직 술 을 좋아하여(嗜酒) 마시지 않는 날 이 없고, 벼슬이 비록 낮고 집이 비 록 누추하였으나(屢空; 문이 뚫림) 편안하였다(晏如).
晩年大歸淸道一兄三弟皆尙無恙時 節會合五老皤皤相與磨腮<=顋>交 頸若兒戱然一鄕以爲美談
늙어서는 모두 청도로 돌아와 형님 한분과 세 동생이 모두 근심이 없 고, 계절마다의 모임에 5명 늙은이 의 머리가 희끗희끗하니, 서로 뺨 을 부비고 목을 감고 어린 아이처 럼 노니, 그 고을에 이것이 미담으 로 되었다.
銓曺要之曰公來可大授猶不起成化 癸卯九月十一日終年七十四其年十 一月十一日葬于郡西北水也異之原
인사를 맡아보던 관청에서 요청하 기를 공이 오면 큰 것(벼슬)을 줄 수 있다고 하나 오히려 나아가지 않았고, 성화 계묘년(1483) 9월 11 일에 별세하니 나이는 74세였다. 그해 11월 11일에 <청도>군의 서 북쪽 수야산의 언덕에 장사지내었 다.
公初娶鄭仲虔之女生一女先逝繼室 龍仁李氏生二女三男公嘗夢龍馬之 異名其子皆從馬 長駿孫次驥孫次馹 孫皆有文名駿與驥同登壬寅甲科後 四年 駿重捷科 馹亦連甲三榜人皆 曰難也
공은 처음에 정중건의 따님을 부인 으로 맞이하여, 1녀를 낳았으나 돌 아가시고, 계실(작은 부인)로 용인 이씨를 맞아 2녀3남을 낳았다. 공 이 일찍이 꿈에 용과 말(馬)의 기이 한 꿈을 꾸어, 그 아들의 이름에 모 두 말 마(馬)의 변을 붙이니, 장남 은 준손(駿孫)이고 다음은 기손(驥 孫)이고 다음은 일손(馹孫)이니, 모두 글로서 이름을 날렸다. 준손 과 기손은 같이 임인년(1482년)에 갑과에 급제하고, 그 후 4년(1486 년)에 준손이 중시(重試)에 붙고, 일손도 또한 연이어서 갑과에 세 사람이 붙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 기를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다> 이라고 하였다.
夫人性行懿淑事舅姑順御僕妾仁敎 誨子孫甚有法度常戒三子曰謹言行 篤信義愼勿置私怨於人人或怨詈汝 報以和顔無相猶也
부인은 성품과 행실이 아름답고 정 숙하여, 시부모(舅姑)를 모시는 일 에 온순하였고, 종들과 여자 종들 에게 인자하였으며, 자손들을 타일 러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일(敎 誨)에 항상 법도가 있어서 항상 자 제들에게 훈계하기를 “삼가 언행 을 돈독하게 하고 신의가 있도록 하여 신중하고 사람들에게 개인의 원한을 두게 하지 말 것이며, 사람 들이 혹시 욕하여 매도하면 너는 부드러운 얼굴로 응대하여 서로 어 색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 다.
三子爲夫人迭相乞外每之官輒戒之 曰愼母使累及老母爲也
세 아들은 부인(모친)을 위해 지나 치게 서로 밖에서 빌어서, 관직을 받을 때 마다 번번히 훈계하여 말 하기를 “진실로 어미가 누를 끼치 니 나도 늙었구나.” 라고 했다.
公之庶子有八曰元亨利貞欽明文思 夫人皆子之使不失生業其賤出者贖 以己奴而良之旣疾病駿自咸陽郡守 來侍側駿要劑藥取鐵硏於本郡來夫 人聞之不悅曰豈有留官物私第者乎 其亟還之
공의 서자로는 8명이 있었는데, 원 (元), 형(亨), 리(利), 정(貞), 흠(欽), 명(明), 문(文), 사(思)이니 부인이 모두 자식같이 여겨 생업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고, 그 천한 출 신의 사람들은 그들의 노비 신분을 양인으로 바꾸도록 하였고, 질병이 나자 준손이 함양군수에 있으면서 <집에> 와서 간호(侍側)하며, 준 손이 약을 짓고 쇠를 구하여 갈아 서 본군(청도)에 오니, 부인(모친) 이 이를 듣고 기뻐하지도 않고 말 하기를 “어찌 관에 있는 물건을 개 인집에 가지고 오느냐? 빨리 돌아 가라.” 라고 하였다.
臨絶語二子曰有生必有死吾死命也 勿爲我傷生卒年七十二是弘治丙辰 閏三月二十九日也用五月二十七日 祔葬公之墓左成雙墳禮也
임종시에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으니 내가 죽는 것은 운명이다. 나로 인해서 마음을 상하지 말아라.” 라 하고 돌 아가시니 나이 72세였다. 이때가 홍치 병진년(1496년) 윤3월 29일이 다. 5월27일에 용(用; 발인?)하여 공의 묘 옆에 묻어 쌍분으로 했다.
驥先歿官止刑曺佐郞无子 鄭氏之一 女適生員金震卿 夫人之女長適司直 尹起汾生二子燧焞次適司果趙健生 二子如愚晦
기손이 먼저 별세하여(1492년) 벼 슬은 형조좌랑에 그치고 아들이 없 었다. 정씨(孟之前配) 딸 하나를 두 어 생원 김진경에 시집보냈다. 부 인(孟之繼配)의 장녀는 사직 윤기 분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수와 돈이다. 차녀는 사과 조건에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여우와 여회이다.
駿生四男一女男大有大壯大畜大雅 女適進士李公權
준손은 4남 1녀를 낳았으니, 남자 는 대유, 대장, 대축, 대아이고 여 자는 진사 이공권에게 시집갔다.
馹不育越翌年丁巳駿與馹列考妣行 狀伻來示余請碑文乃文而銘曰
일손은 자손이 없었고 관직에서 파 직당한(越?) 다음해인 정사년(1497)준손과 일손이 부모( 考妣)의 행장을 준비하여 나에게 와서 보여주고 비문을 청하여 이에 글을 쓰니 다음과 같이 새겼다.
伽倻古國首露初起其開也異其積也 累綿綿延延爲仍爲耳處士孝子經歷 善士父子聯芳克類克似一身才器五 朝終始
가야의 옛 나라는 수로가 처음 일 으켰으니, 그 시작이 기이하고 그 쌓인 것이 아주 많아 면면히 후손 들에게 전해졌다. 처사(극일)는 효 자요 경력(맹)은 선사이다. 부자가 계속해서 아름다워 능히 비슷하게 닮았고, 한 몸의 재능이 5 임금을 끝까지 모셨다.
白首郎署賢不必以優遊醉鄕萬事不 理積有陰德宜介繁祉不食其報云如 何矣
흰 머리카락에 하급관리(郎署)이 니 현명한 것이 별로 불필요하여, 넉넉하게 즐기면서 술에 취하여 느 끼는 즐거운 경지(醉鄕)에 만사가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쌓여있는 음 덕에 마땅히 복을 많이 받아야(繁 祉) 하지만, 그 보답을 받지 않으니 어찌 이렇게 되었는가.
天賜賢配龍仁之李惟玆兩美乃生三 子遷坊做孟過庭訓鯉群龍騰競衆桂 生倚
하늘이 현명한 부인을 주니, 용인 의 이씨이다. 생각하니 이에 둘 다 아름답고 세 아들을 낳으니, <이들 이> 동네를 옮겨서(고향을 떠나) 큰일을 하고, 가정을 떠나면 편지 로 가르쳐 여러 용들이 다투어 올 라갈 때, 여러 계수나무는 살아서 서로 의지하네.
九重賜榮一鄕觀美分符奉檄北堂伊 邇折筍烹魚窮親甘旨大運已矣哀哀 考妣淸道治西佳山秀水牛眠馬髼山 隴雙峙我銘于石于山之址人世易遷 聲光不死
여러 겹으로 내린 영광에 한 고을 이 찬미하고, 분부를 받든 편지에 북당이 가까웠다(어머니가 가까이 있는 것과 같다). 새싹을 꺾어서 물 고기를 삶으니 친함이 다하나 달고 도 맛있어라. 큰 운이 이미 다해 불 쌍한 부모님이여! 청도의 서쪽, 산 은 아름답고 물은 맑아라. 우면의 마봉산에 농쌍 언덕이다. 나는 돌 에 새겨서 산의 터로 가져왔다. 인 간세상은 쉽게 변하나 목소리의 빛 깔은 죽지 않았구나(목소리는 귀에 쟁쟁하다).
[1] 北堂;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 르는 말
參贊 涵虛亭 洪貴達 撰
참찬 함허정 홍귀달 지음
자료7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1247-5
김맹 의 묘
묘는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수야촌[지금의 이서면 수야리]에 있다.
묘갈(墓碣)은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이 찬하였다.
김맹 의 묘
자료8)
출처,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1401년(태종 1)에 중승(中丞)을 고친 이름으로, 중승(中丞) 또는 아장(亞長)이라고 하였으며, 대사헌(大司憲: 從二品) 이하 장령(掌令: 正四品)‧지평(持平: 正五品)까지의 다른 사헌부 관원과 함께 통칭 대관(臺官)이라고 하였다. 학식(學識)과 덕행(德行)이 높아서 이조(吏曹)로부터 천거(薦擧)된 대관을 특히 남대(南臺)라고 하였다. 한번 이 벼슬을 지낸 사람은 아래 벼슬을 제수 받지 못하였다.
모든 대관은 사헌부의 청환직(淸宦職)으로, 문과 급제자 중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홍문관(弘文館) 등을 거친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되었는데, 그만큼 직무가 막중하기 때문이었다. 이조의 전랑(銓郞)과 함께 전 조선시대의 사족사회(士族社會)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자료9)
[네이버 지식백과] 김맹 [金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金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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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출처 | 디지털청도문화대전-김맹 |
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진(子進). 청도 사인촌(舍人村)[현 각남면 칠성리]에 살았다. 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며, 어머니는 한성 부윤 이간(李暕)의 딸이다. 김준손(金駿孫)·김기손(金驥孫)·김일손(金馹孫) 등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꿈에 용마(龍馬)를 보았기 때문에 아들 이름을 모두 마(馬)변 글자로 지었다 전한다.
김맹(金孟)[1410∼1483]은 생원시를 거쳐,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김천 도찰방·예조 좌랑이 되었다. 1451년(문종 1) 평안도 도사를 거쳐 고령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좌랑으로서 세조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곧 의금부 진무를 거쳐 오위도총부 경력을 역임하였다. 성종 초 집의에 올랐다가 퇴직하였다.
벼슬을 마다하고 부모의 봉양에만 정성을 쏟은 아버지 김극일의 훈회(訓誨)에 영향을 받아 성품이 단아하고 청렴하였으며 권세와 이익을 쫓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러 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화기(禍機)를 여러 차례 겪었으나 무사할 수 있었다. 안평 대군이 여러 번 그를 초대하였으나 만나지 않았으며, 또 도총부의 경력으로 재직할 당시 직속 상관인 도총관 남이(南怡) 집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번번이 화(禍)를 면했다고 전한다.
묘는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수야촌[지금의 이서면 수야리]에 있다. 묘갈(墓碣)은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이 찬하였다.
세조 즉위 당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맹 [金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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