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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 안평대군 이용(李瑢)
이 비의 주인공은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 비의 받침은 거북받침돌을 잃어버려 자연돌로 대신하였고 그 위에 비 몸을 올렸으며, 용을 조각한 머릿돌은 비 몸과 한돌이다. 비문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나, 비문의 내용을 실은 책이 전하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업적과 왕후, 빈(嬪), 그 소생에 관해 간단히 적고 있다 한다.
앞면의 비이름은 정인지의 글씨이고, 뒷면에 새긴 글은 김요가 지은 글에 안평대군 이용이 글씨를 쓴 것이다. 제작은 정분과 민신의 지도아래 150여명의 석공 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하였다.
문종 2년(1452년)에 세운 비로, 강남구 내곡동의 구 영릉(舊英陵)터에 묻혀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인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왔다.
영릉 신도비명 병서
요 임금은 아들인 단주를 놓아두고 순에게 선위하였는데, 순 임금은 중화의 덕이 있었으므로 요임금의 인덕이 더욱 후대에까지 미쳤고, 문왕은 아들인 백읍고를 놓아두고 무왕을 왕으로 세웠으므로 무왕은 문왕의 공적을 잘 계승하여 주나라의 왕업을 더욱 창성하게 하였다.
공자가, “당 · 우는 어진 신하에게 선위하고 하후 · 은 · 주는 자손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뜻은 한가지이다.”라고 말한 것은 모두 사심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우리 태종이 선위한 것은 요 임금과 문왕이 품었던 마음이며, 우리 세종이 선위를 받으신 것은 순 임금이나 무왕과 같은 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보위에 있을 때에, 일찍이 원자 제를 세자로 삼고 어진 사우를 가려서 교육의 방법을 극진히 하였으나, 세자는 자라서도 장난기가 있어서 학문과 덕에 진보가 없으니 태종이 매우 근심스럽게 여겼다. 영락 무술년 유월에 이르러서는 세자의 실덕이 더욱 심하여 태종이 적손을 세워서 후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대신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세자의 교육을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쓰셨는데도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이제 어린 손자를 세자로 책립한다 하더라도 어찌 뒷날 그가 현명하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비를 폐하고 그 자식을 세우는 것이 의리로도 어떠할는지요. 그러니 어진 이를 가려서 후사로 삼는 것만 못할 듯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에 세종은 세자의 동복아우로서 서열은 셋째이고 일찍이 충녕대군으로 봉해져 있었다. 태종이 이르기를, “충녕이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지니 그를 세자로 세우는 것이 옳겠다.” 하고 마침내 충녕을 세자로 삼으니 종친과 문무백관들이 절하며 하례하고 내외가 모두 만족히 여겨 칭송하였다. 드디어 천자에게 상주하니 천자가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적출의 장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은 고금 불변의 상도이다. 그러나 후사가 어지냐 어질지 못하냐에 따라 국가의 성쇠와 존망이 달린 것이다. 왕은 국가의 먼 장래를 염려하고 성쇠존망의 기미를 밝게 살펴 어진 이를 세워 후사로 삼고자 하니 왕의 선택을 허락하노라.” 라고 하였다. 이해 팔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책명을 청하였다.
십일월에 세종이 책보를 받들어 태종에게 성덕신공상왕의 존호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봄 정월에 천자가 홍로시, 승유천을 보내 세종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그해 유월에 천자가 태종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근자에 왕이 셋째 아들이 효성스럽고 학문에 힘써 종사를 계승할 만하다 하고, 또 자신은 연로하다 하여 전위할 것을 청하였다. 짐이 왕의 식견이 명달함을 생각하여 특별히 소청을 허락한다. 대체로 대를 잇는 데는 후사가 있어야 하고 보위를 전하는 데는 마땅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 이제 왕은 어진 이를 가리고 덕 있는 이를 지명하여 종사를 맡게 하였으니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였다. 짐은 이를 진실로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여 왕에게 연향을 내린다. 이는 왕실 일가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왕의 온 백성의 경사인 것이다.』하였고, 또 세종에게 칙서를 내려 충효의 도로써 권면하고 연향을 내려 주었다. 팔월에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두 임금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잔치를 받으니 예악의 성대함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다.
일찍이 원경왕후께서 홍무 정축년 사월 십일 임진일에 세종을 한양의 잠저에서 낳으셨는데, 네 살 되던 해에 왕후가 태종께서 세종을 안고 해 가운데 앉아 있는 꿈을 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께서 왕위에 오르고 세종이 다시 대통을 이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세종은 즉위 전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위의가 있었다. 대위에 오른 후로는 총명과 지혜가 우뚝이 뛰어났으며 너그럽고 부드러운 기품으로 백성을 용납하고 대중을 기르는 덕이 있었다. 물건을 제작할 때는 홀로 지혜를 내어 힘차고 굳센 의지를 발휘하였으니 두려워할 만하고 본받을 만하였으며 단엄하고도 중정하여 공경심을 갖게 하였다. 정의는 입신의 경지에 올라 사물의 이치에 대해 자세하고 명확한 변별력이 있었다.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동이 틀 때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본 다음 윤대하시고 경연에 납시었다가 내전에 든 뒤에도 글을 보는 등 조금도 게으름이 없으니 정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한 후로는 나랏일을 적당한 사람에게 맡겼다고 생각하여 산수의 취미를 즐겨 자주 교외로 놀이를 나가 유쾌히 지냈다. 가끔 근신에게 이르기를, “밝은 임금을 얻어 국정을 맡겼으니 천하에 나처럼 근심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찌 천하에 나 같은 이가 없을 뿐이리오. 고금을 통틀어서도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국정을 근심함이 깊었기 때문에 그 기뻐함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시월에는 내외 사찰의 노비를 혁파하여 모두 관으로 귀속시켰으며 이어서 오교를 혁파하고 선 · 교 양종만을 남겨 두니 이단의 종교가 크게 정비되었다.
경자년 봄에 비로소 집현전을 설치하고 학문에 밝은 선비를 뽑아 모아 고문에 응하게 하였다. 이해 여름에 원경왕후가 학질에 걸려 궁궐 밖으로 기피하였는데 왕후의 가마를 부축하여 따라 나가서 심지어는 노숙을 하며 약을 받들어 항상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칠월에 왕후가 승하하니 미음도 들지 않다가 태종께서 강권하고 나서야 조금 들을 정도였다. 신축년 팔월에 천자가 북정할 때 말 일만 필을 바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포장하고 은폐를 하사하였다. 구월에 태종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렸다. 임인년 오월에 태종이 승하하자 삼년 동안 최복을 입고 정사를 보았으며 이를 정하여 영세의 법으로 삼았다. 갑진년 가을에 명나라 태종 문황제가 승하하고 인종 소황제가 등극하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상사를 위로하고 등극을 하례함에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그러자 천자가 기뻐하며 지극한 충성에 대해 포장하고 채폐를 하사하였다. 을사년에 인종이 승하하고 선종 장황제가 등극하자, 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하례하였다. 선덕 병오년 봄에 천자가 왕의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고 폐백을 내렸는데 왕비에게까지 미쳤다. 이해 겨울에 다시 오경 · 사서 · 성리대전 · 통감강목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상으로 보내는 것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황제가 차고 있던 보옥으로 만든 띠 · 고리와 도검까지도 풀어서 보내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는 성균관에 거둥하시어 선성께 배알하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백성들이 항상 우리나라의 토산물이 아닌 금과 은을 해마다 명나라에 공물로 바치기 어렵다고 호소하자 친아우 공녕군 인을 보내어 사유를 갖추어 진술하니, 천자가 특별히 금과 은의 조공을 토산물과 대체해서 바칠 것을 허락하고 인에게 상사품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이해 겨울에 천자가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왕의 나라에 도착하거든 왕은 다만 예로써 대접하고 물건을 선사하지는 말라. 왕의 부자는 조정을 공경히 섬긴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해가 갈수록 더욱 공경히 섬긴다는 것을 짐이 깊이 알고 있는 바로서 좌우 근신들이 이간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또 칙서를 보내어 이르기를, “왕은 뛰어나게 어진 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파저강 등지의 야인이 다른 부락과 연합하니, 그들의 노략질을 당한 요동 · 개원 등 변방의 군민들 중에서 우리나라로 도망 온 사람이 오백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모두 북경으로 보내니 야인들이 분을 품어 우리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계축년 봄에 판중추원사 최윤덕과 중추원사 이순몽 등에게 명하여 야인들을 치게 하니 그 괴수 이만주 등이 새나 짐승이 달아나듯이 도망갔으므로 그들의 소굴을 헐어버리고 돌아왔다. 갑인년 봄에 또 선성을 배알하고 인재를 선발하였다. 삼월 병오일에 헌릉을 배알하니 감로가 송백에 내렸는데, 또 경복궁 후원의 소나무에도 내렸다. 이에 백관이 하례 드리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함길도 북문의 강을 끼고 있는 주군들은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로써 다 우리의 조종이 왕업을 일으킨 곳이다. 그동안 야인의 점령지로 있다가 이때에 비로소 회령 · 종성 · 온성 · 경원 · 경흥 등 여러 진을 설치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을묘년 봄에 명나라 선종이 승하하고 지금의 태상황제가 즉위하였으므로 표문을 받들어 위로하니 천자가 사신을 보내어 비단을 하사하였다. 정통 무오년 팔월에 다시 원유 관복을 하사하였다. 임술년 오월에 달달이 사람을 시켜 글을 가지고 우리의 북문에 이르렀으므로 변장을 시켜 불러서 타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왕이 없는 법이다. 이제 대명이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너희들이 어찌 부도한 말을 하는가.”라 말하고 끝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이 급히 이 사실을 북경에 상주하니 천자가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 갑자년 봄에 칙서를 보내 이르기를, “변방의 일을 효유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잘 따르고 받들어 어기거나 게으름이 없으니 왕은 어질도다.” 하고 특별히 곤룡포를 하사하여 은총을 표시하였다. 대마도와 일기도 등의 섬에 사는 왜적들이 명나라 연해의 땅을 침범하고 또 우리의 제주의 경내도 범하였는데 변장이 다 잡지 못하여 본도로 도망친 자가 있었다. 세종이 사람을 보내어 도주를 효유하여 잡아 보내게 하니 도주가 명을 받들어 모두 잡아서 보냈다. 이들을 북경으로 압송하여 처벌을 받게 하였는데, 이것이 전후 육십 여명에 이르렀다. 천자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칙서를 보내어 이르기를, “왕은 능히 선왕이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던 마음을 본받아 공순하고 정성스러움이 오랠수록 더욱 독실하므로 조정의 돌봄과 대우가 더욱 융숭하니 ‘군신이 한 마음이요 종시가 변함이 없다.’고 할 만하다. 이제 다시 변방을 침범한 왜적을 잡아 보내니 왕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뜻을 보겠고 아울러 변방을 지키는데 사람을 잘 써서 횡포를 막은 공이 있음을 알겠도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조정에서 착함을 아름답게 여기고 어짊을 중히 여겨 예로 대우하기를 융숭하게 하노니 덕이 있는 있는 사랑과 영화를 받는다는 말은 바로 왕에게 해당된다.”라고 하였다. 동량북에 사는 오랑캐 낭포야온두는 일찍이 자기 아비를 죽인 자인데 이 해에 우리나라에 와서 조공하였다. 세종께서 생각하기를, “대역의 죄를 진 사람은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요, 왕법으로 보아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동량북은 우리 국경에 가깝고 오랫동안 임금의 덕화를 받은 놈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 유사를 시켜 국경에서 찢어 죽이고 하교하여 야인들을 타이르니 야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을축년에 근심과 과로로 병을 얻자 금상 전하에게 명하여 정무에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병인년에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성운의 온갖 변화를 다 기록할 수 있게 하여 오랑캐와 중국의 모든 말을 다 옮겨 적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었으니, 그 제작의 정미함은 고금에 뛰어났다고 할 만하다. 무진년에는 원손 홍위를 봉하여 왕세손으로 삼았고 기사년 가을에는 금상 황제가 즉위하자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고 또 말을 보내 변방의 경비를 도왔고, 황제는 한림시강 예 겸과 형과급사중 사마 순을 보내어 폐백을 하사하였다. 우리나라는 명나라 태조 고황제 때에 구장 면복을 하사 받았는데 이는 품질이 친왕에 준하는 것이었다. 다만 왕세자께서 아직 면복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부족하게 여기던 중 세종께서 칠장 면복을 명나라에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세종은 효심이 지극하였다. 날마다 수강궁에 문안을 드릴 때면 기쁜 표정과 부드러운 얼굴을 했고 옥을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든 듯 조심하는 태도는 전대의 제왕이 미칠 수 없는 바였으며 상사와 제례를 당해서는 예와 정성을 극진히 하는 등 모두가 법도에 맞았다. 비빈 이하는 각각 그 분수에 맞게 은혜로 대접하니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여러 왕자를 마땅한 도로써 가르치니 적서와 존비에 따른 의장과 은수가 등급이 분명하였다. 모두들 학문을 좋아하고 이치에 통달하여 끝까지 교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한 습관이 없었다. 여러 왕자들이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을 때가 되면 실에 꿴 구슬과 기러기 줄처럼 나란히 들어가니 나라 사람들이 다 그 종사 · 인지와 같은 경사가 있음을 감탄하였다. 처음에 태종이 제(褆)를 외방으로 내쳤으나 세종은 무시로 불러 보셨고, 끝내 서울로 돌아오게 한 뒤 친애하여 거리낌이 없게 하였다. 이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옳지 못하다고 간언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두 형과 아우들을 대함에도 형제의 정을 다하였고 종실의 여러 친척들도 자주 만나 술을 내려 즐거움을 나누었고, 유복의 친척은 모두 재능에 따라 벼슬을 주고 촌수가 멀거나 벼슬하지 않고 있는 자에게는 호역을 면제하거나 세금을 감면하여 긍휼히 여겼으며 외척까지도 대우함이 또한 마땅함을 얻었다. 또 종학을 설치하여 태조의 자손으로서 종적에 들어 있는 자는 모두 글을 배우게 하였으니 교육의 방법이 지극하다 하겠다.
여러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되 능력 있는 자는 가상히 여기고 무능한 자는 불쌍히 여기니 중한 형벌을 받는 자가 없었으며 환관들에게는 엄숙하게 대하고 일의 권한을 맡기지 않았다. 사대의 예는 지성에서 우러나와 명나라에 바치는 문서와 방물은 모두 몸소 살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러 황제가 사랑하고 돌보아 물품을 하사한 것이 융숭하고 가상히 여겨 포장하는 말이 전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국이 보배를 바치고 야인들이 예물을 가지고 와 남에서 북에서의 사신이 끊이지 아니하여 높이고 친하고 감격하여 추대함이 심복에서 나왔다. 전주 · 출척법을 지극히 정밀하게 하여 제정하였고 이 때문에 요행으로 벼슬을 얻는 경우가 자취를 감추고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게 되었다. 수령이 배사할 때에는 직접 인견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를 하도록 타이르니 사람마다 스스로 힘썼다. 농상에 유의하여 책을 만들어 권유하고 몸소 밭가는 것을 살피고 농작물을 심으니 사람들이 농사짓기를 즐겨 하였다. 손실법의 폐단을 개혁하여 공법을 정하고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고 농사의 작황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서 이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게 하여 삼대의 공 · 철의 유법을 복구 시행하였다. 유사에게 명하여 종과 경쇠를 만들게 하여 율관을 불어 음을 조화시키니 아악이 일신되었다. 회례에 사용하던 여악을 처음으로 철폐하였으며, 또 조종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 · 여민락 등의 악장을 지으시니 소리와 의식이 지극히 아름답게 되었다. 당송악보를 만들어 느리고 빠른 음조를 고르게 하니 사람마다 악보만 있으면 악사가 아니라도 모든 악곡을 각각 바르게 다룰 수 있게 하였으니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다. 고금을 참작하여 「오례의」를 정하니 정과 문이 알맞게 갖추어 졌으며 처음으로 양로연의 예를 베풀어 남자 노인은 왕이 몸소 참석하고 여자 노인은 왕비가 친히 잔치를 치렀으며 지방에 있는 노인은 해당 수령이 직접 대접하게 하였다.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고 80이상의 노인에게는 작위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니 임금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재변을 당할 때면 하늘을 두려워하고 구황과 휼민에 마음과 힘을 다하는 등 모든 일에 실질을 힘쓰고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였고 각종 의상과 규표를 만들었으며 흠경각 · 보루각 등을 지었다. 혼상 성구정시의 · 앙부의 · 한양일출입분은 모두 몸소 제작한 것이다. 이로써 천문과 역수가 비로소 착오가 없게 되었다.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것은 풍속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며, 「명황계감」을 편찬한 것은 안일과 향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통감훈의」와「치평요람」을 편찬한 것은 역대의 흥망을 알게 한 것이요, 「역대병요」를 편찬한 것은 평화로운 때에도 전쟁에 대비하는 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밖에 의약 제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정하여 새롭게 하였다. 주자와 기리고의 따위도 어느 하나 유의하지 아니함이 없었다.「진설」을 지어 진법을 익히고 전함을 수리하고 화통을 더 제조하고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니 군비가 더욱 엄하여졌다. 법률이 분명하고 옥사를 처리함이 공평하자 형벌이 명쾌해졌고 술을 경계하고 형벌을 내리는 것을 가엾이 여겨 모두 교서를 내리어 관리들을 단속하니 이때를 당하여 비록 기예를 다루는 백공이라도 모두들 그 기능을 극도로 발휘하게 되었다. 상림원의 관리가 화기를 고루 갖추기를 청하자 하교하기를, “나는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유사는 마땅히 실질적인 것을 힘쓰라. 뽕나무와 닥나무, 과실수는 모두 일상생활에 긴요한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부터는 이러한 것으로 일을 삼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 하였다. 언젠가는 대신들에게, “옛날의 역사를 보면 태평한 시대에도 오히려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까지 극간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비록 조금 세상이 편안하다 하나 아직 옛날의 태평시대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감언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어쩐 일인가?”라고 하는 등 항상 마음을 터놓고 간언을 구하며 신하들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하였고 말이 비록 적합하지 않더라도 벌을 주는 일이 없었다.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대신들과 상의한 뒤에 처리하였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없었다.
경태 원년 경오년 봄 이월에 병이 드니 의원은 그 기술을 다하였고 신에게도 두루 빌었으나 끝내 효험이 없었다. 십칠일 임진에 별궁에서 훙하니 춘추가 오십 사세요, 왕위에 오른 후 삼십 삼년 만의 일이었다. 신하와 백성들이 크게 왕의 은택을 입어 모두들 “대덕은 반드시 수를 누리는 법이니 길이 만년을 누리실 것이다.”라 하였는데 문득 만백성을 버리시니, 아 슬프다. 대소의 신료로부터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실성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금상전하께서 유명을 받들어 재궁 앞에서 즉위하시고 거상의 예를 다 하시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책보를 받들어 영문예무 인성명효대왕의 호를 올리고 묘효를 세종이라 하였다. 이해 여름 유월 십이일 갑신에 영릉의 서실에 합장하니 이 또한 유명이었다. 명나라에 부고가 전해지자 천자가 매우 슬퍼하고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는 한편으로 고명으로 장헌의 시호를 내렸다. 우리 전하에게는 후한 부의를 내리고 왕위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곤면구장을 내리고 왕비에게는 관복을 주었다. 우리 전하에게 내린 고명에 대략 이르기를, “고 조선국왕 이모는 자애로운 은혜와 겸손한 태도가 있었으며 총명하고 특달하여 선을 즐기고 이치를 따라 조그마한 일에도 조심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상국을 섬기기를 꾸준히 정성스럽게 하였으므로 왕의 인후한 덕은 백성을 신복하게 하였고 공적은 변경에까지 드러났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왕과 같은 이는 드물었다. 그대 이모는 바로 왕의 세자로서 충효를 행함에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조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니 순서로나 덕으로나 왕위를 계승하기에 마땅하다. 오직 충성하고 효도하여 길이 부왕의 행적을 따르라.”라고 하였다. 대체로 우리 세종의 거룩한 덕이 사해에 빛나서 천조에 알려졌기 때문에 생전의 영예를 받음과 사후의 애도를 받음이 이토록 지극하였던 것이다. 아, 훌륭하도다.
왕후의 성은 심씨로 청송의 이름난 집이다. 증조 휘 용은 고려시대에 문하시중 청화부원군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덕부는 고려 공민왕을 섬기어 두 번이나 문하시중이 되었고 우리 공정왕조에 이르러 문하좌정승이 되어 청성백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휘 온은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어머니 안씨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는데, 영돈녕부사 천보의 딸이다. 후비는 나면서부터 착하고 아름다웠으므로 태종이 가려 뽑아 들여 빈이 되어 경숙옹주에 봉하였다. 양궁을 공경히 섬기어 두터운 은총을 받았고, 이어 세종이 왕세자로 봉해지자 후는 경빈으로 봉해졌고 세종이 즉위하자 후비는 공비에 봉해졌다. 선덕 임자년에 예관의 건의에 따라 공이라는 미칭을 버리고 왕비로 고쳐 봉하였다. 왕후는 정숙한 덕이 있어 세종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왕후가 나고 들 때면 반드시 기립하여 깊이 경례를 표하였다. 왕후는 빈첩들을 접대하거나 아래로 시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를 베풀었으며 서출들도 모두 자기의 소생과 같이 여기어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때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가 살펴보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왕에게 경계를 드리는 내조는 있어도 사사로이 청탁하는 일은 없었다. 궁중이 바르니 덕화가 나라에 흘러 아득히 태사의 유풍을 추급하였다. 정통 병인년 봄에 병을 얻으니 세종께서 몸소 밤낮으로 돌보고 우리 전하께서는 곁에 모시어 탕약을 받들었으나 삼월 이십 사일 신묘에 훙서하시니 향년 오십 이세였다. 시호를 소헌이라 하고 칠월 일구일 을유에 영릉의 동실에 장사지냈다.
왕후는 팔남 이녀를 낳으시니, 큰아들은 바로 금상전하이고 차남은 세조로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셋째는 용이니 안평대군이요, 넷째는 구이니 임영대군이요, 다섯째는 여이니 광평대군인데 먼저 죽었다. 여섯째는 유이니 금성대군이요, 일곱째는 임이니 평원대군인데 이 또한 먼저 죽었다. 여덟째 염이니 영응대군이다. 장녀는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 정소공주라 증하고, 차녀는 정의공주로서 연창위 안맹담에게 하가하였다. 신빈 김씨는 여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회이니 계양군이요, 차남은 공으로 의창군이요, 셋째는 침으로 밀성군이요, 넷째는 운으로 익현군이요, 다서째는 장으로 영해군이요, 여섯째는 거로서 담양군인데 복중에 죽었다. 혜빈 양씨는 세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오이니 한남군에 봉하고 차남은 현이니 수춘군이요, 셋째는 천이니 영례군에 봉하였다. 숙원 이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정안옹주로서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다. 상침 송씨는 딸 하나를 낳았는데 정현옹주로서 영천위 윤사로에게 하가하였고 궁인 강씨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영으로 화의군이다. 우리 전하의 현덕왕후 권씨는 증의정부좌의정 전의 따님으로 1남1녀를 낳고 훙서하였다. 아들 홍위는 현재 왕세자로 있고 딸은 경혜공주로 영양위 정 종에게 하가하였다. 사칙 양씨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수양대군은 증좌의정 윤 번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덕종이니 도원군이요, 나머지는 어리고 측실 박씨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안평대군은 증좌의정 정 연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우직이니 의춘군이요, 차남은 우량이니 덕양정이다. 임영대군은 증우의정 최승령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주는 오산군이요, 나머지는 다 어리다. 광평대군은 첨지중추원사 신자수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보로서 영순군이다. 금성대군은 증좌의정 최사강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평원대군은 증좌의정 홍이용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영응대군은 증좌의정 정충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화의군은 승정원 동부승지 박중손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측실 김씨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계양군은 판중추원사 한 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고, 의창군은 부지통례문사 김 수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한남군은 호조정랑 권 격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직 어리고 밀성군은 인순부 소윤 민 승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수춘군은 부지통례문사 정 자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익현군은 예빈시 소윤 조철산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영풍군은 사헌부 집의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영해군은 증좌찬성 신윤동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정의공주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승 정광조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정현옹주는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며 의춘군은 우의정 남 지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조화의 미묘함은 사물에 나타나고 성인의 마음은 정사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세종께서는 생지의 성인으로서 중용의 법도를 세워 인륜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고 선왕을 잘 계승하여 제왕의 효도를 다 하였다. 구족이 이미 화목하고 온 백성이 다 화평하고 모든 일이 다 조화를 이루니 대왕의 명성이 나라에 가득하였다. 천자는 그 충성되고 어짐을 포장하여 베풀어 주는 것이 많았고 이웃나라에서는 왕의 정성과 믿음에 감복하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며 서로 잇달아 찾아 왔다.
신은 시종한 것이 십년이고 정부와 육조에 출입하여 이십 여년 동안 성덕을 가까이서 모셨다. 참으로 지극히 광대하시어 정미함을 다하였고 매우 고명하며 중용을 말미암았으니 실로 동방의 요순이라고 할 수 있다. 소헌왕후는 곤후의 덕으로서 임금의 배필이 되어 한 나라에 국모로서 모범을 보이니 덕화가 사방에 미치었으며 또 다남의 경사가 있었다. 우리 전하를 낳으시니 성덕이 있어 대통을 이었다. 그 위에 어관의 사랑을 이루시며 종우와 같이 자손이 많았다. 참으로 하늘이 내신 배합으로서 주나라 태사와 짝할 만하다. 신은 필력이 보잘 것 없어 성덕을 칭송하기에 부족하니 천지의 큼을 그림으로 그리고 일월의 밝음을 칭찬하려는 것과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명을 받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바친다.
순임금은 요임금 이어받아
참으로 합당하게 거듭 빛냈고,
무왕은 문왕을 이어
왕업을 잘도 창성케 했네.
덕이 훌륭한 이는 제가 되고,
공이 높은 이는 왕이 되네.
빛나는 문채 있어
성덕을 주셨구나.
어진 이에 전하고, 아들에게 전하는 건
실로 하늘의 명함이요.
혹은 선위하고 혹은 계승함은,
오직 공심이지 사심 아니네.
생각건대 우리 세종은 하늘이 내신 성인이라,
효제의 성품이요 충신의 자질이네.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니,
주공의 뜻이요.
공자의 생각 밝고 밝은 태종은
미묘하고도 깊으셨네.
어두운 이 폐하고 덕 있는 이 가리시니,
요임금과 문왕의 마음이었네.
천자의 조정에 이를 아뢰니
황제도 이를 허락했네.
얼마 후 정사에 지치게 되니,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었네.
천자가 책명을 내리자
사신이 드디어 이르렀고,
천자가 연회를 내려 주시어
주행을 보이셨네.
도가 그 몸에 쌓이어
총명하고 슬기로워라.
이른 새벽 일어나고 밤늦게 잡수시며
정사에 힘쓰시어,
받은 책임 능히 하니
부왕이 기뻐했네.
양궁을 즐겁게 모시며
항상 기쁜 얼굴이었고,
용루에서 문안드릴 때
더욱 정성되고 공손하였네.
상사에는 슬픔을 다 하고
제사에는 정성을 다하시니,
하늘이 감로를 내리어
그 신령함을 밝히었네.
궁중에선 화락하여
은혜가 치우침이 없었고,
가법이 바르니
남들이 이간할 수 없었네.
큰 형이 지방에 나가 있으니
자주 불러서 만났고,
얼마 후 서울로 불러 들여
우애가 더욱 두터워졌네.
마음으로 우애하니
형제간에 화합했네.
어울려 함께 즐겨하니
형제 모두 빛나도다.
구족까지 두루두루
은택이 미쳐갔네.
자손들은 번성하여
의좋게 모여 살고
의방으로 가르치니,
서를 읽고 시를 외네.
등급이 분명하매
적서가 분수 알고
뭇 신하 예우하여
형벌을 쓰지 않았네.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니
천자가 포상했네.
무엇을 주셨는가
조환과 보도로세.
또 무엇을 주었는가
용을 수놓은 곤룡포라.
예로써 이웃 나라를 대하니,
이웃나라와 조화 이뤄
산 넘고 물 건너
예물 들고 찾아오네.
먼 나라가 한집 같네.
백성이 잘 살고 번성해지매
인의로 차츰 교화했네.
인에 그치고 효에 그치고
공경에 그치고 믿음에 그치셨네.
중을 세우고 화를 이루니
인륜이 밝아져 요순의 시대였네.
임관하는 법이 바르고 분명하니
요행이 사라지고,
어진 이에게 직책주고 능한 이를 부리니
일마다 모두 알맞았네.
전제를 살펴 정하니
아전의 농간 줄었고
걸처럼 아니 하고 맥처럼 아니 하니
세금이 타당하였네.
서둘러 의상을 만드신 다음
율력을 정하였고 오례를 조절하니
감정과 예의가 법에 맞았네.
악성과 의식을 새롭게 하여
조종의 공덕을 칭송하였네.
연회에 처음으로 아악을 쓰고
여악을 물리쳤고,
양로연 몸소 참석하여
가을로써 정식을 삼으셨네.
경사를 편찬하여 득실 살펴 거울삼고,
훈민정음 제정하여 누속을 씻으셨네.
공물은 토산만 하도록 천자가 윤허하고,
세자에게 칠장면복을 나리니 온 나라가 영광이었네.
베푸신 모든 것들 후손에게 전할 만했네.
북방에 진을 설치하니, 옛 강토 되찾았고
위엄과 덕이 멀리 미치니 모두가 복종 하였네.
군사가 북으로 향하매 적의 추장이 숨을 몰아쉬었네.
곧바로 소굴을 치니 스스로 전복되고
글월 한 장 남으로 보내니, 왜놈들이 항복하매
명나라로 보내어 벌 받게 하였네.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 잊지 않았고,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운 것을 잊지 아니하여,
험한 곳에 성과 보루를 쌓고 창과 칼을 준비 하였네.
전함을 새로 만드시니
견고하기 쇠인 듯 돌인 듯 대포를 쏘아대니,
빠르기 번개 같아 군자(軍資)와 기계는 전보다 훨씬 뛰어났네.
호생의 마음으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니,
형벌이 공평하여 억울한 이가 없었네.
백공의 기예들도 모두 다 법도에 맞춰서
완호를 싫어하고 실질을 중시 하였네.
더욱더 겸손하여 바른 말 듣기를 목마른 듯하였네.
높고 높은 덕이요 빛나는 문채로세.
표현할 길 없는 위대함과 비길 데 없는 공이로다.
우 · 주와 짝하겠고, 한 · 당대에는 없었던 일
서른하고 세 해 동안 부모 되고 임금 되시었네.
하늘이 이 백성을 돌보지 아니 하여,
문득 신민을 버리었네.
원근이 비통에 잠겨 부모처럼 슬퍼하였네.
우리 임금 보위를 이으니 타고난 효성이시라
밝음으로 밝음을 잇고, 성인으로서 성인을 이으셨네.
장사와 제사의 모든 제도 유명을 다 따르셨네.
천자가 조상을 하니 제수와 제문이라
행적 살펴 이름 정하여 좋은 시호 내리셨고,
부의도 후히 보내 은전을 베푸셨네.
왕작을 잇게 하고 면복을 내리셨네.
왕비께도 하사하니 주관(珠冠)과 유적(䄖翟)이네.
천자의 은혜가 참으로 두텁도다.
생각건대 우리 왕후 하늘나라 아씨인 듯
왕가에 시집와서 궁중 정위 앉으시니,
태사의 덕으로 문왕의 짝이로다.
성주를 낳으시니 나라 운수 성하도다.
많은 아들 두시어 인지를 읊었도다.
참으로 우리 동방의 억만 년 경사로세.
아아, 선왕께서 거울 잃음을 탄식하시더니,
다섯 돌도 채 못 되어 홀연히 떠나셨네.
검소하게 능 만드니 같은 궁에 실만 다르네.
우러러 일각을 생각하니 오장이 찢어지는 듯 아프네.
생각건대 왕의 성덕 만대토록 영원하리.
대강을 삼가 적어 명사(銘詞)를 드리옵나니,
하늘처럼 땅처럼 영원토록 빛나오리.
世宗大王英陵神道碑
英陵神道碑銘 幷序
堯舍丹朱而禪舜 舜有重華之德 而堯之仁 益以遠 文王舍伯邑考而立武王 武王有丕承之烈 而周之業 益以昌 孔子曰 唐虞禪 夏后殷周繼 其義一也 一者 謂皆無私心也 我太宗之禪位也 其堯文之心乎 我世宗之受禪也 其舜武之德乎 太宗之在位也 早建元子褆 爲世子 擇賢師友 以盡敎養之方 世子有童心 學不就 德不進 太宗深以爲憂 永樂戊戍六月 世子失德滋甚 太宗欲立嫡孫爲嗣 大臣等進曰 殿下敎養世子 無所不至 尙且如此 今立幼孫 寧能保異日之賢乎 況廢父立子 於義如何 莫若擇賢爲嗣 時世宗 以世子母弟 次居第三 會封忠寧大君 太宗曰 忠寧最賢諸子中 宜立之 乃立爲世子 宗親文武百官拜賀 中外洽然稱頌 遂以奏聞天子 勅曰 立嫡以長 今古不易之常道 然嗣子之賢不肖 國之盛衰存亡係焉 王爲國家長久之慮 鑑盛衰存亡之機 欲立賢爲嗣 聽王擇焉 是年八月 太宗禪位于世宗 遣使請命 十一月 世宗奉寶 上太宗奠號聖德神功上王 明年己亥春正月 天子遣鴻臚寺丞劉泉 封世宗爲王 六月 天子勅太宗曰 比以第三子 孝弟力學 可以繼承宗祀 且自陣年老 請襲以位 朕惟王識見明達 特允所請 夫繼世在於有後而傳序在於得人 今王簡賢命德 俾宗祀有托 以副國人之所望 良用嘉悅 賜王宴享 不惟王一家之慶 且爲王一國人之慶也 又勅世宗 勸勉以忠孝之道 仍賜宴享 八月使到國 兩聖受宴于景福宮之勤政殿 禮樂之盛 聳動一國 初元敬王后 以洪武丁丑四月十四日壬辰 生世宗於漢陽潜邸 四歲而王后夢 太宗抱世宗 坐於日輪中 未幾 太宗登寶位 而世宗又承大統 天之命有德 豈偶然哉 世宗自在閤 天性好學 手不釋卷 沉默寡言 有穆穆之容 又即大位 聰明睿智 則首出庶物之聖 寬裕溫柔 則容民畜衆之德 制物獨運 而有發强剛毅之執可畏可象而有齊莊中正之敬 精義入神 而有文理密察之別 每日四鼓求衣 平明受朝 次視事 次引輪對 次御經筵 乃入內 猶覽書史 無少懈 於是 政無不擧 事無不治矣 太宗旣傳位 自念付托得人 樂山水之趣 屢出遊郊牧以自怡 閑謂近臣曰 得明主 委國政 無憂者 天下無如我也 豈惟天下無如我者 古今亦無如我也 盖其憂之也深 故其喜之也如此 冬十月 盡革中外寺社奴婢 皆歸于官 尋罷五敎 止留禪敎兩宗 於是 異端之敎 闢之廓如也 歲庚子春 始置集賢殿 選聚文學之士 備顧問也 是夏 元敬王后遘痁 避忌于外 掖輦徒步 至有露宿 奉藥常不離側 七月 王后薨 水漿不進 太宗强之 乃小進 辛丑八月 天子北征 進馬萬匹 天子褒美 賜以銀幣 九月 上太宗太上王之號 壬寅五月 太宗薨 致喪三年 服衰行事 定爲永世之法 甲辰秋 太宗文皇帝崩 仁宗昭皇帝登極 奉表進慰 稱賀盡禮 天子喜獎忠懇 賜以彩幣 歲乙巳 仁宗崩 宣宗章皇帝御極 又遣使慰賀 宣德丙午春 天子稱嘆至誠 賜幣 以及王妃 是年冬 又賜五經四書性理大全通鑑綱目等書籍 自是賞賚 無歲不到 至解所御寶裝絛環及刀劍以賜之 己酉夏 幸成均館 謁先聖取士 國人 常患金銀非土產而朝廷歲貢難繼 乃遣親弟恭寧君裀 具由陳請 天子特許免進 代以土物效誠 賞賜裀甚厚 是年冬 天子勅曰 朝廷所遣人等 至王國中王但以禮待之 母贈遺以物 王父子 敬事朝廷 多歷年所 愈久愈篤 朕所深知 非左右近習所能間也 又勅曰王可謂卓然賢王者矣 先是 婆猪江等處野人 與他部落連結 其所擄掠遼東開原邊境軍民逃至我國者 五百餘名 悉皆解送京師 野人懷憤 犯我北邊 癸丑春 命判中樞院事崔潤德 中樞院使李順蒙等 徃伐之 其酋李滿住等 鳥竄獸奔 覆其巢穴而還 甲寅春 又謁先聖 取士 三月丙午 謁獻陵 甘露降于松柏 又降于景福宮後園松樹 百官請陳賀 不受 咸吉道北門沿江州郡 本高麗舊疆 我祖宗興王之地也 而爲野人所據 始置會寧鍾城穩城慶源慶興等諸鎭 盡復其舊 乙卯春 宣宗崩 今太上皇帝踐阼 奉表陳慰 天子遣使 賜錦段 正統戊午八月 又賜遠遊冠服 壬戍五月 達達使人賚書 至我北門 招諭邊將 語之曰 天無二日 民無二王 今大明統一天下 汝何發不道之言 遂拒不納 世宗馳奏京師 天子嘉悅賞賜 甲子春 勅曰 所諭邊事 悉能遵奉 罔有違怠 王其賢哉 特賜袞龍袍以寵異之 對馬一岐等島賊倭 侵竊上國沿海之地 又犯我濟州之境 邊將擒捕未盡 有稍稍逃竄本島者 世宗使人諭島主捕送 島主俯伏奉命 悉索執送 歸之于京師 以即天誅 前後凡六十餘名 天子深嘉之 勅曰 王克體爾先王敬天事大之心 秉恭擄誠 久而彌篤 肆朝廷眷待益隆 可謂君臣一心 終始靡間者矣 茲復械送犯邊賊倭 足見王體國安民之意 亦以見守邊得人 而有禦暴之功 又曰 朝廷嘉善重賢 禮遇優加 所謂德厚者寵榮 王其有焉 東良北住兀良哈浪甫也隱豆 會弑父者也 是年來朝 世宗以爲大逆之人 天地所不容 王法所不赦 東良北 密邇我境 久霑王化 不可不誅 令有司 轘於境上 下敎諭野人 野人等皆震慴 乙丑 以憂勤得疾 命今上殿下 叅決庶務 丙寅 創制訓民正音 以盡聲韻之變 蕃漢諸音 譯無不通 其制作精微可謂超出古今矣 戊辰 封元孫弘暐 爲王世孫 己巳秋 今上皇帝 臨御天下 奉表陳賀 又進馬以助邊備 帝遣翰林侍講倪謙刑科給事中司馬恂 賜以幣帛 我國 自太祖高皇帝賜以九章冕服 秩視親王 惟王世子 末有冕服 國人咸以爲慊 世宗奏請七章冕服 竟蒙兪音 世宗至孝 日朝壽康宮 愉色婉容之愛 執玉奉盈之敬 前世帝王之莫及 其遇喪祭 盡禮極誠 咸中法度 妃嬪以下 恩待各盡其分 無有間言 敎諸子以義方 嫡庶尊卑 儀章恩數 粲然有等 皆好學達理 終無驕惰奢華之習 每朝夕定省 珠璧相聯 鴈行而入 國人咸嘆其有螽斯麟趾之慶 初太宗 放褆于外 然世宗 召見無時 卒使還京 親愛無嫌 群臣堅執不可 不聽 事二兄 待諸弟 盡其友于之情 宗室諸親 亦數會見 置酒以成歡洽有服之親皆隨材授職 疏遠在野閑居者 亦復戶蠲稅 以存恤之 至於外戚 待之亦得其宜 又置宗學 太祖之孫 凡尸宗籍者 皆令受學 敎養之道 至矣 禮遇群臣 嘉善而矜不能 無受刑戮者 如宦寺之輩 莊以莅之 不任事權 事大之禮 出於至誠 凡所進獻文書方物 莫不親自監檢 所以列聖寵眷錫予之隆 褒美之辭 前昔無比 倭邦獻琛 野人執贄 自南自北 絡繹不絕 尊親感戴 出於心服 立銓注黜陟之法 至精至備 僥倖屏迹 賢良進用矣 守令拜辭 引見面諭 恤民之政 人人自勵矣 致意農桑 作書勸諭 省耕觀稼 人樂趨本矣 革損實之幣 定爲貢法 分地六等 分年九等 以上下其稅 復三代貢徹之遺法 命有司 鑄鍾造磬 吹律恊音 而雅樂一新 會禮始不用女樂 又述祖宗功德 作定大業與民樂等 樂極其聲容之美 作唐俗樂譜 以均慢數之調 則人人接譜 不煩師學 而諸樂 各得其正 亦前昔之所未有也 參酌古今 定五禮儀 盡其情文之備 始設養老宴禮 男則親臨 女則王妃親饗 在州郡者 守令親饗 百歲以上者 月致酒肉 八十以上者 賜爵有差 於是 恩無不及矣 遇災畏天 救荒恤民 盡心盡力 則皆以實而不以文矣 修七政內外篇 作諸儀像圭表及欽敬報漏等閣 而渾象星晷定時儀仰釜儀漢陽日出入分 皆自創制 於是 天文曆數 始無差失焉 撰三綱行實 則礪風俗也 作明皇戒鑑 則防逸樂也 修通鑑訓義治平要覽 則監興亡也 集歷代兵耍 則不忘戰也 以至醫藥諸書 亦皆校正如新鑄字記里鼓之類 又無所不致其意也 作陳說 閱習陳法 益修戰艦 增制火桶 城廓修甲兵鍊而武備嚴 法律明讞獄平而刑罰淸 戒酒恤刑 皆下敎書 戒飭官吏 當是時 雖百工技藝 咸精其能 上林園官 請備花器 敎曰 予性不喜花卉 有司當務實 桑楮果木 皆切於日用 汝等 自今以後 以此爲職 可也 嘗謂大臣曰 歷觀往昔 太平之世 尚有牽裾切諫者 今雖小康 未及於古 未見有見有敢言者 何也 常開懷求諫 務使盡言 言雖不中 未嘗罪之 事無大小 必與大臣謀而後行 故無有過拳 景泰元年庚午 春二月 不豫 醫盡其術 禱徧于神 終未効 十七日壬辰 薨于别宮 春秋五十四 在位三十三年 臣民沐浴恩澤 咸謂 大德必得其壽 永享萬年 而奄棄萬姓 嗚呼慟哉 大小臣僚 以至輿臺僕隷莫不失聲號哭 今上殿下 奉遺命 即位于梓宮之前 諒闇盡禮 率群臣 奉冊寶 上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之號 廟號世宗 夏六月十二日甲申 合葬于英陵之西室 亦遺命也 訃聞 天子慟悼 遣使賜祭 又賜誥命 諡以莊憲 賜我殿下賻特厚 仍襲封王爵 錫以袞冕九章 王妃冠服 其賜我殿下誥命 略曰 故朝鮮國王李某 慈惠謙恭 聰明特達 樂善循理 纎毫能謹 敬天事上 終始一誠 仁厚孚於國人 功烈著乎邊境 自朝鮮有國以來 罕有如王者也 爾李某 乃其世子 忠孝有誠 敬愼不懈 以長以賢 宜膺傳襲 惟忠惟孝 以永率乃父之行 蓋我世宗盛德 光于四海 升聞于天 故終始哀榮之典 如此之至 嗚呼盛哉 王后姓沈氏 靑松世家 皇會祖諱龍 高麗贈門下侍中清華府院君 皇祖諱德符 事高麗恭愍王再爲門下侍中 至我恭靖王朝 爲門下左政丞 封靑城伯 皇考諱温 領議政府事 封靑川府院君 皇妃安氏 封三韓國大夫人 領敦寧府事天保之女 后生而淑媛 太宗妙選來嬪 封敬淑翁主 敬事兩宮 篤承恩眷 世宗封王世子 后封爲敬嬪世宗即王位 后封爲恭妃 宣德壬子歲 從禮官言 去美稱 改封王妃 后有幽閑貞靜之德 世宗在潜邸 后之進退 世宗必起立 深加敬禮 接嬪媵 下至侍妾 皆有恩 視庶出子 皆如己出 撫愛有加 御膳進 則必親臨省視 以盡誠敬 有進戒之助 無私謁之行 壼儀克正 化流邦國 遠追太姒之風 正統丙寅春 遘疾 世宗日夜臨視 我殿下侍側 奉湯藥 三月二十四日辛卯 薨 享年五十二 諡昭憲 七月十九日乙酉 安厝于英陵東室 后誕八男二女 長即今上殿下 次世祖 封首陽大君 次瑢安平大君 次璆臨瀛大君 次璵廣平大君 先卒 次瑜錦城大君 次琳平原大君 亦先卒 次琰永膺大君 女長未笄而卒 贈貞昭公主 次貞懿公主 下嫁延昌尉安孟聃 愼嬪金氏 生六男 長璯桂陽君 次玒義昌君 次琛密城君 次璭翼峴君 次璋寧海君 次璖潭陽君 在服中而卒 惠嬪楊氏 生三男 長封漢南君 次玹壽春君 次瑔永禮君 淑媛李氏 生一女 貞安翁主 未笄 尚寢宋氏 生一女 貞顯翁主 下嫁鈴川尉尹師路 宮人姜氏 生一男 瓔和義君 我殿下顯德王后權氏 贈領議政府左議政專之女 誕一男一女而薨 男弘暐 今封王世子 女敬惠公主 下嫁寧陽尉鄭悰 司則楊氏 生一女 幼 首陽娶贈左議政尹璠之女 生二男一女 長德宗桃源君 餘幼 側室朴氏 生一男 幼 安平娶贈左議政鄭淵之女 生二男 長友直宜春君 次友諒德陽正 臨瀛娶右議政崔承寧之女 生二男二女 長澍鳥山君 餘皆幼 廣平娶僉知中樞院事申自守之女 生一男 溥永順君 錦城娶贈左議政崔士康之女 生一男 幼 平原娶贈左議政洪利用之女 無子永膺娶贈左議政鄭忠敬之女 和義娶承政院同副承旨朴仲孫之女 側室金氏 生一男 幼 桂陽娶判中樞院事韓確之女 生一男 幼 義昌娶副知通禮門事金修之女 生一男 幼 漢南娶戶曹正郎權格之女 生一男 幼 密城娶仁順府少尹閔承序之女生一男 壽春娶副知通禮門事鄭自濟之女 生一男 翼峴娶禮賓少尹趙鐵山之女 永豊娶司憲執義朴彭年之女 寧海娶贈左賛成申允童之女 貞懿公主 生四男二女 女長適敦寧府丞鄭光祖 餘皆幼 貞顯翁主 生二男 皆幼 宜春娶右議政南智之女臣窃惟化工之妙 著於物 聖人之心 著於政 惟我世宗 以生知之聖 建中建極 爲人倫之至 善繼善述 闡帝王之孝 九族旣睦 萬姓咸和 庶務畢諧 聲名洋溢 天子褒其忠賢 錫予實繁 隣邦服其誠信 梯航相繼 臣侍從十年 出入政府六曹二十餘年 親近耿光 信乎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實東方之堯舜云 昭憲王后 以坤厚之德 配乾剛之聖 母儀一國 化彼四方 且有多男之慶 生我殿下 有聖德以承大統 又致魚貫之寵 有螽羽之多 信乎天作之合 而與周之太姒 匹休云 臣筆力蕪拙 不能稱頌盛美 不幾於書天地之大 譽日月之明者乎 然承命不敢辭 謹拜手稽首而獻 銘曰 舜承帝堯 重華允恊 武繼文王 克昌大業 德盛而帝 功高而王 煥乎有章 載錫耿光 與賢與子 天實命之 或禪或繼 惟公匪私 惟我世宗 天縱生知 孝弟之性 忠信之資 好學不倦 周情孔思 明明太宗 惟幾惟深 廢昏命德 堯文之心 敷奏天庭 帝降兪音 旋倦于勤 乃禪以位 天子錫命 皇華聿至 天子錫宴 周行是示 道積厥躬 聰明睿智 宵衣旰食 勵精圖理 克承負荷 父王以喜 奉歡兩宮 愉色婉容 問寢龍樓 益虔益恭 喪盡其哀 祭盡其誠 天降甘露 式昭厥靈 在宮雝雝 罔有徧恩 家法克正 人無間言 伯兄居外 來見源源 旣而召還 敬愛彌敦 因心則友 斯翕弟昆 其湛曰樂 華萼相輝 以及九族 恩澤覃施 振振子孫 詵詵螽斯 敎以義方 讀書誦詩 儀章有等 嫡庶咸宜 禮遇群臣 刑戮不加 至誠事大 天子褒嘉 何錫予之 絛環寶刀 又何予之 袞龍之袍 以禮交隣 隣邦輯和 梯航執贄 萬里一家 民旣富庶 仁義漸摩 止仁止孝 止敬止信 建中致和 人倫堯舜 銓注法精 僥倖屏迹 任賢使能 各當其職 田制旣定 猾吏手縮 不桀不貊 征歛無忒 首作儀像 次定律曆 五禮損益 情文之極 新樂聲容 祖宗功德 會用雅樂 始斥女樂 親臨養老 秋以爲式 撰集書史 監觀得失 訓民正音 一洗陋俗 貢許土宜 天子有勅 世子七章 光生一國 凡所施爲 無非燕翼 建鎮朔方 舊疆是復 威德遠被 無思不復 偏師指北 戎醜喙息 直搗巢穴 彼自顚覆 尺書下南 倭奴面縛 歸之京師 俾就顯戮 安不忘危 治不忘亂 城堡據險 戈予乃鍛 戰艦新造 堅如鐵石 火桶發機 疾若霹靂 軍資器械 遠邁前昔 好生之心 益致欽恤 刑罰平允 人無負屈 百工技藝 咸底于則 不喜玩好 務從質實 愈執謙遜 求言如渴 巍巍之德 郁郁之文 難名之盛 莫大之勳 虞周與儔 漢唐無聞 卅三年間 爲父爲君 昊天不吊 奄棄臣民 遠邇纒悲 哀慕如親 我王嗣位 至孝由性 明以繼明 聖以繼聖 山陵喪制 悉遵遺命 天子致弔 賜祭誄行 節惠定名 美諡以贈 厚賻亦至 恤典斯飭 俾襲王爵 錫之冕服 賚及王妃 珠冠䄖翟 天子之恩 實優實渥 恭惟王后 俔天之妹 來嬪王家 正位乎內 大姒之德 文王之配 篤生聖主 鴻基益競 即有多男 麟兮播詠 實我東方 億載之慶 於戲先王 嘆興亡鑑 星未五周 忽遺弓劍 因山爲陵 同宮異室 仰思日角 五內痛裂 惟此盛德 萬代如一 謹撰梗槩 拜獻銘詞 天長地久 焜燿無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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