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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원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
● 고려대학교 대학원(사회윤리전공)
● 숭실대학대학원(사회사업전공)
● 미국 Houston 신학대학원 Trinity 대학교 대학원 선교학 전공
● Pansacola 신학대학원 철학박사 과정이수 ● Unit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 박사 과정 수료(D.miss,cand)
● 본교 교목실장, 상담실과, 신학과장 역임 ● 現 선교학 교수와 성결신학연구소장
▣ 저서와 논문 ▣
◉ 『개혁신학과 경제윤리』한국 개혁신학회 논문집 제6집 1999.
◉ 논문 제목 : 한국 태고종과 성결 교리 비교 연구
그 외 다수 등.
◈ 열매가 있는 삶 (요 15:1-8)
◈ 정상에 오른 기독교인 (벧전 3:8-17)
열매가 있는 삶
요 15:1-8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유대인들의 사랑 받는 나무가 바로 포도나무였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아마 가장 약하고 시들하고 보잘것없는 나무일 것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집 짓는 재목이나 성전을 짓는 기둥이나 제단의 불로도 사용할 수 없는 크게 사용가치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약하고 약한 나무가 포도주를 만드는 데는 좋은 원료가 됩니다. 그 포도나무는 과실을 생산할 수 있으므로 다른 여느 나무보다 아낌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사 5:1-7)이나 포도나무(고전 2:21, 계 19:10)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에서 말하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라고 했고 또 우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요, 예수는 참 포도나무, 그리스도인은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포도나무와 관련해서 ‘열매가 있는 삶’이란 제목으로 서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포도나무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가지는 항상 나무에 붙어 있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가지 혼자서는 아무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가지의 기능은 원목에서 전하는 양분을 받아, 열매를 맺는 것이 가지의 기능입니다. 다시 말하면 포도가지는 그 스스로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포도가지가 먹기 위해서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닙니다. 포도가지의 사명은 따로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자기를 위하여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먹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잘나서, 똑똑해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을 도구로 삼아 이방인들을 구원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시키려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내재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단순히 인간인 우리를 즐겁게 살라고 보내신 것만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선교하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지의 본래의 기능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2절). 이 말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사명을 잘 수행을 못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잘라버린다는 것은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이 있습니다. 혹시 사명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빨리 찾아야 합니다. 찾았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십분 발휘해야 되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징벌을 부여할 것입니다.
2. 주님께서는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할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 가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13절 이하를 보면,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에 Uiddush ha shom이라고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준행함으로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레위기 22장 32절에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하지말고 나도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아람인으로부터 낙타 한 마리를 샀습니다. 집에 와보니 목 주변에 보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인들이 강도 만날까 두려워 낙타 목에 보물을 숨겼다고 합니다. 횡재를 한 그 유대인은 나는 낙타를 샀지 보석을 사지 않았다고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합니다.
2.) 주님은 제자의 노릇을 함으로 열매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되는 길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주님처럼 우리가 주의 사랑을 알았으니, 사랑 받은 우리가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그제야 우리가 주의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준 사랑은 편견과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과부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3. 주의 성품이 속에 형성될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많은 과실을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깨끗한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요 15:2). 헬라어 ‘카타리죠’는 청소 또는 정화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문둥병을 고칠 때도 같은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마음이 썩고, 혼합되고, 불순하고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장군이었지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칭찬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인 사울왕이나 패륜아 압살롬을 사랑할 수 있던 넓은 마음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불순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의 장수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심히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기의 죄과를 깨닫고, 시 51편 7절에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깨끗한 마음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창조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 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창조에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모양이나, 노력과 수단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속에 선과 악이 꿈틀거린다고 탄식한 것이 로마서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롬 7:19-25).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재창조의 기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은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의 거룩하라고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말씀을 통하여 변화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끊는다는 것은 고통이 따릅니다. 유대인의 할례도 난지 8일만에 합니다. 그러나 필요없는 가지나 죽은 가지는 잘라버려야 원줄기와 열매가 잘 자랍니다. 우리는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쁜 습관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Pascal은 “습관은 인간의 제 2의 천성이며, 그것은 제 1의 천성도 파괴한다”. 스페인 격언 “습관이란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약하나, 나중에는 쇠사슬처럼 강하다”. 사도 바울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연극을 맡은 분들은 외모뿐만 아니라 실제 인물의 습관 사상까지 연구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외모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내적으로 예수와 더불어 살고, 예수의 성품을 닮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3:20).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살고 있을 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참 진리인 예수님과 더불어 알찬 열매를 맺읍시다.
정상에 오른 기독교인
벧전 3:8-17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상에 오르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상에 올라가 ‘야호’소리를 지릅니다. 정상을 정복한 기쁨의 소리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근거로 하여 ‘정상에 오른 기독교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나 직장 생활을 하는 분이나 성공을 추구합니다.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는 제일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갖가지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힘써 일하고 연구도 합니다. 일본에 한 사업가는 성공을 하기 위하여 67가지 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성공하려면 시간을 잘 관리해야하고 둘째는 노력, 셋째가 좋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또 옳은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일하는 사람의 열심입니다. 성공을 하려면 지식과 지혜보다도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열심이란 단어를 헬라어<entheos>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받는 것이란 뜻입니다. 열심이란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아야 참된 열심이란 말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열심에서 볼 수 있고 또 바울의 열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주의 일을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열심있는 사람들을 지식이 부족하고, 경솔하고, 품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지식이 풍족한 사람이 열심까지 있다면 그는 큰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에서 보면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 성구들은 바울 사도가 얼마나 열심이었나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열심히 사역한 선교사였습니다. 저는 오늘 열심에 관한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1. 열심은 우리에게 가능성을 찾는데 도움을 줍니다.
열심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열심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어진 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찌다 쯔유도모는 “원래 일체의 세계 문명은 이 노력이 두 글자에 뿌리박고, 거기에서 싹이 트고, 가지를 쳐서,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가능성을 결코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가 보장될 수 없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소망이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그는 힘이 강해지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만약 우리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 있는 피가 순환이 잘 안될 것입니다. 비록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점점 약해지고 병이 들게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육체적인 가능성을 이루기 위해서 활동적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능성을 사용할 때, 우리들은 놀라운 결과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의 아담 클락이라고 하는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영리하여 30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성경에 관심이 있다보니 결국은 많은 성경주석을 써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열심으로 일을 하면 우리들은 많은 것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게으르고, 열심이 없다면 우리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45세까지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통나문 집에서 어렵게 살 때에 이웃들이 볼 때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보고 자신감 가졌습니다. 노예를 부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그는 노예해방 운동에 앞장 섰으며, 확신과 신념에서 이 일에 불철주야로 뛰었습니다. 그는 그의 일에 가능성을 가지고 일했을 때, 미국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개인 한사람 한사람은 연약하고 유약하고 무익해 보입니다. 그러나 작은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는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것입니다.
2. 열심을 싸움에서도 승리하게 됩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많은 적을 이겨야 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싸움에서 꼭 승리합니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앗수르의 왕이 이스라엘의 왕 히스기야 왕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너의 나라를 보호할지라도 나는 너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 이 편지를 보십시오. 감히 앗수르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할까요?” 그날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앗수르 진영에 나타나 185,000명의 군사를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우리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합니다. 비록 우리들의 생각이 좋았더라도 우리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신앙은 싸움입니다.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면 패하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 바울은 선한 일에 적과 싸웠습니다. 마귀와 싸움에서 이미 이겼습니다. 옳고 선한 일에 앞장섰던 신앙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이기고, 또한 최후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자 100m 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게일 디버스 선수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심한 갑상선 질환에 편두통으로 얼굴과 다리가 부어 올림픽 1년전만 해도 걷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1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고 담당의사는 달리기 훈련을 하면 다리를 절단해야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게일은 올림픽 5개월을 앞두고 강훈련에 전념하였고 코치인 밥커시도 그녀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오직 그녀의 집념이었습니다. 훈련의 열심은 그녀를 재기시키고 그녀의 생명을 다시 찾게 했고 오직 그녀의 정신적 승리(곧 마음)이었습니다.
3. 우리들이 열심히 일하면 좋은 것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고 열심있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을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하심이니라” 선한 일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플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은 만물을 화하며, 황금으로 만들고, 무형의 시간까지도 이를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들은 그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현자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체나 교회에서는 그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전화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전화가 발명된지 아십니까? 전화를 발명한 사람은 알렉산더 그래햄 벨이었습니다. 그는 귀머거리 학교의 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는 귀머거리 학생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귀머거리인 한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한 벨은 많은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벨은 귀머거리인 그의 아내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벨은 무엇이든지 듣기 원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한 기구를 만들기 원했습니다. 벨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전화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벨의 전화기 발명은 인류에게 큰 도움을 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좋은 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어진 일에 충실히 일하면 결국 그것은 남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만 보고 달렸습니다.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래, 미래를 위해서 뛴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들은 기도를 먼저 열심히 합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속한 자녀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정상에 오를 것입니다. 열심히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정상을 바라보면서 뜁시다. 또 우리의 눈을 정상에 놓읍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한 일을 합시다.
윤동철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
● 미국 미조리주 캔사스시 신학교 M.Div
● 미국 뉴저지주 드루 대학교 조직신학 전공 (STM. PH.D)
● 現 성결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겸 기획처장
▣ 논문 ▣
◉ 『프로테스탄트 원리』
그 외 다수 등.
◈ “율법의 완성” (마 5:17-18)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행 17:24-29)
“율법의 완성”
마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본문 말씀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곳에서도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율법을 이루는 것, 또는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지만, 실제로는 이루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더욱이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꾸짖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을 이루는 것이며,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인가 주님의 말씀과 생애를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율법은 남이 아닌 자신을 꾸짖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다른 사람의 행위를 살피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에 주님은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자신의 행위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이용하여 올무를 삼으려고 찾아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께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는가? 하며 궁금해 할 때, 우리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돌을 들고 여인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남을 심판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순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 돌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들고 있는 그 돌은 여인을 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내리쳐야 할 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은 율법을 들어 죄인을 치는 것을 쉽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우리 주님도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율법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고 반문합니다. 그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는 이 서기관이 주님에게 옳게 보이려고 “이웃됨”에 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주님은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들어서 이웃을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0-3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율법의 사람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행위와 율법보다는 강도 만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율법의 행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웃됨은 사랑의 실천에 있는 것이며 이 사랑의 실천의 율법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은’, ‘외식하는 자’로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내용, 율법의 의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이 원하셨던 하나님의 참된 목적을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3. 율법은 용서와 섬김의 실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물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시며, 섬김과 용서의 도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셨습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은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니라”(마 18:23-35)
형제를 용서하는 것, 서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율법으로 볼 때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비천한 죄인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율법은 용서하는 것이며, 섬기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꾸짖고, 자신을 통하여 다른사람을 바라볼 때에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용서만이 율법의 심판에서 은혜와 축복으로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용서함으로 은혜와 축복의 주인이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타인의 잘못을 비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사랑과 용서를 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율법의 형식과 전통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용서로 이어질 때에 가능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리의 형식을 내세우며 복음의 충실하지 않으면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이제 사랑과 용서의 실천을 통하여 지역 공동체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행 17:24-29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학교에 출근을 하면서 저는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교통사고 통계표를 봅니다. 남부순환도로에 들어서면 오류 I.C.에 오늘도 “어제의 시내 교통사고”라는 안내와 함께 집계 사망 2명 부상 87명이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문자적 언어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도 숫자로 표시된 언어를 바라보면서 별 느낌 없이 지나쳐 버립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언어와 문자 그리고 통계를 나타내는 숫자 이러한 언어들은 직접적인 사건 자체로서의 표현이 아니라 기호로서 나타나는 언어입니다. 이러한 언어는 사건에 대한 전말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단순 코드로 처리하기 때문에 사건의 개별성의 느낌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숫자로 표현하는 통계적 표현의 기호는 실상 인격이나 사건의 개별적 구체성이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망 2명, 부상 87명이라는 숫자를 보면서 그 통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과 가족 그리고 주변상황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통 사고로 사망한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가장이라면… 만일 나 같은 가장이라면… 그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람들 가운데도 갖가지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상을 당하고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그 중에 있다면… 어느 덧 우리는 현대 문명의 기계적 사고에 포로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우리는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면서 세속문화에 젖어 들었습니다.
문화에 세속적인 것이 어디 있고 성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문화는 존재의 깊이와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실 혹은 실존적 상황만을 진정한 휴매니즘으로 여기는 그런 문화를 말합니다.
세속문화는 종교를 미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과 믿지 못할 신화 같은 이야기들을 미신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법칙과 논리를 벗어나 사건은 미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미신입니까?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의 법칙이 변함없이 계속되리라고 믿는 믿음일 것입니다. 보편성이 한결같이 수학적 기호와 같이 기계적이고 논리적인 제한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미신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보편성은 기호로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는 과학을 다루지 않습니다. 종교는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생명의 힘은 역동적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전합니다. 그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변화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논리와 법칙에도 적용됩니다. 논리와 법칙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움직임에 있습니다. 그것들의 역동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역동성을 주관하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니 바꾸어 말해도 좋습니다. 그 힘이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적입니다. 이 세상에 논리와 법칙을 움직이는 힘이 없다면 논리와 법칙은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성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그 가운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주기적 사건, 하나의 연속적 패턴을 유지하는 규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하여 이룩한 것이 문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사건적 말씀의 한 단면을 가지고 현대인들은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때로는 부정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우리의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이내 생각도 사라지고 움직임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모든 움직임의 시작입니다. 모든 말씀과 언어의 시작입니다. 태초부터 계시는 말씀은 창조적이며, 사건적이며, 미래적입니다. 그 말씀은 힘이며, 역동성이며, 소망의 근원입니다. 그 말씀은 존재의 깊이에 있으며 현재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있으며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은 구원론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2. 세속문화는 존재의 깊이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휴머니즘의 실존주의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을 낳게 되었습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삶.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방랑의 흔적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세속문화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알지 못하고, 가야할 곳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을 파괴하고, 역사를 부정하고, 현실적 상황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모친살해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세속문화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현실 이외에 모든 사건들을 미신적인 것, 그리고 형이상학적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세속문화는 또한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개인주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주의 실제로 이기주의로 전환됩니다. 개인주의는 나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하여 타인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그런데 실제로는 개인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단지 법과 질서에만 충실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름다운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이 광고가 말하는 “아름다운” 그리고 “개인주의”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출함으로 타인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그런 표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타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나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타인을 자신의 심미적 욕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나 자신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놓는다면 우리의 삶은 곧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에 말과 당나귀가 나옵니다. 말과 당나귀는 짐을 지고 주인을 따라 갑니다. 힘이 약한 당나귀가 말에게 호소를 합니다. 자기의 짐을 조금만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자기 몫을 지고 가기에도 힘이 든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당나귀는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당나귀의 짐을 모두 말에게 실었습니다. 말은 진작 당나귀의 청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선 기독교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공동체에 참된 사랑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모든 이들의 안녕을 위한 정의가 머무를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통하여 참된 자유가 머무를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함께 하십니다. 공동체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아플 때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서로가 살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타자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만 타자가 없이 홀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며 서로 도우며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사람들은 휴머니즘적 실존주의가 만들어 놓은 문화를 거부합니다. 그들의 세속문화는 뿌리를 잃고 현실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스스로 위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 문화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방랑의 길을 가는 그 자체가 우리의 운명입니다. 니체가 말한 대로 신은 죽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형이상학적 믿음의 신을 이미 운명을 개척하는 초인간들 앞에서 죽었습니다.” 운명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용기있는 초인간들 앞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의 가치도 사라집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옵니까? 인간은 아메바로부터 시작했습니까? 인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믿는 순간 우리는 동물적 존재 이상은 아니라는 사실에 귀착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자기를 중심으로 하기에 발전이 없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든 개체와 모든 문화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 기준은 바로 그 개체의 판단, 각 공동체의 판단아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혹 다원주의의 상황에서 모든 것이 가치 있으며 모든 것이 가치를 상실한 시대입니다. 그러한 시대는 더 이상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시대에서는 더 이상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만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적이며 구원론적입니다.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의 사람들의 빛이라”(요 1:2-4)
하나님은 정의의 사건적 말씀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사건적 말씀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의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으시고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사건적 말씀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진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망 2명, 부상 87명이라는 숫자가 개별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와 깊이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적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로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도 그의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 안에 사건적 힘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