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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흘러가지만 산(山)은 고향을 지킨다 (3)
— [중원과 백파] ☆ 예천·문경·상주 문화 이유적 탐방 이야기 —
[탐방 제2일] ☆ 작약산(芍藥山) 등산
▶ 2022년 05월 01일 (일요일)
산으로 가는 길
▶ 무릉리를 지나, 작약산에서 발원하는 지평천을 따라 올라가면 최상류에 이안면 구미리(龜尾里)가 있다. 구미리는 동서로 장대하게 뻗어있는 작약산의 품에 안긴 마을로 산행 들머리 마을이다.
작약산(芍藥山)은 백두대간 속리산 줄기 남쪽의 형제봉(831m)에서 동쪽으로 분기해온 산줄기가 청계산—국사봉을 경유하여 칠봉산(598m)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와 여기 작약산(770m) 줄기를 이룬다.
산행들머리는 ‘구미리마을회관’ 앞이다. 회관 앞 마당 가장자리에 안내판이 있다. … ‘작약산(芍藥山, 770m)은 산세가 부드럽고 송림이 우거져 있는데, 남쪽에는 무릉(武陵)이라는 너른 승지를 품고 있다. 산의 북쪽은 영강 상류의 문경 가은읍이요, 남쪽으로 상주 함창읍 사이에 있는 육산으로 작약의 꽃봉오리처럼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령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 뻗어 와서 크게 자리 잡고 높게 솟은 함창의 진산(鎭山)이다.’ …
작약산은 거대한 산체가 동서를 뻗어있으므로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곳이 있지만 해발 770m 상봉이 서쪽 끝에 있으므로 마을 서쪽에 있는 ‘임도’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사한 햇살이 쏟아진다. 청정한 기운이 충만한 싱그러운 날이다.
느티나무 약수터
▶ 마을회관을 출발하여 경사진 임도를 따라 1.4km 올라가면 ‘약수터와 정자’가 있다. 약수터 앞에는, 2012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640여 년의 ‘느티나무 거목’이 서 있는데, 고려 말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느티나무 고목 아래의 반석[석연암] 위에 바둑판을 새겨 놓았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고목 옆에 사각의 정자도 있다. 구미리와 약수터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이 있다.
… 백두대간 속리산 형제봉에서 동으로 가지를 쳐 다시 북으로 한 줄기를 이루니 ‘갈령작약지맥’이다. 이 지맥의 주봉이 작약산(芍藥山, 일명 宰岳山)이다. 이 산의 서쪽 한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의 형상이고 마을이 그 꼬리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이안면 구미리(龜尾里)이다. 마을 가운데 삼태성이라 하는 세 개의 동산이 있으며 그 동편에 사맥등(蛇脈嶝)이라고 하여 뱀처럼 생긴 긴 등이 있기도 하다.
… 이곳 ‘느티나무 약수(藥水)’는 원래 작약산 7부 능선 암벽 아래, 이곳에서 약 700여 미터 떨어져 있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호스를 땅에 묻어 이곳에서 편하게 그 물을 받아 마시는 약수터를 조성했다. 실제로 이 작약산 정상(표지석)에서 서쪽으로 50m 정도 나아가면 몸집이 제법 큰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 거북의 머리가 속리산 문장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 약수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거북에게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임도는 서쪽의 장암리—수예리에서 이곳 구리미를 거쳐 동쪽의 이안의 안룡리로 이어지는 산허리 길이다. 이곳 약수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임도(林道)를 따라 5.5km 가면 ‘장암리마을회관’에 이르는데, 장암리는 이기태의 생가(生家) 마을이다. 지금 중원의 큰 형님이 살고 있다. 임도를 따라 동쪽으로 7km를 가면 이안면 안룡마을회관으로 간다.
본격적인 산행(山行)
▶ 12시 18분, 상봉으로 올라가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5월의 신록이 싱그러운 산길이다. 세상은 아직도 코로나 환국(患局)이지만 여기 청정 산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완만한 경사와 가파른 길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산의 능선을 따라 오른다.
12시 52분, 자상한 이정표가 있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상봉으로 바로 올라가는 길이요, 우측으로 가면 약수터(원천)를 경유하여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좌측의 등산로는 경사가 급하여 위험하므로 가급적 우측의 약수터 길을 이용하라는 안내판을 부착해 놓았다. 우리는 좌측의 길로 바로 올라갔다.
과연 산길을 가팔랐다. 경사가 급하고 좌우가 낭떠러지여서 몸의 균형을 잘잡아서 걸어야 했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그 풍경이 아름다웠다. 오월의 숲속에 연분홍 철쭉꽃이 수줍은 듯 피어 있고 마른 땅에 낙엽 속에도 연보라 빛 봄꽃이 소복히 피어 있어 나그네의 시선을 끌었다. 수림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 신선하고 청정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그러나
이어지는 산길은 경사가 급하고 아주 위험하여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산길에는 친절하게도 곳곳에 산뜻한 이정표를 설치해 놓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온몸에 땀이 흘렀지만 공기가 신선하여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진중하게 발걸음을 옮겨놓는 사이 하늘이 환하게 열리는 능선(稜線)에 이르렀다. 이정표가 있다. 정상까지 0.4km를 남겨둔 지점, 수예리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수예리는 작약산 남서쪽에 있는 산골마을이다.
작약산 정상(頂上)
▶ 오후 1시 3분, 작약산 정상(頂上,770m)에 도착했다. 자연석으로 세운 정상석이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산에는 우리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정상의 풍경은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정상 앞의 바위에 올라 천하를 조망한다. 남쪽으로는 멀리 은척면의 중심에 있는 성주봉이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은척면 수예리 마을이라 했다. 서쪽으로는 멀리 속리산 산줄기와 그 사이 첩첩이 포진하고 산들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첩첩 산들은 초록의 거대한 물결이 파도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작약산의 북쪽은 영강의 상류인 가은읍일 터인데 수목이 가려 바로 보이지 않았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눌렀다.
정상의 통바위 위에 올라가서 말없이 고향마을을 바라보는 중원의 모습이 자못 엄숙했다. 산 아래 저 은척면 장암리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무릉리 초등하교를 졸업하고 함창의 고등공민학교를 거쳐 고향을 떠난 이후, 근 50년만에 그리던 산에 올라 바라보는 고향이니 그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
그리고 능선의 서쪽으로 나아가보니 예의 ‘거북바위’가 있다. 바위 끝에 돌출된 부분이 거북이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데 과연 그 바라보는 곳이 속리산 문장대 쪽이었다. 거북의 등을 타고 앉아서 첩첩 청산을 조망한다. 잠시 망중한(忙中閑)의 시간, 이마에 신선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아, 맑은 햇살이 은은하게 쏟아진다. 신선하고 따사롭다.
▶ 정상 아래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아 간단하게 점심 요기(療飢)를 했다. 함창의 편의점에 사온 빵과 우유 그리고 과일 등이다. 후식으로 중원이 준비해온 커피와 견과류도 있었다.
작약산 능선 종주
▶ 식사를 마친 후, 둘이는 작약산 능선 종주(陵線縱走)에 돌입했다. 이제 거북바위에서 출발하여 동쪽을 향하여 능선 길을 걷는 것이다. 능선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가파르게 내려갔다가 또 올려치고 그리고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급전직하 아래로 쏟아진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내닫는 발걸음, 아직도 하체 근력은 살아 있으므로 출렁거리는 파도를 타고 가듯 능선 길을 치고 나갔다. 억새밭 군락지를 지나고 660고지를 지났다. 그리고 645m 안부를 지나서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산줄기의 시루봉(724m)을 지나 안부에 이르러 임도(林道)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계속 능선을 타면 안룡리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임도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허벅지와 발목에 심한 무게가 실려 스틱을 이용하여 몸의 균형을 맞추어 내려갔다. 길은 험하고 꽤 멀었다. 작약산 임도는 산의 아래쪽에서 동서로 이어져 있다.
▶ 오후 3시 15분 드디어 임도에 내려섰다. 쉼 없이 속보로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는 다시 서쪽, ‘느티나무 약수터’로 가야한다. 우리가 등산을 시작한 거기 약수터에서 내려가면 구미리, 원점회귀의 산행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구미리마을회관 앞에 차를 주차해 놓았기 때문이다. 오후 4시, 구미리에 도착했다.
* 무릉리 *
동아제약 고 강중희 회장 묘소와 생가
▶ 산행을 마치고, 구미리에서 무릉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무릉리 마을길로 들어갔다. 아트막한 뒷산, 이기태는 그곳에 있는 고(故) 강중희(姜重熙) 회장의 묘소(墓所)를 찾았다. 규모가 제법 큰, 당당하고 봉긋한 봉분 두 기(基)가 나란히 자리한 묘소는 아주 정갈하고 아늑했다. 남향받이 너른 유택에는 촘촘하고 싱싱한 잔디가 덮여 있고, 묘역의 주위에는 예쁜 모양으로 다듬어진 향나무를 비롯하여, 뼈가 단단한 배롱나무(백일홍), 울창한 대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자연스럽게 울타리를 하고 있다.
오늘은 때 마침 봄이 무르익는 시기여서 선홍과 백색의 철쭉이 만발하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스프링쿨러 시설도 갖추고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묘지가 늘 싱그럽게 유지되는 것 같았다. 정결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묘지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제약 고 강중희 회장은 이기태와 같은 고향 사람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기태의 인생(人生)의 은인(恩人)이다. 그는 강중희 회장의 묘소에 머리 숙여 묵념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
동아제약 강중희 회장
○ 동아제약 창업주 강중희(姜重熙, 1907~1996) 회장은 작약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골마을, 경북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고구려의 병마도원수를 지낸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후예이며, 고려 조 정당문학 겸 대사헌 강회백의 18대 손이다. 강중희 회장의 조부(祖父)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선비였고 또한 한의원으로 추앙을 받아 마을 주변의 환자들을 자주 돌보았다. 강중희 회장은 이러한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고 때로는 약초를 말리거나 분류하는 작업을 거들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15세에 문중에서 세운 사설학원인 ‘신광학원’에 입학한 강중희는 이해가 빠르고 기억력이 좋아 남다른 진도를 보여 서당에서 열리는 한시(漢詩) 짓기대회에서 늘 1등을 하였고. 동급생들에게 천자문을 지도하는 역할도 했다.
18세가 되던 해 강중희는 오랜 고민 끝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소박한 꿈은 냉혹한 현실에서 녹녹치 않았고 2개월이 지나갈 무렵 부친의 사망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1926년 가을, 그는 다시 짐을 꾸려 일본 나고야로 떠났다. 봉제공장 견습공으로 들어가 다시 일본 생활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일하고 받는 보수로는 공부는커녕 생활하기도 빠듯했다. 그는 결국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1927년, 장남 강신호가 태어났다. 1930년, 23세 되던 해에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
1930년 청년 강중희는 서울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약사 외판원으로 입사했다. 열심히 일했다. 주문과 배달, 수금을 통해 기초적인 판매술을 익혔고 틈나는 대로 소분작업과 포장을 도왔다. 묵묵히 일에 열중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제약회사의 운영을 파악해 나갔다.
그러던 중 근무하던 회사가 사소한 잘못으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아 문을 닫았다. 이후 회사의 경영을 총괄했던 일본인 ‘미야베’의 제의로 서울 중학동에 ‘미야베 약방’을 공동으로 창업했다. 강중희는 외판원 시절에 닦아 놓은 판매기반을 활용하여 하루가 다르게 매출을 늘려나갔다. 공동창업 8개월이 지나고 나서, 기자를 꿈꾸던 미야베가 신문사에 입사해버렸다. 혼자 남은 강중희는 간판을 ‘강중희 상점’으로 바꿔 달고 독자적으로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날이 ‘동아제약의 창립기념일’이 된 1932년 12월 1일이었다.
위생재료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강중희 상점’은 1934년부터 일상생활에 필요한 약품(藥品)을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품목은 고약, 알코올, 휘발유, 빙초산, 얼음베개, 얼음주머니, 파리채, 끈끈이 파리약, 화장비누, 마스크 등 일상용품이었다. 창업 초기에 가족단위로 출범했던 상점은 1936년부터 판매망을 확대하여 서울 외곽에 위치한 한국인 약방과 약국 대부분을 석권했다.
1936년 후반부터는 판매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고 1940년경 지방판매팀은 경원선팀, 경의선팀, 경부선팀, 호남선팀으로 세분화되었다. 이후에도 지방판매는 계속 확장되어 신의주, 회령뿐 아니라 만주 봉천(지금의 선양)까지도 신규거래처로 확보하면서 하루 평균 매출 5,000원을 기록했는데 당시 서울에서 최고의 매출을 올렸던 약방의 하루 평균 매출이 23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이렇게 ‘강중희 상점’은 명실상부한 판매량 1위의 약도매상으로 도약했다.
도매업으로 크게 성공한 강중희는 위생재료를 직접 생산(生産)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 의약품 제조업 허가와 품목허가를 승인 받아 감기약, 소아용약, 정장제, 소화제, 피부질환 약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강중희 사장이 창업 한지 불과 10년 만의 쾌거였다.
8∙15 광복 직후 강중희 사장은 제일 먼저 ‘강중희 상점’ 대신 그 자리에 ‘동아약품공사(東亞藥品公司)’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49년 8월 9일, 강중희 사장은 상호를 ‘동아제약주식회사(東亞製藥株式會社)’로 변경하고 법인체로 등록하며 제약회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2년 12월 ‘강중희 상점’을 개업한지 만 17년 만에 현대적 개념의 제약회사로 거듭난 것이다.
1951년 6·25 피난길에 올랐던 강중희 사장은 4년 6개월 만에 서울로 복귀했지만 다시 찾은 서울 중학동 본사에는 시설과 원자재는 물론 사무실 집기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6∙25 전쟁은 약업계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은 강중희 사장에게도 위기이기도 했지만 또한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우선 피난지에서의 약업 활동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자본을 모은 약업인이 많아 수복 후 재건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용두동 동아제약주식회사
강중희 사장도 완제 의약품 수입에서 그치지 않고 항생제라는 신약개발에 눈을 돌려 새 공장의 부지를 찾아 나섰다. 공장 부지의 적격지로 그는 현재 동아제약(현 동아쏘시오홀딩스) 본사가 위치한 용두동 252번지를 지목하고 2,700여 평의 대지를 매입했다. 착공 1년만인 1958년 5월, 용두동의 벌판에서 연건평 852평의 항생제 공장을 준공하게 되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신약생산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항생제 기계 도입을 위해 강중희 사장은 장남인 강신호를 독일로 보냈다. 독일에서 강신호는 여러 기계를 비교·검토, 엄선하여 항생제 제조 기계릉 도입했다.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마침내 1959년부터 ‘오일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이 용두동 항생제 공장의 첫 제품으로 생산되었다.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이처럼 강중희 회장은 1932년 창업 이후부터 항생제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50년대 말까지 집념과 직접 두발로 뛰어다니며 시장을 분석하고 대중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제품화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동아제약’의 기틀을 마련했고, 동아제약 회장 아들 강신호가 독일프라이부르크대학 의학을 공부를 시작으로 동아제약에 상무로 입사를 하여 박카스를 개발을 하였다. 박카스는 그리스신화의 디오니스신의 영어의 이음인 바커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박카스 신화’를 창조하면서 90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의 의지와 집념은 동아제약의 근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③
1970년 이기태와 동아제약 강중희 회장
문경종합고등학교 광산과를 졸업한 이기태는 1969년 겨울, 서울에 올라와 고려대 법대에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그는 당시 용두동에서 자취하고 있는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신세를 졌다. 대학시험에 낙방했지만 그냥 집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이 아니라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이리저리 고심하다가, 결연히 용기를 내어 당시 용두동에 있는 ‘동아제약’을 찾아갔다. 당시 동아제약 강중희 사장은 이기태의 고향인 상주(은척) 출신으로 바닥부터 자수성가한 기업인이었다. 고향 출신의 그를 찾아가 취직을 호소할 생각이었다.
그가 동아제약 수위실에 가서 사장님을 뵈러왔다고 했더니, 수위는 사전에 약속이 없는 사람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기태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이기태는 매일 동아제약 정문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위실 옆에서 기다렸다. 점심도 먹지 않고 그렇게 수위실 옆에서 기다렸다. 누렇게 뜬 얼굴로 간절하게 수위에게 ‘사장님을 뵙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수위가 그 사연을 묻더니 총무과에 전화를 해 주었다. 총무과를 통하여 ‘들여보내라’는 사장님이 언질을 받았다. 사장실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강중희 사장을 뵈었다. 그는 무릉리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간절하고 절박한 사정을 말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취직을 시켜달라’고 간청을 했다. 강중희 사장은 사정이 딱한 고향의 젊은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총무부장을 통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했다. 그래서 이기태는 동아제약 영업부에 취직되어, 일반 약국에 박카스 등 약품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약 상자를 실은 자전가가 넘어지기도 하는 등 엄청나게 고생을 했으나 이내 숙련이 되었다. 수입이 좋았다. 외근에 특별수당까지 받았다. 가끔 집으로 돈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를 했다. 일 년 동안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할 꿈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 진학,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이기태에게 동아제약 강중희 회장은 인생(人生)의 큰 은인(恩人)이다. —
동아제약 배달원으로 입사하여 일 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알뜰하게 저축하여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1971년 이기태는 드디어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학교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71학번이었다. 법학과는 아버지가 원하시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다. 열심히 일하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절실하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그는 힘들게 일하면서도 더욱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④
동아제약 퇴직… 그리고 경찰관의 길
저녁에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한 시간 일찍 회사를 나와야만 한다. 그렇게 일상이 계속되니까 이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상주고등학교를 나온 6살이 많은 상주 고향의 선배였다. 상주고등학교는 동아제약 강중희 사장이 고향에 설립한 사학(私學)으로서 매년 5~6명의 졸업생을 동아제약에 특채를 했다. 그 동료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비난과 압박을 가해왔다. 하루는 그를 조용히 불러내어 조용히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기태의 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불만을 그대로 표출했다. 몇 차례 간곡하게 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기태는 조용히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험악한 기세로 ‘한 차례 강한 펀치’를 가하면서 그의 기(氣)를 죽여 버렸다. 이러구러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만한 태도를 사과하고 빌었다.
그런데 이튿날 회의 시간에 회사의 안○섭 과장이 ‘이기태’ 이름을 거론하면서 동료사원 폭력 운운하며 대놓고 질책하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가 과장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고자질한 것이었다. 이기태는 그렇게 된 원인을 무시하고 자신을 꾸짖는 과장이 야속했다. 어차피 터진 일, 순간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과장 면전에 나아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며 강하게 분노했다. 그러나 그는 이기태의 상사였다. 그 일로 인해 이기태의 회사생활은 불편했다. 그래서 얼마 후 조용히 휴직계를 내고 군대에 갔다.
2년 6개월 간의 군대 복무를 마치고 이기태는 다시 회사에 복직했다. 그런데, 문제의 안(安) 과장은 그 사이 회사의 인사를 담당하는 총무부장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옛일을 지우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런데 부장은 이기태를 서울이 아닌 멀리 ‘안양공장’으로 발령을 냈다. 안양에서는 퇴근하고 서울 도심(낙원동)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수도권 전철(1호선)이 생기기 전이었다. 도저히 대학에 다닐 수 없었다. 강중희 사장에게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가장 어려울 때 취직을 시켜준 분에게 다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이기태는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쪽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법고시 공부를 했다. 대학도 졸업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같이 공부하던 친구로부터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생각 끝에 ‘경찰간부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합격을 했다. 그때부터 이기태는 대한민국의 ‘간부 경찰’에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청와대경호실에 복무하는 등 경위(警尉)에서 총경(總警)이 이르기까지, 공직생활을 하면서 어릴 때 효령대군 후손인 아버지로부터 훈육 받은 ‘선비정신’을 마음에 지니고, 공직자로서 정도(正道)를 걸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강중희 회장 생가(生家) 방문
▶ 우리는 강중희 회장 묘소에서 내려와 강중회 회장 생가를 찾았다. 동아 인재개발원과 무릉초교 사이의 앞길을 따라 무릉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의 여러 집 중, 한 가운데에 강중희 회장의 생가가 있다. 두 채의 집 가운데 우측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기와집이 있다. 장중하고 완강한 모습이다. ‘銀尺堂’(은척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강씨 문중의 재사(齋舍)라고 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자그마한 초가(草家)가 한 채 있다. 아마 옛날의 생가(生家)를 그대로 살려놓은 것 같았다. 집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듯 고요했다.
이곳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우리나라 굴지의 제약회사를 세워서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강중희 회장이 고향에다 유덕이 남긴 것이다. 조금 전에 둘러본, 어느 왕릉보다도 훨씬 아름답고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강 회장의 산소처럼.
* 이기태의 고향집 방문 *
상주시 은척면 장암리
▶ 무릉리에서 마을길을 따라 나와 조금 나가면 장암1리이다. 거기에는 지금 이기태의 큰 형님이 살고 계신다. 이기태가 태어나 소년 시절 무릉초등학교를 다니고 은척과 함창의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집이라고 했다. 별채에는 농기구가 잘 정돈되어 있고, 본채는 개량 기와집인데 집안은 깨끗했다. 오늘 형님 내외분은 출타하셨는지 집안은 인기척이 없이 조용했다. 이기태는 어제 와서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 갔는데, 오늘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락도 하지 않고 온 것이다. 집 앞의 약간 높은 곳에 사각정이 있어 거기에 올라가 잠시 고향집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장암1리 마을회관’이 있다.
* 두곡리 은행나무와 뽕나무 *
▶ 장암리 마을회관 앞에서 마을도로(장암천)를 따라 내려와 32번 국도에 진입했다. 이제 오늘의 고향방문 일정을 마치고 이곳 상주 은척에서 문경시 농암—가은을 경유하여 상경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기태는 농암으로 가는 길목에거 오른쪽에 있는 두곡리로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유명한 은행나무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뽕나무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마을 초입에 보건소(-광장)가 있고 그 맞은편에 장대한 은행(銀杏)나무가 있다. 맑은 오후의 햇살은 받은 초록의 은행나무가 장엄하다.
… 상주 두곡리(杜谷里) 은행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75호)는 수령이 약 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 8.3m에 가지가 사방으로 우람하게 뻗어 있어서 철봉의 지지대로 받쳐놓았다. 가을날이면 이 거대한 은행나무가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의 황금빛 잎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떨어지면 다음해엔 풍년이 들고, 몇 날을 두고 잎이 떨어지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마을은 6·25전쟁 때 전혀 해(害)를 입지 않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두곡리 은행나무가 지켜준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두곡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지역주민들의 관심과 보호 속에 지금도 건강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 가치가 크다. …
▶ 은행나무의 위용을 바라보다가, 이기태는 길 가까이에 있는 가정집 텃밭 길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내자 안쪽에서 집안일을 하는 한 분이 나왔다. 다름 아닌, 이기태의 고향 선배였다. 서울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노후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다. 진주 류씨라고 하는데,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자꾸 집안으로 들어가 차라도 한잔 하자고 권하는데 귀경길 시간이 촉박하여 정중히 사양하고, 집 앞에 서서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고향과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류(柳) 공은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라면서 민주당이 집권한 지난 5년간의 국정농단에 대해 매섭게 비판했다.
… 류 공의 안내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두곡리 뽕나무를 찾아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뽕나무라 이렇게 큰 것은 처음 보았다. 귀물(貴物)이다. 나무 아래에 일제시대 세웠다고 하는, 마모가 심한 ‘名桑記念碑’(명상기념비)가 서 있다. ‘명상(名桑)’은 유명한 뽕나무라는 뜻이다.
… ‘상주 은척면 두곡리 뽕나무(천연기념물 559호)는 높이 12m에 이르는 수령이 약 300년 된 고목이다.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뽕나무 재배를 권장했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지금까지 누에고치 30kg을 만들어낼 만큼 왕성하게 잎을 피워내고 있어 상주의 오랜 양잠(養蠶)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기념물(記念物)이라고 할 수 있다.
쌍곡계곡 — 귀경 길
* [상주시 은척-문경시 농암-가은-(쌍곡계곡) 소금강휴게소-연풍(중부내륙고속도로)]
▶ 오후 5시 30분, 상주 은척면 두곡리를 출발하여 귀경길에 올랐다. 해가 한참 서산 위에 걸려 있다. 하루가 짧다. 귀경길은 32번 국도를 타고 은척에서 매봉 아래의 지동터널—사현터널을 지나서 문경시 농암(면)에 들어섰다. 농암에는 백두대간 청화산-속리산(문장대-형제봉) 산곡에서 발원하여 ‘쌍룡계곡’의 절경을 이루고 흘러내려오는 영강(潁江)의 본류가 흐른다. 농암을 지난 영강은 가은(읍)을 지나서 진남교에서 문경 대미산-조령산 등에서 내려오는 조령천을 받아들여 점촌을 경유, 함창 아래에서 이안천과 합류하고서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 우리의 제네시스는 농암에서 영강을 따라 가는 901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은에 도착, 거기에서 922번 지방도로와 517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백두대간 장성봉(동)과 대야산(서) 사이의 ‘제수리치’를 넘어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쌍곡계곡’에 접어들었다. 쌍곡계곡은 군자산과 칠보산 사이의 협곡으로 노송(老松)과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특히 수량이 많고 물이 맑아 여름철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쌍곡계곡은 북쪽으로 흘러 연풍에서 내려오는 쌍천에 흘러들고 이 쌍천은 칠성면에서 괴산천(달천의 본류)에 합류하여 충주의 탄금대 옆에서 남한강에 유입된다. —
쌍곡계곡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 ‘쌍곡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리는 우람한 기암절벽(奇巖絶壁)이다. 오후 6시 30분 소금강휴게소 식당에서 갈비탕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중원의 제네시스는 연풍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일로 질주 … 무탈하게 상경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