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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계생가(漁溪生家)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이 건물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2년(1420년)에 태어나 성종(成宗) 20년(1489년)에 돌아가신 충신(忠臣)이며 단종시(端宗時)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어계은자(漁溪隱者) 조여(趙旅) 선생의 생가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1976. 12. 20.)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영월(寧越)에서 단종(端宗)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고 왕(王)의 얼을 동학사(東鶴寺)에 모신 후 이곳 백이산하(伯夷山下)에 은거(隱居)했던 곳으로서 지금은 후손들이 재실(齋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기와집으로 개와(蓋瓦)에는 무오(戊午) 9월 일(九月 日)이라 명문(銘文)되어 있고, 주변은 토담을 둘렀다. 이집 바로 뒤에는 어계선생(漁溪先生)과 정부인(貞夫人) 흥양이씨(興陽李氏)에게 향례(享禮)를 올리는 조묘가 있고, 이곳에 하사품(下賜品)인 동제향로(銅製香爐)와 그가 짚던 죽장(竹杖)이 보관되어 있다.【문화재청】
원북재(院北齋) 및 조묘 : 어계선조조묘재실(漁溪先祖 廟齋室)로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다. 원북재(院北齋)에 있는 조묘는 어계선조와 정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에게 향례(享禮)를 드리는 곳으로 매년 3월 상정일(上丁日)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한다.
채미정(采薇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채미정(采薇亭)은 본래
서산서원에 속했던 건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書院)이 훼철(毁撤)된 후 "채미정(采薇亭)"이라 게명(揭名)하고 자손과 사림(士林)이 매년 9월 9일에 선조(先祖) 어계선생 諱 여(旅)와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 관란(觀瀾) 원호(元昊),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문두(文斗) 성담수(成聘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생육신(生六臣)에게 국천제(菊薦祭)를 거행한다.
채미정(采薇亭)은 어계선생(漁溪先生)이 단종(端宗)을 폐위(廢位)시키고 스스로 왕위(王位)를 차지한 세조의 처신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정자로 1693년에 중건하였고 1954년에 재건(再建)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으로서 정자(亭子) 좌우측에 "백세(百世)" "청풍(淸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 정면에 연못이 있고 북쪽 절벽 위에 있는 청풍대(淸風臺)에는 "문풍루(聞風樓)"란 육각정이 있다.
서산서원(西山書院)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서산서원(西山書院)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신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숙종 29년(1703년) 예조판서 조상우(趙相愚)와 숙종 30년(1704년)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상소에 따라 임금의 재가를 얻어 영남의 유생과 후손들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숙종 33년(1713년), 손경장(孫慶章) 등의 상소로 "서산서원(西山書院)"이란 사액현판(賜額縣板)이 내려졌으며 현판은 권형(權灐)의 글씨이다.【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1977】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것을 1984년에 복원 완공하였다. 경내에는 서산서원을 비롯하여 외삼문, 내삼문, 동, 서재, 육각정, 생육신사적비, 정절공사적비, 전사청, 소청각과 생육신의 위폐를 모신 충의사 등이 있고 주련(柱聯)은 선생의 시(詩)인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이다. 서산서당(西山書堂)은 서산서원이 훼철된 후 광무 2년(1902년)에 본당(本堂)을 건축하고 서원의 전례에 따라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에 생육신(生六臣)에게 미천제(薇薦祭)를 거행한다.
계룡산 동학사(鷄龍山東學寺) 숙모전(肅慕殿)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묘재실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된 숙모전(肅慕殿)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의 동학사(東鶴寺) 경내에 있으며, 단종(端宗)과 충신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 경내에는 삼은(三隱), 즉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모시는 삼은각(三隱閣)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세조 2년(1456년)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葬禮) 지낸 뒤 삼은각(三隱閣) 옆에 단을 만들고 제사하였다. 2년 뒤 동학사에 들렸던 세조(世祖)가 자기로 인해 죽은 280명을 초혼각(招魂閣)에 모시도록 했다. 영조 4년(172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순조 27년(1827년) 다시 세웠으며, 고종 41년(1904년)에 중건하여 고종으로부터 숙모전(肅慕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현재 89위가 모셔져 있고 3월 보름과 10월 24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고마암(叩馬巖)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입구에 있는 절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명 "고바위"라고 하는 고마암(叩馬巖)은 어계선조께서 낚시를 하시던 곳이라고 한다.
백이산(伯夷山)과 숙제봉(叔齊峰)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 있다. 백이산(伯夷山)의 옛 이름은 쌍안산인데 단종(端宗) 복위후(復位後) 숙종(肅宗)께서 내리신 어계선조사제문중(漁溪先祖賜祭文中)에 쌍안산을 백이산이라 칭하여 공의 절의(節義)가 옛적 백이(伯夷)와 같음을 찬양하였다. 숙제봉(叔齊峰)은 백이산 옆에 같이 솟아있는 산이다.
응암재(鷹巖齋) : 어계선조묘각((漁溪先祖墓閣)으로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응암리에 있다.
정절공어계선생신도비각(貞節公漁溪先生神道碑閣) :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참판 이미가 지었고 비각(碑閣)은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에 있다.
정절공어계선생태생지(貞節公漁溪先生胎生地)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 비(碑)가 있다.
단종역사관 : 숙종 35년(1709년)에 사액(賜額)된 영월 「창절사(彰節祠)」에는 사육신을 비롯하여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를 배향하고 있다. 생육신 중에 누락된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 정숙공(貞肅公) 성담수(成聃壽)의 창절사(彰節祠) 배향은 후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에는 끝내 이루어지 못하였다. 2002년 4월 5일, 장릉(莊陵)내에 개관한 단종역사관(端宗歷史館)내에 생육신(生六臣)과 사육신(死六臣) 12위(位)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유물을 전시함으로서 후손(後孫)들의 오랜 숙원이 성취되었다.【함안조씨종회보 제 30 호(2002년 6월 25일)/영월군청홈페이지()】
용계서원(龍溪書院)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5호(1974.12.10)로 지정되었고, 현재, 벽진이씨 경은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1392년~1480년])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 건물은 선생이 죽은 후인 정조 6년(1782년) 왕명으로 토곡동(土谷洞)에 건립되어 이맹전을 비롯한 생육신(生六臣)을 배향(配享)하였다.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항동(魯巷洞)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7월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졌다.
6) 언행록(言行錄)
단종 3년(1455년) 선생(先生)이 성균관(成均館)에 계시다가 수양대군이 선위(禪位)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명륜당(明倫堂)에 올라 여러 서생(書生)들과 작별하고 낙향(落鄕)하여 낙동강(洛東江)가에 은거(隱居)하여 세사(世事)를 사절(謝絶)하고 종신(終身)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일찍이 지은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에는 선생의 뜻이 은미(隱微)하게 표현되어 있다.
회두거목강산묘(回頭擧目江山墓)
지활천장사묘망(地闊天長思渺茫)
희헌원의비사극(羲軒遠矣悲伺極)
화훈불견심자상(華勳不見心自傷)
차재료도생고만(嗟哉 倒生苦晩)
회가인혜불능망(懷佳人兮不能忘)
머리 돌려 눈을 뜨니 강산(江山)이 저물고
땅 넓고 하늘 높아 생각이 아득하네.
희헌(曦軒 : 복희와 황제 두 분) 두 분 어디 갔소. 슬프기가 그지없다.
요순(堯舜) 세월 못 만나서 마음 아프구나.
슬프다 이내 신세 어인 일로 괴로운가.
연연(戀戀)한 이내 마음 내 임금 그리워 잊어지지 아니하구나.
서원(書院)은 함안 원북에 있다.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 직학(直學) 원호(元昊), 경은( 隱) 이맹전(李孟專), 진사(進士) 성담수(成聘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을 병향( 享)하고 서산서원(西山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세칭(世稱)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선생(先生)은 의젓한 풍도(風度)로서 일찍부터 두각(頭角)을 나타내었다. 사람들은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였고, 점점(漸漸) 성장(成長)하자 스스로 학문(學問)에 매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대의(大義)를 통투(通透)하는데 주안(主眼)을 두고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따서 과거응시에 쓸 정문(程文)에 몰두하는 일은 수치(羞恥)로 여겼다.【참찬(參贊) 이미선비명(李薇選碑銘)】
항상 방안에 고요히 앉아 만권(萬卷)을 대하여 성현언어(聖賢言語)에 침잠(沈潛)하였고 그 뜻을 얻은 후면 마음이 즐거워 침식을 잊었으며 혹은 원림(園林)에 노닐면서 스스로 시(詩)를 읊어 자위(自慰)했다.【비명(碑銘)】
부모의 마음을 즐기게 하는 색양(色養)에 힘써 평상시 봉양(奉養)에 어김이 없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며, 즐겨 드시는 음식은 비록 가난해도 풍성(豊盛)하게 하여 받들었다. 부모 곁을 잠시라도 떠나지 않았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애경(哀敬)을 다하여 추원감모(追遠感慕)하였고, 장제(葬祭)의 예절에 있어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비명(碑銘)】
손님이 오면 보리밥 채(菜)나물로 대접하고 서로의 이야기가 농사일이 아니면 야담(野談) 따위였고, 집이 가난하여 아무 것도 저축한 것이 없어도 태연히 즐기고 강의(剛毅)한 기상과 화태(和泰)한 모습은 안면(顔面)에 수연(粹然)히 나타나 구슬을 깊이 간직한 듯 하며, 부화(浮華)한 버릇을 절거(絶去)하여 교격과정(矯激過情)한 자는 통쾌(痛快)히 배제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비명(碑銘)】
선생은 생전에 정암강상(鼎岩江上) 갑좌(甲坐)에 묘소(墓所)를 정하고 말씀하시기를 "정암강수(鼎岩江水)가 없어져야 내 자손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 자손은 마땅히 원북에 세거(世居)할 것이나 만약(萬若)에 쇠퇴(衰退)하면 산승칠발안(山僧七鉢案) 오봉상대처(五峯相對處)에 옮겨 살면 다시 크게 번성하리라."고 하였다.【가승(家乘)】
전(傳)에 말하기를 "공(公)의 성(姓)은 조(趙), 이름은 여(旅), 자(字)는 주옹(主翁)으로 함안 사람이며, 고려원윤(元尹) 단석(丹碩)의 후예(後裔)다. 젊어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공부하여 문장에 능했고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단종 임금이 본의 아니게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하자 공(公)은 분연히 다시 과거에 응치 않겠다고 하고 은거하다가 종신(終身)하였다.
공(公)이 풍수학(風水學)에 능하여 함안 원북동 수석(水石)의 승개(勝槪)가 아름다워 그곳을 복지(卜地)하였다.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아 수목(樹木)이 하늘을 치솟고 거친 곳이었으나 공(公)이 수목(樹木)과 풀을 베어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 후 본지손(本支孫)들이 번성(繁盛)하여 관면(冠冕)이 끊이지 않고 연장접옥(連墻接沃)하여 마침내 큰 동네가 되어 자손(子孫)들이 세거(世居)하였다.
공(公)은 자호(自號)를 어계(漁溪)라 하고 문집(文集)이 세상에 나왔으나 묘명(墓銘)이 권중(券中)에 실리지 않아 그의 언론행적(言論行蹟)이 소상히 미상(未詳)이다. 찬(贊)하여 말하노니 문종(文宗)과 단종(端宗) 임금 때에는 나라에서 교육을 진흥시켜 다사제제(多士濟濟) 가위 성세(盛世)라 할 수 있었다.
세조(世祖)가 선위(禪位)를 받자 일시에 힘세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몰려들어 칭신(稱臣)을 하기를 난(亂)을 피해 온 옛날 은(殷)나라 자손들이 주(周)나라 제사(祭祀)에 돕던 것처럼 하였으나, 옛 임금을 그리워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사적(六臣事蹟)은 남추강전(南秋江傳)에 실려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혁혁(赫赫)하게 비치고 있다.
공(公)과 같은 분이 성균관의 유생으로 처음부터 장릉(莊陵)에 칭신(稱臣)을 하고 출사(出仕)를 하지 않았으나 그토록 좋은 재주를 가지고 새 임금 세조에게 나갔다고 한다면 만종록(萬鐘錄) 청자(靑紫)의 귀(貴)한 자리도 허리를 굽혀 물건을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지만은 도리어 굳은 절개(節槪)로써 항거(抗拒)하여 죽어도 좋다하고 저 멀리 세상을 은둔(隱遁)하고 민망(憫 )한 점(点) 하나 없이 늙어 죽어도 후회(後悔)치 않았다.
이는 정녕 호걸(豪傑)의 기상을 가진 선비로서 도리(道理)를 중히 여기고 정의감(正義感)이 깊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공(公)의 마음은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던 마음과 같음을 알겠으며, 동봉(東峯) 김열경(金悅卿)과 가위(可謂) 일대의 신교(神交)로서 후일(後日) 역사가들이 붓을 잡아 대서특필(大書特筆)하고 김시습과 같이 후세(後世)에 전한다고 하면 죽은 의백(毅魄)이 외롭지 않을 것이며, 설사 후세(後世) 사람들이 나를 몰라준다 한들 한(恨)이 될 것이 없겠다.【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 지음】
세칭(世稱) 김열경은 동방의 백이(伯夷)라 한다. 독립독행(獨立獨行)한 선비라 하겠으나 동류(同類)와 친교(親交)를 끊고 처자(妻子)를 버리고 미치광이 모양으로 돌아다녀 스스로 자기 몸을 더럽힌 점은 결코 방정(方正)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함안(咸安)에 있는 백이산(伯夷山)은 고(故) 어계선생(漁溪先生) 조공(趙公)이 살았던 곳으로서 종신토록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고 낚시만 드리우고 스스로 즐겨 지냈다. 그 마음은 대개 김시습과 같은 마음이요, 그 발자취는 은회(隱晦)하여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칭(稱)할 수 없었다. 좋은 세상을 만났으면 징현천유(徵顯闡幽)한 뜻을 능히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조선(朝鮮)의 절의(節義)는 단종과 세조 때의 육충(六忠)을 제일로 손꼽으며, 그 외에도 포의(布衣)로서 탁연(卓然)하게 공(功)을 세운 자가 많았도다. 영조(英祖)때에는 많은 현재(顯材)들이 세상을 빛냈으니 어찌 공이 크지 않겠는가!
석담선생(石潭先生)이 일찍이 열경(悅卿)을 추상(推詳)하기를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김시습을 알지 못한다 해도 무엇이 민망하겠는가?"하였으니 이 또한 공(公)의 마음을 알아서 한 말이다. 공(公)이 세운 대의(大義)는 천지(天地)를 지탱하고 만고(萬古)에 뻗어 변(變)치 않는 것인즉, 만일 공(公)이 스스로 없애고자 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하늘인데 그 하늘을 어찌 하리요.【도암(陶菴) 이제(李締)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 발문(跋文)에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니 우리 선조 어계공(漁溪公)은 세종 2년(1420년)에 태어나 단종 1년(1453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수년 후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헌출(軒出)한 장부임에도 채색(彩色)을 깎고 빛을 감추어 산림 간(山林間)에 노닐면서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라 했다. 살림살이는 검약하고 구태여 치산(治産)하지 않고 오직 신의(信義)로서 향리(鄕里)와 사귀었으니 대개 김시습이 은거하면서 몸을 감추려는 뜻과 같았다.
공(公)은 지인(至人)으로 사상(思想)이 아주 연징(淵徵)한 까닭에 그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없어 사람들이 공(公)의 은절(隱絶)이 어떠한지를 몰랐다. 이제 살피건대 다만 후세 사람들이 모를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도 모르고 또한 외인(外人)들도 모르고, 하물며 한 집안 사람조차 은절(隱絶)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외형(外形)으로 나타나 숨길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유고(遺稿)인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를 고찰하니 공(公)의 지극(至極) 미묘(微妙)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희헌(曦軒 : 복희와 황제 두 분) 두 분 어디 갔소. 슬프기가 그지없다.
요순(堯舜) 세월 못 만나서 마음 아프구나.
이것이 공의 본정(本情)으로 부득불(不得不) 밖으로 노정(露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절(佳節)에 등임(登臨)하는 일은 결코 노심(勞心)하거나 개탄(慨歎)할 장소(場所)가 아니거늘 시사(時事)에 감동되고 옛 일을 생각하여 시대를 애도(哀悼)하는 뜻이 어찌 자연(自然)을 노래하는 시(詩)에 담기지 않겠는가?
백이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면서 지은 노래에 "신농(神農), 우하(虞夏)가 홀연(忽然)이 없어졌으니 내 장차(將次) 어디를 갈 것인가?"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시(詩)의 어맥(語脈) 또한 여기에 근거(根據)한 것인가?
인덕(仁德)은 심어 없어지고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받지 못하였으나 공(公)의 제자(諸子) 제손(諸孫)에게 비로소 길경(吉慶)이 발생(發生)하였으니 적선여경(積善餘慶)이 어찌 소연(昭然)치 않으리오.
광해군 9년(1617년) 가을
오대손(五代孫) 임도(任道) 삼가 발문(跋文)함.
7)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
구월구일시중구(九月九日是重九)
욕수가절등고강(欲酬佳節登高岡)
백운비혜안남빈(白雲飛兮雁南賓)
난유수혜국유방(蘭有秀兮菊有芳)
산명수벽연참담(山明水碧煙慘 )
풍고일정기처량(風高日晶氣凄凉)
적화토설강지호(荻花吐雪江之滸)
풍장홍금산지양(楓粧紅錦山之陽)
두목기상취미수(杜牧旣上翠微峀)
도잠창망백의랑(陶潛 望白衣郞)
천재풍류여작일(千載風流如昨日)
지금호기늠추상(至今豪氣凜秋霜)
회두거목강산모(回頭擧目江山暮)
지활천고사묘망(地闊天高思渺茫)
희헌원의비하극(羲軒遠矣悲何極)
화훈불견심자상(華勳不見心自傷)
심음필하건곤활(沈吟筆下乾坤 )
난취준전일월장(爛醉樽前日月長)
차재료도생고만(嗟哉 倒生苦晩)
회가인혜불능망(懷佳人兮不能忘)
구월 구일은 중양절(重陽節)
좋은 계절 즐기고자 산등성이 올랐네,
흰 구름 뭉게뭉게 기러기 떼 날라 오고,
난초 잎 빼어나고 국화꽃 향기롭네.
산 밝고 물 푸른데 연기 가듯 참담(慘憺)하고,
바람 불고 햇살 맑은데 가을 기운 처량(凄凉)하네
갈대꽃은 강가에 눈발처럼 휘 날리고,
단풍잎은 양지쪽을 비단같이 물 들였네.
두목(杜牧)은 호방(豪放)하게 취미(翠薇)산에 올랐고,
도연명(陶淵明)은 술 심부름꾼 오기만 기다렸네,
천 년 전 풍류(風流) 세월 어제일 같았는데,
지금도 그 기상 서리 발처럼 엄숙하네,
머리 돌려 해 저문 강산을 바라보니,
땅 넓고 하늘 높아 사념(思念)이 아득하네,
희헌(羲軒)의 세상 멀어져 슬프기 한이 없고,
요순(堯舜) 시절 못 만나니 마음 절로 상하구나,
침통히 읊조리는 붓끝에는 천지가 망막하고,
흠뻑 취한 술잔 앞에 세월은 유유 하네
가엷어라 이 늙은이 오래 삶이 괴롭구나,
마음속 그리운 임 잊을 수가 없다네.
8) 시호(諡號)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正祖) 5년(1781년) 9월 29일[무진(戊辰)] / 선조 조여의 증시(贈諡)를 청하는 봉조하 조중회의 상소문
봉조하(奉朝賀)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기를,
『신의 10대조(十代祖) 증 참판(贈參判) 신(臣) 조여(趙旅)는 곧 단종조(端宗朝)에 절의를 지킨 신하로서 을해년[단종 3년(1455년)] 이후 문을 닫고 자취를 끊은 채 도(道)를 지니고서 일생을 마쳤으니, 그 정충(貞忠), 고절(苦節)은 실로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 이맹전(李孟專) 등 여러 사람들과 일체(一體)로 뜻을 함께 하였던 것은 물론, 세상에서 일컬은바 생육신(生六臣)입니다.
고 참찬(故參贊) 이미(李薇)가 묘표(墓表)에 쓰기를, "선생(先生)의 마음은 뒷사람이 선을 그어 헤아려 알 수 있는 바의 것이 아니다. 만일 서산(西山)의 두 아들이 당시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서로 심곡(心曲)을 털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했을 것이다."하였고, 고 판서(故判書) 성문준(成文濬)은 전(傳)을 찬(撰)하기를, "노산(魯山)이 내선(內禪)한 뒤로 공(公)이 다시는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고 절의를 지켜 길이 은둔(隱遁)하였다."하였고, 선정신(先正臣) 이재(李縡)가 신도비(神道碑)을 찬(撰)하기를, "공(公)은 경태(景泰) 계유년[단종 원년(1453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는데, 사망(士望)이 매우 중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생(諸生)들에게 인사하고 돌아간 다음, 일생 동안 다시 나오지 않은 채 낚시로 물고기나 잡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이렇게 스스로 자취를 숨겼으므로, 칭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배(先輩)의 입론(立論)과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난번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이 유독 이맹전(李孟專)에게만 미쳤고 신의 선조(先祖)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성조(聖朝)에서 숭장(崇奬), 격려(激勵)하는 정사에 있어 어찌 흠결(欠缺)스러운 탄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선조의 우뚝한 절의를 굽어 살피시어 한결같이 고(故) 정언(正言) 이맹전의 전례에 의거 특별히 증시(贈諡)하는 은전을 내리소서.』하니,
비답하기를,
『특별히 청한 바를 허락한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거행하게 하라.』하였다.【원전】45집 267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正祖) 5년(1781년) 11월 20일[무오(戊午)] / 증 판서 조여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증 판서 조여(趙旅)에게 「정절(貞節)」의 시호(諡號)를 내렸다.【원전】45집 281면
9) 영월부읍지(寧越府邑誌)-팔현사조(八賢祠條)
팔현사는 숙종 신해년에 창절사 장내(牆內)에 창건하여 생육신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여, 성담수 및 권절, 정보를 병향하였는데 영조 계유년에 사액(賜額)이 되지 않아 국령으로 훼철되었다.
……중략(中略)……
노산군(魯山君)을 영월에 안치하여 두고는 파수병으로 하여금 청령포(淸令浦) 나루를 지켰다. 어계조공(漁溪趙公) 여(旅)는 함안에 살면서 영월 오백여리를 매월 세 번씩 상감문안을 드리면서 중도에는 관란(觀瀾) 원호(元昊)의 집에 유숙(留宿)하였으며, 매일같이 성수만세(聖壽萬歲) 하심을 하늘에 기도하였다.
정축년(丁丑年)[1457년] 10월 24일 노산군(魯山君)의 승하(昇遐)하셨다는 부음(訃音)을 듣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밤중에 청령포에 당도하여 보니 역시 배가 없는지라. 나루를 건너지 못해 방황하던 중에 어느덧 날이 밝아 오는지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니 강물도 따라 울더라. 마침내 의복을 벗어 등에 지고 건너려고 할 때 문득 옷을 당기는 지라 돌아보니 큰 호랑이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천리분상(千里奔喪)에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다행히 이 강을 무사히 건너면 상감을 수렴(收斂)할 것이요. 건너지 못하면 창해(滄海)의 귀신(鬼神)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당기는고."하니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므로 공(公)이 그 뜻을 짐작하고 등에 올라탔더니 청령포 나루를 건너 주었다.
곧 시소(屍所)에 들어가 보니 다만 수직(守直)하는 사람 둘뿐이더라. 통곡(痛哭) 사배(四拜)한 후 옥체(玉體)를 수렴(收斂)하고 문을 나오니 기다렸던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너 주었다.
10) 치악산제명록(雉岳山題名錄)
원 조 이 삼공제명(元 趙 李三公題名)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요선정 건너편에 있는 암각명(岩刻名)으로 원호(元昊[號:觀蘭]), 조여(趙旅[號:漁溪]), 이계정(李季亭[號:挑村]) 이 세 사람은 무릉계곡을 거점으로 자주 만나 단종의 안위를 근심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놓은 이 제명(題名)은 바로 그들의 행적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제명(題名)은 1987년, 무릉-운학간 도로개설공사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1991년 6월, 영월충절현창회에서 원래 위치의 동남방 백보가량 되는 지점에 복원하였다.
제명록기적비(題名錄記蹟碑)
이 제명(題名)은 조선조(朝鮮朝) 단종의 선위(禪位)에 즈음하여 절의(節義)를 지키신 원호(元昊), 조여(趙旅), 이계정(李季亭) 세 선생(先生)께서 영월 청령포로 유배(流配)된 단종임금의 안위(安危)를 근심하며 치악산에 올라 성수(聖壽)를 기원(祈願)한 충절(忠節)의 표상(表象)으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다.
원선생(元先生)의 자(字)는 자허(子虛)요, 호(號)는 관란(觀瀾)이니 원주인이다. 세종(世宗)때 등과(登科)하여 직제학(直提學)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니 원주에서 영월로 옮겨 관란정(觀瀾亭)을 지어 항상 임금을 기리며 슬퍼하였다. 단종이 사사(死賜)되니 복상(服喪) 3년을 하고 일상기거를 단종이 계시던 동편(東便)으로 향(向)하였다. 숙종때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정조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조여선생(趙旅先生)의 자(字)는 주옹(主翁)이요, 호(號)는 어계(漁溪)이니 함안 인이다. 단종 때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수학(修學)하고 있는데 수양대군의 찬위에 분개하여 제생(諸生)들과 하직하고 함안백이산하(咸安伯夷山下) 원북동에 숨어 살았다.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니 그곳으로 찾아가 자주 문후(問候)를 드렸다. 단종이 사사(死賜)됨에 분상수렴(奔喪收斂)한 사실이 남추강시(南秋江詩)와 영월읍지에 실려 있고, 동학사(東學寺)에서 김시습(金時習) 등과 단종의 원혼을 달래는 초혼제(招魂祭)를 올렸다. 숙종때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정조 때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다.
이계정선생(李秀亭先生)의 자(字)는 영보(英甫)요, 호(號)는 도촌(挑村)이니 우계인(羽溪人)이다. 단종조(端宗朝) 음사(蔭仕)로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있을 때 수양대군의 찬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순흥(順興)에 은거(隱居)하였다. 거실(居室)은 삼면(三面)이 벽이고 북쪽으로만 창문을 두어 항상 영월을 향(向)하여 앉았다. 단종이 승하한 후 일편단심(一片丹心) 곧은 절의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그 뒤 철종 때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세조 3년(1457년)경에 새겨진 이 제명(題名)은 단종의 슬픈 역사와 관련된 유일한 석각(石刻)으로서 후일(後日) 눌옹(訥翁) 이광정공(李光庭公)이 이를 어루만지며 만고충절(萬古忠節)을 감탄하였으며, 참판(參判) 목만중(睦萬中)은 자취를 세상(世上)에 널리 알렸다.
그 후 540여 년 동안 보존되어 온 위대한 사적(事蹟)이 불행히도 근년(近年)에 도로 확장으로 파괴되었다. 1991년 영월충절현창회에서 이를 안타깝게 여겨 세분 선생(先生)의 후손(後孫)과 의논하여 원위치에서 동남방(東南方) 백보(百步)가량 되는 이곳에 복원하게 되었다.
이처럼 절의(節義)높은 세분 선생(先生)의 충절(忠節)을 영원히 기리고 전 국민(全國民)에게 알리는 동시에 후손(後孫)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제명록기적비(題名錄記蹟碑)를 세운다.
2000년 11월 일
삼성후손문중 후원(三性後孫門中後援)
영월군수(寧越郡守) 김태수(金太洙) 건립(建立)
치악산제명록(雉岳山題名錄)
첫 머리에 관란(觀瀾) 원호공(元昊公)이요. 다음이 어계(漁溪) 조여공(趙旅公)이며, 그 다음이 도촌(桃村) 이계정공(李季亭公)이 쓰여 있다. 성명 아래 각기 별호를 표기하고 그 아래의 방제(方題)에는 경태년(景泰年) 3월 16일에 입석(立石)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년(年)자 위에 글자가 한자 빠져 있다. 눌옹(訥翁) 이광정공(李光庭公)은 단정(斷定)지우기를 사육신이 죽게 된 무렵이라고 하였으니 무엇을 고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근거 한다면 경태 7년 병자(丙子)이다, 대저 돌이란 물체는 오래 되어도 부서지지 않은 특성으로 그대로 꼿꼿하게 굽히지를 아니하고 서 있으며 세분의 제명(題名)으로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했음은 이 또한 차돌의 특성을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치악산(雉岳山)은 바로 원주고을의 진산(鎭山)이요 원주(原州)는 관란 원공(元公)이 살던 고장이다. 당시 서로가 손을 잡고 산에 올라 풀을 깔고 둘러 앉아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채미가(採薇歌)를 불렀을 것이며 물을 굽어보며 초사(楚辭)을 읊었을 것이다. 그 행적을 어루만지며 그 마음을 상상해보면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라, 아아! 만약 이 세분이 당시의 시류(時流)를 따랐더라면 공훈(功勳)이 금궤에 가득하여 휘황하게 빛 낼 수 있었을 것인데도 어찌하여 산언덕 바위 한쪽에 이름만을 새겼던 것일까? 서리 내리고 물이 떨어지는 속에서 영원한 평판(評判)으로 사람들이 이를 어루만지며 찬탄하고 있음은 바위에 제명(題名)하였기 때문이요 공훈(功勳)에 뜻을 두지 않음이었다.
참판(參判) 목만중(睦萬中) 짓다.
11) 어계비원(漁溪碑苑)
이 비원은 단종(端宗)이 선위(禪位)에 즈음하여 절의(節義)를 지키신 생육신(生六臣) 어계(漁溪) 조여(趙旅) 선생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1988년 5월, 영월충절현창회가 단종의 유배지(流配地), 이곳 청령포 가까운 곳에 세웠다.
어계선생(漁溪先生)은 경상도 함안인(咸安人)으로 세종 2년(1420년)에 출생하시어 단종 원년에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단종의 선위를 맞이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 함안으로 돌아가 평생토록 절의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이곳을 자주 찾아 단종의 안부를 살폈으며, 도중(途中) 생육신의 한분인 원호(元昊) 선생의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시면서 단종의 성수(聖壽)를 함께 기원(祈願)하기도 하였다.
단종이 승하(昇遐)하자 선생은 함안에서 이곳 청령포에 당도하여 호랑이 등에 업혀 강을 건너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였다는 "호도청령포(虎渡淸 浦) 조옹염노산(趙翁殮魯山)"이라는 설화(說話)가 남추강집과 대동기문(大東奇聞), 영월읍지(寧越邑誌), 강원도지(江原道誌)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또한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東學寺)에서 김시습(金時習), 엄흥도(嚴興道), 조상치(曺尙治) 선생 등 세칭 초혼칠신(招魂七臣)과 함께 단종의 고혼(孤魂)을 불러 제사를 지내어 뒷날 숙모전(肅慕殿)의 기원이 되었다. 어계선생을 비롯한 생육신을 사향(祀享)하는 원사(院祀)는 경상남도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계룡산 동학사(東學寺)내의 숙모전(肅慕殿), 영월의 팔현사(八賢祠,-지금은 毁撤)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