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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부터 8일 동안 이어지는 중국 국졍절(國慶節, 국가건국일) 황금연휴에 먼저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에서 있을 옛 연변과학기술대학교 제자인 최연경양의 결혼식 주례를 한 후, 남은 기간 동안에 산서성 북부와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그리고 섬서성(陝西省) 북부지방을 돌아보기로 했다.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도 많은 만큼 한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중국의 공휴일 연휴제도이다. 한국의 960배에 달하는 넓은 땅에서, 대부분 교통수단으로 기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공휴일 연휴를 2~3일 주어서는 사람들이 도저히 고향에 다녀올 수가 없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장안대학교는 학생들을 전국에서 모집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고향이 정말 다양하다. 동북쪽 끝 만주리(滿洲里)에서 온 학생, 동남쪽 끝 해남도(海南島)에서 온 학생, 서북쪽 끝 신강자치구(新疆自治區)의 우루무치나 카스에서 온 학생, 그리고 서남쪽 끝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의 라싸에서 온 학생들 등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학생들은 방학 중 대부분 기차를 이용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깝게는 10여 시간에서 멀게는 50여 시간까지 걸린다. 집이 먼 경우에 가고 오고 데만도 3~4일씩 걸리기 때문에 연휴를 2~3일로 했다가는 도저히 집에 다녀 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실용적인 중국인들이 생각한 제도가 7~8일을 연속해서 쉬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대체근무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정이나 국경절에는 원래 3일간 연휴인데 만약 월, 화, 수 3일이 공휴일이라면 목, 금, 토, 일까지 연속해서 쉬고, 목요일 금요일 이틀 동안 근무 못한 것을 그 전주 주말이나 그 다음주 주말에 대체근무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체근무 제도는 일반회사뿐만 아니라 공무원,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심지어는 대학교까지 통용되기 때문에 그 동안 나도 주중 수업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대체수업한 경우가 많이 있다.
중국의 기차는 크게 경좌(硬座), 연좌(软座), 경와(硬卧), 연와(软卧)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앞의 두 개는 좌석칸이고 뒤의 두 개는 침대칸이다. 가장 낮은 등급인 경좌에 한해서 50%의 학생할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비를 아끼려고 그 긴 귀로를 꼭 경좌를 타고 간다.
나도 예전에 연길에서 북경을 갈 때 침대표를 사지 못해서 경좌표를 사서 25시간을 앉아서 간 적이 있었는데, 기차에서 내린 후 완전히 녹초가 된 기억이 아직까지 새롭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북경에 도착한 다음 3일 이상 피곤이 안 풀려서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나는 연길에서 북경까지 25시간을 경좌를 타고 가본 이후 그 다음부터는 감히 경좌를 타고 갈 생각을 꿈에서 조차 하지 못했는데, 학생들은 대부분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심지어는 일주일정도 이어지는 구정연휴와 국경절 연휴에도 기차를 타고 집을 다녀온다.
언제가 한번은 집이 만주리라는 한 학생이 48시간을 경좌에 앉아서 아침에 서안에 도착해서 3, 4 교시 내 수업에 들어왔다고 하기에 내가 피곤할 테니 수업을 참석하지 말고 기숙사에서 쉬라고 해도 “메이 원티(没問題, 문제없습니다)”하고 끄떡없이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기야 아무리 멀다 한들, 아무리 힘들다 한들 부모형제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막을 것이 무에 있겠는가? 왕복 100시간을 앉아서 가야 한다고 해도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고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나면 피곤이 눈 녹듯 풀어질 것이다.
최연경양의 결혼식을 마친 다음날 중국 3대 고성(古城)이라는 평요고성(平遙古城)을 둘러본 다음, 산서성의 제2도시 대동(大同)으로 가서 오전에는 운강석굴(雲崗石窟)을 감상하였다. 그리고 오후에 하늘에 떠있는 있는 사찰이라는 이름의 현공사(懸空寺)와 북악항산(北岳恒山)에 올랐다.
운강석굴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65km 쯤 달려가자 평야가운데 우뚝 솟은 산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곳이 바로 오악(五岳)중에 북악(北岳)으로 유명한 항산(恒山)의 입구이다. 산을 바라보며 조금 더 다가가자 현공사가 나왔다.
항산이 오악중의 하나로서 옛날부터 그 위명을 떨치고 있지만, 오늘날 항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항산입구에 있는 현공사일 것이다. 현공사는 중국의 절벽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극한의 예술미를 보여주는 사원이다.
현재의 현공사는 지상에서 약 58미터 정도 위에 세워져 있어서 ‘하늘에 떠 있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였지만, 사실은 오랜 세월 동안 협곡바닥이 흙으로 메워져 올라와서 낮아진 것으로 현공사를 저음 지었을 때에는 바닥에서부터 90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었다고 한다.
현공사는 그 모습이 마치 비취색 병풍과 같다고 해서 취병산'(翠屛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한 봉우리의 북쪽 단애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북위시대 도교의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 365-448)의 “공중에 사원을 건립하라”을 유언을 받들은 제자 이교(李皎)가 북위태화(北魏太和) 15년(491年)에 건립한 사원으로 이후 역대 많은 왕조를 거치며 증개축 되어서 지금에 이르렀다.
비록 시작은 도교사원이었지만 현재의 현공사는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가 합류된 삼교(三敎)의 사원으로 현공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삼교전(三敎殿)에는 유불선(儒佛仙)의 3대 대표인물인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의 소상(塑像)이 함께 모셔져 있다. 이렇게 중국의 사원들이 유불선 삼교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이유는 크게 종교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종교적인 이유로 불교는 중국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신생종교로 민간에선 여전히 도교와 유교의 위세가 강했다. 불교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필히 기존의 민간종교인 유교와 도교를 안아야 했다. 그래서 유교와 도교의 창시자인 공자와 노자가 실은 모두 석가모니의 제자들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며 석가모니 옆에 유교와 도교의 창시자들을 함께 모시는 형태의 사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둘째, 정치적인 이유로 이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는 한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불교를 활용했다. 기존 한족의 종교인 도교나 유교 대신 이방 종교인 불교를 새로운 나라의 지배이념으로 삼아 북위의 황제들이 곧 부처라는 논리로 백성들을 감화, 지배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건물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오랜 건축기법인 ‘잔도’라는 건축방식 덕분이다. 잔도는 절벽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나무를 집어 넣은 후 그 위에 길을 만든 것으로 중국의 험한 산들에는 대부분 이 잔도로 길이 나있고, 지금도 잔도를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다.
현공사 역시 잔도 기법을 이용하여 건축하였는데 절벽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나무 보를 박아 넣은 후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나무 보의 길이는 7~8미터 가량인데, 구멍 속에 3분의 2 정도가 박혀있고 밖으로 튀어나온 3분의 1 정도가 건물을 지탱하도록 되어 있다. 밖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겨우 3미터 안팎으로 건축물 또한 당연히 좁을 수밖에 없다. 현공사의 전체면적은 152m2에 불과하나 40여칸의 전각(殿閣)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6개의 주요한 전각들은 모두 목조로 만든 계단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통행이 이루어진다.
예전에 건축적으로 현공사에서 주목 받는 부분은 지붕이라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지붕을 자세히 보니 정말 지붕 모양이 다 달랐다. 전통 건축에 쓰는 지붕양식 4가지가 모두 현공사의 건물들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현공사 아래 계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장관(壯觀)’이란 글자는 현공사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 글자는 당나라의 시선(詩仙) 이태백이 쓴 것으로 이태백은 계곡아래 강물에 띄어져 있는 배에 앉아 까마득히 먼 하늘위에 세워져 현공사를 올려다 보며 그 경치에 탄복하여 ‘장관’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남겼다고 한다.
현공사를 나와서 항산(恒山)으로 갔다. 항산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웅장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절벽, 그리고 깊은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는 모습만으로도 왜 항산이 오악중의 하나로 불리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항산은 원악(元岳) 또는 상산(常山)이라고도 불리며 주봉 천봉령(天峰岭)은 우리나라의 한라산과 비슷한 해발 2,017m이다. 그러나 넓은 평야가운데 갑자기 솟아난 웅장한 산세와 아찔한 절벽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산속 곳곳에는 수많은 도교사원들이 지어져 있어서 다른 사악(四岳)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나름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항산에는 팔선(八仙)의 하나인 장과로(张果老)가 은거하며 수행하였다고 하며, 서한(西汉, BC206~AD220) 초기부터 사묘(寺庙)들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명청(明清)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묘군(寺庙群)이 건립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항산 입구에는 도교 팔선중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조상이 서 있었다. 팔선열전(八仙列傳)의 장과로(張果老)편에 따르면 장과로(張果老)의 원래 이름은 장과(張果)로 존칭으로 노(老)자를 뒤에 붙여 장과로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장과는 당대(唐代)에 항주(恒州) 조산(條山)에 은거하던 신선으로 항상 흰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데 하루에도 수만 리씩 다니었고 쉴 때면 이것을 몇겹으로 접는데 그 두께가 종잇장과 같아서 건상(巾箱)과 같은 조그만한 상자곽 속에 넣어 두었다. 그러다가 타려고 하면 물을 뿌리는데 그러면 곧 당나귀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알 수가 없고 항상 백발 늙은이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장과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서하관(棲霞觀)에 가면 장과로가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시(詩)가 적혀 있다고 한다.
거출다소인(擧出多少人) 많은 사람을 들어보아도
무여저노한(無如這老漢) 이 노인 같은 이 없네
불시도기려(不是倒騎驢) 나귀를 거꾸로 탄 게 아니라
만사회두간(萬事回頭看) 모든 일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네
나귀는 도교와 불교에서 상징하는 의미가 깊다. 당나라 때의 고승인 영운선사(靈雲禪師)가 불법의 진리를 묻는 한 객승에게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다 가기 전에 말의 일이 온다)라는 화두(話頭)로 답했다.
불법에서 십이간지(十二干支)에 없는 여년(驢年, 당나귀 해)은 인생에서 영원히 닥쳐오지 않는 시간을 의미한다. 오지 않는 시간에서의 당나귀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비실재를 뜻하며, 이에 반해 말의 일은 실재하는 현재이다. 그러므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죽음과 삶, 공과 유의 대립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신선은 나귀를 거꾸로 타고 앉아 흘러가는 세상을 직시하며 무위(無爲)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했다. 나도 남은 인생 헛된 목표를 잡으려고 나귀를 재촉하는 그런 각박한 삶이 아니라, 물처럼 흘러가는 바람처럼 흘려 보내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길 잃은 나그네 항산의 소로에 서서 제 그림자에게 묻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가소한산로 / 당나라 무명시인
가소한산로 (可笑寒山路) 우습구나 내 가는 인생 길이여
이무거마종 (而無車馬蹤) 길에는 수레 자국 조차 없네
연계난기곡 (聯溪難記曲) 이어진 개울은 몇 구빈지 기억하기 어렵고
첩장부지중 (疊嶂不知重) 첩첩 싸인 가파른 산 몇 겹인 줄 몰라라
읍로천반초 (泣露千般草) 풀잎마다 눈물 같은 이슬 맺혀 있고
음풍일양송 (吟風一樣松) 소나무 가지마다 바람이 인다
차시미경처 (此時迷徑處) 이제 길 잃은 나그네는
형문영하종 (形問影何從) 제 그림자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