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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序1 1. 李中煥(1690-1752)의 생애1 2. 택리지의 사상적 배경2 3. <택리지>에 나타난 청담의 혈실파악상태와 의식세계 4 II. 택리지의 주요 내용6 1. 사민총론(四民總論)과 택지(擇地)6 2. 팔도총론(八道總論)7 3. 복거총론(卜居總論) 12 4. 총론(叢論)19 III. 택리지의 풍수적 연구20 1. 택리지의 풍수적 의미20 2. 택리지의 저술의 사회적 배경20 3. 택리지의 지리책으로서의 가치21 4. 택리지의 평가21
IV. 택리지는 풍수서인가의 논쟁22 1. 문제제기22 2. 풍수학은 지리학인가?23 3. 택리지와 풍수23 4. 私見24 |
I. 序
1. 李中煥(1690-1752)의 생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자는 휘조, 호는 청담 또는 청화산인이며 여주가 본관이다. 숙종 16년에 출생하였는데 참판 진휴의 아들이고, 찬성 상의 5대손이며, 우리 나라 대 실학자 성호 이익의 재종손이다. 24세 되던 해(1713) 증광 병과에 합격하였고, 김천 도찰방을 거쳐 병조 정랑으로서 봉직하였다.
당시 경종이 병약하여 노론파의 주장으로, 연잉군(후일 영조)을 왕세제로 삼아서 대리 청정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에 정인중이 왕체제를 업고 왕을 시역하려 한다는 목호룡의 고발로 인하여 정인중 이하 60여 인이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일시적으로는 성공하여 목호룡은 공신이 되었고, 이중환도 또한 이에 가담한 양으로 지목되었다. 경종 3년(1723) 2월에 이 무고 사건이 뒤집히면서 이중환도 목호룡과 함께 몰리게 도어 영조 원년(1725) 2월부터 4월까지 형을 네 차례나 받았다. 끝내 불복하여 영조 2년(1726) 12월, 섬으로 귀양 갔고, 영조 3년(1727) 10월에 풀려나왔으나, 12월에 사헌부의 징계로 다시 먼 지역으로 귀양 갔는데, 38세의 한창때였다. 이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63세(1752) 까지의 생활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길은 없다.
<택리지>를 저술한 연대도 정확하지는 않으나, 청담 자신이 쓴 발문에 “내가 황산강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일이 없어 --- 우연히 논술한 바가 있다.”하였다. 여하튼 그가 먼 지역으로 귀양가서 언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으며, 이 책을 저술하기까지의 생활도 전혀 알 길이 없으나, 동계기인의 발문에 “떠돌아 다니면서 살 집도 없어서 -- ” 한 것을 보면, 그는 동서로 유리걸식하면서 비참하게 지냈던 것이 틀림없는 듯하다. 그리하여 살만한 곳을 생각하게 되었고, 살만한 곳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생리(生利)를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택리지>는 결국 비참한 환경에서 경험으로 얻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택리지의 사상적 배경
우리 나라의 지리서 중에서 청담 이중환의 <택리지>만큼 많은 평가와 함께 애독되어온 책은 이제까지 별로 없는 듯하다. 이 <택리지>는 저자의 손에서 탈고되어 조선말까지 한 번도 인각된 적이 없으면서도 각종의 사본으로 시정(市井)에 전해 오는 것이 그 수를 모를 만큼 많다고 하며, 그 명칭도 <택리지>외에 <팔역지>․< 가저지>․<산수록>․<총화>․<길지총론> 등으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떠한 필요성과 평가기준에 의해서 그처럼 애독자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이 <택리지>에 관해서 이제까지의 내린 평가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택리지>는 사대부, 즉 양반계층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발견하는데 길잡이가 되는 귀중한 책이라는 점에서 널리 애독되었다. 이 책은 특히 당시의 실학파 학자들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당시의 사회 정치적인 사정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수의 지배층에 의한 권력독점으로 인하여 권력체제에서 떨어져 나온 몰락한 사대부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이익은 서울․경기 지방의 몰락한 사대부층의 생활에 대해서 “사(士)가 벼슬을 하지 못하면 살아갈 길조차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된다.”고 하고, 이 중에서 “사대부의 가세는 더욱 곤궁한 처지이다.”고 하였다. 실학은 바로 이들에 의하여 울흥되기 시작하였으며, <택리지>를 저술하게 된 동기의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 <택리지>는 우리 나라 인문지리학의 시초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우리 나라의 고전적 지리서는 거의 모두 조선건국 이후의 것들이다. 이 중에서 이 <택리지>의 편찬 이전의 것은 거의 모두 관찬사업, 즉 왕의 명령 혹은 고급관리들의 손에 의해 제작되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이 관찬지리서 모두 국가의 행정적인 필요와 왕권의 유지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은 그 좋은 예의 하나다. 요컨대 관찬지리서는 국가의 행정적인 필요와 왕권의 유지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택리지>는 그와는 달리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의 관계를 논술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인문 지리서였다. 일찍이 최남선은 이 <택리지>에 관해서 “우리 나라 지리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인문지리학의 처음 발명이다” 라고 한 바 있다.
위와 같은 평을 받아온 이 <택리지>는 어떠한 동기 및 과정에서 산출된 것일까? 한 개인의 사상이나 그것의 결정체인 저작물은 모두 시대적인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적인 산물은 아닌 것이며, 거기에는 각고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이중환의 <택리지>도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그의 고뇌에 찬 현실생활의 극기과정에서 산출된 것이다. 그러면 청담 이중환은 어떠한 동기와 필요에서 이 책을 서술하게 된 것이며, 또 이것은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그가 전국의 풍속과 지리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관직에서 탈락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몰락사대부들의 난처한 처지에 관해서 대략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사대부가 관직의 기회를 얻지 못하면, 산림으로 돌아가 파묻혀 있는 것이 고금에 통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조 3년 몇몇 사대부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난을 진압한 후 조정에서는 매양 산림 으슥한 곳에 큰 적이 숨어 있다가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대부가 돌아갈 곳은 과연 어디 있을까. 산림에 묻혀 있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 사이에 의심을 품으며, 중인․하인층보다 사대부계층을 더 한층 감시의 대상으로 주시하고 있다”하고, “초야에 있거나 조정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몸 둘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관직의 길에서 탈락된 사대부들의 난처한 입장을 일반적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청담 그 개인에게 직접 부딪쳐 있는 절박한 현실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동서남북 사방을 다 돌아보았으나, 어느 한 곳에서도 그 자신이 안주할 만한 곳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다시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며, 도리어 사대부라는 신분의 미명 때문에 정부 당국으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같은 처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정말 암담한 현실이요 절망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이같은 처지에서 그 자신이 반드시 해두어야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 같다. 여기에서 얻은 산물이 바로 이 <택리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한 시기는 1751년 첫여름 상순이라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2세, 그가 사망(63세)한 바로 그 앞의 해이다. 이로 볼 때 이 <택리지>는 그의 자서전과 같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택리지>의 발문 중에 “이 글을 넓게 보는 사람은 문자 밖에서 참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 있는데 특히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한 ‘문자 밖의 참뜻’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간단히 말할 수 없지만, 그 바로 앞의 구절을 다시 보면, 이것의 의미를 어느 정도 시사해주고 있는 것 같다. 생각건대 이것의 의미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다녀보아야 그런 곳은 없으니, 현재 살고 있는 그곳을 보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서 살아가라고 한 뜻이 아닐까? 이것은 그 자신의 능동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남이 나를 위해서 살기 좋은 곳을 절대로 만들어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주체적 노력, 이것만이 자기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요, 살기 좋은 곳을 구하는 최선을 방법인 것이다.
청담은 고뇌에 찬 현실의 생활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자주적 의식에 도달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망각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환경에 대한 것이다.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주자학적 대국적 세계주의에 매몰되어 주체성을 잃어버린 상태가 지속되어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 환경이었다. 모든 사고의 발상이라든가, 사물의 판단기준을 당시 우리의 실제실정에 입각한 파악이 아니라 대국-중국의 것, 주자학에 입각해서 발상․판단하였던 것이 당시의 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 나라의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갖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이었다. 청담은 그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서 이 어려운 과제를 극복하고 자아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청담은 우리 나라의 실지 실정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추구한 실학파학자들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청담 이중환의 사상과 그의 저서를 더욱 평가해야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다른 실학파 학자들에 비하면 남긴 저술이 지극해 적다. 이 <택리지>가 그이 유저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3. <택리지>에 나타난 청담의 혈실파악상태와 의식세계
이 책은 대체로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총론 네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중점은 팔도총론과 복거총론에 있다. 사민총론에서는 소위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으로 달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을 서술하였고, 팔도총론에서는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서술한 다음, 당시의 행정 구역인 팔도로 나누어서 그 지역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그 지역과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설명하여 인문 지리적인 성격을 띠었다.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만한 곳을 조건을 들어서 설명하였는데, 또한 인물과 관련된 부분도 많지만 그보다도 상업경제 관계를 많이 말하였다.
청담은 당시의 지배계급, 즉 사대부계층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들도 원래는 모두 평등한 인민이었는데,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사대부 계급, 즉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피지배 계급으로 분화되던 초기에는 이들 사이의 격차라든지 대립이 그렇게 격심하지 아니하였다 한다. 그는 계급이 분화되던 초기의 현상에 대해서 “옛적에는 사대부(士大夫)란 것이 없었고, 모두 같은 인민(人民)이었다. 이 인민 중에서 네 계층이 생겼는데, 士는 어질고 덕이 있으면 나라의 王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을 못하는 자는 農․工․商이 되었다.”(사민총론)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모두 평등하였는데, 벼슬을 한 자와 하지 못한 자, 이것이 사대부와 농공상의 민으로 갈라놓은 최대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배․피지배 계급의 분화 과정에 대한 그의 이 같은 평면적인 견해에 대해서 역사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면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의 의식만은 한번 중시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민(四民)의 등분(等分)이 단순히 직업상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지배 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이 같은 의식 작용은 당시의 지배 계급, 즉 사대부 계급의 사회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여기서 그의 사대부 사회에 대한 논평을 하나 더 예거하기로 하자. 그는 당시의 사대부 사회의 일반적인 인심과 그들의 상호간의 대립상에 대해 “대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심히 나쁘지 않은 곳이 없다”하고, 이들은 “당파를 만들어 유객(遊客)을 끌어 들이고, 권세를 부리며, 민중을 침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당파 싸움은 민중의 생활을 개선․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그들 상호간의 세력 다툼이요, 이권쟁탈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던가는 “조정에는 노론․소론․남인의 삼색 사이의 원한은 날로 깊어져 서로 연적이라는 죄명을 덮어 씌우고 있으며, 그 영향이 아래로는 지방 곳곳에 미쳐 하나의 전장을 이루고 있다” (복거총론 이라 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의 정계는 당파 간에 결사적인 항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청담은 원래 남인계열의 명문출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생활은 사대부 또는 당파 - 남인에 소속되어 있는 치인으로서의 것이 아니라, 절박한 현실에서 자신의 생존을 영위해 가려는 하나의 자연인 그대로였다. 이 같은 그의 현실적 생활은, 그로 하여금 객관적 입장에서 당시의 정치적 현상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청담은 정치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경제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견해를 남겨주고 있다. 그의 경제사상에 관한 것은 ‘복거총론’의 생리조(生利條)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첫머리는 “무엇으로서 생리(生利)를 논할 것인가.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벌써 바람․이슬로 식량을 대신하지 못하며, 깃․털로써 몸을 가리는 옷을 대신하지 못 한다”라고 한 구절부터 시작된다. 그는 결국 인간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생산 활동에 의해서 식량을 해결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리학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지론이요 사상이었다. 그가 말한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이란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제일이고, 배․수레와 사람 및 물자가 모여들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농업의 최적지란 ‘오곡과 목화 등을 심어서 잘 자라는 곳’이라 하고, “논에 볍씨 1말(두)을 종자로 해서 60두를 거둘 수 있는 곳이 제일이고, 4, 50두를 거두는 곳은 다음이며, 30두 이하인 곳은 땅이 메말라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 우리 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전라도의 남원․구례와 경상도의 성주․진주 등 몇 곳이 있다고 하고, 이곳은 논에 한말 종자를 뿌려서 최상은 140두를 거두고, 다음은 100두를 거두고, 최하로 80두를 거두는데, 여타 지방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의 벼농사의 상황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수확량에 엄청나게 많은 차이가 있다. 최고 140두에서 최하 30두 이하, 즉 동일면적당 약 5대 1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심한 격차가 생긴 원인을 순전히 토질에만 돌릴 수는 없을 듯하다. 더구나 당시 한말 종자를 뿌려서 60두가 생산되는 곳은 일반적으로 최상의 토지에 속한다고 하면서 전라도의 남원․구례와 경상도의 성주․진주 등지에서는 최고 140두까지의 수확을 거둔다고 하니, 이것은 단순히 토질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기술상의 문제도 따랐던 것이다.
청담은 벼 생산량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특수농작물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말한 당시의 우리 나라 특수 농작물의 종류와 이것의 생산지로서 가장 유명한 곳은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과 한산의 모시밭, 안동과 예안의 왕골밭’이라 하고, 부유한 지주나 상인들이 이것을 독점해서 이익을 보는 자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생산된 작물, 즉 담배․생강․왕골 등은 당초부터 자급자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판매를 전제로 한 생산이었음이 틀림없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부자들에게 매점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판매 전제로 한 생산품, 즉 상품은 상업발달의 기본요소이다. 사실 이 <택리지>는 당시 우리 나라의 상업 발달의 현황을 살펴보는 데 좋은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은 조선왕조의 상업에 대한 정책이다.
조선왕조의 건국 초기부터 상업의 발전을 억제해 왔다. 이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상업은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 같은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으며, 특히 이 후자의 발전이 거듭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상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발전을 가져왔다. ‘팔도총론’을 보면, 당시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지방도시로 성장한 곳이 수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 중 몇 개만 적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평안도의 평양․안주 두 곳은 “대도시가 되어 시장에는 북경의 상품이 많다.”고 하고, “상인으로 사신을 따라 왕래하는 자는 매양 엄청난 이윤을 얻어 부유한 자가 많다”고 한다. 함경도의 원산은 “어민들이 모여 살아 어업을 생계로 삼으면서 바닷길로 전국을 통행하고, 바다 위의 모든 상선이 다 여기에 항시 정박한다.” 고 하였다 그리고 “무릇 모든 산물이 다 여기에서 출하하고 강원․황해․평안․경기의 모든 상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주민들이 산물의 저장․유치와 판매로 업을 삼아 부자가 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경상도의 밀양은 “낙동강을 끼고 바다에 가까워서 한양의 상인들이 화물을 이곳에 적치하고 동래․왜관과 상호 무역의 이득을 보는 자가 많다”고 한다. 충청도의 은율․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바다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서 어부와 상인들이 모두 이곳에서 물건을 교역하는데, 매년 봄․여름 동안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을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을 넘치고, 크고 작은 상선들이 밤낮으로 담처럼 바다에 벌려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전국의 화물이 모여 산같이 쌓여 있다고 한다. 끝으로 경기도의 안성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화물이 운집하고 공인․상인들이 모여 상업도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열거된 도시는 농․수산물의 집산지와 육․해로를 통한 교역 교통로의 요행지에 발달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비단 위에서 열거한 도시뿐 아니라,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춘 지역은 거의 모두 신흥지방도시로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대략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우리 나라의 교역 교통로는 수륙양변 모두 발달되어 있었지만, 상인들은 수로보다 육로를 더욱 많이 이용하였던 것 같다. 이것의 주요 원인은 선박기술이 크게 진보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청담은 교역활동에 가장 이로운 운송수단인 배를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안타까움과 이에 따른 경제적인 손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말은 수레와 같지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므로, 온 나라의 상인들은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고 다닌다. 길이 멀고 노자로 허비되는 비용이 많으면 소득이 적다. 그러므로 말이나 수레보다는 배로써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 이윤이 훨씬 많이 남는다.”고 하고, “우리 나라의 동․서․남쪽은 모두 바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요컨대 우리 나라의 지리적 환경은 상선의 운용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가장 불리한 말(馬)로써 모든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주된 원인은 조선술의 미발달에 기인하였던 것이다. 청담이 위와 같이 당시의 물자의 운반 수단에 대해서 개선을 주장한 이래로 박지원․박제가 등의 북학파 학자들이 또 선박의 제조․활용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청담의 사상과 그의 현실에 대한 파악상태에 대해서 주로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주목할 만한 점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정치 현상에 대한 그의 비판은 객관적이었으며, 상업 경제적인 면에서의 관찰 태도는 거의 과학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로 조선 후기의 대지리학자로 불러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는 풍수지리적인 입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한계에서 온 것이며 이 한계는 시대적인 한계였다.
지리학에 있어서 위와 같은 그의 한계는 정치․사회․경제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의 신분적인 한계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한 예를 보기로 한다. 청담은 우리 나라의 재화산출․상품유통 등 상황에 대해서 소상히 논술하고, 이것의 결론으로 “ 비옥한 삼남지방에서 농사짓는 것보다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중계무역을 하는 자들이 훨씬 이윤을 많이 보고 있다.”고 했다. 즉 농업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훨씬 이롭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그는 또, “사대부로서 이런 일(상업)은 할 수 없으니, 다만 고기잡이나 소금 제조에 알맞은 곳을 골라 배를 두고, 그것으로써 생기는 이득을 받아서 관혼상제 四禮에 드는 비용에 보태는 것이야 무엇이 해로우랴.”고 했다. 여기서 그의 인식의 한계점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대부 신분의 소유자였으며, 결코 서민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신분적 위치와 현실적 생활의 괴리에서 오는 번민으로 고뇌하였던 것이다.
4. <택리지>의 구성
택리지는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 총론,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하에서 각각 그 주요 내용을 발췌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II. 택리지의 주요 내용
1. 사민총론(四民總論)과 택지(擇地)
백성을 사(士), 농(農), 공(工), 상(商)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사(士)는 사대부(士大夫)로서 사회의 지배계층에 해당하고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직분과 지위에 적합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땅히 살 만한 곳을 만든다. 그러나 시세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고, 지역에 좋고 나쁨이 있으며, 인사에도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나는 시기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2. 팔도총론(八道總論)
(1) 팔도의 위치
1) 팔도의 지명
조선의 땅은 팔도(八道)로 나뉘어 있는데 함경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그것이다. 각도의 지리적 위치는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고 있고, 강원도는 함경도의 남쪽에 계속된다. 평안도는 중국의 심양에 인접하고(淸의 고도 원래의 봉천), 황해도는 평안도의 남쪽에 계속하고, 경기도는 강원도·황해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경기도 남쪽은 충청도와 전라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전라도의 동쪽이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옛날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땅이다. 경기․충청․전라도는 옛 마한과 백제지역이다. 함경도·평안도·황해도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땅이었다.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濊貊)의 땅이었다.
2) 조선의 지세
동남서가 바다요, 다만 북쪽만이 여진·요심에 통하는데 산악이 많고 평야가 작다. 그 백성은 유순하고 근직하나 기량이 작다. 조선의 남북으로의 길이는 삼천리에 걸쳐있으나 동서로는 천리가 채 못 된다. 대외적으로 조선은 대체로 중국과 왜의 사이에 위치한다.
3) 조선이 성립되기 이전의 지리와 관련한 역사
고조선이 존재하다가 위만이 남하하면서 지배세력은 익산으로 세력을 옮기고 마한이라 하였다. 마한의 국경은 역사에 분명하지 않으나 진한·변한과 함께 삼한이라 한다. 혁거세는 한나라의 선제때 일어나 지금의 경상도를 모두 차지하고 진한·변한을 복속시키었으며 신라라 하였다. 경주를 서울로 정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주몽은 말갈에서 일어나 평양을 점거하고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그리고 주몽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 남하하여 부여를 서울로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백제는 지금의 전라도에 지역에 해당된다. 삼국이 성립하고 발전하다가 신라가 모든 세력을 누르고 국토를 차지하였다. 이후에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나 태조왕이 당대를 평정하고 고려를 세웠다.
(2) 평안도
평안도는 압록강(鴨綠江)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이후로 압록강의 이남을 경계로 삼았다. 평안도는 넓은 평야와 아름다운 산의 경치를 가지고 있다. 대동강 유역의 땅은 오곡과 면화의 재배에 적당하나, 둑과 시내가 적어서 오로지 밭곡식을 일삼는다. 하류에는 벽지도가 있어서 원주민들이 여기에 논을 만들어 일무(一畝)에 팔(八)석(서너말?)을 거둘만하였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서남쪽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에 이른다. 평양의 서쪽으로 백리에는 청천강이 흐르고, 과거 고구려 시기 수나라의 군사들이 얕은 개울로 알고 이르다 많은 수가 수몰하였다. 안주의 동쪽에는 영변부가 있는데 지형이 험준하여 철옹(鐵瓮)이라 부른다. 강계부는 수목이 우거지고 매년 춘추에 백성들이 채취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인삼이 많이 나서 삼산지(蔘産地)라 부르게 되었다. 의주는 국경의 중요한 지역으로 압록강과 닿아있다. 압록강에는 위화도라는 하중도가 있는데 태조가 여기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내고 고려의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아서 조선을 건립하였다. 대체로 청천강 이남을 청남이라 하는데 동서로 지형이 좁다. 평지가 적고 논이 없으며 거의가 밭으로 일궈져 있다. 청북은 지형이 높고 추우며 북방과 맞닿아 과실의 수확이 없고, 백성은 게으르고 구차히 산다. 오직 평양과 안주만이 큰 도회를 이루고 중국과의 거래가 많은 관계로 물자가 넉넉하다. 청남은 내지에 가깝고 풍속이 문학을 숭상하나, 청북은 풍속이 미개하고 무(武)를 숭상하지만 오직 정주(定州)에만 등과한 문사가 많다.
(3) 함경도
평안도의 동쪽을 백두산의 대맥이 남하하면서 하늘을 가르는 것 같이 높은 영(嶺)이 되었다. 이 영의 동쪽이 바로 함경도이다. 옛날 옥저의 땅으로, 남쪽은 철령(鐵嶺)이 한계가 되고 동북쪽은 두만강(豆滿江)이 한계가 된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이천리가 넘고 바다와 가깝고 동서로는 불과 백리다. 주몽의 점거지가 되었다가 여진인들이 살았으나 고려 중엽에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여진인을 몰아내고 강의 이북으로 칠백리에 있는 선춘령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 이후 김종서로 하여금 육진(六鎭)에 병영을 두어 백두산의 동남에 있던 여진의 근거지를 모두 우리의 판도에 두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강희제는 목극등으로 하여금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나누게 하였다(백두산 정계비-토문강의 위치가 분쟁의 여지로 작용하게 된다).
함흥이북으로는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굳세고 사납고 토지가 차고 메말라 곡식이라고는 오직 조와 보리 뿐 이고 메벼가 적고 면화가 전혀 없다. 원주민들의 성질이 마치 여진인과 같아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어 추위를 견딘다. 산에서 얻어지는 담비와 인삼으로 상인과의 교역으로 옷감을 얻는다. 바닷가의 생산은 풍족하나 황해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함흥읍은 문학을 숭상하고 등과를 하는 자도 있었다. 또 평야가 먼 데까지 펼쳐져 있으나 바다에 인접하여 거칠고 평양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함흥에는 태조가 살던 집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아들 태종이 사자를 보내어 모시어 오려 했으나 태조의 심지를 쉽게(易)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자 박순(朴淳)의 죽음으로 태조가 마음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안변과의 서북경계로 원산이 있는데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 한다. 동북은 해로로 육진에 통하며 육진 및 여러 읍에는 상선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룬다. 조정에서는 여기에 곡식창고를 짓고 흉년이 되면 풀어서 백성을 구제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조선건립이후 삼백 년 간 관리의 배출이 극히 드물었다. 대각에 오르는 이가 있다 하여도 극소수였다. 태조가 왕씨의 왕위를 대신하였던 만큼 그 좌명 공신도 또한 서북도의 맹장이 많았다. 이미 나라를 얻은 다음에는 "서북인은 크게 쓰지 말라" 하였다. 이곳의 풍토가 척박하고 성질이 드세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아니한 관계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4) 황해도
황해도는 경기도와 평안도의 사이에 위치한다. 백두산의 남맥이 함흥부의 서북에 이르러 검문령(檢門嶺)이 되고, 다시 남하하여 노인치(老人峙)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삼방치(三方峙)를 지나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일어 철령이 되고, 다른 하나는 서남행 하여 곡산을 지나 학령(鶴嶺)이 된다. 여기서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송악이 되고 이는 고려의 서울이 된다. 두 번째는 면악인데 이는 단군의 옛 서울이다. 셋 째는 곡산과 수안을 지나 자비령(慈悲嶺)과 절령( 嶺)이 되고 서쪽으로 황주 극성에서 그친다. 황주는 절령의 북쪽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경계를 이루게 된다. 수안·곡산·신계·토산 등은 산속에 위치하여 주민이 불순하고 도적이 많이 출몰하고, 예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적었다. 평산과 금천에는 등과한 이가 제법 된다. 서쪽 면악의 동록에는 화천동(花川洞)이 있다. 화천동은 청인(淸人)의 조묘지(祖墓地)라 한다. 여기는 평야가 널리 퍼져 있고 토지가 부유해 번창한 촌락이 많고 사대부도 나왔다. 극성의 평야는 동서로 넓이가 십여리이고 서쪽은 남오리강(南五里江) 하류에서 그친다. 강의 동서로 있는 촌락들은 토지가 대단히 비옥해서 오곡과 목화에 적당하다. 그리고 연철(鉛鐵)이 생산된다. 장산곶은 솔밭(松田)을 만들어 비상시의 궁전의 건축·배·수레 등의 제조에 이용되도록 준비하였다. 장산곶 북쪽 금사사(金沙寺)의 바닷가는 모래의 빛이 고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복어·해삼·성게가 나지만 토지는 메마르다. 다만 풍천과 은율은 비옥하여 수확량이 대단하다. 해주는 이율곡이 사당을 지어 학문을 강의하여 이 지역의 학문이 발달하지만 후에는 당파가 조직되어 악향(惡鄕)이라 불리며 주목된다. 해주의 동으로는 평야가 있고 경치가 빼어나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 있어서 납·철·면화·생선·소금의 이익이 있어 일부 부유한 사람이 많으나 사대부는 적다. 황해도는 옥야와 아름다운 평야가 있으나 천하의 다툼을 유발할 수 있는 요충의 땅이 될 터이니 이것이 본도의 단점이라 하겠다.
(5) 강원도
강원도는 함경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고 서북은 황해도와 이웃하고 서남은 경기·충청의 두 도와 인접한다. 영동에는 과거 예국의 서울인 강릉과 삼척, 울진이 있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천리에 이르나 동서로는 백리에 미치지 못한다. 척량산맥으로 이미 서북을 막고 동남은 멀리 바다와 통한다. 지세는 옹색하고 큰산 아래에 위치하나 산과 평야가 모두 낮고 평평하고 아름답다. 동해는 조수가 없고 맑아서 벽해(碧海)라고 부른다. 동해는 이름난 호수와 바위가 많아 경물이 전국에서 첫째이다. 관동팔경이라 부르는 여덟 가지 경치가 아름답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는 기승지가 많고 골짜기 등에는 그윽하고 물이 맑다. 사람들은 경치를 거닐고 유희를 즐겨 학문을 하는 이가 적다. 하지만 강릉에서는 급제자가 많다. 농업은 수확이 부족하다. 삼척이 유일하게 생산이 뛰어나다. 토지가 메마르지만 어업과 전업으로 부자가 많다. 촌민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한다. 영월에는 사육신의 묘지가 모셔져있다. 회양에서 정선 사이의 강은 서로 흘러 한강으로 이른다. 산의 경치는 좋으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다. 춘천은 인제의 서쪽에 위치하며 한양까지는 서남으로 이백리다. 과거 맥국의 서울로 소양강을 끼고 있다. 원주는 영월의 서쪽에 있으며 산골짜기의 고원분지가 열려있어서 맑고 깨끗하며 험준하지가 않다. 또 영동과 서울의 사이에 있어 동해의 어염과 인삼, 관락, 궁전의 재목을 운수하여 도회가 되었다. 북쪽의 횡성은 산골짜기가 있어 산이 평평하고 물이 맑다. 충주강의 하류는 오대산의 서쪽에서 적악산맥이 끊기고 강 외의 산이 막혀있어 자리가 좋다. 이는 서울로 통하고 주상으로 부자가 많고 사대부가 많은 곳이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예맥의 땅을 본거지로 일어나고 왕을 자처하였으나 잔학하여 후에 태조에게 쫒겨나게 되었다. 근래는 개간과 화전(火田)으로 숲이 줄고 인삼의 소출이 줄어들게 되었다. 홍수가 나면 토사가 유실되어 한강의 수심을 얕게 한다.
(6) 경상도
경상도는 지리가 가장 좋다. 강원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서로는 충청·전라와 인접한다. 북으로는 태백산이 있어 풍수가들은 하늘에 솟은 수성(水星)의 형국이라 한다. 좌측에서 시작한 지맥은 동래에서 그치고 우측에서 시작한 지맥은 소백·작성·주흘·회양·청화·속리·황악·덕유·지리산 등이 되어 남해에서 그친다(좌우는 서울에서 바라보는 입장). 두 지맥의 사이는 비옥한 편이다.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에서 시작하고 강은 김해로 흘러가 경상도의 중앙을 지난다. 강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로 나뉜다. 이 땅은 과거 신라의 땅으로 소위 계림군자국(鷄林君子國)이다. 지금은 동경을 두어서 다스린다. 신라는 태조에게 땅을 바치고 귀속 되었다. 신라시기에는 당과의 교류가 깊었다. 초기의 경상도에서 등과가 많이 이뤄져서 과거 정치의 판도를 잡았다. 선조 이후로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이가 적었다. 하지만 풍속이 훌륭하여 문과의 급제율이 전국에서 으뜸이다. 좌도의 땅은 메마른 탓에 검소하지만 학문에 정진하는 풍조가 이뤄져 있고 우도는 비옥하여 호사스럽지만 좌도에 비하여 학문열이 떨어진다. 본도의 사람들은 학문을 중시하고 서로의 의리를 중시한다. 시골의 한적한 곳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동래에는 왜인과의 거래가 이뤄지고 남해안 지역에는 왜의 도주가 머물며 조곡을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경상우도는 조령의 아래에 있다. 이는 한양으로 이르는 관문이다. 덕유산 부근의 토지는 비옥하고 특히 진주는 유능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7) 전라도
동으로는 경상도 북으로는 충청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백제의 땅으로 후삼국시기 견훤은 태조를 여러 번 공격하여 위태롭게 하였다. 고려가 견씨를 평정하고 난 후에 백제인을 미워한 나머지 "차령(車嶺) 이남인을 채용치 말라"고 하였다. 전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서남지방은 어염·메벼·실과·솜·모시와 닥·대나무·귤·유자와 감의 이익이 있다. 전라도의 풍속은 풍요로우나 학문을 하는 자가 적다. 덕유산은 충청·전라·경상도의 교차를 이루고 있다. 이 중 마이산의 한 지맥은 서남으로 달려 임실과 전주의 경계를 따라 하나는 서향하여 모악이 되어 만경·동진강에서 그친다. 다른 하나는 서남향하여 순창의 덕흥산이 되고 정읍의 노령이 되는데 이는 남북 통행의 대로이다. 노령에서 갈라지는 산맥은 서로는 영광에서 그치고 북으로는 부안 변산에서 그치고 동남으로는 담양 광주 하의 여러 산이 된다. 전주는 인구가 조밀하고 재화가 쌓여 서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전도에서 오직 전주만 맑고 조촐하며 가장 살 만하다. 예산은 충청과의 경계에 있고 좋지 않은 땅이다. 이에 반하여 강경·황산은 배가 머무는 곳이다. 탄현의 동은 고산현이고 용화의 남은 익산이다. 고산과 익산은 토지가 비옥해도 산세가 험해 살 곳이 못 된다. 모악의 서쪽 옥구·만경은 사람이 살 곳이 많다. 노령의 서로는 영광·함평·무안이 되고 남으로는 장성과 나주다. 법성포는 아름답고 동네가 열지어 있어서 소서호(少西湖)라 한다. 바다에 접한 여러 읍에는 조창을 두어 조운을 한다. 나주는 한양과 비슷하고 인물이 많다. 목포는 풍기가 화창하고 땅이 넓고 물자가 넉넉하여 광주와 함께 명읍이라 부른다. 전라도의 해안의 수심은 육지에서 토사의 유입으로 점차 낮아지고 있다. 영암은 중국과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부흥산의 동으로는 임실, 순창, 남원과 구례가 있어 모두 산악이 있는 군이다. 섬진강은 전라와 경상의 경계로 남원의 절경을 이룬다. 남원과 구례는 논이 많고 경치가 좋다. 임실에서 구례에 이르는 강변은 경치가 좋고 촌락이 많다. 구례는 지리산의 서쪽에 있어 과거에는 악토(惡土)라 했는데 근자에는 많이 맑아졌다. 광주는 나주에 통하며 풍기가 넓고 이름난 촌이다. 해남 강진은 탐라와 연결하는 곳으로 이익이 많다. 그러나 겨울에도 벌레가 동면하지 아니하고 장기가 서리고 일본에 가까워 살 곳이 못된다. 남해는 물살이 세고 급하여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10만의 왜군을 물리친 곳이라 한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있고 지방 산물이 넉넉하다. 흉년이 적고 수확이 많다. 그러나 본도는 멀리 떨어져있고 풍속이 다르므로 살 곳이 못된다.
(8) 충청도
경기도와 전라도의 사이에 있어서 서는 바다에 임하고 동은 경상도와 인접하고 동북은 강원의 충주와 인접한다. 본도의 반은 차령(車嶺) 이남에 있고 반은 위에 있어 경기와 이웃한다. 산물은 전라도, 경상도에 미치지 못하나 사대부가 많고 여기에 기반을 두고 근거하여 사는 사람이 많다. 서울과도 가까워 살기 적당하다. 충청은 내포를 가장 좋은 곳으로 삼는데 가야산 둘레의 십현을 통칭하는 것이다. 본토의 바다와 가까운 곳은 학질과 부스럼병이 많다. 산천이 평평하고 잘 짜여 있으나 뛰어난 맛이 적고, 구릉과 마른 땅과 젖은 땅이 아름답기는 하나 대자연의 기이한 경치가 드물다. 오직 보령이 산수가 좋다. 결성, 해미, 안면도는 큰 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태안, 서산이 있고 강화와는 하나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다. 서산의 동쪽은 은천, 당진이고 다시 큰 만을 사이에 두고 아산과 서로 대치한다. 북의 사면은 경기도의 남양과 화량과 사이에 작은 바다를 두고 마주본다. 여기서 뱃길로 왕래하면 한양과도 가깝다. 충청의 서쪽은 어염의 생산으로 이익이 크다. 성주산의 남으로는 서천, 한산, 임천인데 모시의 재배가 적당하고 그 이익이 전국에서 으뜸이며, 강과 바다의 사이에 적당하여 뱃길이 편하다. 정산, 정양은 토지가 장천이라 살 곳이 되지 못한다. 공주는 금강의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경계가 넓다. 금강은 공주의 북에서 다시 남하하여 다시 서로 기울어 바다로 흘러간다. 금강의 하류에는 평야가 있고 강의 내부까지 배가 드나들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강경지방은 우물대신에 빗물을 받아서 침전시켜 음용한다. 부여는 백제의 서울이고 산야가 평탄하고 논이 기름져서 살 만한 곳이며 공주의 서북은 석간수(石間水)가 많고 논이 기름지고 목화, 수수, 조를 갈기에 적당하고 사대부가 살기에 좋다. 공주의 유구는 어염의 이익을 독점한다. 추풍령은 평평하고 암석이 윤택하고 시내가 맑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도 쉬워 한(旱)재가 적다. 청산도 그러하다. 금산은 관개가 쉽고 경장지가 비옥하다. 괴산·청주·문경의 교차점에는 재목이 많고 거래가 이뤄진다. 북쪽의 진천은 청주에 비하여 평야가 적고 산이 많다. 그러나 큰 내가 있고 비옥하다. 안성과 직산은 바다와 가까워 이익을 얻는다. 청안은 산수가 촌스러워 살 곳이 못된다. 천안, 직산, 평택, 아산, 신창, 온양, 예산의 풍속은 서로 같다. 하지만 남쪽은 산골에 가까우며 토지가 기름지고 목화에 적당하고 북은 바다와 가까우며 토지의 메마름과 기름짐이 반반이다. 어염의 이득은 있으나 목화는 적당하지 않다. 서해안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하였고 여기서 거래가 이뤄지고 부자가 많다. 유궁포의 여러 읍중 예산만이 도회가 되었다. 아산과 온양, 충주는 사대부가 많고, 충주는 수륙으로 한양과 통하여 유사시는 반드시 싸우는 지역이 된다. 임진왜란때 신립이 여기서 패한 적 있다. 금천, 가흥, 말마리를 내창과 함께 충주의 사대촌이라 한다. 충주의 서북에는 탄금대가 있는데 우륵이 가야금을 여기서 탔다고 전해진다. 충주의 동북은 제천으로 지형이 높고 바람이 차고 토지가 척박하여 면화의 재배가 없고 부자가 적다. 북으로는 의림지가 있는데 과거 신라시대에 관개로 쓰였다 한다.
(9) 경기도
죽산과 여주는 충청과 경계한다. 죽산의 칠정산은 기호의 경계를 이루고 서북으로 뻗쳐서 수유현에서 끊어져 평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용인의 부아산이 되고 석성산 광교산이 된다. 광교산의 서북에서 관악이 되고 서쪽에서 수리산이 되어 서해로 들어 간다. 영주 영릉은 왕의 묘지가 있다. 중산 서쪽의 한남 여러 읍은 촌락이 쇠퇴하고 산수가 화장해 살 곳이 못된다. 수로는 충주에서 강을 따라 원주 양근을 돌아 광주 북쪽에 이르러 용진강을 만나 한양 앞의 강이 된다. 여주는 강남에서 첫째의 땅이다. 강남 기슭의 마암은 검룡소가 있다. 북쪽의 지평, 양근은 골짜기가 깊어 조광조가 복거하려던 곳이다. 광주는 유사시에 전장터가 되므로 살 곳이 되지 아니한다. 경기도의 서로는 인천, 부평, 김포가 있고 더욱 서로는 강화부가 있다. 강화부를 건너는 바다에는 손돌목이 있어 건너는 배가 조심하지 않으면 곧잘 부서진다. 강화부는 배를 대기가 수월치 않고 자연적으로 요새의 지형이라 외침을 받아도 강화까지 미치지 아니한다. 하지만 결국 몽골의 용골대가 강화부를 건너와서 패배시키었다. 수원의 동쪽은 양성, 안성인데 화물이 풍부해 도회를 이루고 수원의 북쪽은 과천이고 과천위로 십여리를 가면 서울의 남문(南門)이다. 백악은 형가(지형의 형국을 잡는 풍수가)에 말에 "충천(衝天)하는 목성(木星)의 형상이 궁성의 주산이 된다." 하였다. 신라의 중 도선은 "왕을 이을 자는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 할 것이다." 하였다. 고려의 후기에는 무학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였다. 서울의 외성은 눈이 내려 녹은 안쪽과 그렇지 않은 밖을 구분하여 경계를 삼았다. 서울 주위의 양주, 곤천, 가평, 영평은 동교가 되고 고양, 적성, 파주, 교하는 서교가 된다. 두 지방 모두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한양의 정면전면이 큰 강으로 막히고 오직 서쪽만이 황해도로 통한다. 도성에서 서로 오리만 가면 사현이 되고 사현고개 넘으면 녹번현인데 여기는 "한 사람이 관문을 맡으면 만 사람도 열지 못한다" 하였다. 본도의 북으로는 연천이 위치하고 마전의 북쪽에 사녕이 있다. 연천은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 만한 곳이 적다. 삭녕은 토지가 자못 좋고 강에 임하여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
3. 복거총론(卜居總論)
대저 살 곳을 택할 때에는 처음에 지리를 살피고 다음에 생리, 인심, 산수를 돌아본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은 못된다. 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아름답지 못하면 오래 살 곳이 못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좋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이 되지 못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아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고,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가 없다.
(1) 지리(地理)
지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말하는가? 첫째 수구를 보고 다음에 야세·산형·토색·수리·조산·조수 등을 본다. 즉, 먼저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 들의 형세를 본다. 다음에 산의 모양을 보고, 다음에는 흙의 빛깔을, 다음은 조산(祖山)과 조수(祖水)를 본다.
1) 수구(水口)
수구가 이지러지고 성글고 텅 비고 넓은 곳은 망하게 된다. 즉,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간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서 구할 것이다. 산중에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수구가 굳게 닫힌 곳을 찾기 어려우니,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물이 있어야 한다. 높은 산이나 그늘진 언덕이나, 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있게 판국(版局)을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 된다. 막은 것이 한 겹이라도 진실로 좋지만 세 겹, 다섯 겹이면 더욱 크게 좋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랜 세대를 이어 나갈 터가 된다.
2) 야세
야세는 들이 매우 넓으면 터는 굉장히 좋은 곳이다. 피할 곳은 사방의 산이 높아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좁고 작은 산에 사는 것보다는 넓은 들에 사는 것이 낫다. 즉 무릇 사람은 양명(陽明)한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는바, 하늘은 양명한 빛이니 하늘이 조금만 보이는 곳은 결코 살 곳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들이 넓을수록 터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과 비와 차고 더운 기후가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가 많이 나고 또 병도 적다. 사방 산이 높아서 해가 늦게 돋으면서 일찍 지고, 밤에는 북두성도 보이지 않는 곳은 가장 꺼리는 곳이다. 이런 곳은 양명한 빛이 적고 음랭한 기운이 쉽게 침입하여 혹 잡귀가 모여들기도 한다. 또 조석으로 산 안개와 장기(장氣)가 사람을 병들게 하기 쉽다. 이 때문에 산골에 사는 것이 들에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큰 들판에 낮은 산이 둘린 것은 산이라 하지 아니하고 모두 들이라 한다. 그것은 하늘빛이 막히지 아니하고, 수기(水氣)도 멀리 통하기 때문이다.
3) 산형
산형은 주산이 수려, 단정하고 청명하고 연약·아담하면 제일인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사방의 산이 멀리 있어 들이 널찍하고 산맥이 평지로 뻗어 내려 강을 만나 들 터를 이룬 곳이면 그 다음이 된다. 산맥은 나약하나 생기가 없고 산 모양이 무너지고 기울어진 곳은 길기가 적다.
높은 산중이라도 들이 펼쳐진 곳이라야 바야흐로 터가 된다. 무룻 산 모양은, 조종(祖宗)되는 산은 다락집이 치솟은 형세라야 좋다는 감여가의 말이 있다. 주산(主山)이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상(上)이다. 뒤에서 내려온 산맥이 끊어지지 아니하면서 들을 건너다가 갑자기 높고 큰 봉우리로 솟아나고, 지맥이 감싸 돌면서 골판(洞府)을 만들어 궁내(宮內)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나며, 주산의 형세가 온중(穩重)하고 풍대(豊大) 하여 겹집이나 높은 궁전 같은 것이 다음이다. 사방에 산이 멀리 있어서 평탄하고 넓으며, 산맥이 평지에 뻗어 내렸다가 물가에 그쳐서 들판 터를 만든 것이 또 그 다음이다. 가장 꺼리는 것은 산의 내맥(來脈)이 약하고 둔하면서 생생한 기색이 없거나, 혹 산 모양이 부서지고 비뚤어져서 길한 기운이 적은 곳이다. 땅에 생생한 빛과 길한 기운이 없으면 인재가 나지 않는다. 이러므로 산 모양을 살피지 아니할 수 없다.
4) 토색
토색은 흙과 모래가 굳고 조밀하면 우물이나 샘이 맑고 차다. 이런 곳은 살만 하다. 흙빛이 붉은 진흙, 검은 사력, 황토 등이면 죽은 흙이며 그런 땅 에서 솟는 물은 반드시 산장기가 낀다.
무릇 시골살이는 물 복판이나 물가를 가릴 것 없이, 토질이 사토(砂土)로서 굳고 촘촘하면 우물물도 맑고 차다. 이와 같은 곳이면 살 만한 곳이다. 만약 붉은 찰흙과 검은 자갈이든지, 또는 누런 질흙이면 이것은 죽은 흙이다. 그 땅에서 나는 우물물에는 반드시 장기가 있는데 이와 같아서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무룻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과 짝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생성하는 묘(妙)함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은 반드시 흘러오고 흘러감이 지리에 합당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정기를 모아 기르게 된다. 이런 것은 감여가의 술서가 있으니, 갖추어서 평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터는 묘터와는 다르다.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또한 시내와 간수(澗水) 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 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
5) 조산
무룻 조산에 혹 돌로 된 추악한 봉우리가 있든가, 혹 비뚤어진 외로운 봉우리가 있거나, 흑 무너지고 떨어지는 듯한 형상이 있든지, 흑 엿보고 넘겨보는 모양이 있거나, 혹 이상한 돌과 괴이한 바위가 산 위에나 산밑에 보이든지, 혹 긴 골짜기로 된 충사(沖砂)가 전후 좌우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살 수 없는 곳이다. 산은 반드시 멀리 있으면 맑게 빼어나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맑고 깨끗하여 사람이 한 번만 보아도 기쁨을 느끼며, 울퉁불퉁한 밉살스런 모양이 없으면 길한 것이다.
6) 조수
조수(朝水)라는 것은 물 너머의 물을 말하는 것이다. 작은 냇물이나 작은 시냇물은 역으로 흘러드는 것이 길하다. 그러나 큰 냇물이나 큰 강이 역으로 흘러드는 곳은 결코 좋지 못하다. 큰 물이 역으로 흘러드는 곳은 집터나 묘터를 논할 것 없이 처음에는 비록 흥왕하여도 오래되면 패망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곳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흘러드는 물은 반드시 산맥의 좌향과 음양 이치에 합치되어야 한다. 또 꾸불꾸불하게, 길고 멀게 흘러들어 올 것이고 일직선으로 활을 쏘는 듯한 곳은 좋지 못하다. 이런 까닭에 장차 집을 지어서 자손 대대로 전할 계획을 하려고 하면 지리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여섯 가지(수구 ·들 ·형세·산 모양 ·흙 빛깔·물길·조산 조수)가 긴요한 내용이다.
(2) 生利
어찌하여 생리를 논하는 것인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미 바람과 이슬을 음식 대신으로 삼지 못하고, 깃과 털로써 몸을 가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히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는 조상과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와 노비를 길러야 하니, 재리(財利)를 경영하여 넓히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득이 재리를 경영하며 살림을 넓히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소득재화를 구하여 힘입게 된다. 재화는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에도 부하게 된 다음에 가르친다 하시었다. 옷을 헐벗고 밥을 빌어먹게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돌보지 못하며, 처자의 윤리도 모르는 자에게 어찌 가만히 앉아서 도덕과 인의를 말하라 하였겠는가. 대저 세상 사람이 빈 명망에는 민감하면서, 실용은 버린 지가 오래 되었다. 매양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게 하는 까닭에, 남 몰래 악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체하는 자가 없지 아니하다. 이러므로 먼저 의식의 근원에 힘쓴 다음에 예의의 단서를 닦게 하여, 사람에게 악한 일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대저 푸른 소나무를 벗하고 횐 구름과 짝하며, 돌을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며, 아침 연기 속에서 밭을 갈고 저녁 달 아래 물을 긷는다는 그 명목이야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그러나 이것은 상고 때 예의가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민(民)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만약에 이런 것으로써 본(律)을 한다면 관례에 반드시 빈상(儐相 : 식을 주도하는 사람)을 모시지 않으며, 혼인에 반드시 친영(혼인할 때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다시 신랑 집에 와서 혼인 예식을 거행하는 일)하지 아니하며, 초상에 반드시 관(棺)을 갖추지 아니하고, 제사에 반드시 제기를 쓰지 아니할 것이니, 이런 일을 어찌 오늘날에 행할 수 있으랴. 까닭에 인생이 이 세상에 있어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는 모두 재물이 소용된다. 그런데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땅에서 생기므로 땅이 비옥한 것이 제일이다. 다음으로 배와 수레와 사람이 모여 서로 통하는 곳이라야 한다. 즉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제일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 땅이 기름지다는 것은 땅이 오곡 가꾸기에 알맞고, 또 목화 가꾸기에도 알맞은 것을 말한다. 논에 볍씨 한 말을 종자로 하여 70두를 거두는 곳이 제일이고, 40· 50두를 거두는 곳이 다음이며, 30두 이하인 곳은 땅이 메말라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비옥한 곳은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 경상도의 성주, 진주 등이다 경상좌도는 메말라 가난하고 우도는 기름지다. 전라도는 지리산의 곁에 자리 잡은 곳은 기름지다. 해안에 가까운 곳은 고을에 물이 없어서 가뭄이 많다. 충청도는 내포평야와 차령의 이남은 기름지고 메마른 땅이 반반이다. 한강의 북쪽은 메마르고 강원도에서 서쪽의 개성부까지 역시 메마르다. 강원도 영동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곳도 메마르고 황해도는 메마르고 기름진 곳이 반반이다. 평안도의 산속 고을은 메마르고 바다 주변의 땅은 비옥하다.
목화는 영남·호남이 잘 되는데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평안도의 들에서도 잘 된다. 그리고 진안, 연전, 강전, 임천, 한산, 안동, 예안에서 고루 재배된다. 물자의 운반에 있어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여 온 나라의 상고들은 거개가 말 등에 화물을 싣고 다닌다. 이런 까닭에 운송비가 많이 들어 이득이 적다. 이는 배에 싣고 운반하느니 못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지라 뱃길은 전국의 각지에 있고 모두 한양으로 통한다.
김해의 칠성포에서 상주까지 배가 드나든다. 서쪽으로는 진주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강 영광의 법성포 충주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 등지도 조수와 통하므로 상선이 드나든다. 은진의 강경은 상선이 모이는 곳이라 큰 도회를 이룬다. 한강은 용산까지 배가 드나들게 되었다. 많은 배가 여기에 정박하게 되었다. 평안도의 평양의 대동강과 안주의 청천강이 배를 통하여 이(利)를 본다. 삼남지방은 조창을 두어서 조운으로 수송하는 까닭에 수로에 조군(漕軍)을 두어 일년 내내 줄지어 수송한다. 평안도 함경도는 조운으로 납이 이뤄지지 않는 까닭에 수운이 없고 다만 평안도의 상선이 서울의 한강에 통래한다. 남한강은 배가 서로 통하여 상선이 수시로 이동하고 거래가 이뤄진다. 부유한 상인이 되면 일본과 중국의 연경과 통한다. 이러한 자는 한양에 많고 다음으로 개성이며 다음으로 평양과 안주가 많다.
(3) 人心
공자는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 하였고 맹모(孟母)의 삼천지교는 좋은 풍속을 좇은 것이다. 우리나라 팔도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하여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의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납고 모질고, 강원도는 산골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은 백성이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財利)에만 따른다.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민의 풍속이고 사대부의 풍속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후로 이중환은 붕당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인심이 흉흉해짐을 통탄한다. 나라의 인심이 사라지면 흉흉하고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가는데 낙이 없어진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의 인심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4) 산과 강(山水)
1) 산수총론(山水總論)
산수는 어찌하여 논하는 것인가. 대저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사람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만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매양 생각이 날 때마다 그 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옛날에 주부자(주자)가 무이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냇물 굽이와 봉우리 꼭대기마다에 글을 지어서 빛나게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다 살 집은 두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봄 동안에 저 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어서, 또한 제대로 나쁘지 않다." 하였다. 후세 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을 본으로 삼을 일이다.
백두산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안쪽이 우리나라다. 백두산에서 산맥이 한 복판으로 내려온다. 동쪽가지는 두만강으로 뻗고 서쪽의 가지는 압록강으로 뻗는다. 동쪽의 가지는 백리가 되지 못하나 서쪽은 산협이 끊이지 않고 내려와 남쪽 줄기로 약 천리를 내려가서 경상도의 태백산에 이르기까지 한줄기를 이룬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수(水)형이다. 강원도와 함경도의 사이에 철령을 두고 있다. 영(嶺)이라 함은 고개로 조금 낮고 평평한 곳을 말한다. 평안도 일도는 모두 함흥에서 뻗은 서북지역을 만들었다. 강원도 일도는 모두 영서에서 뻗어 내린 것으로 전국서 가장 짧다. 태백산맥은 좌우로 갈라져 좌편은 동해를 따라 남하하고 우편은 소백산의 남쪽으로 내려간다(이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좌우는 동서와 반대가 된다). 소백의 덕유산은 노령에서 갈라져 서쪽가지는 흩어져 남해의 여러 섬을 이룬다. 이중 가장 긴 것은 광양 백운산으로 남으로 달려 여러 섬이 된다. 전국의 수계는 등마루의 바깥쪽까지 모두 동해로 흐르고 경상도 일도 및 섬진강은 남으로 흐른다. 북쪽의 의주에서 남쪽의 나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2) 산(山)
이중환은 전라도와 평안도는 가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산에 대해 설명한다. 금강산은 모두 돌로 이뤄졌는데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다. 금강산은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명산이다. 설악산도 돌로 이뤄진 산인데 높고 험하고 낭떠러지를 이루며 그윽하고 깊고 싸늘하다. 오대산은 흙산으로 바위와 골짜기가 겹겹이 싸고 깊숙이 막혀있다. 태백·소백산도 흙산이나 그 흙빛이 수려하다. 두산 모두 동부의 낮고 평평한 곳에 있고 산허리의 위는 돌이 없는 까닭으로 비록 웅대하나 살기(殺氣)가 적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에 이르기까지는 대체로 한줄기 산맥으로 통한다. 속리산은 석세가 높고 크고 연꽃의 형상이다. 이곳의 물맛은 차고 맑고 물빛도 검푸르러 가히 사랑할 만하다. 덕유산은 꼭대기가 평평하다. 덕유산은 흙산이다. 여기는 구천동이 있고 물이 맑고 그윽하다. 또 성을 쌓고 여기에 사기와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지리산은 남해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두류산이라 하기도 한다. 산의 기운이 영험하고 지지(地誌)에는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온난하여 산 속에 밤, 대나무, 감이 절로 열고, 절로 진다 하였다. 청학동과 만수동이 있다고 전해진다. 경상일도는 석화성(石火性)이 없다 하였다. 해인사는 가야산에 위치하는데 팔만대장경판을 소유하고 있다. 안동의 척량산은 태백산맥이 내려오다가 예안강에서 멎은 것이다. 돌벽이 있으며 높고 기이한 모양이라 한다. 태백산과 소백산의 사이에는 부석사가 있는데 신라 때의 의상이 지팡이를 꽂은 터가 있다한다. 이후로는 유명한 절의 이름을 들고 있다.
3) 산형(山形)
무릇 산의 형체는 반드시 수려한 돌로 산봉우리를 이루어야 산도 수려해 보이고 물도 맑다. 반드시 강과 바다가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야 큰 힘이 있다. 이런 곳은 네 곳이 있는데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진잠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이 그것이다. 오관산은 도선이 수모본간(水母本幹)이라 하였고 산세가 극히 멀고 길다. 감여가들이 말하기를 주천토이다. 기세는 웅장하고 넓고 크며 의사는 크고 원만함을 포용한다. 오관산의 좌우로는 골짜기에 마을이 많다. 서쪽으로는 박연폭포, 동쪽으로는 화담이 있어 샘과 폭포가 아름답다. 한양의 삼각산은 도봉산과 잇댄 산세를 이룬다. 형세가 수많은 불꽃이 하늘로 치받는 것과 같다. 산은 보필이 없고 골짜기의 동네도 적다. 미더운 것이라면 남산의 한줄기가 거슬러서 판국(版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여가들은 정남의 방향이 좋지 못하다 한다. 계룡산은 웅장하기가 오관산에 못 미치고 수려함도 삼각산에 미치지 아니하다. 평지가 적고 동남이 또한 트이지 못하였다. 구월산은 산맥이 되돌아 원맥을 돌아다보는 지형이다. 서북은 바다에 면하였고 동남에서는 두 강물을 거슬러 받는다. 이외에는 춘천의 청평산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고 영험하다. 해미의 가야산은 흙산이고 가야사의 골짜기는 상고(上古) 상왕(象王)의 궁궐터이다. 비록 합천의 가야산만 못하나 해상의 경치가 아름답다. 남포의 성주산은 두산이 합해 큰 동네를 만든다. 이는 시내와 골짜기 동네 사이에 또한 살만하다. 노령의 한가지는 북에서 부안에 이르러 서해의 가운데로 들어간다. 서남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이것이 변산이 된다. 사람이 살수는 없으나 명승지라 할 만한 곳으로는 백운산이 있다. 영암의 월출산도 그러한데 돌 끝이 뾰족하다. 광주의 백운산은 도선이 도를 닦던 곳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순천의 조계산은 남쪽의 송광, 계동의 승지가 있다. 청송의 주방산은 모두 돌로 이뤄져 기이한 산이다. 이 밖에도 산이 많으나 샘과 돌이 없는 곳은 언급하지 않았다.
4) 해산(海山)
무릇 바다의 산 가운데에는 또한 기이한 곳이 많다. 제주도의 한라산은 영주산이라고도 하는데 산 위에 큰 못이 있다. 과거의 탐라국인데 신라때 복속되었다. 목장이 있어 준마가 생산된다. 완도는 전라도 강진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육지에서 십리 떨어져 있다. 이 섬은 과거 신라의 청해진으로 장보고가 웅거하던 섬이다. 울릉도는 강원도의 삼척부의 바다 가운데 있다. 맑은 날 높은 곳에 올라 보면 구름 같다. 이곳은 옛날의 우산국이다.
5) 산수승지(山水勝地)
산수의 경치가 좋은 곳은 마땅히 강원도의 영동지방이다. 여섯 호수사 절경을 이룬다. 삼일포는 마치 숙녀가 화장한 것같이 아름다워 절경을 이룬다. 경포대의 한 작은 산기슭이 동으로 뻗어서 고개마루가 된다. 호수의 둘레는 이십 여리이고 깊이는 낮아서 작은 배가 다니기 알맞다. 통천의 총석정은 금강산의 산기슭이다. 북쪽 바다의 가운데에는 세로로 갈라진 돌기둥이 있어 마치 목수들이 칼로 다룬 것과 같다. 함경도의 안변부도 경치가 빼어난데 그중 철령의 한 줄기는 동으로 해상을 달려서 전개되어 높은 일산이나 병풍을 벌린 듯이 아득히 그림과도 같다. 학포라는 큰 호수는 둘레가 삼십 여리이며 물이 깊으나 투명하고 맑다. 영동과 함경도의 경치가 전국에서 아름답다.
6) 사군산수(四郡山水)
영춘·단양·청풍·제천의 네 가지 군은 비록 충청도에 속하나 실은 한강의 상류에 위치하였다. 단양은 전 고을이 모두 여러 산 가운데 위치한다. 십 여리의 평야는 없으나 강과 시내바위의 승지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이담(二潭)과 삼석(三石)이라 부른다. 이중환 충청의 북쪽에 있는 네 군을 유심히 보고 그에 대한 세심한 경치를 나열하고 있다(네 군의 경치에 관한 언급이므로 간략하게 적었다).
7) 강거(江居)
대저 높은 산, 급한 물은 한때의 구경거리는 되나 살 곳으로 적당하지 아니하다. 그러나 음산하고 험악한 형상이 전혀 없을 경우 영기(靈氣)가 있어 살만한 곳이다. 강거는 평양 외성을 팔도의 최고로 친다. 평양은 기상이 크며 삼색이 수려하고 강은 유유히 흐른다. 산은 낮고 강은 대단히 넓어서 배가 다니고 성안과 성 밖에는 공청과 관속 그리고 평민이 산다. 시가는 가옥이 즐비하고 상가가 번화하다. 이곳은 배가 드나들어 장사를 하고 부자가 많다. 이밖에도 우리나라에는 공주, 상주, 나주, 목포, 광양, 진주, 부여 등이 강에 임하고 있다. 이들은 삼남의 중심에 있고 서울과도 통하여 살만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언급하지 않는다.
8) 계거(鷄居)
속담에 "계거(=시냇가)는 강거만 못하고 강거(강가)는 해거(바닷가)만 못하다" 하였다. 이는 재화를 통하고 어염의 획득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무릇 강에 임하여 집과 정자를 짓는 것은 어지러짐이 많아 흥망이 무성하다. 그러나 바다보다는 강이 강보다는 시내의 근처에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난세의 기준으로 일컽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계거지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이다. 도산은 산줄기가 합쳐지는 긴 산골짜기가 형성 되어있다. 산이 그리 높지 아니하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담하다. 하회는 황강의 물이 휘돌아 흘러 마을 앞에서 머물러 깊어진다. 여기의 정자는 모두 절경을 이룬다. 계고로는 오직 이 두 곳이 전국에서 첫째이다. 다음으로는 영주 서북방에 순흥부치와 죽계가 있다.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고 들은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다. "소백산과 태백산의 두산 아래와 한강의 상류는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 라는 말이 있다. 다음은 적등산의 남으로 용담에 주줄천이 있고 금산에 잠원천, 장수에 장계, 무주의 주계가 있다. 이들은 모두 지극히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다. 다음으로는 화령과 추풍령의 사이에 있는 안평계, 금계, 용화계가 있다. 이 삼계는 기름지고 교환이 잘 이뤄지고 청명한 기상이 있는 곳이다. 또 그 다음은 문경의 벙천인데 경치가 좋다. 또 다음은 속리산 북쪽의 괴산인데 뛰어난 경치와 유사시 피할 곳으로 적당하다. 다음은 원주의 주천은 지극히 좁은 산골짜기이나 제법 들이 열렸다. 산은 그리 높지 안고 물은 몹시 맑고 푸르나 논이 적어서 조로 연명한다. 이외에 충청도에서는 보령의 청라동, 홍주의 광천, 해미의 무릉동, 남포의 화계가 있다. 전라도는 남원의 요천, 흥덕의 장연, 장성의 봉연 이들은 모두 땅이 기름지고 생리가 밝아서 살만하다. 경기도에는 용인의 어비천, 강원도 원주의 안창계 일대와 횡성읍, 황해도는 해주의 죽천, 송화의 수회촌이 자못 시내와 산의 경치가 좋고 메마르지 아니하다. 무릇 산수라는 것은 정신을 기쁘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삶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들이 야비하게 된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기름지고 지리가 좋으며 생리도 좋은 곳을 택하여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4. 총론(叢論)
이중환은 기자조선을 강조하면서 언급하는데 기자의 자손이 선우씨가 되었고, 고구려는 고씨가 되었다. 신라는 여러 왕인 박(朴), 석(昔), 김(金)의 성씨가 모두 왕이 되었다. 신라의 말기부터 중국과 통하여 비로소 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가지지 못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이 개국할 때 명분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사대부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인품과 능력을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사대부가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 중에서 사대부로 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사대부는 나라에 쓰이지 아니하면 산 속에 사는 것이라고 이중환은 말한다. 이중환의 단일 생각인지 아니면 사대부들의 일부들 혹은 여러 사대부의 생각인지 알 수 없으나 사대부보다 평민으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는 농(農)·공(工)·상(商)의 이로움과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이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일종의 상대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동서남북 살 곳이 없다 하는 이가 있는데 이리하면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으며 사대부와 농(農), 공(工), 상(商)의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택리지는 여기서 끝맺고 책의 말미에는 팔역지발문(八域地跋文)이 있어 책의 성격과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고 정자(正字) 이중환의 업적을 기린다. 조선시기에 이러한 지리지를 집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저자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상의 택리지는 사대부를 비롯한 사람들의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자연의 조건과 환경적인 요소 그리고 인위적인 요소를 자세하게(일부는 추상적이지만...) 기록하고 있다. 그 조건으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그리고 산수(山水)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세부적인 요소로는 산(山), 물(水), 강(江), 바다(海), 시내(川), 사람(人), 산물(産物), 기후(氣候), 지형(地形), 명승지(名勝地), 논밭-들(田沓-野), 사람들의 성격(性格), 교통(交通), 상거래(商去來), 도회(都會), 인물(人物), 정치(政治), 그리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그 바탕으로 책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들의 종합적으로 설명된 것이 바로 택리지(擇里志)다.
III. 택리지의 풍수적 연구
1. 택리지의 풍수적 의미
택리지에서 논하는 것은 모두 양택풍수로 주택, 마을과 국도(國都)에 관한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현상과 사물을 평면으로 보지 많고 그 원인을 밝힘과 동시에 잘못도 예리하게 기술하였다. 당시 사대부 사회의 문제점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그 장단점을 논하고, 붕당정치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논하고 있다. 신임사화의 피해자로서 자신의 억울함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색이 다른 노론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시비를 가리고 있다. 이와 같은 냉정함은 오랫동안의 방랑생활을 통하여 내면적 인격수양이 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은 방랑기간에 우리 나라 각지를 답사하면서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의 상관관계, 지역과 인물의 배출, 지역적인 유사성과 차이점, 인구의 증가에 따른 산간 벽지의 개발 등을 몸소 체험하였다. 현장답사를 통한 체험은 그의 탁월한 시문의 재능을 자극시켜 가거지(可居地)를 후세에 전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택리지』가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만의 나열에서 벗어나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 설명, 즉 땅과 그 위의 인간을 이해하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국토를 표현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2. 택리지의 저술의 사회적 배경
조선 후기에 지리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의 발달 배경을 최영준은 두 가지로 요약 하였다. 첫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국토의 중요성과 재발견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兩難은 온 타의에 의해 전국 각지로 피란하는 민족 대이동을 하게 하였다. 그것이 비록 생존을 위한 고난의 여행이었을지라도 비로소 각 지방의 자연환경·산물·국토의 크기와 모양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지리적 지식을 얻게 되고, 동시에 明軍과 왜군 등 수십만의 외국인들을 접한 국제적 감각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이 영원히 살 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뿐이라는 점, 그리고 이 땅을 복구하려면 국토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지혜가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후기의 地理書들은 대부분 자연환경, 자원분포, 인구분포, 교통, 관방, 조세, 풍속과 생활 등 국가경영과 관련되는 문제들을 다루어 국토재건과 방어정책 수립의 기초자료로 활용토록 하였다.
둘째는 서양 과학과 淸학문의 도입으로 새로운 학풍 지리학의 전통 수립이다. 우선, 서양 과학 중 최초로 전래된 것은 타코 브라헤 (Tacho Brahe)의 우주체계에 관한 천문이론이다. 이 무렵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만든 한자 지명이 수록된 곤여만국전도 역시 조선에 반입되고, 163년에는 다시 리치가 만든 만국도설(萬國圖說)과 곤여만국전도의 수정본, 알레니(J. Alleni)신부의 직방외기(職方外記)가 입수되었다. 1644년에는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지구의(地球儀)를 가지고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1674년에는 페르비스트(F. Verbiest) 신부의 곤여전도와 곤여도설이 전래되었다. 이러한 서양의 지리서와 지도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지구는 둥글고 광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조선 후기 지리학 발달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또 하나의 학풍은 北學인데, 이것은 중국을 올바르게 인식토록 하였다. 특히, 다산(茶山)은 서양의 학술과 기술을 수용하여 이룩한 청조의 새로운 과학기술 문명을 강조하고, 이렇게 소수의 학자에 의해 도입된 외래학문은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탄생시켰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근대와 민족지향성의 성향을 지닌 학문정신에 입각하여, 실정·실증·실리의 학문을 추구하였으므로 자국 지리에 대한 실학적 연구를 진작하여 국토지리에 대하여도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다각적인 연구를 하였다. 『道路考』, 『山水考』, 『東國地誌』와 같은 자연지리와 地誌에 관한 연구물의 출현과, 풍수지리설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나 『擇里志』와 같은 인문지리서도 나왔다. 한편 실학자들에 의해 『東國地理誌』, 『灌域』, 『我邦强域考』나 『海東緣史地理考』등의 역사지리서가 출간되었다. 이 밖에도 실학자 들이 업어 낸 백과사전식 저술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역사지리적 논변도 실학시대의 지리학적 업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리서와 더불어 주목할 일은 실지답사의 검증을 거쳐 제작된 전국지도- 정상기의 「동국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도 당시 전통지리학이 거둔 큰 성과라 할 것이다. 이러한 조선 후기 지리학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사람은 김정호와 이중환 이었다.
3. 택리지의 지리책으로서의 가치
택리지는 우리 나라에서 실학이 발흥한 배경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한국지리책이다. 종전의 '동국여지승람'으로 대표되는 백과사전식 지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형의 지리서로 나타난 것이 택리지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유형원의 반계수록에도 서양의 과학적인 지리학의 면모가 나타났으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지구론, 지진론, 조석론 등 자연 지리적인 해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단편적으로 다루었으나 택리지는 우리 나라 전지역을 포함하는 유일한 종합적인 지리서이다.
4. 택리지의 평가
첫째로 『택리지』는 훌륭한 인문지리서이지만 풍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둘째로 자연과 안간과의 관계를 환경결정론적 시각으로 보았으며, 셋째로 지방에 대한 편견이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 특정지방에 관한 편견의 문제는 『택리지』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다. 각 지방의 인 심과 풍속에 대한 저자의 편견을 보면 전라도 · 황해도 · 강원도 · 함경도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였고, 경기도 · 경상도 · 평안도는 호의적으로 평하였다.
☞ 참고 : 可居地/避兵地/福地/隱居地/遊覽地
□ 가거지(可居地) : ①영원히 살만한 곳(1): 공주의 갑천들(甲川坪), ②가장 살만한 곳 (6) : 충북 보은 관대(館垈), 전북 전주 구만(九瀉), 전남 구례(九禮), 충남 금산(錦山), 연안의 보련강변(寶輦江邊), 황해도 연안의 백천(百川), ③진실로 살만한 곳(5) : 충주 금천(金遷), 충주 가흥(壽興), 순흥 죽계(竹溪), 해주 긍천, 송화 수회촌(水回), ④보통 살만한 곳(25) 만경(萬傾), 변산(邊山), 이천(停川), 금산 봉계(鳳溪), 대구 금호, 성주 가천(星州 伽川), 전주 율담(票漂). 청주 곡천(鵠川), 선산 감천(甘川), 계룡산 경천, 공주 이인(利仁), 공주 유구(維場), 공주 마곡(派谷), 회인(複人), 괴산(桃山), 가야산의 해미(海美), 남포 성주산(聖住山), 용인 어비천(魚肥川), 음죽 청영천, 화령(火嶺), 추풍령 (秋承嶺), 황주(養州), 재령(載寧), 봉산(鳳山) 등이다.
□ 피병지(避兵地, 8處) : 용담(龍潭), 의림지(義林地), 삼도(三島), 속리산(俗離山), 달 천(達川), 상류 정선(旅善), 안동의 네 곳(내성 춘양 소천 재산), 회양(灌陽) 등이다.
□ 복지(福地 11處) : 문경의 병천(槪川), 무풍(舞豊),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가야산 동북쪽 만수동(萬水洞), 지리산(智異山), 청화산(淸華山), 보령의 청라동(育蘿漏), 광천의 해미(海美), 하동의 화개(花開) 등이다.
□ 은거지(隱居地) : 원주 사지산 남두능동(南社陵洞), 영월의 주천(酒泉), 횡성 덕은촌 (德恩村), 속리산 을치(栗皓) 북쪽이다.
□ 일시의 유람지(遊覽地) : 청하의 내근산(內近山), 청송의 주방산(周房山)이다.
□ 불가거지(不可居地) : 충남의 여산(礪山), 은진(恩津), 남사천(南沙川), 금천(金川), 직산 북쪽 청안(淸安) 양근(楊根), 동래(東來), 남한산성, 영암(靈譜)등 동남 해상 8읍 왜구침입 가능의 곳
IV. 택리지는 풍수서인가의 논쟁
1. 문제제기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해 이 택리지가 풍수학 서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 있는 듯하다. 이에 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풍수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한국 근대지리학을 대표하는 택리지가 과연 풍수서적인가, 서울 定都가 풍수에 근거한 것인가, 풍수는 중국과는 다른 자생적인 것인가, 풍수는 서양지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인가 등을 두고 논쟁을 했다. 풍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풍수지리가 신비스런 요소가 본질로서 사회적 해독을 끼쳐왔고, 풍수는 과학적 객관적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풍수는 중국 황토지대 혈거족 사이에서 기원한 것으로 자생적인 것이 아니며, 서울정도 등 과거의 영향력은 과장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풍수를 옹호하는 입장(최창조 교수)에서는 잡술적 요소를 배제한 풍수는 풍수는 중요한 전통사상의 뿌리로서 한국적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을 중요대상으로 삼아 벽에 부딪힌 서양학문의 활로를 열어줄 가능성도 지녔다고 반박하고 있다. 최교수는 서양지라학의 그 꿈없는 비인간성에 절망한 오늘날 풍수에 대한 관심은 새롭다면서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땅을 단순한 흙과 돌무더기 집합정도로만 보지는 않았고 땅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더 나아가 우리의 모태로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풍수와는 다른 자생적 특성이 있다고 강조하는 그는 서울정도가 유학자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당시 땅에 대한 체계적 지식은 풍수와 지리가 혼융된 상태였고 관에 풍수전문기관이 있었고 왕조실록 등을 분석하면 한양으로의 천도가 주로 풍수에 의거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시간상 많은 자료를 참조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대적 입장에 있는 최영준 교수의 “풍수와 택리지”의 논문을 참고하여 그 논의를 요약하고 이에 대해 사견을 밝히고자 한다.
2. 풍수학은 지리학인가?
우리 나라가 풍수지리가 조선시대에는 서로 비슷하게 쓰였기도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 서양의 "geography"라는 학문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리학이라고 번역하는데 생긴 오류로 인식하고 있다. 즉 전래적으로 풍수와 지리를 같은 개념으로 생각되어온 우리나라의 풍토에서 "geography"를 지리학으로 번역하면서 풍수도 포함한 것처럼 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하에서 풍수학과 지리학의 차이에 대해 최영준 교수의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풍수는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직관으로 관찰한다. 즉 푸수사들은 땅을 그 형태, 크기, 경제적 가치에 따라 평가해서는 안되며, 땅도 인간처럼 의지와 감정을 가진 영적 존재로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땅 연구는 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술에 가까우며 풍수를 지리학으로 인정한다면 좋게 평가할 때 역학적 지리학이 되고, 나쁘게 평가할 때 유사과학적 원시지리학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성을 무시한 직관적 논리로 국토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데에는 부적당하기 때문에 풍수를 국토연구의 기본철학으로 용납하기 어렵다고 한다.
부연설명하면, 지리학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객관적․분석적으로 탐구하는 서양지리학은 땅을 광물 또는 무생물로 보고 동시에 인간의 집터 및 자원의 생산장소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풍수의 명당이 지리학에서는 중요시 되지 못하는 반면에 흉지가 오히려 요지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조 후기 실학사상이 대두되면서 비과학성, 비현실성, 비실용성이 강하게 지적되었다(박제가, 정약용 등)
② 풍수가 관연 공간질서를 탐구하는 학문인가로 풍수학이 지리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한다. 즉 풍수는 지역의 일반법칙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한 장소가 갖는 특성을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풍수가 지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③ 『조선의 풍수』를 쓴 일본학자 木村의 말을 인용하여, 풍수는 인간이 창조한 문화경관의 특성과 구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추상적인 자연의 氣에만 관심을 두며,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역리적․주술적 측면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지리학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한다. 이는 점성술을 천문학으로 인정하지 않고, 관상술을 심리학이나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地相을 보는 풍수를 지리학과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3. 택리지와 풍수
① 최영준 교수에 의하면 택리지는 조선시대의 지리서 가운데 한반도의 자연현상와 인문현상을 가장 논리적으로 체계있게 서술한 지리서이다. ☞ 사견으로 택지리의 내용을 보면 풍수학에서 말하는 곤륜산에서 출발한 한반도의 山系를 서술하고 있거나 水口 등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는 전통적인 음택에 기초한 풍수적 이론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고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이나 사람의 인심, 특산물 등에 대해서 논하면서, 필요한 경우 주관적인 해설을 가미한 지리학 인문서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② 복거총론에서 말하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와 지리의 세부항목으로 수구, 야세, 토색, 수리, 조산조수 등을 가지고 可居地/避兵地/福地/隱居地/遊覽地 등을 논하고 있는 바 (풍수의 전통적인 입장인 음택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이는 양택에 관하여 개략적인 기술로 보여진다라고 하고 있다. 사견으로 양택에 관한 이론을 다루면서 구체적으로 양택풍수에서 다루고 있는 풍수적 이론은 보여지지 않는다.
③ 地와 人을 별개의 존재로 보는 地人相關論의 입장에서 풍수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환경결정론(환경이 인물을 배출한다는 주의, 즉 자연적 요소 즉 풍수가 좋은 지역에서 좋은 인물이 나온다는 주의)을 비판하면서 인물은 산천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풍수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즉 택리지의 복거총론에서 “우리 나라에는 천리 되는 물과 백리되는 들이 없는 까닭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해 서융이나 여진처럼 모두 중국에 가서 제왕이 못되었다”라는 풍수사들의 주장에 대해 한반도에서 많은 명당이 풍수사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그런 인물이 안 나온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주장과 함께 교육의 힘이 중요한 예로, 코르시카라는 작은 섬에서 나폴레옹이 나왔고, 척박한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길러졌다는 반증을 들고 있다.
4. 私見
풍수는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이다. 즉 자연이다. 그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잘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 풍수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산 꼭대기에 나홀로 살 수도 없다. 택리지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 살기 위하여 구비되는 조건들이 다 충족될 수 있도록 최대한 고려하는 것이 풍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리적 조건이 삶에 부합하도록 하여야 하고, 삶에 있어서 먹고 사는 것이 관건이라 생각한다. 옛날 관을 중요시 한 것도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대의 명리학에서도 재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택리지의 생리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교류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 교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인심도 중요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람의 정서가 굴뚝있는 공장 지대보다는 공원이 있는 주택가 지역, 같은 주택가라도 경치가 좋은 풍치지구(경관지구)에 거처하면 마음이 편안한 것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그 정서적 안정을 위해 산수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취향은 현대의 별장 또는 전원주택 개념으로 연결되는 이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택리지에서 다루고 있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것도 풍수적 개념이 없더라도 누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양택을 구입하고자 할 때 경제적 여건이 허락된다면 최대한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에 마련할 것이다.
또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 눕는 음택도 풍광이 수려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양지바른 곳에 눕고자 할 것이다. 땅에 물이 베어나와 축축한 토는 싫어할 것이고 부드럽고 포근한 흙을 찾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느낌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할 것이다. 조상을 좋은 조건의 음택에 모심으로써 “동기감응”이 되어서 자손의 발복이 된다는 전통적 풍수이론도 맞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후손의 입장에서 조상을 좋은 곳에 모셨다는 안도감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심적 안정을 가져다 주고 그 심적 안정이 일상생활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작용하지 않나 쉽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항상 죄책감을 갖고 산다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풍수와 지리는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본다. 특히나 지리에는 경제적 관저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하여 개발이라는 논리가 가미되고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학문이라면, 인간이 인위적 노력을 할 수 없는 조건, 즉 주어진 자연적 조건하에서 가장 좋은 땅만을 찿는 그런 풍수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풍수에도 國域風水라는 것이 있어서 국토의 전체적인 모습이나 심지어 한반도와 동아시아, 또는 세계 속의 한국을 바라보는 입장이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는 주어진 조건하에서의 재해석에 불과한 것이지 인간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개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음택이라는 아주 조그만한 영역에서이든, 비교적 중소규모의 양택이든, 대규모의 국토개발의 영역에서이든 풍수라는 요소가 전혀 무시될 수 없다. 왜나하면 풍수가 주는 그런 술수적 혜택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고 자연과 인간의 가장 환경친화적으로 개발하는 데에는 풍수의 이론이 비록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수화 지리학은 구별되는 영역으로서 각자 하는 역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풍수적 관점으로만 지리학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지리학적 관점에서만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무시하는 개발논리만을 주장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결국은 어느 한 분야만이 독자적으로 타 분야를 배제하는 논리는 그 타당성이 없다고 보여진다. 서로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되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풍수를 포함한 술수측면에서의 동양학은 이제 비법이 횡횡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이론화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흔히 식자층에서는 혹세무민하는 잡술로 치부되어 더 이상 가치가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학문화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끊임없이 연구해서 이론화 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이중환 지음․이익성 옮김, 택리지, 을유문화사, 20011.1.
오세창, 택리지의 풍수지리학적 연구, 사회과학연구, 대구대 사회과학연구소, 11권1호, 2003.
최영준, 풍수와 택리지, 한국사시민강좌, 14, 일조각, 98-122면.
경향신문, 학계 『풍수논쟁』 가열, 1994년 5월 11일, 12면.
<참고사이트>
http://cafe.daum.net/hurrah2/2mcr/5?docid=HTc2|2mcr|5|20060111101845&q=%C5%C3%B8%AE%C1%F6%BF%E4%BE%E0
http://cafe.daum.net/candypull/LyFd/3?docid=krcv|LyFd|3|20051115090517&q=%C5%C3%B8%AE%C1%F6%BF%E4%BE%E0
http://blog.daum.net/marubo/495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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