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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문 밖에서 서성이는데….
그 누가 창백한 얼굴로 창문을 흔든다
서둘러 문 밖에 서니
수척한 계절은 저만치 가고 있다
몸도 마음도 비워 버린
수도승의 뒤태처럼 저만치 가고 있다
먼 하늘 뒤안길, 저녁별 지듯이
저만치 가고 있다.
// <가을> 석등 정용표._
그 누가 창백한 얼굴로 창문을 흔든다.
문 밖에 서니 수척한 계절이 저만치 가고 있다. 수도승 뒤태처럼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는 먼길 떠나는 가을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하여 서둘러 바람을 타고 길을 나선다. 지금 즈음 백두대간은 화신火神의 뜨거운 화무火舞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으리라. 백척간두로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은 첩첩의 골산인 설악을 넘고, 넘어 오대산을 넘어, 치악산(雉嶽山, 1288m)으로 번지고 있으리라. 육신을 사르는 그 불길은 한반도의 등뼈를 타고 삼천리에 장엄하게 타오르리라.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로에 몸을 띄운다. 마른땅 적시며 굽이굽이 휘돌아온, 아침 안개 자욱한 남한강을 건너 그 지류인 섬강에 이르자 산천은 온통 수채화 물감을 풀고 있는 듯했다. 만종萬鍾에 이르러 저 눈부신 손짓에 차를 멈췄다. 만 가지 기원을 담은 종소리도 아름다운 화폭에 잠시 넋을 놓고 있는 듯 고요했다. 행려의 객은 저 고운 빛깔들을 커피와 함께 마신다. 황홀하게 물든 가을 낙엽과 미각을 유혹하는 은은한 커피향, 자욱한 아침 안개와 치렁치렁 감겨오는 가을 바람의 여유로움은 바람처럼 길을 나선 이방인이 누리는 호사로운 자유일 터. 달리는 차창엔 길길이 드러누운 듬직듬직한 산군들이 대간의 지맥을 따라 칠보의 몸단장이 한창이었다. 곱게 몸 단장하는 칠보의 저 속살은 얼마나 희고 고울까 싶었다. 이윽고 새말 나들목으로 부드럽게 흘러든 행려의 객은 구룡사 주차장에 발을 딛는다. 집을 나선지 두 시간만인 오전 8시 10분.
치악골의 가을은 완연하다.
깊은 산골의 쌉쌀한 갈바람이 목덜미에 감겨온다. 등산화로 갈아 신고, 배낭을 둘러메며 산문으로 뚜벅뚜벅 걸음한다. 노란 잎새들이 흩날려 발등 위로 굴러간다. 마지막 가는 샛노란 잎새들이 눈물나게 저리도 곱던가. 뒹구는 낙엽들이 계절의 처연함을 더해 주는 이 가을 운치의 백미 앞에 문득, 세기의 연인이었던 이브 몽땅(Yves Montand)의 불후의 명곡 <고엽>이 떠오른다.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했던 음영 짙은 빼어난 풍모의 우수에 젖은 감미로운 목소리가 털목도리처럼 감겨 오는 듯했다.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추억과 회한도 함께…. 망각의 싸늘한 밤, 난 잊지 않았어요. 그대가 내게 들려주었던 그 노래를…." 사람은 가고, 그 노래는 남아 오늘도 쓸쓸하고 외로운 가슴마다에 위안이 되고. 적막한 가슴마다에 스며들어 그 마음을 달래어 주고 있다. 길섶의 낙엽엔 차가운 한로寒露가 맺혀 있다. 한로와 눈을 맞췄다. 한로는 애틋한 별리에 목이 메인 듯 붉은 눈물방울을 달고 있다.
구룡계곡에 발을 딛는다.
명경 같은 계곡물이 한 옥타브 높은 옥구슬 톤으로 흐른다. 잠시 내려가 손을 담그니 차고 시리다. 문득, 서른 다섯 해 전, 이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세 아가씨가 계곡물에 어른거린다. 그녀들 중 한 아가씨는 살구꽃같은 미모였다. 그날 나는 12월의 매큼한 바람을 뚫고 서울에서 홀로 비박장비를 메고 열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이 깊은 산골로 걸음하였다. 눈 내린 하얀 신길을 걸어 구룡사 못 미친 계곡 어디 쯤에서 하룻 밤 묵을 짐을 푼 그날 밤, 치악의 살 떨리는 한기에 내몰려 밤새 오들오들 떨다가 새벽녘에 잠시 단꿈 속으로 떨어진 동틀 무렵, 건너편 아가씨들이 밥 지을 불을 못 지펴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삭정이를 한아름해서 불을 지펴 줬더니, 그 답례로 아침식사 대접이 차려졌다. 밤새 냉기에 떨었던 터여서 언 속을 녹여주었던 뜨거운 냄비의 하얀 쌀밥과 그 찌개 맛은 지금도 아련하다.
젊은 여인들이여! 아름다운 봄꽃 같았던 여인들이여! 내 이제사 실토하오. 그날 아무 말없이 꾸역꾸역 밥만 먹은 뒤 “고맙다”는 짧은 말만 남긴 채, 겸연쩍게 자리를 떠났던 그 청년은 결코 그런 사내가 아니 었다오. 그 사내 가슴엔 무쇠를 녹이는 이글거리는 뜨거운 불덩어리를 품고 있었다오. 비록 말 없어 얌전하게 비췄을지 모르나, 그 청년은 산을 허물고 바위를 녹이는 가슴 불타는 사내였다오. 어찌 그 불덩어리 없이 살 떨리는 초동初冬의 그 깊은 시린 계곡의 겨울을 홀로 찾아 들었으리오. 이렇듯 아침 이슬 영롱한 봄꽃 위에 호랑나비 날던 미망(未忘)의 기억들이 저 가을 계곡에 하얀 망초꽃처럼 피어난다. 그때 내 나이 스물 하고 여섯, 이 치악산과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며, 이번이 세 번째다.
*구룡사 사천왕문과 200살 된 샛노란 은행나무는 그 수관이 참 아름다웠다.*
구룡사龜龍寺다.
아홉 마리의 용에 얽힌 전설이 먼저 떠올라 아옵 구九자의 구룡사九龍寺로 여겼으나, 현판엔 거북 구(龜)자가 걸려 있다. 기록엔 서기 668년(신라 문무왕 8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천하 승지의 명당자리 였으나, 이 사찰이 한 때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다. 그때 풍수에 능한 한 스님이 길을 지나가면서 폐사廢寺 된 이유가 "이 절 입구의 거북바위의 혈맥을 끊어버려 그 운이 막힌 것이라." 하여, 절명을 아홉구(九) 대신에 거북 구(龜)자를 쓰서 오늘의 명찰에 이르렀다 한다. 한 번 쯤 허연 백발에 흰도포자락 날리는 선각의 예지가 비범한 신선 같은 선골풍의 도인道人을 만나, 내 신수身數에 깃든 기수氣數의 천운를 봤으면 싶은 생각이 스친다.
구룡사 경내는 불사를 일으키는 기중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절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기실, 이 나라 안의 모든 절들이 재정이 나아졌다 싶으면 불문곡직 불사를 일으킨다. 그렇게 삐까번쩍한 광발을 내야 극락왕생하는지 모르겠으되, 절은 고색창연한 맛이 살아 있어야 한다. 도량道場이란 그윽히 깊은 참맛이 우러나야 하리라. 중이 속가를 떠나는 본질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허욕을 벗고, 시간을 벗고, 인간을 벗는 일일 게다. 그런 고행의 과정과 시간을 거슬러 부처의 마음과 계합契合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비워야 하며 자신의 전생를 처절하게 도려내어 관음觀音따라 포시해야 하리라. 그 길은 어쩌면 백조의 나래를 타고 영원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간이 세속의 광발과 명리를 좇는다면 아귀다툼의 박덕한 속심俗心과 다를 봐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숫제 나라 안의 모든 종교단체에도 국세와 지방세를 거두어 들여야 하리라. 이 점은 내 불변의 시각이다. 저들에게 세제상의 특혜와 면책을 주는 이유가 그 어디멘가. 위대한 성자인 석가모니와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물신 숭배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계시하였던가. 나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세렴폭포를 돌아나와 사다리병창길 초입에 선다.
치악으로 치면 이 코스가 최고의 난 코스인 셈이다. 이곳에 가을 산빛이 황홀하게 타오르고 있다. 단풍이 저리도 곱고 아름답게 물드는 것은 고달프게 부대끼며 살아온 한생을 무던히 잘 견뎌온 삶의 시간들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바람 잘 날 없는 날에 한여름 폭양의 목이 타는 가뭄과 천둥과 비바람에 찢기고 아파하며 파란의 생애가 빚어낸 삶의 빛깔일 터이다. 치악산은 본디 가을단풍이 색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적악산(赤嶽山)이라 불렀으나, 구렁이에게 꿩의 목숨을 구해준 선비가 그 꿩의 보은報恩으로 구렁이로부터 위기의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서 꿩 치(雉)자를 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주봉인 비로봉(1,288m)을 비롯하여 향로봉(1,043m)과 남대봉(1,182m) 등 1,000m 이상의 고봉들이 웅장한 골격을 형성하며 차령산맥을 내달린다.
*적악산으로 불렸던 치악산의 붉은 단풍*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사다리병창길이다.
하지만 곱게 내린 단풍들이 바람처럼 길을 나선 산객의 마음에 붉은 주단을 펼치 듯 떠나는 계절의 처연한 감동으로 채색되어 다가온다. 이곳의 사다리병창이란 뜻은 산정 비로봉으로 통하는 능선의 형태가 사다리 형태를 말하며, “병창”은 영서지방 방언으로 벼랑, 절벽을 뜻한다. 월악산(1,097m)의 등반 코스 중 덕주사에서 마애불을 거쳐 영봉으로 드는 깎아지르는 단애의 코스와 이 사다리병창코스가 서로 막상막하의 쌍벽을 이루는 듯하다. 치악의 불길은 6.7부 능선까지 번지고 있었다. 저 타오르는 불길에 취해 커메라 셔터를 쉴새 없이 눌렀다. 얼마나 정신없이 눌러댔던지, 지나가는 어느 산객이 “연사連射로 촬영하시나 봐요”한다. 통상 촬영에 심취하다 보면 가끔 낯선 이로부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을 때가 있다” 이참에 고백하거니와, 나 같은 사람은 사진영상에 대해선 시러베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그렇고, 그 예술성이나 영상기술이나 평론 등의 측면에선 허드레 축에도 들지 못한다. 단지 카메라를 잡았을 땐 피사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내느냐에 비중을 두는 편이다. 가끔 나처럼 어설픈 사람에게 과분한 제안을 주신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윽고 8부 능선에 이르러 나뭇가지는 하얀 맨살을 드러낸다.
이쯤해서 카메라를 내리고 돌팍에 엉덩이를 붙이고 첫 목을 축인다. 목구멍으로 녹아드는 물 맛이 감로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비췻빛 하늘아래 빛바랜 나뭇잎이 가지 끝에서 팔랑거린다. 수척할대로 수척하여 나풀거린다. 천지에 흩날리며 뒹구는 낙엽을 지켜보는 일과 앙상한 뼈대만 남아 겨울바람에 감기는 나목을 지켜보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적막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가 되면 삶의 변방으로 물러나 차가운 저녁별 지듯이 생의 종장終場으로 가는 길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나 저 나뭇잎이나 하늘아래 모든 미물 역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본질은 다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나이 벌써 이순耳順이다. 나뭇가지에 메달린 저 수척한 이파리처럼 내가 이 지상에 머물 시간의 여백이 얼마일까 싶다. 그래서 난 요새 나의 요원한 꿈의 한 조각이었던 유토피아를 찾아나서고 있다. 오랜 지기같이 정이 가는 고즈넉한 나만의 둥지를 하나 찾고 있는 것이다. 비 내린 젖은 날이나 그런 날의 오후, 눈 내리는 날, 낙엽이 흩날리는 날이면 이 메마른 사막과 같은 도시를 고즈넉이 떠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마당 깊은 그곳에서 며칠씩이나 혼자 머물며 차를 끓여 마시며, 붓을 들고 그림을 좀 그리고 싶은 것이다. 혼자 글을 쓰고, 사진도 담으며, 산책도 하고, 산길도 걸으며, 인생마저 내려놓을 아늑한듯 소박한 꿈의 둥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핍진한 이승의 길 위에 삶이 팍팍하고, 이 삶에 염증이 돌 때마다 나는 이 로망을 피안彼岸으로 떠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곳은 소리없이 한 잎 꽃잎이 지 듯,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육신의 아름다운 에필로그의 흔적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에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진행형 따라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로 꼽히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최적의 이상향의 낙토樂土로 꼽은 “청화산"靑華山의 산수를 직접 돌아봤다. 한나절 그곳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어제의 생각이 오늘 변하듯 세월이 참으로 무상했다. 아득히 흘러온 세월은 쉼없이 변하고 있었으며, 그 세월의 물살에 실려온 사람들의 관념이나 사상이나 그 개념 역시 부단히 변한다는 것을 느끼며 그 길을 돌아섰다.
이윽고 정상인 비로봉에 선다.
엄청난 산객들로 산정의 열기가 후끈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굽이치는 풍광들이 무극無極으로 흐른다. 끊어질 듯 말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저 초연한 선형線形의 선미線가 영원의 그리움처럼 가슴으로 흘러든다. 하늘 맞닿은 산마루에 서면 나는 늘 굽이치는 저 허공은 이승을 떠나는 인간이 영원으로 드는 참회의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한없이 부드럽게 흐르는 저 우련한 풍광을 바라볼 때마다 더 할 수 없이 마음은 평안하고 평화로워지며, 세상 삶의 지난함을 잊는다. 막힘없이 트인 이곳 산정에 세 기의 큰 미륵불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 돌탑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준 옹의 꿈에 신이 나타나 비로봉에 삼년 안에 삼 기의 돌탑을 쌓으라는 계시가 있어서 혼자 탑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불탑 중 남쪽엔 용왕탑이 자리하고, 가운데 산신탑, 그리고 북쪽에 칠성탑이 거의 일직선상으로 축조돼 있다. 아마 그 탑들은 비와 물水을 다스리고, 이 치악산을 다스리며, 그리고 인간의 명(命)과 재복(財福)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리라 유추된다. 돌탑 주위로 몰려든 산객들은 저마다 기념 촬영과 자리 깔아 식사에 여념이 없다.
비로봉毘盧峰. 우리나라 산 중에는 비로봉이란 이름이 참 많다.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 팔공산 비로봉(1,193m) 금강산 비로봉 등등이 그렇다. 여기서 비로毘盧란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불교 용어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원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비로자나불을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로 부르는 부처다. 사찰의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 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 되는 부처님이 석가모니다. 그래서 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비로봉毘盧峰이라 한다. 비로봉이 지상의 최고 높이에서 하늘과 손을 맞잡고 있음을 볼 때, 비로毘盧는 지상 최고의 지존과 존엄을 뜻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산 길에 든다.
오늘도 허다한 사람들이 차가운 보석 같은 네온사인 번쩍이는 도시에서 비좁고 이기적인 삶에 급급해 있을진데, 하늘 맞닿은 저 초연한 산봉우리는 어쩌면 지상의 마지막 구원의 봉우리요, 그 땅인지도 모른다. 하산길로 접어든 계곡은 거친 너덜 지대가 펼쳐지며 야성의 자연미가 그대로 느껴진다. 진종일 산길 걸었던 고단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주차장에 도착하니, 하루해가 설핏하다. 그 길 위에서 세상 근심 끊는 행복한 하루였다.
이윽고 머리가 희끗한 이순耳順의 허름한 사내 하나가 저만치 삶의 고단한 파다라이스를 느끼며 처연한 계절 속으로 사라진다.
치악산 가을 배웅 길에서._석등 정용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