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귀뚜라미>
귀뚜라미
울음낭 터뜨리고
나 대신 누가 우는가
가을을 끌어안고
밤새워 누가 우는가
그믐달
새벽이슬 밟으며
한 사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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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올리는 잔
- 부부총*에서
삭은 뼈 우는 소리 온 산을 적십니다
후생의 밥그릇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제 가슴 후벼 파는가 바람마저 각혈하는
그대 곁에 진설하는 맵고 짠 상처 한 상床
뾰루지로 솟아올라 깨진 접시 이 맞추듯
복제품 금동관 씌워 허깨비로 웃습니다
굽다리 높은 잔에 눈물 가득 퍼 올리면
낙엽 한 장 동동 떠서 비사 읽는 해종일을
서릿발 붉은 입술로 박차소리 뜨겁습니다
* 1920년 일본이 수탈해간 양산시 북정리 부부총의 유물을 도쿄박물관으로부터 2013년 10월 15일부터 3개월간 빌려 양산박물관에서 67점을 전시하였으나 금동관은 빌리지 못해 복제품을 전시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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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닝하는 사회
책상 위 깨알들이 스멀스멀 기어간다
감독관 들어오며 일어서라 줄 바꾸라 도끼눈 쌍심지가 제대로 돌아간다. 옆 사람 답안지를 두리번 일별하고 짧은 치마 스타킹 속 돌돌 만 페이퍼에 볼펜 속 두루마리 귀신같이 꺼내보는 꽃먹물 거동 보소, 남의 글 베끼기는 누워서 떡 먹기요 표절이라 시비해도 낯색 하나 변치 않는 먹물아비 줄 세울까 벼룩을 줄 세울까 천지사방 튀면서도 원조元祖라 침 튀기니
길거리 원조 간판들 너도나도 먹물 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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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에 서다
을지부대 전망대서 북녘을 바라본다
유월에 갇혔는가 침묵의 능선 아래
균열된 가슴 한복판 먹뻐꾸기 울다간다
삭지 못한 응어리를 저 계곡에 던져두면
구르고 깎이다가 모래 되고 먼지 될까
한 다발 바람을 풀어 녹슨 철책 닦는다
렌즈로 당겨보는 비로봉이 지척이다
어깨 겯고 가기위해 녹음은 저리 부풀고
패랭이 지뢰밭 뚫고 붉게붉게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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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후드를 쏘다*
살대 끝
물고 있는
과녁 뚫은 화살 본다
시공의 빗장 걷고
까마득히 하늘 갈라
뚫는다
지구의 미간
뉴스가 기립한다
* 2014년 콜롬비아 메데린에서 개막한 세계양궁연맹(WA) 2차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훈련에서 한국 대표 주현정은 과녁에 꽂힌 화살의 뒤에 다른 화살을 박는 '로빈후드'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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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아씨
순장 길 떠나가는 비화가야 송현아씨*
언젠가 만나리라 깨무는 붉은 입술
아직도 열여섯 가슴 향기로 젖는다
그대여 잡아주오 날 부르는 아씨의 손
박물관 유리벽에 손바닥 맞대보면
실핏줄 소용돌이치는 내 전생을 만난다
* 경남 창녕 박물관에 재현되어 있는 송현리 고분에서 발굴한 순장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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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다
사방으로 튀어가는 꽃병조각 날 세운다
엉겁결 뛰는 발에 핏물은 배어나고
꽃의 집 숨을 멈추자 덮쳐오는 이 고요
흩어진 파편마다 눈 뜨는 불빛 좀 봐
허물 벗는 나비인가 꽃은 바로 활짝 피네
비로소 터지는 숨길, 날숨들숨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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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저 옵서예
공주의 옷자락이 휘날리는 조랑말에
탐라 사내 뛰어올라 초원을 내달렸다
성곽은 허물어져도
바람의 말 지키자던
강생이 몽생이도 저들의 말 내리 전해
잘리고 흩어져도 숨길 이은 탯말 조각
박물관 진열장에 들까
숨비소리 떨리는
유배도 항쟁도 아닌 갈옷 속에 살아온 말
천년 왕국 부활하듯 재기재기 옵서예
삼성혈 돌하르방은
쉬영갑서 목이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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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눈을 뜨다
묵언을 끝냈는가
눈을 뜨는 저 석고상
껴안고 웅크리며 더러는 와불처럼
응고된 세상을 열고 커튼콜에 답한다
검투사 칼을 휘둘러 지키려던 사랑 한줌
불기둥 삼키었네
불멸을 움켜쥐었네
누천년 뼈를 세운 몸 피돌기를 시작한다
빛처럼 지나간 생 시간을 걷어내면
겹겹의 문명 벗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메멘토 메멘토 모리*
신의 말씀 들린다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즉,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잊지 마라'라는 의미를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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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팅
별나라 거미족이
세상을 분칠한다
아스라한 목숨줄이
벽을 타고 흔들린다
눈 하나
까딱 않는 빌딩
태양 아래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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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좌우가 바뀐 채로
거울 속서 누가 본다
똑바로 보려거든 그대를 뒤집어라
한 번쯤 뒤집고 보면 가는 길이 보이리
영문글자 자리 바꿔
달려오는 앰뷸런스
앞차의 백미러엔 생명길 뚫고 있다
꽉 막힌 내 안을 본다
거울 하나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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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행 버스
구르는 바퀴 위에선 흔들려야 제격이죠
통로가 좁을수록 비비기에 적합해요
소주에 오징어다리 엉킬수록 흥겨운 법
커튼은 내려야죠 바깥세상 안 볼래요
몸속의 저 폭풍은 신께서 주신 선물
갈수록 강퍅한 세상 아웃사이더가 편해요
묻지 마 묻지 마라 가는 길 당최 몰라
하늘인지 바다인지 출렁이는 무대에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볼륨이 높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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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의 날개
비탈밭 엎드리어 가슴 파던 두더지
이랑을 북돋우며 간신히 붙든 세상
비둘기 고랑에 앉아 땀방울을 쪼고 있다
그렁그렁 눈물 담아 손끝을 찔러가며
제 손으로 만든 수의 단정히 차려 입고
이제는 날개 폈을까
흙만 파던 울 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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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 신은 여자
빛 찾아 열쇠 찾아 킬힐로 딛는 아침
어깨에 부딪는 햇살 유리벽 타고 올라
하루를 꽃피웁니다
푸른 향기 품습니다
뒤태도 날씬하게 콕콕 찍는 퇴근길
애완견 두 귀 쫑긋 현관문 긁는 소리
힘줄 선 눈을 지웁니다
발자국을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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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게
산과 들 헤매었나 갈비뼈가 드러났네
올가미 파고들어 피로 물든 모가지
뒷발을 끌어당기며 엎어질 듯 길을 미네
한사코 뼈를 세워 목줄의 주인 찾는가
눈곱 낀 눈동자로 농막을 기웃하다
긴 유랑 돌아서는가 무릎 꺾는 누렁이
오, 저런! 걸렸구나 내가 놓은 올가미에
세상을 맑혀보려 시도 쓰고 비질도 했건만
디딘 곳 허방다리네
벼랑을 부여잡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