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만에 돌아온 화랑무공훈장
김 덕 남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무남독녀로 태어나 60여년을 살았다. 아버지는 1950년 8월 15일(음) 입대하여 1951년 9월 12일 강원도 양구군 동면지구에서 전사하셨다.
집에는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닳고 좀이 슨 전사통지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해가 오지 않았으므로 전사통지서를 차마 믿을 수 없어 오랜 동안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1981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아버지의 비석을 찾았을 때 그제야 어머니는 이 곳이 세상의 울음 터인 양 통곡을 하셨다.
그 다음 해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가셨다. 아버지와 함께 국립현충원에 안장해 드린 후 아버지가 전투에 임했음직한 낙동강, 왜관, 다부동 등 전적지를 순례하였다. 아버지와 그 또래의 청년군인들이 목숨 걸고 지킨 유학산을 쳐다보며 작성한 졸시다.
아버지, 길을 가다
- 격전지 다부동에서
열여섯 새 각시를 빈집에 홀로 둔 채
보던 책 밀쳐놓고 끓는 피 총에 감아
퍼붓는 물동이포탄 그 속으로 뛰어들다
탱크와 자주포가, 곡사포와 기관총이
마주보며 쏘아대는 승자 없는 불잉걸 속
밤마다 바뀌는 주인 유학산의 핏강이여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명(命)한 상관
그 앞에 몸을 던져 흩어지는 새파란 꿈
갓스물 볼 붉은 혼이 다부동에 살고 있다
지난 여름에는 철원의 한탄강을 지나고 양구의 펀치볼을 거쳐 을지부대 전망대(DMZ 철책 위 해발 1,049m)에서 가칠봉을 바라보았다. 저 봉우리 전투에서 아버지는 전사하셨으리라. 푸른 숲도 말문을 닫고 시간도 혼절하는 노을 아래 아버지는 피를 흘리며 꽃 같던 색시와 얼굴도 모르는 젖먹이 딸을 생각했으리라. 그 손을 잡아드리고 싶다. 그 피를 닦아드리고 싶다. 복부에 박힌 총탄을 내 손으로 뽑아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눈을 감겨드리고 싶다. 이제 모든 것 잊고 편히 쉬시라고 간절히 말씀 드린다. 그렁한 눈을 드니 철책선 너머 금강산 비로봉, 일출봉이 멀리 보였다.
2013년 11월 13일 53사단에서 아버지의 무성화랑무공훈장을 전수 받았다.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하셨다고 자료화면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사단장님은 훈장을 늦게 전달해서 안타깝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위의 시 「아버지, 길을 가다」를 낭송하고 사단장님께 내 시조집을 드렸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제31묘역에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께 훈장과 훈장증을 바치러 가야겠다. 그리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가슴 깊이 부르며 그 동안의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다. 아버지! 아버지!
김덕남(6·25전쟁 유족이며, 시조시인.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최근 시조집 『젖꽃판』를 펴냈다.)
- 〈나라사랑신문〉 2014. 2. 1. 국가보훈처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