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놈처럼 종이 되어 배불리 먹어보련다
조선 후기 야담에는 당대 신분 사회의 동요 양상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 가운데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대립 양상이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주인과 하인의 대립 양상이다. 이는 결국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간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몰락한 양반이 선대 노비를 추노(推奴)하러 갔다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는 등의 사례에서 이런 세태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지방에 부임한 수령․감독관들과 지방에서 족세(族勢)를 형성한 아전․통인들 사이에 만만찮은 갈등이 빚어진다. 물론 이것이 당대 전반에 걸친 지배적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요소들이 도처에 팽배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을 확보한 지배 계층이 이러한 여러 요인에 의해 체제 붕괴의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민중의 의식이나 세력이 강력한 기반을 구축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 우위권은 지배 계층의 몫이며, 거기에 반발 작용으로 이러한 갈등이 빚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 야담집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극한 대립 형상을 절제하고 해학적 대립 양상이 보여 진다. 주인과 종이나 원님과 지방 하속의 대립 양상이 주를 이룬다. 잔칫날 음식 때문에 종놈이 상전에게 수작을 건다.
어떤 사람이 혼인 잔치에 가려고 종놈을 불러 말을 씻기고 안장을 준비하도록 시켰더니, 글쎄 종놈이 시큰둥하게 투덜댔다. [쇤네는 싫습니다요.]
상전이 화를 내며 야단을 쳤다. [상전의 명을 따르지 않겠다니, 허, 이런 법이 어디 있을꼬?]
종놈이 해명을 했다.[생원 나리께선 술과 고기를 실컷 잡수시는 게 좋아 늦게 돌아가도 상관이 없지만, 이 놈이야 주리고 떨리는 걸 참을 수 있어야지요.]
상전이 방법을 일러 주었다. [그건 네놈이 변변치 못해서 그런 게야, 내가 음식 받는 걸 눈 여겨 봐 뒀다가 슬쩍 뒤에 와서 서있으면, 알아서 건네주지 않 을까?]
종놈은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고는 상전을 모시고 잔칫집으로 갔다. 그럭저럭 술상이 오자, 종놈이 상전 뒤에 가서 기침을 해서 놈이 왔음을 알렸다. 상전은 음식을 한 접시씩 뒤로 빼돌렸는데, 놈이 기침하는 대로 내 주다 보니, 회 한 접시만 달랑 남았다. 그런데도 놈이 또 기침을 해대는 게 아닌가? 상전이 발끈해서 쏘아 부쳤 다. [이 놈아, 내 자리에 앉아! 내, 네놈 대신 말 몰고 배 한 번 채워 보련다!]
有人欲往婚姻會 呼奴刷馬具鞍 奴不說曰 小人則厭矣 其人怒曰 不從上典之令 安有如許紀綱 對曰生員主 則長飫酒肉 故久坐忘反 而小人則不忍飢寒故也 其人曰 此則汝不周通之致也 昇吾受饌 來立吾後 吾何不給 奴諾而陪去 及進杯盤 奴入其後 故咳告來 其人給以一器 隨咳隨給 至餘一器膾 而奴又警咳 其人大怒曰 汝坐吾坐 吾當代汝執鞭 以圖一飽. [破睡錄](45話). [韓國野談資料集成](卷12).
상전과 하인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상전의 무지와 종놈의 맹랑한 소행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종이 상전에게 불이익을 당하거나 모멸을 받더라도 참는 것만이 미덕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상전은 잔칫집 행차에 종놈이 그간의 불만을 터뜨리자 그 불만을 해소해 주리라고 단단히 협상을 하고 잔치 마당에 당도한다.
협상대로 음식을 뒤로 빼돌리다 보니, 당사자의 몫이 바닥난다. 그는 이 지경이 되자 상전의 체통을 내동댕이친다. 그는 하찮은 음식으로 인해 종놈과 자신의 역할을 바꾸자는 억지를 부린다. 이 대목에 이르러 종놈은 승세를 잡는다. 그는 상전 몫의 음식을 모조리 차지했으며, 그 동안 당했던 고충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기쁨을 누린다. 주종의 심각한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지만 무지한 주인에 대해 재치 있는 종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출처 : 이원걸. [조선 후기 야담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