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08
“현유불검돌(賢有不黔突) 성유불난석(聖有不暖席), 현인(묵자를 가리킴)의 굴뚝에서는 연기 나는 날이 없고, 성인(공자를 가리킴)의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다.”
두보(杜甫)의 오언고시 발동곡현(發同谷縣 : 동곡현을 떠나다)의 첫 2구(句)다. 묵자나 공자나 자신들의 깨우친 도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잠시도 편히 머물 틈이 없었다는 뜻이다.
문득 이 시구(詩句)를 떠올리게 한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는 말 그대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과 회담 후 곧바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가고, 거기서 돌아오기 무섭게 다시 김을 만나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다.
문 대통령 동분서주하는 까닭은
이른바 ‘한반도 운전자’로서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이겠지만 갈수록 북한 쪽으로 경도되는 인상이 뚜렷하다. 그는 북한의 입장에 서서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완화를 유도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미동맹이 아닌 민족자주·민족자결을 강조하면서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 경제교류 및 협력을 서두르는 빛이다. 미국에 대해서는 북한이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먼저 취하기를 촉구해 마지않는다.
나아가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대변인 역을 자임하고 나서는 장면을 당당히 연출해 보인다. 유엔총회 기조연설이 대표적 사례다. “북한은 우리의 바람과 요구에 화답했습니다. 이제 국제사회가 북한의 새로운 선택과 노력에 화답할 차례입니다.” 그 ‘새로운 선택과 노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데도 문 대통령과 정부는 ‘종전선언’에 미국이 동의해 줄 것을 압박하고 있다. 종전선언이 성사되면 자연스럽게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의 완화 및 해제로 이어지리라 믿고 기대하는 눈치다.
문 대통령지지 세력도 북한의 이미지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10·4남북선언 11주년 기념 평양 민족통일대회에, 160명이 공군 수송기를 타고 다녀왔다. 이들은 평양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하고 찬사를 보냈다. 어느 여당의원은 “10년 만에 본 평양은 너무나 변해 상전벽해를 실감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으로 보는 여명거리는 미상불 대단하다 할만 했다.
그런데 집단 체조에, 또 여명거리 건설에 동원된 북한 주민들, 그러니까 북녘 동포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해봤을까? 대규모 카드섹션과 집단체조에 짙게 배어있는 수만 명 어린 학생 및 주민들의 슬픔에는 얼마만큼의 눈길을 주었을까? 알록달록한 색깔의 여명거리 고층빌딩들을 적셨을 그곳의 군인과 청년·학생들의 피땀을 잠시라도 떠올려 보긴 했을까?
그건 자발적 창조성의 발현이 아니라 노예노동의 결과였다. 주민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1인의 영광을 위해서 바쳐진 희생이었다. 1인에 의한 철권지배체제가 아니고서는 이뤄낼 수 없는 집단체조와 빌딩숲을 보고 온 사람들 가운데 인민의 고난을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김정은만 위대하면 된다는 것인가. 그의 영광을 위해 다른 모든 주민은 희생을 강요당해 마땅하다고 여기는가.
▲ 북한 평양을 찾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지난 7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오산공군기지를 통해 입국해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과 대화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폭력정권과 민족공조는 불가능
도대체 누구, 아니면 무엇을 위해 문 대통령은,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숨이 찰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우리 국민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문 대통령은 오히려 우리 안에 많은 적을 두고 있다. 반면에 북한에는 편들어주며 얼싸안을 사람들만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들을 위해 굴뚝에 연기 나고,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이 동분서주한다는 것일까? 아무려면 그러기야 하겠는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데.
폭력정권은 그 명분과 목적이 무엇이든 악(惡)이다. 악을 행하는 자와 동행 혹은 동거하는 것은 불행한 결별과 파국을 예비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북한이 세습독재와 사이비 신정체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선한 이웃이 될 수 없다. 폭력은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폭력성을 완전히 극복할 때에만 평화적 상생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이건 인류사의 경험칙이다. 그런 북한의 무엇을 믿고 우리 정부는 우리의 대북 무장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겠다는 것인가.
진보적 이념 정향을 가졌다면서 ‘민족’에 집착하는 까닭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보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집착하는 가치라고 여겨져 오지 않았는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민족자주·민족자결’을, 한나라의 대통령이 세상을 향해 주장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휴전선 북쪽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처하는 세력이 있다. 이 상황에서 자주·자결은 무얼 의미할 수 있는가. 이른바 ‘외세’인 미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걷어내 버리면 평화가 충만한 민족대단결의 나라가 성립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는 것인지 누가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7일 북한을 방문해서 김정은과 3시간 반 동안 면담 및 오찬을 가졌다고 발표됐다. 그런데 결과는 “오늘 북한 방문에서 상당히 좋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다. 아직 우리가 할 일이 상당히 많지만 또 한 걸음 내디뎠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정도에 그쳤다. 주요 관심사였던 미·북 2차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갖기로 한 게 고작이다. 북한은 동창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엔진시험장 및 미사일 발사대,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사찰 수용 의사를 전하며 종전선언 등 미국의 상응조치를 요구했지만 폼페이오 장관은 다만 이를 청취했을 뿐이라고 한다. 대화 지속의 모멘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특기할만한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읽힌다. 오독인가?
이미 충분히 경험했지만 북한 핵 문제 해결의 길은 험난하고 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특별히 뾰족한 수는 없다는 게 이미 드러났다. 그는 지난해 내내 북한 정권을 요절이라도 낼 듯 허풍스럽게 몰아댔으나 그 다음 수를 찾지 못했다. 지금은 간지러운 찬사와 사랑고백까지 하면서 김정은의 핵 포기 결심을 얻어내려 하지만 그것도 가능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눈치다.
김정은이 요구하는 대로, 또 문 대통령이 역성드는 대로 ‘한건의 조치에 하나의 대가’라는 방식을 채택한다면 북한의 비핵화는 부지하세월이다. 지금 군사적 옵션을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대북 제재의 강화다. 작년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밀어붙이면 김정은이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경우 협상의 성공확률은 높아진다.
자칫하다가는 불가사리 키운다
그게 꺼려진다면 장기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한국 정부의 당사자 의식이 아주 긴요하다. 대북 경제제재에 구멍을 내고, 독자적으로 경제지원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를 되살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과부의 바늘을 먹으면서 자라나 집안에 있는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먹고, 온 동네, 온 송도, 온 나라의 쇠를 다 삼켜 거대한 괴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결코 죽일 수도 없게 된 ‘불가살이(不可殺伊)’를 우리가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①김정은 체제의 본질과 속성은 바뀔 수가 없다. 변화하는 순간 그 체제는 무너지고 만다. 폭정이라는 호랑이등에 탄 김정은과의 평화공존은 가능한 기대가 못된다.
②지금의 한반도 정세에서 민족자주·민족자결은 희박한 가능성에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모두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③그 가치를 지켜가자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신뢰성과 경제성이 가장 높은 방법이다. 우리의 힘이 강력할 때만이 북한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게 가능해진다.
④북한의 권력집단을 ‘민족공조’의 파트너로 착각해서 무장을 내려놓고, 경제지원을 확대하는 것은 송도 불가사리에게 바늘을 먹이는 셈이 된다. 열심히 먹이면 착한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게 아니라 괴물이 되고 만다. 주민들을 굶겨 가면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온 저들이 못할 짓이 뭐가 있겠는가.
⑤북한 체제 측을 도와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평화통일에까지 이르는 길은 너무 멀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통일이 안 된다. 상반되는 2체제를 한 국가 안에 아우르는 연방제 통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없는 꿈이다. 그러기보다는 북한 체제의 모순이 더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스스로 변화하는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빠르다.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가 활발해 질수록 여론지지율이 높아지는 현상에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것은 다 깽판 쳐도 된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현 정부 담당자들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가 나빠지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남북관계는 국민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진곤 /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자료출처 :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