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철학(6) 정신적 사랑의 기준 : 정신성
세상에는 아름다운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남성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남성은 '성적 타락'과 같은 기준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지적인 존재'이며 정신성과 영혼성을 본질적으로 지니는 존재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미와 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남성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성은 지적인 존재가 아니며 근본적으로 지적인 면이 결여된다고 평가하는 전통- 이 전통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인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성관을 지배해왔다- 때문에, '지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남성'이 중심에 놓인다. 그에 반해 '아름다움'은 '지성'이 아니라 '감성'과 관련된 측면이 많기 때문에, 감각적 미와 감각적 결합 욕구는 이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되면서, '미'에 대한 논의에서는 '여성'이 중심에 놓이곤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미의 이데아를 논할 때는 이것을 감각적 미와 감각적 결합 욕구에 빠져들지 않고 '정신적 미'로 고양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남성의 세계'와 연결시킨다. 그가 미의 이데아에서 남성과의 관계를 그리는 것은 '남성은 지성적 존재'이고 '여성은 감각적(감정적) 존재'라는 전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 미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신적 미'로 이행해야 한다는 자각, 성적 사랑을 극복하고 '정신적 사랑'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자각이 이루어질 때, 지성적 존재인 남성 철학자는 '지에 대한 사랑'에 휩싸인다. 정신적 사랑은 지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욕구를 함축하므로 지적 차원이 문제가 된다. 지적 측면을 비교하고 지적 요소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지성적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상대방도 자신과 동등하게 이성과 권리를 지닌 '인격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신적 사랑'은 달리 말하면 '인격적 사랑'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 중에서 '정신'을 지니는 존재이면서 인격적 존재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때 정신성의 척도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신성의 척도가 '이성 능력'이라면, 이성 능력을 지닌 자는 유일하게 '인간'뿐이므로 '인간'은 이성 능력이 파생시키는 특수한 능력들–가령 사유 능력, 언어 능력, 창조력 등–의 소유자가 된다. 그러나 만약 '정신성'의 척도가 '영혼의 소유 여부'나 '활동성의 소유 여부'와 같은 차원으로 간주된다면, 정신성을 지닌 대상의 범위는 넓어진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영혼'의 관점에서 세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와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라는 기본적 욕구를 지니며, 이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한다. 이런 원초적욕구에 따라 존재하는대상은 '식물과 같은' 자로서 '식물혼'의 부류에 속한다.
두 번째 부류는 식물혼이 지니는 기본 욕구와 활동 이외에도 '감각–지각'을 지닌다. 이것은 감정을 느끼고 표출하는 능력이며, 먹이를 찾아 시·공간을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도 포함한다.1) 식물혼의 활동성 이외에 공간 이동성도 지니는 존재는 마치 '동물과 같은' 자로서 '동물혼'의 부류에 속한다.
세 번째 부류는 식물혼과 동물혼의 활동성 이외에도 이성 능력을 소유하며 이성 능력이 파생시키는 독특한 활동성을 지닌다. 여기에는 합리적 계산 능력, 언어 사용 능력, 언어를 통해 보편적 개념과 지식체계를 형성하는 능력,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 - 태어날 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본능적 측면이 아닌 것 - 을 배우고 학습하는 능력, 무엇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문화를 형성하는 능력, 대상과 연관된 이미지를 상상하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능력 등이 적용된다. 지금까지 빈번하게 언급했던 미를 감각하고 미적 차원을 인지하는 능력이나, 행동에 대한 도덕적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세 번째에 적용된다. 이렇게 식물혼, 동물혼의 활동성과 그 이상의 활동성까지 포함하는 세 번째 부류는 '인간혼'이라 일컬어진다. 이 중에서 정신성에 해당되는 것은 세 번째이므로, 정신성의 핵심은 '인간혼'을 지닌 인간이다.
물론 근대 이래로 과학의 발달을 토대로 하여 인간혼에만 적용되던 능력이 동물에게도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식물도 동물이나 인간처럼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에 관해서는 '백스터 효과'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각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거짓말 탐지기'의 원리를 설명하던 백스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짓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이 손을 갖다 대는 부분에 어느 날 우연히 나뭇잎을 갖다 놓았다. 그랬더니 거짓말 탐지기가 반응을 보였다. 그걸 신기하게 여긴 백스터가 이 나무 저 나무의 잎을 가져다 놓았더니 계속해서 거짓말 탐지기가 반응을 보였다. 이에 장난기가 발동한 백스터가 '어떤 나무'를 지정하여 마음속으로 '너를 불태워버릴 거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나무의 잎을 탐지기에 갖다 놓았더니, 탐지기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놀란 백스터가 다른 나무에도 그것을 적용했더니 유사한 반응이 나타났다. 백스터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혹시 식물도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있고, 인간처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식물도 감정을 나누는 능력이 있어서 그들끼리 - 인간과 다른 형태라 해도 그리고 인간이 감지하지는 못해도 - 서로 감정을 교감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 뒤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자연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자연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사용하고 변형하고 마모시켜도 되는 대상 - 마치 베이컨이 말한 실험과 관찰의 대상 - 이 아니며, 자연 자체도 인간과 같은 독자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인간들끼리 대화하고 교호작용을 하듯이, 식물들끼리도 그리고 자연물끼리도 대화하고 교호작용을 하며, 더 나아가 식물과 인간이, 자연과 인간이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마음대로 분석하고 자르는 실험과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유기적 대상으로 간주된다.
한편 '동물혼'은 학습 능력이나 이성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혼'과 구분되는데, 오래전에 TV에서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사례를 방송했다. 동물은 먹이를 발견했을 때, 인간처럼 물에 씻거나 불에 굽는 것과 같은 2차 행위를 통해 먹이를 섭취하지 않는다. 발견한 먹이를 곧바로 먹어치우거나 조금 쉬었다가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동물원에서 조련사가 원숭이에게 먹이를 줄 때, 원숭이가 보는 앞에서 먹이를 계속해서 물에 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숭이에게 고구마를 그냥 주었더니, 원숭이가 흐르는 물에다가 고구마를 씻어서 먹었다. 조련사가 시청자들 몰래 원숭이를 훈련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원숭이가 본능적으로 하지 않는 -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 행동을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이 사례는 예외적인 것이고 그저 돌발적으로 나타난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에, 동물 전체에 적용할 만한 보편적 가능성은 미흡하다. 그러나 이제는 동물에게서도 분명하게 어떤 교감이 일어나고 있고 서로 교호작용을 한다는 점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되자, 식물과 동물뿐만 아니라 무생물체에게도 교감 가능성을 확장시켜보려는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생명이 없는 자연물도 타인을 감지할 수 있는 '타감 작용'을 하며 그 때문에 피곤이 누적되면서 자연물의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명화 「모나리자」는 한 편의 그림이라서 다른 것과 교감을 하거나 감정 내지 이성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모나리자」는 그저 모 박물관에 조용히 걸려 있으며, 관람객들이 그 앞을 지나가면서 감상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이 - 마치 인간이 타인을 감지하듯이 - 관람객을 계속해서 감지하고 그로 인해 미묘하게 피곤함을 느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명산에 휴식기를 주고 관객의 접근을 일정 정도 제한하는 것에도 이런 발상을 적용해볼 수 있다.
타감 작용은 인간에게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어떤 공간에 나 혼자 있다면, 나는 어떤 일이든지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공간에 어떤사람이 나타난다고 가정해보자. 나타난 사람이 설령 나를 볼 수 없는 장님에다가 귀머거리여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각할 수 없다고 해도 - 그리고 그가 자기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이전에 하던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양해를 해준다고 해도 - 나는 왠지 모르게 그를 의식하게 되고 그 때문에 은연중에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타인에 대해 호의적감정을 지니고 있어도, 타인은 신경 쓰이는 존재이며 때로는 피곤한 존재로 다가온다. 타인이 피곤한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은 내가 어떤면에서 타인을 감지하고 타인과 교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영혼의 활동성은 식물, 동물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인간혼의 독자성을 완벽하게 밀고 나가기가 어려우므로, 인간에게만 고유한 다른 측면이 필요하다. 정신적 사랑을 인간에게 고유하게 적용할 수 있는 차원을 찾아보자. 이때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인격'을 지닌 정신적 존재를 묻는다면, '인간'이라고 대답하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혼의 활동성과 달리 '인격적 사랑'은 유일하게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정신성이다. 정신적 사랑에 '인격적 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면, '성적 사랑'과 대비되는 '정신적 사랑'은 인간 간의 사랑으로 압축된다.
서로 관계하는 양자가 상대방을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며 그리고 다양한 관계 양태를 지닌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인간과 끊임없이 만나고 상호 작용을 하는데, 이때 그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은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다. 인간은 인격체와 지적 대화를 하고 지적 감화를 받고 정신적 교감을 하는 가운데, 친밀성의 정도와 차원이 달라진다. 지적 대화와 감화를 야기하는 사랑은 동등한 인격체들이 하는 사랑이다.
성적 사랑이 생겨나고 작동하는 이유가 '결핍감'과 '결핍을 해소하려는 욕구'이듯이, 정신적 사랑은 상대가 지닌 지적 능력과 인품이 나로 하여금 '정신적 결핍'을 느끼게 하며 상대와의 교감을 통해 '지적 결핍을 해소하려는 욕구'로 작용한다. 대화와 교감을 통해 상대에게서 '지적, 정신적 미'를 얻고 상대와 일체감을 이루면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열정이 바로 '정신적 사랑'이다. 이렇게 해서 정신적 사랑으로 특화된 에로스가 바로 '필리아(Philia)'이다.
필리아는, 감각적 에로스가 정신적 에로스로 고양된 것이며, 성적인 것과 관계없는 결합 및 유대를 보여주는 '인격적 사랑'이다. 즉,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자유와 동등한 인격을 지닌 '자립적 주체들 간의 사랑'이다. 필리아는 지적-인격적 차원에 대한 사랑과 교감을 중시하며, 넓은 의미에서 '우정'2)으로 이해된다. 우정은 친구 간의 사랑이므로 인격적 동등성의 측면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며, 지적-정서적 교감이 위계질서를 형성하지 않을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정신적 사랑은 마치 친구관계에서와 같은 사랑이다. 상대방을 나의 친구처럼 간주할 때, 상대를 나와 동등하게,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승인할 수 있으며, 그런 인격체들의 사랑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서 정신적 사랑의 양태가 나타날 수 있다.
각주
1 Aristoteles, J. L. Ackrill(ed.), A New Aristotle Reader(Oxford : Clarendon Press, 1987), 168f 참조.
2 요한네스 로쯔, 『사랑의 세 단계』(심상태 옮김, 서광사, 1984),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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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7) 정신적 사랑의 양태 : 성적 사랑과 관련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