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쓴 조선 기생
‘장한’ 18~21쪽엔 일본·미국·중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조선 기생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기무라 이치로(木村一郞)란 일본인은 “내지(內地)에 있을 적에 저는 조선의 기생에 대해 한없이 아름다운 동경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며 당대의 대표적 요리집 ‘명월관(明月館)’에서의 경험을 실었다.
“텅 비인 방에 혼자앉아 있으려니까 얼마 안 있다가 장지문이 바스스 열리더니 호화로운 비단 옷으로 몸을 감은 어여쁜 두 미인이 들어오더니만 한 손으로 땅을 집고 가만히 조선식의 예(禮)를 하더니만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노란빛 저고리에 남빛 치마를 입었고 또 하나는 분홍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었는데 퍽 보기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머리는 윤택이 흐르게 잘 빗고 뒤에 보기좋게 내려앉은 쪽에 금비녀를 꽂은 맵시라든지 손으로 빚어놓은 것 같이 어여뻐 보이는 두 발 맵시는 확실히 조선의 기생만이 가지고 있을 미의 극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웁고 그리웁던 기생. 아침이나 밤이나 항상 꿈꾸던 기생을 좌우에 앉히고 술을 마시니 어찌 그 술맛이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잘 먹을 줄도 모르는 술이언마는 미인이 권하는 바람에 많이 취하도록 먹었습니다. 이리해서 저는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마음껏 유쾌히 놀았습니다.”
기생을 칭찬한 듯한 이 글은 뒷부분에서 “그런데 한 가지 안 된 것이 있습디다”라며 180도 돌변한다. 필자는 “조선에 고유한 조선의 정서가 있어야 할 것인데 모든 것이 일본의 것을 흉내 낸 것이어서 조선의 기생도 아니요 일본의 게이샤도 아닌 것 같은 때가 더러 있는 것입니다”라며 “일본에서 비교적 하류사회에 만연하는 가고 노도리를 태연히 부르는데 아주 한심해서 못 보겠습디다. 이것이 그리웁고 그리웁던 조선의 기생이든가 하고 실망의 탄식이 저절로 울려나왔습니다”라고 적었다.
미국인 띠·와이·번쓰는 “내지(內地)의 게이샤 기생을 보고 놀란 나는 조선에 와서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며 “거리에서 아름다운 맵시의 기생을 볼 수 있었다”고 적었다. 그는 기생에 대해 “키가 조그만 것이라든지 발 맵시가 어여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가 퍽 온화한 것이라든지 모든 것이 인형과 같이 아름답다”고 묘사했다. 그는 하지만 “어느 분은 길에 다니면서 껌을 찍찍 씹고 다닌다든지 혹은 지나는 남자를 보고 시시덕대는 일이 종종 있다”며 “행동을 점잖게 가져 고운 의복과 아름다운 용모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라고 당부했다.
중화민국 사람 왕따밍(王大名)은 “조선에 나온 지가 거의 30년 된다”고 자신을 소개한 뒤 “옛날의 기생은 정중하고 고상하고 지금의 기생은 경솔하고 야비하다고나 할까요”라면서 “예기(藝妓)와 창기(唱妓)는 다르니 기생이 된 이상 춤이든지 노래이든지 조선의 고유한 예술을 몸에 익혀서 참다운 기생, 기생다운 기생이 되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서울에만 근 오백 명의 기생을 볼 수 있다”며 당시의 기녀 수를 추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