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반도체 감산을 결정했다. 삼성전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적으로 수요가 줄어든 탓이라고 하지만 세계 D램 시장의 72.6%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수출의 25%를 기여하는 반도체 신화가 모래 위에 쌓은 공허한 성이었다고 자책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 경제의 급소를 노리고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흔들어버린 비열한 일본을 탓해야 한다.
수입이 중단된 반도체 소재의 물량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물량 확보는 세계 초일류로 성장한 반도체 기업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다. 어쭙잖은 훈수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정부와 언론이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던 공급원을 찾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삼류 정치인들의 어설픈 진단과 이기적인 선동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언론을 통해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업체로 알려진 중소기업은 주식시장에서 재빠르게 수익을 챙기고 돌아서버렸다. 근거 없는 소문을 부풀려서 애꿎은 투자자들만 헛물을 켜게 만든 언론의 책임이 크다. 반도체 산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나 정밀화학 산업이 걸음마 단계인 중국에 대한 뜬소문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실험실 수준의 결과뿐인 특허에 매달리는 중기부 장관의 호들갑도 애처롭다.
언론에 흔히 소개되는 '에칭'(식각)은 실리콘 웨이퍼를 세척하는 공정이 아니다. 실리콘을 깎아내서 섬세한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핵심공정을 말한다. '액체'와 '가스'(기체) 상태의 불화수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수분을 제거한 무수 불화수소는 섭씨 19.5도에서 끓어서 기체가 된다. 액체 불화수소도 온도를 높여주거나 압력을 낮춰주면 가스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불화수소를 세척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불화수소의 높은 휘발성 때문이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생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냉장고·에어컨의 냉매 생산에 훨씬 더 많은 양의 불화수소가 사용된다. 정유공장의 촉매로 사용하는 불화수소의 양도 적지 않다. 대부분 48% 정도의 농도로 물에 녹인 '불산'이 사용된다. 저순도의 중국산 범용 불화수소는 반도체 공정용 고순도 불화수소와 전혀 다른 소재다.
우리만 일본산 반도체용 고순도 불화수소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전 세계 고순도 불화수소 시장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다. 대만과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도 일본산 불화수소에 매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100년이 넘는 정밀화학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만큼 품질이 좋고, 가격이 싼 고순도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맹독성의 불화수소를 정제하는 설비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극복하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불화수소가 반도체의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도 아니다.
부품·소재·장비의 공급원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경영학적 원칙은 일반론일 뿐이지 모든 경우에 반드시 적용되는 자연법칙은 아니다. 야비한 일본이 노린 것이 바로 그런 틈새다. 우리가 고순도 불화수소의 국산화에 성공을 했더라면 일본은 다른 소재를 공격의 무기로 선택했을 것이다. 60년 이상 긴밀한 분업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던 상황에서 졸렬한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천일 수밖에 없다.
무엇을 국산화할 것인지의 판단은 온전하게 기업의 몫이다. 대기업이 모든 부품·소재·장비를 국산화해서 중소기업을 살려줘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인 억지다. 정부의 역할은 따로 있다. 분명한 공정 경쟁의 원칙을 제시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는 일이다. 무지한 장관이 나서서 시장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반도체 산업을 우리보다 훨씬 먼저 시작했던 일본이 우리에게 시장을 빼앗겨 버린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산만 고집했던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본과의 '전쟁'을 들먹이면서 외치는 동북아 평화는 무의미하다. 중국·러시아까지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정치와 경제는 절대 별개일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역사 문제는 국민에게 짐을 떠넘기거나 국가 경제를 볼모로 삼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정부가 외교로 해결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