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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규원은 1941년 경남 밀양 삼량진읍 용전리에서 태어났다.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의 씌어지는 서정시』(1981)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오규원 시 전집』(전2권)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날이미지와 시』 등과 『현대시작법』을 상자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 2월 타계했다.
시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비교적 좋았던 경제적 여건도 급격히 나빠져 중학교 3학년 때는 학비를 내지 못해 정학까지 당한 적도 있다. 이후 자식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변함이 없었으며, 아버지가 계신 고향에 찾아간 적도 없다. 결혼식은 통고만 했을 정도이며 성인이 된 이후 예순을 넘기도록 아버지의 장례와 한 번의 묘소참배가 고향을 찾아간 전부이다.
이런 연유로 '고향'은 시인에게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어머니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얼굴이다. 언제나 평화와 안식이 준비되어 있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 그 속으로 가서 잠들고 싶고 꿈꾸고 싶은 곳,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궁 밖의 현실처럼 불화와 궁핍의 근원이었다. 그의 시적 작업은 허상뿐인 아버지와 아버지적 언어를 벗어난, 그리고 자궁 속의 언어를 벗어난 이 현실 위에서 나의 자궁, 나의 자연을 찾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평화와 안식이 있는 자궁이라 하더라도 자궁 속의 꿈꾸기란 눈 감은 꿈꾸기이며 언어 없는 꿈꾸기이다. 그리고 자유가 유보된 신화적인 평화의 공간이다, 그가 말하는 고향이란 자궁을 지닌 어머니의 몸과 같아서 자궁 안의 '자연의 언어'와 자궁 밖의 '인간의 언어'를 품고 있는 시간적 공간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자연의 자궁이며, 자연은 우주의 자궁이다. 그리고 자연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그 경계에 시인은 서 있다.
2. 여자와 모성과 언어
일찍 생모를 여읜 시인에게 '모성성'은 그의 문학적 생애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모성성'에 대한 추구는 많지 않다. 다만 '여자'라는 익명적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인 문법과 상상력의 층위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가 전념한 사물에서 관념을 제거하려는 작업이 남성적인 언어와의 싸움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집 『사랑의 감옥』의 마지막 다섯 편은 모두 여자가 등장하는 작품으로서 모성성과 관계가 있다. 「저 여자」「이 여자」라는 사실적 이미지 위에 암시적 이미지를 겹쳐놓은 작품이 있기도 하다. 「원피스」는 사실적인 동시에 풍자적인 이미지의 여자다. 이 시집의 여자는 모성성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의 「한 나라 또는 한 여자의 길」에 나오는 "나에게는 어머니가 셋"이라는 사실적 이미지의 여자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니까 「말」이라는 작품에서 표현한 바 있는 "욕망의 성기며 육체의/현실"인 그 언어와 겹쳐놓은 여자들이다. 특히 「말」이라는 작품을 읽어보면, 여성적으로 의인화된 말(언어)이 어떻게 세계를 자기 몸속에 끌어들여 자기화하는가가 그려져 있다.
아래 시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말(언어)과 관련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
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한 잎의 女子 1」전문 - 언어는 추억에 걸려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
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리
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女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女子, 화가 나
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女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女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女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女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女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女子, 더러 멍청해지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
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 「한 잎의 女子 2」전문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
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
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소설 같은 女子, 표지 같은 女子, 봉투 같은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
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
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
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한 잎의 女子 3」전문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오규원의 연작시 <한잎의 女子> 3편은 모두가 발상법이나 문체면에서 자신의 초기시 <한잎의 女子>의 모방이다. 특히 <한잎의 女子 1>은 초기시 <한잎의 女子>의 두 구절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과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이 서로 배열순서를 바꾼 것 이외는 전문이 똑같다. 뿐만 아니라 이 3편 모두는 자신의 <現象實驗>의 세 구절을 발췌하여 각기 부제목으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초기 시처럼 표면상 연가풍을 그대로 띠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태도를 진술하고자 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언어가 시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시인의 체험이 언어를 형상화하는 수단이라는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이 연작시는 체험을 진술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의도상으로 언어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태도를, 그 체험을 매개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 묻은 /자식의 옷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헹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때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 죽을 쑤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는 /
사내의 그것을 만진다 그 손은 /그렇다ㅡ언어이리라 「손」전문 ㅡ김현에게
시인이 김현을 위해 쓴 이 강렬한 색조의 시는, 언어에 대한 시인의 지독한 애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애증은 전율스럽다. 위의 시는 관념인 언어를 인식대상으로 삼는다. 손의 행위를 축으로한 여자의 욕망과 손의 움직임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환유의 언어체계를 보여준다. '손'은 하나의 의미에 귀속되지 않고 일상적인 영역에서부터 초월적인 영역에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켜나간다. '손-언어'란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옮겨가는 기호일 뿐이다.
샤하리아르, 잠든 당신의 심장이 /톡톡 뛰고 있다 신기하게도 /나를 가둔 당신의
두 팔 사이의 /어둡고 깜깜한 세계 속에서 내 심장도 /톡톡 뛰고 있다 잠이 깨면
당신은 나를 또 죽이려 하리라 그러나 /심장의 박동 소리는 당신의 것도 /나의
것도 구별 없이 듣기가 좋다 //
샤하리아르, 나는 당신이 주는 비단으로 몸을 감고 /향수로 땀내를 씻고 당신이
주는 음식을 /당신이 주는 포크와 스푼으로 내 뱃속을 /채운다 나는 당신이 만들
어놓은 창을 통해 /아라비아의 달을 보고 구름처럼 포근한 /이불로 앞으로도 오래
어두울 한때를 잠재운다 /그러나 달은 낙타의 사막에서 더 밝다 //
샤하리아르, 당신은 벌거벗은 몸이 아름답다 /육체는 욕망의 본적지다 본적지에서
보면 /어둠 속의 별처럼 젖꼭지도 배꼽도 반짝인다 /나는 당신의 욕망을 내 몸으
로 받고 /당신의 죽음을 내 자궁에 가둔다 나는 /당신의 언어이므로 당신 속에서
일용할 /사랑을 얻는다 사랑을 얻고 당신의 발바닥이며 /혓바닥이며 무엇무엇이며
온몸에 불을 지른다 /불을 질러 내 우주에 불을 밝힌다 //
샤하리아르, 나는 유프라테스강이다 아니다 /티그리스강이다 아르메니아고원이다
아니다 /아라비아의 샤하리아르 대왕이다 아니다 /네푸드사막이다 아니다 루브알
할리 라는 /공허 지대이다 아니다 비가 와야 물이 흐르는 /누쿠니와디이다 비샤
와디이다 세헤라쟈드이다 /아니다 아니다……………………………………… -
「세헤라쟈드의 말」전문 ㅡ「千一夜話」別曲
「세헤라쟈드의 말」이 아마도 '여성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잠든 샤하리아르 앞에서 세헤라쟈드가 하는 독백의 형태로서, 물론 세헤라쟈드는 『천일야화』에 나오는 그 여자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최소한 하루가 더 보장된, 그날 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여자의 말이므로, 따지고 보면 세혜라쟈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운명을 짊어진 시인이 자기의 현실 앞에서 하는 독백이기도 하다. 시 속의 세헤라쟈드의 말 가운데는 "나는 당신의 욕망을 내 몸으로 받고/당신의 죽음을 내 자궁에 가둔다 나는/당신의 언어이므로 당신 속에서 일용할/사랑을 얻는다 사랑을 얻고 당신의 발바닥이며/혓바닥이며 무엇무엇이며 온몸에 불을 지른다/불을 질러 내 우주를 밝힌다"라는 부분이 있다. 저는 '당신의 죽음을 자궁 속에 가둔다'라는 표현에 주목해보자. 어째서 삶을 가두지 않고 죽음을 자궁 속에 가두는가. 여기에 시인의 '여성성'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죽음의 잉태' 이미지는 '당신의 죽음'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세헤라쟈드에게 진정한 의미의 새 생명의 잉태는 샤하리아르의 죽음을 잉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극적 관계는 시인과 현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3. 나와 언어
시인은 4․19 세대로서 '나'라는 존재를 대문자로 의식한 최초의 세대이다. 대문자적 근거는 한반도는 반토막이 났지만 어떻든 독립국가에서 한문이나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교육을 받고, 민주를 배우고, 배운 민주를 실천에 옮기고 또는 실패를 체험한 주체로서의 의식을 말한다. 주체인 '나'는 여기 이곳에서의 '나'는 물론이고 '나' 속의 우리와 우리 속의 '나' 와 '나' 속의 나까지 의식하고 체험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의식의 심화가 어떤 형태로든 이후 한국 사회 변화와 발전의 힘이 되었으며, 이 대문자로서의 '나'라는 존재의 의식에 의해서,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와 유사 자본주의의 야합 속에서도 여기 이곳에서의 '나'의 발견과 '나'의 몫 찾기가 계속되었다고 보며, 그 '나'의 몫 찾기의 행위가 시인의 시작업의 행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즉, 모더니즘의 자기 반성적 내면 탐구와 리얼리즘의 새로운 토대 구축, 그리고 서정주와 청록파의 영향력 감소와 김수영, 김춘수의 영향력 증대라는 흐름 속에서, 그 4차선 거리에 있는 신호등의 색깔을 '나'가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행보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 이후 오규원의 시는 보다 현실 지향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는 그가 직장을 모 화장품회사의 홍보실로 옮긴 시기로서, 자본주의의 체제에 대한 보다 예각적인 인식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를 계기로 시인은 언어의 문제에 보다 치열하게 매달리게 된다.
1
언어는 추억에 /걸려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
꿈 많은 말발굽이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 가 /망명 정부의 청사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 퇴직한 외교관宅의 /초인종이다
2
빈 하늘에 걸려 /클래식하게 /서걱서걱하는 겨울 /음과 절이 뚝뚝 끊어진 /시간을 /
아이들은 / 공처럼 굴린다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은 전차다 /추상의 /위험한 가지에서 /흔들리는 흔들리는 사랑의 /방울 소리다
3
언어는 의식의 /먼 강변에서 /출렁이는 물결 소리로 /차츰 확대되는 /공간이다 /
출렁이는 만큼 설레는 /설레는 강물이다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광장에는 나무들이 / 외롭기 알맞게 떨어져 /서 있다
-「現象實驗」전문
여기서 오규원의 언어는 낡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움과 나름대로의 권위를 지닌 존재들이다. 그는 이때까지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을 믿으면서도 현실의 언어 또는 '나'의 언어는 낡았음을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을 믿고 있었다는 흔적은 '모자' '정부' '외교관' 등의 단어를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시인이기 때문에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언어와 삶, 현실과 순수성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는 오규원에게 더욱 절박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안녕」치 못한 시대, 「패배전쟁시대」, 그리고 일상화된 억압의 현실 속에서 절대적으로 순수한 언어가 유지되기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시와 삶의 대립에서 삶의 패배를 읽어내지만, 순수한 언어에의 믿음과 타락한 세상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 사이에서 순수한 언어를 갈망하는 것이야말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힘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어의 명징함, 그리고 의식의 깨어있음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좌표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리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文碑도 먼저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 중략 …… 남들이 시를 쓸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남들이 시를 쓸 때」부분
시인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의식이란 깨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쓰는 일」은 「민망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인 삶을 포기하고 훼손된 현실과 제도화된 가치에 스스로를 던져놓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이야말로 바로 시쓰기의 원동력이다. 시인은 순수한 의식과 진정성을 되묻고 이것을 추구한다. 그에게 안정을 부여하는 언어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현실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간직할 수 있는 내적인 동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깨어서 견뎌야 하며 자신의 의식을 일깨워 건강한 언어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정신성을 벼려나감으로써 시의 세계를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의 세계에 두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純粹詩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는 것은 언어의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현실속에서 와해되어 버릴만큼 현실은 타락했고 자신은 현실속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오규원은 언어를 믿는 것이 자신의 소외를 상쇄시켜 주리라 믿었고 이것은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적 주체의 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다. 오염된 현실 속에서도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존재, 진정한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언어의 순결성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길들여진 관념이나 제도화된 가치, 그리고 굳어진 언어와의 싸움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띠고 수행된다. 그의 시작(詩作)은 언어화된 현실의 힘을 빌려 세계를 인정하면서 거부하고 거부하면서 인정하는 긴장과 갈등의 양극을 순회하면서 새롭게 펼쳐진다.
4. 날이미지
오규원 시에 관해 짧게 정의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ㅡ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날[生]이미지'로서의 현상, 그 현상으로 이루어진 시.
시인은「살아있는 것」이라는 시작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한 것입니까?"
"정(定)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定)하지 않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 『조주록』, pp. 58~59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이므로, 사물의 이름은 물론 의미까지 정(定)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이성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인간 중심으로 이해하고 명명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정한다.
실존의 문제를 그 바닥으로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언어라는, 피할 수 없는, 이 미끈거리는 존재와 부닥친다. 인간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조직화하는 존재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집을 구조적으로 지난날과 다르게 고쳐, 인간인 '나'만이 아닌, 세계와 함께 언어를 '사는' 방법은 없을까? 만약 우리가 명명하는 것이, 세계를 끊임없이 개념화시키는 것이라면, 명명하는 사고의 근본인 은유적 사고의 축을 버리고, 그리고 그 언어도 이차적으로 두고, 세계를 '그 세계의 현상'으로 파악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형상은 굳어 있는 개념도 아니며,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살아있는 의미망ㅡ즉, '날이미지'다.
전통적인 시는 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자기의 사상이나 정서를 언어로 노래한 것이다. 그것이 만약 인간 중심의 사고의 결과라면 그걸 벗어나는 방법의 첫번째는 주체의 사상이나 정서를 빼버리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달력이라든지 나무라든지 실제를 가리키는 용어와, 사랑이나 슬픔, 법 등 관념 용어이다. 두 번째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세계를 체계화하려고 만들어놓은 관념용어를 시에서 빼는 것이다. 그러면 한 번 더 인간적인 것을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개념적인 것이나 사변적인 것이나 그러한 비유, 혹은 진술 이러한 것을 모두 빼버린 상태에서 사물의 현상을 재현하는 것, 그것이 날이미지시이다.
시인은 날이미지를 네 가지로 나눈다. 사실적 날이미지는 사실성 그 자체만으로 날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발견적 날이미지는 사실적 날이미지에 발견적 시선이 개입되는 것이다. 직관적 날이미지는 어떤 깨달음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현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환상적 날이미지는현실과 환상의 두 차원에 동시에 발을 내려놓고서 얻어내는 이미지를 말한다. 환상적 날이미지의 예를 보자.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는 젖고 /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몸춘 돌은 /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망초와 아이」전문
위의 시의 '환상적 날이미지'는 앞에 나오는 사실적 현상의 도움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현상이 '환상적 날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현실의 일각인 사실적 현상과 환상적 현상을 구별 없이 동일한 차원에 놓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이때 환상적 현상을 이루는 이미지가 '환상적 날이미지'인 것이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반복했다"는 것은 '사실적 날이미지'이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그때마다 날개를/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는 정황은 사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이미지이지만, 앞의 사실적 정황은 같은 공간에서 '돌이 몸속에 날개를 집어넣고 날아오른다'는 환상적 날이미지가 가능하게 해준다.
5. 언어의 감옥과 견자시론
창작에 있어 사물의 외양이나 본질, 현상, 이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는 수사법은 묘사뿐이라고 시인은 주장한다. 깨달음을 직술하는 방법은 진술이며, 진술은 귀를 향하는 어법이다. 그러므로 눈을 향하는 모든 건 묘사만이 가능하다. 진술도 묘사를 바닥에 깔고 해야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묘사가 객관지향성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사만 해서는 안 되며 묘사 위에 모든 것을 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인간 관념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오규원은 관념 용어로 현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는 뒤집어보면 사회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 안 한 그의 시가 사회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전복의 사회학인 것이다.
오규원의 질문의 서두는 언어(인식)란 무엇인가이다. 전복의 사회학을 이루는 기본적 골격은 언어란 무엇인가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 즉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이 그의 시를 새롭게 한 것이다. 휴머니즘이란 용어가 좋긴 한데 말을 바꾸면, 그건 인간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과 맞서려면 인간의 욕망이 수습해놓은 나쁜 요인들을 배제할 수 있는 아주 정교한 장치들이 필요한데, 시인도 위대한 화가처럼 각각의 구조(시법)을 짜야한다는 것이다. 랭보가 모음(음악)을 색깔(시각)로 바꾸어 노래한 이후, 가객의 시대는 갔다는 것이다. 즉 지금 같은 불안정한 내재율 구조로는 시가 노래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금은 견자(見者)의 시대이므로 자기의 시법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시, 마음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득하다면 시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냥 그득한, 그것이 불교와 같은 종교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견자시론 쪽으로 연결되기를 시인은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끝)
참고문헌
* 『사랑의 감옥』오규원, 문학과지성사, 2001, 재판 4쇄.
*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오규원, 문학과지성사, 2000, 재판3쇄.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오규원, 미래사, 1991, 초판.
* 『날이미지와 시』오규원, 문학과지성사, 2005.
* 「해방의 언어 그 날(生)이미지를 찾아가는 시적 여정 …오규원論」이연승 19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