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에서 글을 올릴 수 없는 신수현학우의 요청으로 제가 대신 글을 올립니다.^^
신수현 ( BoDiChiTa ) 님의 말 :
감동, 저는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깨어있지 못하는 사람을 일깨울수 있는 것은 귀와 눈을 통해 들어오는 지식이아니라마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만큼 다양합니다. 몰랐던 것을 알려주는 지식일수도 있고 한편의 영화, 시, 문화공연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충학학우가 말하는 것처럼 대중들 자신이 사회적 약자인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왜' 사회적 약자인 지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왜 그들이 사회적 약자인지를 알려줄 수 있다고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에는 의문이 듭니다.
금방 잊혀져 버릴 고리타분한 옛날 책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아성이 새내기를 받고서 세미나를 먼저하기보다 연습을 먼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왜 사회적약자인지를 알려주는 것에 있어서는 문화예술의 힘은 한계적일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을 열고 감동을 줄 수 있는 데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싶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문화예술의 역학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고있는 몸짓이 대중적이지 않다라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현재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얘기하고싶은 것은 앞으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도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가 재범학우가 말한 것처럼 중용적이라면 더이상 바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용적인 변화를 꾀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충학학우가 말한 "몸짓은 당연히 변화해야하고, 항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그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는 안됩니다." 라는 말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변화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위에서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설명하기위해 편의상 변화를 두가지로 나눠보겠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변화를 취하려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변화는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변화에 대한 목표를 정하고 그 변화를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후자의 변화가 중용적이라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얘기 하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몸짓의 변화 속에서 늘 진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항상 그럴 수 없을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을 큰 시각에서 본다면 그 진보적이지 못할 모습
또한 몸짓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민중가요가 시대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던 간에 그 민중가요의 모습은 큰 흐름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 흐름에 맞춰 몸짓이 창작되고 행해진다는 것이 저는 당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것 또한 민중문예의 한 흐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zen 이라는 그룹이 민중판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몸짓의 변화에 대한 생각과 지금 민중가요가 변화하는 만큼 그에 따라 몸짓도 변화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이 밑에 글은 편한 생각으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원래는 댓글이 달렸을 때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그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며, 여러 학우들이 참여할 수 있을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컴퓨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따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 점은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글을 쓴 김에 이번에 태원학우가 패원들을 향해 던진 "왜 당신을 찌르기를 하십니까?
라는 이 의문에대한 제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07년 제가 패장을 할 당시에 저는 우리 동기끼리라도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논해보고 싶었고 카페에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저 스스로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선뜻 제가 나서서 제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왜 이러한 질문을 하기가 꺼려지는지 좀 알것같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몸짓을 하기위해, 몸짓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기위해 아성이라는 공간에 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짓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를 알고 아성 가입원서를 쓰는 사람은 몇 안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점점 시간이 지나고 몸짓을 해가면서 우리는 생각을 정립해야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화를 해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사람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너는 고민을 많이 했기 때문이고 나는 고민을 적게 했기 때문이다의 문제로 귀결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짓을 왜 하는지를 정립해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자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가 꺼려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나니 태원학우가 이렇게 용기내어 찌르기를 왜 하냐고 물어본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우들이 조금씩 고민을 해 볼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에게 짧건 길건 몸짓을 하는 이유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고 해서 절대 주눅이 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번득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길을 가다 쓰레기를 줍다가 생각이 날 수도 있기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다음에 또 누군가가 태원학우처럼 개개인의 의견을 묻는 글을 올린다면 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견이 올라왔을 때 바로바로 댓글을 달면서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대의견보다는 동조, 칭찬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처음에 한 학우가 의견을 제시했더니 바로바로 반대 댓글이 달린다면,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해보려했던 학우는 주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견이 올라온다면 "아~ 너는 그랬구나."라는 식의 동조 댓글을 달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바로바로 반대의견의 댓글이 달릴때보다는 더 많은, 다양한 의견의 글이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견의 글은 그 다음에 이루어 져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져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군대를 다시가야 하나..
내가 그랬었나
당신은 왜 찌르기를 하십니까? 나 자신한테 물어본다면
병신...ㅋㅋㅋ
라고 답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