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민속놀이로 대표적인 것은 송파산대놀이와 장안편사놀이, 바위절마을 호상놀이, 남사당놀이라 할수있다. 여기에 강령탈춤과 북청사자놀이 등 이북에서 전해져오는 것이 서울에서 전승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지만 그 근원지가 서울이 아닌 이북지방이어서 제외시킵니다.
★송파산대놀이 松坡山臺놀이★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지정연월일 : 1973년 11월 11일 보유자 : 이충선(李忠善), 문육지(文陸地), 송파산대놀이 보존회 전 승 지 : 서울특별시
송파산대놀이는 송파 지역에서 전승되던 탈놀이로, 놀이꾼들이 탈을 쓰고 재담ㆍ춤ㆍ노래ㆍ연기를 하며 벌이는 연극적인 놀음이다. 송파는 한강변의 5강(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의 하나로서 송파진(松坡津)으로 불리던 곳이며, 조선왕조 후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향시(鄕市) 15곳 중의 하나인 송파장을 이루어, 송파산대놀이의 경제적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연희자의 한사람인 허호영(許浩永)의 말에 의하면 약 200년 전부터 송파산대놀이가 창성되었으나 중도에 쇠진되었던 것을 1900년부터 송파에 거주하는 허윤(許鈗, 1867∼1935)에 의해 구파발 본산대 연희자 윤희중(尹熙重, 1840∼1923)을 초빙하여 재건하고, 그 뒤 연중행사로 정월 보름ㆍ단오ㆍ백중ㆍ추석에 놀았는데 7월 백중에는 크게 놀았다고 한다. 1924년에는 큰 규모의 산대놀이 모임을 송파에서 열었는데 이때에 구파발ㆍ아현ㆍ퇴계원ㆍ의정부ㆍ노량진 등지에서 20여명의 이름있는 연희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듬해 한강대홍수로 송파마을이 유실되자 주민들은 가락동과 돌말이〔石村〕에 정착하면서 산대놀이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에서 전수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도 양주별산대놀이와 같이 그 주제를 보아서도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계통의 중부형(中部型)의 한 분파이다.
공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길군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돌아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거리굿 또는 길놀이가 있다. 행렬의 순서는 붉은 바탕에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고 쓴 기가 앞서며 다음 악사들이 서고 쌍호적·꾕가리·징·장고의 순으로 선다. 놀이를 준비한 모갑(某甲)이 가면을 쓰지 않고 서고 다음에 첫상좌·둘째상좌·연잎·눈끔적이·옴중·팔먹중들·샌님·신할아비·완보·취발이·포도부장의 순으로 뒤따르고 그 뒤에는 기타 여러 사람이 탈을 쓰고 서며 맨 뒤에 여역(女役) 탈들이 선다. 여기에 노장이 끼어 양쪽 소무를 거느리고 행진한다.
노는 순서는 7마당〔과장(科場)〕 9거리〔景〕(또는 12마당)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마당. 상좌춤마당.(양주의 경우와 비슷함) 제2마당. 옴중마당. 제3마당. 연잎·눈끔적이마당. 제4마당. 팔먹중마당. 첫째거리 북놀이, 둘째거리 곤장놀이(북놀이), 셋째거리 침놀 이 제5마당. 노장마당. 첫째거리 파계승놀이, 둘째거리 신장수놀이, 셋째거리 취발이놀이 제6마당. 샌님마당. 첫째거리 의막사령(依幕使令)놀이(말뚝놀이), 둘째거리 샌님· 미얄할미놀이, 셋째거리 샌님·포도부장(捕盜部長)놀이 제7마당. 신할아비·신할미마당이다.
이 놀이의 기본적인 춤사위는 7가지로 화장무ㆍ여다지ㆍ멍석말이ㆍ곱사위ㆍ깨끼리ㆍ돌단이ㆍ건더덩 등 7가지가 있으며 양주별산대놀이에는 없어진 당녀(唐女)춤이 있다. 또 몸짓(mine)에 가까운 것으로는 팔뚝잡이ㆍ무릎치기ㆍ까치걸음ㆍ갈지(之)자 걸음 등이 있으며, 장단은 염불(念佛)ㆍ타령(打令)ㆍ굿거리가 있다. 염불에는 6박자의 느린 염불과 잦은 염불인 도도리 장단이 있고, 타령에도 역시 늦은 타령과 잦은 타령이 있는데 잦은 염불인 잦은 타령과 깨끼리춤의 경우 박자는 같은데 반주가 바뀌는 잦은 타령이 있다. 반주 악기로는 장고·피리·해금·대금·북·제금(굿에서) 등이 있다.
탈의 수는 32개(원숭이 포함 33개)이며 제작방법은 다른 산대탈과 같으며 모두 바가지 탈이다. 양주산대놀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고 놀이마당에서 이들 탈들이 맞는 역이 따로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양주산대놀이에 비하여 옛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장안편사놀이 長安便射놀이★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7호 지정연월일 : 2000년 4월 20일 보 유 자 : 김경원(金慶原) 전 승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장안편사놀이란 조선시대 서울에서 행한 활쏘기를 행하는 무술경기이다. 도성문안이 한 편이 되고, 모화관ㆍ홍제원ㆍ창의문 밖ㆍ남문 밖ㆍ애오개 등이 한 편이 되며, 양화도ㆍ서강ㆍ삼개ㆍ한강ㆍ뚝섬ㆍ왕십리ㆍ동소문밖 손가장(孫家庄) 등이 한 편이 되어, 이 세 편이 쏘던 놀이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장안편사 이외에도 터편사〔射亭便射, 사정끼리 기예비교〕, 골편사〔洞便射, 일종의 지역대항전〕, 사랑편사(舍廊便射, 사랑끼리 교유하는 무사들이 사원을 편성하여 경기하는 것), 한량편사(閑良便射, 한량끼리 편성하여 경기하는 것) 등이며 이 밖에도 한출편사(閑出便射)·삼동편사(三同便射)·남북촌편사(南北村便射)·아동편사(兒童便射)등이 있었으며, 각각 갑·을·병 3등급으로 나누어 경기하였다.
갑오경장(1894)에 따라 옛 사풍(射風)이 일소되었다가 1899년에 황학정(黃鶴亭)이 설립되면서 다시 왕성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1922년 황학정이 중추 되어 조선궁도연구회(朝鮮弓道硏究會)가 발족됨에 따라 활기를 찾게 되었다. 1945년까지 서울에는 40여 개의 활터가 있었는데, 그 중 백호정(白虎亭)·석호정(石虎亭)·풍벽정(楓碧亭)·노지사정(盧知事亭) 등이 유명하였으며 활터에는 활을 쏘았을 때 화살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과녁 뒤에 토성(土城)을 설치하였다. 편사(便射)는 양편이 각기 일정한 수의 선수를 선정하고 매 선수가 세 순에서 다섯 순씩 쏘아 맞힌 화살의 총수를 합해서 승부를 짓는다. 활쏘는 사람들에게는 지켜야 할 9훈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덕행·성실겸손·자중절조·예의엄수·염직가감·습자무언·정심정기·불언승자·망망파골 등이다. 이 편사놀이는 으레 풍악과 기생이 있어 응사하는 한량 뒤에 두세 사람씩 나란히 서서 병창을 하여 응사원들의 흥취를 돋군다. 쏜 화살이 적중하면 획창(獲唱)이 큰 목소리로 외치고, 또 획관(獲官)이 나직이 "변(邊)"이라고 하면 이 때에 기생들은 그 응사원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그 성과 직함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획창ㆍ획관을 변이라 하여도 기생들은 변이라 하지 않고 "관중(貫中)"이라고 한다. 가령 첫 번째 살이면 "아무 서방님 일시에 관중이요" 한다. 이와 같이 변에 맞아도 관중이라 함은 옛날 궁중에서 왕이나 정승이 쏠 때에 이를 존대하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과녁에 화살이 '중', '부중'이라 하는데 대하여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예를 들면, 쏜 화살이 과녁의 위턱을 스치고 지나가 떨어지는 것은 맞지 않은 것으로 한다. 화살이 과녁 변을 맞고 과녁 나무조각은 떼었어도 살이 과녁에 꽂히지 아니하면 안 맞은 것으로 한다. 화살이 과녁에 못 미쳐 땅에 떨어졌다 튀어서 맞는 것은 맞은 것으로 하나, 맞는 소리만 내고 활촉이 과녁에 박히지 않은 것이면 안 맞은 것으로 한다. 쏜 화살이 과녁 아래 끝에 맞고 우죽만 땅에 떨어지고 활촉이 과녁에 박힌 것은 맞은 것으로 한다. 이상과 같은 판정이 있어 경기를 슬기롭게 진행하였다.
★바위절마을 호상놀이★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0호 지정연월일 : 1996년 9월 30일 보 유 자 : 이종천(李鍾天)·이재경(李載慶) 전 승 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바위절마을(岩寺洞) 호상(好喪)놀이는 부부쌍상여(雙喪輿) 호상놀이로서, 가정형편이 좋으며 오래 살고 복이 있는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 하는 놀이이다. 출상시(出喪時) 험난한 길을 무난히 갈 수 있도록 전날 밤 빈 상여를 메고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모여 밤새도록 만가(輓歌)를 부르며 발을 맞추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현 강동구 암사동이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래되어 왔으나, 그 뒤 마을의 개발과 도시화 물결로 단절된 것을 30여년만인 1990년에 몇몇 뜻있는 이들에 의해 원형 복원되었다.
이 놀이의 구성은 출상ㆍ상여놀이ㆍ노제ㆍ징검다리ㆍ건너기ㆍ외나무다리 건너기ㆍ산비탈 타기ㆍ산역행으로 짜여져 있으며, 대여(大輿)는 4인씩 9행해서 36명, 소여(小輿)는 4인씩 7행해서 28명의 상두꾼으로 꾸몄다. 대여에는 선소리꾼이 올라서거나 앞서 걸어가며 요령을 흔들고 소리를 멕이며, 소여에도 요령잽이를 한 사람 배치한다. 상여를 들어올리거나 내릴 땐 요령을 잦게 흔들므로써 신호로 삼는다. 절차는 발인제, 노제, 논두렁 건너기, 짐검다리 건너기, 외나무다리 건너기, 산신제, 달구질, 평토제 순이며, 복식은 상복이다.
놀이 내용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망인(亡人)이 상여에 옮겨지면 발인제를 지낸다.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면서 "곤방네"를 세번 부를 때 상두꾼들이 "네"하고 대답하며 상여를 들어 어깨에 멘다. "어러기넘차" 소리를 몇 회 부르며 발을 맞춘 뒤 선소리꾼이 마모소리를 내면 상주ㆍ복재기들은 절을 세 번한다. 상여도 앞쪽을 숙이며 하직 인사를 한다. 요령잽이가 상여 앞에 올라선다. 동구 밖을 나가기 전에 쌍상여가 마주 보며 서로 밀고 당기며 맴돌기도 하면서 상여어루기를 한다. 소리는 방아타령이 불리워진다. 상여는 망인이 잘 다니던 곳, 자기 소유 전답을 지날 때 잠시 쉬는데 이때 노제(路祭)를 지내고 조문을 하지 못한 조객(弔客)들은 문상을 한다. 징검다리와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는 4열의 상두꾼 중 바깥편 2열은 대열에서 나가고 안쪽 2열만 건넌다. 상여와 발은 중심에 두고 몸을 바깥으로 곧게 기울이기 때문에 2열의 상두꾼이 V자형을 이루게 된다. 산비탈을 탈 때는 4열로 가되 높은 경사면의 상두꾼들 2열은 몸을 숙이고 낮은 논둑의 다른 2열은 상여를 높이 치켜 들어주므로써 균형을 맞춘다. 이렇듯 여러 가지 형태의 행상모습과 그 운구 요령을 보여 주고 있다.
암사동의 일반적 상여 행렬은 연 혹은 지초연이 앞서고 만장기와 농악(징·장·북·쇄납)이 뒤따르며 상여ㆍ상주ㆍ복재기ㆍ조객순으로 길을 떠난다. 고증자들은 방상시를 보지 못하였으며 민속경연 준비 때에 첨가했다고 한다. 달구질은 6인이 2회 다지고 평토 후 벌다구질은 10∼15인이 3회 다짐이 기본이며, 상주가 더 달궈주길 바랄 때는 2회 더 해서 모두 9회를 다지기도 한다. 선소리꾼은 따로 서서 북을 치면서 메기고 달구꾼들은 각자 한발 두 뼘 길이의 긴 달굿대를 쥐고 나비 놀 듯 허리를 굽놀리면서 소리를 받는다. 암사동 쌍상여 호상놀이는 일반 전통 장례행사와 비슷하나 슬픔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즐거운 가운데서 진행된다는 것과 발 동작이 절도 있다는 것과 또 회심곡과 방아타령 등이 불리어지는 것이 일반 상여와 다르다 하겠다. 이 놀이는 조선시대 이 마을에 세거(世居)하던 문씨(文氏) 문중에서 행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남사당놀이 男社黨놀이★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지정연월일 : 1964년 12월 7일 보 유 자 : 남사당놀이 보존회 외 전 승 지 : 서울특별시
남사당은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예인(流浪藝人)집단으로, 조선조 후기부터 1920년대까지 우리나라 농어촌을 떠돌아다니며 민중에게 즐거움을 제공하였다. 이 남사당놀이는 우두머리 곧, 모갑인 꼭두쇠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음)·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재인(才人)·광대(廣大)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이어 왔다.
남사당놀이의 연원이나 형성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사당패의 주요 구성원이 여자임에 반하여,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우두머리로 한 남자들만의 사회였다.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조직은 엄격하였고 모자란 인원은 가난한 농가의 아이나 고아ㆍ가출아 등으로 충당하였다. 현재까지 이들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남 당진·회덕, 전남 강진·구례, 경남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는 삐리들의 기예(技藝)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독립적인 존속이 어려워지게 되자 중매구와 걸립패와의 교습을 거치게 되고, 사당패·솟대장이패와의 교류도 갖게 되면서 오늘의 형태로 변모된 것이다.
남사당놀이 가운데 얼른(요술) 등의 종목은 이미 사라졌지만 나머지 여섯 종목은 다음과 같다.
풍물 일종의 농악인 인사굿으로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판·당산벌림·양상치기 등 24판 내외의 판굿을 돈다음 상쇠놀이·따벅구(벅구놀이)·징놀이·북놀이·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의 순서로 농악을 친다. 이 풍물은 웃다리 가락(충청·경기·이북지방)을 바탕으로 하며 꾕가리·북·징·장구·날라리 땡각(令角)의 잽이(악사)와 법고 등을 포함한 최소 24명 정도가 일조를 이루는데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동니·채상 등의 몸재주와 묘기를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버나 대접이나 쳇바퀴·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이다. 이 놀이의 묘미는 접시 등을 돌리는 외에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주고 받는 재담과 소리가 극성(劇性)이 짙은 데 있다.
살판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판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종류는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 등 11가지 순서를 가지고 있는데, 본래는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의 놀이 가운데 하나였는데 남사당놀이로 수용한 것이다. 살판쇠(땅재주꾼)와 매호씨가 잽이의 장단에 맞추어 재담을 주고받으며 재주를 부린다.
어름 줄타기 곡예로 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대 중앙을 가로지른 외줄을 어름산이(줄꾼)가 건너가며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는 놀이다. 종류는 앞으로 가기·장단줄·거미줄 늘이기 등 15종의 순서가 있다.
덧뵈기 덧(곱)본다는 것은 탈을 쓰고 연희를 하는 일종의 탈놀음이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우세한 풍자극으로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 등 네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때그때 지역민의 취향과 흥취에 영합하였다.
덜미 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전하지 않는 전통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로, 남사당 연희자들은 덜미라 부른다. 대개 두마당 일곱거리로서, 즉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 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짓고 허는 거리) 등이다.
이 6가지 놀이는 대략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3∼4시까지 연희되어 총 6∼7시간을 공연하였지만 현재는 2∼3시간 정도로 축소 연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