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기상청 예보에 의하면
부산의 오늘 기온은 영상 0도, 체감온도 영하 3도이라고 한다.
금년 들어 최하의 기온이다.
이번 주 토요일은 동지이다.
동지는 양력 24절기 중 22번째로 보통 양력 12월 22일경이다.
절기는 북경 기준이므오 한국 기후와 맞지 않다.
금년은 동지 음력일이 11월 21일 하순이라 노동지(老冬至)이다.
[노동지에 노인들이 다시 못 올 먼 길을 많이 떠난다]는 슬픈 속담이 있다.
동지가 초순이면 애(소)동지, 중순이면 중동지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동지를 작은 설, 구정을 큰 설로 여겼다]고 한다.
이 시점에 나이를 한 살 먹는 것이다.
그리고 동지에는 “액을 물리친다”하여 [끓고 있는 팥죽 국물을 대문이나 마당 등에 뿌리고
팥죽을 사당에 올려 동지차례를 지낸 후 가족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었다]고 전한다.
동지 때는 아니지만 고려시대에도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팥죽을 쑤고 예쁜 옷을 입어
부모님의 장수를 기원하며 술을 올렸다]는 기록이 ‘익재집’에 전한다.
익재 이제현은 고려 공민왕 때 활동하였던 문신으로
그의 딸은 공민왕과 혼인하여 혜비(惠妃)에 책봉되었고
그의 호를 딴 ‘역옹패설’은 조선의 ‘추강냉화’ 그리고 ‘연려실기술’ 등과 함께
유명 야사(野史)로 전해오고 있다.
한의학자에 의하면 “팥죽은 양기를 보강해 면역력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혼미한 정국 속에 우린 갑진년(2024년) 끝자락에 서 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 해의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이라고 한다.
한자를 잘 모르는 우리에게는 어려운 용어이다.
”세력을 제 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 만연한다.“는 의미라 한다.
작년은 “견리망의(見利忘義)”로서
“눈 앞의 이익 만 생각하여 의로움을 잊는다.”하며 우리 사회를 꼬집었다.
이 사회의 맑은 하늘은 언제쯤 찾아올까.
의령지회 을사보수단을 최종 마감한다.
중앙종친회 수보위원회의 '을사보발간범례'가 확정되고 2년,
지회의 실질적 수단이 시작된 지 1년이 경과되었다.
그동안 150명의 종친이 843건의 신청서를 제출하셨고
내용을 헤아리니 신규입보 388건, 수정(추가 포함) 455건이다.
좀 더 나은 수단실적을 거둘 수 있었음에도 그러하지 못하였음은 아쉽다.
저희 수보위원들의 홍보와 정성이 부족한 부분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도움주신 종친들께 수보행정총괄로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수보위원들의 임무는 계속 된다.
내년에 신청 내용 대로 등재되었는지 교정 작업을 하여야 한다.
수단 못지 않게 중요한 임무이다.
이번에 개인사정으로 수단에 미처 참여하지 못하신 분에 대한
구제책이 있는 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많은 자료가 등재된 족보 일수록 그 가치가 빛난다.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1476년/조선성종8년)가 사대부 집안에서 최초 족보로 인정 받지만
개성왕씨를 포함한 명망 집안의 족보는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1565년/조선명종21년)를 롤 모델로 하였다.
시조로부터 19세손까지 모두 4만2천명 직손과 외손 등의 관직과 약력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두 족보가 본손(本孫) 뿐만 아니라 외손(外孫)까지 등재하였지만
가정보는 사위 외외손(外外孫)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고 한다.
3권 3책인 성화보와 10권 10책인 가정보는 목판본으로
아들(子), 딸(女) 구분 없이 출생 순으로 자녀를 등재하고 있다.
여성을 폄훼하는 유교국가에서 이례적인데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영향으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념이 적었다고 한다.
권(券)은 문서나 서적을 세는 단위이고 책(冊)은 권을 묶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권 또는 3권이 1책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조선 후기에 발간된 개성왕씨 창간무오보(創刊戊午譜/ 1798년/조선정조23년)는
선남후녀(先男後女) 즉 딸보다 아들을 먼저 그리고 출생 순으로 등재하고 있다.
이런 사유로 참봉 관직을 지낸 밀양박씨 광제(光濟) 15대 대고모부께서는
병사공(왕종지)의 매형인지, 매제인지 알 수 없고
실묘되어 산청에 제단이 있는 17세 왕언박의 생부(生父)인
16세 왕담 할아버지와 전주이씨 익번 16대 대고모부 두 분 역시 서열 순 파악이 어렵다.
가정보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시조 류차달을 1대(代)하고 아들인 류효금을 2대(代)로 등재하였는데 일반적으로 1세(世), 2세(世)로 기록된다.
대와 세가 동일하다는 성균관 주장이 있다.
성균관은 상대하세설(上代下世設)이 근거가 없다고 한다.
다만, 관계를 이야기할 시는 다르다고 한다.
예컨대, 본인은 1대조이자 1세조이고 부친은 2대조이자 2세조이지만
관계를 표시할 시는 부친이 1대조이자 1세조라는 설이다.
그러므로 족보에서 대와 세가 혼용하여 사용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보 하단에 색인페이지 수를 기록하며 천자문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병기(倂記 )하였다.
아라비아 숫자는 5세기경 인도에서 발명되고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오늘날 전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조선은 신문화가 도입된 갑오개혁(1894년) 시점이니 가정보 발간 3세기 이후이다.
추정컨대, 보학을 연구하는 학도를 위하여 가정보 사본에 아라비아 숫자를 최근에 추가하지 않았을까.
성화와 가정은 중국 명나라의 8대황제 헌종과 11대황제 세조 재위 시 연호이다.
당시 조선은 신하의 나라이니 자체 연호와 천신제(天神祭)도 허용이 되지 아니하였다.
명나라는 국성(國姓)이 주(朱)씨인 한족(漢族)의 마지막 국가로 청(淸)에 의해 멸망되었다.
안동권씨대종회는
8차족보인 갑신보(2004년)부터 디지털족보로 전환하였고
종중행사나 애경사 기사를 담은 월보인 종보(宗報)의 창간일은
1974.12.01.이라고 '본관사수'라는 TV 종편 방송에서 알려 주었다.
희미한 기억으로 개성왕씨 또한 비슷한 시기에 종보가 연보 형태로 발간되였던 사례가 있었다.
개성왕씨종중은 이번 을사세보 발간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있다.
차류씨종보사(車柳氏宗譜史)에서 유래된 캐묵은
‘왕씨원파기(王氏源派記)’는 이제 추방하여야 한다.
조선시대에 삶을 이어 가셨던 선조님들의 생각 속에
“중국은 황제국이고 조선은 제후국이니 중국의 문물과 사상이 최고이다”라고 여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지배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흠모가 개성왕씨의 국조(고려태조의 증조)가 당나라 황실의 후손이라는 오류를 가져왔다.
국조께서 ‘당나라 귀성(貴姓)의 자’라는 신분이 삭제 되기를 원한다.
갈 길이 멀다.
갑신세보 수권(首卷)의 많은 자료가 제자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사진은
여말선초 인물인 왕족 익령군 왕기(王琦) 선조께서
조선위정자의 개성왕씨에 대한 학살을 피하고자 머물렀던
인천 옹진군 영흥도(靈興島) 일출 모습으로
후손이 셀프 선정한 올해 최고의 의미 깊은 광경이다.
신분을 세탁하고 하루하루를 숨어 살아 연명하신
익령군의 애환이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전하여 온다.
2024.12.18.(수) 아침
의령지회 30세 왕경수(王漢道) 배상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을사년에는 좋은 일 만 가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