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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가나안 변방에서 믿음에 실패하다
연구 범위: 민 13,14장
기억절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요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온 민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 - 지금은 영적 안식, 하늘에서는 영원한 안식.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믿음이냐 불신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
개관: 민 13,14장
13:1~25, 땅을 탐색함 | 13:26~33, 14:6~9, 돌아와 보고함 | 14:1~5, 10~45, 파멸적인 결심 |
조사단을 구성함(13:1~16). 가나안을 탐하러 보냄(13:17~25). | 다수의 보고(13:26~29, 31~33). 소수의 보고(13:30, 14:6~9) |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반역(14:1~5, 10). 불신에 대한 형벌(14:11~38). 2차 반역(14:39~45) |
서론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난 지 수개월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성경에 주어진 사실들을 주시해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난 후 “제3월”에 시내 산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백성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성막이 건축되어 제2년 초에 그 구조물이 세워지기까지 지냈다(출 40:17 참조). 제사장들을 임명하고 유월절을 지내고 조직상의 여러 절차들을 거치는 데 거의 두 달이 걸렸다. “제2년 2월 20일에”(민 10:11) 성소 위의 구름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시내 산에서의 장막 생활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11 일후에(부조와 선지자 상권, 513) 이스라엘 회중은 가나안의 남쪽 변방 바란 광야의 가데스에 진을 쳤다. 이리하여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 변방에 도착하기까지 소모된 총 기간은 15 개월이었다.
1883년에 엘렌 화잇은 기록하기를 l884년의 대실망 이후에 재림교도들이 저희의 믿음을 굳게 지키고 연합의 정신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 따랐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저들의 노력과 함께 큰 능력을 베풀었을 것이며, 사업은 끝나고 보상받을 당신의 백성을 영접하기 위하여 벌써 주님께서 오셨을 것이다. …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 불신과 불평과 반역이 40년 동안이나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은 것이었다. 동일한 죄들이 현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다. 어떤 경우도 - 하나님의 허락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로 죄와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이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게 만든 것은, 주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는 자들 사이의 불신, 세속적 욕망, 성결치 못함, 다툼 등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81, 82).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히브리서 4장 1절의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땅을 탐색함(민 13:1~25)
둘레가 1,200 리나 되는 가나안 땅을 40 일에 걸쳐서 두루 여행하는 이 위험하고 걱정스런 사명을 위하여, 바란 광야의 가데스에서 12명이 선발되었다. 그들은 남단에서 북쪽으로 발행하여 레바논의 산들을 지나 다마스커스(다메섹)의 북부도시 하맛 어귀(21절)까지 갔다. 그들의 목적은 그 나라의 자연, 그 나라 사람들, 도로망 등을 알아보고, 잠재적 위험은 무엇이며 그 땅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준비 사항들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의심을 사도록 무리를 지어 다닌 것 같지는 않다.
정탐꾼들은 무엇을 발견하였는가?(민 13:21~24)
답:
(실례) 포도 한 송이를 막대기에 꿰어 멘 것은, 한 사람이 들기에 너무 무거워서가 아니라, 흐트러지지 않게 잘 가져오기 위함인 듯하다. 1819년 로킹햄의 후작에게 두 관이 좀 넘는 큰 포도가 선물로 보내졌다. 80 리나 되는 먼 길을 장대에 때어 4명이 운반하였는데 한 번에 두 명씩 교대로 메어 그것을 날랐다. 기록상 가장 큰 포도송이는 두 관 반 정도의 것이었다. 이 정탐꾼들은 석류와 무화과와 함께 그것을 가져 왔다.
돌아와 보고함(민 13:26~33, 14:6~9)
다수의 보고(민 13:26~29, 31~33)
열 두 정탐꾼 중 열 명은 어떤 보고를 하였는가?(31~33절)
답: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이 본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들은 그 땅이 아주 비옥하고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들의 보고를 반박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비 시설들을 사실대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그 나라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여러 인종들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도달한 결론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었다. 낙망은 누가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정탐꾼들은 그 땅의 비옥함을 인정하였다. 그 증거로써 그들 앞에 큰 포도송이와 그들이 가져온 다른 과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낙망하여 그 땅이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그 거민을 삼키”(32절)는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게 그 땅이 “나쁜” 땅임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자란 거인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절망 상태에 머물러 있을수록 들은 어려움을 더 많이 보게 되었고, 땅에 대한 이전의 좋은 인상은 애써 부인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한 기대는 곧 경악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열렬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 그들은 모세에게 보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다. … 백성들은 열광하여 여호와의 목소리를 열심히 청종하고 곧 나아가 그 땅을 점령하기를 원하였다. … 그러나 이제 사태는 달라졌다. 정탐꾼들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 낙담으로 가득 찬 불신의 마음에서 나온 감상을 말하자, 백성들의 희망과 용기는 공포와 절망으로 변하였다. 그들의 불신은 회중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신민을 위하여 그렇게도 자주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권능은 잊힌바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514).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재림과 함께 그들이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어떤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인가?(벧후 3:3,4)
소수의 보고(민 13:30, 14:6~9)
여호수아는 무엇을 토대로 그런 낙관적인 보고를 했었는가?(민 14:8,9)
답:
민수기 13장 30절과 31절 사이의 현격한 대조를 주시하라. 한편에서 우리는 믿음과 용기를 보며, 다룬 한편에서는 불신과 낙망을 본다. 요즈음에도 양편의 태도가 다 교회 안에 보인다.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있는 장애물들의 심각성을 강조하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교우들의 믿음을 약화시켜 많은 손해를 교회에 끼쳐 왔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4:9, 13:30)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와 다른 시대 다른 환경 속에 살았던 이사야는 우리가 용기 주는 말을 해야 할 것에 대해 무슨 권면을 하고 있는가?(사 35:3,4)
답:
<참고>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만물의 끝이 갈까왔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징조들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다. 폭풍의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단 한 마디라도 불신이나 낙망의 말을 하지 말자”(교회증언 9권, 167).
“믿음을 이야기하자. 그러면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낙망의 생각이 자리할 틈을 결코 주지 말자. 한 마디의 의심의 말도 하지 말자. 그러한 말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결국 낙망과 불신의 수확을 거두게 한다”(서신 77, 1895).
파멸적인 결심(민 14:1~8, 10~45)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반역(민 14:1~5,10)
백성들이 반역 중에 취한 행동은?
1절
2절
4절
10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은?(히 3:19)
답: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 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들을 바라보는 중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로 계속해서 그들 중에 기적을 행하셔서 초자연적인 당신의 능력의 현시를 통해 그들을 보호하셨다. 그러나 불신 때문에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보지 못하였다.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만일 고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여호수아와 갈렙 편에 섰을까, 믿음 없는 군중 틈에 섰을까? 오늘날 낙망적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나는 어떻게 하는가? 나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증거들을 기억하고 그 증거들을 의지하는가?
불신에 대한 형벌(민 14:11~38)
다시 한 번 모세는 자행자지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 하였다. 몇 달 전에도 그랬듯이 모세는 이스라엘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자기를 크고 새로운 나라의 지도자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 항변하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무아의 중보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서 나오도록 의도하셨던 바이다. 모세의 호소에 응답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셨으면서 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는가?
답:
용서가 죄의 결과로부터 사람을 반드시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히 3:19)다. 믿음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인 방법으로 응하는 데 부적당하게 되었다. 그 뒤에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가나안 공격을 고집한 것(40~45절)은 그들에게 아직도 불신의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죄에 알맞게 주어진 형벌은 무엇이었나?(민 14:2, 3:28~34).
답:
이런저런 껍질을 다 벗기고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죄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의 대부분은 죄 그 자체에 있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길을 주장할 때, 들은 그 결정의 필연적인 결과를 당하게 된다. “회개”가 저질러진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보이는 것이기보다는 심기운 것에 대한 추수를 피하려는 욕망일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갈 6:7, 8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근거로 어떤 경고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가?(히 4:1)
답:
히브리서 3, 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여 믿음에 충실 하라는 권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락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그 세대 중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엄숙한 맹세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알아봅시다) 히브리서 3장 7절부터 4장 11절까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석서들을 사용하여 다음 질문들에 최선을 다해 답하라.
사도는 자신의 주장에 시편 95편 7~11 절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있는가?
답:
히브리서 4장 1절의 안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답:
히브리서 4장 8절의 이름 “예수”(흠정역)는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를 가리킨 것인가?
답:
이 사도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창세기 2장 2절을 가리키고 있다.
답:
이상스럽게도 9절에서 쓰인 안식이라는 말은 그 밖의 다른 곳에 사용된 일반적으로 안식에 해당하는 말들과 헬라어의 형태가 다르다. 여기서 사용된 말은 안식일이라는 헬라어에서 온 것이다. 개혁판은 9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것은 안식일 안식을 구속의 안식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후에 안식일에 쉬신 결과로 안식일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구속 사업에서 쉬셨으며, 비록 세상에서 예수를 사랑한 자들에게는 슬픔이 있었지만 하늘에는 기쁨이 있었다. 하늘 거민들의 눈에 찬란히 빛난 것은 장래에 대한 약속이었다. 결코 넘어뜨릴 수 없었던 죄를 정복함으로 회복된 창조물과 구속받은 인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업에서 흘러나오는 결과임을 하나님과 천사들은 보았다. 예수께서 쉬신 이 날은 이런 광경과 영원히 연결되었다”(시대의 소망 3권, 308).
9절의 “안식할 때”는 히브리서 3장 7절부터 4장 11절까지 나와 있는 안식의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답:
안식일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증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 출 31:13 참조)고 말씀하셨다. 안식일 준수는 올바로 이해되기만 하면 노력해서 구원을 얻어 보려는 율법 주의적 시도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고 있다는 표요,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표인 것이다.
히브리서 3장 14절은 예수의 재림이 분명히 지연되는 것에 관해 어떤 빛을 던져 주는가?
답:
히브리서의 권면은 원래 사도 시대 교회의 믿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도 시대 당시의 교회 안에는 일반적으로 주께서 약속하신 재림이 오래 지연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 그러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벌써 30년 이상이 지났다. … 그런데 아직도 그분의 재림의 징조는 없었다. 틀림없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짐과 예기치 않은 지연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그래서 아마 특별히 이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는 권면을 주려한 듯하다. 하늘 법정에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명백한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히 3:14)가 되게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신앙의 굳건한 기초를 제공해 줄 것이었다. …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될지도 모르나, 지금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 사도 시대 교회에 주어진 이 교훈은 특별히 오늘날의 교회에 꼭 알맞은 것이다“(본교 성경 주석 7권, 416).
사도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 긴박성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가?(히 3:13~15 4:7)
답:
2차 반역(민 14:39~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신에 대해 형벌이 선고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민 14:39, 40; 신 1:41 비교)
답: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과 맞서 우리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한, 우리가 어떤 노선을 택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패배하고 슬픔으로 돌아서서 40년의 방랑을 시작하기 위해 광야로 향했다. 그들이 믿음의 사람들인 소수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보충학습: 부조와 선지자 상권의 “열 두 정탐꾼”(513~524쪽)을 읽어라.
요약
불신은 현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죄의 광야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15)는 사도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또는 교회로서 불신의 보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믿음의 보고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적용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하는 데 이번 공부가 도움이 되었는가?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나와 같다면 예수의 재림이 더 지체될 것 같은가, 덜 지체될 것 같은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뜻대로 하시게 한다면 나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