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공파하고는 계가다르지만
진주정씨의 훌륭하신 선조이십니다
후손중에 정화원 국회의원이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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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진주정씨 - 정주원의 우복종택(愚伏宗宅)17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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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
2024. 5. 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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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종가(산수헌) 외서면 우산리 193-2(채릉산로 799-46) 1750년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에 터를 잡은 것은 상주 판관을 지낸 정택(鄭澤)의 아들 정의생(鄭義生)이 상주의 호족 상산김씨 김득제(金得齊, 1315~?)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 정의생은 처가 동네인 상신전촌에 살게 되었고, 정효옹(鄭孝翁), 정걸(鄭傑), 정극공(鄭克恭)까지 4대가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상주시 공성면 초오리와 인창리 사이다. 정극공의 아들 정번(鄭蕃, 1449~1521) 대에 이르면 역시 상주지역인 율리로 이거하게 된다. 1500년대를 전후한 시기로 보이는데, 지금의 상주시 청리면 소재이다. 율리에 살게 된 진주정씨는 대체로 한미하였다. 정번이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을 뿐 그의 아들 이하 3대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진주정씨는 정번의 현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현달하면서 상주지역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우복 정경세의 현달로 인해 우복의 부친인 정여관(鄭汝寬, 1531~1590)은 좌찬성에, 조부인 정은성(鄭銀成, 1511~1560)은 이조참판에, 증조부인 정계함(鄭繼咸, ?~1526)은 좌승지에 추증되는 은전을 입게 되었다.
우복 정경세는 율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지만 중년 이후로는 지금의 종가가 있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우거하는 일이 많았다.
또 우산에 별장을 짓고 강학활동을 하다가 상주의 매호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경세는 만년에 각종 옥사에 연루되면서 삶이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결국 제자인 조희인(曺希仁)과 조우인(曺友仁)의 배려를 받으며 매호촌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1750년(영조 26)에 영조가 우복 정경세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독서하던 곳인 우산 기슭에 동서 5리 남북 10리의 사패지(賜牌地)를 내리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정경세의 후손들은 이를 가리켜 ‘칠리강산(七里江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경세의 5대손 정주원(鄭胄源,1686~1756) 대에 이르러 청리면 율리를 떠나 외서면 우산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후손들이 지금까지 우산리와 그 주변에 세거하고 있다.
정주원의 손자 입재 정종로는 상주 진주정씨의 또 다른 불천위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은 정종로를 ‘경학과 문장이 융성하여 영남 제1의 인물’로 칭송하였다. 이후 정상진(鄭象晉), 정민수(鄭民秀), 정윤우(鄭允愚), 정동규(鄭東奎)를 거쳐 긍재(肯齋) 정의묵(鄭宜默, 1847~1906)에 이르러 또 한 번 큰 현달한 인물이 출현하게 된다. 긍재 정의묵은 1885년(고종 22)에 대과에 급제한 뒤에 여러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였던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우복종가에 내려오는 서애학통을 착실하게 계승했다고 하겠다. 이렇듯 진주정씨 우복종가는 현재 15대 종손 정춘목(鄭椿穆)에 이르기까지 우복 정경세와 입재 정종로 두 명의 불천위를 배출한 영남의 대표적인 종가를 형성하였다.
우복종가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의 우복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로 우복천이 흐르는데, 이안천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복천은 화북면 동관리 형제봉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우산의 어풍대(御風臺)를 지나 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종가 앞쪽에는 천마산(天馬山, 일명 시루봉)이 자리 잡고 있다.
우복 정경세의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이고, 초시는 문숙(文肅), 개시는 문장(文莊)이다. 부친은 정여관(鄭汝寬), 모친은 합천이씨 이가(李軻)의 딸이다. 1580년(선조 13)에 상주목사로 와 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로써 퇴계 이황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에, 1586년(선조 19)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8년(선조 31)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영남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시키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선조 33) 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이때 정경세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여 이곳에 오현(五賢)을 종사하였다. 1607년(선조 40)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의병의 식량을 모으는 일로 영남지방을 동분서주하였다. 1629년(인조 7)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고, 이듬해에는 겸지춘추관사로 『광해군일기』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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