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의 만행
강 동 구
작은아들이 호주 시드니에 살다 보니 세 번째 호주를 찾게 되었다.
대학을 다닐 때 새로운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며 영국 일본 독일 미국 등을 두루 다녀보고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일 년여 머물다 호주에 정착하여 호주 국적의 한국 아가씨와 결혼하여 토끼 같은 아들 둘을 낳고 열심히 살고 있다. 이런저런 핑계로 이번에도 아들네 집을 오게 되었다.
인천 공항에서 저녁 7시에 출발하여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6시가 되었다. 짐을 챙겨 아들 집에 오니 며느리 손자가 반갑게 맞아 준다. 솔직히 말하면 아들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고 손자들만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도 이제 두 돌이 아직 석 달 남은 작은 손자 녀석이 제일 보고 싶었다.
아마 그 녀석이 아녔으면 이번에는 아내만 보내고 나는 집에 남아 있었을 것 같다. 큰 손주는 사부인이 산후조리를 해 주었고 작은 녀석은 아내와 내가 산후 시중을 들어주어 더 애틋한 마음도 있고, 내리사랑이라 그런지 작은놈이 더 내 마음을 차지한다.
재롱도 말썽도 절정에 이르고 있으니 녀석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
기내에서 선잠을 조금 잤더니 졸음과 피곤이 몰려온다. 대충 점심을 먹고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들 며느리 아내가 내 얼굴을 보고 박장대소를 한다. 이제 여섯 살인 큰손자 녀석은 시치미를 뚝 떼고 능청을 떨고 있다.
큰 녀석이 할아버지 얼굴에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검정 테이프를 얼굴 이곳저곳에 붙이고 매직 펜으로 낙서를 해 놓았으니 보는 사람들이야 포복절도, 할 수박에, 참 오랜만에 손자 녀석 때문에 크게 한번 웃어 보았다. 두 노인네 사는 집에 웃을 일이 뭐 그리 있었겠나(?) 손자의 만행이 이렇게 기쁨을 가져다주다니(?) 아직 손주가 없는 친구가 떠오른다. 자녀의 결혼이 늦어 손주가 없는 친구는 손주 한번 안아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다. 그 친구 앞에서는 손자 자랑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다.
손자의 만행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금 년에 학교에 들어간 녀석은 영어책을 가져와 나보고 읽기를 강요한다. 아는 단어도 있지만 모르는 단어가 대부분이다. 녀석은 영어 실력을 할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
큰 녀석은 할아버지를 잠시 그냥 두지를 않는다. 이것 하자 저것 하자는데 도무지 체력이 달려서 감당이 안 된다. 아들 며느리는 할아버지 괴롭히지 말라고 성화를 하지만 손자 녀석에겐, 마이동풍이다. 사내 녀석이라 할아버지가 제일 만만한 친구다. 제 아비는 가끔 야단도 치지만 할아버지는 절대로 야단을 치지 않고 저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인 줄 녀석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참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내가 손자일 때 할아버지 얼굴에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면 아마 며칠을 야단맞고 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할아버지들은 엄격하셔서 감히 가까이 가기에도 두려운 존재가 할아버지였다, 대신 할머니가 손주들을 사랑의 치마폭에 감싸주셔서 손주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 주셨다. 손주가 아무리 잘못하여도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할머니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부모에게 야단맞을 때 구해주시는 구세주이기도 하셨다.
미인은 찡그려도 예쁘다더니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사랑스럽고 예쁘기 그지없다. 자식이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는 것, 보다, 더 큰 효도가 있을까? 예쁜 손자를 낳아준 며느리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저녁에는 쇼핑을 겸하여 외식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에 나오니 아코디온을 연주하는 젊은이가 열심히 연주를, 한다. 구걸을 위하여 연주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남을 기쁘게 해주면 자신도 더불어 행복해지고 결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아코디온 연주자의 재능기부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작은 손자다. 집에서 음악 소리만 들리면 춤을 추는 녀석은 아코디온 연주에 어김없이 신나게 춤을 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인형 같은 아이의 엉덩이춤 공연에 모두 행복해한다. 한 사람의 재능기부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니 한 사람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만남은 기쁘지만 헤어짐은 슬픈 일이다. 이제 얼마 후에 녀석들과 헤어져야 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가끔 티 비에서 아빠가 일하는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동남아 아이들을 본다. 몇 년 만에 아빠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공항에서 헤어질 때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애써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제 얼마 후에 내가 티 비의 주인공이 될 차례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또 만남을 약속한 이별이기에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손자들을 만날지 이별의 서운함보다 손자들의 성장한 모습이 더 궁금해진다. 손자들아! 다음에 할아버지와 만나면 멋진 모습을 보여다오. 너희들이 할아버지에게 저지른 만행은 이다음에 너희들이 성년이 되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꼭 들려주마.
첫댓글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장로님의 글을 감상하다보니 저도 손자2명이 아부다비에
지 아빠따라 떠난지 일년반이 지났는데 보고 싶네요.
년말이면 파견근무마치고 귀국하니 참아야죠!
손자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도 만행을 저지르는
손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