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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의 여파가 가라앉고 나와 하영은 일상적 생활로 돌아갔다.
역사 선생님이 꿈인 하영은 교직 과목을 신청해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영과 일주일에 하나 정도는 같이 수업을 들으려고 하는 나도 같은 교직 과목을 신청했다.
수업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또 전생의 나의 꿈도 다시 생각났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꿈을.
비록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 꿈을 이루는 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해송암에서 만났던 스님 지율이 찾아 왔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하영과 같이 희주와 정민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요즘 들어 하영과 부쩍 더 가까워 지긴 했지만 주변의 시선이 있어 항상 희주와 정민과 함께 하곤 했다.
회색 승복 차림의 지율이 강의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염이 하얀 노승이 학교에 있으니 지나가는 학생들이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나는 차에 지율을 태우고 내 집무실로 갔다.
정민과 희주도 연락을 받고 집무실에 합류했다.
지율은 하영이 가져온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승이 결례임을 알면서도 저하를 뵈러 온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율이 고개를 숙이며 합장을 했다.
"전에 저하께서 선원비록의 소재에 대해 궁금해 하신 것 같아, 소승이 알게된 조그만 실마리가 있어 찾아 뵙었습니다."
나도 그 분분이 항상 궁금하던 차였다.
"스님 혹시 사라진 뒷부분에 관한 이야기 인가요?"
"네 맞습니다."
"소승이 우연히 들은 소식으로 선원비록을 가져간 정철이라는 자가 있는 곳을 알게되었습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뜬 지율이 품 안에서 종이 쪽지 하나를 건넸다.
"인연이 되면 찾을 수 있겠지요. 소승은 이만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암자를 너무 오랫동안 비운 것 같습니다."
지율이 가고 종이를 펴보니 거기에는 주소 하나가 씌여 있었다.
강원도 춘천시 천홍로 20번지
정민이 주소를 검색해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병원인데요. 주소상으로는 춘천 정신병원으로 나옵니다."
다음날 우리 넷은 주소지의 병원으로 갔다.
정민이 운전을 했고 가는 내내 우리들은 선원비록에 대한 말을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가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용건을 말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황태자가 온 것을 알고 수근수근하던 간호사들 중에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환자분 성함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철 이라는 분이 계십니까?"
간호사가 모니터를 응시하다 고개를 든다.
"황태자님, 그런 분은 계시지 않네요."
내 당혹스런 표정을 본 정민이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간호사에게 물어봤다.
"혹시 성이 정씨가 아닌 다른 성씨에 이름만 정철인분이 있을까요?"
다시 조회해본 간호사가 정민에게 대답한다.
"아, 한 분 있네요. 홍정철 이라는 환자분이 계시는데요."
"혹시 이분 나이가..."
"이 환자분 90세가 넘으세요."
정민이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찾는 분이 맞는거 같은데요. 지금 만나볼 수 있을까요?"
간호사가 곤란한 듯 말했다.
"황태자님, 죄송하지만 가족 외에는 면회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간호사에게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해보았다.
"잠시라도 좋으니 한 번만 만날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간호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님 정말 죄송한데 규정상 가족 외에는 절대 면회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하영이 앞으로 나와 카운터에 비치된 면회신청서를 집어들었다.
"면회신청하겠습니다."
"네? 가족 외에는 안되는..."
하영이 간호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홍정철님...제 가족입니다."
"하영이 면회신청서의 빈칸을 펜으로 채워넣었다."
- 이름 홍하영
- 관계 손녀
***
인조왕 때 영의정 민승기 일파에 맞서 왕을 지켰던 유일한 충신은 우의정 홍영기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정신을 놓고 시름시름 앓던 인조도 곧 세상을 달리했다.
그 과도기적 시기에 민승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홍영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인조가 승하하고 더 이상 조정에 뜻이 없었던 홍영기는 민승기 일파의 모함에 적극 대응하지 않고 바로 우의정 자리를 내던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온 홍영기는 죽기 전 자식들을 불러모으고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첫 번째는 절대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이며.
두 번째는 왕실의 비밀서고를 대를 이어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밖으로 공개되면 안되는 왕실의 서책들이 궁궐 내부에 비밀리에 보관되고 있었지만 인조때 자신이 은밀한 곳에 장소를 하나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홍영기는 사람이 잘 찾지 않은 바닷가 근처에 암자를 하나 만들었다.
인조왕을 모시던 궁녀 중 불교에 귀의한 비구니를 암자의 주지로 삼아 관리하도록 하였고.
자신의 자손들이 그 곳에 비밀리에 설치한 서고를 대대로 잘 관리하도록 하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홍영기의 자손들은 그 말을 잘 키켰다,
다만 고종 때, 홍영기의 후손이었던 홍진만은 그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지방에서 학식을 높고 인품이 훌륭한 것으로 추앙받던 홍진만은 고종의 간곡한 청에 조정에 나가 왕을 모실 수 밖에 없었다.
홍진만은 자신이 관리하던 선원비록으로 중국 상해에 있던 피에르 리 가 황실의 후손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고종의 명을 받아 피에르와 함께 중국에서 군대를 키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은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승하에 의해 중단되었다.
한양 저잣거리에는 고종이 일본의 앞잡이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홍진만은 어느 순간부터 적강회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고종이 승하하자 그 감시는 더 노골적이 되었고 밤에 복면을 쓴 사람이 들어와 자신의 집을 뒤지는 일까지 일어났다.
적강회는 사라진 고종이 중국에서 무슨 일을 꾸몄는지와 그곳으로 흘러간 조선왕실의 내탕금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홍진만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집단이었다.
홍진만은 가족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아들 홍병선에게는 오늘 당장 가족을 데리고 암자 근처로 떠나 다시는 한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다.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조상의 유훈을 지키지 못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였다.
가족들이 떠나간 날 밤.
홍진만은 이제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장짓문에 장검을 든 괴한 두 명의 그림자가 보이는 순간 오늘이 마지막 날임을 깨달았다.
괴한이 장짓문을 조용히 열었을 때 방에는 짧은 칼로 자살한 홍진만의 시신만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 홍진만의 자손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고 그의 후손이자 하영의 할아버지인 홍정철 때였다.
황실 내탕금의 비밀을 포기하지 않았던 적강회는 그 실마리가 될 선원비록의 소재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끈질긴 추적 끝에 적강회는 변산반도의 해송암에 선원비록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들은 수십 년간 추적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될 까 매우 조심스런 몸짓으로 움직였다.
적강회에 소속되어 있는 일본 밀교 출신의 승려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 승려는 평범한 떠돌이 승려로 변신을 하고 해송암을 찾아갔다.
오갈데 없는 떠돌이 승려로 여긴 해송암 주지 지은은 그 승려를 암자에 머물게 해주었다.
몇 달간 잡일을 하며 해송암의 생활을 돕던 승려에게 주지 지은도 경계를 풀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혼자 암자를 운영하기가 벅찬 터에 도움을 주는 승려가 고마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암자를 찾아오던 홍정철은 그 승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 승려도 정철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계획했던 거사를 앞당기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아직 어둔운 새벽,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던 정철은 해송암에 불빛이 꺼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간이면 새벽 예불을 드리기 위해 지은이 항상 일어나 있는 시간이었다.
뭔가 일이 생긴 듯 했다.
정철은 가파른 통로를 빠르게 달려 올라갔다.
암자의 대웅전에는 지은이 쓰러져 있었다.
둔기를 맞고 쓰러져 있는 지은의 머리 한 쪽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범임은 지은이 항상 들고 다니던 비밀 서고의 열쇠를 가져가기 위하여 지은을 죽인 것 같았다.
지은은 끝까지 열쇠를 내주지 않기 위해 저항한 듯하다.
오른손에 범인의 옷으로 보이는 천쪼가리를 쥐고 있었다.
정철은 바로 비밀서고로 갔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서고 문 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예상한 대로 떠돌이 승려가 촛불을 켜고 서고에서 꺼낸 서책을 다른 종이에 정신없이 베끼고 있었다.
꺼낸 서책이 빨간 색 실로 묶여져 있는 것을 보니 선원비록이 분명했다.
정철은 조부 홍진만의 당부를 떠올렸다.
- 조선왕실의 수명이 다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홍씨 가문은 왕명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특히 선원비록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선원비록의 뒷부분에는 적강회라는 조선을 배반한 단체가 찾고 있는 비밀이 씌여있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훗날 조선황실의 정통성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분에게 이것을 전달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이다.
정철은 떠돌이 승려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들고 있던 돌로 승려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실 승려는 일본에서 꽤 오랜 기간 무공을 연마한 무술인이었다.
나이 많은 정철 정도는 쉽게 제압할 만한 실력을 가진 자였으나 선원비록을 베끼는 일에 정신이 팔려 일격을 당한 것이다.
정철은 승려에게서 선원비록을 빼앗으려 했다.
순간 정신을 차린 승려가 품 안에서 짧은 일본도를 꺼내 정철의 어깨를 찔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철은 선원비록의 가장 중요한 뒷부분을 잡아 뜯어 서고 밖으로 달아났다.
승려가 정철을 뒤따랐지만 정철은 이 지역의 지형에 능했다.
암자 뒷편 자신만이 아는 좁은 통로를 통해 절벽 위로 올라가 능선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떠돌이 승려는 적강회에 보고했다.
적강회에서는 다시 추가 임무를 주겠다고 했다.
한 달 후, 떠돌이 승려는 다시 해송암을 찾았다.
해송암에는 주지였던 지은의 시신과 핏자국이 말끔히 치워진 상태였다.
떠돌이 스님은 스스로를 해송암의 주지로 임명했다.
법명은 지율이라 했다.
***
간호사를 따라 올라간 3층 입원실 구석 방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햇볕이 비치는 창 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하얀 머리의 노인이 있었다.
우리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면회시간은 2시간 이니 꼭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그 노인은 우리가 왔음을 알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할어버지..."
노인에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민이 눈짓을 하자 하영이 다시 한 번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해보았다.
"할아버지."
그 노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의 눈에는 초점이 하나도 없었다.
하영이 노인의 손을 잡았다. 하영의 눈물방울이 노인의 손에 떨어졌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둘을 바라보았다.
하영의 손을 잡은 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민이 눈짓을 했다. 우리들은 하영을 방에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 뒤에는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있었다.
나는 정민과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희주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가져왔다.
"저 노인분 사실 본 적이 있습니다."
정민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저하가 저 노인을 본 적이 있다고요?"
"네, 3년 전쯤입니다. 워낙 인상이 강렬해 지금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던 날 공항에서 장면이 떠올랐다.
그 때도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눈빛 만큼은 호랑이처럼 이글거렸다.
그 때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 "조상님들과 달리 아무 재주도 없는 저는 왕실의 서책을 지키는 일을 숙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나마도 제 몫을 하지 못해 저하가 오시기만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 "아직 그 무리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하."
그 노인이 하영의 할아버지라니...
그때 봤던 그 노인에게 그간 무슨 일이 생겼기에
눈이 풀린 채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하영이 희주에게 들어오라는 전화를 했다.
다시 노인의 병실에 들어가니 하영이 옆에 앉아 누워있는 노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하영씨를 알아보기는 하신가요?
나의 물음에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긴 하는데 아직 말은 못 하셔요.
간호사가 와서 면회시간이 다 됐다고 했다.
환자에게 급작스런 충격은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희주가 가기 싫어하는 하영의 팔을 잡고 일어났다.
하영은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도 말이 없었다.
서울에 도착할 무렵에야 하영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머뭇거리며 꺼냈다.
하영에게 할아버지란 그리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하영의 할아버지인 홍정철은 대를 이어 서고의 비밀을 지키는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 자손만큼은 자기와 다른 삶을 살기 원했다.
선원비록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삶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철의 아들이자 하영의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었다.
정보보안사에서 일하던 하영의 아버지는 중국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다 불의의 사고로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정철은 몹시 상심했다.
마치 아들의 죽음이 자기 탓인 것처럼 자책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혈육인 하영에게까지 이 일을 남겨주긴 시켰다.
정철은 자기가 죽기 전에 선원비록의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했다.
그래서 미셸이 한국에 왔을 때 부푼 마음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셸을 기다렸던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정철은 미셸이 한국에 오기 전부터 적강회의 움직임이 빨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