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일자진을 쳐라!
김훈의 ‘칼의 노래’는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필독을 권하는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나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몇 권의 책을 붙들고 이겨 나왔다. 고등학교시절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그린 ‘대망’을 읽고 자신감을 키워왔으며 대학때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스베덴보리학파의 신학이론, 조금 지나서는 안병무교수의 민중 신학 관련 책을 읽고 나의 생에 지표로 삼았다. 그런데 이제 나이 50을 바라보는 요즈음 조금은 엉뚱하다 싶게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힘을 얻는다. 이것은 아마 그의 힘 있고 장엄한 문체와, 그 문장이 그리고 있는 한 인간의 간결하고 순수한 인생이 좋았기 때문이리라.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일단 이순신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부수는 것부터 시작한다. 종래 우리가 알고 있던 이순신은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충성을 다한 뛰어난 무장이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평범하나 비범한 인간으로 그가 처한 어렵고도 극단적인 실존적 상황을 죽음으로 마감한 한 무인이다. 김훈은 이러한 충무공의 한없는 단순성과 그가 지켜간 탈정치적인 순수함을 ‘칼의 노래’이라는 상징으로 명징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 첫째는 죽음이다.
김훈이 ‘칼의 노래’를 통해 보여주는 가장 단순하고 극명한 사실은 인간 이순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고 간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절대 권력인 왕과 강력한 적의 함대, 그리고 책무처럼 안아야하는 조선 민초들의 삶에서 가장 확실하게 도망가거나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음처럼 분명하고 모호한 것은 없다. 분명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죽는다는 절대적인 사실이며 모호하다는 것은 살기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만이 분명하고, 죽음만이 모호하기 때문에 그는 죽기 위해 산다. 그리고 살기 위해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두렵다. 그래서 장군은 솔직하고도 분명한 길을 선택한다. 그는 임금의 손에 죽는 것을 거부하고 전쟁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목숨을 다하는 것이 더 명예롭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택할 수 있는 자연사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민초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도 그는 노량의 바다로 나아간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이다. 노량에서의 모든 순간은 실로 죽기 위해 사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고요해진다. 그가 나아가는 바다는 죽음을 닮았다.
그런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는' 사내가 그인데. 무엇이 두려울까? 그가 두려워한 것은 패용하고 있는 자신의 장검이나 왜도에 의한 치욕적인 베어짐이 아니라 그 칼날을 지탱하고 있는 임금과 권력이라는 ‘자루’에 의한 베어짐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선택은 전투과정을 통해 적의 손에 전사하면서 자신을 구속한 ‘자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이 절절한 충무공의 죽음과 같은 삶 앞에 나는 오늘도 외로운 일자진을 친다.
둘째는 그의 문장이다. 그의 문장은 일단 비장하다. 그리고 유려하고 장엄하다. 장엄하다 못해 죽음을 향해 가는 이순신의 삶처럼 장렬하다. 그 장렬함은 우리글의 산문형식을 빌리나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지나친 압축과 상징도입, 그리고 미학적 간결함은 그의 글이 하드보일형식의 글인가? 하고 한두 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내뱉듯 툭툭 끊어지는 1인칭의 독백체는 이러한 느낌을 더하게 한다. 바다와 칼, 떠다니는 수급, 임금의 교지, 마른 고기반찬 등의 이미지는 여러 가지를 상징하며 작가가 말하려는 주제를 향해 힘차게 전개된다.
그래서인가? 그는 역사적 리얼리즘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기 보다는 작가의 상상력과 관념을 통해 역사적 실재를 교묘히 압도해 간다. 그가 동원한 상상력은 조선백성의 거칠고 피폐한 질곡의 삶을 ‘비참하나 아름답게’ 묘사한다. 역사적 고증이라는 당위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급적 위의 당위를 지켜갈려고 하나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그의 글은 거의 주관을 잃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서 나는 감히 ‘요설’이라고 ‘존경의 폄하’를 하고 싶다.
‘칼의 노래’에 나타난 큰 흐름은 난중일기의 형식을 빌려 썼다. 깊숙이 폐부를 찌르는 문장들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중언부언하는 글이 많다. 소설의 각 문장과 문장간의 거리는 상당히 넓은 행보를 걷는다. 그러나 인물의 심리는 절제된 듯 잘 나타나지 않고 심오하다. 전체적인 글의 나타냄은 지나치게 시적이어서 오히려 역사성과 현장감은 없다. 있다면 임금과 군부, 그리고 외침세력과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사생결단하는 현실만 있을 뿐이다.
만약 충무공이 살아서 김훈의 글을 본다면 나는 이렇게 평할 것 이라고 감히 적어본다.
'시월의 어느 맑은 날이다. 김훈이 나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방자하다. 나의 삶을 사정없이 솎아내니 태연한 그를 조용히 베어야겠다'.
작성일: 2003년 1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