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큰스님이 보여주신 세 번의 미소
(대원3구 강봉)
제가 광덕 큰스님을 처음 뵌 시기는 1975년 쯤입니다.
회사에 다니며 종로 조계사에 있는 서울불교청년회에서 불교와 처음 인연을 맺고 초발심의 마음으로 불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의 3대 명 법사로 알려진 무진장스님과 김경만법사님이 종로 대각사에서 광덕 큰 스님께서 불광법회 창립 법회에서 “금강경” 법문을 시작하시니 꼭 참석해서 공부하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금강경”은 우리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평생 공부해야 할 필수 경전이라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공부를 해볼 각오로 몇몇 청년 불자들과 함께 대각사를 찾아갔습니다. 첫 날 그다지 큰 법당은 아니지만 불자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드디어 예불을 마친 후 광덕 큰스님께서 법상에 오르셨습니다.
첫 번째 “염화시중의 미소”
“여시아문 일시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덕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 스님께서 금강경”의 제1분 법회인유분을 읽어 주시고는 법문을 멈추시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고 잠시 그대로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공양하실 때라 큰 옷 입으시고(중략)..... 공양을 마치신 뒤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고 법문을 해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평범한 일상생활의 과정 즉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바로 도이고 불법입니다. 이 대목의 설명으로 법문은 모두 끝난 것입니다. 이 대목을 온전히 이해했으면 불교를 다 아는 것이고 불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시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뵙는 광덕 큰스님은 많이 야위셨지만 너무 맑고 깨끗한 얼굴에 깊고 충만한 미소는 우리 범부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깨달은 분의 미소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잔잔한 미소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처음 뵈었던 그 당시 광덕 큰스님께서 보여주신 염화시중의 미소는 저의 뇌리에 남아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활짝 웃으시는 호방한 미소“
스님의 금강경 강의가 약 1년여 정도 진행되던 어느 날 처음으로 우리 불광법회에서 경기도 삼막사로 야외법회를 갔습니다. 그다음 주 대각사에서 정기 목요법회에서 금강경 강설을 마치고 법등 모임을 하였습니다. 젊은 불자가 대부분인 우리 법등에 큰 스님이 오셔서 이번 야외법회를 다녀와서 불광형제들이 느낀 바가 무엇인지 각자 소감을 말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야외에 나가니까 너무 좋다고 자주 가자“고 하였습니다. 제 순서가 돌아왔을 때 ”우리 불교가 먼 산속에만 있을 것이 아니고 시내에 들어와서 많은 대중들에게 불교를 가까이서 쉽게 접할 수 있게 큰 스님의 법문을 자주 들을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좋겠습니다.“라고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정확히 지적했다고 칭찬하시면서 활짝 웃으시고 함박웃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곧바로 ”불교는 산속의 절이나 소수의 스님들 만의 종교가 아니고 일반 대중, 특히 젊은 불자들이 동참해서 같이 공부하고 더 높은 곳으로 발전하고 포교를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 불광법회가 앞장서서 도심속에서 현대 불교를 꽃 피우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부산 범어사의 주지직도 마다하시고 불광법회를 창설하시고 도심 한복판에서 법석을 펴시는 것도 처음부터 대중불교, 현대불교를 일으키시겠다는 시대적 사명감과 원대하고 뚜렷한 목표를 갖고 시작하신 것입니다.
광복 후 그리고 6.25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 광덕 큰스님은 범어사에서 깊은 공부를 하시던 중에 한 소식을 깨달으시고 오도송을 남기시면서 계속 정진을 하시던 중에 조계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에 진출하시면서 한국 불교의 장래에 나갈 길을 찾으셨습니다. 먼저 정법불교의 기틀을 만드시겠다고 일제의 잔재인 대처승 척결운동으로 대처승을 정리하는 사업에 온 힘을 기울여서 현 조계종의 호법정책에 큰 힘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나라의 불교의 대중화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몇 가지 혁신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첫째 ... 문서포교의 중요성을 파악하시고 한국 최초로 월간불광이라는 정기간행물 책자를 발행하시었습니다. 월간불광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국의 불자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바쁠때는 집에서도 불교를 쉽게 접하고 공부할 수 있고 관공서나 심지어 경찰서, 교도소 등에도 보시를 해서 불교의 대중화에 첫 발을 내디디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 ... 큰 스님께서 직접 시내 중심가에 진출하셔서 많은 불자들이 산속이나 멀리 절에 가지 않고도 정법 불교 쉽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가까운 종로의 대각사에서 큰 스님께서 직접 법문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당시는 교통이 너무 불편하여 도심의 젊은 불자들은 불교를 공부하기가 어려웠는데 광덕 큰스님께서 직접 시내에 오셔서 가까이서 쉽게 법문을 듣고 공부할 기회가 생겨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셋째 ... 너무 난이한 한문 때문에 불교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관계로 단순하게 부처님께 복만을 비는 기복신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광덕 큰스님께서 이를 간파하시고 반야심경, 천수경, 예불문 등을 한글로 직접 번역하셨습니다. 또 찬불가를 지으셔서 한국에서는 최초로 불광법회에서 쉬운 한글로 법회를 진행하고 합창을 시도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금강경, 보현행원품 등 많은 중요한 경전도 한글로 번역하시고 법회에서 공식적으로 한글로 금강경 독송을 시작하시고 지금도 불광법회는 한글 금강경 독송이 기본이 되어있습니다. 전국 사찰에서 한글로 법회를 진행하는 사찰이 조금씩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지만 금강경 한글 번역본을 모본으로 독송하는 사찰은 불광법회 외에는 아직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도 대다수 사찰의 스님들이 광덕 큰스님의 이런 개혁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불교를 훼손하고 일반 신도들에게 불교를 너무 많이, 너무 깊이 가르친다고 광덕 큰스님을 비방까지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광덕 큰스님은 몇 세대를 앞서나가는 선각자이셨고 이런 최초의 시도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정법불교가 전국에 널리 퍼지는 시발점이 되었고 그 후로 다른 많은 절에서도 불광법회를 벤치마킹을 하여 현재의 새로운 대중불교의 완전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불광법회의 초대 회장이시고 광덕 큰스님의 전법 정신과 마하반야바라밀 사상을 전국에 알리는데 일생을 바치신 김경만 법사님(후에 출가하셔서 한탑스님이 되심)께서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우리 광덕 큰스님이야말로 신라 시대 대중불교를 일으키신 원효스님 이후로 한국의 순수 정법불교의 전법에 여러 가지 획기적인 시도를 하셨고, 최고의 업적을 이루신 전법의 화신 광덕 대선사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영원한 미소”
대각사의 불광법회에서 2년 정도 광덕 큰 스님께서 금강경 법문을 마치시고 계속해서 보현행원품을 강설를 하셨습니다. 그때 광덕 큰스님께서 지혜의 금강경과 행원의 보현행원품은 수레의 두 바퀴 같아서 두 바퀴가 서로 보완하고 합일하여 완전한 하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반야 지혜와 바라밀 행원이 둘이 아닌 한 몸처럼 움직임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의 불성을 찾는 육바라밀의 완성이 된다고 마하반야바라밀 사상을 강조하셨습니다.
법회를 다닌 지 4년 정도에 제가 다니던 회사가 여의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는 지하철도 없던 때라 여의도에서 법회시간에 맞추어서 종로로 나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산의 직장으로 옮기게 되고 또 15년 정도 해외로 파견되어 불광법회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안타까운 열반 소식도 해외에서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05년 한국으로 귀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저의 보살은 저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와 잠실의 불광법회에 다녔습니다. 저도 한국에 들어와서 바로 잠실의 불광사로 찾아갔습니다. 2층의 대웅전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법당 상단 왼편 보처에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오랫동안 스님을 뵙지 못하고 잊고 살았던 저를 30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편안한 미소로 저를 반겨주신 것입니다.
큰스님 영단에 삼배를 올리고 한참 동안 큰스님 영정 앞에 앉아 너무 늦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스럽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앞으로 다시 스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 후부터 불광법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예전 큰 스님이 지도해주신 대로 다시 금강경 독송과 바라밀 염송 그리고 참선을 하면서 일과정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지 못했어도 은은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광덕 큰스님이 계신 불광사와 불광법회가 저에게는 영원한 귀의처입니다. 그동안 광덕 큰스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부처님법 가르침과 무한한 사랑 그리고 큰스님의 영원한 미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적은 힘이지만 불광법회를 통해 반야 수행과 바라밀 전법 봉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2024년 7월17일 최종 자료입니다. 강봉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