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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한 옷들
사랑채 문을 삐꺽 열었다
고인 냉기가 기다리듯 썰렁히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버지는 저승꿈을 꾸고 있는지
때국 낀 이불장 밑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이불밑으로 비쭉이 나온 발꿈치는
오래된 박제처럼 메말라 있었다
한 때 젊었을 땐 안방이나 사랑채를 오가며
소죽을 끓여대던 저 뚝심이
이제는 욱신거리는 삭신으로 한 세월 파먹고 있었다
항상 머리맡에 놓인 요강은
꿀단지처럼 신문지로 덮여있고
거기서 새어나온 지린내가 사랑채에 가득 고여 있었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헐렁한 옷들,
밭고랑에 콩씨를 심거나
논두렁에서 꼴을 벨 때 입었던 옷들이
아버지의 빛나는 훈장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마 저 옷들을 입고 가겠지
한평생 일하던 그 모습이 그리워
훠이훠이 새처럼 날아 저승문을 두드리겠지
그러면 저런 옷들을 입은 사람들만 골라
저승문을 열어줄지 몰라
아버지는 가끔 고목처럼 마른 등을 뒤척이지만
그것은 잠시라도 살아있다는 몸부림뿐,
하루살이 보다 못한 저 싸늘한 모습은 영락없는 송장이다
홍시
할머니가 채반에 홍시 몇 개 올려놓았다
늙은 감나무 밑에 뒹굴던 감잎 쓸어 모으며
추석날 내려올 손자 생각하시는 할머니
물렁물렁한한 홍시를
손자의 고운 입에 넣어주고 싶은 마음에
채반 위 홍시 몇 개
늘 할머니의 손끝에서만 뒹굴고 있다
술잔에 고이는 쑥국새 소리
술잔에 술이 없다면
벚꽃 향기라도 담아 마시지 그려
벚꽃은 술보다 더 흰데
향은 지독하더군
벌들이 붕붕거리는 것도
취해서 육자배기를 부르는 것이라네
늦봄이라 술이 더 달고 맛있네
술잔에 술이 떨어지면
쑥꾹새 소리라도 담아 기울이지 그랴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쑥국새 소리 꽃잎 속에 빠져 구성지네그려
이사
내가 이사를 온 날은 산나물이 무리지어 올라올 때였다
세상의 누추한 변방을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산나물 무성한 동네
직장을 잃었어도 맘은 편해
돈이 궁한 날이면 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뜯었다
산나물은 직장에서 버티고 있던 내 마음처럼 뿌리 깊었다
그러나 뿌리째 뽑혀 시골로 내려온 날
밤 연기처럼 올라가는
개의 앙칼진 울음이 달빛에 서러웠다
나팔꽃
나팔꽃 씨 날아와
할아버지 고무신에 둥지 틀었다
흙먼지 날아와 쌓이고
풀들 새끼 친 그곳
아직도 양발 냄새 퀴퀴하지만
고무신 속 흙 양분 삼아 쭉쭉 줄기를 늘였다
목적은 오직 연분홍 웃음 피워 올리는 것
땅바닥을 기어서라도
양지쪽에 야심찬 희망 피워 올리는 것
그 옛날 고향 사립문 타고 올라
개구쟁이 깨웠던 솜씨로 나팔 불어 젖히면
할아버지 흰 고무신 돛단배 되어
혼령처럼 뒤뜰 풀 섶 떠돌아다닌다
단풍
빈 산자락이 단풍 내음으로 젖기까지
산은 얼마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날을 새웠을까
심심하면 울부짖던 멧새들이 오지 않아
가슴 찢어지는 날
죽은 산처녀 무덤 쓰고 내려올 때
산천이 만장으로 뒤덮였다
빈 산이 슬픔으로 젖어드는 길 따라
단풍 강도 밤새도록 흐느끼는데
아픈 날
가을에 아파서 우는 은행나무
제 몸의 구린내 때문에 툭하면 다발째 욕을 얻어먹는다
밟아보면 톡톡 터지는 감촉이 감질나지만
구린내로 피어나 도시의 구석구석을 들쑤실 땐
은행나무 제 생애 가장 아픈 날이 된다
그렇다고 은행나무 무지막지 팬다면
봄날 도로변을 뒤덮었던 아름다운 꽃 시절은 뭐가 되나
구린내만 탓하지 말고
은행알 속에 가부좌 틀고 있는 염주알의 진실을 안다면
은행나무처럼 저렇게 고귀한 나무들도 없으리
초승달
누군가 하늘가에서 풀무를 돌린다
서편 하늘이 숯불처럼 달아오른다
풀무로 달궈진 쇳덩이가 내려치는 망치 앞에서
불꽃으로 변해 걸리던 노을
그 속을 지나가는 낮달이
무두질당해 초승달로 되어 나온 날
지상은 풀벌레마저 흥청망청 노는 잔칫집
잠자리
그녀는 벼랑 끝 무서움을 모른다
몇 해 동안 이렇게 살았다
벼랑에 위험스레 발 걸치고
여차하면 뛰어내릴 듯한 심정으로 살았다
말썽 많은 땅에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벼랑 끝에 발 딛고 사는 세월이
얼마나 가슴 저리게 하는지를
그래도 모진 세상 헤쳐갈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꽃들이 등불처럼 켜진다는 것을
꽃과 나비
나비가 꽃에 앉아
살강살강 쥘부채를 부친다
꽃 위로 흘러내린 고운 모시옷이
꽃향기를 풍긴다
산자락에 넘치는 고요 속으로
새들의 울음소리 진다
지친 나비
가끔씩 쥘부채 멈추기도 하지만
인적 없는 외딴집은
온통 화근내로 가득하다
폐역에서
수많은 세월 속에 똬리 틀고 있다 보니
열차도 풀의 심성을 닮아간다
풀들이 쭈뼛쭈뼛 키를 늘여 열차를 감싸고 있다
붉게 녹슨 철길 죽자 사자 달려왔기에
풀들은 열차에게도 애틋하다
절망한 열차를 위해 풀은 꽃도 피워준다
노란 꽃빛 같은 희망 싣고 달려가라며
나비가 여기저기 찔러봐도 열차는 꼼짝하지 않는다
소처럼 엎드려 단잠 든 열차 옆에서
민들레꽃들이 부푼 꽃씨를 날리고 있다
황간역
배 밭 멀리 완행열차 달려간다
땡볕 햇살 팡팡 터진 배꽃 속으로 완행열차 달려간다
바람처럼 역 스쳐가는 가 싶더니
긴 한숨 내뿜으며 멈춰선다
해바라기처럼 목 꺾고 졸던 역무원
깜짝 놀라 손깃발 살살 흔들려 뛰어간다
"잘 오셨네요. 여기가 희망역인 황간역입니다,
종착역이 절망역인줄 모르니
백년쯤 푹 쉬었다 가세오"
부드러운 안내방송 따라
승객들 녹작지근한 얼굴로 쏟아져 나오고
완행열차 월유봉 노을 이불삼아
백년쯤 쉬어갈 준비를 한다
채송화
채송화가 장독대를 빙 둘러싼다
데모대를 둘러싼 전경처럼
곧 총탄 터지는 저녁이 왔다
채송화들을 보면 평화로운데
탄알 소리를 들으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꼬투리를 수루탄처럼 들고 있는 채송화 옆에
정화수 떠놓고 합장하던
어머니의 머리에 달빛이 내려앉는다
전경 입대한 아들 무탈하라고
엄마는 뜨겁게 합장을 한다
반야사에서
나뭇가지에 눈꽃이 성성하다
눈바람만 서성이는 반야사 뒤뜰
저 멀리 봄날보다 일찍 온 산수유
온몸 뜨겁게 황달을 앓는다
철없이 꽃망울 터뜨린 일이 창피해서
꽃술 위에 살짝 솜털 눈을 덮는다
꽃술 위에 눈 한 짐 얹고
봄날을 기다리는 산수유 안쓰러워
저녁연기가 반야사 뒤뜰을 어루만진다
허공을 휘젓는 눈발처럼
그렇게 반야사 뒤뜰을 헤매다 온다
홍시
속까지 물러터진 뒤에도
나뭇가지만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젖 먹던 힘까지 내 쏟았나
뺨까지 붉어진 얼굴
손자에게 따주면 좋겠는데
날아가던 까치 심술 도졌나
물렁한 뺨에
콕 찍어 놓은 부리의 흔적
어쩐담, 저 아까운 거
손자에게 따주지도 못하고
못했다
바지게에 쇠풀 한 짐 지고
지게작대기 두드리며 걷던 논두렁엔
콩꽃이 아버지의 백발처럼 흐드러졌다
아버지는 모르지만
벌써 세월이 콩 덤불처럼 기어올라
아버지의 나이를 덮친 것이다
고향집
열흘의 폭우에
집이 폭삭 주저앉을 기세다
물 먹은 서까래 내려앉고
제비집은 텅 비어 있는데
마당의 풀대마저 말라붙어
집은 더 음산하다
풀벌레들 앞 다퉈 도망간 줄 알았더니
그늘진 뒤란에서 찌그럭대는 소리
누군가에게 타전을 하듯
밤새도록 울려 퍼진다
풀벌레들 소리에
별들은 왜 저리 깜박이며
내 마음 녹게 하는지
빗물 흠뻑 뒤집어 쓴 집이
슬퍼 눈물 흘리는 표정이다
홍시
내년 가을의 희망을 위해
감나무가 꼭대기에
등불 몇 개 걸어둔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길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꽃과 열매 사이에는 계절의 경계가 있어
꽃이 피면 열매도 물이 들고
열매가 익으면 꽃이 사라져
죽어도 만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을 초입에 도착해서야
감나무에 홍시 하나
허전하게 매달린 것을 보았다
자전거
한때 들길을 누볐다는 추억만으로
그 이름은 내 마음속에서 밝게 빛났다
지금은 외딴집 뒤란에서
죽은 듯 엎어져 있지만
다시 뼈대 곧추 세워 일어날 기세다
그러나 대충 진맥을 짚어 봐도
그의 생애는 이것뿐
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타이어가 터져
공기주머니 내장처럼 흘러나와도
다시 길을 붙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더 이상 욕심은 금물
그는 지금 열혈청춘이 아니다
핸들 삐꺽대고 안장 닳아
등골 폭삭 내려앉은 늙은이의 몰골이다
한때 그녀를 태우고 달렸던 추억만이라도 간직하자
닳아 없어진 타이어에
그녀와의 밀월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6월
봉숭아 무리 딱총처럼 씨방 터지는 소리에도
타이어는 제가 물고 온 길을 달려가듯
헛바퀴를 돌리고 있
금수저
숟가락의 노동은 쉼이 없다
삼시세끼를 위한 노동은
숟가락이 짊어진 운명이다
숟가락의 생애는 움직일 때 빛나지만
숟가락 혼자서는 빛을 낼 수가 없다
젓가락이 숟가락을 받쳐줘야
비로소 제맛을 난다
겉만 반짝인다고 금수저가 아니다
겉은 휘황해도
속까지 빛을 잃으면
금수저가 될 수가 없다
6월
두 손을 벌려 너를 가만히 받아본다
옷자락 속으로 스며드는 실비처럼 가볍고
빈 하늘 날아다니는 꽃가루처럼 보드랍고
오후에 잠깬 흰나비의 날개처럼 조요롭고
길바닥에 깔린 봉숭아의 씨알처럼 간지러운
담배
찰떡궁합이라도
담배 연기처럼 헤어지는 날이 올까
담배를 사랑한 죄가 이토록 치명적인가
마누라가 담배를 끊으라고 소리를 질러도
끊지 못한 세월이 여러 해
내 육신 망가지고 목소리 탁해져도
담배만 뻑뻑 빨아대면
답답한 가슴이 담배 연기처럼 풀어졌다
마누라를 위해
담배의 허리통을 분지르고 싶어도
담배는 나도 몰래 손가락에 끼어 있었다
성냥
그들은 모두 장기수다
방화를 꿈꾸다 감방에 갇혔다
모두들 질서 있게 누워 있지만
머릿속은 늘 뜨거움으로 들끓었다
어쩌다 운 좋게 감방을 탈출하면
죄 없이 갇힌 세월이 서러워서
욱 하고 머리통을 치고받는다
붉은 머리통에서 불꽃이 튈 때
그들의 분노는 활활 집채만큼 불타올랐다
고물 라디오
콩 다발을 털 때 도리깨질이 힘들면
라디오 옆에 등 바싹 구부려 유행가를 들었다
딱총처럼 터지는 콩꼬투리에 놀라
고추잠자리 휘황하게 불꽃쇼를 벌였다
앙칼진 말매미 소리에 귀가 먹먹할 때
구성진 유행가 자락이 내 가슴을 적셨다
티비가 안방을 차지하자
라디오는 뒷방의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구성진 유행가에 신물 나서가 아니다
휘황한 영상이 소리를 이긴 것이다
눈이 귀를 이긴 것이다
라디오가 오랜 세월 깔고 앉았던 자리엔
사각의 흰 엉덩이 자국이 찍혀 있었다
장마 1
갑자기 집 앞에 구명보트가 떠 다녔다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짙은 먹구름이 덮여 있었다
대나무가 부러지듯
지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빗줄기 끝에도
먹구름이 걸쳐 있었다
빗줄기는 벼 포기처럼 땅에 내리 꽂히고
내리 꽂힌 벼 포기는 뿌리째 뽑혀 유랑하는 들판
물놀이하는 보트는
우리네 삶처럼 한 군데 정착하질 못한다
세찬 빗줄기는 언제쯤 그치려나
제사라도 지내면 성난 마음이 풀어질까
대나무 같은 빗줄기에 맞아
통째로 뿌리 뽑힌 삶은
어디서 보상을 받느냐며
지붕에 올라간 소들이
폭우처럼 고함을 지른다
장마 2
온 세상을 장마로 가둔 후에도
하늘은 궁시렁거린다
땅에게 욕설을 퍼붓듯 몰아치는 장대비
평온하던 대밭을 들쑤셔 놓다가
댓잎에 흥건히 고인 비가
눈물처럼 떨어질 때
이제 그만 그쳐도 될 일을
하늘은 어쩌자고 자꾸만 욕설을 퍼붓는가
폭우에 맞아 휘늘어진 댓잎처럼
새들의 목소리도 비에 젖어 후줄근한데
하늘은 어쩌자고 하염없이 궁시렁거리는가
사람들은 이런 물난리
처음이라고 막힌 가슴 치지만
하늘이 성난 얼굴 싹 거두고
언제쯤 댓잎 같은 하늘을 보여 줄까
장마 3
마당의 빗물이 하수구로 빠져 나간다
막혔던 목구멍이 뚫리듯 내 가슴도 뻥 뚫렸다
사나흘 징그럽게 내리는 비는
머리칼을 풀어 지상의 찌든 것들을 하수구로 쓸어버린다
낙화가 무슨 대수랴
더러운 지상을 황홀하게 적셨던 꽃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수구로 빠져나가면 끝인데
눅눅한 세상 위해 꽃불 밝혔던 사나흘
그 사이에 몰아쳤던 빗줄기
강풍에 허리 꺾인 대나무들이 측은하게 눈물을 흘릴 때도
하늘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막무가내 막힌 가슴을 때리는가
피리소리 같은 댓잎 소리가 청승맞지 않는가
장마 4
강풍이 창문을 뒤흔들고 간다
먹구름이 몰려올 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듯
고요가 잠시 머물렀다 간다
고요가 깔린 자리에
이윽고 빗방울 돋는 소리
호박잎 건너뛰는 소리
태풍전야처럼
고요도 뒤끝이 있는지
마당은 전쟁처럼 살벌하다
오랑캐가 쳐들어온 듯
순한 백성이 도망가듯
창과 칼이 부딪혀 불꽃 튀는 소리가
물보라에 뒤섞여 혼란하다
종일 피터지고 울부짖던 소리가
흥건한 핏물로 변해
울컥울컥 하수구로 빠져나간다
검은 노래 1
하수구를 더럽다 말하지 말아라
인간의 썩은 삶들을 한 몸에 받아
칠흑의 지옥으로 보내는 그대는
답답한 지상의 구세주다
인간이 버린 탐욕
위정자의 숙변을
군 말 없이 품에 안고
캄캄한 지하에서 우렁찬
노래를 부르며 간다
더러운 지상을
새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간다
냄새나는 지상의 썪은 삶들을 긁어모아
거품을 잔뜩 문채
유유히 노래를 부르며 간다
검은 노래 2
하수구는 칠흑이지만
물결은 혁명가의 노래를 부른다
어디로 흘러갈지 그 끝 아무도 모르지만
지상을 위해서는 순결하게 몸 바친다
누구도 거부하는 더러운 삶들을
가슴에 품고 지하 끝 막장으로 간다
거기 막장에 가서 푹 썩을지라도
연꽃 같은 세상 꿈꾸며
콸콸하게 노래를 부른다
벌촛날 1
추석을 앞두고 후손들 벌초하러 내려왔다
벌초가 목적이라도 얼굴 더 그리워
벌초 날이면 약속한 듯 고향에 내려오지만
이제는 도시 사람이 되어 낫질도 서툴다
무덤은 거의 예초기 차지지만
실수로 예초기가 빼 놓고 간 풀들은 낫 차례다
낫은 처삼촌 벌초하듯 설렁설렁 풀들을 쳐내지만
예초기는 거침없이 봉분을 밀고 간다
누구는 눈치껏 놀고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툴툴 거리지 않고 일심동체가 되는 벌초 날
예초기의 엔진 소리에도
얽힌 삶 풀 쳐내듯 살아요. 형님
답답한 가슴 길 내듯 살아라 아우,
숫돌에 낫을 갈며 물 먹이듯 물을 들이켜고
예초기에 휘발유 넣듯 탁주 벌컥대면서
매년 벌초 날 우리 꼭 만나요
조상들 외롭지 않게
이날만은 꼭 만나요, 우리
벌촛날 2
생전엔 찾지 않는 엄마에게
추석 앞서 예초기 들고 털레털레 간다
엄마 마음고생이 심했구먼요
세파에 짓눌린 듯 수북한 머리칼
큰 맘 먹고 깎아드려요
엄마의 마음 속 응어리를 쳐내요
제가 어디 살아생전
엄마 머리 깎아 드린 적 있었나요
떡 진 머리로 동네방네 돌아다녀도
남처럼 외면했던 불효자
죽고 나서 이러는 거 소용없겠지만요
엄마, 제 말 들어 보세요
살아서 머리 못 깎아드렸던 이놈
한이라도 풀리게
머리를 대세요, 엄마
힘껏 기계 밀고 나가요, 엄마
낡은 기타
낡고 오래되었어도 그를 버릴 수는 없다
무수한 날에 겨드랑에 끼어 뱉어 내던
들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한때는 목줄이 헐렁해 조이고 늘린 세월이 많았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쩔 수 없이 껴안고 산다
아내와의 불화마저 가슴에 녹이며
그를 껴안고 산 지 수년 째
간혹 아픈 목에서 흘러나오는 탁한 소리가 싫었지만
찰떡궁합처럼 동행한 세월이 아까워
다시 한 번 목줄을 쓰다듬는다
이제는 고칠 수 없는 불구지만
그렇다고 버린다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할까
맘에 들지 않아도 껴안고 살면
불화로 달아났던 아내의 정도 되살아나고
들짐승 같은 울음소리에 마음이 저밀지도 모른다
호수의 노동
산골짜기에 박힌 호수를 아는 사람은 없다
호수가 밖을 향해 길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태양의 발을 담그고
물안개 꾸역꾸역 피어 올리지만
누구도 아는 이는 없다
나는 호수가 빚어내는 노동을 보기 위해 재를 넘는다
가는 길에 칡넝쿨에 걸리고
검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에 움찔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평생 한 번 있는 일
맨 처음 호수를 보는 것이 얼마나 과분한 일인가
그러나 산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굽어본 순간 전율을 했다
호숫가에 먼저 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동안 호수가 그에게도 마음의 길을 냈던 모양이다
혼자 턱을 괴고 앉아 안개의 노동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아우라를 뿜어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