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의 노래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05-12-25 15:56:54
달맞이꽃의 노래
어둠이 깔린 산골에 달맞이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달맞이꽃들은 몽우리를 오므린 채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달이 떠오르면 꽃잎을 활짝 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산골은 삽시간에 금빛 축제로 술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골을 달골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름처럼 산골에서 떠오르는 달은 눈이 시리도록 맑아 달맞이꽃들이 온통 금빛 물결 속에 잠겨 있는 듯합니다. 그 광경은 흡사 수많은 달맞이꽃들이 달을 향해 은은한 기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와, 저게 뭐지”
엄마 달맞이꽃 옆에 붙어 있던 아기 달맞이꽃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습니다. 한 번도 달이 떠오른 걸 구경 못한 아기 달맞이꽃은 처음 태어나면서 만난 세상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엄마 달맞이꽃에게 늘 물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 달맞이꽃은 잘 대답해 주었습니다. 엄마 달맞이꽃은 아기 달맞이꽃을 쳐다보며 속삭이듯이 말했습니다.
“저게 바로 반달이란다. 너는 오늘 처음 반달을 보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저렇게 크지 않았어. 처음엔 손톱 모양이었지. 그러다가 반달이 되고 보름달로 변하지. 그 과정을 지켜보며 달맞이꽃들은 허전한 가슴 속에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게 된단다. 그리움이 쌓이면 온몸에 금빛 물이 들게 되거든”
그럴 즈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반달도 점차 모양이 바뀌면서 더 크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달맞이꽃들은 온몸에 금빛 물이 든 채 눈부신 빛을 계속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기 달맞이꽃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달맞이꽃들이 노란 물이 들어 축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아기 달맞이꽃은 달빛이 가득한 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창백한 꽃빛이 주변에 우울한 그늘만 내려주었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제 몸을 찬찬히 훑어보며 궁금한 듯 말했습니다.
“엄마, 그런데 왜 내 몸은 노란 물이 들지 않지”
“그건 네 마음에 문제가 있는 거란다. 너는 아직 어려 세상을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활짝 열어 달을 맞이할 때만 변화가 올 수 있지. 손톱 달이 반달이 되고 보름달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그동안 네 마음은 의심으로 꽉 차 있었거든. 보름달을 상상하며 마음으로 노란 빛깔을 빨아 들여라. 그러면 네 몸도 보름달처럼 노란 물이 든단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때 쓸쓸한 바람이 먼 산을 휘돌아 불어왔습니다.
달맞이꽃들은 모처럼 불어온 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기분 좋게 흔들거렸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무성한 달맞이꽃들에 섞여 보름달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구름이 나룻배처럼 달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말대로 눈을 꼭 감고 보름달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보름달이 아기 달맞이꽃의 가슴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허전하던 마음속이 뭉클했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며칠 동안 노란 달빛을 쭉 빨아들였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의 가슴 속에는 누런 물이 출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달은 보름달로 변했습니다. 희미한 달골이 보름달빛을 받아 환했습니다.
“어, 내 몸이 어느새 물이 들었네”
아기 달맞이꽃은 자신도 모르게 노란 물이 든 제 몸을 훑어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엄마 달맞이꽃은 아기 달맞이꽃을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맞지, 엄마 말이. 내 새끼 기특하구나”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칭찬에 날아갈 듯했습니다. 엄마의 칭찬이 이렇게 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달맞이꽃들 속에 섞여 꿈같은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풍만하던 달이 또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름달이 작아질 때마다 아기 달맞이꽃도 제 마음 한 쪽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 옆에 붙어 매일 작아지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찬 이슬방울이 아기 달맞이꽃에게서 반짝거렸습니다.
“엄마, 내 마음이 왜 이리 아프지”
엄마 달맞이꽃은 아기 달맞이꽃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아기 달맞이꽃을 위로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들이라면 누구든 겪게 되는 아픔이란다. 달이 기울면 시들고 노란 빛깔도 결국에는 희미해지니 마음이 아프지 않겠니”
“그러면 우리 목숨도 이걸로 끝나게 되나요”
“그렇단다. 그렇지만 아픔 뒤에는 또 희망이 돌아오는 법이란다. 달이 다시 떠오르면 우리들도 가슴을 열고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게 되지. 그러면 우리들도 노란 물이 들고 이 달골에는 시끄럽게 축제가 벌어지겠지. 이렇게 시들고 노란 물이 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니 그렇게 슬퍼할 일도 아니란다.”
아기 달맞이꽃은 엄마의 말에 위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철없는 달맞이꽃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바뀌는 달의 과정을 지켜보며 아기 달맞이꽃은 온몸에 노란 물이 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에 달이 다시 떠오르면 제 엄마가 그랬듯이 아기 달맞이꽃도 제 자식에게 노란 물이 드는 법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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